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화
“애니메이션 좋네요!”
리카가 즉각 동의했다.
“아타시(저)는 어렸을 때부터 디즈니 공주님이 되는 게 꿈이었어요! 어릴 때 공주님 옷 입고 찍은 사진도 많이 남아있다구요!”
“그럼 그거 영화에 나오는 뮤지컬 장면처럼 만드는 건가?”
조아라는 최근에 보았던 디즈니 영화를 떠올려보았다. 영화의 주인공이 멋들어지게 노래를 부르면서 여기저기 마법을 쓰는 장면이었다.
한국은 물론 세계에서도 화제가 되었던 명장면이었다.
“근데 우리를 3D로 표현할 수 있어? 상상이 안 가는데.”
“그러니까 전문가분들이 계시는 거야! 비주얼라이즈까지 우리가 생각할 필요는 없잖아!”
리카는 벌써부터 뮤직비디오 애니메이션화가 확정 사안인 것처럼 흥분했다. 어떻게든 이 아이디어를 현실화시키길 바라는 의지가 돋보였다.
신아름도 현실성을 꼬집었지만, 이 아이디어가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일단 성필이 제안했으니까.
게다가 어렸을 때 보았던 유명 만화 영화의 그림체로 자신이 재탄생된다는 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설레는 일임이 틀림없었다.
“디즈니…… 공주…….”
백설하가 홀린 사람처럼 ‘공주’란 단어를 반복했다. 멤버들은 그녀가 완전히 이 아이디어에 꽂혔단 것을 알았다.
“그래서, 설하야 어때?”
성필이 은근한 투로 물었다.
백설하의 의견처럼, ‘애플 크러쉬’는 사운드적으로 긴장감을 일으켜 카타르시스를 주는 게 힘든 곡이었다.
비주얼적인 임팩트를 극대화해야 한다는 그녀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아직 아이디어가 새싹처럼 움텄을 뿐이지만, 성필은 이 아이디어가 퍽 마음에 들었다.
“저어, 저는 좋은 거 같아요.”
“좋은 거 같아?”
“좋아요!”
“그래.”
성필은 여섯 색깔의 모자를 곱게 겹쳐 정리하곤 한구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격려하듯 툭툭 두드렸다.
“역시 가로 엔터의 브레인, 지식 자판기시네요. 덕분에 좋은 아이디어가 나왔어요.”
“이제 제 별명은 지식 자판기로 굳은 겁니까?”
“한 이사님 마지 텐사이(정말 천재)!”
어쨌거나, 한구인은 자신이 도움이 되었다니 기쁜 마음뿐이었다.
게다가 소녀연맹 멤버들이 3D 애니메이션으로 재탄생한다니, 한구인도 기대됐다.
“자, 그럼 비주얼팀으로 가자!”
이 안건을 확정시키고,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 * *
가로 엔터의 ‘하이라이트 애니메이션화’ 기획은, 조정훈에게 깔끔히 반박당했다.
“디즈니급 그래픽 기술력을 가진 회사는 한국에 없어요.”
“아…….”
“그리고 그 급으로 돈을 쏟아부어 만들 수 있다 해도, 시간이 모자라요.”
디즈니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1프레임 움직이는 장면을 만들기 위해선, 컴퓨터가 100시간 이상 작업해야 한다.
1초가 아니라 1프레임이다.
1초를 100프레임으로 짠다면, 그 1초를 위해 고성능 컴퓨터가 1,000시간 이상 가동되어야 한단 뜻이다.
가로 엔터가 요구하는 10초를 정말 세계 최고의 그래픽 회사가 작업해준다 해도 절대 기한에 맞춰 제작할 수 없다.
사람들이 열광할 만한 가상을 창조하기 위해선 그토록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들어간다.
“정상급 CG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은 전부 일본이랑 미국에 있는데, 외주를 안 받죠. 자체적으로 가동하는 프로젝트들만 하니까요.”
“……그럼 방법이 없을까요?”
“있죠. 그만큼 유려한 그래픽으로 만들 순 없겠지만…….”
조정훈이 검지로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그 검지의 높이를 코 부분으로 낮추었다.
“눈을 낮추면 몇 개 찾을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그만한 회사면 들어온 일을 골라잡아 할 만큼 바쁘겠죠.”
결국, 가로 엔터가 쓸 수 있는 선택지는 없다시피 했다.
1년 전부터 이 프로젝트를 실행했으면 몰라도, 지금으로선 컴백 기한에 도저히 맞출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이 보자…….”
조정훈은 작업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캘린더를 들어 올려 날짜를 살폈다.
“3D 애니메이션 말고, 아예 2D 작화로 생각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이쪽 업계에 잘 찾아오면 지금쯤 일감 받으려는 곳도 있을 거 같은데요.”
“일본 쪽으로 가야 할까요?”
“한국에도 작화 하청 업체들 꽤 있어요. 전문 프로듀서랑 기획력을 갖추고 있는지는 몰라도요. 저희 쪽에서 알아볼까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성필은 JJH를 나오며 허탈한 기분을 숨길 수 없었다. 괜히 길가에 떨어져 있는 돌멩이를 걷어차며 한숨을 쉬었다.
‘설하가 실망하겠지.’
성필이 가로 엔터 건물을 나오기 전까지도, 백설하는 ‘우리가 공주님들 옷 입고 나오면 예쁘겠다’라면서 헤실헤실 웃고만 있었다.
그녀가 이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슬퍼할까.
뭔가 방법은 없을까…….
‘아, 웨벡스 쪽에도 한 번 알아봐달라고 할까? 슈이치 씨한테 부탁해서…….’
맞다.
‘슈이치 씨 일본으로 가셨지 참…….’
가로 엔터에서 케이팝의 정수를 획득한 슈이치는 에스타스 컴백 계획의 중요 인사로 등용되었다.
웨벡스는 에스타스 테스크 포스를 가열 차게 작동시키고 있으며, 그 작업엔 가로 엔터도 한몫 거드는 중이었다.
‘그럼 내가 따로 히무라 실장님한테 연락해야겠네.’
조정훈은 따로 알아보겠다고 했지만, 그의 분위기로 보건대 결과는 신통치 않을 듯했다.
모처럼 좋은 아이디어가 나왔건만 시간 때문에 쓸 수 없다니.
‘딱 10초인데. 그게 어려운 걸까. 아니, 어렵겠지. 업계는 저마다 사정이 있으니까.’
일단은 조정훈의 JJH사(社)와 웨벡스에 희망을 걸어볼 수밖에 없었다.
* * *
“그런가요…….”
예상대로 백설하는 잔뜩 실망한 티를 냈다.
성필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잘못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1년 빨리 여섯 모자 기법을 사용해볼 걸 그랬다. 1년 빨리 그 방법을 알려주지 않은 한구인이 원망스러웠다.
“헤헤, 어쩔 수 없죠.”
백설하는 금방 얼굴에서 아쉬움을 지워버렸다.
“자, 리카. 팔세토(가성)로 3옥타브 이상 음역대를 10초 이상 유지하자. 자, 하나 둘 세…….”
“박 이사님 들으셨나요?! 쌤이 저를 화풀이 대상으로 쓰려고 해요!”
수행평가를 받는 학생처럼 백설하 앞에 선 리카는 트레이닝의 부조리함을 토로했다.
“빨리 백마 탄 왕자님처럼 아타시(저)를 데리고 도망가주세요!”
“리카, 우리는 공주님이 못 돼. 제작사를 구할 수 없대. 그러니까 왕자님도 없어.”
“에엑?! 그럼 야수라도 상관없어요! 자, 미녀를 구출할 권리를 드릴게요!”
“빨리 안 해?”
리카는 눈물을 머금고 팔세토를 내질렀다.
못 한다고 했으면서, 리카의 고음은 청명하게 잘도 뻗어나갔다. 바로 앞에서 듣는 성필의 등에 전율이 돋을 만큼이나 날카롭고 시원했다.
성필이 저 기교를 따라 하려면 당장 목이 칼칼해져 기침할 게 틀림없었다.
“와, 리카 노래 진짜 잘 부른다.”
“에? 에헤헤, 당연하죠! 아타시(저)는 일류 아이돌이니까요!”
이렇게나 재능 넘치는 아이가, 전생에서는 배우이자 모델로 활동했었다.
물론 리카는 배우나 모델이어도, 외모만으로 역사에 획을 그을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리카는 아이돌로 있는 편이 훨씬 빛난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일류 아이돌이네. 그, 리카.”
“하이(네)?”
“내가 꼭 성공시켜줄게.”
“이미 충분히 성공했어요! 정산 몇 번만 더 받으면 서울에 단독 주택도 사겠다구요!”
“그것보다 더.”
적어도 도쿄 중심가에 집을 수 채 가질 수 있을 만큼은 성공시킬 것이다.
“에에, 마아(뭐어)…….”
리카는 성필의 목소리에 서린 은근한 죄책감을 느꼈다.
실제로, 성필은 리카의 진로를 바꾼 것에 희미한 불안을 지니고 있었다.
성필이 리카를 연습생으로 데려올 때 자기암시처럼 계속 되새겼던 말이, ‘아이돌로 전생보다 더 성공시킨다’였었다.
전생의 리카가 돈을 얼마나 벌었을지는 모르지만, 성필은 적어도 그녀에게 백억 대의 자산을 쥐여주고 싶었다.
“무리하진 마세요!”
소녀연맹이 케이어스에 비해 성공하지 못한 이유가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한다. 리카는 성필이 그리 생각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평소보다 더 밝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 전에 저를 구해주세요! 쌤의 트레이닝이 점점 도를 넘고 있다구요!”
“왜, 듣기 좋구만.”
“박 이사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한패였다?!”
“리카 너 진짜 옛날보다 훨씬 실력이 늘었어. 노래에 문외한인 내가 들어도 그래.”
멤버들의 보컬 실력은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여태껏 백설하는 멤버들의 개성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멤버들의 보컬에 심한 간섭은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젠 바닥에서부터 그녀들의 기교를 뜯어고치는 중이었다.
공장에서 찍어낸 듯 몰개성하지 않고, 멤버들의 개성에 맞추어 기교를 탑처럼 쌓아가는 것이다.
그 결과가 가장 두드러지는 게 바로 리카였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사실 저도 느끼고 있어요! 지금이라면 케이어스도 이길 수 있을 거예요!”
리카의 당돌한 선언에 백설하와 성필이 동시에 웃었다. 그러자 리카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두 분 다 못 믿으시는 건가요? 누누이 말하지만, 아타시(저)는 케이어스 최종 데뷔조까지 갔었다구요!”
“어?”
“쌤은 뭘 처음 듣는단 듯이 반응하시나요! 박 이사님도 감사하세요! 그날 제 컨디션이 살짝 안 좋았던 거에 대해서요!”
“살짝 안 좋았어?”
“어, 음, 사알짝, 아주 사아아알짝?”
“그럼 리카 컨디션이 좋았으면 진저 씨가 가로 엔터 오셨겠네?”
“아앙 왜 이야기가 그쪽으로 흐르나요!”
리카가 ‘나빠!’라며 성필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계속 두드렸다.
“아아! 아파!”
성필이 황급히 가슴을 가리면서 물러났다. 그 격렬한 반응에 리카가 화들짝 놀랐다.
백설하도 그러했다.
“리카! 이사님을 그렇게 세게 때리면 어떡해!”
“에, 에, 세게 안 했…….”
성필이 자신의 흉근을 주먹으로 꾹꾹 눌렀다. 그의 표정에 괴로움이 떠올랐다.
“어제 가슴 운동해서 근육통이 심해.”
“소난다(그렇구나)……. 아라쨩이었으면 더 해달라고 했을 거예요!”
“걔는 근육통을 마사지로 푸니까. 리카한테도 부탁하는구나.”
“……?”
“……?”
“……왜 그래?”
백설하가 떨떠름한 투로 말했다.
“박 이사님 방금 리카한테‘도’ 부탁하는구나라고 말씀하셔…….”
성필의 뇌가 5초 정도 정지했다.
“……아, 내가 언어 능력이 부족해서 보조사를 자주 헷갈리거든. 괜히 쓸데없는 곳에 보조사를 붙이고 그래. 실수야 실수.”
“아, 실수시구나…….”
리카가 즉시 보컬룸을 뛰쳐나갔다.
성필도 그녀를 잡으려 문을 박차고 나갔다. 이미 리카는 몇 미터나 앞서가고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연습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 씨 깜짝야!”
거울에서 본인의 미모를 감상하던 조아라는 짜증스레 리카를 보았다.
“뭔 미식축구 선수처럼 들어오고 있…….”
“아라쨩 너무해! 아라쨩 근육통 해결사는 나였잖아!”
“뭐?”
“박 이사님이 아무리 친근하대도 몸 이곳저곳을 만지게 하면 안 돼! 아라쨩은 왜 이렇게 내로남불이 심해?!”
“뭐, 뭐라는 건데. 왜 나한테 화내. 뭐라고? 내가 뭐?”
“내가 박 이사님을 친근하게 여겨서 터치하면 ‘저거 봐 저거 자연스럽게 기대서 손으로 팔 툭툭 치네 아주 여우야 여우 몸에 걍 배어 있어 어휴 잔망스러’라고 하면서!”
“내가 언제?!”
“아라쨩은 박 이사님한테 마사지도 받고 있던 거야?! 내가 얼마든지 해줄 수 있는데 왜!”
조아라는 리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뒤이어 성필이 연습실에 나타났다.
그는 숨을 헐떡이면서 리카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얘, 얘, 하는 말, 믿지 마.”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사실이 아닌데요.”
“에엑 아니었어?! 박 이사님 우소츠키(거짓말쟁이)!”
“어처구니가 없네…….”
성필은 여기까지 리카를 좇아온 게 바보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조아라가 상황을 궁금해하기에, 성필은 자신의 말실수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조아라도 리카의 호들갑에 어이없어했다.
“그딴 걸로 이렇게 난리 쳤어?”
“리카, 너 솔직히 말해. 설하 수업 듣기 싫어서 일부러 오버한 거지?”
“에헤헤, 들켰…….”
뒤늦게 백설하가 등장했다.
“아라야 너 진짜 박 이사님한테 마사지 받아? 범죄야 그거! 당장 이사님한테 사과드려!”
“…….”
갑자기 리카가 기세등등해졌다.
“일부러 오버한 게 아니에요! 누구든 오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쌤을 보세요!”
“쌤 감성 이상하지 않냐? 보통은 내가 범죄가 아니라 아저씨가 범죄잖아.”
아무튼, 사태는 평화롭게 마무리됐다.
리카가 백설하를 향해 양손을 내밀었다. 체포할 테면 체포하란 뜻이었다.
“트레이닝하러 가요!”
백설하는 시간을 확인하곤 낮게 한숨 쉬었다.
“어차피 얼마 안 남았었으니까 이걸로 끝내자.”
“얏타(해냈다)! 도망간 게 정답이었어요!”
“대신 다음 수업을 10분 늘리자.”
“손나(그런)!”
“음, 나도 가봐야겠다.”
성필도 시계를 보곤 멤버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얘들아 연습 열심히 하…….”
“박 이사님 잠깐만요!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흉근 근육통은 어떻게 해결하시나요!”
다른 멤버들이 경악하여 리카를 쳐다보았다. 성필을 친구라 부르며 막역하게 대하는 리카, 드디어 스스럼없이 성희롱까지 하는 단계까지 왔나?
이건 정말 한구인에게 징계 건의서를 제출해야만 했다.
“지가우(틀려)! 유우쨩 때문이에요!”
“유우토가 왜?”
“유우쨩 요즘 운동 열심히 하잖아요! 그런데 가슴 근육통이 너무 심하고 아프대요! 춤도 제대로 못 춘다고 했어요! 운동 오래 하신 박 이사님의 지혜가 필요해요!”
“별거 없어. 마사지기로 가슴 여기저기 풀어주는 거지. 여기도 있지 않나?”
성필은 생각난 김에 구석 선반에 올려진 마사지기를 집어 들었다.
두두두두 격렬히 진동하는 마사지기를 가슴에 대니 고통과 쾌감이 동시에 찾아왔다.
절로 신음까지 나왔다.
“으어, 으어어…….”
“에에, 그거 오늘 아라쨩이 엉덩이에 댄 건데.”
성필이 마사지기를 리카에게 던지듯이 넘겼다. 그리고 적반하장으로 화냈다.
“둔부 근육통은 폼 롤러로 풀어! 마사지기를 왜 거기에 대는데!”
“……뭔데.”
조아라가 충격받아서 되물었다.
“뭐, 내가 더러워요……?”
“…….”
“…….”
“…….”
백설하와 리카가 엄지를 아래로 내리면서 야유했다.
“우우우, 박 이사님은 사과해라!”
“너무하신다 진짜.”
“이건 저희도 실드 못 쳐드려요!”
“빨리 사과하세요.”
성필이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취소.”
“취소?”
잠시 후.
연습실 문을 열고 짜증스러운 표정의 신아름이 들어왔다.
“팀장님 왜 안 오…….”
그곳에 펼쳐진 건 지옥 같은 광경이었다.
리카와 백설하에게 양팔이 구속당한 성필. 그를 향해 조아라가 마사지기의 강도를 최대로 올리고 그의 가슴 여기저기를 눌렀다.
“끄아아악! 너무 아파! 너무 아파! 아프다고오오오오!”
조아라의 표정에 희미한 희열이 새겨진 게 특히 끔찍했다.
신아름은 그 광경을 보고 그냥 문을 닫았다.
* * *
성필은 신아름과 함께 회사를 나왔다.
“아름아, 그 광경은 충격적이긴 했겠는데. 그렇게 날 경멸하듯 봐야겠니?”
“팀장님 걍 벗어날 수 있었잖아요. 애들이 여기저기 만져주니까 좋아서 가만히 있던 거죠?”
“아니, 그거야 그런데…….”
성필이 마음먹었으면 리카와 백설하를 양팔에 짊어지고서라도 도망갈 수 있었다.
그러지 않은 건…….
“내가 아라한테 잘못한 게 있어서 그래.”
“뭐 얼마나 잘못하면 조아라 걔가 하는 고문도 걍 받아들여요? 팀장님 그냥 괴롭힘당하는 게 천직이던데요? 좋아서 눈물도 흘리시고.”
그 이야기를 듣고 충격받은 성필은 정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절대 전생이 떠올라서는 아니었다.
딸 같은 신아름의 날 선 비난을 듣는 게 슬퍼서였다, 정말이다…….
“그, 내가 아라가 쓰던 물건을 더럽단 듯이 던졌어.”
“팀장님 왜 그렇게 사람이 못 됐어요?!”
“그니까 내가 잘못했다고 했잖아! 그래서 그냥 당하고만 있었어…….”
신아름이 수긍했다.
성필은 다행이라 여기며 시동을 걸었다. 신아름이 안전벨트를 멘 것을 확인까지 한 후 차를 몰았다.
신아름은 품에 중간 크기의 종이백을 들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엔 옅은 불안이 서려 있었다.
“민주 씨도 좋아하실 거야.”
오늘, 신아름은 김민주의 연습실로 간다. 김민주에게 생일 선물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성필의 격려에 신아름이 혀를 찼다.
“좋아하건 말건 신경 안 쓰거든요. 에휴, SNS에 자기 곧 생일이라고 태그를 걸지 않나. 연락 와서 선물 달라고 하질 않나. 아니, 선물은 자발적인 거 아닌가? 웃겨…….”
신아름의 말 하나하나에는 가시가 돋아 있었지만, 성필은 그녀의 마음만은 세상 누구보다 따스하고 하얗다고 생각했다.
보통 그런 농담은 씹을 수도 있기 마련이다. 특히 SNS로 연락한다면 더 그렇다.
그런데 신아름은 굳이 김민주에게 직접 선물을 전달하러 가는 것이다.
“착하다 우리 아름이.”
“안 주면 걔가 또 개지랄할 테니까요.”
“쓰읍.”
“또 지랄할 테니까요.”
“쓰읍!”
“……실망할 테니까요.”
“착하다.”
신아름은 뾰로통 입술을 비쭉이면서도, 착하다는 말에 서서히 미소를 띠었다.
특이한 점.
성필이 신아름과 함께 김민주를 보러 감에도, 신아름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심지어 성필이 직접 따라가겠다고 했는데도 말이다.
사연이 있었다.
‘목적지는 민주 씨가 개인적으로 빌리고 사용하는 연습용 스튜디오야.’
어쩌면, 케이어스 컴백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게 목적이라면, 가로 엔터의 누구보다도 성필이 적임자였다.
신아름은 물론 멤버들도 그에 동의했기에, 오늘 성필의 동행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 성필이 가는 건 오로지 비즈니스적인 전략 때문…….
“팀장님 김민주랑 얘기하는 거 금지예요.”
“손나(그런)!”
과즙미 뿜뿜 케이어스의 비타민 김민주와 고작 십수 걸음 떨어져 있을 텐데, 얘기도 못 나눈다고?
고문이얏!
하지만 신아름은 단호했다. 옆까지 오는 건 봐주겠지만, 케이어스 멤버와 화기애애 대화는 건 못 봐주겠다고 말이다.
“알겠죠?”
“알게쯉미돠…….”
“말 똑바로 안 해요?”
“안 할게. 아이돌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것도 팬의 의무니까.”
“더 열받는데요?”
목적지까지 절반 남았을 즈음, 신아름이 문득 말했다.
“쌤 많이 실망하신 거 같던데요.”
“음, 역시 그렇지?”
그렇게나 원하던 하이라이트 파트 애니메이션화가 물 건너가기 직전이니, 실망할 만하다.
“진짜 아예 방법이 없어요?”
“아예 없는 건 아니야. 그냥 눈을 좀 낮추면 할 순 있어.”
“그럴 바엔 안 하는 게 낫지 않아요?”
“우리도 여러 가지 검토를 해봐야지.”
성필도 웬만해선 고퀄리티로 제작하고 싶었다.
그저 시간이 급해서 아무 데나 맡겼다가, 결과물이 마음에 안 드는 일만은 피하길 바랐다.
하지만 제작사 선정에 시간을 들이면, 뮤비 제작 일정을 못 맞출 테고.
딜레마가 계속 이어진다.
“도착. 여기다.”
대여용 스튜디오가 모든 층을 채운 꼬마 빌딩이었다.
이곳의 모든 층과 방을, 여러 기획사의 아티스트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대여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듣기로는 3개월마다 재계약을 맺는다고 한다.
김민주가 빌린 곳은 3층이다.
“갈까?”
“네.”
그때 성필의 핸드폰이 울렸다.
확인하니, 조정훈이 추천 애니메이션 제작사 목록을 보내왔다. 회사마다 JJH에서 판단한 짤막한 의견도 덧붙여 있었다.
성필은 그것을 보면서 계단을 올랐다.
‘근데 조 감독님이 보낸 설명이랑 회사 이름만 봐선 잘 모르겠네. 선정은 우리 회사 사람들한테 맡겨야…….’
그때 성필의 눈에 띄는 회사 이름이 있었다.
‘사이클롭스 워크스.’
눈에 띄는 것만이 아니다.
성필은 이 회사의 모든 사정을 알고 있었다.
사이클롭스 워크스. 전생에 석세스 엔터가 무차별적 확장 전략으로 흡수했던 회사 중 하나였다.
‘뭐야, 이게 왜 아직 남아 있지?’
아마, 이번 생에선 석세스 엔터의 성장이 둔화된 것 때문에 흡수되지 않은 듯했다.
성필은 눈에 희망이 깃들었다.
‘이 회사의 제작 능력은 다들 알아줘.’
아무렴, 최근 5년간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 최대의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회사니까.
약 2시간 분량의 장편 3D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 한국 문화계에도 신선한 충격을 준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문제는.
‘거하게 망했다는 거지.’
손익분기점의 1/10도 채우지 못하고, ‘사이클롭스’는 기술력 자랑만 한 채 씁쓸하게 패배를 곱씹어야만 했다.
석세스 엔터에 흡수되고는 구조조정을 거치고, 조금씩 성장에 주력하지만 이번 생은 어떨까?
성필이 아는 대로라면…….
‘돈이 궁해 죽기 직전일 거다.’
보였다, 백설하의 꿈을 이루기 위한 조각이.
하지만 그 전에.
“김민주, 나 왔다.”
신아름이 연습실의 문을 열었다.
케이어스의 김민주가 그곳에 있었다. 강한 베이스와 댄스홀 기반 사운드의 음악 속에서.
성필의 귀는 그 음악을 순식간에 흡수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이곳에 온 목적을 달성할 수도 있을 듯하다.
‘설마 이게…….’
케이어스의 컴백곡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