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화
성필은 조아라의 일을 해결하자마자 백설하가 있을 보컬룸으로 향했다.
“설하야!”
문을 열고 그녀의 이름을 외쳤지만, 성필을 반겨주는 건 불이 꺼진 방뿐이었다.
성필은 불을 켜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금까지 백설하가 있었는지 그녀의 향이 난다.
딱히 성필이 향에 도착적인 게 아니라, 오랫동안 같이 지내다 보니 백설하가 쓰는 여러 헤어 미스트 향을 외운 것이다.
정말이다.
‘어디 갔지?’
성필은 시간을 확인했다.
생각보다 조아라와 함께 보낸 시간이 길었던 모양이다.
‘어디 보자, 설하 스케줄이…….’
‘더 언노운 싱어’ 후일담 촬영이다.
백설하는 다른 출연자와 비교해서 특이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스승인 이인성에게 패배한 친구 위세라의 원수를 갚는다는, 사람들이 군침을 흘릴 만한 이야기의 소유자다.
‘더 언노운 싱어’의 제작진도 이 이야기를 캐치하여, 백설하가 더 언노운 방어에 실패했을 때 따로 후일담을 찍기로 했었다.
‘언제쯤 돌아올까.’
백설하와 위세라의 대화를 촬영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것이다.
성필은 백설하를 따라간 매니저에게 연락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괜히 매니저한테 내가 보고 싶어 한단 말을 들으면, 설하 성격에 잔뜩 긴장하겠지.’
백설하가 회사로 돌아왔을 때 자연스레 접근해봐야겠다.
성필은 수십 분 전의 백설하를 떠올렸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여러모로 고민이 많을 것이다.
‘설하는 여리면서도 강해.’
그녀 특유의 민감한 감수성은 주위 사람을 품기에 안성맞춤이다. 그러면서도 주위에 쉽사리 휩쓸리지 않는 무게감 또한 보유하고 있다.
백설하를 리더로 삼은 성필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 설하한테는 이번 일이 그렇게 큰 짐이었나?’
당연히, 성필은 ‘우리들의 프로듀싱’이 멤버들에게 스트레스를 주리란 것을 알았다.
하지만 홀로 눈물을 삼킬 정도의 스트레스인가? 고백하자면, 성필은 예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프로듀싱이란 건, 무언가를 창조한단 건 너무나…….
‘즐거운 일이잖아.’
스키를 타본 적 없는 사람은 스키장에 가서 긴장하기 마련이다. 발을 떼면 세상이 멸망할 것처럼 호들갑 떠는 이도 있다.
하지만 한 번 재미를 들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긴다.
어떤 일이든 처음 하면 부담되고 서투르다. 점차 익숙해지면 즐겁게 변하는 것이다. 그럴 줄 알았는데…….
‘설하는 즐겁지 않나?’
혹여나 백설하가 느끼는 게 오로지 부담감뿐이라면, 그녀가 받을 스트레스는 성필이 상상할 수 없을 수준일 것이다.
조아라와는 경우가 다른 문제였다.
조아라는 과정으로도 성취감을 느낄 수 있지만, 백설하는 일을 끝내기 전까지 어떤 보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프로듀싱 자체에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정말 업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여태껏 한 번도 떠올리지 못한 가정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성필은 두려움을 느꼈다.
과연 백설하의 눈물은 어떤 의미였을까.
성필은 찝찝한 기분으로 사무실을 찾았다. 모든 파트 직원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그들의 얼굴엔 놀라움이 배여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 박 이사님.”
A&R팀 이재호는 성필이 오길 기다리기라도 했단 듯 그를 반갑게 맞았다.
“직원 투표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 오늘이었네요.”
얼마 전 A&R팀은 가로 엔터가 수급하고 의뢰한 수많은 곡 중 6개를 골라냈다.
그 6개 안에는 백설하가 총괄한 ‘애플 크러쉬’의 데모와, 정지음이 자신 있게 추천하는 ‘우파루파’도 포함되어 있었다.
최종적으로 선정된 6개 곡 중 소녀연맹의 다음 앨범 ‘인트로: 러브’의 타이틀곡이 선정될 것이다.
‘가장 먼저 할 건 전체 직원 투표.’
20명이 약간 넘는 가로 엔터 모든 직원이 6개 곡을 전부 들어본다. 그리고 ‘좋다’고 생각하는 곡 두 개를 꼽는다.
그러면 표를 가장 많이 받은 곡이 나올 것이다. 당연히 다(多)득표 곡은 타이틀곡으로 고려될 가능성이 높았다.
‘표본으로 20명은 적지만, 그러더라도 대중적 취향을 대강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으니까.’
다음으로는 음악 파트의 전문가 집단인 A&R팀 내에서만 투표한다. 이 과정에 소녀연맹도 참여한다.
저마다의 의견을 주고받으며 A&R팀 내에서 결론을 내린 후 임원 회의까지 올린다.
임원 회의의 결과는 사장에게 올라가고, 어떤 것이 타이틀이 될지 최종 결정된다.
‘이 결과는 기초 조사에 불과하지만, 중요하다.’
성필은 심장이 살짝 빨리 뛰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재호를 향해 대수롭지 않단 듯 물었다.
“뭐가 1위 했어요?”
“그게.”
이재호는 기대감을 높이려는 듯 말을 끌었다.
아까 사무실로 들어왔을 때 직원들이 놀라고 있더라니, 예상외의 결과가 나온 걸까?
“공동 1위가 나왔습니다.”
“공동이요? 동수표예요?”
“예.”
이재호가 투표 결과를 보였다.
[1위: 우파루파, 애플 크러쉬]
“설하 씨의 선택이 중요하겠네요.”
“……지음이는 뭐래요?”
“아직 정 PD님한텐 말씀 안 드렸습니다.”
“그래요.”
성필은 결과가 적힌 종이를 다시 이재호에게 주었다. 그리고 잠시 머리를 식히겠다면서,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무실을 나섰다.
성필이 문에 기대에 섰다.
‘동수표?’
보통 이런 경우라면, 백설하는 당연히 ‘애플 크러쉬’를 꼽을 것이다. 그녀 자신이 확신을 가지고 만든 곡이 아닌가.
하지만, 과연 그럴까?
‘설하는 괴로워하고 있어.’
확신이 있기에 괴로운 걸까?
아니면 확신이 없어서 괴로운 걸까?
백설하는 본인의 주관을 밀어붙이고 있나? 아니면…….
‘그냥 내가 시켜서 기계적으로 프로듀싱하는 거야……?’
우는 백설하를 본 이후 성필의 마음은 폭풍우 치는 바다처럼 요동쳤다.
줄곧 믿어왔던 진리가 깨지는 기분이었다.
멤버들은 인간이다. 아티스트다. 그러니 절대 굽히지 않는 신념과,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픈 욕망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즐거운 일일 텐데…….
‘아니었나?’
그렇다면 ‘우리들의 프로듀싱’은 대체 뭘 위한 걸까. 하기 싫은 사람을 억지로 시키는 거라면, 아티스트성을 광고 도구로만 쓴다던 윤상열이나 정호환과 다를 것도 없는데…….
‘그렇지만, 프로젝트에 들어가기 전까지 애들과 대화는 충분히 나눠봤잖아.’
하기 전에는 될 줄 알았는데, 막상 하고 나니 어렵다. 그렇게 느끼는 경우가 드문 건 아니었다.
본인의 능력을 과신하여 능력 이상의 짐을 지는 일은 흔하니까. 그럴 때는 보통…….
‘짐을 내려놓지.’
하지만 백설하가 짐을 내려놓는다는 건, 프로듀서로서 책임을 벗어버린단 것을 뜻한다.
그럼 ‘우리들의 프로듀싱’은 의미가 사라진다.
‘대체…….’
전생에서 아이돌들에게 저항받는 경험은 처음이 아니었다. 아이돌뿐 아니라 배우나 솔로 가수들에게도, 성필은 항상 저항받아왔다.
그럴 때마다 미래를 보고 확신을 다지며, 그들의 의지와 다른 길로 몰아갔다.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성필은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결국엔 성공하니까. 성공이 자유를 포기한 보상이 되리라 판단했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만약 백설하가 괴로움을 느끼고, 그에 상처받게 되더라도.
‘나는 밀어붙여야 할까? 나는 설하를 상처입힐 수 있나? 상처입히고 싶나? 설하는 정말…… 눈물을 참을 수 없을 만큼 이 과정이 괴로운 걸까?’
아직은 모른다.
결과를 내는 건 백설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다.
* * *
백설하와 위세라는 후일담 촬영을 마치고, 방송국 1층의 카페로 왔다.
매니저들은 따로 자리를 잡았다. 그래봤자 한 칸 떨어진 자리였을 뿐이지만.
“이번 주 방영이죠? 난리 나겠네요.”
“으, 으응.”
백설하는 위세라의 태도 변화가 놀라웠다.
아까 후일담을 찍을 땐 눈이 두 개인 게 한스럽단 것처럼 눈물을 펑펑 흘렸으면서, 지금은 아무 일 없었단 듯한 무표정이다.
‘내가 꿈을 꿨나?’
함께 정상에서 만나기로 했던 두 소녀(한 명은 25세).
그중 한 명은 올라가기 전 날개가 꺾였다. 무려 다른 한 명의 스승에게 말이다.
친구를 위한 복수와, 과거의 스승에게 자신의 성장을 증명하는 드라마틱한 스토리의 주인공.
아까까지는 그랬었는데…….
“아니다.”
위세라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쪼옥 빨았다. 그녀의 스타일리스트는 오늘 온도를 안 본 모양인지, 위세라에게 두꺼운 가디건을 입혔다.
봄 날씨에 그런 것을 입고 촬영하자니 얼마나 더운지, 위세라는 카메라가 멈출 때마다 수정 메이크업을 받아야 했었다.
커피로 시원하게 목을 축인 위세라는 여전히 무덤덤하게 말했다.
“인터넷 보니까 언니가 귀여움 천재인 거 다 알던데, 난리는 안 나겠네요.”
“헤헤, 그치. 가수는 목소리가 얼굴이라더니 진짜인가 봐.”
위세라는 흘끔 시선을 내렸다가 바로 올렸다. 그리고 시치미를 뚝 뗐다.
“그러게요.”
“눈동자 움직인 거 다 보였거든?!”
“알아요.”
아이돌은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다. 아니, 아이돌이 되기 전에도 민감하다.
아이돌의 외모라면 상위 1%라 칭하기 충분하다. 길거리를 다니면 무심결에 시선을 주는 이들이 차고 넘친다.
타인의 얼굴을 고개까지 홱홱 돌리면서 보는 건 실례기에 눈동자만 빠르게 왔다 갔다 한다만, 보이는 사람은 시선을 눈치챌 수밖에 없다.
아무리 눈동자가 빨라도…….
“그만 봐!”
백설하는 부글부글 끓는 열을 식히려 음료를 마셨다. 그리고 조심스레 위세라의 눈치를 살폈다.
위세라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할 말 있어요?”
“……지지 말라고 했었잖아. 괜찮…… 아?”
“김홍윤 선배님한테 졌는데 내가 뭐라고 해요?”
김홍윤.
논쟁의 여지 없는 국내 정상급 보컬리스트다. 노래를 내면 광고도 안 했는데 음원 차트에 여유롭게 안착한다.
노래방 애창곡 순위를 보면 항상 10위권 이내에 등재된,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가수 중 한 명이다.
“진짜 트럭에 치였네요.”
“지금까진 내가 트럭이었는데.”
“저 언니가 계속 이기길래 진짜 놀랐어요. 대체 언제 지나 싶어서요.”
“내가 지길 바랐어……?”
“어느 정도는요.”
위세라의 낌새가 이상했다.
그녀는 어딘가 넋이 나가 있었다. 마치 하루가 가득 채워져 있어서, 틈을 내더라도 여유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때 테이블 위에 둔 위세라의 핸드폰이 진동을 토해냈다. 드르르륵, 테이블을 울리는 요란한 소리 때문에 위세라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
“어, 라희 왜.”
위세라는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한숨을 담아 말했다.
“이제 끝났어. 갈게.”
위세라가 몸을 일으켰다.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는 매우 일상적인 동작이었다. 하지만 백설하는 위세라가 힘겹게 일어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 저 이제 가볼게요.”
“으, 응. 오늘 고생했어. 다음에 또 보자. 밥이라도…….”
“밥이라도, 라고 말하는 사람은 다음에 못 보던데요.”
“야, 약속일 정할까?”
“됐어요. 컴백하면 자주 볼 텐데요. 그때 대기실에서 오순도순 도시락이라도 먹던가요.”
역시, 위세라는 힘이 없다. 말투에서부터 피로가 확 느껴진다.
백설하는 그녀에게 격려의 한마디라도 해야 할까 생각했다.
“그리고 언니.”
“응?”
“힘들면 회사에 휴가라도 좀 달라고 해봐요.”
“……으응?”
“언니네는 될 거 아녜요. 얼굴에 걱정 덕지덕지 붙여두고. 아주 그냥 보는 사람이 더 힘드네.”
위세라가 백설하의 볼을 약하게 꼬집었다. 위세라의 손이 떨어지자, 백설하는 살짝 얼얼한 볼을 손으로 문질렀다.
“매니저님, 이제 가요.”
그렇게 위세라는 떠나갔다.
백설하도 매니저와 함께 회사로 돌아갔다. 조수석에 앉은 그녀는 별다른 생각도 하지 않고 차창 밖만 바라보았다.
도중에 초점이 차창으로 옮겨졌다.
차창에 비친 백설하는, 솔직히 걱정이 붙어 있다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생기 있었다.
‘풀메이크업 했으니까.’
눈가에 나른함이 묻어 있을 뿐이다.
그럴 텐데, 위세라는 왜 그리 말했을까. 정말 사람들이 보기에, 백설하 자신은 걱정을 줄줄이 매단 것처럼 느껴질까?
‘걱정…….’
“설하 씨, 곧 회사 도착하는데요. 가시는 길에 뭐 사실 거나 필요하신 건 없으세요?”
안이상과 김수희의 후임으로 들어온 매니저가 물었다. 백설하는 ‘필요한 거’를 떠올리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백설하에게 필요한 건 돈으로 살 수 없다. 가게에서 찾을 수 없다.
오직 시간만이 가져다줄 수 있지만, 백설하는 그 시간마저도 지나가길 바라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간다는 사실이 두렵다.
지금도 그렇다.
회사로 돌아가면.
‘A&R팀 곡 선정 회의.’
소녀연맹 멤버 전원이 참석하고, A&R팀과 함께 투표권을 행사하여 타이틀곡을 정하게 될 것이다.
많은 표를 받는다고 타이틀곡으로 삼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아티스트, 백설하의 주관이 중요한 변수였다.
‘근데…….’
이런 생각을 떠올린 걸 성필이 안다면 화내겠지. 아니면 슬퍼하겠지. 그래도.
‘애플 크러쉬가 안 뽑혔으면 좋겠어.’
* * *
“동수표요? 신기하네.”
결과를 받아들고 놀라긴 정지음도 매한가지였다. 그는 투표 결과를 음미하듯 차분하게 들여다보았다.
“KS 엔터는 수백 명이 이렇게 투표하는 거죠?”
“다수의 취향을 판가름하고 싶으면 그러겠지. 근데 KS 엔터의 경영 철학이, 문화는 소수가 이끌어간다는 거거든.”
“테크노크라시…….”
성필은 정지음의 기색을 살폈다.
이 질문을 하는 건 좀 그렇지만, 꼭 물어보고 싶기에 용기를 냈다.
“지음아. 너도 이거 투표했었잖아. 뭐 찍었어?”
“비밀 투표 원칙 어디 갔어요?”
정지음은 실실 웃더니, 의외로 간단하게 답을 내놓았다.
“‘애플 크러쉬’요.”
“어? 왜 ‘우파루파’로 안 하고?”
어차피 ‘애플 크러쉬’가 안 될 거라고 생각해서 표를 준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백설하에게 동정표를 던진 것일 수도 있고 말이다.
정지음은 강력하게 ‘우파루파’를 타이틀곡으로 밀어왔다. 갑자기 ‘애플 크러쉬’를 택했단 게 믿기지 않았다.
“설하가 가이드 레코딩하는 걸 봤잖아요. 그걸 보고 어떻게 멀쩡해요.”
‘애플 크러쉬’의 데모를 녹음하던 날, 그녀가 보여준 건 단순한 기교 이상이었다.
열정이란 추상적 개념이 물리적 형태를 갖추어 세상으로 내려온 듯했었다.
“그치, 그날 설하 대단했지. 그런데 그걸로…….”
정지음도 아티스트다.
쉽게 본인의 주관을 꺾으리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만약 본인의 의지를 꺾었다면, 그에 상응하는 이유가 반드시 존재한다.
답을 바라는 성필의 눈길을 받고, 정지음은 듬성듬성 머릿속을 돌아다니던 생각들을 모아 언어로 빚어냈다.
“형, 작곡은 뭐라고 해야 하나. 끝없이 이어지는 선택이에요. 수천 개의 갈림길을 만나고, 그때마다 선택해야 하는데요. 그 선택엔 두 가지 기준이 있어요.”
정지음이 자신의 머리와 가슴을 차례로 가리켰다.
“저는 주로 머리의 소리를 듣는데요. 가끔은 마음의 소리가 더 클 때가 있어요. 이 곡이 좋은 이유가 수백 가지도 댈 수 있지만, 저 곡에 자꾸 귀가 가는 경우요. 전 그럴 때는 마음의 소리를 따라요.”
그도 그럴 게, 음악의 아름다움이란 논리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
그런 시도를 한 이들이 있긴 했지만, 아직까지 음악은 감정의 영역에 남아 있는 예술이다.
정지음이 머리보다 마음의 소리에 집중한단 건, 작곡가로서 쌓아온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혜일 것이다.
즉, 정지음은 진실로 ‘애플 크러쉬’가 더 낫다고 판단했다.
“아직도 애들이 레코딩을 최상으로 뽑을 진 모르겠지만, 만약 설하의 생각대로만 되면 ‘애플 크러쉬’가 더 나을 거 같아요.”
“……그래.”
“형은요?”
“난 둘 다 좋아.”
“난 내 본심 다 말했는데, 형만 박쥐처럼 이러기예요?”
박쥐 성필과 정지음은 함께 회의실로 향했다. 이미 A&R팀원들과 소녀연맹 멤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성필은 미리 자리한 백설하를 보고 살짝 놀랐다.
‘늦을 줄 알았는데, 먼저 와 있었네?’
매니저한테 백설하가 도착하면 언질이라도 해달라고 말해둘 걸 그랬다.
회의 도중 백설하가 오면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지며, 그녀와 대화할 생각이었건만.
‘아니, 지금이라도 회의를 조금 물릴…….’
그때 손혜빈이 야유를 보냈다.
“자기들 중요한 사람이라고 일부러 늦게 나타난 거 봐.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5분 놀다가 들어올걸. 그쵸 재호 씨?”
이재호는 감히 이사 성필과 뮤직 프로듀서 정지음을 농담거리로 삼을 수 없었다.
그가 우물쭈물 입을 다물고 있자, 손혜빈이 그의 어깨로 부드럽게 손을 올렸다.
“그쵸, 재호 씨?”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성필과 정지음은 피식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자, 그럼 먼저 A&R팀 투표 들어가겠습니다. 어차피 나중에 토론할 때 밝혀지긴 해도, 일단은 비밀 투표입니다. 쪽지 돌립시다.”
투표는 금방이었다.
성필은 이재호가 모아온 쪽지를 받아서 화이트보드 앞으로 나섰다.
6개의 곡명을 쓰고, 쪽지를 펼치며 표가 나올 때마다 곡 아래에 정(正) 자를 한 획씩 완성해나갔다.
결과가 나왔다.
“와.”
손혜빈이 탄식을 뱉었다.
이번에도 ‘애플 크러쉬’와 ‘우파루파’가 동점이었다. 표본을 줄였는데도 같은 결과가 나온 건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A&R팀과 다른 파트 직원들의 의견이 일치한단 거잖아?’
프로의 귀와 대중의 귀가 정확히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이건 좋은 신호일까? 성필은 그렇다고 생각했다. 둘 중 어느 게 타이틀곡이 되더라도 괜찮겠단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설하의 의견인데…….’
지금 백설하에게 키를 쥐여줘도 괜찮은 것일까.
“제가.”
그 순간 백설하가 천천히 일어났다.
“먼저 의견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리카가 기다렸단 듯 박수 쳤다. 그러자 박수가 여기저기로 퍼져나갔다.
백설하는 박수 사이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다들 백설하가 무슨 말을 꺼낼지 짐작했다. 백설하 본인이 제작 과정을 총괄한 ‘애플 크러쉬’를 꼽을 게 거의 확실하다.
‘설하의 의견은 이 자리에 앉은 누구의 의견보다 중요하다.’
직접 곡을 소화할 당사자니, 당연하다.
백설하에 이어 멤버들까지 그녀의 편을 든다면, A&R팀에서 극렬한 반대를 하지 않고는 ‘애플 크러쉬’가 통과될 것이다.
정지음은 어쩐지 후련한 낯빛으로 백설하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박수가 가라앉고, 백설하가 말했다.
“저는 ‘우파루파’가 타이틀곡이 됐으면 해요.”
박수가 멈췄을 때보다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웅성거리는 소리도 없었다.
백설하의 이야기에 집중하려 일부러 소음을 억제하는 게 아니었다. 다들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에 굳어버렸다.
“‘우파루파’는 이전의 소녀연맹이 팬분들께 보여드렸던 모습에서 180도 전환한 작품이 될 거예요. 하지만 그래서 도전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백설하는 막힘없이 말했다.
“소녀연맹은 강렬한 퍼포먼스로 주목받은 팀이지만, 지금까지는 무거운 곡으로만 저희를 표현해왔잖아요. 저희는 대중가수니까…… 분명 팬분들이 저희에게 찾고자 하는 모습 중에는 이런 가벼움이 있어요. 가볍게 들을 수 있는 곡을 필요로 하는 분들이 계실 거예요.”
백설하는 테이블을 손끝으로 짚었다. 이제 끝인가? 하는 생각이 든 순간 그녀가 수줍은 미소를 띠었다.
“컨셉의 갑작스러운 전환은 리스크가 있겠지만, 저는 지음 오빠랑 멤버들을 믿어요. 무엇보다 곡이 귀엽고 좋으니까요. 저는 ‘우파루파’를 타이틀곡으로 추천합니다. 이상입니다.”
* * *
백설하가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일부러 주변을 보지 않았다. 다들 놀라고 있겠지.
‘애플 크러쉬에 그렇게나 시간을 쏟았으면서 갑자기 왜 이러냐고.’
하지만, 그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최후의 최후에 마음을 바꾼다. 그런 일이야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사람 마음이 갈대 같단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게다가 방금 백설하의 이야기엔 진실도 섞여 있었다.
백설하는 소녀연맹이 ‘우파루파’를 소화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정지음이 만든 ‘우파루파’가 성공하리라고 믿었다.
처음 ‘우파루파’를 들은 성필은 ‘이게 진짜 대중음악이야!’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됐어, 이제 됐어. 된 거야…….’
백설하는 확신이 없다.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없다.
‘애플 크러쉬’가 ‘우파루파’와 동수표를 받아? 말도 안 된다. ‘애플 크러쉬’에 성필과 멤버들의 표가 몰린 거겠지.
A&R팀 대부분은 ‘우파루파’를 찍었을 거다. 반드시 그럴 거다.
‘나는 나를 못 믿어. 억지로 내 의지를 관철시키고 망할 바에야, 지음 오빠를 따르는 게 나아. 우파루파로 가야 해. 그게 성공하는 길이야.’
‘애플 크러쉬’에 힘이 실린 건, 단지 백설하가 신경 쓰는 곡이란 이유밖에 없다.
백설하가 ‘우파루파’를 추천하면, ‘애플 크러쉬’는 단숨에 ‘우파루파’의 대항마 자리에서 내려올 것이다.
다들 백설하의 눈치를 보길 그만두고 본심을 말하겠지. ‘우파루파’가 더 좋다고, 마침내 본심을 꺼내놓겠지.
‘이걸로, 끝.’
그리고 백설하가 본심을 숨겼단 건 아무도 모를 것이다.
부담감과 책임감에 짓눌려, 그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기로 했단 사실을 알 리가 없다.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도 없으니까.
‘우파루파’를 택했단 걸로 심각하게 태클이 걸릴 일은 없다.
설령 걸리더라도, 백설하는 논리적으로 ‘우파루파’의 우월성을 몇 번이나 설명할 수 있…….
“맞다.”
성필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설하 방송국에서 돌아오면 할 얘기가 있었는데. 여러분 죄송한데 10분 휴식해도 될까요?”
답하는 이는 없었다.
백설하의 선택이 놀라웠던 터라 어떻게 반응할지 결정조차 못 한 이가 태반이었다.
다들 성필처럼 백설하의 선택에 어떤 저의가 깔려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설하야, 잠시.”
“…….”
백설하의 눈동자가 떨렸다.
심장이 요동쳤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듯했다.
목울대가 울렁거린다.
토할 거 같다.
‘아, 아냐. 할 얘기가 있으시면 이 자리에서 들으면 되잖아. 음악과 관련된 거니까 공적인 자리에서!’
백설하는 눈에 힘을 팍 주고 성필을 보았다.
‘왜요?’라고 물을 속셈이었다.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냐고 당당하게 따질…….
“괜찮을까?”
“……네헤에.”
백설하는 마음속으로 수백 번 다짐했던 게 무색하게, 성필을 보자마자 마음의 장벽이 전부 허물어졌다.
백설하는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성필을 따라나섰다.
‘아니야, 아직이야.’
성필도 당황한 나머지 백설하를 불러내 사정을 들으려는 것이리라.
‘내 연기는 완벽해.’
회의실 바로 앞 복도.
백설하는 성필의 뒤를 따르며 몇 번이고 흉복식 호흡을 반복했다.
무대 위에서도 그녀의 긴장을 전부 없애주었던, 십 년 넘게 쌓아온 습관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됐다.’
부동심(不動心).
이 순간, 백설하는 그 어떤 것에도 떨리지 않는다.
“오늘 보컬룸에서 혼자 울었었지.”
“…….”
“그, 아라를 먼저 보러 가서 미안했어.”
백설하의 목울대가 울음을 만들어내듯 거세게 떨렸다.
“너 힘든 거 애들한테 숨기고 있지? 옆에 하양이가 있어서, 너 우는 거 들킬까 봐 아라한테 먼저 간 거야. 혹시 기분 상했으면 미안해. 절대 네가 덜 중요하단 게 아니야.”
성필이 그녀에게로 돌아보았다.
“혹시 네가 울었던 게 프로듀싱과 관련된 거였으면, 지금이라도 이유를 들려줄 수 있을까?”
“아뇨, 저, 저는…….”
“나한테도 말하기 힘든 거야?”
백설하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그녀의 가슴 속 굳게 잠긴 문이 성필의 눈빛 한 번에 주인을 맞아들이듯 활짝 열렸다.
“이사니이임…….”
백설하가 스위치라도 눌린 것처럼 눈물을 펑펑 흘렸다.
“이사님이라서, 말씀드릴 수 없던, 거예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