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22화 (422/760)

422화

KS엔터의 한 휴게실.

벽면에 비치된 텔레비전 앞에 에리카와 김민주가 앉아 있었다. 텔레비전엔 ‘더 언노운 싱어’가 방영 중이었다.

‘노래도 잘 부르는 귀여움 천재’, 백설하의 무대는 언제 봐도 감동이 있었다.

“진짜 뒤지게 잘 부르네.”

김민주가 짤막하고 직설적으로 백설하의 보컬 실력을 평했다.

“나랑 동급이거나 그 이상이겠는데?”

“…….”

“설하 저 사람은 아이돌이 아니라 걍 솔로 가수로 데뷔하는 게 낫지 않나.”

“…….”

“뭐, 나보고 닥치라고 일부러 대답 안 해주는 거야?”

“……아니. 잠시 생각 좀.”

에리카는 ‘더 언노운 싱어’를 챙겨보고 있었다. 친구이자 귀여운 언니인 백설하의 행방이 궁금해서, 는 아니었다.

백설하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어느 감정이 있다. 하지만 에리카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언어로 명료하게 표현할 수 없었다.

‘뭘까.’

꼭 뭔가를 잘못 먹은 느낌이다.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를 따지면, 당연히 부정적이다. 그럼 백설하를 안 보면 될 텐데, 에리카는 그것마저도 하지 않았다.

에리카는 불분명한 것을 싫어한다.

자신의 느낌임에도 자신조차 모르는 감정이 있다면 반드시 알아내야만 했다.

‘그런데, 모르겠어.’

무엇이 에리카 자신을 이토록 불쾌하게 만드는 것일까.

“어, 졌네.”

어느새 결과까지 나왔다.

‘노래도 잘 부르는 귀여움 천재’는 방어전에 실패했다. 그녀의 패배가 선고되고, 가면이 벗겨졌다.

[소녀연맹의 설하라고?!]

연예인 판정단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서 충격과 경악의 감정을 표현했다.

그들은 촬영분이 방영되면 인터넷에 추측 글을 안 보나? 아마 볼 텐데. 정체를 알고도 저런 리액션을 할 수 있으니, 그들은 진실로 프로일 것이다.

“어머.”

휴게실엔 김민주와 에리카뿐이었다.

그런데 뒤에서 제삼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재빨리 돌아보고, 급히 일어나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안녕 얘들아.”

케이어스의 선배 걸그룹, ‘븨이에스’의 멤버 박수련이었다.

박수련은 테이크아웃 커피를 손에 들고 텔레비전 근처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김민주가 박수련의 눈치를 보았다. 그것을 눈치챈 박수련은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다정한 눈웃음을 보냈다.

“어휴, 그렇게 불편해하지 마. 뜨는 해가 지는 해한테 왜 그래.”

“아녜요 선배님.”

불편할 수밖에 없다.

케이어스와 븨이에스는 같은 회사의 그룹이라곤 하나 마주칠 일도, 마주친 적도 그다지 없었다.

아예 별세계에서 살아왔다 해도 좋았다.

이렇게 공용 공간에서 마주치기도 하지만, 보통은 후배가 피한다.

“왜 아니야? 우린 앨범 15개 냈는데 초동 10만 뚫은 게 하나뿐이었어. 너희는 이번에 사전 예약만 20만 장 넘었다면서? 아하하, 우리가 지는 해 맞지.”

“…….”

특히 박수련이 껄끄러운 건, 은근히 후배들에게 질투의 감정을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박수련은 케이어스가 시대를 잘 타고났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븨이에스와 더불어 같은 세대의 아이돌들이 쌓은 금자탑. 그곳에서 떨어지는 꿀을 본격적으로 빨아먹기 시작한 세대가 바로 케이어스였다.

“하아, 우린 퇴물이라서 앞으로 앨범 몇 개나 더 낼지 모르겠다. 하긴, 나라도 븨이에스보다 케이어스에 신경 더 써주겠다. 정호환 이사님 이제 우리 연습도 안 보러 오신다?”

“하하하…… 선배님들이야 이미 실력이 완성돼 계시니까, 믿고 계실 테니까요.”

“그래?”

박수련이 실실 웃으면서 븨이에스를 상징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두 손을 일자로 편 뒤 교차하여 T 모양을 만드는 것이었다.

때론 검지와 엄지만을 교차해 T를 만들기도 하지만, 공식적인 인사에서는 양손을 사용한다.

“이름은 븨이에스(B.E.S).”

거기에 더해 제스처의 T를 더해서 BEST다.

“인데, 최고인 적이 없었네. 아쉽다.”

“……하하, 아. 저 트레이닝 있어서.”

김민주가 일어나 박수련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러면서 팔꿈치로 에리카를 톡톡 건드렸다.

‘너도 지금 타이밍 봐서 나와’란 뜻이었다.

하지만 에리카는 움직이지 않았다. 김민주는 ‘네 맘대로 하라’는 듯 재빨리 휴게실을 나섰다.

박수련이 소파를 짚고 훌쩍 에리카에게 다가왔다.

“에리카…… 일본인이지? 리더라고?”

“네, 선배님.”

“와, 외국인 신기해. 우리는 전부 한국인이라서. 우리도 외국인 한 명 있었으면 재밌었을 텐데.”

외국인을 마치 신기한 볼거리인 양 얘기하는 투였다. 하지만 에리카는 반응하지도, 신경 쓰지도 않았다.

박수련은 ‘재밌겠다’라 혼잣말하며 커피를 마셨다. 그때 박수련의 시선이 텔레비전으로 향했다.

방어전에 실패한 백설하가 이별 무대를 펼치고 있었다.

“잘 부르네. 소녀연맹이지?”

“네, 소녀연맹 설하예요. 선배님이 보시기에도 잘 부르나요?”

“나? 내가 아니라 다 그렇게 생각할걸? 이상한 거 묻네. 하아, 근데 나도 ‘더 언노운 싱어’ 나가고 싶었거든.”

“말씀드려 보시지 그러셨어요.”

“내가? 뭘 그래. 회사에서 알아서 해주는데.”

박수련은 다리를 꼬고 등을 소파에 깊이 묻었다. 그리고 여유롭게 커피를 음미했다.

“나 스물아홉이거든.”

“네.”

“스을스을 관절에 무리가 오더라. 너희들에 비하면 격한 춤도 많이 안 췄는데, 푸하핰! 웃기지?”

“아뇨. 다른 선배님들도 다 관절을 대가로 돈을 버신다고 하시니까요.”

“맞다, 나름 팁인데 춤출 때 과하게 굽히지 마. 뼈끼리 붙어서 안 닳게. 특히 어깨. 으아, 미치겠어 진짜. 일만 있으면 아프거든.”

“조심할게요.”

“근데 또, 후회가 되네.”

에리카는 제발 박수련이 닥치길 바랐다.

그저 ‘더 언노운 싱어’를 보러 이 휴게실에 온 것일 뿐인데.

후배 잡고 이상한 이야기나 할 만큼 시간이 남아도나? 그래도 국내 탑티어 걸그룹이란 사람이? 한 시대의 정점을 차지한 그룹들 중 하나인데?

“너희들만큼은 아니더라도, 회사가 우리한테 춤 좀 빡세게 가르쳤으면 어땠을까 싶어. 지금까지 소화할 수 없는 안무는 없긴 했지만.”

“회사에 말씀드려 보시지 그러셨어요.”

“내가? 굳이. 춤 어렵다고 뭐가 더 있는 것도 아니고.”

근데 뭐가 후회된다는 건데.

“너희 ‘타임’ 멋지더라. 세상에, 나 두 눈이 이렇게 띠용, 하고 나왔다니까. 진짜 시대가 빨라. 요즘 애들 노래는 못 따라가겠어. 2세대 선배님들도 우리 노래 보고 그랬으려나.”

“영광이에요.”

“영광? 외국인이라 그런가, 생소한 단어를 쓰네.”

“여긴 왜 오셨어요? 어떤 분이랑 약속이 있으시다거나.”

“내가? 딱히. 신기해서 그래. 보통 후배들은 나 들어오면 막 나가거든. 근데 넌 안 그러네.”

에리카가 씩 웃었다.

“나갈까요?”

“얘 봐. 나를 이상한 사람 만들고 있어. 연애하고 있니?”

“아뇨. 아직 금지 안 풀렸어요.”

“그래. 괜히 눈치 보지 말고 금지 풀리면 마음껏 하고 다녀. 회사가 잘 숨기게 도와줘.”

“그런가요.”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을 이렇게나 많이 해줬는데도 담담하네. 뭐 궁금한 거 없어?”

“있어요.”

“오.”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있다고 하다니.

“뭐가 궁금해?”

“이제 곧 은퇴하시잖아요.”

박수련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녀가 턱턱 막히는 웃음소리를 냈다.

“내가? 재계약할 줄 안 할 줄 어떻게 알고 곧 은퇴할 거란 거니?”

“아, 죄송합니다. 연차가 쌓이셨잖아요.”

에리카가 ‘상당히’란 말을 덧붙였다.

“거기까지 오면, 후회되는 게 있나요?”

“없어.”

박수련이 간단히 답했다.

“음악상도 많이 받았어. 돈도 많이 벌었어. 차트 1위도 당연하단 듯, 질리도록 해봤어. 콘서트도 재밌었고, 대강대강 즐겁게 잘해온 거 같아.”

이게 정점의 대답이다.

아니, 지금도 탑티어라 불리는 걸그룹의 이야기다. 참으로 깊이가 없었다.

“그래도 더 하고 싶어.”

“하고 싶은 게 있으세요?”

“나? 나는 딱히. 회사가 알아서 잘해주겠지.”

기획사는 동화 속에 나오는 요정 같다.

최소한의 자격만 갖추면 어떤 마법이든 이뤄준다. 박수련이 상상한 것 이상의 마법을 계속해서 이뤄간다.

“넌 나보다 돈 더 많이 벌 거야. 우리 데뷔 앨범 초동은 일이 만 장 겨우 넘었어. 넌 얼마나 좋은 시대에 살아?”

“선배님 덕이죠.”

“그래, 우리 덕이지. 우리가 키웠는데 우린 제대로 먹지도 못했네.”

븨이에스는 비운의 그룹이라고도 불린다.

KS 엔터의 예술적 역량을 총동원하여 케이팝씬의 진보와 혁신, 해외팬의 대량 유입을 이끌었으나, 언제나 선구자는 과실을 맛보지 못하는 법이다.

정호환은 이를 ‘교육비’라고 불렀다.

어떤 회사가 자사의 제품에 생소한 시장으로 진출할 때, 그 회사는 시장에 교육비를 지불해야만 한다.

소비자가 자사 제품에 익숙해질 때까지 출혈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정호환은 븨이에스로 한국 대중에겐 생소한 장르를 다양하게 시도하여 케이팝 시장의 음악성을 몇 단계나 끌어올렸다.

븨이에스란 그룹 자체가 시장에게 바치는 교육비였던 셈이다.

팬들은 정호환이 ‘히히 대중성 X까!’라며 폭주했다고들 하지만, 븨이에스의 아트 컨셉이 너무 뛰어났던 터라 대놓고 욕하지도 못했다.

“아 그냥 재계약하지 말고 결혼이나 할까.”

“사귀시는 분이라도 계세요?”

“아니.”

“왜요?”

진짜 ‘왜요?’란 말이 절로 나왔다.

박수련의 스펙을 보면 애인이 없단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그냥, 만나는 사람마다 다 거기서 거기라. 이제 잘생기기만 한 애들은 질려.”

“잘생기고 예쁜 건 안 질리잖아요.”

“얘 봐라?”

박수련이 에리카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어떻게 인생의 진리를 이렇게 빨리 깨달았니? 맞아, 잘생긴 건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지. 그런데 난 너무 배가 불러서. 연예계 얘기만 하는 것도 지겹고. 일반인 만나볼까. 어디 근사한 회사 중역분 안 계시나? 아, 하지만 너무 늙으면 안 돼. 30대 초중반이 그나마 커트 라인일까.”

30대 초중반의 근사한 회사 중역?

‘이 선배님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보셨네.’

그런 사람은 재벌 2세나 3세밖에 없을 것이다.

“이만 갈게. 너 표정에서 지루해하는 거 너무 보인다.”

“아녜요.”

“아니긴.”

박수련이 에리카의 어깨를 몇 번 주물러주곤 휴게실을 떠났다.

그녀가 나가자 ‘더 언노운 싱어’가 끝났다.

‘내가 지루해하는 게 보인다고?’

그럴 리 없는데.

다른 사람 대할 때와 똑같았을 텐데.

에리카는 무의식적으로 타인의 호감을 산다. 그런 행동이 몸에 배었다. 그런데, 방금은 그러지 못했던 듯하다.

아니, 요즘 들어 계속 그러했다. 마치 사람이 바뀌기라도 한 것처럼.

‘……아.’

이제 알겠다.

에리카는 왜 백설하를 볼 때마다 기분이 나빴는지 알 수 있었다.

박수련 덕분에 알게 됐다.

‘수련 선배님이 하시는 말씀이라곤 전부 회사밖에 없어.’

본인이 하고 싶은 게 없다.

본인이 욕망하는 게 없다.

의지가 없는 사람만 같다.

에리카는 본인도 그리될까 봐 무서웠던 것이다. 그래서 백설하를 보며, 부러워했다.

‘우리들의 프로듀싱.’

아이돌 멤버에게 프로듀싱을 맡긴다는 사상 초유의 계획. 심지어 그것을 세일즈 포인트로 삼고 광고까지 한다.

만약 이 과제를 성공적으로 완수한다면, 소녀연맹은 성장을 위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것이다.

‘난 질투했었구나.’

에리카는 팔꿈치를 소파의 목받이 부분에 걸고, 고개를 돌려 어깨에 뺨을 괴었다.

그리고 상상해보았다.

‘케이어스 데뷔조에서 떨어졌던 게 리카가 아니라 나였으면…….’

내가 소녀연맹에 들어가서 ‘우리들의 프로듀싱’을 하고 있었을까?

가로 엔터가 소녀연맹에게 준 프로듀싱 권한은 어디까지일까? 정말 한도 끝도 없이 마음대로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런 게 가능하다면…….

‘그러고 보니, 난 내가 도전할 가치가 있는 걸 찾아서 연예계로 왔었지.’

아이돌에 도전한 에리카는 승승장구 중이다.

한때 케이어스의 자리를 위협한다고 느꼈던 소녀연맹도, 아마 영원히 케이어스를 따라잡지 못 하리라.

모든 게 무료했던 때와 다를 바 없다.

여전히 그녀의 인생은 공략집대로 나아간다. 앞으로도 승리가 이어지겠지.

그녀의 승리에는 관성이 있다. 이젠 관성이 너무나 강해져 멈추려 해도 멈출 수 없다.

그건 운명의 힘과 같다고, 에리카는 생각했다.

‘박 이사님의 프로듀싱으로도 소녀연맹은 케이어스를 끝끝내 따라잡을 수 없었어.’

그런데 백설하가.

‘언니가 케이어스를…….’

영원히 좇지 못할 목표로 달려 나가는 다섯 명의 소녀들. 그건 시시포스의 형벌과 같았다.

조금은…… 재밌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따라잡을 뭔가가 있다는 건 분명 재밌겠지.

계속된 승리와는 또 다른 맛이 있을 것이다.

‘내가 소녀연맹이 된다, 라. 그럼 리카가 케이어스로 들어오고 리더가 됐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럼 에리카보다 케이어스를 통제하는 것에 서툴렀을까?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리카는 잘 해냈겠지. 그런 아이다.

‘그럼 내가 소녀연맹이 됐으면 리더는 나야?’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에리카는 백설하의 뒤에 있는 걸로 만족했겠지. 정확한 이유는 댈 수 없지만, 그랬으리란 예감이 든다.

결국 전부 망상일 뿐이지만 말이다.

에리카가 소녀연맹이 된다느니, 리카가 케이어스가 된다느니. 이제 와선 전부 쓸데없는 생각이다.

‘결국 케이어스가 된 건 나고.’

승리도 영원히 케이어스의 차지일 테니까.

한 번 벌어지기 시작한 차이는 영원히 줄어들 수 없다.

* * *

모든 인터넷 뉴스가 ‘더 언노운’ 삼 연패의 주인공 백설하를 조명했다. 마치 누구도 백설하를 몰랐단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댔다.

하지만 홍보는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백설하에게 모여진 시선은, 현재 그녀가 참여 중인 ‘우리들의 프로듀싱’ 프로젝트까지 이어졌다.

[소녀연맹의 대담한 도전, 멤버들의 프로듀싱 프로젝트!]

[소녀연맹 올해 여름 미니 볼륨 앨범 ‘인트로: 러브’로 돌아온다]

[소녀연맹의 컴백 임박? 기획사가 보여주는 상징 시그널!]

[소녀연맹의 첫 번째 컨셉 포토 발표. 여름 내음 물씬]

[소녀연맹이 연결하는 너와 나의 신호. 아이돌로서 보여주는 퍼스널리티.]

[소녀연맹의 신보를 표현하는 단어는? “사랑!”]

이와 같은 글이 인터넷 뉴스난은 물론, 대형 포털 사이트의 연예 콘텐츠난을 도배했다.

가로 엔터가 물밑에서 벌여온 홍보 작업이 이날을 기점으로 폭발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 이게 전부 저한테 들어온 예능이라구요……?”

백설하는 민경섭이 가져다준 섭외 예능 목록을 보곤 당황을 금치 못했다. 이 중에서 고르란 것도 아니고, 전부 나가야 한다고 했다.

[케이팝 웨이비 - 너를 보여줘!]

[역전굿판 - 너의 고민을 들어보자꾸나]

[이진형의 음악쇼]

[일일 알바를 구합니다]

[오늘은 오늘이니 좋다]

[라디오 킬 더 비디오 스타]

이외에도 공중파, 케이블을 가리지 않고 온갖 예능이 가득했다.

평소 멤버들이 나가보고 싶다던 인기 예능도 빠지지 않았다.

“이, 이걸 전부…….”

“나가서 홍보해야 해. 설하야, 널 홍보해야 하는 거야.”

성필이 손가락을 튕겨 놀란 멤버들의 주의를 끌었다.

“이게, 내가 너희의 데뷔를 준비할 때부터 기다려온 순간이야.”

“쌤이 ‘더 언노운 싱어’ 나가는 거요?”

“아니, ‘우리들의 프로듀싱’이 시작되는 거. ‘더 언노운 싱어’ 삼연승이 기폭제가 되긴 했지. 그리고, 얘들아. 솔직히 말하자면 기획력으로 대형 기획사를 이기는 건 불가능해.”

대형 기획사들은 아이돌의 시작점부터 노하우를 축적해왔다. 애초에 그들이 한국의 스타 시스템을 구축한 장본인들이다.

순수한 기획력으로 대형 기획사 소속 아이돌을 이기기란, 설명할 필요도 없이 매우 어렵다.

“그러니까 난 다른 곳에 기대를 걸었어. 기획으로 만들어진 캐릭터가 아니라, 너희들 각자의 개성. 퍼스널리티에 승부를 건다.”

가로 엔터가 대형 기획사와 그럴듯한 승부를 펼치기 위해선, 석세스 엔터와 체급이 비슷해지거나 노하우를 십수 년 더 축적해야 한다.

기획력으로는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다.

그러니 성필은 멤버들에게 기대를 건다.

“세일즈 포인트는 성장이다. 성장 그 자체.”

아이돌의 퍼포먼스 실력이 부쩍 올랐니, 옛날에 비해 멘탈이 좋아졌니, 그런 건 팬이 아니고 모를 일이다.

팬이라면 아이돌의 성장을 알아보고 그에 공감하며 응원을 보낸다. 그 시점까지 이입시키는 게 힘든 법이다.

성필은 그 기간을 단축하고자 한다.

“너희들에게 프로듀싱을 맡기면, 앨범의 성적 자체가 너희의 퍼스널리티와 성장을 드러내.”

심지어 그 과정 전체를 아이튜브에 올리고, SNS로 공유하고, 뷔라이브로 드러낸다.

인민이들은 그런 멤버들을 응원한다. 콘텐츠를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할 것이다.

인간의 성장은 그 자체로 문학의 장르가 될 정도로 유서 깊다. 많은 이들이 이 서사에 열광한다.

“중소기업의 기획물인 아이돌이 아티스트까지 성장하는 과정. 난 그걸 대중에게 팔고자 해. 그러기 위해선, 일단 알려야 한다. 너희들이 품은 빛을 사람들에게 알릴 거야.”

동네방네 전국 방방곡곡 전부 알릴 것이다.

미디어를 보는 한국 사람들이면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알려서, 여름에 승부를 볼 것이다.

“너희들이 달려온 시간은 전부 이때를 위해서.”

지금까진 패배를 곱씹은 적이 많았다.

도저히 위에 선 이들을 따라갈 수 없다며 자책한 일도 많았다.

하지만 이제 다를 것이다.

바로 이기진 못하더라도, 폭발적인 속도로 따라갈 것이다.

“지금부터가 소녀연맹의 진짜 도약이야. 절대 줄일 수 없던, 영원히 벌어질 차이를 지금 줄이자.”

그 유명한 제논의 역설에서와 달리,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따라잡을 것이다.

멤버들은 성필의 거창한 계획을 듣고 감탄했지만, 동시에 백설하를 걱정했다.

만약 이 계획이 실행되면 정말 전국 방방곡곡의 사람들이 전부 백설하의 프로듀싱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부담감을 버틸 수 있을까?

“네.”

버틸 수 있다고 한다.

멤버들은 백설하가 시원스레 답하자 오히려 께름칙했다. 또 백설하가 참고 있는 건 아닐까 해서.

“너무 나가야 하는 방송이 많아서 놀랐던 거예요. 다 나갈게요. 경섭 오빠가, 회사가 노력해서 만들어주신 기회니까요.”

“쌤, 괜찮아요?”

“괜찮지. 얘들아, 홍보도 프로듀싱의 일부야.”

당연히 백설하는 성필에게 미리 이 사실을 전달받았다.

“하지만, 이건 너무 부담이…….”

만에 하나 ‘애플 크러쉬’가 망하기라도 하면, 사람들이 얼마나 백설하를 손가락질하겠는가.

호기심에 들어봤다가 ‘아이돌이 그럼 그렇지’ 하면서 비난의 수위를 올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성필의 계획은 케이팝 팬만 노린 게 아니었다. 정말 대중 전체를 노리고 있었다.

케이팝 씬에서 파이를 늘릴 수 없으면, 아예 대중을 끌어오겠단 것처럼. 그만큼 리스크가 크다.

“괜찮아. 아무리 부담돼도.”

백설하가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심장 박동을 따라 다짐하듯이.

“설령 전 세계에 이 사실이 알려져도 상관없어. 내가 프로듀싱한단 것만으로도 화제가 되고 광고가 된다면, 난 기꺼이…….”

모든 압박을 견뎌낼 것이다.

“단 한 분이라도 더 우리 노래를 들어준다면, 뭐든 할 거야.”

한 명에게라도 더 우리의 목소리가 닿기를.

“우린 앞으로 더 나아갈 거야.”

백설하가 손을 앞으로 뻗었다.

멤버들이 쭈뼛쭈뼛 그녀의 손 위에 손을 겹쳤다. 다섯 명의 손이 겹치자, 또 그 위에 백설하가 나머지 손을 겹쳤다.

“가자.”

투쟁.

해방.

소녀.

연맹.

“그리고.”

어느새 멤버들의 얼굴에도 백설하와 같은 결의가 깃들었다.

“승리.”

최고의 아이돌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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