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화
성필이 석세스 엔터로 떠난 후, 사무실엔 묘한 공기가 흘렀다.
아마 긴장일 것이다.
직원 모두 성필이 어떤 답을 가지고 돌아올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방금 떠난 마당에 지금 긴장해봤자 소용없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석세스 엔터가 받아들일까요?”
홍보팀 강지혜가 손혜빈에게 질문했다.
A&R팀 곡 선정 회의에 올라갈 후보들을 살펴보던 손혜빈은, 그 질문을 듣곤 고개를 갸웃했다.
“상식적으로는 피하려고 하겠죠? 아마 어느 쪽이 양보하냐의 싸움 아닐까요.”
“양보요…….”
성필과 가로 엔터는 보유한 모든 정보망을 가동하여 타 회사 그룹들의 컴백 시기를 알아보았다.
전부 알 수는 없었지만, 하늘이 도왔는지 이번 여름엔 중견 이상의 걸그룹들이 컴백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글로브를 제외하곤 말이다.
“저희가 굽혀야겠죠?”
아이돌이 팬덤을 기반으로 수익을 창출한다지만, 시기를 안 타는 건 아니다.
시기라고 할까, 경쟁 그룹과 컴백이 겹치는 것이 주요한 변수다.
예를 들어 비슷한 브랜드 파워를 구축한 스마트폰 회사들이 동시기에 신제품을 발매한다면, 어느 쪽은 반드시 손해 보게 된다. 브랜드 충성도를 강하게 확립하고 있어도 피해는 피할 수 없다.
그렇기에 정말 이번에 끝장을 보겠단 생각이 아니면, 신제품 발매 시기를 조절하는 게 옳다. 수익을 극대화해야 하니까.
아이돌도 마찬가지다. 특히 팬의 유동성이 강한 걸그룹이라면, 체급이 비슷한 상대들과 동시기에 컴백하는 건 반드시 피해야 한다.
“박 이사님은 6월 초반 컴백이라고 하셨지만, 조정은 불가피하겠죠?”
“그것도 상식적으론 그렇죠.”
강지혜가 의문을 가졌다.
아까부터 손혜빈은 ‘상식적으로는 그렇다’고만 말했다. 그럼, 성필과 석세스 엔터와의 협상은 상식적이지 않단 뜻인가?
강지혜는 짐작 가는 게 있었다.
‘박 이사님이 전에 계셨던 곳이 석세스 엔터라고 하셨지.’
가로 엔터의 직원들은 정확한 내용은 모르지만, 성필이 석세스 엔터와 악연이 있단 사실만은 어렴풋하게 인지하고 있다.
자세히 물어보고 싶었지만, 내막을 아는 게 가로 엔터의 중역들이라 쉽사리 입을 뗄 수도 없었다.
“저…… 손 이사님.”
“우리 귀여운 지혜 씨! 뭐 물어볼 때 말 끌거나 하지 말랬죠?”
뒷자리에 있던 A&R팀 이재호는 본인이 꾸중 들은 것도 아닌데 움찔거렸다.
“넵!”
강지혜는 손혜빈의 충고를 곧바로 따랐다. 강직하고 짧게 답한 후, 하려던 질문을 이어갔다.
“옛날부터 여쭤보고 싶었던 건데요. 박 이사님이 석세스 엔터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런 게 궁금해요?”
“역시 말씀하시기 힘든 일인가요?”
“딱히 말하기 힘든 건 아니고요.”
파티션 너머 여기저기서 들리던 키보드 타이핑 소리가 뚝 줄어들었다. 보이진 않았지만 다들 귀를 기울이는 게 확 느껴졌다.
“성필이가…… 아니, 박 이사가 굉장히 믿고 따르던 형이 있었어요. 제 매니저로 짧게 지낸 시간 제외하면, 거의 연예계 입문부터 함께해 온 분이요. 그런데 갑자기 큰 회사에서 나타난 대단하신 프로듀서님이 끼어들었어요. 박 이사랑 동고동락하던 그 형님은 점점 굴러온 돌을 편애하게 되고, 박 이사가 회사를 나왔다. 그 정도 이야기예요.”
간결한 터라 속사정까지 알기는 어려웠지만, 강지혜는 성필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손혜빈이 한 말에 하나씩 의미를 부여해보자면, 굉장히 슬픈 이야기가 된다.
아주 오랫동안, 수년 동안 형 동생 하던 사이가 굴러온 돌 때문에 부서졌다. 심지어 그 형은 동생이 떠나겠다는데 잡지도 않았다.
“박 이사님이 배신감을 느끼실 만하네요.”
항상 철두철미한 성필의 이면에는 그런 아픔과 슬픔이 있었다. 강지혜는 그를 동정하다가, 갑자기 약간 흥분해서 말했다.
“그런 곳에 박 이사님이 직접 가셨다고요?”
“네.”
“혀, 협상이 제대로 돼요? 막 감정적으로 가서…….”
성필이 석세스 엔터에 복수하겠답시고, 아예 글로브와 소녀연맹의 컴백 시기를 맞출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을 버린 석세스 엔터에게 굴욕감을 심어주겠다. 성필이 그리 결심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박 이사님이 가셔도 됐던 거예요?”
“박 이사도 공과 사는 구분해요. 사람이 원체 감정적이라 못할 때가 더 많은 거 같긴 한데, 소련이들 관련되면 하기 싫어도 할 사람이에요.”
성필이 소녀연맹에 쏟은 열정과 애정을 떠올리면, 그가 일을 그르치리라곤 생각할 수 없다.
문제는 사람 일이란 게 항상 생각대로 되지 않는단 것이었다.
역사에 이름을 새긴 영웅들도 사적인 감정이나 고집 때문에 숱하게 일을 망치건만, 보통 사람이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손 이사님이 가시는 게 가장 좋았을 거 같은데…….’
강지혜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손혜빈이 말했다.
“난 못 가요.”
“예?”
“난 성필이처럼 이성적이지가 않아서, 거기 가면 화낼 거 같아.”
방금은 성필이 감정적이라고 하지 않았나?
아니, 그런데 손혜빈도 화를 낼 거라고?
“손 이사님이요?”
강지혜는 이해가 안 되어 되물었다.
그에 손혜빈은 새침하게 입꼬리만 올렸다.
성필이 석세스 엔터 대표 김태훈에게 받은 배신감은 보통 사람이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손혜빈은 성필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만으로, 성필이 겪었을 고통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아무렴, 성필과 얼마나 알고 지냈는데 그 정도도 모르겠는가.
그렇기에, 손혜빈은 석세스 엔터에서 김태훈이나 윤상열과 만나기라도 한다면 표정 관리조차 못 할 것이었다.
“경섭이도 안 돼요. 걔도 석세스 엔터 출신이니까요. 한 이사님은 이쪽이 분야가 아니고, 사장님이 직접 가시는 것도 그렇고. 결국 급이 맞는 사람, 이 일을 할 사람은 성필이뿐이에요.”
강지혜는 혀를 내둘렀다.
가로 엔터는 중역의 절반이 석세스 엔터에 반감을 품은 이들이다.
손혜빈의 말마따나, 그쪽으로 협상하러 갈 만한 사람은 성필뿐인 듯했다.
강지혜는 벽에 걸린 스케줄 보드를 보았다. 가로로 몇 미터는 될 법한 보드엔, 소녀연맹의 스케줄과 컴백에 이르기까지의 작업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일이 잘 풀려야 할 텐데…….’
강지혜의 생각으로 지금까지 소녀연맹은 날개가 꺾여 있었다.
가장 탄력을 받아야 했을 데뷔와, 소녀연맹의 마지막 컴백인 ‘아라베스크’에서 힘을 쓸 수 없었다.
케이어스 때문이었다.
만약 케이어스와 컴백이 겹치지 않았다면, 소녀연명도 케이어스 못지않은 신화를 써 내려갔을 것이다.
‘이번에도 글로브와 겹치는 일은 피해야 해.’
무엇보다, 백설하가 프로듀싱하는 앨범 아닌가. 성적이 안 좋기라도 하면 소녀연맹 멤버 전원의 기세가 꺾일 게 분명했다.
성필의 혀에 소녀연맹의 미래가 달려 있다. 그리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강지혜는 기도했다.
‘박 이사님이 잘하시길.’
언제나 잘해왔지만, 이번에는 더욱더 잘하길.
* * *
어두운 작업실 안, 윤상열은 바닥에 깔린 요가 매트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명상을 시작한 지 벌써 10년도 넘었다.
10년 전, 아직 KS 엔터에 있었을 시절 윤상열은 한 사실을 깨달았다.
‘음악을 들어도 아무런 감흥이 없어.’
그는 농담 삼아 다른 이들에게 ‘음악과 결혼했다’고 말하며 다녔었다.
그렇다면 음악에 감흥이 없단 건 권태기일 것이다. 이 권태감에 몸을 맡기고 바람을 피울 생각 따위는 없었다.
윤상열은 권태를 극복하는 법을 찾았다.
‘명상.’
윤상열은 청각적 자극에 둔해져 갔었다. 깨어 있는 매시간 음악을 듣기 때문이었다.
베토벤이든 바그너든 프랭크 시나트라든 마일스 데이비스든 밥 딜런이든 메탈리카든 어셔든 레이디 가가든 아비치든, 무엇을 듣든 감흥이 없었다.
그렇기에 일부러 하루에 쉼표를 만들었다.
어떤 자극도 받지 않고 자신을 비우는 시간. 이로써 윤상열은 새로운 기분으로 음악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눈을 감고 숨을 들이켠다.
공기가 목을 통해 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그것에 집중하다 보면 잡념이 사라진다.
명상 스승이 이렇게 말했었다.
‘명상에 숙달되면, 나중에는 호흡에 집중하지 않고도 정신을 비울 수 있게 됩니다.’
윤상열이 그 단계에 도달한 건 명상을 시작하고 3년이 지났을 시점이었다. 앉는 것만으로도 무념무상에 들어서는 경지였다.
그 순간부터 윤상열은 권태감을 이겨냈다.
매 순간 음악을 새롭고 강렬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쯧.”
집중이 여의치 않자, 그는 곧게 폈던 허리를 구부렸다. 불편한 가부좌를 풀고 편히 앉아 검은색의 바닥을 바라보았다.
‘곧 성필이가 여기 오는 거지.’
왜 굳이 오라고 한 것일까.
1팀장의 보고를 듣는 순간, 자신은 답을 내렸는데 말이다.
윤상열은 시간 낭비를 싫어한다.
무의식적으로라도 ‘박성필 낯짝이나 보려고’ 같은 판단을 내렸을 리가 없다.
‘그렇군.’
윤상열이 품은 답이 바뀔 수도 있기에, 그는 성필을 작업실로 부른 것이다.
성필에게 듣고픈 답이 있었다.
갑자기 윤상열이 허리를 팍 구부렸다. 어릴 적의 흑역사가 떠오른 사람처럼 몸을 배배 꼬면서 의미 없는 신음을 흘렸다.
‘곧 박성필이 온다.’
그는 두려움을 이겨내고자 한다.
불가사의한 진실로부터 오는 두려움을.
‘넌 어떻게 소녀연맹을 성공시켰지?’
윤상열은 성필에게 자주 이리 말하곤 했었다.
아이돌 기획은 전문적 지식과 안목, 재능이 필요한 일이라고.
그게 없다면, 인터넷에서 아이돌의 헤메코나 곡, 컨셉을 지적하는 키보드 워리어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그림을 어깨너머로 본 주제에 자신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착각하는 건, 너무나 바보 같은 짓이라고.
성필이 프로듀서 자리를 바란단 사실을 알기에, 윤상열은 은근한 멸시를 담아 그리 말했었다.
‘그런데 어떻게 넌…….’
소녀연맹을 만들어낸 건가.
우연과 행운이 겹친 걸까?
그렇다면 두려울 필요가 없는데.
어째서 지금껏 성필을 보길 꺼렸을까.
그때, 자신을 바라보는 글로브 멤버들의 눈빛이 섬광처럼 뇌리를 스쳤다. 소녀연맹의 초동 판매량이 공개될 때마다, 글로브 멤버들의 눈빛은 점점 더 불손해졌더랬다.
‘난 석세스 엔터 소속 아티스트를 전부 관리한다고…….’
그에 비해 성필이 프로듀싱하는 그룹은 소녀연맹 하나뿐이다.
‘감히 나한테 그딴 식으로 눈을 치켜떠…….’
자신의 부족함은 모르고 그런 오만불손한 태도나 보이다니.
그러니까 너희가…….
‘됐다.’
윤상열이 자리에서 일어나 매트를 말았다. 매트를 구석에 둔 후 의자에 앉아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곧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1팀장과 성필이 나타났다.
윤상열은 손을 저어 1팀장을 내보냈다.
어두운 작업실에 두 사람이 마주 보았다.
의자에 앉은 윤상열.
문 쪽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는 성필.
숨 막힐 듯한 공기 속에서.
“앉아.”
윤상열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의자를 가리켰다.
* * *
성필은 그의 앞에 앉았다.
이렇게 마주 보고 앉는 건 아마 5년 만이 아닐까 싶었다.
윤상열이 눈웃음을 지었다. 예전보다 그의 눈가에 주름이 더 깊어지고 많아졌다. 그래,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구나.
성필은 새삼스레 감회에 빠지지 않았다. 가볍게 묵례했다.
“윤상열 PD님, 오늘 PD님을 찾은 건 다름 아니라…….”
“오랜만에 봤는데 선을 딱 가르네. 윤상열 PD님이라 이거지? 그래요, 박 이사님?”
성필은 헛웃음을 뱉었다. 그리고 어느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석세스 엔터를 나온 이후, 윤상열을 줄곧 증오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충분하지 않았던 듯하다.
‘저 비꼬는 말투 들으니까 알겠네.’
이제까지 성필의 증오는 꽤나 식어 있었다.
그런데 윤상열의 비꼼을 듣자마자 정수리를 뚫을 듯한 분노가 올라왔다.
주기적으로 윤상열과 만나 복수심을 키워야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숫돌에 칼을 갈아 날카롭게 만들 듯이.
“어린애처럼 유치하게 그러지 마라. 안 좋게 끝났어도 같이 술 먹으면서 볼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잖아. 안 그래?”
“먼저 이랬던 게 누구더라.”
성필도 가면을 벗어던졌다.
“글로브랑 소녀연맹이 대기실 같이 썼을 때, 내 옆에 앉아 어린애처럼 뚱하니 팔짱이나 끼던 건?”
“참나, 수틀리면 비꼬는 버릇은 여전하네.”
“더 말하면 감정 상할 거 같으니까 그만하자.”
“되게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너 언제부터 나한테 반말 썼었지?”
“몰라. 불편하면 내가 존대할 때 받아들였어야지.”
윤상열은 답하지 않았다. 기분이 상했나? 평정이 줄줄 흐르는 낯짝을 보아하니 전혀 그런 기색이 아니었다.
그에겐 이런 대화 하나하나가 의미 없이 지나가는 것뿐이었다.
의미가 없으니 감정이 이렇고 저렇고 할 것도 없다.
“허.”
갑자기 윤상열이 짧게 웃었다.
성필이 왜 그러냐는 듯 시선으로 묻자,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도 윤상열은 말이 없었다.
‘내가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리나 보지.’
윤상열은 이미 성필의 용건을 알고 있다. 답도 정해놓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성필이 먼저 입을 떼길 바라는 건, 성필이 부탁하는 모양새를 만들고 싶어서일 것이다. 성필은 그렇게 생각했다.
진짜 윤상열의 속내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의 장단에 맞춰주기로 했다.
“글로브도 여름에 컴백할 예정이라던데.”
“어떤 입 싼 인간이 퍼뜨리고 다녔나 모르겠네.”
“그게 숨기려고 숨겨지는 게 아닌 건 알잖아.”
혹시나 누군가에게 불똥이 튈까, 성필은 다급히 몇 마디 덧붙였다.
“어떤 댄스팀이 어느 시기에 안무를 받았다더라, 어느 스튜디오가 몇 타임 예약됐다더라, 무슨 악기 세션이 섭외됐다더라. 그런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어. 몇 다리 더 건너면 어떤 회사랑 연결된 건지도 알 수 있고.”
“……아, 그런 식이었군.”
윤상열은 몰랐던 듯하다.
하긴, 현장에서 뛴 경험이 없는 인간이니.
아마 그는 지금까지 기획사들의 아티스트 컴백 일정이 새어나가는 게, 그저 직원들의 실수쯤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성필은 또 부아가 치밀었다.
시작부터 프로듀싱 파트를 맡았던 고고한 혈통이란 거지…….
“글로브랑 컴백 시기가 겹치길 바라지 않아.”
성필은 ‘형은?’이라고 되물으려고 했지만, 그를 ‘형’이라고 부르는 게 내키지 않았다.
이젠 김태훈마저 김 대표님이라고 부르는 마당이 아닌가. 윤상열만 형이라고 부르긴 뭐 했다.
그렇다고 ‘윤 PD는?’도 이상하고…….
“넌.”
윤상열이 입을 열었다.
“아직도 그러나?”
“……뭐가.”
“넌 자주 나사 빠진 거 같은 얘기를 했었지. 뭐, 자체 프로듀싱 가능한 걸그룹을 만들고 싶다던가. 멤버 전원이 창작 욕구가 가득한, 아티스트성 있는 그룹을 만들고 싶다고. 요즘도 그러냐고.”
“정말, 소녀연맹에 관심 없나 보네. 공식 채널 구독도 안 해뒀어? 난 글로브 채널 구독했는데.”
“‘우리들의 프로듀싱’?”
성필은 의외여서 놀란 기색을 보였다.
“그거 전부 짜고 올리는 거 아니었나?”
“뭐? 아니!”
성필은 저승의 판관이 죄를 묻기라도 한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며 부정했다.
윤상열의 얼굴이 점점 의아함으로 차올랐다.
“그럼, 진짜 그룹 멤버들이 프로듀싱을 맡는다고?”
“그래.”
“참…….”
성필은 윤상열의 표정을 보고 아까보다 더욱 놀랐다. 윤상열은 성필을 동정하고 있었다.
“걸그룹을 관리하면서 편한 점이 뭔지 알아? 여자애들은 남자애들처럼 과도한 인정 욕구가 없단 거야. 남자 애새끼들, 같은 남자인 내가 봐도 대가리에 든 게 없어서 아무렇게나 나대는 꼴이 보기 역겨울 정도거든.”
“……뭐?”
“남들이 옆에서 떠받들어주니 자기가 뭐라도 된 줄 알지. 그러고선 자기는 아티스트라면서 프로듀싱에 도전해. 그럼 팬들이 우쭈쭈 해주니, 더 기가 살아서 자기가 대단한 아티스트님이 된 줄 아는 거야. 여자애들은 좀 다르지. 보통 떠받들어주는 걸로 만족하거든. 남정네들 같은 불상사가 없는 게…….”
윤상열이 편안히 다리를 꼬았다.
“걸그룹의 장점인데, 넌 그걸 스스로 버리고 있네.”
성필은 당황해서 입을 뻐끔댔다.
그의 성차별적 발언 때문은 아니었다.
윤상열의 발언이 모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뭔, 아니, 하지만, 자체 프로듀싱은 석세스 엔터 소속 보이그룹도…….”
“다 꾸민 거지. 이 업계에 있단 놈이, 팬들처럼 그걸 곧이곧대로 믿나?”
저 눈빛.
저 표정.
이 말.
성필은 옛날에도 본 적이, 들은 적이 있다.
정호환에게서다.
아이돌의 아티스트성도 전부 꾸며진 것이고, 팬들에게 어필 포인트로 작용할 정도로만 보이면 충분하다고.
그리 말했던 정호환이, 윤상열과 겹쳤다.
“아이돌이 망하는 순간은 아이돌이 본분을 잊을 때다. 아이돌은 철저하게 기획된 엔터테인먼트 상품이야. 변명의 여지가 없어. 외모에, 춤, 노래 실력, 팬서비스 정신까지는 뭐, 충분히 모두 갖춰진 인간이 있을 수 있지. 아니.”
그런 인간은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창조성은 아니야. 그건 만들 수 있는 게 아니거든. 창조성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을 따름이지.”
“……지금 나한테 충고하는 거야?”
아니면, 그저 성필을 까 내리고 싶을 뿐인가?
윤상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성필은 화를 삭이고, 그가 해주었던 조언인 듯 조언 아닌 조언에 답했다.
“나도 알아.”
“아는데?”
“알지만, 내가 모은 건 진짜 별이야. 아니, 진짜 별들이 모였어. 인생에 단 한 번밖에 없을 기적이 내 앞에 있어.”
“그럼 글로브 애들은 가짜 별이었나?”
성필이 발끈했다.
“나한테 관여하지 말라고 지랄 발광을 해댔으면서, 여기서 글로브를 걸고넘어져?”
“글로브는 가짜 별이야. 영원히 피지 못할 꽃이고.”
“뭐?”
“하지만 내가 진짜처럼 만든다. 핀 것처럼 보이게 해. 그게 기획자가 하는 일이야.”
성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떻게 사람 속을 이렇게 박박 긁어놓을까?
“그 데뷔조 전부 다 나랑 형이 회의해서 정했잖아! 근데 뭐? 가짜 별? 개소리하지 마! 걔들 전부, 전부……!”
진짜 별이다.
성필이 놓고 간 꿈의 조각.
그걸 쥐고 있는 주제에, 가짜 별에다가 피지 못할 꽃이라고?
‘내가, 너만 없었으면, 네가 여기 오지만 않았으면……!’
소민이.
세라.
노아.
지유.
정진.
유현.
이 별들이 지금도 성필의 곁에…….
“……아.”
성필은 흥분 때문에 살짝 뜬 엉덩이를 다시 의자에 붙였다.
갑자기 머리가 팍 식었다. 글로브 멤버들의 이름을 차례로 떠올리자니, 소녀연맹도 같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난 여기 협상하러 왔잖아.’
윤상열과 말싸움해서 어쩌겠단 건가.
‘그리고, 이 인간도 나랑 협상하러 앉았을 텐데. 왜 내 속만 긁어놓는 거지?’
성필은 그 이유를 유추할 수 있었다. 전생에서 윤상열과 지낸 경험 때문이었다.
‘이 새끼, 이미 답을 정해놨군?’
그래서 성필의 기분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막말을 내뱉는 것이었다.
‘그럼 내가 뭔 지랄을 해도 글로브의 컴백 시기는 바꿀 수 없단 거지? 소녀연맹이랑 겹칠지 안 겹칠지는 모르겠다만, 결국 내가 바꿀 수 없다면…….’
성필이 윤상열처럼 비웃음을 띠었다.
“내가 보니까, 아마 프로듀서 자질 문제인 거 같다. 가짜 별? 못 필 꽃? 참나.”
어차피 윤상열이 결심을 마쳤다면, 성필도 그의 비위를 맞춰줄 필요가 없었다.
이왕 왔으니 그의 멘탈에 스크래치나 내야겠다. 윤상열이 하는 짓과 똑같이.
“실력 없는 요리사들이 흔히 그러잖아. 재료가 이상하다고. 형이 딱 그 모양이네. 형은…… 아 맞다.”
성필이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그에게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리고 속삭이는 투로 말했다.
“이 회사, 괜찮아? 망하는 거 아니지? 나 없어지고 나서 건물만 번쩍거리지, 안쪽은 그냥 구멍 숭숭 뚫린 스펀지던데? 천재 프로듀서님도 회사 망하는 건 못 막는 거야? 어떻게, 나중에 길바닥 나앉으면 우리 회사로 올래?”
역린을 건드린 듯, 처음으로 윤상열의 얼굴에 불쾌감이 떠올랐다.
‘이 새끼, 날 도발하고 있어?’
어떻게 인간이 5년이 지나도록 성장하지 않을 수가 있지?
김태훈이 은근히 윤상열 편을 들어주면 입술 비쭉 내밀고 삐친 티를 내던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윤상열의 입꼬리에 비웃음이 걸렸다.
‘내가 애도 아니고 그딴 말 듣고 감정적으로 나갈 거라고 생각하…….’
“에이, 아니다. 실력 없는 사람 들이는 건 우리 사장님도 싫어하실 거야. 미안. 아무렴, 소녀연맹을 만든 내가 있는데 재료 탓이나 하는 요리사를 들이겠어?”
‘가, 감정적으로 나갈 거라고 생각하…….’
“KS 엔터에서도 제 발로 나온 게 아니라 감 떨어져서 눈치 주니까 나온 거 아냐?”
“이 씨발 새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