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26화 (426/760)

426화

김민주는 신아름이 들어오는 것을 거울로 봤음에도, 일부러 3초 정도 춤을 더 추었다.

마치 자신이 일에 굉장히 열중하고 있단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김민주는 한 박자 늦게 음악을 끄고 신아름에게로 몸을 돌렸다.

“어, 왔냐.”

그리고 또 한 박자 늦게, 김민주의 눈이 신아름의 옆으로 향했다.

성필이 빙긋 미소 지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민주 씨 안녕하세요.”

“넵, 박 이사님 안녕하세요!”

신아름에게 인사할 때와 전혀 딴판인 텐션이었다.

하지만 성필은 김민주가 신아름에게 던졌던 무미건조한 인사가, 자신이 받은 활기찬 인사보다 훨씬 친근한 것이란 사실을 알았다.

“받아, 선물.”

신아름이 다짜고짜 김민주에게 선물을 안겼다.

“어, 뭐, 고맙다…….”

대수롭지 않단 듯 답했지만, 김민주는 아까부터 꽤 흥분하고 있었다.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SNS로 신아름에게 연락해서 생일이란 사실을 알렸다.

신아름이 그저 그런 인사치레나 할 줄 알았건만, 설마 직접 선물을 주러 오다니. 그녀가 들어오는 순간부터, 그녀가 품에 안은 쇼핑백으로부터 눈을 돌리지 못했었다.

하지만 기대하고 있단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평소보다 더 퉁명스레 대했다.

“넌 선물 받으면 바로 포장지 뜯어봐?”

김민주가 쇼핑백 안을 흘끔흘끔 보기에 신아름이 놀리듯 말했다.

김민주는 자신이 너무 들뜬 티를 보였나 싶어서, 괜히 털털한 모습을 가장하여 쇼핑백을 한 손에 느슨하게 들었다.

“보는 것도 안 되냐?”

“아니, 난 바로 뜯는 편이라서 물어봤어.”

“…….”

김민주는 왠지 모르게 어색해서 운동화 끝으로 바닥을 톡톡 찼다.

‘뭐 마실 거라도 줄까’라고 물어보려던 찰나.

“그럼 나 간다?”

신아름이 아무런 미련도 없단 듯 그리 말했다.

“아름아 정 없게 왜 그래.”

다행히 김민주가 당황한 티를 내기 전, 성필이 신아름을 말렸다.

“부끄러운 건 알겠는데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얘기라도 좀 해. 난 밖에 가 있을게.”

“그래도 돼요? 팀장님 얘 보려고 왔잖아요.”

“아니라니까 왜 그래…….”

“음료라도 드시고 가세요.”

재빨리 분위기를 캐치한 김민주가 구석의 미니 냉장고로 달려가 음료를 꺼내왔다.

정말 김민주답다고 해야 할까, 나온 건 스포츠 음료였다.

세 사람은 벽면에 나란히 놓인 의자에 쪼르르 앉았다.

신아름은 스포츠 음료의 은근한 단맛과 쓴맛을 느끼며 이마를 찌푸렸다.

“너 여기 이것만 둬? 이거 마시면 입 텁텁하고 뒷맛 안 좋던데.”

“나도 맛있어서 먹는 거 아냐. 수분 섭취가 잘되니까 먹는 거지.”

김민주가 육상을 할 때도 자주 먹었던 것이다. 그녀가 토막 상식을 자랑했다.

“이거 원래 미식축구 때문에 만들어진 거 알아? 선수들은 경기를 뛰면 수분 부족 때문에, 경기 후반엔 아무리 물을 많이 마셔도 체력이 빨리 고갈되거든. 그래서 이걸 개발했어. 이걸 개발한 팀이 그해 우승했고.”

“아, 그래서 이거 마시면 자꾸 화장실 가고 싶은 건가? 흡수가 잘돼서?”

김민주가 어처구니없단 시선을 보냈다.

옆에 남자가 있는데 어떻게 그런 얘기를 하냐는 뜻이었다.

하지만 신아름은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왜 안 좋아졌는지 알 수 없었다. 대신 본인이 하고픈 말을 계속 이었다.

“여기 회사에서 빌려준 거야? 디게 넓네.”

“아니, 내 돈으로 빌렸어.”

“아, 너희도 정산받았구나.”

“뭐? 너흰 정산받았어?”

“……너흰 안 받았어? 왜?”

신아름은 KS 엔터가 케이어스의 돈을 떼어먹었나 의심했다.

당연히 케이어스가 소녀연맹보다 돈을 더 잘 벌 텐데, 어떻게 아직도 정산을 못 받았지?

“아니, 내가 할 말인데. 너희 정산 엄청 빠르네. 우리 선배들도 그렇고, 보통 데뷔 3년이 넘어가면 정산 시작한다던데?”

“뭐어?”

신아름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가서 성필을 보았다. 성필이 답을 주었다.

“대형 기획사는 보통 그래. 후속 그룹이 일반적으로 3년마다 나오는 것도 같은 이유야. 먼저 데뷔한 그룹이 흑자로 전환될 시기에, 다시 적자를 보는 후속 그룹을 내는 거지. 흑자와 적자가 교차하도록 로테이션을 돌리는 시스템이야.”

“3년이…… 보통이라고요?”

“뭐, 케이어스분들 뮤비나 음방 무대, 의상만 봐도 알 수 있잖아.”

보통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보고 넘기지만, 뮤비를 자세히 분석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만큼 돈이 들어갔단 사실을 알 수 있다.

대형 기획사 아이돌의 뮤비에 쓰이는 모든 소품과 세트는 정교하기 그지없으며, 규모 또한 크다.

소녀연맹이 뮤비에 들인 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을 게 분명하다.

거기에 의상이나 음방 무대는 또 어떤가? 외에도 프로듀싱의 모든 파트에, 가로 엔터를 아득히 넘어서는 돈을 들인다.

정산이 소녀연맹보다 느린 게 당연하다.

‘우리 애들이 빨리 흑자로 전환되기도 했지만.’

신아름은 케이어스 정산 관련 의문은 해결했지만, 또 다른 의문이 생겼다.

“네가 무슨 돈으로 여길 빌려?”

“정확히는 엄마 돈이지.”

“뭐 하시는데?”

“걍 샌드위치랑 커피 파셔.”

“아…….”

어디서 가게라도 하는 모양이다. 신아름은 그리 생각했지만, 그냥 평범한 가게가 아니었다.

김민주의 어머니는 번화가에 위치한 3층짜리 커피 프랜차이즈를 운영 중이며, 그 옆에 2층 규모의 샌드위치 프랜차이즈도 운영 중이다.

자식에게 수백만 원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줄 만한 재력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신아름이 거기까지 파악할 재간은 없었다.

‘얘네 어머니도 소상공인이시구나.’

신아름은 동질감을 느끼며 말했다.

“우리 어머니는 채소 파셔.”

“그래?”

김민주 또한 신아름처럼 오해했다.

채소를 판다니, 마트 같은 곳에 납품하는 채소 유통업자나 유기농 채소 전문 매장 같은 것을 상상했다.

둘은 오해 속에 얽혀서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너 생일이라며. 여기서 연습만 해?”

“생일이라고 뭐가 다르냐. 매일 똑같지.”

“불쌍하네. 내가 좀 놀아줘?”

“놀 시간 없어.”

방금 신아름은 농담으로 불쌍하다고 했지만, ‘놀 시간 없어’라는 답을 들으니 김민주가 진심으로 불쌍하게 여겨졌다.

“뭘 사람 동정하고 있어. 나 육상할 때도 똑같았어. 생일이야…….”

김민주가 무덤덤이 읊조렸다.

“나중에 성공하고 나서 마음껏 즐기면 되지.”

나중에 성공하고 나서.

신아름은 그 말을 듣고 괴리감을 느꼈다.

소녀연맹이 항상 따라잡고자 노력하는 케이어스의 멤버조차 성공이란 단어를 함부로 쓰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소녀연맹의 성공이란 케이어스를 따라잡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럼 케이어스의 성공은 뭘까?

“성공? 뭐가 성공인데?”

“……으음.”

의외로 김민주는 바로 답을 내지 못했다. 그녀는 스포츠 음료 포장에 쓰인 영양 성분표를 멍하니 보더니, 모르겠단 듯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자주 그런 생각을 하거든. 차라리 연습생 때가 더 보람 있었다고.”

연습생 때는 쓰러뜨려야 할 상대가 있었다.

명확한 평가 기준이 있었다.

회사 사람들이 누가 누구보다 더 낫다, 누구는 누구보다 더 떨어진다.

김민주가 더 낫다.

이런 평가를 당연하단 듯 내려주었다. 그런데 아이돌로 데뷔하곤 그런 기준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기준이 너무나 혼탁하고 애매모호했다.

“인기나 명예는 불확실하잖아. 거품 같은 거고. 그걸 성공의 척도로 삼는 건 이상해.”

옛날에는 앨범 판매량이나 음원 차트 순위를 성공의 척도라 여기기도 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기준이 될 수 없을 듯하다.

케이어스의 선배 보이그룹의 최근 앨범 초동 판매량은 150만 장을 넘어섰다. 케이어스가 해체할 때까지 절대 따라잡을 수 없을 수치다.

하지만 음원 차트에선 영 맥을 못 추고 있다.

그들이 차트 1위를 달성한 적보다 케이어스가 1위를 달성한 적이 더 많을 정도다.

여기 어디에 명백한 성공의 기준이 있겠는가.

“그런 걸 척도로 삼으면 불안하기도 하고. 흔히 성공을 구름 위를 밟는 기분이라고 하는데, 아마 그렇겠지. 난 좀 다른 의미라고 생각하지만.”

구름 위를 밟는 것처럼 위태롭고 불안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김민주가 생각하는 아이돌의 정점, 아이돌의 성공이란 그러했다.

끓었다 식었다를 반복하고,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대중의 호오(好惡)가 평가 기준이니까.

그건 대중을 상대하는 직업이 항상 느낄 수밖에 없는 불안감일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바라는 성공이란 어쩌면…… 내가 아이돌로 활동하는 중엔 얻을 수 없을 거야.”

그게 김민주를 여러 번 좌절하게 했었다.

그녀는 명백한 기준이 있는 경쟁 속에서 살아왔다. 죽은 후에야 딸의 우상이 된 아버지도, 남이 반박할 수 없는 기준만이 성공의 척도라고 했었다.

몇 등.

무슨 학벌.

어디 회사.

월급.

아이돌은 대중의 관심과 인기를 먹고 살기에, 성공이 수치로 표시될 수 없다.

김민주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을 성공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럼 언제 얻을 수 있는데?”

신아름은 김민주의 이야기를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솔직히 알 수가 없었다.

단지, 김민주가 지닌 의식 수준이 자신보다 훨씬 높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궁금했다.

김민주가 바라는 성공이란…….

“아마.”

이 연습실에 들어오고 나서 처음으로 김민주의 눈이 빛났다.

“내 성공은 역사가 새겨줘야겠지.”

그리 말한 김민주는 부끄러운 듯 배시시 웃었다. 하지만 신아름은 웃지 못했다.

김민주가 한 말은 성필이 했던 말과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었다.

최고의 아이돌.

성필은 그것을 일컬어 역사가 새겨주는 이름이라고 했었다. 그제야 신아름은 성필을 이해한 기분이 들었다.

‘팀장님이 말했던 최고의 아이돌이란 건…….’

그야 성필은 앨범 판매량이나 음원 차트를 보며 울고 웃기를 반복한다. 한때의 인기를 가지고 감정의 커다란 낙폭을 경험한다.

하지만 성필은 그처럼 단기적인 성과만을 본 건 아니었을 것이다.

김민주의 이야기를 듣고 비로소 알게 됐다.

‘아, 그래서…….’

신아름의 어머니에게 콘서트 표를 주러 갔을 때, 성필은 케이어스를 이기는 게 최고의 아이돌이 되는 방법이 아니라고 했었다.

신아름은 수긍하는 척했지만, 내심 이렇게 생각했다.

‘팀장님도 케이어스를 이기길 바라고 있으면서.’

위로하려고 그렇게 말한다고 생각했지만, 성필은 진심이었던 듯하다.

신아름은 성필을 더 알고 싶었다. 그래서 김민주에게 계속 질문했다.

“역사가 준다는 게 무슨 뜻인데?”

“거창한 건 아니고, 소녀시절 선배님들 얘기하면 지금도 레전드라고 하잖아. 우리 나이대 애들도 다 왜 아이돌 됐냐 하면 십중팔구는 선배님들 이름 대고. 그런 거 아닐까.”

한때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는 게 아니라, 활동이 잠정적으로 중단되고 나서도 수년 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를 것.

그건 일시적인 인기가 아니라, 역사로서의 생명력을 얻었다고 봐야 하리라.

“그런데.”

김민주는 줄곧 소외되어 있던 성필을 보며 미소 지었다.

“박 이사님은 저한테 선물 안 주세요? 팬이라고 하셨으면서.”

“예?”

“과즙미 뿜뿜 케이어스의 비타민 민주 잊으신 거예요?”

“아, 아니…….”

성필은 갑자기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오자 당황했다. 두 아이돌의 진지한 이야기를 흐뭇하게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건만.

“사적인 조공은 좀 그렇잖아요…….”

“와아, 에리카랑 진저한테는 선물 받아놓으시고서요?”

“아뇨 아뇨! 제가 케이어스 멤버분들한테 선물을 드리기 시작하면 정말…… 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제가 제 지위를 사적으로 이용하는 느낌이잖아요…….”

“그걸 아는 사람이!”

신아름이 성필의 어깨를 팍팍 때렸다.

“케이어스 애들이랑 연락해요?”

“그건 먼저 연락이 오니까…….”

“아.”

김민주가 뭔가 깨달았단 듯 말했다.

“그래서 에리카랑 진저한테 먼저 연락을 안 하시는구나. 진저가 막 저한테 ‘남자는 원래 연락을 먼저 안 하는 검미까?’라고 자주 그러거든요.”

“남자가 이성한테 먼저 연락한다는 건 마음이 없고선 불가능하죠.”

“여자도 그런데요?”

성필과 김민주 사이에 침묵이 생기고, 곧 둘은 어이없단 듯 웃었다.

“진저는 그럴 만해요. 요즘도 신인개발팀 태웅 오빠랑 친하거든요. 애가 정이 많아요.”

“진저 씨 착하죠.”

“근데 에리카는 조심해요. 걔 속에 구렁이 백 마리는 들었어요. 뭔 속셈일지 몰라요.”

성필은 그저 웃기만 했다.

친구를 괜히 깎아내리는 건 찐친의 증거가 아니겠는가? 에리카처럼 해맑고 순수한 사람의 배에 구렁이가 들…….

‘앗, 머리가……!’

끊은 지 오래된 담배 냄새가 코 주위를 맴도는 기분이었다.

신아름은 성필과 김민주가 케이어스 관련 이야기를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대화의 키를 빼앗았다.

“근데 너 곧 컴백해?”

이왕이면 성필이 이곳에 온 목적도 이루어주려 그런 질문을 던졌다.

“내가 그걸 말하겠냐?”

“하긴, 컴백할 애가 혼자 연습할 리 없지. 그럼 뭔데. 너 혼자 트레이닝?”

신아름은 벌떡 일어나, 연습실에 들어왔을 때 김민주가 추었던 춤을 그대로 재현했다.

약 5초 정도 이어진 동작은 잠시 봤다곤 믿을 수 없을 만큼이나 김민주와 비슷했다.

“솔로 댄스 느낌도 나긴 하네.”

“그 안무 저작권 있어. 어디 가서 추면 안 된다? 어디 가서 보이면 네가 유출한 줄 알고 바로 신고 때릴 거야.”

“네가?”

“KS 엔터 법무팀이.”

신아름은 곧바로 춤을 멈추었다.

KS 엔터에 걸리면 가정이 풍비박산 날 수도 있었다.

“언제 연락해. 밥이라도 먹자.”

“지랄.”

김민주는 웃으면서 욕지거리를 뱉었다가, 곁에 성필이 있는 것을 보곤 급히 입을 막았다.

성필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랄, 라라랄, 라라. 그래. 아이 신난다. 꼭 그러자.”

슬슬 김민주에게 방해된다 싶을 정도로 시간이 지났다. 성필과 신아름은 일어나 연습실을 나섰다.

김민주가 빌딩 아래까지 두 사람을 배웅했다.

신아름이 손을 흔들고 등을 돌리는 순간, 김민주가 말했다.

“박 이사님!”

성필과 신아름이 동시에 김민주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김민주가 남홍범 이사에게 직접 전수받은 애교를 펼쳤다.

“과즙미 뿜뿜 케이어스의 비타민 민주입니당! 다음에는 꼭 제 선물 부탁드려요!”

“네헤에…….”

신아름이 성필의 턱을 쳐 올려 그의 벌린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조수석에 탄 신아름이 툴툴대며 물었다.

“팀장님은 쟤네들 어디가 좋아요?”

“얼굴.”

“……되도 않는 이유 나올 줄 알았는데, 납득 가는 이유네요. 그리고요?”

“그리고…….”

실력과 열정과 아티스트십, 이었다.

하지만 정호환과의 대화로, 전생에서 보았던 케이어스의 아티스트적인 창조성은 전부 거짓이란 사실을 알아버렸다.

“아티스트십.”

하지만 성필은 그리 답했다.

오늘 들은 김민주가 지닌 고민의 깊이는, 그녀를 아티스트의 반열에 올려놓기 충분했으니까.

“팀장님.”

“응.”

“쟤네 컴백 준비하는 거 맞지 않아요?”

“그런 거 같아.”

성필과 신아름이 연습실로 들어갔을 때 들었던 곡. 거기엔 영어 가사가 붙어 있었다.

완벽하기 그지없는 미국식 발음인데, 그건 분명 에리카의 목소리였다.

“수록곡인지 타이틀인지는 모르겠지만, 케이어스는 연내에 컴백해.”

“……여름은 아니면 좋겠네요.”

“의외네. 붙어보고 싶다고 할 줄 알았는데.”

“미쳤어요?”

신아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은 알아요. 우리가 성적으로 따라잡는 게 불가능하잖아요. 어쩔 수 없이 마주치는 거면 몰라도,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어요.”

성필도 동감이었다.

소녀연맹의 성장성을 보장하기 위해선, 그리고 추후 케이어스와 비슷한 팬덤이나마 구축하기 위해선.

‘앞으로의 컴백은 케이어스와 마주쳐선 안 돼.’

글로브와 맞붙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케이어스는 성필이 보기에도, 그리고 세상 사람들 모두가 보기에도 매력적인 그룹이다.

소녀연맹이 케이어스와 만난다면, 지금까지 증명된바 피를 흘리는 수준으로 끝나지 않는다.

* * *

김민주는 일부러 회사에서 연습하지 않았다.

생일이기 때문이었다.

‘귀찮아.’

KS 엔터는 소속 아티스트의 생일에 케이크를 주는 전통이 있다. 아티스트와 관련된 매니지먼트 팀원들이 소소한 파티를 열어준다.

어두운 방에 들어가면 촛불이 켜진 케이크가 있고, 생일 축하 노래가 흘러나오고, 아티스트가 촛불을 끄는.

그런 아주…….

‘엎드려 절받는 이벤트.’

김민주는 아침에 그 일을 겪고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불편함을 느꼈다.

축하해주는 사람들은 죄다 월급을 위해 회사를 다닐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받는 축하는, 그야 기쁜 마음도 있지만, 그렇게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불편했다.

억지 축하를 받는 건 억지로 축하하는 것만큼이나 괴로웠다.

그래서 본인이 빌린 연습실로 도망가듯이 나갔다. 컴백이 얼마 남지 않아 합동 연습을 최대한 많이 해야 함에도 그러했다.

그리고, 김민주는 자신의 이런 생각이 변명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른 이유가 존재했다.

‘멤버들 보기 거북해.’

케이어스는 앞으로 몇 년을 함께 살아야 하고, 몇 년 동안 얼굴을 보아야 할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정이 들 수밖에 없지만, 결국엔 비즈니스 파트너란 느낌이다. 다들 저마다의 목적으로 얼기설기 엉켜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그룹 멤버들은, 자신들의 관계를 윤활유 바른 기계처럼 유지하기 위해 억지 생일 축하를 해줄 게 틀림없다.

작년에도 그랬고, 재작년에도 그러했다.

하지만 김민주는 그런 축하를 받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제는 그런 축하를 받고 싶지 않았다.

진심 어린 축하를 바랐다.

‘그리고…….’

멤버들과 있다 보면, 김민주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진심을 드러낼 듯했다.

사실 김민주는 지금보다 멤버들과 친해지길 바랐다. 그렇기에 억지 축하를 받으면 기분이 안 좋아질 것이고, 그 사실을 들킬 게 분명했다.

그게 싫었다.

자신의 나약한 부분을 들키는 게 싫었다.

‘나만 과하게 정든 거 같아서…….’

진 기분이다.

다른 멤버들이 자신을 대하는 온도는 이전과 다를 바 없는데, 자신의 머리에 꽂힌 온도계만 자꾸만 위로 올라가길 반복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함께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관계 아닌가.

그리고 처음 봤을 땐 ‘왜 이런 또라이들만 모였지?’ 싶었지만, 보면 볼수록 모두의 장점이 또렷이 보인다.

그러니 정이 들었다.

“민주 언니 오셨슴미까.”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케이어스의 막내인 진저가 반겨주었다.

진저는 옛날엔 과하게 날이 서 있었다.

타국에 홀로 왔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낯선 환경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겠지.

그때의 진저는 살짝 머리가 이상하기까지 했었다. 어찌나 머리가 이상한지, 가장 친한 사람이 진소유였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날이 많이 죽었다.

그래서 그녀 특유의 따스함이 자주 가림막을 넘어 사방으로 퍼진다.

“회사에서 준 케이크 아까웠슴미다.”

“괜찮아. 먹으면 살찌잖아.”

“절반 남겨뒀슴미다. 회사 냉장고에 잘 넣어뒀슴미다.”

“다 먹어도 되는데.”

“그런데 민주 언니는 살 안 찌는 체질 아님미까. 가끔은 단것도 먹어줘야 함미다.”

살 안 찌는 체질? 그런 게 있나 싶다.

그저, 김민주는 많이 먹었다 싶으면 평소 운동하는 것보다 더 오래 하는 것뿐이었다.

당연히 먹은 칼로리보다 소비 칼로리가 높으면 살이 안 찐다. 사람들은 그 당연한 사실을 모르고, 김민주에게 살이 안 찌는 체질이라고만 말한다.

“매일 그렇게 운동하면서 단것도 안 먹으면 죽슴미다.”

“언젠 체질이라더니.”

“운동을 좋아하는 성격도 체질임미다. 왜, 노력도 재능이란 말과 비슷함미다.”

“…….”

김민주는 진저의 머리를 쓰다듬었, 아니, 쓰다듬으려 노력했다.

진저의 키가 김민주보다 컸기 때문이었다. 쓰다듬기보다는 손을 올려 움직이고, 그녀를 지나쳤다.

“왔어?”

거실로 가자마자 에리카가 식탁에 앉아 반겨주었다. 식탁 위엔 평소와 다름없는, 체중 관리를 위한 조촐한 음식이 마련되어 있었다.

오늘은 생일인지라, 1팀장이 멤버들끼리 놀라며 휴가를 주었었다.

하지만 멤버들은 오후 4시까지 연습한 후에야 휴가를 즐겼다. 덕분에 여느 때처럼 회사에서 저녁을 해결하지 않고, 숙소에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먹어. 생일이니까 맛있는 거 해주고 싶었는데.”

“전혀 진심 안 느껴지거든?”

김민주가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온 진저도 착석했다.

진소유만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몇 분 늦게 나타나 터덜터덜 식탁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없이 털썩 앉아 걸신들린 것처럼 음식을 해치웠다.

‘진소유 얘는…….’

생일인데도 아무런 말도 없다.

오늘 회사에서 케이크를 줄 때 던지듯이 ‘축하해’라고 말한 게 전부였다. 그래도 같은 그룹 멤버인데, 한두 마디 더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아냐, 이런 생각 그만하자.’

김민주는 온도를 낮추었다. 케이어스에 대한 애정의 온도를 낮추는 데엔 진소유를 생각하는 게 도움이 된다.

김민주는 고구마 말랭이를 우적우적 씹었다.

“잘 먹었습니다. 나 먼저 씻을게.”

“…….”

김민주의 얼굴이 확 찌푸려졌다.

역시나, 진소유가 음식을 빨리 해치운 건 샤워를 가장 먼저 하기 위해서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연습실에서 씻고 올 걸 그랬다.

‘기대한 내가 바보지.’

평소 진소유의 샤워 시간을 가장 많이 물고 늘어지는 건 김민주였다. 아무리 이해해보려 해도 비정상적으로 시간이 기니까.

그러니 진소유도 나름 죄책감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오늘 정도는 ‘민주가 첫 번째로 샤워할래?’ 같은 말이나마 할 줄 알았는데.

[자, 마지막 문제입니다!]

텔레비전엔 교양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MC는 왠지 모르게 절박한 표정이었다.

소녀연맹의 리카가, 한국인도 불가능에 가까울 수준의 한국사 문제들을 파죽지세로 맞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 5군영 중 훈련도감은 임진왜란 중 이 사람의 건의로…….]

[유성룡!]

[네, 유성룡이죠!]

[에에, 방금 답이었는데 제가 맞추니까 바꾼 거 아닌가요!]

[……아닙니다! 유성룡의 건의로 설치되었는데, 이 기관은 어느 책을 기반으로 편제가 설정됐습니다. 명나라의 척계광이 썼고 원앙진 전법이 기록된 이 책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김민주는 이미 나가버린 진소유에겐 신경 끄고 텔레비전에 집중했다.

MC와 패널이 긴장하고 있는 게 보였다.

한국인 게스트들, 그것도 꽤 이름 있는 지식인 게스트들도 9단계에 이르기 전에 다 탈락한 마당이다.

그런데 일본인인 리카만 10단계에 도달하자, 이유를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마치 민족의 자존심이 걸렸단 듯 비장하기까지 했다.

‘뭔 문제가 저래.’

말도 안 되게 지엽적이다.

역사 교사가 와도 맞출 수 있을지 의심된다.

‘걍 떨어지라고 내는 문…….’

[‘기효신서’요! ‘기효신서’를 참조해서 포수, 사수, 살수로 이루어진 삼수병 편제를 고안했습니다!]

[……저, 정답.]

‘맞췄다고?!’

짠 게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비현실적인 상황이었다.

리카는 한우 세트를 머리 위에 이고 세트 여기저기를 호다다닥 뛰어다녔다.

예능 패널로도 유명한 한국사 교사가 심장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박수를 보내는 장면이 이어졌다.

‘이게 말이 되…….’

그때 샤워하러 갔을 진소유가 다시 거실로 들어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알았다.

세면용품이라도 다 떨어져서 가지러 왔나 싶었는데, 갑자기 거실의 불이 꺼졌다.

“뭐…….”

갑자기 어두워진 시야에 당황하기도 잠시, 김민주는 자신의 뒤에서 주황색 불빛이 비쳐온단 것을 깨달았다.

이건 형광등의 빛이 아니다.

진짜 불꽃이 내뿜는 따스한 빛이다.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생일 축하합니다.”

진소유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김민주는 뻣뻣이 굳은 목을 억지로 뒤로 돌렸다. 그러자 이번엔 양옆에서 박수와 노랫소리가 들렸다.

“생일 축하함미다.”

“생일 축하합니다.”

에리카와 진저의 노랫소리가 스테레오 사운드처럼 양옆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진소유가 미소를 지으면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양손에는 티 없이 흰 케이크를 들고서.

“사랑하는 우리 민주.”

진소유가 케이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주황색 불빛에 비친 진소유의 미소.

그 미소는, 그녀가 어째서 케이어스로 뽑혔는지 알 수 있는 증거와 같았다.

“걱정하지 마. 이거 저칼로리 요거트 케이크야. 안에 진짜 단맛 나는 거 거의 안 들었어. 너 이런 거 강박적으로 신경 쓰잖아.”

진소유의 말투는 평소처럼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 듯 무례했다. 하지만 표정만은 달랐다.

자신 이외에는 관심 없단 것처럼, 타인보다는 타인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만 보아왔던 진소유.

그녀의 눈동자는 지금 이 순간 분명히 김민주를 담고 있었다.

진소유가 자신을 직시해주고 있다.

김민주는 그걸 알았다.

“이거, 어떻…….”

“우리끼리 돈 모아서 샀어. 우리 부자 민주랑은 달리, 우리들은 조막만 한 용돈으로 생활하잖아. 내 생일엔 더 좋은 거 사 줄 거지?”

에리카가 진소유에게 다가가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뭐, 내 생일 선물은 필요 없겠다. 민주 감동한 거 보는 걸로 벌써 배부르네.”

“누가 울어…….”

“울었다고 안 했는데?”

김민주는 인상을 찌푸리며 어떻게든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 케이크 소유가 골랐어. 옛날에 우리 미팅 갔던 그 베이커리 있잖아, 네가 맛있겠다고 말했던 걸 소유가 기억하고 있더라구.”

그걸 듣고, 김민주는 정말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 선물이란 이런 거다.

사소하고 작은 것일지라도,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들어있는 게 바로 선물이다.

그렇기에 가치가 있다.

김민주가 바랐던 선물이 이곳에 있었다.

“우리 민주, 감동했어? 이제 언니라고 불러줄 거야?”

“진소유 이 발쓰년아아아…….”

“……???”

갑자기 친근하디 친근한 욕을 얻어먹은 진소유가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웠다.

아무튼.

“자, 소원 빌면서 불 꺼.”

김민주는 코를 훌쩍이며 입바람을 후 불었다.

22개의 촛불이 순식간에 꺼졌고, 하늘로 피어오르는 연기와 함께 김민주의 소원도 저 위로 전해졌다.

‘꼭 성공하기를.’

그게 작년, 재작년의 소원이었다.

이번엔 그 앞에 무언가가 더 붙었다.

‘다 함께.’

다시 불을 켜고, 멤버들은 케이크를 나누어 먹었다.

“짜잔! 제가 준비한 선물임미다!”

진저가 초코볼 과자를 꺼냈다.

그녀가 밋밋한 요거트 케이크들 위에 초코볼을 뿌렸다.

“민주 언니는 생일이니까 조금 더 드리겠슴미다.”

“진저, 남은 건 어쩌게?”

“에리카 언니는 걱정하지 않아도 됨미다. 제가 잘 처리하겠슴미다.”

“네 뱃속에?”

“…….”

에리카에게 남은 초코볼을 빼앗긴 진저를 빼곤, 다들 입가에 미소를 내걸고 케이크를 음미했다.

김민주는 오랜만에 입가에 퍼지는 단맛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시바 이게 인생이지…….”

곧 컴백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부담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될 듯하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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