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14화 (414/760)

414화

다이어트식으로 오랫동안 관리한 사람들은 기름기 있는 음식에 민감하다.

한 끼만 자극적인 음식을 먹어도 다음 날 몸무게가 눈에 띄게 분다.

하지만 사람이 언제까지나 식단을 지킬 수는 없다. 소녀연맹에게는 오늘이 그날이었다.

멤버들은 민경섭의 허락을 받고 숙소에서 치킨을 시켜 먹었다.

“난 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바라 이런 음식도 마다하고 풀 조각과 닭가슴살만 먹을까?”

신아름이 닭 다리를 들고 철학적인 질문을 던졌다. 다들 치킨에 집중하고 있어서 그에 답하는 이는 없었다.

“최고의 아이돌을 위해. 오늘만 빼고.”

신아름이 자문자답한 후 거의 울 듯이 치킨을 허겁지겁 먹었다.

다들 행복했다.

행복해하면서도 죄책감에 시달리는 듯 띄엄띄엄 치킨을 집어 먹는 장하양만 빼고.

“하양아, 인원수 맞게 시켰으니까 많이 먹어.”

“먹고 있어요.”

“여기 소스에 찍어 먹어봐.”

백설하가 소스통을 장하양 가까이 밀어주었다. 통의 뚜껑을 따기 전, 장하양은 소스의 칼로리를 보았다.

저 자그마한 액체 덩어리가 150칼로리나 된다. 한 번 푹 찍으면 30칼로리쯤 될까?

러닝머신에서 4분 정도 뛰어야 한다. 고작 한 입 행복하자고 4분이나 뛰어야 한다니…….

“자.”

백설하가 포크로 소스에 담근 치킨 조각을 장하양에게 내밀었다.

소스가 흐를까 치킨 아래엔 다른 손으로 받치고 있기까지 했는데, 장하양은 도저히 거스를 수가 없었다.

백설하의 손에 소스가 떨어져 더러워지기 전에 덥석 치킨을 물었다.

“맛있지?”

“마히혀효…….”

아이돌을 그만두면 매일 배달 음식을 먹으리라. 아니, 아이돌 그만두고도 관리해야 하는데. 아, 근데 너무 맛있다.

장하양은 끊임없는 내적 투쟁을 거쳤다. 그러면서도 손은 점점 빨리 움직였다.

그때, 장하양은 백설하의 손이 자신보다 느린 것을 눈치챘다.

“쌤, 닭 다리 안 드실 건가요!”

입가에 양념을 잔뜩 묻힌 리카가 물었다.

장하양이 바로 끼어들었다.

“리카, 언니는 아껴두시는…….”

“아냐, 리카 먹어.”

“언니…….”

“헤헤, 난 가슴살이 더 좋아.”

“에엑?! 거짓말이죠! 일반적인 미각을 가졌으면 절대 안 그래요!”

“옛날부터 말했잖아.”

그랬었다.

옛날부터 백설하는 닭가슴살이 좋다고 자주 말했었다.

“난 그냥 맛있는 거부터 먹은 거야. 닭 다리 리카 먹어.”

“얏타(해냈다)! 쌤 사랑해요!”

리카가 양념 묻은 입술로 뽀뽀하려 하기에 백설하가 기겁하면서 밀어냈다.

장하양은 백설하의 닭 다리를 얻어낸 리카를 복잡한 심경으로 지켜보았다.

식사를 마친 멤버들은 돌아가면서 씻었다. 장하양은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침대에 누운 백설하에게 말했다.

“언니, 왜 항상 애들한테 맛있는 건 양보하시는 거예요.”

“으, 으응?”

“좋아하시잖아요.”

백설하는 ‘아니야 정말 난 가슴살이 더 좋아!’라면서 변명을 이어나갔다. 그러다가, 장하양의 차가운 눈빛을 견디지 못해 실토했다.

“그, 난 애들이 맛있게 먹는 거 보는 게 더 좋아.”

그러곤, 백설하는 바보 같단 생각이 들 정도로 순수하게 웃었다.

본인에게 주어진 권리를 행사하라 말하기로 단단히 벼르고 있던 장하양마저 할 말을 잃을 만큼, 백설하의 웃음은 하얗다.

그녀는 진실로 멤버들의 입이 즐거운 게, 본인의 입이 즐거운 것보다 행복한 것이겠지.

그렇게 둘 다 잠자리에 들었다.

고된 연습으로 의식은 쉽게도 꺼져 들어갔다. 그때 옆 침대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백설하가 화장실이라도 가는 걸까.

다음 날.

“언니가 그러셨어요.”

장하양은 어제 있던 일은 물론, 이제껏 백설하가 멤버들에게 해왔던 양보와 배려를 한구인에게 설명했다.

소녀연맹 섬머 시즌 그리팅 굿즈 예산을 검토하던 한구인이 펜을 놓았다.

‘설하 씨의 더 언노운 방어전 실패 때문에 소란스러운 사무실을 피해 휴게실로 왔는데.’

휴게실에서조차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구인은 그게 귀찮지 않았다.

장하양이 귀찮을 리 없지 않은가. 오래전부터 동고동락해온 회사 동료인데 말이다.

“설하 언니는 사실 천사가 아니실까요? 인간 세상이 너무 탁해져서, 농도를 조절하려고 하느님이 보내신 천사 같아요.”

“하양 씨도 주접이 느셨군요.”

장하양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박 이사님 덕분일까요?”

“확실히, 저도 박 이사님 덕에 주접의 세계를 알게 됐습니다.”

“한 이사님, 천재가 영어로 뭐예요?”

“Seolha.”

“미래는요?”

“Seolha.”

“케이팝은요?”

“Seolha. 귀여움 천재이자 음악계의 미래, 케이팝 그 자체인 설하 씨 아니겠습니까.”

“아하하.”

장하양의 웃음은 몇 초 이어가지 못하고 뚝 그쳤다.

“언젠가 언니가 상처받는 날이 올 거예요. 나쁜 남자한테 걸리거나, 사기꾼한테 투자 권유를 받거나,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요.”

“설하 씨를 굉장히 과소평가하시는군요.”

“적정평가예요. 그렇잖아요. 보통 리더라고 하면…… 권위를 살려도 좋잖아요. 이러다가 애들이 언니를 무시하거나 하진 않을는지 모르겠어요.”

“하양 씨, 종인류학적으로 접근하면 말입니다.”

또 한구인의 인문학 강의가 시작됐다.

“침팬지를 예로 들겠습니다. 침팬지 무리에서 우두머리가 되는 개체는, 예상외로 가장 힘센 이가 아닙니다.”

“그럼요?”

“힘도 주요한 요소 중 하나지만, 약자를 지키고 고루고루 베풀며 관대한 성품을 지녀야만 우두머리가 되고도 오랫동안 집권할 수 있습니다. 존경으로 무리를 이끌기 때문입니다.”

“침팬지가 정말 그래요?”

“인류와 가장 가까운 종이라서 그런지 공통점이 많이 보이지 않습니까? 인간도 동물이니, 정치 원리가 크게 다르진 않을 겁니다.”

고작 짐승조차 무리의 우두머리로 올라가려면 배려와 인품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럼 우두머리는 다 베풀면서 뭘 얻어요? 모처럼 우두머리가 되고도 여기저기 다 나눠주면 손해밖에 없잖아요.”

“어…… 그…… 자손을 남길 기회 대부분을 독점합니다.”

번쩍!

“그럼 종인류학적 관점으로 보면, 설하 언니는 번식 기회를 더 많이 얻으려는 거네요?”

“…….”

장하양이 손을 활짝 펼쳤다.

“농담!”

장하양은 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한구인에게 손을 흔들었다.

“오늘도 강의 감사드려요.”

“그걸 노리고 오신 겁니까?”

“에이, 제가 한 이사님을 지식 자판기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노리고 올 리가요.”

지식 자판기란 단어가 매우 수상했다.

“그 침팬지 관련한 건 어디서 배우신 거예요?”

“‘침팬지 폴리틱스’란 책이 있습니다. 미국 정치인들이 필수적으로 읽다시피 한다더군요.”

“또 지식이 늘겠네요. 그럼 가볼게요.”

장하양이 휴게실을 나갔다.

한구인은 적막 속에서 다시 예산 검토를 시작했다. 바로 집중이 되지 않아, 그는 방금까지 장하양이 앉아 있던 자리를 보았다.

‘하양 씨, 대단하시군.’

아이돌 활동만으로도 힘들 텐데 저토록 지적 욕구가 크다니.

조아라는 항상 한구인에게 ‘나 뭐뭐 읽었어요’라면서 칭찬해달라는 듯 말한다. 자칭타칭 소녀연맹 독서왕이라면서 말이다.

그런데 장하양은 조아라보다 더 많이 책을 읽는 듯했다. 대화에서 기품과 깊이가 느껴진다. 처음 회사에 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무심코 동경하게 된다.

‘아름답고 성격도 좋고 노력파에 탐구심까지 깊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까.’

어쩌면 하늘이 장하양의 배경을 암울하게 만든 건 나름의 밸런스 패치가 아닌가 싶은, 그런 몹쓸 생각마저 든다.

그만큼 장하양의 인간성은 독보적이었다.

그때 휴게실로 성필이 들어왔다. 그는 한구인에게 묵례하곤 냉장고에서 음료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한 이사님, 이거 좀 봐주세요.”

“뭡니까?”

[소녀연맹 컴백 초읽기, 프로듀싱에 도전하는 다섯 명의 소녀들]

[아이돌계의 뉴 타입, 소녀연맹. 여름을 노리다.]

“미디어에 보낼 보도 자료 문구거든요, 어느 게 더 끌리세요?”

“어…….”

둘 다 비슷비슷하게 오글거리고 영양가 없어 보인다.

“저는 첫 번째가 괜찮아 보입니다.”

“역시 프로듀싱을 전면에 부각하는 게 낫겠죠?”

“그런데,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음료를 마시던 성필은 어딘가 답답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니, 그게, 좀, 설하가 힘들어 보여서요.”

“설하 씨가 말입니까?”

“중압감을 많이 받는 거 같아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본인의 이름을 걸고 앨범을 준비하고 있으니.”

“그 지점을 넘어서야 성장할 걸 알아도, 옆에서 지켜보는 게 힘드네요. 말로 격려하는 데도 한계가 있고요.”

성필은 한구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런데도 한구인을 보지는 않았다.

성필은 시선을 옆으로 두고, 아련한 눈빛으로 허공을 훑었다.

“안 그래도 리더로서 힘든 애한테 처음부터 너무 힘든 짐을 지워준 게 아닐까요……. 씩씩하게 해 나가는 걸 보면 대견하기도 하고, 저도 모르게 기대고 싶어지기도 해서, 여러모로 복잡하네요.”

“설하 씨가 어른스럽긴 합니다.”

“애가 또 너무 착해서, 다른 멤버들을 몰아붙이는 상황을 힘겨워하나 봐요.”

성필에게선 더할 수 없는 애정이 느껴졌다.

백설하의 성실성과 그녀가 짊어진 과업에 동정을 품고 있는 것이다.

성필이 옛날에 그랬던가. 백설하가 다른 멤버들보다 친근하고 애착이 간다고. 나이 차이가 가장 적게 나서 뿐만 아니라…….

‘음?’

장하양이 했던 농담이 떠올랐다.

‘종인류학적 관점으로 보면…….’

한구인은 성필의 기색을 살폈다.

백설하를 걱정하는 그의 눈에선 애정으로 이루어진 진득한 꿀이 떨어지는 것 같다.

“한 이사님?”

“아, 예. 그래도 성장통 아니겠습니까. 설하 씨는 이겨내실 겁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한구인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하양 씨한테 전염된 건가. 박 이사님은 심각한 이야기를 하시는데 난 시답잖은 농이나 떠올리다니.’

“그렇겠죠. 설하는 이겨낼 거예요.”

한구인의 이야기에 동조한 성필은 갑자기 과자를 찾는 아이처럼 천진난만 말했다.

“한 이사님, 재밌는 이야기 없을까요?”

“……예?”

“알아두면 쓸모없지만 재미있는 지식 얘기요.”

“…….”

한구인은 자신이 정말 지식 자판기가 된 건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 * *

밤, 백설하는 눈을 떴다.

새벽 2시.

오늘 밤만 해도 벌써 다섯 번째다. 잠 한숨 못 자고 일어나는 게, 벌써 다섯 번째.

백설하는 장하양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이불을 밀어내며 일어났다. 그리고 살금살금 방을 나서 화장실로 갔다.

세면대를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욱…….”

속이 안 좋다.

육체적으로 안 좋은 건 아닌 듯하다.

뱃속이 묵직한 이 느낌은, 분명 육체가 아니라 영혼과 연결되어 있다.

속이 안 좋은 게 아니라, 마음이 안 좋다.

그럼에도 백설하는 세면대를 붙잡고 자꾸만 끅끅 소리를 냈다. 뭐라도 토하는 시늉을 하지 않곤 견디지 못할 거 같았다.

“우윽…….”

거울을 보았다.

거울엔 자신이 비쳤다.

고통스러움에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

‘앞으로 몇 달이나 이런 밤을 보내야 할까.’

본격적인 여름까진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

그때까지 매일을 이런 기분 속에서 살아야 한다. 실패도 성공도 자신의 손에 달린, 손에 들기엔 너무나도 버거운 자유다.

아니, 단순한 실패와 성공이 아니다.

‘소녀연맹의 성공과 실패야…….’

회의를 들어갈 때마다 도망가고 싶다.

무언가를 결정해야 한단 말을 들을 때마다 기절하고 싶다.

눈 딱 감고 ‘알아서 해주세요’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다.

‘몰라, 모르겠어. 어떤 곡이 히트하고 망할지, 그런 거 하나도 몰라…….’

어떤 의상을 팬들이 좋아할까? 아니, 팬이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보편적인 만인이 보기에 매력적으로 느낄까?

모르겠다.

어떤 댄스팀한테 안무 발주를 넣을까? 안무 시안을 받으면 뭘 택해야 해? 어떤 게 가장 화제가 될까?

모르겠다.

앨범에는 몇 곡을 넣을까? 곡의 기승전결을 신경 쓰는 편이 좋겠지만, 볼륨을 풍부하게 할 여분의 곡을 넣을까? 그게 팬들한테 매력 포인트로 작용할까?

모르겠다.

뮤직비디오 스토리보드는 뭘로? 어떤 컨셉으로? 몰라, 어느 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박 이사님은 매일 매년 이렇게 지내오신 거야? 사장님과 한 이사님, 손 이사님은 임원 회의마다 이런 선택을 내려왔어? 무슨 확신으로?’

성필이 말했었다.

본인의 선택이 옳았음이 증명되고, 시장이 본인의 선택에 반응할 때 그 쾌감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고.

그런데 그 전에 압사할 것 같다.

모르겠다.

사람들이 뭘 좋아할지…….

아니, 문제는 그게 아니다.

‘사람들이 내가 좋아하는 걸, 내가 설정한 방향을 좋아해줄까?’

대중의 취향과 자신의 취향이 일치할까?

대중에게 맞춰서 프로듀싱했다 해도, 그게 과연 시장을 움직일 수 있을까?

‘나에겐 확신이 있나?’

곧 있으면 A&R팀 최종 곡 선정 회의다.

그때 A&R팀이 직원 투표 결과를 가져온다.

그걸 떠올리자 백설하는 멍한 상태에서 빠져나왔다.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역한 느낌을 못 이기고 그녀는 입을 벌린 채 침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백설하는 세수했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자야 한다.

“언니.”

그 순간, 바로 옆에서 장하양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가오는 소리도 안 들렸던 터라 백설하는 화들짝 놀랐다.

장하양이 백설하의 이불 안으로 들어왔다.

“같이 자요.”

“어, 어?”

“잠 안 와서요.”

그리 말한 장하양은 다짜고짜 백설하의 배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어머니가 쓰다듬어주듯 부드럽게 쓸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생각할 새도 없이 백설하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백설하가 장하양의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하양아아…….”

“네, 언니.”

“나 무서워…….”

* * *

성필이 ‘우리들의 프로듀싱’을 준비하며 가장 신경 쓴 건, 다름 아닌 타 그룹의 컴백 일정이었다.

일주일이 멀다 하고 다른 기획사의 사람들과 만남을 가지며 은근히 떠보았다.

“에이, 진짜 여름에 컴백 안 한다고? 왜?”

성필은 소녀연맹의 컴백과 다른 그룹의 컴백 기간을 최대한 맞추고 싶지 않았다.

다른 아티스트들에겐 전부 음원 차트에서 밀려도 괜찮다. 차트에 철옹성을 쌓은 아이돌 음원에게 밀려도 괜찮다.

하지만 동시기에 컴백한 아이돌에게는 안 된다. 그들에게 져서는 안 된다.

‘설하가 실망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아.’

단순히 그녀가 실망하는 걸 보기 싫은 게 아니었다.

백설하를 비롯한 소녀연맹 멤버들이 자신감을 잃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혹여나 ‘나 때문에 실패하는 건 아닐까?’란 두려움을 갖는 꼴은 절대 못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 그룹의 컴백 일정을 속속들이 꿰고 있어야 한다.

‘적어도 앞뒤로 3주 텀씩은 두고 싶어.’

일단 성필은 소녀연맹보다 덩치가 작은 그룹을 보유한 기획사 직원들에겐 자랑스레 공개했다.

“우리 애들 여름에 컴백할 거 같아.”

그럼 대부분의 반응은 이러했다.

“아, 그래? 절대 여름에 내보내면 안 되겠네.”

여름은 특히 걸그룹이 강한 계절이다.

보이그룹을 담당하는 이들은 난색을 표했고, 걸그룹을 담당하는 이들도 소녀연맹이 컴백할 거란 소식에 한숨을 푹 쉬었다.

예외도 있었다.

“우리 효민이가…….”

이음 엔터 대표인 김명운이었다.

그는 성필과 술자리를 시작하자마자, 아버지가 딸을 자랑하듯 솔로 가수로 데뷔한 우효민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섬머퀸을 노려보자고 하거든. 하하, 잘됐으면 좋겠어. 우리 회사에서 자체적으로 프로듀싱하는 첫 번째 아티스트기도 하고.”

“…….”

성필은 그날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소녀연맹이 여름에 컴백해요’란 말을 꺼내지 않았다.

김명운이 절망할 게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둘 다 술기운이 꽤 돌고, 헤어질 때가 될 때쯤에서야 성필이 툭 던지듯이 말했다.

“우리도 뭐 여름에 컴백할 거 같기도 해요…….”

“으아, 그래? 방송국에서 자주 마주치겠네!”

김명운은 취기가 올라 심각성을 느끼지도 못했다. 성필은 착잡한 심정으로 그를 택시에 태워서 집으로 보냈다.

어쨌든 성필의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정말 놀랍게도, 많은 그룹들이 여름 컴백을 예정에 두고 있지 않았다.

‘이러면 우리 애들 독무대겠는데?’

남은 과업은 대형 기획사의 일정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그것도 어렵지는 않았지만, 가장 큰 난관인 KS 엔터가 남았다.

성필은 가진 모든 연락망을 동원해서 KS 엔터의 일정을 알아내려 했다.

방송국은 물론 KS 엔터에 적을 둔 사람들에게도 모두 연락해서 만남도 가져봤지만, 누구도 입 하나 뻥끗하지 않았다.

이런 경우는 둘 중 하나다.

‘컴백까지 상당 기간이 있어서 기획이 안 잡혔다. 그래서 정말 언제 컴백하는 지 모른다. 혹은…….’

회사가 업계인들에게조차 유출을 꺼린다.

컴백 일정은 잡았지만, 바뀔 가능성이 있단 뜻이다.

‘만약 케이어스나 그 선배 그룹이 여름에 컴백한다고 했을 때 아직도 업계에 일정이 유출되지 않았다면, 내부에서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나?’

‘븨이에스’는 여름 컨셉 곡을 자주 냈으니, 내부에서 반대가 있을 리 없다.

‘그럼 케이어스군.’

케이어스가 계절 곡을 소화할 수 있는가?

적어도 전생에선 그러지 않았다. 하지만 전생을 근거로 삼기엔, 성필이 보는 현재가 크게 뒤틀려 있었다.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케이어스가 정말 여름을 노리나? 아니면 가을? 겨울?’

여름이라면 최악이다.

하지만 가능성은 적다.

‘케이어스는 정호환 이사님과 KS 엔터의 모든 노하우를 들이부은 완성체야. 케이어스 이전의 걸그룹이 모두 시험작이라고 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인 그룹이다.’

그런데 케이어스의 아트 컨셉을 버리고 시기에 편승하는 계절곡으로 승부를 본다?

‘내가 아는 정호환 이사님의 성격상 할 만한 일은 아니야.’

좋아, 배제하자.

그렇다면 성필이 신경 쓸 걸그룹은 오직 하나다.

‘글로브.’

여름은 석세스 엔터 글로브와의 승부가 될 것이었다. 물론, 성필은 글로브와 정면으로 마주칠 생각이 없었다.

급이 비슷한 기획사들끼리는 미리 컴백 일정을 조절하기도 한다.

가로 엔터가 석세스 엔터와 체급이 비슷하진 않지만…….

‘그룹으로만 따지면, 소녀연맹이 글로브보다 영향력이 크다.’

그러니 석세스 엔터와 협상할 여지가 있다.

결론이 난 다음 날, 성필은 모든 팀의 팀장급들을 불러 마지막으로 일정을 조절했다.

“최종적으로 컴백은 6월입니다. 6월의 첫째, 둘째 주에 컴백하는 걸 목표로 잡읍시다. 그렇게 정하고, 제가 석세스 엔터와 협상해보겠습니다.”

모든 팀이 성필의 명령을 받들고 사라졌다.

남은 성필은 회의실에서 스트레칭을 여러 번 거듭했다. 그는 재킷을 걸친 후, 무거운 걸음으로 회사를 나섰다.

아직 꽃샘추위가 가시지 않은 날씨, 성필은 석세스 엔터로 향했다.

‘목표는 글로브와 소녀연맹의 주요 컴백 활동 기간을 겹치게 하지 않는 것. 최소 3주의 텀이 필요하다.’

* * *

성필이 과거 석세스 엔터의 연락망을 이용해서 연락해왔다.

매니지먼트 1팀 팀장은 성필의 용건을 듣고 난색을 표했다.

가로 엔터 같은 중소 기획사가 감히 석세스 엔터급의 회사와 협상을 하러 온다, 그런 사실에 심기가 상한 건 아니었다.

‘소녀연맹도 여름 컴백이야?’

그에 대한 걱정이었다.

앨범 판매량으로만 판단하자면, 글로브는 소녀연맹보다 팬덤이 약하다. 정면으로 승부하면 깨질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먼저 연락을 줘서 고마울 정도야. 근데…….’

일단은 성필이 오기 전에 의견을 들어두는 편이 좋겠지. 석세스 엔터의 두뇌이자 프로듀싱 부문의 총괄자에게.

1팀장이 프로듀서의 작업실로 향했다.

대표 집무실과 비슷한 크기가 아닐까 싶은, 오디오 인터페이스와 음향 장비로 가득한 방.

1팀장은 등을 돌린 프로듀서에게 관련 사실을 전했다.

프로듀서가 쓰고 있던 헤드폰을 벗고 뒤로 돌았다.

“누가 와?”

“박 팀, 아니, 박성필 이사…….”

가로 엔터의 박성필 이사가 온다.

윤상열이 미간을 찌푸렸다.

“박성필이 온다고?”

“예, 어디서 저희 글로브의 컴백 일정을 입수한 모양인데…….”

윤상열은 프로듀싱 파트의 수장이면서도 매니지먼트에 깊게 관여한다.

자잘한 것을 제외하고, 그의 허락을 거치지 않고 글로브는 어떤 일정도 소화하지 못할 정도였다.

윤상열은 본인이 생각한 글로브 브랜딩 이미지에 맞지 않는 일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다. 실수로라도 그런 일이 벌어지길 바라지 않기에, 매니지먼트에 관여할 수밖에 없었다.

즉, 이 안건도 그에게 먼저 보고해야만 했다.

“어떻게 할…….”

“불러.”

“예?”

윤상열이 인상을 팍 썼다.

그에 1팀장이 기겁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윤상열은 반문을 가장 싫어한다.

“예, 예, 오시면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내가 모시라고 했나?”

“…….”

“내가, 박성필을, 모시라고, 했나?”

1팀장은 입술을 덜덜 떨다가, 곧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렸다.

“이, 이쪽으로 오면 데려오겠습니다.”

윤상열이 등을 돌렸다.

1팀장이 나간 방에서, 그는 다시 헤드폰을 썼다. 창백한 전자광이 비추는 그의 얼굴은 다크서클과 피로로 얼룩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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