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24화 (424/760)

424화

야간 자율 학습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김채현은 어머니가 운전하고 온 차를 타고 가면서도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어머니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평소엔 차에 타자마자 피로에 절어 곯아떨어지는 김채현이다.

‘중학교 때랑 1, 2학년 땐 대책 없이 아이돌에 미쳤다고 생각했었는데.’

항상 차에서 눈만 감는 딸을 보며 어머니도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모른다.

딸이 대견하기도 하고, 종일 앉아서 공부만 하는 게 불쌍하기도 했다.

그래서 요즘엔 딸이 좋아하는 소녀연맹에게 고맙다. 숨 트일 구석 하나 없는 수험 생활 중, 짬짬이라도 무언가에 열중할 수 있단 건 행복한 일이니까.

“딸.”

“어.”

“걔네들 뭐가 그렇게 좋아?”

“얼굴.”

“하기사, 엄마도 어렸을 때 여자 아이돌들 좋아했어. 딸 A.O.F 알아?”

“이름만 들었어. 요즘도 예능에 가끔 나오잖아. 근데 엄마는 쿨드 좋아했었다면서. 아빠랑 데이트할 때 쓸 돈도 앨범에 다 부어 넣어서…….”

“얘는, 그거 다 아빠가 과장하는 거라니까.”

과장이 아니었다.

김채현의 아버지는 아이돌을 쫓아다니는 어머니를 보며 피눈물을 흘렸었더랬다. 진지하게 성형 수술까지 고려했었단 모양이다.

“엄마도 어렸을 때 덕질해서 그런가, 내가 이러는데 별로 뭐라고 안 하네. 선주네는 기지배가 왜 같은 기지배를 좋아하고 돈 쓰냐면서 뭐라고 했다던데.”

“그게 문제야? 그럼 선주네 부모님은 남자 아이돌 좋아하는 거면 상관없고?”

“걍 남들이 보기엔…….”

생판 남을, 그것도 평생 만날 가능성이 없는 사람에게, 돌아오지 않는 사랑과 돈 그리고 시간을 쓰는 게 꼴 보기 싫을 뿐이었다.

‘좋아하는 것만으로 행복하다’는 설명은 통하지 않는다.

아이돌에 대한 사랑은 대중매체가 발명되기 전까진 존재하지 않던 형태의 사랑이다. 그래서 현대인에게도 익숙하지 않게 받아들여진다.

사랑이란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맺는데, 아이돌을 사랑한다는 행위엔 쌍방향의 관계가 부재하다.

덕질을 해본 적 없는 사람들은 그 부조리에서 오는 괴리감을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자유연애가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수백 년이 필요했는데, 아이돌에 대한 사랑이 인정받으려면 그 배의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선주네 부모님이 보기엔…… 슬슬 이런 건 졸업해야 한다고 생각하겠지.”

김채현은 어머니의 눈치를 보았다. 어머니도 그런 생각을 가진 건 아닐까 해서였다.

“엄마도 그래?”

“아니. 취미가 있으면 좋은 거지. 딸, 그거 알어? 너네 아빠가 나랑 만날 때 있잖아, 일본 만화 좋아했어.”

“……아빠가?”

“응. 그땐 지금처럼 인터넷이 좋니, 텔레비전으로 그런 거 볼 수 있니. 좋아하는 만화 영화 나오는 요일엔 직접 차 몰고 부산까지 가서 테이프 사 오고 그랬었어.”

“뭐? 옛날엔 애니를 그런 식으로 봤어?”

정말 상상도 못 한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일본에서 녹화한 애니메이션 비디오가 바다 건너 배 타고 오면 부산에서 산다고?

아빠가 그걸 샀다고? 매주 부산까지 가서?

“아빠 진짜 오타쿠였네.”

김채현은 가까스로 ‘씹덕’ 대신 ‘오타쿠’란 단어를 꺼낼 수 있었다.

어머니는 옛날 생각이 나는지 피시시 웃었다.

“사람은 끼리끼리 만난다는 게 맞나봐. 나도 아빠 같은 사람한테 빠지고. 눈 큰 여자애들 나오는 만화 좋아하는 사람이랑……. 그 캐릭터 이름이 뭐더라. 머리가 하얗고 교복 입었던 건 기억나는데.”

“언제 그만뒀어? 엄마랑 아빠 취미 생활.”

“아마 취직하고 나서일걸.”

김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세상의 풍파에 견디지 못하고 취미를 손에서 놓는다. 그런 사람이 세상엔 많을 것이다.

대부분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10대와 20대가 타깃이라고 하니 말이다.

“딸.”

“응?”

“나랑 아빠는 그 시기를 겪어봐서 알아. 누구에게건 뭔가에 흠뻑 빠질 때가 있어. 그게 만화일 수도 있고, 아이돌일 수도 있고, 스포츠 선수나 배우일 수도 있어. 모두 철없을 때 홀려서 쫓아다닌다고 하는 별거 아닌 경험은, 의외로 사람한테 큰 흔적을 남겨.”

아직 자아가 확립되지 않았을 시기.

사람들은 그 자아를 지탱하기 위해 자신 대신 사랑할 것을 찾는다. 대상이 무엇인지는 상관없다. 그 모든 경험은, 비록 기억이 사라지더라도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남게 된다.

“그때 겪는 감정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분명 큰 도움이 될 거야. 사실 동반자나 마찬가지지. 딸도 크면 이때 기억하면서 ‘그렇구나’ 할걸?”

흔적을 남긴다.

김채현은 그 말이 마음에 와닿았다.

그녀는 핸드폰에 떠오른 소녀연맹 멤버들의 예능 클립 화면을 바라보았다.

이 다섯 명의 소녀들을 사랑하고, 응원하고, 황홀해하던 경험은 손과 얼굴에 주름이 새겨지고도 남을 것이었다.

아니, 이미 깊은 흔적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강렬히 남아 있었다.

‘정말…… 내 진로를 정해버렸으니까.’

김채현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영어 단어장을 꺼냈다.

‘올해에 꼭 가는 거야.’

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대학.

그곳의 공연예술학과.

김채현은 그곳에 진학하여.

‘가로 엔터에 입사한다.’

김채현의 꿈은 엔터테인먼트 기획자다.

문화로서 사람들에게 행복과 감동을 주고, 또한 세상을 바꾸어나갈 것이다.

소녀연맹이 새긴 커다란 흔적은, 영원토록 그녀의 미래를 바꾸어놓았다.

* * *

소녀연맹은 대한민국의 예능이란 예능은 전부 출연할 기세였다.

소녀연맹을 모르는 사람조차 최근 몇 주간 그녀들의 이름을 머릿속에 각인할 정도였다.

항상 성공적인 것만은 아니었지만, 몇몇 개는 대박을 터뜨려 조회 수 백만을 넘는 인기 예능 클립이 탄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지속적으로 쓸 수가 없어.’

대중은 쉽게 싫증을 내는 편이다. 괜히 이미지 소모란 단어가 있는 게 아니다.

예능 출연은 짧고 굵게 치고 빠져야만 한다.

‘목적은 사람들에게 소녀연맹의 존재를 알리는 거였어. 이건 일단 성공이다.’

후일 소녀연맹이 컴백했을 때, 관련 기사나 소식의 제목을 보고 ‘이건 뭐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노래도 잘 부르는 귀여움 천재’ 백설하.

차창을 격파했던 장하양.

귀신의 집에서 진짜 울었던 조아라.

모교에 방문해서 본인의 졸업 앨범 사진을 찢어버린 신아름.

교양 프로그램에서 10연속 한국사 문제를 전부 맞춘 리카.

대중들은 소녀연맹의 컴백과 동시에 멤버들을 기억해낼 것이다. 또한, 멤버들이 예능에서 질리도록 밝혔던 ‘백설하가 프로듀싱한 곡’도 기억하겠지.

아이돌이 직접 제작 총괄한 노래를, 호기심에 한 번씩 들어볼 것이다.

‘우리 애들은 잘해줬어.’

소녀연맹의 전초전은 승리를 거두었다고 평해야 좋으리라. 그녀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해내었다.

무대 앞의 싸움은 해냈다.

이젠 무대 뒤의 싸움만 남았다.

정확하게는, 뮤직비디오가 남았다.

“으음.”

백설하는 조정훈이 사장으로 있는 JJH에서 기획한 스토리보드를 탐탁지 않게 확인했다.

여러 번의 협의를 거쳐서 만들어낸 것이지만, 아직도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저어.”

백설하가 입을 열었다.

조정훈은 침을 꼴깍 삼키며 그녀의 입을 보았다. 성필과 손혜빈, 가로 엔터의 비주얼 파트 직원들도 백설하에게 집중했다.

“좋아요. 정말 좋은데요. 임팩트가…….”

디자인 관련 직업군이 가장 화나는 말 1위.

‘좋은데요, 뭔가 부족해요’다.

클라이언트도 부족한 것을 모르면서 디자이너에게 ‘부족하다’고 말하는 상황이 가장 화난다.

조정훈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백설하를 응시했다. 과연 그녀는 ‘뭔가 부족하다’고 말할 것인가?

“여기 마지막 하이라이트의 임팩트가 더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

조정훈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스토리보드는 가로 엔터와 JJH의 협의를 거쳐 완성한 것이다.

심지어 그곳엔 백설하도 참여했는데, 다짜고짜 ‘부족하다’고 말했으면 조정훈도 난감했을 터였다.

최소한 마음에 안 드는 파트를 정확하게 짚어줬으니, 백설하는 양반에 속했다.

“그런데, 전에 설하 씨도 말씀해주셨다시피 멤버분들 퍼포먼스로 채우기로 했잖아요. 그렇게 디자인한 건데…….”

아이돌의 뮤직비디오에는 여러 레퍼토리가 있다.

오직 퍼포먼스로만 이루어진 퍼포먼스 버전 뮤직비디오.

마치 화보처럼 멤버별로 컨셉을 잡고, 짤막한 비주얼 씬과 퍼포먼스를 교차하는 식의 뮤직비디오.

어떤 스토리를 잡고, 스토리의 진행과 퍼포먼스를 교차하여 보여주는 뮤직비디오.

아예 스토리 진행만 보여주는 뮤직비디오.

가로 엔터가 택한 건 스토리와 퍼포먼스가 결합된 버전이었다.

그리고 뮤직비디오의 스토리는, 높은 나무에 열린 하나의 사과를 따 먹기 위해 여러 전략을 쓰는 소녀연맹 멤버들이었다.

사랑의 쟁취를 잘 나타내는 메타포라고 다들 인정했다.

“이펙트를 더 줘볼까요?”

“아뇨, 조금,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한데요.”

백설하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았다.

여러 번 협의한 사항에 다시 태클 거는 게 미안한 듯했다. 성필은 그런 백설하를 안심시켰다.

“설하야, 시원하게 말해. 아티스트가 욕심을 가지고 요구사항을 늘려주는 게, 조 감독님 입장에서도 더 좋은 일이야. 아무렴, 같이 일하는 아티스트가 의욕이 넘치는데 누가 싫어하겠어?”

“…….”

“에헤헤, 그렇죠?”

“…….”

“맞죠, 조 감독님?”

조정훈은 자본주의적인 미소를 지었다. 또 회사 직원들과 지옥의 마라톤 회의를 할 생각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네, 그렇죠…….”

“그럼.”

조정훈이 수긍하자, 백설하는 다시 진지한 분위기로 돌아왔다.

“‘애플 크러쉬’는 사운드적으로 하이라이트를 표현할 수 없는 곡이에요. 그러니 긴장감과 해소, 사운드의 마이너스와 플러스 대비 효과를 쓸 수 없어요. 하이라이트를 표현하려면 이전보다 훨씬 정밀한 기교가 필요해요.”

“어떤……?”

“그건 감독님이 생각해주셔야…….”

백설하, 아티스트 다 됐다!

“비주얼적인 임팩트가 굉장히, 굉장히 커야 해요.”

뮤직비디오야 다 거기서 거기일 것이다.

사람이 나와서 춤추는 게 메인인 콘텐츠 아닌가. 강렬함을 어떻게 주어야 할까.

카메라 앵글을 더욱 극적으로? 그런데 애플 크러쉬는 그럴 만한 곡이 아닌데.

CG을 막막 사용해? 근데 그러면 너무 싼 티가 날 수도 있는데.

조정훈은 점점 고민에 빠져들었다.

“일단은.”

성필이 실의에 빠진 조정훈을 대신해 회의를 이끌었다.

“그건 저희 쪽도 생각해볼게요. 조 감독님은 너무 부담가지지 마시고, 기한에만 맞춰서 생각해주세요. 이번 곡은 옛날 것들처럼 해외 로케나 큰 세트도 필요 없어서, 금방 찍을 수 있잖아요.”

“그나마 그건 다행이죠. 알겠습니다. 저희도 최대한 임팩트 있는 하이라이트를 준비해볼게요.”

곡이 최후의 하이라이트로 진입하고 이어지는 약 10초. 그게 ‘애플 크러쉬’ 뮤직비디오의 성패를 가릴 것이다.

케이팝은 시각적인 요소와 분할될 수 없는 종합예술이다.

아이돌은 춤을 택한 순간부터 뮤직비디오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동시에 뮤직비디오의 세례를 받았다.

케이팝의 영상미는 아이돌이 글로벌적인 호응을 얻을 수 있던 가장 주요한 이유 중 하나였으니, 절대 소홀할 수 없다.

‘곡보다 중요하다’고 하면 과장이겠지만, 곡에 못지않게 매우 중요한 파트임이 틀림없다.

“그럼 다음 회의 때 뵙겠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백설하는 금방 성필을 다시 찾았다. ‘회의 수고하셨습니다’란 말과 함께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자꾸 뮤비 촬영이 지연되네요…….”

“어쩔 수 없지. 최고를 위해서니까. 근데 기한은 어떻게든 맞출 수 있어.”

“그, 예전에 이사님이 컴백 이틀 전에 가사 받아서 녹음한 그룹 얘기해 주셨잖아요. 그땐 ‘어떻게 그러지?’ 싶었는데, 정말 가능할 거 같아요…….”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맞기 전까지는.

그 명언이 왜 태어났는지 몇 주간 여실히 느끼게 됐다.

세상사 마음대로 안 되는 것투성이다. 심지어 그게 더 나은 결과물을 위한 것이니, 미루는 일을 정당화까지 하게 된다.

“그런데 임팩트라니, 뭐가 부족하게 느껴져?”

“아, 어, 그게요. 소녀연맹이 지금까진 스토리텔링에 굉장히 신경을 썼었잖아요. 그래서 스토리의 기승전결에서 오는 카타르시스가 뮤비에 있었는데, 이번엔 그런 게 없으니까요.”

오직 퍼포먼스로만 하이라이트를 표현하려니, 소녀연맹의 전작을 보았던 백설하로서는 밍밍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비주얼적인 방면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한 것이다.

“근데 역시, 무리한 요구겠죠……?”

“무리한 게 어딨어. 뭐든 하려면 할 수 있지.”

“호, 혹시 좋은 생각 있으세요?”

“아니.”

“…….”

“차차 생각해보자.”

“헤헤, 막 창의적인 생각이 마구마구 들게 하는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있습니다.”

불쑥 한구인이 나타나자 백설하가 화들짝 놀라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마치 귀신의 집에서 진짜 울었던 조아라와 비슷했다.

“하, 한 이사님 사람 놀래키지 마세요!”

“아까부터 뒤에 있었습니다만…….”

“……방법이 있다구요? 저희 뮤직비디오요?”

과연 한구인이 떠올린 하이라이트의 임팩트를 증가시키는 법은 무엇일까.

한구인도 오랫동안 일을 하다 보니 아이돌에 관한 안목이 생겼을 것이다.

백설하는 기대하며 그의 입을 바라보았다.

“그거 말고, 창의적인 생각이 마구마구 들게 하는 방법 말입니다.”

“아, 그거요…….”

“대놓고 실망하시니 가슴이 아픕니다. 크흠. 창의성 계발 기법 중에 여섯 색깔 모자 기법이란 게 있습니다.”

“창의성 계발 기법이요?”

“그 왜, 브레인스토밍 같은 방법들을 창의성 계발 기법이라고 부릅니다. 그중 하나입니다.”

요컨대 여섯 색깔 모자 기법이란 이러했다.

레드, 블루, 블랙, 화이트, 그린, 옐로. 각 색의 모자를 쓰면 각 색에 맞는 아이디어만 내는 것이었다.

화이트는 객관.

레드는 감정.

옐로는 장점.

블랙은 비판.

블루는 통제.

그린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지껄이기.

이런 식으로 회의를 진행하면, 회의가 관성에 따라 흘러가는 것을 막아준다는 모양이다.

“확실히, 무조건 장점만 말하기나 아무 말 대잔치보다는 훨씬 낫겠네요.”

“그렇습니다. 마침 멤버분들과 박 이사님까지 합치면 여섯 명이니…….”

* * *

“……왜 박 이사님이 혼자서 모자 여섯 개를 전부 쓰시는 겁니까?”

“네? 이렇게 하는 거 아니었어요?”

성필은 겹쳐 쓴 여섯 개의 모자를 벗어서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그러자 멤버들이 실망했다.

‘아저씨가 또 바보짓 한대!’란 소식을 듣고 달려왔건만, 아무래도 바보짓은 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혼자서 여러 관점으로 생각하니까 의미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박 이사님은 의외로 남의 말씀을 잘 안 듣는 성격이시군요. 아니면 남자 말만 잘 안 들으시는 겁니까?”

“으하하! 그러시면 제가 여자에만 관심 있는 거 같잖아요. 저는 보이그룹한테도 관심 있다고요.”

“왜 내가 박 이사님 남자 좋아하는 얘기를 듣고 있어야 하지?”

“하양 언니, 그거 컨셉이에요? 뭔 아저씨가 남자 얘기만 하면 그 말 해요.”

아무튼, 시험 삼아 성필이 혼자 여섯 색깔 모자 기법을 해보기로 했다.

성필은 먼저 흰색 모자를 썼다.

육등분(六等分)의 성필, 시작!

화이트 성필이 말했다.

“‘애플 크러쉬’의 스토리보드 중 라스트 하이라이트를 설하가 마음에 안 들어한대. 얘들아, 어떡하면 좋을까?”

레드 성필이 말했다.

“비주얼 임팩트라면 역시 의상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노출도를 늘리자!”

옐로 성필이 맞장구쳤다.

“그렇지! 청춘이란 억누르지 않고 드러내는 거야! 사랑은 줄곧 고결하고 숭고한 거라고 표현되곤 하지만, 엄연히 본능에서 출발하는 거 아니겠어? 그 부분을 무시하면 안 돼!”

레드 성필이 박수까지 치며 좋아했다.

“맞아. 사랑이 인간을 근본적인 부분에서 변화시키는 이유는, 인간의 본질인 관능적 열망을 직시하게 해주기 때문이잖아!”

“아저씨 그거 레드(감정) 맞아요? 평소보다 더 똑똑해졌는데?”

“사랑이란 두 사람의 욕망이 부딪치고 서로의 한계를 분출하는 거야! 둘이 만나 내뿜는 육체적인 힘! 그게 바로 사랑이야!”

“박 이사님 엣찌(음란)!”

“결국, 사랑의 임팩트란 육체다!”

쾅!

블랙 성필이 책상을 쾅 치면서 반박했다.

“지랄들 하고 있군. 벗어서 임팩트를 줄 수 있다면.”

쿵!

블랙 성필이 다시 책상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성인 잡지 모델들이 팝스타들을 진작 압도했을 거다! 2세대 걸그룹의 정점도 섹시 컨셉이 차지했겠지! 그런데 그랬나?”

“팀장님 해리성 인격 장애 아니야?”

“나 좀 무섭다.”

“아니! 대중이 무대 위에서 바라는 건 노골적인 섹슈얼리티 어필링이 아니다! 그딴 물러터진 의견이나 내려면 차라리 입을 다물어라!”

“아하하, 박 이사님이 여섯 명이네. 진짜 이러면 재밌겠다. 난 블랙 이사님으로 할래.”

“아타시(저)는 레드 이사님이요!”

“얘, 얘들아 박 이사님은 시장에서 파는 물건이 아니잖아…….”

“아.”

그때 그린 성필이 문득 말했다.

“리카 ‘러브 미러’ 뮤비처럼, 아예 라스트 하이라이트 10초를 전부 애니메이션으로 해볼까?”

회의실에 침묵이 감돌았다.

“……애니메이션?”

옐로 성필이 말했다.

“아니, 뭔 애니메이션?”

“팀장님 컨셉 붕괴예요. 옐로 팀장님은 장점만 말해야죠.”

“10초를 전부 애니메이션으로 하겠다고?”

“그게.”

그린 성필이 계속 말을 이었다.

“설하가 전에 컨셉 회의할 때 말했었잖아. 디즈니 주인공들 나오는 사랑 이야기 같은 분위기로 하고 싶다고. 그럼, 진짜 디즈니처럼 멤버들 3D 애니메이션으로 바꾸면 임팩트가 있지 않을까?”

“그렇군.”

블루 성필이 요약했다.

“확실히, 짧게 애니메이션을 삽입하는 테크닉을 사용한 뮤비가 있지. 그게 시각적인 만족감을 주는 건 증명된 바다. 좋아. 다들 이의 있나?”

“아니, 아저씨 언제까지 그거 하게요. 나 진짜 좀 무서운데요.”

“아하하, 나 블루 이사님으로 바꿀래. 아니, 하나가 남으니까 난 블랙이랑 블루로…….”

“하양 언니도 그만해요.”

모든 성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성필이 입을 턱 막았다. 그의 어깨가 전율로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나왔다…….”

정말, 아이디어가 나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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