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3화
누군가가 말했다.
팬은 어떤 조건도 없이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사람이라고.
동시에 또 말했다.
팬질은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는 짝사랑이라고.
고3 김채현은 요즘 그 말의 의미를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팬은 기다리는 사람이다.
‘소련이들 컴백 보고 싶어.’
중학생 때부터 소녀연맹을 보아왔다.
고3이 되어서도 그 사랑은 변함없지만, 과거에 그려왔던 생활과는 달랐다.
숨 막히는 수험 생활 속 소녀연맹을 보면서 힐링을 얻거나, 그녀들을 에너지 삼아 나아가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역시, 컴백이 없으니까 동력이 없어진다고 해야 하나.’
덕질 생활이 밍밍하다.
소녀연맹의 콘서트는 재밌었다.
그때 샀던 콘서트 한정 판매 굿즈는, 그녀의 방에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선반의 가장 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선반 위에 놓이고 걸린 족자봉이나 포스터, 응원봉을 볼 때마다 콘서트의 여운이 되살아난다.
하지만, 사람은 추억만으로 먹고 사는 데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콘텐츠가 여러 가지 올라오긴 하지만, 그래도 앨범 컴백이 보고 싶어.’
소녀연맹의 라이브 머신 리카는 휴가 기간에도 라이브를 자주 켜기로 유명했다. 지금도 자주 라이브를 하면서 팬들에게 효도하는 중이었다.
다른 멤버들도 짬짬이 방송을 하면서 팬들과 소통하거나, SNS에 짤막한 글을 올리곤 했다.
“채현아.”
쉬는 시간, 다른 반 친구인 이선주가 놀러 왔다. 김채현은 영어 단어장을 내려놓고, 반가우면서도 일부러 틱틱댔다.
“넌 쉬는 시간마다 피곤하지도 않아?”
“몇 번 온다고 그래. 것보다 수현이 연습생 됐다잖아.”
“응.”
“그…… 혹시 수현이한테 소련이들 사인받아달라는 거 어떨까?”
“뭐어?”
김채현은 순간 마음이 동했지만, 친구에게 그런 일을 시키고 싶진 않았다.
백수현은 가로 엔터의 연습생으로 들어갔다. 얼마 전에 만났는데 어깨에 뽕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보는 김채현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허세 섞인 말투는 짜증 나기까지 했었다.
온전히 자기 힘으로만 뽑혔다나.
‘아니, 연습생은 당연히 자기 힘으로 되는 거지. 누구 빽으로 들어가나?’
그래도 뭐, 친구니까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야, 수현이 입장에서 생각해 봐. 우리야 소련이들이라고 부르고, 이름에 ‘씨’나 ‘님’도 안 붙이지만. 수현이한텐 하늘 같으신 선배님들이잖아. 가서 사인받아달라고 수현이가 잘도 말하겠다.”
“글치…….”
이선주는 이미 예상했음에도 실망한 티를 버리지 못했다.
소련이들의 사인…… 사실 김채현은 이미 팬미팅 때 받았던 터라, 크게 구미가 당기지는 않았다.
물론 멋들어진 사인지에 커다란 사인을 받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백수현에게 부담을 줘서까지 가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나도 걍 해본 말이야.”
“거짓말하네.”
“근데 너 SMS 엔터 새 걸그룹 봤어?”
“아니.”
“야, 노래 개미쳤어. 요즘 밖에 다 그 노래만 들려. 차트 1위도 바로 올라가고.”
김채현이 이선주에게 의심 섞인 눈초리를 보냈다. 과거, 이선주는 소녀연맹을 배신하고 케이어스까지 파면서 잡덕의 길을 걸었다.
지금도 그러하다.
거기에다가 또 다른 걸그룹까지 추가할 생각인가 보다.
“거기 막내가 고1이거든?”
“뭐? 고1? 우리보다 어린 애들이 데뷔한다고?”
“우리도 이제 늙었지 뭐…….”
세상에.
지금까지 걸그룹이나 보이그룹은 전부 언니 오빠들이었는데.
언제 자신이 이렇게나 나이 든 것일까.
김채현은 자신의 책상을 보았다. 영어 문제집 위에 올라온 단어장이 보였다.
고3, 19살이다.
‘에휴, 이러다가 30대도 금방이겠네.’
어쨌거나, 이선주는 쉬는 시간 내내 대형 기획사인 SMS 엔터의 신인 걸그룹에 관한 예찬을 늘어놓다가 사라졌다.
수업 종이 울리고, 영어 선생이 들어왔다.
“자습하자. 모르는 거 있으면 들고 와.”
김채현의 고등학교는 2학년 겨울 방학 보충수업 때 모든 3학년 교과 진도를 뺐다.
따라서 국어, 영어, 수학은 웬만한 경우 자습만 하는 편이었다. 교사에 따라 문제 풀이 시연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보통은 자습이었다.
김채현은 덜 외운 단어를 십수 분 외운 후 문제집을 풀려 했다. 그러다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교사는 어느 학생이 가져온 문제를 풀어주고 있었다.
김채현은 책상 아래로 핸드폰을 가져가 이어폰을 연결한 뒤, SMS 엔터의 새 걸그룹 뮤비를 보았다.
‘멋지다.’
이선주가 그렇게나 호들갑 떨 만했다.
춤이나 노래,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역시 대형 기획사에서 만들었다고 해야 할까, 멤버 한 명 한 명이 모두 완성형이었다.
막 생긴 그룹이니, 지금부터 덕질하면 성골로서 충만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대형 기획사의 아이돌이니 성적 걱정도 없겠고, 사생활도 엄정히 관리될 테니 스트레스받을 일도 거의 없을 터다.
“흐음.”
김채현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창밖을 보았다.
저 멀리 운동장 끝의 철봉이 보였다. 저곳에서 소녀연맹의 조아라가 졸업 사진을 찍었더랬다.
‘참, 나도 바보 같았지.’
소녀연맹의 조아라가 다녔던 학교라고 진학을 희망하다니.
입학 후 몇 개월 동안 얼마나 즐거웠던가.
쭈뼛쭈뼛 조아라를 보아왔던 2학년, 3학년 선배들을 찾아가 ‘소녀연맹 아라 아세요?’라고 물어보기까지 했었다.
조아라의 이야기를 수집하는 게 김채현과 이선주의 취미이기까지 했었다.
‘아라는 학교에 거의 오전만 있어서 제대로 본 적도 없단 대답뿐이었지.’
그나마 건진 미담이라곤, 시험 기간 계단에서 공부하는 것을 보았다던가. 급식실에서도 시끄럽게 떠들지 않고 밥만 먹었다던가. 졸업식 때 사진을 부탁하니 흔쾌히 찍어줬단 것 정도였다.
그걸 떠올리니 김채현의 입가엔 자연스레 미소가 감돌았다.
저녁 시간.
고3인 그녀가 유일하게 여유로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친구인 이선주와 함께 느릿느릿 운동장을 걸었다.
그러면서, 김채현은 소녀연맹 공식 채널에 업로드되는 ‘우리들의 프로듀싱’을 보았다.
[음악을…… 작곡과 편곡 과정에 참여하면서 도움이 많이 된다고 느끼는 게 있는데요.]
백설하는 이 시리즈의 주인공이었다.
매 편마다 그녀가 겪는 프로듀싱 과정과, 그로 인해 생기는 고민, 기쁨을 다루고 있었다.
문제점은 그녀가 어떤 곡을 작업하는지 들을 수 없단 것이었다. 백설하는 분명 무슨 곡을 말하고 있는데, 김채현은 윤곽조차 잡을 수 없었다.
‘이 시리즈 시작할 땐 금방 컴백할 줄 알았지.’
이 인고의 시간이 더 이어질 줄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어쩌면, 이 시리즈는 소녀연맹이 컴백한 뒤에 보아야 더 재밌게 감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음악을 듣는 귀가 이전보다 좋아졌어요. 박자 감각이 좋아진다거나, 안 들리던 게 들려요. 이게 춤출 때도 더 도움이 되구요.]
그리고 또, 김채현은 이 시리즈를 쭉 봐오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었다.
백설하의 분위기가 점점 더 무겁고 진중하게 변해간다.
처음에는 열정과 설렘에 들떠서 곧잘 웃음을 보여주었지만, 지금은 진지한 인터뷰를 하듯 텐션이 낮았다.
마치 고3이 시작되는 학기에는 인서울을 부수겠다며 들떴던 학생이, 학기 말이 되면 재수를 고려하듯이 말이다.
김채현은 댓글로 ‘기대하고 있어 힘내 설하야!’라고 적어주었다. 백설하가 이 댓글을 볼 확률은 0에 수렴하겠지만, 그래도 늘어난 댓글 수로나마 백설하가 위안받길 바랐다.
‘컴백은 언제일까. 여름? 가을? 겨울일지도 모르겠네.’
SMS 엔터의 신인 걸그룹은 물론 좋았다.
하지만 장하양의 사진을 처음 봤을 때 같은 두근거림은 찾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소녀연맹은 김채현이 마지막으로 덕질하는 아이돌이 될지도 몰랐다. 슬슬 아이돌에 쏟는 시간도 줄어들…….
“야, 소련이들 예능이 엄청 많이 나오는데?”
“어? 아, ‘더 언노운 싱어’ 때문인가 보네.”
백설하가 ‘더 언노운 싱어’에서 패배함으로써, 모두가 다 아는 그녀의 정체가 공개됐다.
가면을 벗지 않아도, 백설하의 시그니처나 다름없는 특징으로 인해 모두가 알았지만. 세상은 전혀 몰랐단 듯이 백설하를 대했다.
“클립이나 나오면 볼…….”
“아니 진짜 많이 나온다니까!”
이선주가 소녀연맹의 스케줄표를 들이밀었다. 김채현은 이선주가 오버한다고 생각했지만, 표를 보곤 생각이 확 바뀌었다.
“이, 이거 전부 나온다고?”
출연 예능만 10개가 넘는다.
김채현의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저 예능들에서 뽑을 수 있는 영상 클립만 몇 개일 것이며, 능력자 인민이들이 또 편집은 얼마나 맛깔나게 해줄 것인가?
지금까지 나온 예능들과, 앞으로 나올 예능을 합하면 소녀연맹 콘텐츠가 화수분처럼 아이튜브와 SNS를 지배할 게 틀림없다.
아니, 그것보다.
“이거 정말…….”
“컴백하려는 거 같지?”
소녀연맹의 기획사, 가로 엔터가 본격적인 공세에 들어섰다.
이건 마치 선전포고와 같았다.
소녀연맹이 곧 돌아온다는 신호임이 틀림없다.
심지어 오늘도 소녀연맹의 백설하와 장하양이 출연하는 예능이 잡혀 있다.
제목은 ‘우리는 산다’였다.
“……이거 그, 재난이나 사고 상황에서 대처 방법 알려주는 프로그램 아니야?”
“나갈 수 있는 예능이란 예능은 다 나가려나 본데?”
소녀연맹이 미디어에 얼굴을 비추는 건 팬으로서 기쁜 일이지만, 그래도 좀 가려가면서 받아주지.
‘시청률 1%도 안 나오는 건데…….’
그 실망은, 그날 야자를 마치는 길에 환희로 바뀌었다.
‘소녀연맹 장하양 격파’가 실시간 검색어 검색 순위를 점령했을 때였다.
* * *
안전 강사 한 명과 코미디언 MC 한 명, 그리고 게스트들을 데리고 진행하는 예능 프로그램 ‘우리는 산다’.
예능국이 아니라 교양국에서나 편성할 법한 프로그램으로, 컨셉의 한계 때문에 시청률 1%의 벽을 뚫지 못하고 있었다.
“PD님, 저희 이대로면 종영되겠는데요.”
“나도 알아.”
‘우리는 산다’가 화제를 끌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컨셉 자체가 화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옛날에 존재했던 레전드 예능 ‘이승 탈출’처럼 자극적인 스토리로만 도배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산다’의 플롯은 안전 강사와 함께 진행하는 안전 교육이었으니까.
“작가팀, 뭐 생각 없어요?”
오늘도 평화롭기만 한 PD와 작가팀의 회의.
PD가 ‘아이디어 못 내면 회의 안 끝내요’라고 선언한 지 4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았다.
작가들이 돌아가면서 기획을 발표하고, 피드백하고, 또 고민해봐도, 시청률을 올릴 만한 아이디어가 없다.
하지만 PD도 슬프지 않았다.
‘걍 빨리 종영하고 새 프로그램 맡자.’
어쩌면 예능 PD의 무덤인 교양국으로 갈 수도 있겠지만, 선배 PD 밑에서 아마존이나 남미 위험지대를 돌아다니는 것도 재밌겠단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이번에 채택될 예정인 ‘차량 전복 사고 대처법’ 촬영보단 재밌을 것 같다.
“그럼 이번엔 걍 차량 전복 사고 대처법 에피소드로 가고요, 게스트는요?”
“개그맨 김순항이랑 아이돌 세인으로 꼽아봤는데요.”
“누군데요?”
“저도 어제 조사하면서 처음 알았어요.”
“그렇군요. 그럼 그 두 분으로 할까요.”
곧 종영 예정일만큼 시청률이 낮은 방송답게, 나오려는 게스트도 다 거기서 거기였다.
어디든 방송 한 번이 고픈 사람들 말이다.
화제가 될 법한 유명인이 나올 일은, 이 방송이 끝날 때까지 없겠지.
“안녕하십니까!”
“끼아아아아아아아악 당신 누구야아아아악!”
민경섭이 회의실 문을 박차며 힘차게 들어왔다. PD가 기겁하면서 소리쳤지만, 민경섭은 우직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안전 교육 방송 PD와 작가들답게 대처도 빨랐다.
“경비 불러요!”
“바리케이드 쌓아!”
“농성해!”
“소, 소녀연맹 담당 매니저입니다!”
‘소녀연맹’이란 단어에 제작진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민경섭이 맹수를 진정시키듯 손을 저으면서, 바리케이드가 되기 직전인 테이블 위에 명함을 꺼내 올렸다.
“게스트 찾으신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소녀연맹 설하를 게스트로…….”
“고정 MC로 나와주세요!”
소녀연맹, 너무나 쉽게 예능 출연 확정!
“MC는, 하하, 죄송합니다.”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차라도 드시고 가세요! 김 작가, CP님한테 가서 우리 예고편 송출 횟수 늘려달라고 해!”
“네? 저희 예고편 안 내보내 준 지 두 달 넘었는데요?”
“그니까 소녀연맹 설하 님 나온다고 해야지!”
“아하, 알겠습니닷!”
* * *
백설하는 소녀연맹의 프로듀싱 협의, 트레이닝, 멤버 지도만으로도 힘들다.
종일 머리가 불타는 기분이다.
하지만 옛날과는 다르다.
본인이 프로듀싱한 ‘애플 크러쉬’를 믿지 못했을 땐 아침에 일어나는 게 두려웠지만, 이젠 자기 전 내일이 기대된다.
기분 좋게 머릿속의 불꽃이 타오른다.
‘오늘 할 일은 예능.’
이후 몇 주 동안 잡힌 예능만 해도 두 손으로 셀 수 없다.
그렇다, 프로듀싱만으로도 바쁘다.
하지만 대충할 수는 없다.
‘홍보도 프로듀싱의 일부, 프로듀싱을 넘어서는 매니지먼트의 영역.’
아무리 좋은 곡이라도 사람들이 들어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돌은 무조건적인 청취층이 보장되어 있단 점에서 다른 뮤지션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엔 그 이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사람들이 한 명이라도 더 우리의 노래를 들을 수 있도록.’
백설하는 소녀연맹을 알린다.
아무리 적은 사람이 보는 예능이라도 가리지 않고 나간다.
‘이건 나의 싸움, 아니. 우리들의 싸움이다.’
예능은 프로듀싱과는 또 다른 전쟁터다.
그런 곳에, 백설하는 장하양과 함께 나와 전의를 다졌다.
“하양이는 예능이 서투니까 내가 잘 서포트해줄게.”
“부탁드려요 언니.”
장하양은 예능이나 라디오에 나갈 때마다 영 맥을 추지 못했다.
흑화한 소녀연맹 팬들이 모이는 ‘조아라 마이너 갤러리’에서도 장하양을 꽃병풍이라 부르곤 하니 말이다.
예능감은 꽝이란 평가가 지배적이다.
백설하는 그런 반응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사람들은 심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도 인터넷에 적어둬서, 그들을 원망한 적도 있었다.
‘하양이가 또 그런 말을 듣게 할 순 없어.’
예능 출연 경험이 많은 자신이 리드해야 한다.
“차량 전복 사고 상황에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여 명을 달리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안전 강사가 MC의 신호에 따라 설명을 시작했다. 아스팔트로 덮인, 안전 교육을 위한 공터에는 자동차가 두 대 놓여져 있었다.
“밀폐된 차량에 불이 붙어 일산화탄소 중독이 된다던가, 아니면 아예 엔진이 폭발할 수도 있습니다. 가장 많은 경우는, 전복된 차량이 무게 때문에 쓰러지며 이차적인 충격을 받는 겁니다.”
강사는 ‘그럴 때는 바로 차에서 나와야 합니다’라면서 두 대의 차 중 뒤집힌 곳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런데 보통은 차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창문을 내리려 해도 전력 계통이 고장 나 작동하지 않곤 합니다. 이럴 때는 창문을 깨야겠죠.”
강사는 능숙하게 웃옷을 벗고 손을 감쌌다. 그리고 주먹으로 창문을 부순 뒤, 유리로부터 몸을 보호하려고 창문틀에 옷을 올려놓고 기어 나왔다.
“저, 저희가 해보는 건가요?”
“하하, 그건 너무 위험하니까 전복되지 않은 차의 유리를 깨보는 걸로 대신하겠습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제작진은 새삼 절망하고 있었다.
“아무리 게스트가 좋아도…….”
“방송 플롯이 쓰레기면…….”
“개노잼이네…….”
“이거 너희들이랑 나랑 같이 회의해서 짠 프로그램인 거 잊었냐?!”
메인 PD는 작가와 동생 PD들의 험담을 듣곤 일갈을 날렸다. 하지만, 이 플롯이 재미없는 건 메인 PD가 가장 잘 알았다.
‘노래도 잘 부르는 귀여움 천재가 나오면 뭐 해. 방송 자체가 재미없는데…….’
이번엔 소녀연맹의 네임 벨류로 시청률 1%는 돌파할지도 모르겠지만, 한때의 돌풍에 불과할 듯하다.
메인 PD는 한숨을 내쉬고 다시 촬영에 집중했다.
“이, 이렇게요?”
“네. 그렇게 감싸시면 됩니다.”
백설하는 안전을 위해 손에 붕대를 두르고, 또 그 위에 웃옷을 감싸 글러브처럼 만들었다.
“이제 창문을 있는 힘껏 치세요!”
백설하는 강사의 지도대로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잡고, 양손의 힘을 이용해 차창으로 힘껏 주먹을 내질렀다.
꿍.
둔탁한 소음만 들리지, 창문은 깨질 기미가 안 보였다.
“어, 어?”
백설하는 쉽게 깨질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안 깨지자 힘을 점점 올리다가, 마지막엔 전력을 다해 주먹을 내질렀다.
하지만 차창은 깨지지 않았다.
“이게 선팅이 돼 있어서 더 깨기 힘듭니다.”
“헤헤, 쉽게 될 줄 알았어요…….”
“유리란 게 미디어에서 깨지는 역할로 많이 나오는데, 실은 굉장히 부수기 어려운 물질입니다. 특히 차 안에 갇힌 상황에선 자세가 안 나오기 때문에, 온전히 팔 힘만으로 부숴야 하거든요. 훨씬 난이도가 높죠.”
백설하는 ‘차 안에 갇히면 절대 못 부수겠네’란 생각을 했다.
강사는 이미 예상한 듯 차례를 장하양에게로 넘겼다.
‘좋아, 이대로 하양 씨만 실패하면 다음으로 넘어가야겠다.’
방송 대본은 이러했다.
‘여성분들은 근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아 부수는 게 쉽지 않으실 텐데요’라며, 이럴 때 유용한 방법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어디 보자, 다음에 쓸 소품이…….’
팡!
강사가 잠시 소품을 찾느라 한눈판 사이, 듣기에도 청명한 파괴음이 들렸다.
급히 그곳을 보니, 장하양 앞에 놓인 차의 조수석 창문이 깔끔하게 부서져 있었다.
“……?”
팡!
이번에야말로 보았다.
장하양은 조수석 창문에서 그치지 않고 운전석 창문도 부수었다.
‘말도 안 돼.’
강사가 경악했다.
저 자세는, 저 정권 지르기는, 일반 여성이 할 수 있을 만한 게 아니었다. 특히 굶는 게 일인 여자 아이돌이라면 더욱.
‘회전력을 줘서 지르잖아? 저건 코어 힘이…….’
강사의 취미는 골프다.
골프 연습장에서 여자들이 클럽을 휘두르는 것을 보면, 휘두를 때 몸이 클럽에 이끌려 간다. 코어의 힘이 약해서 몸이 회전력을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보통 여자는 그럴 텐데, 장하양은 주먹을 내지를 때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다. 하체에서 올라온 힘을 코어가 전달하여 어깨와 팔까지 이어져, 주먹에서 폭발한다.
강사는 그녀의 자세만으로도, 장하양이 육체를 단련해온 기간을 알 수 있었다.
팡!
조수석 뒤의 차창이 또 부서졌다.
“……?”
팡!
반대편 차창도 부서졌다.
“그, 그만…….”
와장창!
장하양은 보닛에 올라가 플라잉 펀치로 차의 앞유리마저 부수었다. 그리고 차가 두더지 잡기라도 되는 듯 보이는 유리마다 주먹을 내질러 박살 냈다.
강사가 경악했다.
“그만해도 괜찮은데요?!”
“아하하, 이거 재밌어요!”
어느새 자동차는 눈 뜨고 볼 수 없을 몰골이 되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우리는 산다’의 메인 PD는 어느 생각을 떠올렸다.
뇌리에 번개가 내려친 것만 같은, 진실로 번뜩이는 아이디어였다.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게 평범한 게스트가 아니라 군인이나 특수부대원이면 어떨까?’
지금까지 나왔던 게스트들은 철저하게 ‘잘하지 못하’고 ‘배우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장하양이 차 유리를 격파하는 모습을 보니 속이 다 시원했다.
만약 특수부대원을 위기 상황에 몰아넣고 탈출하거나,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재밌지 않을까? 당연히 못 할 줄 알았던 하양 씨가 유리창을 송판처럼 격파하는 것처럼…….’
의도치 않게, 장하양은 ‘우리는 산다’의 레전드 편을 갱신했다.
또한 미래의 레전드 예능도 탄생시켰다.
* * *
“형, 하양이한테 ‘미래차’ 티비 광고 들어왔는데요? 그리고 또…… 무슨 유리 공장 견학 영상 찍어달래요.”
“광고? 우리 애들 활동도 안 하는데 광고가 어떻…… 헤엑, 뭐 이렇게 돈을 많이 줘?”
“그게…….”
[검색어 순위
1. 소녀연맹 하양 유리 격파
2. ‘우리는 산다’ 차량 모델
3. ‘미래차’ 주식 매도
4. ‘미래차’ 차량 유리 강도
5. ‘근성 유리 제조회사’ 사장 해명
6. 소녀연맹 하양 근육
7. 소녀연맹 컴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