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31화 (431/760)

431화

두 가지 선택 모두 후회를 동반한다.

성필은 여태껏 자신의 능력이 발휘하는 여러 바리에이션을 보아왔다.

후회하는 미래 속에서 또 후회하는 것을 보거나. 혹은 후회하는 미래가 계속해서 이어져 마침내 해답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결말에 도달하거나.

‘하지만 어찌 됐든 내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영역이었는데…….’

이번엔 어느 것을 선택하든 후회한다.

당황스럽긴 하지만, 놀랍지는 않았다.

인생을 살아가며 이런 일이야 흔히 발생하는 것이니까. 무엇을 선택하면 다른 것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 말이다.

‘그럼 내가 할 일은…….’

선택으로 얻은 보상의 경중을 파악하는 것이다.

성필은 자신을 쳐다보는 이들에게 애매한 미소를 짓곤 회의가 이어지도록 두었다. 그리고 눈을 감으며 회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국내 최대 규모의 워터파크가 개장했다고 한다. 매우 고맙게도, 운영진 측에서 소녀연맹을 개장 행사에 불러주었다.

멤버들은 수영복을 입은 군중 앞에서 훌륭하게 무대를 소화했다.

‘오늘도 재밌었다’라며 끝낼 수 있었을 것이다. 백설하가 무대에 내려오던 중 계단에서 넘어지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못 걷겠어?”

“네…….”

성필은 백설하를 무대 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박스 중 하나 위에 앉혔다. 그리고 무릎을 꿇곤 그녀의 발목을 자세히 살폈다.

부은 것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부어오를 듯했다. 걷지도 못하니 염좌인 건 확실했다.

‘많이 다친 게 아니면 좋을 텐데.’

성필은 백설하의 발과 발목에 염좌용 스프레이를 뿌려주고, 매니저 안이상에게 말했다.

“밴에 들 것 있어요?”

“네, 가져올까요?”

“부탁할게요.”

워터파크 행사.

많고 많은 행사 무대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성필이 직접 온 건, 워터파크 경영진 사람들과의 미팅 때문이었다. 미팅이라 해도 성필이 가로 엔터의 중역으로서 인사를 하는 정도였지만 말이다.

그들은 소녀연맹을 공식 홍보 모델로 임명하고 싶다고 한다.

이곳에 오기까지만 해도 행복했지만, 고통에 얼굴을 찌푸린 백설하를 보고 있자니 행복이 전부 자취를 감추었다.

“저어, 이사님.”

“응?”

“꼭 들 게 필요한가요? 업는다거나…….”

“너무 멀어. 중간중간 바닥에 물기도 있어서 위험하고. 그리고 하양이가 아무리 힘이 세도, 널 업고 어떻게 주차장까지 가.”

“……?”

백설하는 뭔가 하고픈 말이 있어 보였지만, 끝내 입을 열진 않았다.

성필은 착잡한 심정으로 말없이 백설하의 발만 바라보았다. 그녀가 발끝을 오므리면서, 창피한 듯 발을 슬쩍 감추었다.

“아야!”

그러다가 발목이 상자에 살짝 부딪혀 또 고통을 호소했다.

“움직이지 마.”

“네에…….”

또 둘 사이에 침묵이 번졌다.

그동안 백설하의 입술은 자꾸 닫혔다 열렸다를 반복했다. 이윽고, 그녀가 겨우 목소리를 냈다.

“이사님, 저요. 이 무대에 서기 전에요, 며칠 전부터 몸이 안 좋았어요.”

“뭐? 그런데 왜 말 안 했어?!”

성필이 거의 화내다시피 목청을 높였다.

어쩐지, 발 걸릴 만한 구석도 없고 미끄럼 방지 패드도 붙어 있는 곳에서 왜 넘어졌는지 의아했었다.

“몸이 안 좋았으면 말을 했어야지!”

백설하가 고개를 저었다.

“이 무대 말고, 모든 무대에서 그래요.”

“어……?”

“무대에 오르기 며칠 전부터 속이 메스껍고, 눈앞이 캄캄해지고, 그리고 무대 준비하려 백스테이지에 서면 아예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요.”

성필은 무대 공포증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아이돌이나 뮤지션들이 흔히 걸리는 정신적인 질환이었다. 무대에 서는 게 일인 자들이 무대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는 병.

성필과 둘만 남은 지금, 백설하는 참아왔던 이야기를 전부 해버리려는 생각인 듯 입을 쉬지 않았다.

“힘들어요 이사님…….”

백설하가 기어코 눈물까지 보였다.

“있잖아요, 되게 웃긴데, 아니, 슬픈데요……. 무대에 올라가서 노래 부를 때, 저도 모르게 노래들에 급을 정해버려요.”

이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이 안 좋아할 텐데.

이 노래는 이전에 불렀던 것보다 인기가 없었는데.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해버려서, 급을 나눠서, 옛날처럼 즐겁지도 않고, 그게 너무 괴로워요…….”

곡에 급을 나눠버린다.

이는 뮤지션이면 모두 가진 고통일 것이다.

히트곡을 부르면 확실히 반응이 좋다.

하지만, 뮤지션은 히트곡을 사랑하기도 하지만 히트하지 못한 곡들도 사랑한다.

모두 제 자식이니까.

자신의 자식들이 타인에게 급이 나뉘어 계단식의 평가를 받는 것을 보면, 마음이 편치 않은 건 당연하다.

심지어 본인조차 그리 생각한다면 자괴감이 상당할 것이다.

“특히이…….”

백설하의 목소리가 울렁거렸다.

“‘애플 크러쉬’ 부를 땐 창피해서 죽고 싶어요…… 혀 깨물고 당장 무대에서 쓰러지고 싶어요…….”

성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백설하의 말투는 평소의 그녀라면 절대 쓰지 않을 법한 것이었다. 얼마나 응어리진 게 많으면 이럴까.

“서, 설하야. ‘애플 크러쉬’가 왜 창피해……. ‘애플 크러쉬’는 성공했…….”

“이사님, 초동판매량이요…… 성공의 지표라고 하잖아요…….”

앨범 초동판매량은 음원 차트와 쌍벽을 이루는 성공의 지표다.

특히 팬덤의 성장을 볼 수 있단 점에서, 음원 차트에선 알 수 없는 부분을 가늠하는 게 가능하다.

“전혀…… 안 올라갔잖아요…….”

“…….”

“이사님이 프로듀싱했던 앨범들은 다음 앨범에 판매량이 2배, 6배씩 뛰었어요. 그런데 저는, 저는……!”

성장이 거의 멈추다시피 했다.

백설하는 그걸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설하야, 누누이 말했지만 그 성적이면 잘 방어한 거야.”

“방어요?”

백설하는 이제 거의 실성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녀는 울면서 웃었다.

“케이어스를 상대로 그럭저럭 방어하면…… 그게 성공인 거예요?”

“…….”

“아녜요, 이사님, 아니에요. 그냥 저는 진 거예요. 제가 소녀연맹을 망쳤어요. 우리 애들, 우리 애들, 지금보다 더 성공해야 하는 애들인데 저 때문에……!”

백설하가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혜빈 언니는 시간이 한정적이라고 하셨어요. 저는 그 한정된 시간을 내다 버렸어요. 이래서, 이래서 어떻게 최고의 아이돌이 돼요? 어떻게 정상까지 올라가요? 제가 애들이 가는 길에 장애물을 둔 건데! 오늘처럼…….”

백설하가 자조했다.

“넘어졌어요. 소녀연맹이, 넘어졌다구요. 똑바로 걸어가도, 뛰어가도 모자랄 판인데…….”

제가 넘어뜨렸어요.

백설하는 그 말을 끝으로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성필은 위로할 말을 찾지 못했다.

네 선배들을 떠올려라. 항상 드라마틱하게 성장할 순 없다. 오히려 활동 기간 내내 판매량이 박스권에 갇혀 있던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단순비교로 백설하를 위로할 순 없었다.

성필이 간신히 목구멍에서 말을 끄집어냈다.

“설하야, 그래도 난 네가 만든 곡이 좋아.”

백설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다시 발을 오므리곤 숨기듯 뒤로 끌었다. 창피하단 것처럼.

* * *

웨벡스 사옥의 수많은 연습실 중 하나.

백설하는 기타를 치는 데 집중했다. 턱을 따라 흘러내리는 땀을 닦지 않을 정도로 몰입했다.

그녀의 연주가 끝나자 성필이 물개박수를 쳤다. 백설하는 수줍게 웃으면서 생수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이제 완벽하네. 이대로면 한국에서도 밴드 포맷으로 컴백해도 되는 거 아니야?”

“에이, 그 정도는 아니에요. 세븐데이 선배님들이 보면 얼마나 같잖겠어요.”

세븐데이는 본격적인 밴드 포맷의 아이돌이다. 특히 일본에서 인기가 많은 편이다.

그들은 다른 아이돌이 춤을 연습하는 것만큼 악기 연습에 공을 들인다.

확실히, 소녀연맹이 밴드를 메인으로 음방 무대에 오른다면 ‘밴드를 얕보고 있나?’란 마음을 가질지도 몰랐다.

“확실히 그렇긴 하지?”

“…….”

백설하가 입을 비쭉 내밀었다.

‘앗! 설하가 바랐던 답은 이게 아니구나!’

성필이 급히 방향을 틀었다.

“농담이고, 설하 이제 실력이 물올랐잖아. 세븐데이처럼 레퍼토리에도 없는 곡을 즉석해서 연주하는 정도까진 아니라도, 기획한 곡이면 완성도가 꽤 높을 거야.”

“……그럴까요?”

“당연하지! 이 정도면 오오치 선생님도 발로 박수 치실걸?”

백설하는 성필의 필사적인 우쭈쭈를 달콤히 받아먹었다. 그녀는 기타를 거치대에 두곤 바닥에 다리를 쭉 펴고 앉았다.

“설하야, 케이어스 일본 컴백 앨범 초동 봤어?”

성필은 백설하의 기분을 더 좋게 해줄 요량으로 케이어스 관련 주제를 꺼냈다.

“일본에선 확실히 우리가 케이어스 잡은 거 같아.”

이번 케이어스의 리패키지 앨범 일본판은 오리콘 차트에서 영 맥을 추지 못했다.

그에 비해 소녀연맹은 오리콘 차트를 날아다니는 수준이었다.

한국에서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한 그룹, 이란 말은 듣기 좀 그렇지만. 그래도 소녀연맹의 성공을 증명하는 것이니 기쁜 마음뿐이다.

“이대로면…….”

“괜찮아요.”

백설하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케이어스 관련된 얘기는…… 안 듣고 싶어요.”

“…….”

성필은 능숙하게 화제를 갈무리했다. 그러면서도 서글픔은 어쩔 수 없었다.

‘설하가 케이어스를 과도하게 경계하니까.’

경계라고 할까, 그건 패배감에서 비롯된 수치심일 것이다.

백설하만의 문제가 아니다.

멤버들도 케이어스를 옛날보다 더 경계하고 있다. 케이어스가 이룩한 신화적인 업적 때문이겠지.

아니, 그것보다…….

‘나…… 때문이지.’

성필은 ‘소녀연맹의 컴백을 3주 미룬다’는 의견을 지지했었다.

지금 가로 엔터의 사람들이 당시를 떠올린다면, 성필의 행동을 ‘지지’ 정도로 불러주진 않겠지만 말이다.

당시의 성필은 ‘컴백 안 미루면 우리 다 죽어!’란 기세였었다.

소녀연맹의 컴백을 미루느냐 마느냐, 그 의제는 한시가 급함에도 결정을 내리는 데 이틀이나 끌었었다.

논쟁이 후반으로 들어가서도, 중역들의 의견은 하나로 모이지 않았었다.

그러자 이번엔 멤버들이 나섰다. 백설하를 포함한 멤버들은 ‘예정대로 가자’에 힘을 실었었다.

아직도 리카의 위풍당당한 목소리가 기억에 남아 있었다.

‘도전은 익숙하니까요!’

케이어스와 동시기에 컴백하는 게 대수인가? 이미 두 번이나 겪어본 일이었다.

소녀연맹의 자신감에 임직원들이 감화되려던 때, 성필은 즉각 거부했다.

‘안 돼.’

죽어도 안 된다.

그리 주장하는 성필에게선 아우라마저 흘렀다. 죽음을 각오하고 왕에게 간언을 올리는 신하의 기세가 있었다.

그에겐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 확신은 가로 엔터의 사람들과 소녀연맹에게 이렇게 보였다.

‘소녀연맹은 죽었다 깨어나도 케이어스와 붙어선 안 된다. 절대 이길 수 없다. 비등비등한 상태까지도 갈 수 없다.’

성필에게선 거의 두려움마저 느껴졌었다.

‘아니’와 ‘아라베스크’에서 보였던 태도와 전혀 달랐다.

결국, 컴백은 미뤄졌다.

가로 엔터는 이제까지 쌓아온 신뢰에 어느 정도 타격을 입었으나, 소녀연맹의 컴백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성필이 생각하기에, 잃은 게 컸었다.

‘멤버들은 자신감을 잃었어.’

자신감, 투쟁심, 라이벌 의식.

케이어스와의 압도적인 격차를 보고, 멤버들이 위축되었던 적은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 격이 달랐다.

소녀연맹보다 3주 먼저 컴백했던 케이어스는 격이 다른 수준의 초동판매량을 달성했다.

그야말로 걸그룹의 신화로 불리기 충분할 만큼의 성공을…….

‘지금까지도 그러긴 했었지.’

케이어스가 가는 길엔 신화의 발자국만이 찍혔었다. 멤버들은 그런 케이어스의 뒤를 부단히도 뒤쫓아갔었다.

그리고, 성필이 그런 멤버들을 응원해왔다.

이번엔 달랐다.

이번에, 성필은 단호하게 ‘못 해’라고 말해버린 것이다.

결과를 본 멤버들도 수긍했다. 너무나 간단하게 받아들였다.

‘이길 수 없구나.’

더 이상, 멤버들은 케이어스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됐다.

성필이 케이어스를 덕질하는 것에 대해서도, 옛날처럼 장난스레 태클을 걸거나 괴롭히지 않는다.

그녀들의 기운을 북돋으려 ‘우리 차트 순위가 더 높아’란 말을 해도, 반응이 없었다.

‘저희가 늦게 컴백했으니까 당연하죠…….’

그녀들은 자신들이 잘해서 좋은 결과를 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상황과 환경이 맞아 들었다고만 여겼다.

그녀들은 스스로 케이어스 이야기는 꺼내지 않게 됐다.

마치 소녀연맹에게 케이어스란 부분이 잘려져 나간 것만 같았다. 멤버들은 케이어스를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로 생각하는 듯하다.

“…….”

그래서, 성필은 백설하가 ‘케이어스 관련한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요’라고 한 후.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오랫동안 둘 사이엔 침묵이 감돌았다.

벌써 몇 개월째 이어진 분위기였다.

더는 옛날의 불꽃 같은 기세는 볼 수 없겠지. 성필은 그리 생각하며 서글픔을 삼켰다.

* * *

‘두 개의 미래 전부, 수익적인 측면에선 성공했단 게 보여.’

소녀연맹의 ‘애플 크러쉬’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성공할 게 틀림없다.

‘일단 두 개를 비교해보자.’

컴백을 미루지 않으면 백설하는 무대 공포증을 얻고, 소녀연맹이 더 성장하지 못한 이유를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

지금까지 소녀연맹은 케이어스와 만나더라도 성장만 거듭했었는데, 자신이 그것을 망쳐버렸다고 말이다.

‘두 번째에선, 소녀연맹 자체가 케이어스를 라이벌로 생각하길 관두었다지.’

유추하건대, 케이어스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성공을 이룩한 모양이다.

초동판매량이 신화적인 수준이라고…….

‘근데 이건 이상해. 전생의 케이어스는 3년 차에 그만큼 판매량이 높진 않았었는데…….’

정호환이 각성이라도 한 것일까? 리카의 도전장을 받고 폐관 수련이라도 했나?

모를 일이다.

‘애들의 투쟁심이 다 꺾일 정도면 진짜 말도 안 되나 보네. 설마 초동판매량 50만 장 돌파? 그 정도야?’

아무튼, 성필이 보기에 양쪽 전부 마이너스 요소가 너무 컸다.

소녀연맹의 강점 중 하나는 끝을 모르는 향상심이었다. 그게 천장에 턱 막히게 되는 꼴이니, 무엇을 골라도 후회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건 뭐 어쩌라는 거야?’

어느 쪽을 골라도 후회한다.

어느 쪽이든 보고 싶지 않은 미래였다.

아예 제3의 길로 들어서서 컴백을 앞당기란 뜻인가?

‘아니, 당겨봤자 무슨 차이가 있다고…….’

두 미래 모두 후회의 원인은 케이어스였다.

그렇다고 성필이 원인을 제거한답시고 케이어스에게 독침을 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혹은.

‘에리카 씨한테 흡연 사실을 공개하겠다면서 협박할 수도 없고. 진저 씨한테 매달려서 제발 망해달라고 울며불며 부탁할 수도 없고. 민주 씨가 아름이랑 톡하면서 쓴 적나라한 욕을 공개한다며 협박할 수도 없고. 소유 씨한테 하양이랑 만날 기회를 팔아넘겨서 원하는 걸 얻을 수도 없고.’

원인이 케이어스?

그걸 알아도 성필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애초에 원인을 제거하는 게 불가능한데, 어떻게 더 나은 미래를 고를…….

‘……원인이 케이어스라고?’

성필은 미래의 기억을 더듬더듬 따라 올라갔다.

애초에, 자신은 왜 후회한 거지?

‘설하가 슬퍼해서. 설하가 괴로워해서. 그걸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면…….

성필의 눈이 커졌다.

‘중요한 건 선택이 아니야. 사건을 고르는 게 아니야.’

성필이 후회한 이유는 ‘어느 쪽을 고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선택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어느 쪽을 고르든 보상의 경중만 차이가 나지, 큰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앨범의 판매량이나 음원 순위 따위로 후회하지 않았어. 미래의 나는 그런 건 안중에도 안 뒀어. 애초에 그럴 거였으면 몇 개월 전에 미래를 봤겠지.’

성필은 백설하만을 걱정했을 뿐이었다.

그녀의 이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 그런 마음만으로 후회했다.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 선택이 있지 않았을까 괴로워했던 것이다.

‘애초에, 설하를 행복하게 만들 선택 따윈 없잖아.’

그러니, 중요한 건 선택이 아니라…….

‘인식(認識).’

성필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회의실을 풍경을 보았다.

“물론 컴백을 안 미루면 우리 애들이 지겠죠. 성적이 안 좋겠죠. 그래도, 방송국한테 고개 숙일 이유 만드는 것보단 낫잖아요.”

민경섭이 말했다. 성필의 그의 단어 사용에 집중했다.

그는 ‘지겠죠’라고 말했다.

“계속 말하지만, 설하한테는 평생에 한 번뿐일 기회일 수도 있어. 그 기회를 외부 사정 때문에 적당히 쓰자는 거야? 안 돼. 이번 프로젝트 첫 번째 타자가 설하야. 스타트를 잘 끊어야지. 지면 안 돼. 설령 잃는 게 있어도 반드시 이겨야 해.”

손혜빈이 말했다.

민경섭처럼, 그녀도 ‘이긴다’거나 ‘진다’는 단어를 사용했다.

회의는 그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승리와 패배란 프레임 안에서, 여러 사람이 갑론을박했다.

성필은 백설하에게 집중했다.

그녀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모두의 의견을 경청하려 노력했다. 동공에서 고민이 맺혀 떨어지는 듯했다.

다들 케이어스란 맹수를 마주하곤 두려움에 떨고 있다.

지금까지 그 맹수에게 여러 번 물려보았기에, 마주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는 것이다.

‘그렇구나.’

미래에선, 이런 흉흉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던 것이다.

이긴다, 진다.

케이어스에게 진다, 이긴다.

이런 식으로 모두가 케이어스에게 집중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애초에 이 회의가 열린 것도 케이어스 때문이니.

‘알겠다.’

성필이 할 일은 모두의 인식을 바꾸는 것이다.

그에 알맞은 미래를 골라내면 된다.

성필은 두 마이너스를 저울질하다 마침내 하나를 골라냈다. 그리고 마이너스에 덧씌울 수 있는 플러스를 계산해냈다.

두 개의 미래 중, 하나를 골라냈다.

‘오히려 지금이 기회일 수도 있어.’

소녀연맹은 슬슬 케이어스에 대한 열등감에서 졸업해야만 한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패배와 슬픔을 곱씹었는가.

경쟁심은 좋은 동기이지만 과도하면 독이 된다.

성필이 할 일은 명확했다.

‘설하와 멤버들이 좌절했던 이유는 케이어스를 적으로 봤기 때문. 애초에 그게 말이 안 돼.’

승리와 패배라는 프레임에서 탈출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상대는 그룹 하나 따위가 아니라 시장 그 자체니까.’

소녀연맹의 목적은 시장을 움직이는 것이다.

승리와 패배라는 지엽적인 땅으로부터, 성공과 실패라는 대국적이며 장기적인 전장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그러니 백설하와 소녀연맹, 가로 엔터의 인식을 바꾼다.

어떻게?

‘내 혀로.’

성필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폐를 가득 채울 것처럼 숨을 크게 들이켰다.

‘케이어스 여러분, 미안해요.’

박성필, 잠시 ‘유스’에서 탈퇴합니다.

“케이어스…….”

성필이 케이어스란 이름을 꺼내자,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를 쳐다보았다.

“케이어스?”

홍규헌이 반문했다.

성필은 이를 악문 다음, 잠시 케이어스에 대한 팬심을 내다 버렸다.

“케이어스 따위.”

회의실의 모두가 놀랐다.

마치 예수를 한 번 부정한 베드로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케이어스 따윈 신경 안 써도 돼요.”

베드로가 예수를 두 번 부정했다.

여기저기서 웅성댔다.

아까부터 성필이 이상하게 보이긴 했다. 홍규헌은 걱정을 담아 물었다.

“박 이사, 혹시 오늘 어디 아파?”

“박 이사님 해열제나 진통제 필요하십니까?”

“형 요즘 많이 일한다 했는데.”

“잠시 회의 쉴까? 성필이 너 많이 심각해 보여.”

“박 이사님 괜찮으세요……?”

의도했던 반응이었지만, 성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 내가 케이어스를 따위라고 부른 것만으로 이런 취급을 받아?’

평소의 자신은 대체 어떤 모습이었길래 이러지?

모두의 반응은 충격적이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시간은 없었다.

성필은 진중한 태도를 유지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니요. 도저히 더는 못 듣겠어서요. 다들 뭐만 하면 케이어스, 케이어스, 케이어스…….”

성필이 테이블을 주먹으로 쿵 쳤다.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려는 듯 강렬한 기세로.

“다시 말합니다. 케이어스 따위!”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정했다.

“신경 안 써도 됩니다!”

입 털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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