432화
백설하와 소녀연맹이 그렇게나 패배감을 느꼈던 이유는, 목표 자체가 케이어스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목표를 바꾸면 된다.
“박 이사님이 미쳤습니다!”
“한 이사님 이제 진지한 얘기 시작할 거예요.”
“예.”
다들 ‘케이어스 따위’라는 성필의 태도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놀란 만큼 뒤이을 그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먼저, 저희의 목표부터 확실하게 정하고 가요.”
“목표?”
손혜빈이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목표라니. 명확한 목표란 게 있어?”
기획사가 공장도 아니고, 생산량 몇 % 증가같이 구체적인 목표를 내걸 순 없는 노릇이다.
성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확하게 수치화된 목표는 있을 수 없지. 근데, 우리가 케이어스란 이름만 듣고 너무 겁먹고 있는 거 같아.”
“겁먹지 말자고?”
“아니, 케이어스를 보지 말자는 거지. 내가 애들한테 누누이 말했지만, 케이어스를 이기는 게 최고로 가는 길은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만…….”
다들 성필이 말한 ‘목표를 확실히 하자’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성필은 그 의문을 해결해주려 했다.
“설하야. 네가 프로젝트 들어가기 전에 말했었지? 대중적인 곡, 국민적인 인지도를 가진 곡을 만들고 싶다고.”
“네, 네에.”
“아이돌이 성공의 지표로 삼을 수 있는 건 대표적으로 두 개야.”
앨범 초동판매량.
음원 차트.
“앨범 판매량은 케이팝 팬들을 대상으로 만든 거지. 케이팝 씬을 바닥까지 삭삭 핥아먹으시는 분들.”
“박 이사님처럼 말입니까?”
“맞아요 한 이사님, 저처럼요. 음악을 월 몇천 원만 내면 무한으로 즐길 수 있는데 왜 앨범을 사겠어요. 앨범은 소장 욕구가 있는 팬들이 사는 거죠. 어쨌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보통 걸그룹이 초동판매량이 높기 위해선, 대중성과 예술성이란 두 기준 가운데 예술성 쪽으로 더 가야 해요.”
보이그룹에서도 같은 현상이 벌어진다.
예술성에 중점을 둔 컨셉은 판매량이 높게 잡힌다.
물론 사람마다 선호하는 컨셉이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딥한 이미지가 케이팝 팬들에게 잘 먹혀든다.
그냥 잘생긴 오빠들이 사랑을 노래한다고 좋아하던 시대는 가버린 지 오래다.
극단적인 예시지만, 요즘은 인간 세계에 잠입한 뱀파이어가 가상 현실 속으로 들어가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지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
“하지만 여름 노래는!”
성필이 책상을 쿵 내려쳤다.
곁에 앉아 있던 백설하가 깜짝 놀랐다.
“사랑 노래는! 기본적으로 딥한 컨셉 따위 잡을 수 없어요! 하려면 할 수야 있겠지만, 사랑스러운 소녀들이 시원하고 청량하게 노래하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대중들에게 어필하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요!”
“소녀(25세)요……?”
“대중들을 위한 사랑이에요! 대중들을 위한 여름 컨셉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노리는 건……!”
음원 차트여야만 한다.
“앨범 그까짓 거 천 장만 팔아도 상관없습니다!”
“아니, 상관있는데. 천 장 팔리면 소녀연맹 망한 거잖아.”
“없어요!”
“있…….”
“없어요!”
홍규헌이 살짝 토라져선 입을 꾹 다물었다.
성필은 백설하에게로 홱 고개를 돌리며 그녀에게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설하야, 앨범 판매량 따윈 손톱만큼도 상관없어!”
“네, 네에…….”
“빨리 말해!”
“네?”
“상관없다고!”
“어, 없어요…….”
“맞아!”
성필의 얼굴이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긴장으로 굳어 있던 백설하의 얼굴도 풀어졌다.
“오직 차트! 오직 음원 차트! 음원 차트 상위권만 노리면 돼요! 여름을 지배한다는 건 판매량이 높단 게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부르고 많이 안다는 거니까요!”
“형, 차트를…… 우리가 뭐 예측할 수 있어요? 차트 순위는 미루거나 말거나 딱히 상관없지 않아요?”
“없긴 왜 없어!”
성필은 너무 열정적이어서, 아까부터 얼굴 전체가 땀을 로션처럼 펴 바른 듯 번들거렸다.
실제로 그는 아까 먹은 점심 식사의 칼로리를 맹렬하게 소모하고 있었다. 모든 칼로리를 열정으로 뒤바꾸었다.
“노래는? 들으면 질려! 그러면? 경쟁 상대가 추후에 등장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무조건 케이어스나 글로브보다 나중에 컴백하는 게 이득이잖아!”
“그럼 형은 미루자는 쪽인 거죠? 결국 케이어스한테서 도망가자는 거…….”
“아니!”
성필이 곧바로 반박했다.
“솔직히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뭐 어쩌잔 거예요?!”
“어차피 우리가 차트 상위로 오를 건 부동의 사실이야. 느리냐 빠르냐의 차이이지.”
성필은 자신이 보았던 미래를 떠올렸다.
첫 번째 미래에서, 성필은 어째서 ‘애플 크러쉬’가 성공했다고 말했을까?
이전 앨범과 비슷한 판매량을 유지한 것을, 미래의 성필은 잘 방어했다고 했었다. 그런데 그 이후엔 ‘애플 크러쉬’가 성공했다고 말했다.
미래의 성필일지라도, 결국엔 현재의 성필과 이어진다.
성필은 자신의 언어 구사법을 아주 잘 안다. 자기 자신이니 당연했다.
미래의 성필은 ‘인트로: 러브’ 앨범과 ‘애플 크러쉬’를 다른 선상에서 비교한 것이다.
‘즉, 애플 크러쉬가 성공했다는 건…….’
음원 차트 상위권에 이름을 박아 넣었다는 뜻이다. 케이어스와 같은 시기의 컴백했음에도 말이다.
‘중요한 건 두 번째로 본 미래였지.’
거기선 미래의 성필이 확실히 언급한다.
소녀연맹의 곡이 케이어스보다 음원 차트 순위가 높다고 말이다.
“그러니까, 케이어스에게서 도망간다기보다는 선호도의 차이지. 설하가 원한다면 케이어스와 동시기에 얼마든지 컴백해도 된다!”
중요한 건, 이 회의실에 자리한 이들의 인식을 바꾸는 것이다.
케이어스와의 전면전으로 인식하는 게 아니라, 음원 차트에서 상위권을 얻기 위한 싸움으로 인식하게 해야 한다.
그러면 케이어스의 앨범 판매량이 신화적이든 뭐든, 소녀연맹은 원래 목적대로 성공한 게 될 수 있다.
‘결국 미래의 내가 후회했던 건, 애들이 자신감을 잃었기 때문이잖아.’
자신감을 잃은 이유는, 케이어스의 모든 업적을 라이벌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케이어스의 앨범 판매량 따위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도 이왕이면 컴백을 미루는 게 좋겠지.
“저…….”
그때 한구인이 슬쩍 손을 들었다.
“새삼스럽습니다만, 박 이사님은 음원 차트에서라면 무조건 소녀연맹이 이기리라고 생각하시는 듯한데…….”
정말 새삼스러운 질문이었다.
성필은 어느 순간이든 소녀연맹이 승리를 이루리라고 말해왔으니까.
그러나 이번은 옛날과 그 궤가 달랐다.
성필의 두 눈엔 미래를 미리 보고 온 듯한 완고한 확신마저 박혀 있었으니까. 다른 이들이 보기에,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유가…….”
“여름은 아이돌의 계절이에요. 밝고 활기차며 건강한 에너지를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아이돌이니까요. 아이돌 중에서도 걸그룹의 계절이죠.”
“예, 뭐…….”
“하지만 옛날엔 좀 달랐어요. 2세대 때는 보이그룹도 여름에 꽤 먹어줬었죠. 하지만 이젠 그런 경우가 점점 드물어졌어요. 오죽하면 보이그룹은 컴백해서 음원 차트 50위권 안에만 들어도 성공이라고 하겠어요?”
성필의 설명은 여느 때처럼 장황했다. 하지만 다들 장황한 이야기의 끝에는 핵심이, 사안을 꿰뚫는 혜안이 있으리란 사실을 알았다.
“보이그룹이 수익성을 극대화하는 법은 바로 팬덤을 늘리는 겁니다. 케이팝 팬덤이 바라는 건 사실 대중성과는 괴리가 있죠. 어쨌거나, 걸그룹은 애초부터 보이그룹과 팬덤 싸움으론 상대가 안 되기에 대중성을 추구해왔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판이 바뀌었다.
현대의 걸그룹들은 선배들이 만들어낸 낙수 효과를 잘 받아먹고 있다.
이제는 걸그룹도 과거의 보이그룹 못지않은 팬덤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 효과를, 케이어스는 극한으로 쓰고자 하는 거예요. 다들 못 느끼셨어요?”
케이어스는 컴백은 모두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점점 어느 추세가 보이고 있다.
데뷔곡인 ‘카오스’보다 컴백곡인 ‘가이아’가 음원 차트 체류 기간이 짧았다.
그리고 최근 컴백곡인 ‘타임’은 ‘가이아’보다 체류 기간이 더 짧았다.
앨범 판매량은 점점 더 상승하지만, 오히려 음원 차트에서 힘을 쓰는 기간이 줄어드는 현상이 관찰된다.
“케이어스는 대중성에서 예술성으로 점점 키를 돌려가고 있는 겁니다. 보이그룹처럼, 주요 타겟을 팬덤으로 잡고 있어요.”
그리 말하며, 성필은 입술을 깨물었다.
케이어스는 전생과 달라졌다.
전생의 케이어스는 대중성과 예술성의 중간 지점을 절묘하게 찾아냈었지만, 이제는 그 추가 예술성으로 기울고 있었으니까.
수익 측면에선 현재의 판단이 옳겠지만, 확장성을 일정 부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케이어스는 과거보다 성장이 빠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과거보다 성공할 순 없으리라.
만약 이 기조가 이어진다면, 반드시 그러하다.
“그럼 박 이사님은, 케이어스가 이번에도 그 전략을 이어가리라고 예상하시는 겁니까?”
“예. 하지만 저희는 아니잖아요. 애초에 저흰 소녀연맹이 극적인 반향을 얻었었던 이유인 세계관도 어느 정도 포기했어요. 멤버들을 드러내는 데 집중하느라고요. 그리고 설하는 대중성을 목적으로 곡을 만들었고요.”
그렇다면.
“저희가 임할 전장은 앨범 판매량이 아닙니다. 차트를 노려서, 국내 행사를 휩쓸고, 인지도를 마구잡이로 확장해서,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인기를 얻어낼 겁니다.”
“아, 그래서 앨범 판매량은 상관없다고 하신 거군요.”
“예!”
성필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그는 스스로가 대견했다.
‘내가 방금 한 말들을 전부 즉석으로 생각해낸 건가?’
자신에게 임기응변의 재능이 이렇게나 크게 있는 줄 몰랐다.
동시에, 괴롭기 그지없었다.
갑자기 무대로 올라가서 준비되지 않은 스탠딩 코미디를 하는 기분이었다.
목적은 회의실에 앉은 이들의 인식을 바꾸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백설하의 인식을 말이다.
‘아마, 미래에서 봤던 풍경은 가로 엔터가 케이어스 컴백 소식에 허둥지둥한 결과겠지. 허둥지둥, 케이어스와의 승부만을 신경 쓴 거야.’
케이어스란 이름만 최종 목표로 걸어놓았으니, 앨범 판매량을 보고 좌절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설하야, 다시 말할게. 앨범 판매량 따윈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말했잖아. 국민 모두가 알 만한 노래. 그건 판매량과 상관없는 분야야.”
아무튼…….
성필은 숨이 살짝 거칠어져선, 모두에게 말했다.
“저희의 목적은 음원 차트. 그리고 음원 차트에 소녀연맹의 이름을 박아 넣기 위해선, 컴백을 미루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성필은 대화의 주제를 바꾸었다.
케이어스와 붙느냐 안 붙느냐.
승리냐 패배냐.
이 프레임을 ‘음원 차트에서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는 방법’에 관한 논의까지 옮겨왔다.
“컴백을 미루는 편이 좋다…….”
물론!
“설하야, 케이어스한테서 도망간단 느낌이 들어서 찝찝하다면 안 미뤄도 돼! 어차피 우리는 우리의 전장에서, 우리의 방식으로 이기니까.”
해롤드 라스웰은 정치란 누가,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언제 얻을지 결정하는 행위라고 했다.
조금 달랐던가?
어쨌거나, 성필은 정치했다.
미래를 보지 않았을 때와 모든 게 같지만, ‘어디서’만은 바뀌었다.
미래를 보지 않았을 때는 ‘케이어스에게서’의 승리가 목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 자리에서 모두가 설득된다면 ‘음원 차트에서’의 승리로 인식이 뒤바뀐다.
“승리가 빠르냐 느리냐의 차이일 뿐이야. 그리고 하등 상관없는 앨범 판매량이 조금 줄어드느냐 늘어나느냐의 차이이고. 설하야, 네 마음이 가는 대로 해도 돼. 오랜만에 케이어스분들이랑 만나고 싶으면 그냥 화끈하게 안 바꿔도 되고. 이왕이면 확실하게 섬머퀸이 되고 싶으면 미뤄도 되는…….”
“그럼 안 미룰게요!”
백설하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 이상하게 들리실 수도 있겠지만, 저희들의 가능성을 시험해보고 싶어요!”
성필의 입꼬리가 살짝 일그러졌다.
‘아, 아직 얘기 덜 끝났는데……?’
컴백을 3주 더 미뤄야 하는 이유.
아직 그 쐐기를 박지 않았다.
성필은 ‘우파루파’를 회의의 중심으로 가져올 생각이었다. 홍규헌이 더블 타이틀을 제안했었지만, 일정이 빡빡하여 중도 포기한 그 계획을.
컴백이 3주나 미뤄졌으면 어떤 형태로든 잊혀진 ‘우파루파’를 불러오는 게 가능해진다.
‘음원 차트를 노리자는 내 목적과도 맞아떨어지고, 설득력도 더 높일 수 있는 제안이었는데. 이것까지 말했어야 했는데…….’
백설하가 ‘안 미루겠다’고 대뜸 선언해버렸다.
비틀렸던 성필의 입꼬리가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가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이야 설하 아주 화끈하다! 그래야 소녀연맹 리더답지!”
“헤헤.”
성필은 웃었다.
그리고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내가 미루자고 말 바꾸면 미래의 풍경처럼 될 거야.’
성필은 의연해야만 한다.
그때 민경섭이 감동받은 투로 말했다.
“설하 네가 그렇다면…….”
민경섭은 백설하의 용기에 경의를 표했다. 그가 찔끔 흘린 눈물을 검지로 닦았다.
“응원할게. 나도 인민이니까…….”
성필은 만약 시간을 멈출 수 있다면, 지금 당장 시간을 멈춘 후 민경섭을 벽으로 내던졌을 것이었다.
성필은 한구인을 보았다.
그가 봤던 미래에서, 한구인은 최종적으로는 미루는 것에 반대했던 듯했었다. 이번엔 바뀌었을까?
“투쟁, 해방, 소녀, 연맹, 승리……. 그렇습니다. 저희들은 언제나 불리한 위치에서 승리를 추구해왔습니다. 도전과 노력, 그게 여러분들의 시그니쳐겠죠. 설하 씨, 저보다 훨씬 어린 나이시지만 존경할 수밖에 없군요. 저처럼 때를 탄 어른에게선 나올 수 없는 빛나는 용기가, 설하 씨에겐 있으십니다.”
한구인은 미래와 같은 선택을 했다.
성필은 속으로 절규했다.
제발 가로 엔터의 이익을 생각해줘……!
“어린애가 막 나 감동하게 만드네…….”
손혜빈은 스포츠 만화라도 본 것처럼 감동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이었다.
아까까지는 반드시 미뤄야 한다면서 민경섭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으면서……!
“뭐어, 그러면…….”
홍규헌이 정리하듯 말했다.
“안 미루는 걸로 갈피가 잡힌 건가?”
다들 박수로 화답했다.
백설하가 쑥스럽단 듯 자신의 머리칼을 배배 꼬았다. 그녀가 잘했냐는 뜻으로 성필을 바라보았다.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 같아서, 성필은 미소를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장하다 설하야.”
“하지만.”
홍규헌이 말했다.
“내일 한 번 더 토론해보자. 일분일초가 급한 사안이란 건 알지만, 다들 본인 의견을 묵히는 기간을 가져. 그럼, 회의 끝.”
* * *
성필은 1층 휴게 공간의 소파에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포즈를 취한 채 앉아 있었다.
‘나는 소녀연맹의 메인 프로듀서.’
그 메인 프로듀서가 ‘앨범 판매량은 하등 상관 없으’며, ‘우리가 승리할 곳은 음원 차트’라고 선언했다.
‘이걸로 애들의 부담이 줄어들까?’
적어도 성필이 봤던 미래처럼 백설하가 좌절에 빠지는 일은 없을까?
모르겠다.
인간의 감정 같은 내밀한 것을 어떻게 몇십 분만에 바꿀 수 있겠는가. 성필이 후회했던 건 사건 때문이 아닌 감정 때문이었으니, 제대로 미래를 바꿨는지조차 점칠 수 없었다.
‘하지만 미루는 쪽이 결과는 더 좋을 거 같아. 내가 봤던 미래는 그런 분위기였잖아.’
게다가, 케이어스와 함께 컴백하면 소녀연맹은 케이어스의 신화적인 앨범 판매량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음원 차트가 주요 전장이라고 주지시켰더라도, 멤버들이 충격받지 않을 도리는 없을 거 같은데…….
‘다른 방향으로 말했어야 했나? 내가 괜히 이상한 연설해서 설하한테 감명을 준 건가? 우파루파는 어떡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회의를 더 지켜보는 거였는데…….
“박 이사님.”
성필이 우중충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백설하였다.
성필은 금세 미소를 만들어냈다.
“어, 설하야. 어쩐 일…….”
“회의에서 거짓말하신 거죠?”
“어?”
“상관없다고 하신 거요. 실은 미루셨으면 좋은 거잖아요.”
“아, 아니…….”
성필이 당황해서 손을 내젓자, 백설하는 고개를 저었다.
마치 잘못에 대해 변명하는 자식을 대하는 듯했다. 그녀는 부드러운 분위기로 성필을 안심시켰다.
“박 이사님.”
“……응.”
“이사님은 저희 감정을 굉장히 잘 맞추시죠? 밖으로 티를 안 내도요. 저도 여러 번 놀랐어요. 그런데, 이사님만 저를 알아보는 건 아니에요.”
백설하가 앉은 성필을 향해 기울였던 상체를 들었다. 성필의 눈은 죄지은 사람처럼 아래로 향했다.
백설하의 복숭앗빛 무릎이 보였다.
왠지 모르게, 백설하가 지금 미소 짓고 있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저 무릎처럼 분홍빛의 홍조를 띠곤, 여느 때처럼 자애로운 표정을 짓고 있겠지.
“다는 아니라도, 저도 이사님이 거짓말하는 건 대충 알 수 있어요.”
“…….”
백설하가 성필의 곁에 앉았다.
“이유…… 알려주실래요?”
성필은 메인 프로듀서로서 언제나 확신에 가득 차 있어야 한다. 백설하에게 약한 모습은 보여주지 않으리라, 그리 다짐했었다.
하지만 성필은 소파 위에 가볍게 올려둔 자신의 손 위에 백설하의 손이 살포시 올라오자,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성필의 마음은 주인을 맞아들이는 문처럼 활짝 열려, 그의 진심을 훤히 보여주었다.
목이 막혀서, 그가 말했다.
“네가 상처받는 건 보기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