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화
JJH로부터 부정적인 답이 돌아왔다.
‘사이클롭스 워크스’는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있기에, 가로 엔터의 요청을 들어줄 수 없단 것이었다.
[다른 곳을 알아보시는 게…….]
하지만 성필은 쉽게 포기할 인물이 아니었다.
사이클롭스의 저력을 알고 있는, 그리고 회사 내부 사정을 아는 성필이니 포기할 리가 없었다.
‘다른 곳은 안 돼.’
조정훈의 말마따나, 다른 제작사들은 이미 스케줄이 풀로 들어찼을 것이다.
설득하든 돈으로 그들의 시간을 사든, 가로 엔터의 예상보다 훨씬 긴 기간이 필요할 게 틀림없다.
다른 제작사와 접촉하며 시간을 낭비할 순 없었다.
그들의 역량을 파악하고 스케줄을 조율하다 보면, 뮤비 제작 기한은 필연적으로 늘어날 것이었다.
하지만 사이클롭스 워크스는 다르다.
‘이미 그 회사의 능력은 알아. 그리고, 지루한 협상 과정 없이도 사이클롭스에게 프로젝트를 맡길 수 있어.’
쉽게 표현하자면, 사이클롭스 워크스는 다른 제작사들보다 방어력이 낮다. 성필은 그들의 약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있으니까.
즉 공략이 쉽단 말이었다.
‘문제는 사이클롭스 워크스를 공략할 무기를 구하는 거지.’
그 무기란 다름 아닌 돈이었다.
“조 감독님,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예?]
“사이클롭스가 저희를 도와준다 치고, 뮤직비디오 비주얼을 구상해봐요.”
[도와준다 치고……?]
사이클롭스를 공략할 무기는 가로 엔터의 창고에 잠들어 있다. 그리고 그 창고를 지키는 건 한구인이었다.
성필은 앞으로, 고작 10초에 투자하기엔 터무니없다 싶을 만큼 많은 돈을 쓸 생각이었다.
지금 시점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최선의 퀄리티를 위하여.
‘한 이사님을 설득하려면 일단 아군이 필요해.’
그 아군은, 소녀연맹의 뮤비를 맡은 조정훈이다.
* * *
‘애플 크러쉬’의 스토리보드가 확정됐다.
JJH와의 회의엔 이례적으로 한구인이 참석했다.
한구인은 ‘사이클롭스 워크스’에 지불하기로 예정된 금액을 본 후 뒷목을 잡고 실신하기 직전, 권아인 경리의 도움으로 겨우 정신을 차린 와중이었다.
고작 10초에 들인다기엔 과도한 금액이다.
웬만한 금액이면 납득하겠지만, 이건 상식을 넘어서 있다.
“조 감독님…….”
우울한 어투의 한구인이 입을 떼자, 회의실의 전원이 그에게 집중했다.
한구인은 가로 엔터의 창고지기다.
가로 엔터의 창고를 열 수 있는 권한은 오로지 그에게만 있다.
일반적으로 그는 프로듀싱 파트의 의견을 존중하는 편이지만, 이번엔 너무 과했다.
“뮤비에 사용되는 단 10초의 장면. 그곳에 억을 투자할 가치가 있습니까?”
성필이 ‘사이클롭스 워크스’에 지불하기로 한 금액은 억 단위였다.
“이 돈이면 빠듯하게 뮤비 한 편을 찍을 수도 있겠습니다.”
가로 엔터는 흑자로 전환했다.
드디어 자본을 움직이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렇기에 갑작스레 돈을 거머쥔 이들에게 발생하는 보편적인 현상, 돈지랄을 경계해야만 했다.
한구인은 오늘 이 자리에 악마의 변호사로서 왔다. 그는 이 일에 문외한이다. 하지만 문외한조차 설득할 수 없는 논리를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10초를 위해 소모되는 억 단위의 돈은, 그저 ‘믿는다’는 말로 퉁 칠 수가 없다.
“한 이사님.”
조정훈이 말했다.
그는 가로 엔터의 프로듀싱 파트와의 협의를 마친 후 이 자리에 왔다.
그리고 사이클롭스 워크스의 손에서 탄생할 10초의 애니메이션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 또한 한구인처럼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이 업계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제시간에 기획한 일은 제시간에 끝낼 수 있다. 제시간에 기획되지 못한 일은 2배의 돈을 써서 제시간에 끝낼 수 있다, 고요.”
“그 말씀은?”
“뮤비에 애니메이션을 쓴다는 발상 자체가 너무 늦었습니다. 적당한 제작사를 찾거나 기다리기엔, 컴백 시기에 맞출 수 없어요.”
그래서 훨씬 더 많은 돈을 투입할 것이다.
한구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오직 더 빨리 끝내기 위해서 말입니까?”
“아니요! 사이클롭스 워크스의 기술력은 한국에서 최고 수준이에요! 만약 그분들이 이 일을 맡아주신다면, 그분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도 잠시 접고 저희 일을 맡아주시는 겁니다! 그러니 그만큼 수고비를 지불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이게 상식적인 금액이죠.”
“수고비…….”
“애초에 지금 일을 맡아주시는 것 자체가 기적이에요. 저흰 기적을 이루려는 거고요.”
“꼭 이곳이어야 합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면 ‘꼭’은 아닙니다만…….”
성필은 조정훈이 한 발자국 물러난 것 같아 긴장했다. 이대로 한구인에게 밀리기 시작하면 정당성을 잃을 것이다.
다른 곳과 교차 검토를 신중히 하자.
최대한 비용을 줄일 수 있는 곳을 찾자.
현재의 결단은 너무 성급하다.
이런 상식적인 의견이 튀어나오면, 일단 가로 엔터 외부 인사인 조정훈은 말이 궁해진다.
그럼 다음은 성필과 한구인의 싸움으로 넘어갈 것이다.
‘그때가 되면…….’
성필은 귀여움 천재 백설하를 쓸 수밖에 없다. 그녀에게 한구인을 설득(애원)하도록 해야만 한다.
한구인, 오랫동안 함께 꿈을 향해 달려온 동료에게 그토록 폭력적인 방법을 쓰고 싶진 않았다.
“‘꼭’이 아니라면…….”
한구인이 반박을 이어 나가려던 때.
“소련이들이 최고가 아니어도 된다면, 예, 다른 곳으로 바꿔도 됩니다. 더 경제적인 곳으로요.”
소녀연맹의 이야기가 테이블 위로 올라오자 한구인이 멈칫했다.
조정훈이 기세를 이어갔다.
“한 이사님. 가로 엔터의 목표가 뭡니까? 단기적으로 돈을 잃지 않는 겁니까? 아니면, 장기적으로 더 많은 돈을 버는 겁니까?”
조정훈에게선 어떤 아우라마저 느껴졌다.
오랫동안 한 예술에 투신하여 그 바닥까지 맛본 이의 통찰이, 그의 혀에서 나오는 공기 하나하나마다 배어 있었다.
“한 이사님, 경제적인 가격을 치르면 경제적인 것밖에 얻지 못해요. 그저 그런 가격의 물건은 그저 그런 가치밖에 없어요. 억 단위의 돈이요?”
조정훈이 의자를 거칠게 끌며 일어났다.
그의 눈동자가 불타올랐다.
“단 1원도 깎지 말고 그대로 지불하세요! 한 이사님이 아깝다고 생각하실 만큼 커다란 돈, 그만큼의 대가가 그대로 돌아올 겁니다! 이건 그냥 허황된 말이 아닙니다.”
어느 세계적인 포토그래퍼가 고객에게 시간당 수백만 원의 돈을 요구했다.
당연히 고객인 모델은 그것을 거부했다.
한 시간 사진을 찍어주는 대가로 수백만 원이라니. 너무 과하지 않나? 아니면 자신을 놀리는 건가?
그에 포토그래퍼가 답했다.
‘평범한 가격의 평범한 포토그래퍼에게 가세요. 그럼 평범한 사진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과하다고요? 그렇죠. 하지만 당신이 저에게 이 돈을 낸다면…….’
“가로 엔터는 사이클롭스에 준 돈이 아까워서라도 더 세세하고 깐깐하게 뮤비 제작에 간섭하고, 도움을 주고, 관여할 거예요. 단 10초, 그 10초는 그냥 10초가 아녜요!”
가로 엔터의 모든 역량이 동원된, 어떻게든 억 단위에 상응하는 대가를 얻어내기 위한 투쟁이 집약된 10초일 것이다.
그 포토그래퍼는 세계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당 수백만 원의 비용을 내걸자 다들 코웃음 쳤다.
지금은 다르다.
모두 그의 렌즈 앞에 서고 싶어 안달이다.
그의 말마따나, ‘돈이 아까워서라도 더 열심히 하며, 더욱 창조적인 결과를 낸다’는 건 사실이었다.
“가격이 과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과함만큼 더 얻어낼 작정으로 달려들어야죠! 과한 가격은 기대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냅니다! 가로 엔터가, 그리고.”
조정훈이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제가 억 이상의 결과물을 얻어내게 만들겠습니다!”
회의실이 침묵에 잠겼다. 다들 조정훈의 기세에 압도되어 입을 떼지 못했다. 그의 어디에 이런 열정과 힘이 숨겨져 있나 궁금할 지경이었다.
마치 유명 동기부여 강의에나 나올 법한 아우라가 그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확실히.”
한구인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은행도, 적당히 돈을 빌려준 기업에겐 관심이 없지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돈을 빌려준 기업에겐 촉각을 곤두세우는 법입니다. 은행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기업을 서포트하게 되죠. 그렇군요, 최고를 얻으려면 최고가를 제시하라…….”
한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가로 엔터의 목적은 단기적으로 돈을 잃지 않는 게 아니죠.”
장기적으로 누구도 넘보지 못할 황금의 탑을 쌓아 올리는 것이었다.
대형 기획사들처럼 스타 시스템의 노하우를 축적하여,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종국에는 추월하는 기업이 되는 게 목표였다.
업계를 선도하는 대형 기획사들의 힘은 수익성이 아닌 문화적 영향력에서 나온다.
KS 엔터가 순익이 비슷한 다른 기업들보다 훨씬 높은 주가와 가치를 유지하는 것도, 그러한 영향력 때문이다. 기업의 목적인 생존을 넘어, 기업의 미덕인 도전과 혁신을 체화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한구인이 말했다.
“가로 엔터도 성장한 만큼 예술성에 재투자할 필요가 있겠죠.”
허락이 떨어졌다.
성필과 조정훈이 기쁨에 서로를 얼싸안았다.
* * *
‘사이클롭스 워크스’의 대표 송구경은 집무실에 앉아 머리를 쥐어 싸맸다.
‘애니메이션을 완성하기 전에 부도가 나겠어…….’
이전에 만들었던 대규모 프로젝트 애니메이션은 손익분기점의 10%도 채우지 못하고 상영관에서 내려왔다.
‘한국의 디즈니’라고까지 홍보하며, 투자금을 여기저기서 다 끌어다 쓴 것치곤 어처구니없는 결말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다시 일어서야 해.’
직원들을 닦달하며 어떻게든 다음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극장판을 제작하고 있다.
하지만 전망이 좋지 않았다.
돈은 떨어져 가는데 투자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대로면 직원들을 하나둘씩 해고하다가, 월급이 밀리고, 결국엔 완성하지도 못하고 회사가 해체될 판국이었다.
이젠 투자자는커녕 변두리 은행조차 송구경에게 돈을 빌려주길 꺼렸다.
‘노하우와 기술력을 자랑하면 뭐 하냐고.’
능력자가 반드시 성공하는 건 아니다.
능력이 있어도 실패할 수 있고, 실패한 사람은 다음 기회를 얻기 훨씬 어려워진다.
송구경이 혼신의 힘을 들여 육성한 인재풀과 노하우는, 사이클롭스 워크스가 망한 후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 여기저기로 흩어질 것이었다.
차라리 업계 사람들은 그걸 바랄지도 모르겠다.
‘이전 프로젝트 시작하기 전에 주변에서 그랬었지.’
한국은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봤자 아무도 안 본다고.
프랜차이즈 캐릭터의 파워가 없고선 손익분기점 채우는 것도 힘드리라고.
송구경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사이클롭스 워크스의 기술력이 험난한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에도 통하리라 자신했었다.
사람들이 본 적 없는 미려한 그래픽. 그것만으로도 화제가 되리라 확신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지 말라는 것엔 이유가 있었다.
‘그래도 포기 안 해.’
애니메이션은 그의 꿈이었으니까.
‘적어도 1/3까진 완성할 돈이 필요해. 거기까지만 완성되면, 그걸 미끼로 투자자를 더 끌어모을 수도 있을 텐데…….’
송구경은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에 탈모까지 와버렸다. 그런 그에게 가로 엔터의 요청은 또 다른 스트레스의 원인이 됐다.
“우리한테 그럴 시간이 어딨어. 거절해. 이거 완성 못 하면, 다른 일을 아무리 받아도 결국엔 망해.”
“하지만…….”
“돈 모자란다고 자잘한 거 다 받아서 돈 찔끔찔끔 모으면, 그게 하청이지 제대로 된 애니메이션 회사야?”
그렇게 거절했더랬다.
그런데 오늘은 직접 가로 엔터의 인물이 찾아왔다. 그는 자신을 박성필 이사라고 소개했다.
나름 이사급이 왔는데 적당히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다크서클이 코끝에 닿은 정도로 내려온 팀장급 인물에게 정중히 성필을 돌려보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결국 대표 송구경이 직접 나서야 했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그래요, 안녕하세요.”
송구경은 짜증이 다 났다. 안 그래도 부족한 시간을 이 인간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니 속이 다 뒤틀렸다.
스트레스와 미래에 대한 불안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법이다.
“죄송합니다만, 저희는…….”
송구경은 이성적인 인간이다. 짜증이 치밀어도 그것을 외부로 표출하지 않는 데 익숙하다.
조목조목 거절의 이유를 댔다.
“그러니, 뮤직비디오 건은 받아들일 수 없겠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성필은 송구경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지 다짜고짜 계약서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송구경은 그것을 흘끔 내려다보았다. 천박하게도, 가장 위에는 계약금이 적혀 있었다.
숫자를 볼 필요도 없었다.
송구경은 더 이상의 무례를 참지 않았다.
“저희를…….”
한국 애니메이션계의 총아라 불리던 우리를!
“돈으로 사려는 겁니까! 저희를 모욕하실 생각입니까!”
“저, 최소한 확인이라도 하시고…….”
“이 업계에 문외한인 분이 제시한 금액이야 볼 필요도 없습니다! 저희가 계속 정중히 거절드리고 있는데도 막무가내이신 모습을 보니 딱 알겠습니다 그……!”
계약서를 붙잡고 보란 듯이 흔들던 송구경의 눈이 번쩍 뜨였다.
계약금 뒤에 찍힌 숫자를 봤기 때문이었다.
“그게, 저희가 본 사이클롭스 워크스의 가치입니다.”
성필은 백 마디 말보다 정성이 듬뿍 담긴 돈을 보여주는 편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전생에서도 통했지.’
김태훈과 석세스 엔터는 애니메이션에는 문외한이다. 그런 인간들에게 회사를 넘기는 게, 송구경 입장에선 달가울 리 없었다.
거절하는 게 당연했다.
만약 그들이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당연히 거절했을 터였다.
‘그런데 송 대표님은 받아들이셨었어.’
오직 돈 때문이었다.
돈. 세상만사 모든 행복과 문제의 근원.
비록 성필이 내건 돈은 그가 제작 중인 애니메이션을 완성하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위기를 넘길 정도는 될 것이다.
업무량에 비해 과하리만치 막대한 돈.
하지만 사이클롭스 워크스가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일시 중단하는 대가로는 적정한 돈.
‘석세스 엔터가 손을 뻗치지 않은 이상, 이 시점에선 가로 엔터가 유일한 동아줄이다.’
실제로 그러했다.
그가 성필의 손을 맞잡았다.
“10초요? 최고의 퀄리티로 뽑아드리겠습니다!”
‘모욕하는 거냐’고 꾸짖기엔, 너무나 많은 돈이었다.
* * *
소녀연맹의 다음 앨범이 성공할 수 있을까?
판을 까보기 전까진 아무도 모르지만, 그 전에 대략적으로나마 감을 잡아볼 수 있는 이벤트가 존재한다.
레코딩이다.
내일 소녀연맹은 ‘인트로: 러브’의 타이틀곡인 ‘애플 크러쉬’를 녹음하게 된다.
드디어 백설하가 ‘이 정도면 됐다’고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지금 수준이면 멤버들의 역량을 최대치로 발휘할 수 있겠단 확신이 들었다.
최대치라 해도, 최고가 아닌 최선일 뿐이지만 말이다.
‘아직은 이 정도로 괜찮아.’
소녀연맹 전원에게 ‘븨이에스’ 수준의 보컬 실력을 요구하진 않는다. 그건 너무나 가혹한 기준이며, 달성할 수도 없는 목표이다.
소녀연맹에게 필요한 건 딱 ‘애플 크러쉬’를 구현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다.
‘이대로…….’
내일 레코딩에 들어간다.
백설하는 숙소 베란다 난간에 팔을 걸치고 괜스레 달을 바라보았다.
열린 문으로는 거실에서 열띠게 논쟁하는 동생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맞춰주는 순간부터 사랑이 아니지. 사랑은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거잖아.”
조아라가 그럴듯한 의견을 내놓았다.
소녀연맹은 앨범 컨셉이 정해진 순간부터 여러 번 사랑에 관한 토론을 거듭해 왔다. 이건 성필의 지시 중 하나였다.
‘이번에 표현해야 할 건 너희들의 사랑이야. 사랑이 뭔지 정확하게 알고, 그걸 목소리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해.’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성필은 그저 듣기 좋게 투명한 보컬을 구사하길 바라지 않았다. 멤버들의 개성이 확실하게 곡에서 드러나길 바랐다.
그 의견엔 백설하는 물론 멤버들도 동의했다.
여태까지 걸그룹은 대중성이 지상 과제였기에, 멤버들의 실력과 개성을 드러내는 곡보다는 안정성이 검증된 곡을 택해왔다.
댄스와 보컬 실력을 갈고닦아 데뷔로 뽑히면, 그녀들이 펼칠 수 있는 거라곤 개성 없이 일치된 목소리와 간단하고 단순한 안무뿐이었다.
‘이번엔 너희들을 전부 드러내는 거야.’
소녀연맹의 아이덴티티를 만들었던 세계관을 넘어, 그녀들 자신의 퍼스널리티를 표현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사랑이 무엇인지 고민하여, 그것을 목소리에 담을 줄 알아야 했다.
자신만의 사랑을 표현하는 게 그녀들의 과제인 것이다.
“지가우(틀려)!”
리카가 조아라에게 반발했다.
“한 이사님이 ‘사랑은 상대의 비위를 맞춰주는 거’라고 했어!”
“뭔데, 그게 무슨 사랑이야.”
조아라가 어이없단 듯 말하자, 리카는 기다렸단 듯 후후 웃었다.
언뜻 가볍고 이상하게 보이던 의견은 순식간에 철학적으로 뻗어나갔다.
“사랑이란 무엇이냐! 프로이트는 인간의 나르시시즘을 일부 잘라내어 상대에게 주는 거라고 했어! 인간은 모두 자신을 사랑해! 그 자기애를 포기하면서 상대에게 굽히는 게 사랑이야! 어떻게 한없이 빛나는 상대 앞에서 고개를 뻣뻣이 들겠어! 그러니까!”
리카가 검지로 조아라를 가리켰다.
“아라쨩이 말하는 건 사랑이 아니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것’뿐이야! 아니면 ‘사랑한다고 말하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거나! 진정한 사랑은 내 일부를 포기할 수 있는 거야!”
“아.”
장하양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어릴 때 봤던 만화에서 리카가 방금 한 말이랑 비슷한 설정이 있었어. 그, 마녀나 마법사들이 나오는 거였는데. 결혼하면 서로의 하트를 바꿔서 가슴에 넣어둬.”
“로맨틱하네요! 심장을 바꾼다뇨!”
“그래서 상대가 죽으면, 상대가 죽는 게 아니라 내가 죽는 게 돼.”
“……로, 로맨틱?”
“그리고 상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되면, 하트의 불빛이 꺼지면서 죽는 거야.”
“설정이 너무 씁쓸한데요?! 아이들이 보는 만화 맞나요?! 그러면 상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기미가 보이면 어떡하나요!”
장하양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가볍게 말했다.
“아하하, 먼저 일부러 죽어야지. 상대가 죽도록.”
“에에엑?!”
“사랑하지 않을 기미가 보인단 건, 다른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단 거지? 그럴 바에야 차라리 없는 게 낫지 않을까. 그리고 그 사람이 모두에게 잊힐 즈음, 내 기억 속에만 살아있는 그를 떠올리며 추억하는 거야. 드디어 우리 둘만 남았구나…….”
“무셔…….”
리카가 오들오들 떨면서 조아라에게 안겼다.
장하양이 의외란 듯 물었다.
“리카가 말한 ‘나를 잘라서 상대에게 주는 사랑’이란 건 이런 의미 아니야?”
“절대 아니에요!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구요!”
“아하하, 나도 알아. 농담이야.”
“휴우, 그렇죠?”
“당연하지.”
리카와 장하양이 서로를 보면서 해맑게 웃었다.
“그래도.”
조아라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했다.
“상대한테 맞춰주기 시작하면 끝이 없잖아.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건데. 피곤하고 괴롭지 않나. 오래 못 갈 거 같은데.”
“어, 그거 무슨 느낌인지 알겠어.”
신아름이 공감했다.
“상대가 ‘너는 이렇지?’라면서 기대하는 건 좀 무섭잖아. 멋대로 내 모습을 그리기만 하는 게 소름 끼치기도 하고.”
“내 말이랑 핀트가 좀 안 맞는데. 뭐…… 원치 않게 행동할 수밖에 없단 건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에에, 그럼 아름이는 애인이…… 예를 들어…….”
리카가 ‘아!’하며 손뼉을 쳤다.
“애인이 여사친이 많으면, 그건 원래 그런 거니까 용서해줄 거야?”
“아니? 절대 아닌데?”
“앞뒤가 달라!”
“그러니까 처음부터 잘 관찰하고 사귀어야지.”
“너무 신중해! 사랑은 기다려주지 않는다구!”
“야 신아름, 근데 넌 이상형이 뭐냐?”
“이상형? 별거 없어.”
“오오.”
조아라는 어떤 아이돌이나 배우의 이름이 나올지 궁금했다.
“으음…… 먼 외국에 있어도 내 전화 한 번에 달려와 줄 수 있는 사람?”
“……달려와서, 뭐 하는데?”
“걍 나랑 얘기 좀 하는 거지.”
“외로워서 외국에 있는 애인을 불러? 넌 진짜 못돼 처먹었다.”
신아름은 딱히 반론하지 않고 픽 웃었다.
“상대가 그렇게 해주면, 나는 그만큼 상대를 더 사랑해주는 거지. 그게 다야.”
“그게 훨씬 못됐지.”
“뭐?”
“사랑이 등가교환이냐? 해준 만큼 더 해주게?”
“어쭈, 꼭 해본 사람처럼 말하네?”
“한 이사님이…….”
장하양이 끼어들었다.
“자본주의는 연애도 교환관계로 만들었다고 하셨어. 어쩌면 자유연애 전, 우리의 조상님들이 운명적 사랑을 더 믿으셨을 거라고. 가문의 결합이지만, 그건 두 사람이 벗어날 수 없는 운명적인 힘이 작용했기에 현재의 사랑보다 더 운명적이었을 거라고.”
“흠…… 내가 선택하지 못한 상대…… 뽑기네요?”
조아라는 재밌는 게 생각났단 듯 허탈하게 웃었다.
“막 결혼식 날 첨 봤는데 아저씨 같은 사람 나오고 그럼 웃기겠다. 와, 생각해보니까 미쳤는데? 그렇게 만나면 진짜 떨어지지도 못하고 평생 살아야 되잖아.”
“박 이사님이면 A랭크 아닐까?”
“진짜 뽑기처럼 말하네. A랭크가 제일 높아?”
“SSS랭크까지 있어!”
“뭔데.”
“얘들아.”
장하양이 둘의 대화를 멈추었다.
“우리 사람 급 매기는 얘기는 하지 말자.”
리카와 조아라는 뒤늦게 자신들의 실수를 알아차리고 미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방금의 대화는 품평과 다르지 않았다.
“쌤은요?”
신아름이 분위기를 환기하려, 베란다에 멍하니 선 백설하를 불렀다.
백설하가 돌아보았다.
“응?”
“쌤이 생각하는 사랑은 뭐예요?”
“기다리는 거.”
“……네?”
백설하가 수줍게 웃었다.
“하양이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란 소설 추천해줘서 읽었었거든. 거기서 마음에 닿는 문장이 있었어서.”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난 사랑을 기다리는 거라고 생각해. 기다림도 사랑할 수 있는 거. 아, 이렇게 말하니까 ‘어린왕자’의 여우가 한 말이랑도 비슷하다.”
“으이익!”
리카는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겠는지 자신의 얼굴을 마구마구 문질렀다.
“쌤 몸속에 10대 소녀의 영혼이 들어가 있어! 쌤을 돌려줘 바케모노(괴물)!”
“헤헤, 좀 오글거렸나?”
“포브스 선정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25세.”
“어?!”
“쌤, 이제라도 ‘애플 크러쉬’ 버리고 청순 계열 곡으로 바꿀까요? 쌤 진짜 기막히게 잘 표현할 거 같아요.”
“아, 아름아 왜 그래애…….”
“쌤 바깥 구경 그만하시고 들어오세요!”
그리 말한 리카는 토론이 끝내고 하려 했던 보드게임 박스를 중앙에 놓았다.
토론을 시작하기 전에도, 내일 레코딩의 긴장을 풀기 위해 반드시 보드게임을 해야 한다고 어찌나 성화던지.
백설하는 미소 지으며 거실로 한 걸음 내디뎠다. 하지만 그 전에, 그녀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달이 있었다.
‘달…….’
백설하가 달을 명확하게 인식한 건 어릴 적, 늦게까지 놀이터에서 놀 때였다.
어느 순간 하늘의 달을 보게 됐다.
어느 쪽으로 걷던 달은 백설하를 따라왔다. 달려도, 멈춰도, 높이 올라가도, 고개를 숙여도 달은 항상 같은 곳에 있었다.
쫓아오는 것 같아 무섭기도 했고, 자신을 지켜주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달.
그건 말없이 백설하의 머리를 비추며 기다리고 있다. 자신을 봐주길 기다리며 언제까지나.
‘사랑은…….’
기다림.
그건 아마 달과 비슷한 형태일 것이다.
언제나 백설하를 지켜보는 사람.
그게 미래에 백설하가 사랑하게 될 사람일 것이고, 백설하는 그 사람을 보자마자 달을 떠올릴 게 틀림없다.
‘나의 사랑은 기다림이구나. 기다리는 사람의 감정을 목소리에 담아야 하는 거네.’
백설하는 상념을 마치고 멤버들 사이에 끼어들어 앉았다.
“이 게임은 정말 재밌어요!”
리카가 보드게임 박스를 열었다.
세 장의 사진이 보였다. 절대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인 사진이었다.
성필, 한구인, 홍규헌의 바디 프로필이었다.
“……?”
“……?”
“……?”
“……?”
“……에.”
리카가 박스를 조심스레 닫았다.
“잘못 가져왔네요!”
“잡아!”
신아름과 조아라가 리카를 구속했다.
장하양이 보드게임 박스를 빼앗았다.
백설하가 리카를 심문했다.
“왜 이런 걸 가지고 있어?! 너, 너, 대체 무슨 생각이야! 후, 훔쳤어? 훔친 거지?! 사장님이랑 이사님들이 이걸 순순히 줄 리가 없잖아! 빨리 자백해!”
“아타시(나)는 무죄야아아아아앗!”
* * *
성필은 회사 건물을 나서기 전 몇 번이나 심호흡했다.
레코딩은 항상 떨리는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훨씬 컸다.
백설하가 제작 총괄한 ‘애플 크러쉬’의 녹음은 과연 어떤 형태로 이루어질까. 기대감과 불안이 반반씩 섞여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불안과 기대에만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그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문 앞에 뭐 있었어요?”
“아니.”
성필은 정지음의 어깨를 격려하듯 두드리며 그와 함께 나아갔다.
그들의 앞에는 손혜빈, A&R팀 이재호, 그리고 소녀연맹 멤버들이 있었다.
성필은 긴장으로 떨리는 목소리를 뱉어냈다. 그럴 생각이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성필은 그것을 다른 이들이 못 느끼길 바랐다. 바라며, 말했다.
“가자.”
‘애플 크러쉬’의 레코딩.
‘우리들의 프로듀싱’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보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