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0화
KS 엔터의 최고운영책임자(Chief Operation Officer)인 구유한 이사. 그는 프로듀싱 파트가 위치한 층으로 내려왔다.
회사 운영 부문과 프로듀싱 파트가 엮일 일은 거의 없다.
심지어 이사급이 서로를 직접 찾아갈 일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정호환 이사님 지금 계시나?”
“자,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정호환의 집무실 앞 데스크, 그곳의 비서가 초조한 눈빛으로 내선 전화를 집어 들었다.
정호환이 구유한을 달가워하지 않는단 건 이미 프로듀싱팀 여기저기 퍼진 사실이었다.
길 가다가 마주치는 것도 싫어하는 사람인데, 직접 집무실로 찾아왔으니 얼마나 심기가 불편할까.
“모시라고 하십니다…….”
구유한은 데스크 위에 놓인 서류철을 만지작거리다가, 허락이 떨어지자 조바심이 느껴질 만큼 빠르게 손길을 거두었다.
비서가 데스크를 빙 돌아 구유한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를 대신해 노크한 뒤 문을 열어주었다.
구유한은 정호환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정호환은 뽑기 기계에서 뽑은 싸구려 피규어를 만지며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문이 닫히고, 구유한은 서리 바람처럼 서늘한 기세를 지우고 미소를 지었다.
“1층 카페에서 뽑으신 겁니까?”
KS 엔터 사옥의 1층엔 대중에게도 개방된 카페가 있다.
그곳엔 KS 엔터 소속 아티스트의 온갖 굿즈를 팔며, 카페 메뉴엔 아티스트의 이름을 붙여 타 카페 메뉴보다 더 비싼 가격으로 판다.
정호환의 손에 들린 피규어도 카페의 뽑기 기계에서 나오는 종류였다.
그룹 ‘븨이에스’ 멤버들의 동물화 캐릭터 피규어.
“민주가 줬어요. ‘에이힌’ 피규어를 뽑고 싶었는데 수련이 게 나왔다면서요.”
“이사님께 남은 걸 준 겁니까?”
그런데 뭘 그리 사랑스럽단 듯 보고 있는 건지. 구유한은 멀거니 그를 바라보다가,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듯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보다 빨리 정호환이 말했다.
“환영합니다.”
“예?”
“지금까지 저희 사이에 미묘하고 불쾌한 기류가 돌았단 걸 인정하지요. 그걸 깨고 친목을 다지려 일부러 발걸음해 주시다뇨. 늙은 나이임에도 새 친구를 사귄다니 가슴이 설렙니다.”
‘일 이야기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만’이라고 못 박는 선언이었다.
정호환이 구유한을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는,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임에도 사사건건 걸고넘어진단 것이었다.
업무 시간이든 휴식 시간이든 가리지 않고.
하지만 구유한으로선 어쩔 수 없었다.
“저도 이미 결정된 걸 극구 반대하며 돌리고픈 생각은 없습니다. 케이어스의 컴백은 예정대로 진행되겠죠. 프로듀싱 파트와 매니지먼트 파트가 협의한 대로요.”
“일 이야기는…….”
“하지만 이번엔 꼭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구유한의 눈에 기름이 흘러넘쳤다. 불티 하나만 들어가면 금세 하늘까지 치솟을 대화재로 번질 것이었다.
“예상되는 소녀연맹과 글로브의 컴백일에, 왜 굳이 케이어스의 컴백을 맞추신 겁니까? 아시잖습니까, 걸그룹은 보이그룹과 달리 팬층을 공유하는 경향이 큽니다. 양쪽 다 피 흘리고 끝날 일인데, 왜 굳이 강행하십니까?”
만약 구유한의 어투가 존댓말이 아니었다면, 싸움을 거는 것처럼 들렸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구유한은 공격적이었다.
“최소 2주, 아니. 3주의 텀은 두어야 하지 않습니까?”
“회의에서 이유는 이미 말씀드렸지요.”
“‘븨이에스’가 ‘레이어드’와 붙었을 때를 벌써 잊으셨습니까?”
3세대의 탑을 장식한, 그리고 지금도 탑티어로 분류되는 두 그룹.
KS 엔터의 븨이에스.
SMS 엔터의 레이어드.
몇 년 전, 두 그룹은 1주의 차이도 두지 않고 같은 시기에 컴백했었다.
“처참했습니다. 말이 안 되는 결과였어요. 븨이에스가, 고작 음악 방송 하나에서만 1위를 얻어냈습니다. 차트 1위를 찍지도 못했습니다. 한 번 쓰러지니 계속 밀렸어요.”
“지금, 소녀연맹과 글로브를 대형 기획사의 그룹과 비교하시는 겁니까?”
“저는 최악을 말하는 겁니다. 컴백 시기를 맞추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그런데, 일부러 시기를 맞춰요? 어째서입니까?”
“우리의 힘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케이어스는 KS 엔터 문화기술의 총체입니다. 정수예요. 케이어스보다 일찍 나왔던 3세대 이후의 걸그룹들, 대형 기획사의 걸그룹들은 전부 케이어스에 패했습니다. 강 대표도, 송 PD도, 자기네 그룹이 케이어스에 졌단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합니다. 시기가 잘 맞물리지 않았다며, 황급히 다음 그룹을 내놓는 꼴을 보라지…….”
정호환의 얼굴엔 만족감이 서려 있었다.
오랫동안 경쟁해왔던 숙적들에게, 마침내 승리했단 만족감이었다.
“KS 엔터의 힘은 시장을 선도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선도란, 일단 모든 이들을 뒤로 보낸 후 성립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 감정적인 이유로?”
“이해하지 못하시겠죠.”
“예, 이해가 안 갑니다. 케이어스는 이미 소녀연맹이든 뭐든 눈에 안 들어오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소녀연맹을 좋아합니다.”
구유한이 눈가를 찌푸렸다.
그는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정호환이 자주 구사하는, 이야기 도중 샛길로 가는 화법도 당연히 좋아하지 않았다.
“소녀연맹과 케이어스는 비슷한 지향점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처음 보자마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마치…… 싱크로니시티, 그게 정말 있는 게 아닌가 했습니다.”
“공시성(共時性) 말입니까?”
의미 있는 우연의 일치란 뜻이다.
인과적으로 전혀 연결될 구석이 없지만 두 사건이 같은 목적이나 원인으로 발생했다는, 그런 비과학적인 이야기다.
인과가 개입하지 않은 운명 정도의 의미일까.
“제가 보는 미래와 선구안이 나만의 것이 아니구나, 그런 생각마저 들었어요. 예, 저는 소녀연맹을 좋아합니다. 다른 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난 형제처럼요. 하지만 결국은 케이어스의 열등재(劣等材)였고, 앞으로도 그러하겠죠. 이번 컴백은 쐐기입니다.”
“……정말.”
구유한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신기하군요.”
“뭐가 말입니까.”
“예술가가 이끄는 회사가 어떻게 업계의 1위가 되었는지.”
그건 구유한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모욕이었다.
‘너 같은 인간이 대가리로 앉아 있는데 어떻게 회사가 이렇게 컸냐’의 순화어였다.
“그런 방식으로, 대체 몇 번의 성장 가능성을 놓친 겁니까? 이런 일이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반복됐겠죠. 그래서 KS 엔터는…….”
“구 이사.”
정호환이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여태껏 구유한에게 앉으란 말도 하지 않았던 터라, 구유한은 줄곧 서 있었다.
그렇기에, 드디어 정호환과 구유한의 눈높이가 맞았다.
“구 이사가 KS 엔터에서 이루어낸 업적은 높이 평가합니다. 정말 저도 놀랐어요. 우리 회사에 돈 나올 구석이 이렇게나 많은지 몰랐으니까요. 주주분들이 예뻐하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결국 예술 하는 회사는 예술가의 겁니다.”
그만 깝치고 꺼지란 뜻이었다.
돈놀이나 하는 사업가 나부랭이가 어디서 끼어드냐는 선포였다.
구유한은 물러났을 것이다. 옛날 같았다면, KS 엔터 그 자체나 다름없는 정호환에게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을 게 틀림없다.
하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마지막입니다.”
“뭐요?”
“저는, 이 구유한은, 회사의 이익 극대화란 목적을 지니고 주주총회에서 선임되었습니다. 정 이사님이 자꾸만 이렇게 회사의 이익과 상반되는 결정을 내린다면,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
“정 이사님은 저를 머리에 잉크만 든 머저리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저도 프로 의식이 있습니다. 이 업계에 대해 공부하고 또 공부했습니다. KS 엔터에 헌신한 연차 20년짜리 매니저보다, 제가 더 잘 알 거라고 확신합니다. 지금의 케이어스는 틀렸어요.”
정호환의 눈썹이 꿈틀댔다.
“‘븨이에스’에서 벗어나세요. 걸그룹을 보이그룹처럼 운용할 생각하지 마세요. 걸그룹이면 걸그룹답게, 팬덤을 위한 작품성보단 대중을 위한 상품성을 추구하란 말입니다. 예술보다 유희입니다. 아이돌은 본분을 잊을 때 망하는 법입니다. 보이그룹은 회사의 돈줄이고 걸그룹은 회사의 얼굴입니다.”
정호환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케이팝의 역사 그 자체인 자신에게, 손으로 돈이나 셀 줄 아는 샌님이 지적질을 하고 있다.
하지만 정호환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린아이에게 놀림당한다고 상처 입을 어른은 없듯이.
“아까 어쩔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만, 그건……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는 말입니다.”
“제가 못 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정호환이 싱긋 웃었다.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십니다, 구 이사님. 대단해요. 이제 나가보시지요.”
구유한은 그의 말대로,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무실을 나섰다.
정호환은 의자에 털썩 앉았다.
‘감히 네깟 게…….’
대한민국의 문화, 역사 그 자체인 자신에게 망발을 지껄여?
됐다.
구유한은 쓸 만한 인재다. 그의 능력은 증명되었다. 심기 좀 불편하다고 어떻게 할 순 없다.
‘이 회사 임직원들만 수백 명인데,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게다가, 구유한이 아무리 두드려도 성문은 깨질 일 없다. 정호환은 KS 엔터 내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부서지지 않는 성이었다.
어린애가 돌 몇 번 던진다고 흔들리진 않는다.
‘븨이에스가 레이어드와 붙었을 때를 벌써 잊으셨습니까?’
구유한이 남겼던 말이 귓가를 둥둥 떠다녔다.
정호환은 눈을 질끈 감았다.
당시 븨이에스 멤버들의 얼굴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활동을 마친 그녀들의 얼굴은 정말 영혼이 빠져나간 것만 같았었다.
“케이어스는 최고다…….”
케이팝 역사 30년이 낳은, KS 엔터가 고르고 골라낸, 정호환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그때 불현듯 븨이에스 멤버 박수련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정 이사님, 저희 이것밖에 안 됐나요?’
정호환은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그래, 케이어스는.
븨이에스란 교육비를 시장에 지불하고, 븨이에스 자체를 희생물로 삼아 만들어낸.
‘시대의 총아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아…….’
져선 안 된다.
* * *
케이어스의 컴백 소식을 접한 가로 엔터는 분주해졌다.
한구인이 내린 지시 때문이었다.
‘소녀연맹의 컴백이 3주 밀릴 것을 가정하고 계획을 짜서 가져와라.’
원래의 계획이 3주 밀리면, 당연히 개판이 될 수밖에 없다.
먼저 비주얼팀.
이유이가 모니터를 멍하니 보면서 펜을 끄적였다. 거의 넋을 놓은 것 같아, 조금만 더 있으면 침이라도 줄줄 흘릴 듯했다.
‘무대 설비는 완성되고 폐기, 해체할 걸 가정하는데…….’
아이돌의 사전 녹화 무대는 곡 컨셉에 맞도록 심혈을 기울여 디자인한다.
거대한 무대 설비를 두거나 특수효과 장치를 준비하고, 말로 하기 힘들 정도의 제작물이 무대 하나에 여기저기 주렁주렁 걸리고 설치된다.
그것들은 업체에서 생산된 후 바로 무대에 가져와 쓸 것을 가정한다.
‘근데 3주가 밀리면 보관할 곳이 필요해.’
업체에 맡겨두면 비용이 발생한다. 물건을 가만히 두는 데도 돈이 든다.
심지어 소녀연맹이 컴백하면 여섯 개 음악 방송 무대에서 사전 녹화에 들어간다.
무대마다 다른 비주얼로 꾸미니, 총 여섯 세트의 장식물들을 3주나 맡겨둬야 한다.
‘돈이 뭐 이렇게 많이…….’
그걸로 끝도 아니다.
‘빌리기로 했던 옷들은? 메이크업샵 예약해뒀던 스태프들은?’
멍하니 모니터를 보던 이유이는, 결국 과부하를 이기지 못하고 책상에 이마를 쿵 박았다.
다음, 매니지먼트팀.
“X 됐다!”
매니저 대기실에 민경섭의 외침이 떠다녔다.
그것을 바라보는 매니저들은…….
“진짜 X 됐어요!”
“어떡해요 팀장님!”
소녀연맹의 컴백이 3주 밀린다?
가로 엔터의 모든 매니저들이 방송국으로 가서 음악 방송 PD들에게 무릎 꿇고 신발을 핥아야 하리라.
음악 방송 스케줄은 길면 몇 개월 전부터 픽스되는 게 보통이다.
갑자기 빠진다고 하면 제작진은 얼마나 짜증이 나겠는가. 지금까지 조율해왔던 게 전부 망가지는데 말이다.
그게 다인가?
아니!
‘음방 말고, 홍보하러 나가기로 했던 다른 예능들은 어쩌라고!’
매니저들이 핥아야 할 구두의 개수가 2배로 늘어난다.
거기서 또 끝인가?
아니!
‘컴백 일자에 맞춰서 잡아뒀던 축제랑 행사 스케줄은 또 어쩌라고!’
민경섭은 스트레스 때문에 손발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나머지, 그의 뇌는 희미한 희망을 만들어냈다.
그가 매니저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한 이사님이 3주 밀렸을 때의 기획을 제출하라고 하셨지만, 설마 진짜 3주 밀진 않으시겠지?”
“진짜 밀겠던데요?”
“왜애애애애애애애애!”
민경섭이 안이상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안이상이 울컥했다.
“말한 건 수희인데 왜 제 멱살을 흔드세요?! 남녀차별이얏!”
가로 엔터 전체가 혼란에 빠져 있었지만, 가장 괴로운 건 한구인이었다.
그는 홀로 휴게실에 있었다.
한구인은 벽에 이마를 쿵, 쿵, 쿵, 쿵, 박았다.
“KS 엔터, 어째서 우리한테 이런 짓으을…….”
한구인은 자그마한 꿈이 있었다.
소녀연맹의 팬덤이 공고히 결집하고, 소녀연맹의 수익성이 증명된 지금. 제발 소녀연맹이 경쟁자 없이 컴백하는 것이었다.
‘글로브? 그 정도면 그래…… 봐줄 수 있다.’
그런데 케이어스라니!
소녀연맹은 운도 지지리 없지, 데뷔와 마지막 컴백을 케이어스와 맞추게 되었었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소녀연맹은 연속 음방 1위도 거뜬히 해냈을 것이었다. 앨범도 훨씬 많이 팔았을 가능성도 있다.
‘박 이사님이 그러셨었지. 걸그룹은 팬층을 공유하는 경향이 크다고…….’
여자 팬들 사이엔 주식이 보이그룹, 간식이 걸그룹이란 말까지 있다고 한다.
간식은 주식과 달리 여러 번 먹을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한계는 있다.
초코바와 마시멜로를 같이 먹는 사람도 있겠지만, 초코바 하나만 먹고도 충분하다며 그만두는 사람이 보통 아니겠는가?
‘그 이유 전부 차치하고서라도, 설하 씨가 프로듀싱한 음반이야. 성공해야만 해.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성공해야만 한다…….’
“한 이사님.”
한구인이 시무룩한 눈빛으로 뒤를 보았다.
권아인 경리가 휴게실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회의…….”
“예, 알겠습니다. 가겠습니다.”
한구인이 비틀거리며 휴게실을 나섰다. 그런 그를 권아인이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경리인 그녀는 회사 중역들이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한결같던 한구인이 저러는 것을 보니, 그가 지닌 고민의 깊이가 엿보였다.
“한 이사님.”
권아인이 작게 주먹을 쥐고 말했다.
“파이팅!”
“…….”
뭘 힘내라는 걸까.
한구인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응원을 받고서도 가만히 있을 순 없던 터라, 작게 웃어주곤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에는 가로 엔터의 중역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에 더해, 이번 ‘우리들의 프로듀싱’의 주인공인 백설하도 있었다.
“다 왔네.”
홍규헌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가로 엔터가 회사다운 조직을 갖춘 후, 홍규헌이 이런 회의에 참여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었다.
홍규헌의 역할은 토론이 아니라 결정이었으니까. 부하들과 분리되는 것은 조직의 수장이 권위를 갖기 위한 첫 번째 단계였다.
하지만, 홍규헌을 배제한 회의는 너무나 지난하며 결정 또한 느렸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이례적으로 그녀도 참여했다. 최대한 빨리 결정을 내리기 위해.
“시작하자. 먼저, 의견 있는 사람.”
민경섭이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미루면 안 됩니다. 가로 엔터와 소녀연맹이 쌓아왔던 신뢰도가 박살 날 거예요. 사실상 방송국 사정 전부 무시하고, 저희들 돈 더 벌어보자고 약속을 깨는 거잖습니까.”
“날 것 그대로 말하자면 뭐어, 그렇지.”
“이익을 조금 희생하더라도 예정을 지키는 편이 낫습니다.”
“이익을 조금……?”
손혜빈이 곧장 반박해왔다.
“애들의 시간은 무한하지 않아. 이제 3년 차라지만, 커리어를 쌓을 기회는 한정돼 있잖아. 모든 컴백이 소중하고 귀중해. 기회마다 최고의 성과를 올려도 모자랄 판이잖아.”
“음.”
홍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로 엔터의 목적은 예나 지금이나 최고의 아이돌이었다. 모든 직원이 한마음 한뜻으로 그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간다.
손혜빈의 말마따나 시간은 무한하지 않다.
“시간은 얻을 수도, 만회할 수도 없는 한정적인 자원이야. 그럼 만회할 수 있는 자원을 소비하는 편이 낫지. 경섭이 네 말처럼 ‘이익을 조금 희생하는’ 정도가 아니야. 신뢰를 깨뜨리고 컴백을 미뤄서, 성공을 손에 넣자.”
“손 이사님, 하지만…….”
한구인이 조심스레 의견을 펼쳤다.
“비주얼팀도 3주 미룸으로써 입게 되는 비용 피해가 만만치 않을 거다…… 란 의견 아닙니까?”
“그 이상의 이익을 보는 거예요. 그야 비주얼 팀장으로선 경섭이처럼 말해야겠죠. 하지만, 이사로서의 저는 미뤄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그렇습니까.”
한구인은 민경섭과 손혜빈, 둘 다 일리가 있단 생각이었다.
어느 쪽의 의견을 듣던 일장일단이 있다.
하지만 그건 평형을 이룬 저울 같은 상태가 아니었다. 지금으로선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이쪽이 더 옳았다’라고 생각할 판단이 존재한다.
가로 엔터의 중역들은 그 판단을 찾아야 했다.
“박 이사는?”
이목이 그에게로 쏠렸다.
성필은 민경섭과 손혜빈을 한 차례씩 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먼저 설하의 의견을 듣고 싶어요. 사업적인 관점보다, 직접 곡을 들고 무대로 나가는 아티스트의 생각요.”
회의실의 분위기에 압도당했던 백설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사실 그녀도 답은 알 수 없었다. 민경섭과 손혜빈, 두 사람 모두 옳았다. 흑백을 가릴 수 없는 문제 같았다.
하지만, 아티스트로서의 감정을 고백하자면…….
“저, 저는…….”
……모르겠다.
“모르겠어요, 정말…….”
케이어스와 맞붙는다는 불안감.
그리고, 케이어스에게서 도망간다는 패배감.
그 두 가지가 얽혀서 명확한 형태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성필은 이해한단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설하가 그렇다면, 저는 아무래도…….”
다들 성필의 입만 바라보았다.
소녀연맹의 컴백을 3주 미룬다.
찬성 1표, 반대 1표, 애매모호 2표.
성필의 답이 회의의 향방을 가를 확률이 높았다.
“미루…….”
그 순간, 성필이 움찔하면서 돌처럼 굳었다.
약 몇 초, 다들 이상하게 여겨 그를 부르려던 찰나. 성필의 눈에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그는 더 없을 확신을 담아 말했다.
“미루지 않고 그대로……!”
그 순간, 성필이 또 몇 초 멈췄다.
사람들은 그가 갑자기 병이라도 걸렸나 의심했다. 그리고, 성필은 석상에서 사람이 된 것처럼 움찔하며 다시 입을 움직였다.
“그대로…….”
“미루지 말고 그대로 가자고?”
“……가는 것, 도, 일리가 있, 고, 미루자는 것도 괜찮, 은, 의견 같, 은데, 요?”
“박 이사 어디 고장 났어?”
찬성 1표. 반대 1표. 애매모호 2표. 고장 1표.
성필은 정말 뇌가 망가진 사람처럼 손까지 덜덜 떨었다. 그가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뭔데, 대체 어쩌란 건데.’
두 선택지 모두 후회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