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화
레코딩은 놀랍도록 빨리 끝났다.
‘아라베스크’ 녹음이 며칠을 끌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백설하의 보컬 디렉터로서의 재능이 드러났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처음부터 멤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곡이라서 그런 걸까.
쉽게 쉽게 생각하면, 이렇게 잘 풀리는 날도 있을 수 있다 정도로 퉁 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레코딩은 하루 만에 끝났지만, 거의 10시간을 끌었다. 옛날보다 빨리 끝났어도, 그때보다 시간당 에너지를 더 많이 소모한 듯했다.
하지만 멤버들은 성필이 입을 열자 언제 피곤했냐는 듯 게슴츠레했던 눈을 번쩍 떴다.
“너희들의 개성이 잘 드러난 거 같아.”
그렇게 말하곤, 성필은 감상평을 들려주었다.
“아라는 기대했던 대로 선명한 딕션과 길게 뻗는 가성이 인상적이었어. 특히 도입우 ‘우우우우’는 진짜 역사에 남을 거 같아.”
“너무 띄우는데?”
“진짜야. 아라 특유의 호소력이 도드라지고, 내 가슴에도 와닿았어.”
“아직도 가슴에 근육통 있어요?”
조아라가 장난스레 성필의 가슴으로 손을 뻗자, 성필이 곧바로 팔짱을 껴서 자신을 방어했다.
“하양이는 보컬을 컨트롤하는 능력이 많이 발전했어. 여자한테는 찾아보기 힘든 중저음의 목소리잖아. 옛날엔 너무 과해서 튄단 느낌이었는데, 이젠 합의점을 잘 찾은 거 같아.”
“……제 목소리, 좋다고, 하셨잖아요. 그, 그런데 과하게, 튄다구요?”
“아, 아니, 안 좋단 얘기가 아니라 컨트롤하는 게…….”
“아하하, 농담이에요. 이사님이 무슨 말씀하시는지 알아요.”
성필이 나무라듯 그녀를 보자, 장하양은 풋풋하게 웃으며 백설하의 허리에 자신의 손을 걸쳤다.
“다 언니 덕분이에요.”
“응, 설하가 큰일 해줬어. 하양이한테서 감미롭고 부드러운 톤의 보컬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 하양이의 강점은 감정을 보컬에 잘 투영하는 거였는데, 이젠 스펙트럼이 더 늘어났어.”
“제가 뭘요…… 하양이가 연습을 열심히 한 거죠.”
그러곤, 백설하는 눈을 반짝이며 성필을 보았다. 그가 자신의 보컬엔 어떤 칭찬을 해줄지 궁금해서 못 참겠단 듯했다.
“음, 설하는 뭐 똑같았네.”
“네?!”
“다른 게 없어.”
“그러, 그런, 그럴…….”
“물오른 실력, 농익은 목소리, 절정의 보컬리스트. 그야말로 정점! 노래에 문외한인 나는 더 올라갈 지점을 제시하지도 못하겠다.”
“……그런 단어 일부러 쓰시는 거예요?”
“역시 물오른 쌤이에요!”
리카가 박수 쳤다.
“역시 농익은 쌤.”
조아라가 끼어들었다.
“절정의 백설하!”
신아름까지 웃으면서 백설하를 놀렸다.
백설하는 동생들을 혼내는 시늉을 했다. 동생 라인이 꺄르르 웃으면서 녹음실 여기저기로 도망갔다.
“그리고 아름이.”
여기저기 도망 다니던 신아름은 어느새 쪼르르 성필의 앞에 와 있었다.
“아름이는 선천적으로 성량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었거든, 근데 이번에는 전혀 그런 게 안 느껴졌어.”
“아, 그거요.”
신아름이 질린 눈으로 백설하를 바라보았다.
요 몇 개월, 백설하는 신아름의 호흡법을 바닥에서부터 뜯어고쳤다.
신아름이 잘못 들인 발성이나 호흡법을 처음부터 다시 잡은 것이었다. 때문에 일정 기간 실력이 떨어지는 과도기를 거쳤지만, 이젠 바꾼 기교로 예전과 비슷한 수준에 이르렀다.
아니, 예전보다 더 낫다.
앞으로는 더 나아질 것이다.
“철혈의 독재자 쌤한테 조교받은 덕이죠 뭐.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내가 그렇게 심했어……?”
“아니, 쌤 근래 내 어디 제일 많이 보는 줄 알아요? 배예요 배. 호흡 잘하고 있나 아닌가 감시한다니까요? 문득 정신 차리면 쌤이 내 배…….”
신아름이 자신의 배꼽 아래를 슬슬 쓸었다.
“쳐다보는데, 진짜 소름 돋아요.”
“소름이라니…….”
백설하가 금세 울상이 됐다. 설마 사랑하는 동생을 향한 사랑이 그런 식으로 비쳤을 줄 상상도 못 했다.
성필이 신아름의 정수리를 손날로 톡 쳤다.
“아야!”
“스승님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신아름은 자신의 머리를 쓸면서 헤헤 웃었다.
“농담이구요. 저도 놀랐어요. 이렇게 보컬이 달라질 수 있구나 해서요.”
백설하의 얼굴이 밝아졌다.
성필은 칭찬을 이어갔다.
“맞아, 원래부터 아름이는 팔방미인이었는데 이젠 훨씬 나아졌어. 가성과 진성을 아무렇지 않게 넘나들고, 소화할 수 있는 음역대도 늘어나고, 동시에 아름이만의 개성도 있어. 특히 중간에 런(음계를 계단처럼 차례로 빠르게 오르거나 내려가는 기법) 구사하는 파트는 걸작이야.”
“아니이 뭐어…… 걸작까지느은…….”
“감정을 잡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게 흠이긴 하지만.”
“……애초에 감정을 잡는단 거 아직도 모르겠어요. 뭐 울먹이면서 노래해야 해요?”
“하양이 하는 거 들어봤잖아.”
“팀장님, 하양 언니는 감정을 잡는 게 아니라 걍 휩쓸리는 거예요. 노래 부르면 자기 혼자 영화 주인공 돼서 다 애절하게 부르잖아요.”
“아하하, 시기 질투는 익숙해. 재능 있는 자의 숙명이니까.”
“아앗! 이거 아름이가 자주 하는 말투예요!”
리카는 장하양을 가리키며 ‘아름이랑 똑같아요!’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신아름이 얼굴을 붉혔다.
성필이 그녀를 놀렸다.
“아름이 평소에 애들한테 그런 말 하는구나?”
“걍 장난으로 하는 말이에요…….”
“거짓말! 아름이 콘서트 백스테이지에서도 아타시(저)한테 재능 없다 뭐다 했었어요!”
“야 리카 너……!”
“사실이잖아!”
“리카가 재능이 없긴 왜 없어.”
리카는 드디어 자신의 칭찬 차례가 찾아왔음을 직감했다. 허리에 손을 올리곤 자랑스레 가슴을 폈다.
“리카는 일본어의 재능이 있잖아.”
“뭔가요 그건?! 아직도 일본어의 천재 밈을 미시는 건가요! 그때 박 이사님이 붙였던 별명은 귀여움 천재 빼고 다 죽었다구요!”
“너 일본어 잘하긴 하지.”
“아타시(나)는 일본인이니까 당연하지! 아라쨩이 한국어 잘하는 거랑 똑같아!”
“세계시민 아니고?”
리카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세계시민이면서, 일본 주민! 일본 시민권 보유자야! 아아앙 이런 대화는 됐고 빨리 칭찬해주세요!”
“어어, 그러니까…….”
성필이 픽 웃었다.
“뭐라 할 말이 없다.”
“그 정도로 못 했나요?!”
“아니, 리카는 항상 뭐든지 잘해줬잖아. 이번에도 그랬어.”
보컬적 역량이 이렇네 저렇네 따지기 전에, 리카는 뭐라 꼬집을 만한 약점이 없었다.
멤버들 앞에서 할 수 없는 칭찬이라 삼키고 있었지만, 성필은 이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케이어스 데뷔조 최종 후보까지 올라갔는지 알겠어.’
케이어스가 추구하는 건 멤버들의 전문화가 아닌, 각 멤버들의 기량이 골고루 분배되는 것이다.
소녀연맹과 같은 퍼포먼스 지향형 그룹이지만, 무엇 하나 빠지는 부분이 없었다.
데뷔 초반 보컬 역량이 미숙했던 진저 정도가 예외겠지만, 지금은 그것마저도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내가 생각했을 때, 리카의 진짜 강점은 이해력인 거 같아. 어떤 춤이든, 노래든, 바닥에서부터 이해해서 다시 자신만의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 탁월해.”
“으음?”
“팔방미인이란 뜻이야.”
“아타시(저)는 미인이니까요!”
성필은 이번 레코딩을 진행하며, 지금까지 꿈만 꾸었던 미래를 현실로 받아들이게 됐다.
진정한 가능성이 그의 눈앞에 찾아왔다.
성필은 레코딩 CD를 손에 들었다.
“너희들 한 명 한 명이 ‘애플 크러쉬’에서 완성됐다. 하지만 너희들의 기량보다 더 주목하고 싶은 건 이 곡의 구성이야. 설하야.”
“네, 네.”
“처음 말했던 것처럼, 이 곡은 보컬이 시작이자 끝이야. 사운드적으로 어떤 기발한 장치나 놀랄만한 구성이 포함되어 있지 않아. 오직 목소리만이 전부인 곡. 그래서 도전이었던 곡.”
그 도전은 성공이었다.
“오직 반복과 중첩, 조화, 서로를 해치지 않는 개성만으로 곡이 어느 수준까지 상승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어. 단순하지만 천박하지 않고, 복잡하지 않지만 세련되었어.”
백설하는 개성 넘치는 멤버들의 목소리를 하나의 앙상블로 묶어 완벽한 일체로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멤버 개개인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고선 쓸 수 없는 작곡 테크닉이었다.
“서로 다른 이름과 목소리가 단 하나의 점으로 수렴되고, 정교하게 위치한 배음(倍音)은 수학 공식처럼 아름답기까지 해.”
“아저씨는 수학 공식이 아름다워요?”
“한 이사님은 아름답다고 하시더라.”
“저런…….”
“설하야.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은 많지?”
“네에…….”
“노래를 잘 부르는 그룹도 많아.”
하지만, 그 멤버들을 모아 조화를 이루게 만드는 것은 어렵다.
재료들이 다 좋다고 해서, 무작정 섞어서 만들면 맛있어지는 게 아닌 것처럼.
“‘애플 크러쉬’는 뮤직 프로듀싱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될 거야. 대중성과 예술성의 중간에 놓인 완벽한 중간 지점으로.”
백설하는 아까부터 참고 있던 질문을 꺼내었다. 긴장으로 그녀의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그, 그럼, 잘…… 된 거죠?”
성필이 웃었다.
“물론이죠, 백설하 프로듀서님. 완벽한 프로듀싱이었습니다.”
“아.”
백설하는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다행이다.”
그녀는 바닥을 보며 그리 말했다.
“다행이야…….”
성필도 마찬가지로 생각했다.
아니, 다행인 수준이 아니다.
‘기대 이상이다.’
마침내, 소녀연맹은 본인들의 퍼스널리티를 개성적이고도 세련되게 표현할 수 있는 법을 찾았다.
성필은 손에 들린 CD를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이게 소녀연맹이다.’
소녀연맹의 손으로 탄생시킨.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소녀연맹의 사랑이다.’
* * *
화면은 황야를 비춘다.
장하양은 황야를 곧게 뻗은 도로를 터덜터덜 걸어간다. 걸음 하나에, 햇볕에 찌푸리는 눈짓 한 번에 피곤함이 묻어 있다.
무언가를 갈구하는 것처럼, 그녀는 피로도 개의치 않고 걷기를 반복한다.
마침내 그녀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녀가 고개를 든다.
얇은 가지 끝에 걸린 사과가 보인다.
장하양은 그 사과를 홀린 것처럼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살을 찌푸린다.
고운 손이 나타나 사과를 더듬는다.
장하양이 눈썹을 꿈틀댄다.
하나의 손이 더해진다.
쉴 새 없이 사과를 더듬는 손길은 교미하는 뱀을 연상시키는 것 같기도 하다.
태양이 정점에 이르고, 장하양의 눈가에도 그림자가 드리웠다.
손이 세 개로 늘어났다.
세 개의 손은 사과에게 지문을 빼앗아 가라고 호소하듯 강하게 그것을 붙잡는다.
장하양이 모르는 지문이 사과를 더럽힌다.
장하양은 또 한 걸음 내딛다가, 물러난다.
마지막 손이 더해졌다.
네 개의 손이 빈틈없이 사과를 붙잡고 감쌌다. 그건 서로 사과를 손에 넣기 위한 투쟁 같았다.
에덴에 아담이 넷이었다면, 그리고 이브가 네 명의 아담에게 사과를 요구했다면, 아담들은 사과를 사랑하는 아내에게 바치기 위하여 서로를 죽였을 것이다.
그들의 자손인 최초의 살인자, 카인이 태어나기 전에 인류는 살인이란 대죄를 경험했을 것이었다.
사과를 붙잡은 네 개의 손은 사과를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폭력적으로 사과를 탐했다.
화면은 장하양의 상반신을 비춘다.
그녀의 눈동자는 텅 비어 있는 것처럼 검은자가 탁했다.
그녀의 몸이 살짝 아래로 굽혀졌다.
무언가가 화면 아래에서 튀어나왔다.
장하양의 손에 소총이 들렸다.
탕.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총구에서 명멸했던 빛과, 반동 때문에 살짝 움찔한 장하양의 움직임 덕분에 총이 발사됐단 것을 알 수 있었다.
몇 초 후, 장하양의 얼굴로 새빨간 액체가 튀었다. 피보다도 더 붉고 끈적한 무언가.
피자두의 과즙을 연상시키는 붉은 액체였다.
장하양은 얼굴에 과즙을 묻힌 채 다시 앞으로 걸어간다. 걸어가서, 뭉개지고 으깨진 붉은 덩어리를 바닥으로부터 빼앗았다.
마침내 자신의 것이 된 사과를, 그녀는 시원하게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한껏 부풀려진 볼.
한 방울의 과즙도 놓지 않겠단 듯 꼭 다문 입술.
이빨과 이빨이 닿고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씹고 또 씹는다.
마침내 땡볕 아래서 생명을 손에 넣는 장하양은 만족스러운 눈웃음을 짓는다.
그와 동시에 ‘애플 크러쉬’의 하이라이트 멜로디가 짧게 재생됐다.
평소였다면 아름답게만 들렸을 따스한 현악기의 소리가, 지금은 마치 비명처럼 느껴졌다.
[Apple Crush Teaser #1]
[Love, Is Violence]
마침내 공개된 소녀연맹의 신곡 티저.
그것을 본 인민이 유용태는 할 말을 잃었다.
예술적이기까지 한 영상미는 그렇다 치고.
“……잔혹동화 컨셉인가?”
사랑, 전혀 전달되지 않았다!
* * *
핸드폰 세로 화면 모드로 촬영한 영상.
딱 보아도 전문가의 솜씨가 아니다.
어디 돌아다니는 일반인이 핸드폰을 들고 영상을 촬영한 것 같다.
다만 이 영상이 훌륭한 이유는, 피사체가 리카이기 때문이었다.
핸드폰의 앵글이 피사체를 자동으로 인식하기 전, 화면이 살짝 흐려지는 것조차도 예술처럼 보이게 만드는 리카의 외모.
그런 리카가 일상복 차림으로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카메라, 그가 다가가자 리카는 그를 흘끗 보곤 급히 수첩을 가린다.
[보지 마!]
배경은 동네 공원의 자판기 앞으로 바뀌었다.
리카는 반 팔 티셔츠의 목깃을 펄럭이면서 땀을 식힌다. 그녀의 턱으로 땀이 한 방울, 처마를 따라 흐르는 빗물처럼 매끈하게 떨어졌다.
[뭐 마셔?]
리카가 구김 없이 맑은 미소를 보였다. 그녀는 아무거나 뽑아서 그에게 던지듯이 넘겼다.
캔이 땅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리카가 심심한 사과를 전했다. 그러면서도 미안한지, 자신의 것을 그에게 넘겼다.
[다 먹지 마! 나눠마시는 거야!]
배경은 노을이 지는 언덕으로 바뀌었다.
리카는 맨발로 꽃이며 잔디 사이를 뛰어다니면서 해맑게도 웃는다.
먼 거리라, 피사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카메라는 흐려지고 선명해지길 반복했다.
리카가 돌아보았다.
[여기!]
그 순간, 마법처럼 리카만이 선명해졌다.
흐려진 배경 속에 리카만 또렷했다.
그는 리카에게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노을의 빛이 강해진다.
태양을 가리던 언덕의 지평선을 넘자, 주황색의 빛이 역광으로 리카를 감쌌다.
그녀는 검게 보였지만, 세상 무엇보다 밝았다.
[그거 언제까지 들고 있게.]
리카가 핸드폰을 빼앗았다.
툭.
그 소리와 함께 화면은 바닥에 떨어진 듯 잔디의 모습을 가까운 거리에서 잡았다.
[모처럼 놀러 왔잖아!]
추방된 화면 안의 세계, 그 밖으로 리카의 해맑은 미소만이 그녀의 행복을 들려주었다.
세상 그 어떤 고난이 와도 그녀의 눈엔 그림자가 들어설 일이 없을 것이다. 절로 그런 생각이 들 법한, 티 없이 맑은 웃음이었다.
배경은 대학교 내의 학생 식당 같은 곳으로 바뀌었다. 학생들이 카페와 동시에 식당으로도 쓰는 곳.
리카는 그의 건너에 앉아 테이블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 브런치 메뉴 중 하나, 후식으로 사과가 하나 나왔다.
[음.]
리카는 사과에게서 그에게로 눈을 돌린다.
그녀는 배시시 웃고는, 사과를 들어 한 입 살짝 깨문다.
바로 먹는 게 아깝다는 듯, 그녀는 사과에 자신의 치아 자국만을 희미하게 남기고 내려놓는다.
사과는 붉다.
그 붉음 위에 리카의 입술이 묻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바라본다.
카메라의 흐릿하고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Apple Crush Teaser #2]
[Love? Maybe, Friendship. Rather than love.]
소녀연맹의 티저는 주마다 하나씩 발표됐다.
그 말은, 장하양의 첫 번째 티저가 발표된 후 4주가 지나면 소녀연맹이 컴백하리란 뜻이었다.
어쩌면 더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김채현은 소녀연맹의 컴백이 몇 주나 남았단 게 고통스러웠지만, 티저를 보자 기다림조차 즐겁단 생각이 들었다.
‘하아, 내가 왜 이걸 폰으로 봤을까. 모니터로 봤어야 했는데…….’
아니, 리카가 주인공인 티저 영상은 핸드폰의 버티컬 화면에 맞춤이었다.
핸드폰으로 본 게 정답이었을지도 모른다.
김채현은 화면 안의 리카를 검지로 살살 쓸었다. 너무 귀여워서 볼 한 번만 깨물어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하양이 티저도 좋았지만, 리카 티저도 좋아. 아니, 다 좋아!’
소녀연맹 팬덤인 인민은, 소녀연맹의 오랜 공백으로 많은 이들이 휴덕이나 탈덕에 들어갔었다.
걸그룹을 코어하게 팬질하는 이들이 적다 보니,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철새가 많은 편이니까.
김채현은 소녀연맹에게 관심이 덜 쏟아지진 않을까 걱정했다.
‘미디어에서 아무리 광고를 때려도 결국은 팬덤 싸움으로 갈 수밖에 없으니까…….’
결국엔 팬덤 싸움이 될 것이다. 김채현이 그리 추측한 이유가 있었다.
장하양이 주인공인 첫 번째 티저는 영상미가 매우 훌륭했으며, 소녀연맹 팬덤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렸었다.
하지만 짐작컨대, 이번 소녀연맹은 다크한 컨셉으로 더 들어간 듯 보였다.
‘딥한 컨셉의 곡은 대중에게 어필하는 게 힘들잖아.’
그러니 이번 소녀연맹의 성패는, 이제까지 구축한 팬덤의 충성도에 달려있을 것이다. 김채현은 그렇게 예상했었는데…….
‘아닌가?’
리카의 티저를 보니 긴가민가하다.
청춘 로맨스 드라마의 장면을 짜깁기한 것 같은 게 튀어나오니, 인민이들도 혼란에 빠져 있었다.
컨셉이 사랑인 것 같긴 한데…… 도대체 어떤 곡이 나올지 감도 못 잡겠다.
‘하이라이트 멜로디만 계속 반복되고. 아니, 되게 좋긴 한데…….’
되게 좋다?
아니, 너무 좋다.
너무 좋아서 공부에 집중하지 못할 지경이다.
김채현은 그 멜로디만 따로 잘라서 계속 반복 재생하여 들을 정도였다.
“우리 소련이들…….”
딱 5년만 기다려.
수능 조지고 대학 학점 조지고 멋들어진 스펙을 갖추고 나서 꼭 가로 엔터에 입사할게.
“꼭 꽃길만 걷자…….”
특히, 이번 앨범은 백설하가 프로듀싱을 맡았다고 한다.
인민이들은 벌써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설령 곡이 안 좋더라도, 이미 흐린 귀와 흐린 눈을 장착하고 용비어천가만 읊을 준비를 마친 기세였다.
그렇게까지 죽 쑬 리는 없지만, 그래도다.
‘반드시, 꼭, 설하와 소녀연맹을 위해서…….’
인민들은 준비를 갖추고 숨을 죽였다.
결전의 그 날을 위해서.
그 날…….
‘케이어스도 비슷한 시기에 컴백할 거 같으니까.’
* * *
리카의 티저를 찍은 건 성필이었다.
조정훈은 진짜 아마추어가 찍은 것 같은 풋풋함을 원했기에, 전문가가 아닌 이에게 촬영을 맡기고자 했었다.
그게 바로 성필이었고, 그 일로 성필은 어느 방면으로 아직까지 고통을 받았다.
예를 들어 지금.
“뭐 마셔?”
휴게실에서 물을 마시던 성필의 곁으로 리카가 훅 다가와 말했다.
리카가 반말하자 성필은 깜짝 놀랐다.
리카는 그런 성필이 재밌어서 못 견디겠단 듯이, 그녀의 눈꼬리가 대책 없이 기쁨으로 휘어졌다.
“야 리카…….”
“박 이사님한테 반말한 거 아니에요! 뮤비 티저 대사 읊은 거예요!”
성필이 노려보자 리카가 인상을 쓰며 외쳤다.
“보지 마!”
“…….”
“이것도 대사예요!”
리카는 성필에게 반말 쓰기를 즐겼다.
성필은 그게 탐탁지 않았다.
띠동갑의 아이에게 반말을 듣는단 게 기분이 나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가 반말을 쓰니, 50m 밖에서 서로를 보고 있던 것만 같은 관계가 갑자기 10m 안의 거리로 줄어든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멀리서 손을 흔들기만 하던 그녀가 눈 깜빡할 사이, 표정마저 관찰할 수 있는 거리로 들어온 느낌.
성필은 그것을 견디기 힘들었다.
이러다가 10m보다 안으로 들어올까 봐.
“네, 알겠어요.”
리카는 성필이 난처한 기색을 보일 때마다 더욱 좋아했으므로, 성필은 장난으로 받아쳐 주었다.
“이해했어요.”
“……에?”
효과가 즉시 드러났다.
성필이 존댓말을 쓰자 리카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리카 씨는 저한테 반말 쓰시고, 저는 존댓말 쓸게요.”
“손나(그런)! 하, 하지 마세요! 거리감 느껴져요!”
“리카 씨가 한 발자국 다가오시면 제가 두 발자국 물러날 수밖에요.”
“그 노래 가사에서 물러난다는 것도 결국엔 다가가기 위함인 건 아시나요! 사용법이 틀렸어요! 앗, 아니면 더 친해질 기회를 노린단 뜻인가요!”
“아니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히도이(너무해)! 장난 좀 쳤다고 이렇게 벽 칠 것까진 없잖아요! 정말 상처받겠어요!”
리카가 성필의 옷자락을 붙잡고 발을 끌었지만, 성필은 우직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리카가 사준 입생로랑 티셔츠가 주우욱 늘어났다.
“어른답지 못해요!”
“뉘에 뉘에 져는 어린애임뉘다아.”
“자꾸 이러시면 사장님한테 이를 거예요!”
“박 이사님!”
1층 홀까지 리카의 루돌프가 되어 그녀를 끈 성필. 그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2층 난간을 보았다.
홍보팀 강지혜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지혜 씨?”
“케, 케이…….”
그녀가 침을 꼴깍 삼킨 후, 크게 외쳤다.
“케이어스 SNS에 앨범 사전 예약 예고 게시글 떴어요!”
성필의 머리가 텅 비었다.
말 그대로 텅텅 비어서, 생각이 불가능했다.
그 순간, 비닐봉지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성필은 문 쪽을 바라보았다.
백설하도 성필처럼 넋 놓은 표정이었다.
“예……?”
‘애플 크러쉬’의 티저가 올라가고, 소녀연맹의 컴백이 확실시된 현재.
케이어스 또한 컴백을 예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