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16화 (416/760)

416화

갑자기 욕을 처먹은 성필.

‘뭐? 씨발 새끼?’

라 반문하며 격정적인 분위기로 흐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필은 그러지 않았다.

갑자기 어른으로서의 이성적 판단 능력을 되찾은 건 아니었다.

윤상열을 더 화나게 만들 방법이 있었기에 그의 욕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성필은 리카가 자주 짓는 은근히 깔보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순간, 격정적으로 끓어오르던 윤상열의 기세가 팍 꺾였다.

마치 분노가 극점에 이른 사람이 도리어 냉정해지는 것처럼, 머리카락마저 삐죽 솟아오를 듯 강렬했던 윤상열의 기운이 가라앉았다.

“정호환 이사, 그 인간이 소녀연맹 콘서트에 갔던 건 아나?”

윤상열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반응과 질문은 성필에게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윤상열이 조울증이 있는 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갑자기?”

“아냐고.”

“……알지.”

정호환은 리카가 보낸 초대장(도전장)을 흔쾌히 받아들였었다.

성필은 처음 리카의 계획을 듣곤 그만두라고 했었으나, 리카는 끝끝내 정호환에게 초대장을 보냈었다.

정호환이 소녀연맹의 콘서트에 왔단 사실을 안 건, 성필이 장하양과 함께 KS 엔터로 갔을 때였다.

장하양이 진소유에게 선물을 받으며 담소를 나누는 동안, 성필은 정호환, 에리카와 마주 앉아 콘서트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정호환과 사적으로 만났나?”

“몇 번.”

“뭐라든?”

“뭐가?”

“소녀연맹에 대해. 네 그 괴상한 꿈에 대해. 정호환을 흠모하고 있던 너였으면, 그 이야기를 안 했을 리 없지.”

“…….”

소녀연맹은 대단하다. 굉장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틀에 박힌 칭찬들. 그 정도였다.

오히려 정호환은 성필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었다. 그와의 첫 만남에서 정호환은 성필의 팬을 자초할 만큼, 소녀연맹 프로듀싱 전략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정호환이 완전히 성필의 이상에 동의하는 건 아니었다.

‘윤상열은 정호환에게 열등감을 갖고 있다.’

그건 전생에서 익히 밝혀진 바였다.

정호환은 윤상열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고, 그를 외곽으로 밀어내는 것을 거듭하여, 마침내 그 스스로 KS 엔터를 나가도록 만들었었다.

윤상열은 정호환을 증오했다.

‘문화 밀수꾼이라고 했던가…….’

정호환이 성공한 이유는 오로지 시대를 잘 타고난 것뿐이라고 했었다. 1세대 아이돌은 그저 외국 문화를 도둑질하고 떡칠해서 만든 누더기에 불과했노라고.

성필은 윤상열의 차분한 태도에 전염된 듯, 아까의 열기를 잊어버리고 담담히 말했다.

“꿈이지만, 꿈이라서 멋지다고 하셨어.”

표현 방식만 다르지, 정호환은 윤상열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부터 성필은 그토록 동경해왔던 정호환을 거짓 우상이라고 규정했었다.

원래 선구자는 의심받고 고난을 겪는다고 했던가. 성필은 주변에서 쏟아지는 비판을 그리 받아들이기로 했었다.

왜냐면, 자신이 옳으니까.

“근데.”

성필이 슬슬 질린 투로 말했다.

“언제까지 잡담만 나누려고? 빨리 대답 듣고 싶은데. 어쩔 거야? 우린 6월 초 컴백으로 생각하고 있어. 글로브는?”

마주쳐봤자 둘 다 재미는 못 본다.

사람들은 신세대 걸그룹의 대격돌이라면서 들뜨겠지만, 비즈니스적인 측면에서는 악수에 가깝다.

“우리가 양보할 수도 있어.”

성필이 한발 물러섰다.

그에 윤상열은 만족감도, 비웃음도, 뭣도 없는 얼굴로 말했다.

“6월 초? 글로브도 그쯤이다.”

“우리가 몇 주 뒤로 무를까?”

“그럼 우리도 똑같이 가지.”

“……뭐 하자는 거야?”

“증명하겠단 거다.”

“소녀연맹이랑 초동 판매량 싸움이라도 하게?”

윤상열이 실실 웃었다.

“초동 판매량으로 싸우면 당연히 소녀연맹이 이기지. 앨범 판매량은 그 앨범의 퀄리티로 결정되는 게 아니란 것쯤은 너도 알잖아.”

앨범은 특이한 상품이다.

그 앨범의 퀄리티로 초동 판매량이 결정되는 경향이 적다. 앨범의 판매량은 그룹이 거둔 이전 앨범의 성과로 정해진다.

글로브의 마지막 앨범 초동은 7만을 넘었다.

소녀연맹은 12만이었다.

그것으로 다음 앨범 판매량을 점치면, 소녀연맹의 승리가 당연하다.

“증명은 음원 차트로 이룬다.”

“대체 뭘…….”

윤상열의 유치한 투쟁심을 보고 있자니 성필은 기가 다 빨리는 기분이었다.

성필은 굳이 누구에게 무엇을 증명할 거냐고 물을 필요도 없이, 윤상열이 이러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정호환 이사님에게 증명하겠단 거겠지.’

윤상열은 정호환을 증오하지만, 동시에 존경의 감정도 품고 있다. 애증의 대상인 것이다.

윤상열에게 정호환은 언젠가 따라잡아야 할 우상이자, 정상에서 끌어내려야 할 거짓 우상이었다.

윤상열은 정호환이 소녀연맹과 성필을 높이 평가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그러니, 이번에 글로브와 소녀연맹을 격돌시킬 생각이었다.

“괜찮겠어?”

소녀연맹이 이길 텐데 괜찮겠냐, 그런 도발은 아니었다.

“석세스 엔터, 위험하잖아. 수익을 극대화시켜도 모자랄 판에 이런 도박을 하겠다고?”

“도박은 승패를 점칠 수 없을 때 쓰는 단어야.”

“도박 맞잖아. 우리가 어떤 곡을 가지고, 뭘 무기로 가지고 나올 줄 알고? 자기 패만 알고 승부를 거는 게 도박이야.”

“내 패가 풀하우스면, 도박이라고 말하기도 뭣하지.”

윤상열은 글로브를 풀하우스로 일컬었다.

그건 윤상열 자신의 프로듀싱 능력을 믿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성필은 윤상열의 자신감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동시에 그가 혐오스러웠다.

“글로브 애들, 제대로 관리되는 건 맞아?”

윤상열의 자신감은 글로브 멤버들을 학대에 가까운 트레이닝에 밀어 넣기 때문에 생겨난다.

그걸 알기에 윤상열의 자신감을 좋게 볼 수가 없었다.

“애들이 널 그리워하는 건 알아.”

윤상열은 결투를 입에 담은 사람답지 않게 시종일관 차분했다.

성필은 그의 태도가 점점 기분 나빠졌다.

글로브의 상황을 화제로 끌고 왔음에도, 무엇 하나 동요를 보이지 않는 윤상열. 찔러도 피가 나오지 않는 사람을 본 것처럼 기괴한 기분이었다.

“양소민이랑 위세라는 널 찾아가기도 했었고. 개인적으로는 고마울 따름이지.”

“뭐?”

“넌 여길 나가서도 도움을 주니까.”

성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윤상열은 글로브 멤버들이 받는 심적 고통을 앎에도, 그딴 짓거리를 계속 이어 나가고 있다.

심지어 양소민이 더는 버틸 수 없어서 잠시 도망갔던 사건을 두고, 성필에게 고마워하고 있다. 그녀들의 머리를 식혀주어서 감사하다고,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

‘뭐 이딴 인간이…….’

성필의 미간이 분노로 꿈틀대는 것을 보자, 윤상열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네가 하던 일을 내가 대신 하는 것뿐인데 뭘 그리 화내?”

“……내가 하던 일?”

“애들 잡는 거.”

“난 너처럼 애들한테 개지랄 떨진 않았어!”

“그래, 넌 좀 물렀지.”

성필은 현기증이 일었다. 도저히 인간과 대화하고 있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너, 네가 어떻게 그래. 누군가에게 몰리고 도망가는 경험을 했으면서, 글로브 애들한테는 어떻게 그래?”

“맞아. 난 결국 KS 엔터를 나왔지.”

트라우마를 건드렸음에도 윤상열은 침착했다.

“하지만 그건 숨구멍이 없어서였어. 도저히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대로 있었으면…… KS 엔터 산하의 별 시답잖은 레이블로 쫓겨나거나 했겠지.”

“너도 애들한테 똑같이 하잖아! 그 고통을 알면서 넌……!”

“아니, 애들한테는 희망이 있어. 난 그 희망에 닿도록 몰아치는 거지.”

“희망? 뭐, 정산? 돈?”

“정상에 닿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 힘든 시기를 거치면 보상이 따를 거라는 희망. 나와는 경우가 다르지.”

성필은 그에게 반박하지 않았다.

솔직히, 성필은 석세스 엔터를 나오고 나서 줄곧 이상하다고 생각해왔다. 어째서 윤상열이 글로브를 그토록 몰아붙이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전생의 윤상열은 글로브 멤버들에게 다정했으면 다정했지, 절대 박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몰아붙이는 역할은 성필이 맡았었다.

그러니, 윤상열은 성필이 나간 석세스 엔터에서도 성필의 대역을 세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그 이유가 지금 밝혀지려는 듯해서, 성필은 잠자코 있었다.

“아이돌은 철저한 엔터테인먼트 기획 상품. 기획이 전부다, 라고 사람들이 말하는데. 그렇지. 맞아. 그 기획을 사람을 찾는 것, 캐스팅과 데뷔조 선정부터 시작돼. 이른바 보석을 찾는 거.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야. 보석에 금속 테를 두르고 장식을 더하는 것 이상이 있어. 보석을 깎는 거다.”

윤상열이 컴퓨터로 다가가 아이튜브를 켰다. 그곳에서 어느 아이돌의 음방 무대 영상을 재생했다.

보이그룹 다키스트의 곡이었다.

윤상열은 다키스트 리더 서유선이 목을 훑는 안무 파트를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이돌에겐 춤이나 노래 이상의 능력이 존재해. 만인을 매혹할 듯 찬란하게 뿜어내는 생명의 힘이 있어. 모든 아이돌이, 아니,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지. 젊음이 내뿜는 힘, 청춘이야.”

젊은 남녀에겐 아우라가 있다.

자신의 찬란한 미래를 의심하지 않고 올곧게 달려가는 눈부신 빛이다.

“하지만 그 힘을 한계까지 갈고닦는 인간은 모래 한 줌보다 적어. 보이나?”

윤상열이 모니터에 뜬 서유선을 가리켰다.

서유선은 게슴츠레 풀린 눈으로 자연스레 웃었다. 하얀 치아가 빛을 내듯 시원스레 드러났다.

그는 청춘 그 자체인 인간이었다.

억누르지 않고 모조리 드러낸다.

“서유선이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되기까지, 이런 몸짓을 가지기까지, 이런 목소리를 가지기까지 얼마나 노력했는지 상상이나 가나? 매혹도 기술이다. 자연스럽게 타고 나는 매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영상이 끝났다.

윤상열은 모니터에서 비치는 전자광을 맞으며, 아직도 황홀함에 잠겨 말했다.

“아이돌의 퍼포먼스는 프로시니엄 무대(평면 액자 무대)를 기반으로 한다. 그 안에서 그림이 되고, 전시되지. 방송 안무란 평면 속에 갇힌 아이돌이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질 수 있는 방법일 뿐이고, 노래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 광고에 불과하다. 가장 중요한 건, 사람들의 시선을 계속 잡아두는 아이돌 본인의 힘이야.”

“그래서…… 그 힘을 낼 수 있도록 애들을 몰아붙인단 거냐?”

“서유선을 볼 때마다 신기했었지. 매일을 지옥 속에서 살며 온몸에 검은 찌꺼기를 두르고 있으면서도, 무대 위에선 어떻게 그리도 빛날 수 있는지. 지금은 안다.”

서유선이, 다키스트가 윤상열이 본 최초의 완성품이었던 이유는.

“한계의 한계까지 몰리는 경험이 이어졌기 때문이야. 자신의 부족함을 끊임없이 인지하고 보완하려 했기 때문이지. 자신이 파괴될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불사신 신화에 빠진…… 청춘 그 자체야.”

청소년의 정신 상태를 표현하는 단어 중 하나가 ‘불사신 신화’다.

자신에게는 거대한 불행이나 심각한 재앙이 발생하지 않으리라고 믿는 오만의 극치다.

자신은 남들과 다르게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청소년기 특유의 사고방식.

그렇기에 젊음은 그토록 빛날 수 있다. 자신의 빛을 의심하지 않고 올곧게 달려갈 수 있으니까.

그 빛은 타인도 볼 수 있다. 그러니 동서고금의 문인들이 청춘을 예찬해온 것이다.

“다른 이들과 서유선이 달랐던 건, 서유선은 정말 신화 속에 있었단 거다. 자신을 파괴할 수 있는 고난을 전부 이겨냈으니까.”

성필은 소름이 끼쳤다.

윤상열은 다키스트가 어떤 모습으로 활동을 마쳤는지 알 것이다. 빈말로도 좋았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윤상열은 서유선과 다키스트가 겪은 고난과 고통을 미화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아이돌은 2, 3년차가 되면 포기하거든. 자신이 정점에 갈 수 없단 사실을 깨닫고, 그냥 대강대강 팬들이 좋아할 만한 짓거리만 해대는 거야. 자기가 작품이란 자각이 전혀 없어. 춤이 좋아요, 노래가 좋아요, 아이돌이 좋아요, 계속 이렇게 살고 싶어요, 이딴 개소리만 지껄여.”

“그만해…….”

“사람이 한계에 부딪혔을 때 옆에서 ‘그만하면 잘했어’, ‘이제 됐어 넌 훌륭해’, ‘지금의 너이니까 소중한 거야’, 이딴 소리를 들으면 거기서 끝이야.”

“그만하라고!”

성필이 소리쳤다.

글로브 멤버들이 이딴 미치광이 밑에 있단 게 불쌍하기 그지없었다.

윤상열은 글로브를 학대하면서도 죄책감 하나 가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 윤상열. 차라리 부딪치고 깨져라. 석세스 엔터가 망할 때까지. 그래야 최대한 빨리 글로브 애들을 데려올 수 있지.

성필은 그리 결론 내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

“간다.”

“너, 양소민의 꿈이 뭔진 알지?”

성필이 움찔하며 멈춰 섰다. 그가 천천히 윤상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세계 최고의 아이돌이라고, 그렇게 말하더군. 처음 들었을 때 어처구니가 없었어. 세계 최고의 아이돌이 뭔데? 아무튼, 그래 좋다. 그렇게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지.”

“…….”

“We are the one, Globe. 세계 그 자체가 될 소녀들……. 난 그 거창한 구호와 꿈을 이룰 거다. 이 구호, 네가 만들었었지 아마?”

성필은 답을 찾지 못하고 그를 보기만 했다.

“앞으로 5년 후, 그 애들이 ‘이 정도면 잘했어’라고 말하는 모습 따윈 볼 생각 없어. 나를 증오하고 원망하더라도, 그 애들이 세계가 되는 걸 볼 거다.”

“그건…… 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맞아, 나를 위해서지. 그게 내 꿈이니까. 그걸 위해서, 난 글로브를 다이아몬드로 만든다.”

영원토록 청춘만을 간직한 돌.

녹슬지도 때를 타지도 않는 보석의 왕.

“글로브는 영원히 청춘이어야 한다. 패배해선 안 돼. 청춘이 패배를 선언하고 사회 여기저기에 꽂힌 흔한 톱니바퀴로 변하는 순간이 있지. 자신이 불사신처럼 죽지도, 파괴되지도 않을 거라 확신하는 청춘이 그저 그런 어른으로 변하는 순간……. 별것 아닌 일로 이상이 꺾여나갔을 때다. 취업이 안 돼, 상사한테 혼나, 실연당해, 투표해도 사회가 안 바뀌어, 그딴 시답잖은 일들로 어른이 되는데, 우습지.”

글로브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차트 1위를 못 해.

앨범이 천장에 닿은 듯 판매량이 안 늘어.

계속 제자리걸음이야.

그 지점에서 상승 욕구를 잃어버리는 날이 반드시 오게 된다. 여느 그룹들처럼.

“그건 대중의 평가 따위에 신경 쓰니까 그런 거다. 거품 같은 인기나 바라보니까. 그러니 난 내 개인의 평가로 글로브를 몰아붙인다. 그리고 성공의 기쁨도 안겨줘. 그 애들은 정원의 꽃처럼 관리되는 거야. 영원히 내가 제시한, 신기루 같은 기준만을 바라보면서.”

그러면 언젠가는 정상에 닿을 수 있다.

다키스트와 같은 빛을 가질 것이다.

윤상열은 진실로 그렇게 믿었다.

“정호환은 이 신념을 포기했고, 넌 괴상한 소리를 지껄이며, 다른 기획자들은 스스로 뭔갈 할 의지도 없어. 그 가운데 나만 남을 거다. 내 이름만 이 시대를 대표할 거다.”

마침내 윤상열의 일장 연설이 끝났다. 성필은 그의 생각을 지금 이 순간에 와서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윤상열이 그저 성격이 더러워서 글로브 멤버들을 괴롭히는 게 아니란 사실을 알았지만, 마음이 전혀 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더 증오스러웠다.

인간을 도구로밖에 보지 않는다. 도구가 쓰임을 다하면, 녹슬고 부러지더라도 기뻐할 거라고 생각하는 인간이다. 애초에 인간은 도구가 아닌데.

“이렇게 주절거리는 걸 보니.”

성필이 말했다.

“너도 확신이 없구나? 나한테 인정받고 싶기라도 해?”

이번에는 윤상열이 답하지 않았다. 그도 성필처럼 돌려줄 말을 찾지 못하는 것이리라.

기분 나쁜 침묵 속에서 성필이 한 가수의 이름을 꺼냈다.

“김광석. 알지?”

윤상열은 갑작스레 튀어나온, 고인이 된 싱어송라이터의 이름이 나오자 당황했다.

대중음악계에 종사하며 김광석을 모르는 이가 있을 리 없잖은가.

“‘부치지 않은 편지’란 곡 좋더라. 들어봐.”

성필은 그 말만을 남기고 작업실을 떠났다.

약 1시간에 이른 이야기는, 그리도 허무하게 끝이 났다. 윤상열은 결국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소녀연맹과 글로브는 동시기에 컴백할 것이다.

둘 중 하나가 크게 일정을 바꾸지 않는 이상, 제 살 파먹기에 돌입하여 어느 한쪽은 패배할 운명이었다.

“…….”

윤상열은 성필이 나가고 나서, 그가 마지막에 했던 말을 되짚었다.

김광석의 ‘부치지 않은 편지’. 그게 갑자기 왜 나왔을까? 윤상열은 아이튜브에 곡을 검색하고 들어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성필이 왜 그 곡을 추천했는지 알 수 있었다.

‘꽃 피우긴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그 가사가 성필의 답을 대신했다.

즉, 윤상열의 방법이 틀렸다는 은유였다.

윤상열이 크게 웃었다.

‘제 딴에 음악계에 종사하는 인간이란 거지? 이딴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하고…….’

꽃 피우긴 쉽다.

그 말대로, 윤상열은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만 같던 꽃봉오리들을 차례로 열고 있었다. 억지로 잡아 뜯어 잎을 드러냈다.

그것을 두고, 성필은 이리 말한다.

‘아름답긴 어려워라.’

윤상열은 조소를 머금다가, 웃음을 뚝 그쳤다.

정호환과의 사이가 틀어지기 전, 그가 했던 말이 떠올라서였다.

‘이런 방법으론 애들이 불행해질 뿐이야. 그 애들이, 어리고 가능성 넘치는 애들이 그렇게 망가졌는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정호환은 갑자기 개심이라도 한 것처럼 말했었다.

다키스트를 만들어낸 인간이 대체 무슨 말을?

그때 윤상열은 제발 그딴 소리는 하지 말라며 정호환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호소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날로부터 윤상열의 우상은 죽었다.

‘다섯 명 모두 정신질환을 호소했다. 세 명은 그 증상이 심해져서 아예 은퇴했다. 목 아래로 금이 안 가고 관절이 닳지 않은 부분이 없었지.’

그래서 뭐?

‘그들은 일류 무용수와 같았고 최고의 보컬리스트였으며, 영원한 청춘의 아이콘이자 최고의 아이돌로 남았다.’

대중음악의 역사에 이름이 남을 그룹이 됐는데, 그걸로 충분하고도 넘치지 않는가?

‘꽃 피우긴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윤상열도 안다.

그러니 아름답게 만들려 노력하고 있잖은가.

꿈을 위해서. 윤상열은 다시 한번 다키스트와 같은, 서유선과 같은 빛을 보고 싶었다. 그것만을 위해 산다 해도 좋았다.

이미 선례가 있으니, 이 방법이 옳다.

[꽃 피우긴 쉬워도]

김광석의 처량한 노랫말이.

[아름답긴 어려워라.]

작업실을 울렸다.

* * *

협상에 실패했다.

즉, 글로브와 소녀연맹의 컴백이 같은 시기가 될 거란 뜻이었다.

손혜빈은 풀 죽어 그리 말하는 성필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냥 우리가 뒤나 앞으로 옮기면 되는 거 아니야?”

“윤상열이 우리랑 컴백 시기를 맞추겠대. 그냥 우리랑 시기가 겹치는 게 아니라, 우리를 따라서 컴백하겠단 거야.”

“뭐? 사이코야?”

“그러게.”

석세스 엔터를 나올 때부터 성필의 마음은 좋지 않았다.

피 대신 진흙이 흐르는 것처럼 기력이 없고, 머릿속에선 안 좋은 생각만 나며, 입에서도 작게 욕지거리가 끊임없이 나왔다.

‘설하가 프로듀싱하는 앨범인데, 아예 컴백 시기가 글로브랑 겹치면 성적 향상이 크진 않을 거야…….’

만에 하나, 소녀연맹이 글로브에게 추월당할 수도 있다. 그럼 백설하가 얼마나 좌절할 것인가.

성필은 슬퍼하는 백설하를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찔끔 나왔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갔으면 결과가 달랐을까?’

모른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후회할 미래를 보지 않았단 사실이었다. 아마 소녀연맹이 글로브 때문에 참패하는 미래는 일어나지 않겠지.

‘그래도 이왕이면…….’

글로브와 붙는 일은 없었으면 했는데.

“야, 신경 쓰지 마.”

손혜빈이 성필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성필의 우울함을 먼지처럼 털어버리려는 것처럼.

“윤상열 그 새끼가 너 어지간히 신경 쓰나 보다. 이야, 우리 성필이 성공했네?”

“……성공?”

“너 술 먹으면 한탄하고 그랬잖아. 막 윤상열이랑 비교하면서 ‘나도 대학을 갔어야 했는데’라거나.”

“그건 왜 말해…….”

창피한 기억이었다.

술 먹고 한 말은 대부분 창피하지만, 그건 특히나 창피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의 손혜빈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 만나면 윤상열 이야기나 꺼내면서 신세 한탄밖에 하지 않았으니.

“옛날엔 네가 그 새끼 질투했는데, 이젠 네가 윤상열한테 질투받네.”

성필은 손혜빈의 위로를 헛되게 하지 않으려 작게 웃었다. 굳이 그 때문만은 아니고, 손혜빈의 말이 격려가 되기도 했다.

“그러게.”

윤상열이 자신을 질투한다 이거지.

전생에선 영원히 따라잡지 못할 위치에 선 인간이었는데. 이젠 대등한 입장에서 겨룰 수도 있다.

“누나 말이 맞네.”

“설하는 걱정하지 마. 이번 앨범 우리가 꼭 성공시킬 거잖아. 1년 만의 컴백이니까 인민이들도 이 갈면서 준비하고 있지 않을까?”

“소녀연맹 콘서트 성적 보면 애정이 식진 않은 거 같아.”

“오히려 더 불타오르지! 전 세계에서 우리 애들 공연 본 사람들이 수만 명인데! 난 씨, 걸그룹이 고작 2년 차에 월드 투어 도는 거 대형 기획사 빼고 처음 봐.”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다음 앨범 또한 성공일 것이다.

성필은 어느 정도 기운을 차렸다.

“설하나 보러 가야겠다. 설하 어딨어?”

“위로해서 기운 차리게 해줬더니 다른 여자 보러 가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쓰레기 같잖아.”

정보: 맞다.

“설하 보컬 룸에 있을걸?”

“또 연습하고 있어?”

“설하도 대단해. 꼭 나 어렸을 때 보는 거 같아.”

“누나는 춤에 미쳤었지.”

“그래서 유학도 가려고 했잖냐. 대학도 잘 졸업하고.”

“뭔데. 나 미안 하라고 하는 말이야? 고마워 정말, 유학 포기하고 여기 남아줘서.”

“슬슬 감사함 농도가 옅어지는 거 같은데.”

“뭐 뽀뽀라도 해줘야 해?”

손혜빈이 웃으면서 볼을 내밀었다. 성필은 손키스를 날려주곤 백설하를 찾으러 갔다.

보컬룸 앞에 선 성필은 매무새를 정돈하곤 목청을 가다듬었다.

“설하야.”

노크한 후 문을 열었다.

그 즉시 성필은 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아.”

백설하가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일그러진 그녀의 표정을 본 순간, 성필의 머리 또한 몸처럼 정지했다.

왜 우는 걸까. 혼자 있는 방 안에서 울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백설하가 앉은 피아노의 보면대에는 악보 대신 프로듀싱 관련 기획서가 있었다. 몇 번이나 검토한 것처럼 붉은 줄이 여기저기 그어져 있었다.

백설하는 급히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러고도 흐느낌은 줄어들지 않아, 성필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성필은 문고리를 쥔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단 것을 깨달았다. 문고리를 꽉 쥐어 떨림을 없애고, 마침내 보컬룸 안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박 이사님.”

바로 옆에 장하양이 나타났다.

성필은 깜짝 놀라 그녀에게로 눈을 돌렸다.

문이 장하양 쪽으로 열려 있어, 그녀는 보컬룸 안쪽의 상황을 알 수 없었다.

백설하도, 성필도, 장하양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으니 다행이었다.

“어, 어, 하양아. 왜?”

“잠시 와주실 수…….”

“어디?”

“연습실이요.”

“어…….”

성필은 보컬룸으로 눈동자가 돌아가지 않게 하려 노력했다. 혹여라도 장하양이 안쪽에 무슨 문제가 있나,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백설하는 안쪽에서 허겁지겁 얼굴에 묻은 눈물기를 지우고 있을 것이다.

“왜?”

장하양은 곤란한 일이 있으면, 오히려 곤란 따위 없단 듯 미소 지으면서 말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곤란한 기색임에도 미소 따위 없었다.

“아라가…….”

울었다.

연습하다가, 갑자기 철퍽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목 놓아 울었다.

‘더는 못 하겠다, 이제 하기 싫다’라고 하며…….

갑작스러운 사태에 멤버들도, 매니저들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니 상황을 보러 성필이 와줬으면 한다.

그런 이야기였다.

“…….”

성필의 눈동자는, 떨리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이 떨려왔다.

양쪽에 자석이 놓인 나침반처럼 마음의 화살표가 미친 듯이 떨리며 돌아간다.

어느 쪽을 가리켜야 할까.

백설하.

조아라.

이 순간, 누구에게 먼저 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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