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0화
“그래서.”
홍규헌은 A&R팀 회의 결과를 듣곤 어이가 없었다.
“백설하의 놀라운 연설을 듣고 별다른 토의도 없이 ‘애플 크러쉬’를 찍었다고?”
“토의가 있긴 했어요.”
몇몇은 ‘우파루파’를 지지하기도 했었으니까.
하지만 별다른 힘을 쓰진 못했다.
그날 회의실에서 펼쳐졌던 일은 마치 연극과 같았다.
자신을 믿지 못했던 한 아티스트가 마침내 확신을 갖게 되는 감동적인 이야기.
그것을 직접 보고 어찌 백설하에게 반대할 수 있겠는가.
“설하의 의지가 강하고, 지음이랑 멤버들이 지지해줘서 ‘애플 크러쉬’가 되긴 했지만요.”
“하긴, 표를 던졌다고 그거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지.”
‘우파루파’와 ‘애플 크러쉬’는 동수표였다.
그건 의견이 첨예하게 갈린다기보다, 어느 쪽이든 좋단 것에 가까웠다.
둘 다 소녀연맹의 타이틀이 되기 부족함이 없다. 그렇다면, ‘애플 크러쉬’를 택하는 쪽이 ‘우리들의 프로듀싱’ 취지에도 맞았다.
“음…….”
홍규헌은 결과를 탐탁지 않아 하는 기색이었다.
‘애플 크러쉬’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었다. ‘애플 크러쉬’가 채택된 과정이 마음에 걸렸다.
성필은 재빨리 그녀의 걱정을 캐치했다.
“제가 ‘우파루파’ 찍은 직원들한테는 그 곡이 돼야 하는 타당한 이유를 3페이지 이내로 작성해서 내라고 했어요. 무조건 ‘우파루파’만 변호하게요.”
“불쌍하네…….”
혹시 정말 ‘우파루파’가 꽂혔는데 분위기에 휩쓸려 말하지 못한 직원이 있을 수도 있다.
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은 가로 엔터에 들어온 지 1년이 채 안 되는 직원들이었다. 웬만해선 튀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의견을 면전에서가 아니라 서면으로 받았다.
“그거까지 다 돌려보고…….”
“그걸 또 공유까지 했어?”
“팀이니까요. 서로 생각을 알아야죠.”
‘우파루파’를 택한 죄로 추가 업무까지 생기고, 이미 기운 판에 반대 의견을 써서 팀원 사이에 공유되기까지 했다.
어쨌든, 덕분에 홍규헌의 걱정은 해결됐다.
‘박 이사랑 정지음 기에 눌려서 직원들이 입도 못 뗀 건 아닌가 했는데.’
성필은 억지로 입을 떼게 만들었다.
“그래도 ‘애플 크러쉬’가 더 낫다고 A&R팀이 판단했단 거지?”
“예. 그리고 임원 회의에서도 ‘애플 크러쉬’를 타이틀로 선정했습니다.”
임원 회의라고 해봤자 참석자는 넷에 불과하다. 성필, 손혜빈, 한구인, 민경섭.
A&R 쪽을 담당하는 성필과 손혜빈이 ‘애플 크러쉬’에 손을 들면, 임원 회의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올 확률이 높았다.
누가 기를 쓰고 ‘이건 절대 안 돼!’라고 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그럼…… 이대로 진행할까요?”
“박 이사.”
“예.”
“더블 타이틀 어떻게 생각해?”
홍규헌은 ‘우파루파’를 수록곡으로만 두기엔 아까운 모양이었다.
“1년이 훨씬 지나고 처음 맞는 컴백이야. 더블 타이틀도 과하진 않을 텐데.”
“그렇죠.”
걸리는 건 멤버들의 피로도다.
아이돌 3년 차인 소녀연맹이라면 동시에 두 안무를 숙련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만약 안무들의 난이도가 적당하다면 말이다.
‘애플 크러쉬는 보컬 난이도가 높아. 댄스랑 결합해서 퍼포먼스를 완벽히 펼칠 때까지 얼마나 걸릴까.’
그건 순전히 ‘애플 크러쉬’ 안무의 난이도에 달렸다. 만약 여유가 있으면 ‘우파루파’까지 타이틀로 두어도 괜찮으리라.
“제 생각이지만, ‘우파루파’는 공연이나 콘서트에서도 단골 레퍼토리가 될 거 같아요.”
“나도 그 생각이었어. 미리 안무를 붙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해. 안무만 받아두고, 외우는 건 콘서트 때 한다던가.”
“그러면 ‘우파루파’에 관해서도 팀원들이랑 얘기해보겠습니다.”
“고생해.”
그건 그렇고, 더블 타이틀이라.
‘소녀연맹급이면 음방에서 무대를 두 타임 얻는 것도 그리 어렵진 않겠지?’
일단 확인해야 할 건 ‘애플 크러쉬’의 안무였다. 여러 댄스팀에 시안을 발주하고, 최대한 보컬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퍼포먼스를 짜는 편이 좋다.
아니, 꼭 그렇게 해야 한다.
‘오랫동안 기다린 인민이들을 위해서라도, 이번에 애들이 많은 걸 보여주길 바라.’
이왕이면 ‘우파루파’까지 타이틀로 올라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 * *
가로 엔터의 A&R팀에게 ‘애플 크러쉬’ 프로듀싱 작업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왜냐하면, 최초로 안무 발주를 해외 댄스팀에도 넣어 보았기 때문이다.
“영어로 답장이 왔어요!”
이재호가 호들갑을 떨었다. 그는 영어로 온 메일이 신기하기 짝이 없는지, 몇 번이나 제목을 반복해서 읽었다.
“영어로 오는 건 당연하잖아요.”
성필은 이재호의 반응이 재밌어서 픽 웃었다. 몇 살 차이도 안 나는데, 마치 이재호가 굉장히 어린 동생인 것만 같았다.
“이게 마지막이죠?”
“옙.”
다음은 안무 선정 회의다.
이 안무를 정하는 과정도 꽤 길고 험난하다.
가로 엔터에는 전문적인 퍼포먼스 디렉팅 팀이 없는 터라, 외부에서 디렉터를 따로 섭외해서 시안들을 수정해야 한다.
하나의 시안만 쓸 수도 있겠지만, 파트에 따라 여러 시안을 잘라서 쓸 수도 있다.
그렇게 수많은 곳에서 수급한 안무들을 하나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짧을 리 없…….
“…….”
짧을 리 없을 텐데…….
A&R팀 회의.
모든 시안을 확인한 직원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자신의 판단이 맞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저기…….”
한 명이 용기 내어 말했다.
“아무리 봐도 이거요…….”
가로 엔터가 해외 댄스팀에게 의뢰했던 것이었다. 그 댄스팀은 ‘포스트 무브먼트 아카데미’란 곳 소속이었고, 가로 엔터와도 면식이 있었다.
“이거 하나 그대로 갖다 붙여서 써도 되겠는데요?”
‘포스트 무브먼트 아카데미’ 소속, 댄스팀 ‘카를’의 시안이 특출나게 뛰어나다.
모두의 시선이 성필에게로 모였다.
성필은 신음을 흘리듯 숨을 뱉었다. 그의 머릿속엔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친구이자 동생, 안무가 백민정의 얼굴이 지나갔다.
‘이번에도 우리 소련이들 안무는 내가 따야지!’
조아라의 스승인 그녀는 반드시 자신의 안무가 채택될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했더랬다.
‘민정아, 미안하다.’
그간의 정을 신경 쓰기에, 너무 좋은 안무가 들어왔구나.
* * *
연습실.
스크린에 뜬 ‘애플 크러쉬’ 시안을 보는 백설하의 눈이 반짝거렸다. 저렇게 넋 놓고 보다가 침이라도 흘리는 건 아닐는지.
“멋져요…….”
스크린 안에서 춤추는 건 다섯 명의 서양인이었다. 특이한 점은, 걸그룹 안무 시안임에도 남자가 한 명 껴 있단 것이었다.
중앙에서 남자라곤 믿을 수 없이 몸의 곡선과 유연성, 고아함과 아름다움을 뽐내는 마른 근육질의 남자.
조아라가 미국에 춤을 배우러 갔을 때 ‘포스트 무브먼트 아카데미’에서 보았던 그녀의 우상, 미국의 댄스 경연 프로그램 댄싱 스타 시즌7 우승자, 릭 칼먼이었다.
“멋져? 칼먼 씨 몸이?”
“춤이요! 진짜, 진지한 얘기 하는데…….”
백설하는 성필에게 눈총을 주었다. 그리곤 곧바로 다시 ‘애플 크러쉬’의 시안으로 빠져들었다.
멤버들의 반응도 다 백설하와 비슷했다.
‘애플 크러쉬’의 안무는 지금까지 소녀연맹이 소화했던 것과 조금은 결이 달랐다.
‘소녀연맹이 해왔던 건 방송 안무…… 였지만 조금은 다르지.’
방송 안무를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카메라에 찍히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하지만 소녀연맹은 퍼포먼스의 강렬함에 중점을 둔 그룹이었다. 따라서 소녀연맹의 안무는 방송 안무이면서 극장춤과도 연관성을 가졌다.
‘극장춤은 프로시니엄 무대(평면 액자 무대)에서 정면의 관객들에게 보이는 걸 가정하지.’
대표적으로는 발레가 있다.
극장춤은 일단 관객의 눈에 움직임이 확연히 들어와야 한다. 그렇기에 큼직한 동작과 신체의 가동 범위를 넘어서는 과신전(過伸展)을 무기로 삼는다.
화려하고 복잡한 동선 이동과 칼로 자른 듯한 군무는, 발레로 대표되는 극장춤의 특징이다. 이는 아이돌 안무와도 맞닿아 있지만…….
‘아이돌의 춤은 카메라에 잘 찍히는 게 목적이고, 그게 무기야.’
굳이 발레처럼 움직임이 클 필요는 없다. 간단하고 소박한 동작이라도, 카메라가 확대하여 촬영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소녀연맹의 안무는 방송 안무보다 극장춤에 가까웠다. 실제 무대에서 관객을 압도하기 위해 펼쳐지는 극한의 퍼포먼스 말이다.
그 효과는 콘서트에서 증명되었다.
‘하지만 릭 칼먼이 구상한 안무는 동작 자체가 좀 소박하네.’
개인의 모든 동작이 팔을 펼친 거리 안에서만 행해진다.
노래 부르는 사람의 상태를 정확하게 캐치하여, 지나치게 복부를 구부리거나 허리를 숙이는 동작도 없었다.
대신 동선 이동이 많다. 그리고 이동도 단순히 걷는 게 아니라, 비단이 바람에 나부끼는 것처럼 가볍고 유려하다.
모든 걸음은 스포츠 댄스의 스텝을 연상시키듯이 리드미컬하다.
‘나는 춤을 못 추…….’
……적어도 군무는 춰본 적이 없다.
그러니 멤버들의 부담을 완벽히 이해할 순 없었다.
성필은 조아라를 보았다. 아까부터 칭찬 일색인 멤버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반응이 뚱한 그녀에게로.
“아라야, 이거 춤 난이도 어때?”
“한 명씩 보면 어렵진 않아요.”
“전체적으로 보면 어렵단 거야?”
“어렵다기보다는…… 타이밍을 재는 데 애 좀 먹겠는데요.”
릭 칼먼의 시안에는 군무, 즉 모든 멤버들의 동작이 일치하는 순간이 단 세 번 존재한다.
바로 하이라이트였다.
그 외엔 멤버들의 안무가 전부 다르다. 마치 도미노처럼 순서대로 관객의 초점을 빼앗아 간다. 그 움직임이 전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게 어려운 거구나. 확실히 그렇겠네.’
이 춤은 개인의 숙련도보다, 서로가 서로의 타이밍을 얼마나 잘 맞추느냐의 싸움이다.
이어달리기와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멤버들은 끊임없이 서로에게 바통을 넘기다가 하이라이트가 됐을 때 군무를 선보여야 한다.
“동작이 완전히 일치하는 칼군무처럼은 아니겠는데, 한 명이 틀리면 전체적인 아름다움이 흐트러져요.”
“오…… 전체적인 아름다움…… 어려운 단어…….”
조아라가 성필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팍팍 때렸다.
“근데 아라야.”
“뭐요. 더 맞고 싶어요?”
약 1초, 성필은 12살이나 어린아이에게 ‘더 맞고 싶어요?’란 말을 듣는 자신의 삶을 반추했다.
자신은 세상 사람들에게, 또 부모님에게 떳떳한 삶을 살아왔는가?
‘당연.’
성필은 성찰을 마치고 하려던 이야기를 이었다.
“아까부터 왜 이렇게 죽상이야. 이 안무 마음에 안 들어?”
스크린을 보고 있던 백설하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녀가 고개를 천천히 돌려 어깨 너머로 조아라를 흘끔거렸다.
“아뇨. 신경 쓰이는 거 있어서요.”
“뭐가?”
“유독 한 명이 눈에 띄어요.”
조아라가 스크린 안에서 열심히 춤추는 릭 칼먼을 가리켰다.
“저런…… 남자가 눈에 띄는구나. 우리 아라, 9개월만 더 참자.”
조아라는 이번엔 손바닥 대신 주먹을 들었다.
이 정도면 맞고 싶어서 이러는 거다. 조아라가 성필에게 응징을 가하려던 순간, 리카가 둘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박 이사님 때리지 마! 폭력은 아라쨩이라도 용소 모태!”
“뭐?”
“용서 못 해!”
“그래 조아라 너 좀 심해.”
상황을 보던 신아름까지 끼어들었다.
“너 성격 더러운 거 사방팔방 다 알리냐? 아무리 팀장님이 친해도 12살이나 어른인데 그렇게 손찌검해서 되겠냐고.”
“가, 갑자기 왜 그래. 너희들도 들었잖아. 아저씨가…….”
“팀장님이 맞을 만한 짓이라도 했어? 팀장님도 뭐라고 좀 해봐요. 이런 애한테 맞는 거 속상하지도 않아요?”
“별로?”
“조아라, 더 때려.”
때렸다.
더불어 신아름도 성필의 등을 마구마구 두드렸다. 그것을 지켜보던 리카는 ‘밍나(다들) 그만둬!’라며 말렸지만, 쉽지 않았기에 결국 강자의 편에 붙었다.
성필은 조아라에게 어깨를 맞고, 신아름에겐 어깨가 두드려지고, 리카에겐 목 마사지를 당하면서 말을 이었다.
“한 명이 눈에 띈다니?”
“칼먼 저 사람이 추는 춤만 좀 화려하다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있어요.”
성필은 다시 ‘애플 크러쉬’의 시안을 보았다.
조아라의 말을 듣고 보니 알겠다. 릭 칼먼이 맡은 멤버의 파트만…….
‘분량이 더 많은 것도 아니고, 더 어려운 것도 아닌데, 정말 더 눈에 확 들어와.’
‘애플 크러쉬’의 시안은 점을 노리는 동작보다 선을 만드는 동작이 더 많다.
힘을 보여주기보다 곡선의 아름다움을 살리는 동작들.
그 안에서, 릭 칼먼이 중앙에 나서서 하는 동작만이 가상의 점(點)을 타격하듯 빠르고 파워풀하다.
“아, 혹시…….”
“아저씨 알았어요?”
“‘카를’ 댄스팀도 ‘애플 크러쉬’를 듣고 안무를 만들었을 거잖아.”
“그쵸.”
“릭 칼먼 씨가 맡은 게, 혹시 설하가 아닐까?”
가로 엔터는 백설하가 보컬을 입힌 ‘애플 크러쉬’와 파트 분배까지 릭 칼먼에게 전달했다.
그러니 이 안무에는 멤버들의 파트까지 표시된 것이다. 그리고 아마, 릭 칼먼은 소녀연맹의 메인 보컬을 위해서 눈에 띄는 안무를 남겨준 듯했다.
‘애플 크러쉬의 파트 배분은 모든 멤버가 거의 동일하니까.’
차별하지 않겠다는 백설하의 편집증적인 태도는, 모든 멤버의 파트를 오차범위 1초 수준으로 동일하게 분배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메인 보컬인 백설하의 파트는 ‘애플 크러쉬’의 백미라 할 수 있다. 하이라이트 속의 또 다른 하이라이트라고 할까.
“오, 진짜 쌤이 주인공이네요.”
“아니!”
백설하가 벌떡 일어났다.
“내가 프로듀싱 했다고 제일 눈에 띄는 파트를 가져갈 순 없어!”
멤버들이 애교부린 강아지를 본 것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조금은 파트 욕심을 부려도 될 텐데, 백설하는 프로듀싱 과정 내내 형평성에 집착했었다. ‘애플 크러쉬’의 파트만 보아도 그랬다.
조화(造化)란 단어를 형상화한 듯 멤버들의 비중이 동일하다.
“실력으로 정하자! 가장 잘 부르는 사람이 저분 파트를 가져야지!”
“……쌤이 제일 잘 부르잖아요.”
“헤헤, 그럼 내가 해야겠네?”
멤버들이 백설하에게 달려들어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비명이 이어질 때까지 간지럽혔다.
멤버들이 물러나자, 파들파들 떨며 바닥에 널브러진 백설하만이 남았다.
“규, 그먀안…….”
“뭐, 저 파트는 쌤이 가진다 치고. 아저씨, 우리 이 안무로 가요?”
“A&R팀에서도 만장일치 나왔어. 다들 이거밖에 안 보인다더라.”
“수정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 짜이긴 했네요.”
“아라야. 이거 안무 따는 데 얼마나 걸릴까?”
“나는 뭐, 하루요. 나 혼자만 하는 거면요.”
“난 지금 다 땄는데?”
신아름이 어깨를 으쓱했다.
조아라는 한숨을 쉬곤 적당히 대꾸했다.
“그래, 너 잘났…….”
“아름이 대단해!”
성필이 신아름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비행기 태우듯 높이 들어 올렸다. 그 상태로 몇 번이나 회전했다.
“벌써 다 했다고? 천재 아니야? 아름이 대단해 너무 멋져!”
신아름은 처음엔 당황하다가 이내 기쁨의 비명을 지르면서 좋아했다.
3초 후, 성필은 갑자기 기운이 빠진 듯 숨을 헐떡이며 신아름을 내려놓았다. 신아름이 아쉬워하면서 물었다.
“갑자기 왜 이래요?”
“아니, 요즘 들어 너한테 이런 적이 없는 거 같아서.”
“팀장님이 먼저 거리 쟀잖아요.”
“아름이도 벌써 22살이니까.”
“……나도 한 시간만 주면 안무 다 외워.”
조아라가 소심하게 말했지만, 목소리가 작아서 아무도 못 들었다.
“아타시(저)도 해주세요!”
“리카는 안무 다 땄어?”
“3초 정도요!”
“그래, 다 하면 와.”
“밤에 몸 씻고 기다리세요!”
“몸이 아니라 목이야. 그리고 제한 시간은 10분이야.”
“손나(그런)! 아름이 치사해!”
“자, 그럼.”
성필이 손뼉을 쳤다.
장난스러운 분위기가 가시고 이목이 그에게로 모였다.
“차별이얏!”
“리카, 진지한 얘기 할 거야.”
“하이(네)…….”
“그럼 이 시안은 숙련하는 데 시간은 오래 안 걸리는 거지? 적어도 ‘아라베스크’ 수준은 아니지?”
멤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더블 타이틀로 가볼까? ‘우파루파’랑 ‘애플 크러쉬’로.”
“예?!”
바닥에 드러누워 있던 백설하가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다. 그리고 성필의 앞까지 달려와 절망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못 믿는 거죠? 사장님이 ‘애플 크러쉬’를 못 믿으시는 거죠?! 아, 아니, 실은 저한테 보여준 모습이 전부 연기고 다들 ‘우파루파’가 좋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럴 줄 알았……!”
“아니야. 너희들 컴백이 엄청 밀렸잖아. 인민이들한테 더 많은 걸 보여주자는 의미로 더블 타이틀 제안하는 거야. 당연히, ‘우파루파’도 안무 난이도를 최대한 낮출 거야. 표현력에 초점을 맞춰서. 어떨까?”
“아, 그런 거면…….”
백설하가 장하양을 보았다.
장하양은 괜찮단 뜻으로 눈웃음을 지었다.
“괜찮을 거 같아요.”
“좋아. 다들 고마워. 그러면…….”
* * *
타이틀곡과 안무가 확정됐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비주얼 파트가 일을 시작할 때다.
아이돌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꽃, 의상!
이유이는 일단 컨셉 이미지에 맞는 의상 세트를 하나 디자인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본 장하양.
“어, 어?”
장하양은 인쇄된 의상 디자인 스케치를 보곤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이 눈이 잘못된 건 아닌지 몇 번이나 눈을 찌푸리고 크게 떠보았으나, 디자인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으아, 아, 아아, 아?”
“어때, 좋지?”
성필은 멤버들의 반응이 썩 마음에 드는 듯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이유이와 하이 파이브를 하곤 벌써부터 비주얼 파트의 승리를 외쳤다.
결국 옆에서 보다 못한 신아름이 대신 화내주었다.
“이게 뭐예요!”
신아름이 장하양의 의상 스케치를 낚아채서 성필에게 들이밀었다.
그녀가 치마를 가리켰다.
“치마가 뭐 이따위로 짧아요?!”
초(超) 미니스커트라는 이름이 어울릴 정도로 짧았다.
“이거 입으면 엉덩이 밑도 보이겠어요! 심지어 여긴 또 뭔데요!”
신아름은 손가락을 살짝 옆으로 움직였다. 치마에 옆트임이 있었다. 치마 끝부터 허리까지 옆이 트여 있다.
“그냥 벗으란 거 아녜요?!”
“……그만, 아름아, 그만.”
겨우 충격에서 회복한 장하양이 신아름을 만류했다.
“분명 박 이사님도 생각이 있으실 거야. 뭔가, 있으실 거야. 그렇죠 이사님?”
“유이 씨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없었다?!”
이유이는 당황하며 스케치를 받아들였다.
“아, 이거 인쇄가 덜 됐나 봐요. 인쇄기 잉크 채워야겠다. 여기 희미한 부분 보여 다들?”
이유이가 치마 아랫부분을 가리켰다.
허벅지 중간에 희끄무레한 선이 보인다.
“여기 3부 바지도 같이 입는 거야.”
장하양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는 최악의 가정까지 떠올린 참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방송 심의 규정이 심히 관대한 이세계로 와버려, 굉장히 섹슈얼한 컨셉의 걸그룹이 되었다는 망상이었다.
다행이다…….
“앗! 그럼 이거도 인쇄 덜 된 거였네요!”
리카도 장하양처럼 안심하며 스케치를 보였다.
그녀는 다른 멤버들과 달리 숏팬츠나 핫팬츠 종류가 아니라, 기장이 발목까지 닿는 종류의 일반 바지였다.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허벅지 안쪽이 휑하니 비어 있는 것이었다.
“아타시(저)는 또 허벅지 안쪽이 트인 줄 알았어요! 이 무슨 도착적인 바지인가 했는데, 잉크가 덜 찍혔던 거네요!”
“그건 트임 있는 거 맞는데?”
“손나 바카나(그런 바보 같은)?!”
리카가 손을 벌벌 떨다가 스케치를 놓쳐버렸다. 스케치가 한구인의 발밑까지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왔다.
한구인이 그것을 보았다.
“이게 그렇게 충격적이십니까?”
“한 이사님 그게 무슨 소리신가요?! 허벅지 안쪽이 휑하다구요!”
“한의사님 진짜 공감 능력 없으시네.”
“우리 맨살 드러내는 게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거 아니야?”
22살들의 파상공세에 한구인이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주장을 굽히진 않았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디스코 팬츠도 무대 의상으로 자주 쓰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거의 길이가 엉덩이 아랫부분까지밖에 안 오는…… 그런 의상 말입니다.”
한구인의 주장은 매우 타당했다.
하지만 리카는 쯧쯧 혀를 차며 검지를 흔들었다.
“한 이사님! 자고로 전부 벗은 것보다 애매하게 드러내는 게 부끄럽고 섹슈얼한 거예요!”
“그렇습니까?”
“하이(네)! 팬티만 입은 것보다, 팬티 입고 카우보이 신발에 카우보이 모자, 카우보이 허리띠를 맨 게 더 섹슈얼하잖아요!”
“…….”
리카의 묘사는 한구인의 바디프로필 컨셉과 일치했다.
한구인은 당시가 떠올랐다. 악마처럼 웃으면서 자신에게 온갖 액세서리를 입히는 홍규헌과 성필…….
한구인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또르륵 뺨을 타고 떨어졌다. 인생에 몇 번 없을 귀중한 경험을, 그 이상한 복장으로 겪다니…….
“근데 옷 되게 예쁘네요.”
백설하는 고작 의상이 한 세트만 나왔음에도, 벌써 무대 위에서 섬머퀸이 된 소녀연맹을 상상하고 황홀함에 빠졌다.
이유이가 자랑스레 말했다.
“그치? 너희들이 입는 거 전부 명품이다? 산 다음에 재봉사분들한테 수선받아서 쓸 거야.”
“명품이요? 얼마인데요?”
“2,000만 원.”
2,000만 원이라.
꽤 비싸지만, 일주일에 2,000만 원이면 소녀연맹의 클래스로 따지자면 적당하리라.
다섯 명이 일주일에 여섯 번 무대에 오르면, 옷이 30세트가 필요하다.
한 세트가 50만 원이라고 쳐도 1,500만 원이다. 전부 명품인데 2,000만 원이면 이유이가 매우 경제적으로 의상을 기획한 것이다.
“에이, 뭐야.”
신아름은 장난으로 실망한 티를 냈다.
“우리 옛날보다 훨씬 컸는데 아직도 일주일에 2,000만 원밖에 안 써요? 한 5,000만 원까지는 써야죠. 우리 이제 월클 아녜요?‘
“하루에 2,000만 원인데?”
털썩.
무언가 무거운 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그쪽을 보니, 한구인이 기절하여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 * *
평화로운 이음 엔터의 어느 날.
우효민은 스타일리스트가 가져온 무대 의상 한 벌을 입어보았다.
흰 운동화와 핫팬츠, 그 위에 한쪽 어깨를 드러내는 언밸런스 오프숄더 셔츠.
여름날 대학로에 가면 쉽게 볼 수 있을 만한 스타일이었다.
“…….”
이음 엔터 대표 김명운은 침을 꼴깍 삼키며 우효민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전신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있었다.
김명운 옆에 선 스타일리스트도 손톱을 갉아 먹어가며 우효민의 답을 기다렸다.
‘효민아, 미안하다…….’
김명운은 돈만 많았다면 값비싼 자체 제작 의상으로 우효민을 꾸며주고 싶었다.
약 6주의 음악방송 출연 동안 들어가는 의상비는 어마어마하다. 때론 곡비보다 많이 들 수도 있다.
‘그나마 여름은 일상복 스타일링이 자연스럽기에 망정이지. 그, 그리고 딱히 돈을 크게 아끼려고 한 건 아니야. 스타일리스트님께 가격 대비 효율을 중시해달라고 말씀드리긴 했지만…….’
이음 엔터의 하나뿐인 아티스트. 그녀가 ’싫다‘고 하면 김명운도 그녀의 청을 최대한 들어주어야 하리라.
김명운은 모처럼 선물을 준 딸의 반응을 살피듯 초조했다.
그때 우효민이 뒤로 홱 돌았다. 그녀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이거 진짜 귀여워요! 봐요!”
우효민이 만화처럼 펄쩍펄쩍 뛰며 자신의 차림을 자랑했다.
걱정으로 구겨져 있던 김명운의 얼굴이 확 펴졌다. 그가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의 공연이 끝난 듯 기립박수를 펼쳤다.
“예쁘다 우리 효민이!”
옆에 서 있던 스타일리스트가 환호를 보탰다.
“이대로 퍼포먼스 함 해볼까요?”
“그래, 섬머퀸 효민이가 간다!”
“올해 여름은 저희 거예요!”
이음 엔터는 섬머퀸의 꿈을 꾼다.
힘내라, 이음 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