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12화 (412/760)

412화

검은 배경의 텅 빈 방.

중앙에는 덩그러니 의자 하나가 놓여 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카메라 앵글 안으로 한 사람이 들어온다.

[안녕하세요, 소녀연맹 설하입니다.]

백설하는 이 상황이 어색하여 못 견디겠단 듯, 수줍은 미소를 지으면서 어떻게든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괜스레 의자 팔걸이를 훑었다.

[네, ‘우리들의 프로듀싱’ 프로젝트 첫 번째 타자가 됐습니다. 예에에…….]

화면이 과거를 비추었다.

몇 개월 전 ‘우리들의 프로듀싱’ 회의.

누구 하나 입 한 번 움직이기 어려운 엄숙한 분위기 속. 멤버들이 한 남자의 시선을 피하기만 하고 있었다.

[소녀연맹 메인 프로듀서 박성필]

성필은 숨쉬기도 힘든 분위기 속에서 눈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음, 지원자가 없네. 그럼 설하부터 하자.]

침묵.

[……으헤?]

다시 화면이 현재로 돌아오자, 백설하는 억울함 가득하게 외쳤다.

[진짜 말도 안 되지 않아요?!]

카메라 앵글 밖의 스태프들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백설하는 그런 그들을 노려보다가, 어쩔 수 없단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첫 번째 프로듀서가 됐어요. 일단, ‘우리들의 프로듀싱’이 뭐냐면요…….]

백설하가 프로젝트에 관해 설명했다.

대본은 없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이 프로젝트의 의의를 말할 뿐이었다.

[박 이사님은 저희가 데뷔하기 전부터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었어요. 저희가 생각했으니까 저희가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뭔가가 있을 거라구요. 솔직히이…… 두려움이 크죠. 그게, 제가 아이돌이 되려고 연습할 땐 정말 이런 순간이 올 거라고 생각도 못 했었거든요.]

백설하는 그저 무대 위에서 빛나는 아이돌이 좋았기에 아이돌이 됐다.

무대 위의 빛만 바라보았을 뿐, 무대 뒤의 어둠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관심 외였다.

[저는 소녀연맹이 되기 전엔 아이돌 그룹 만드는 데 수십 명, 수백 명이나 필요할 거라고 생각도 못 했었거든요. 그렇잖아요. 그냥 노래 만들고, 춤 만들고, 의상 입힌 뒤에 무대로 보내는 게 끝이 아닌가 했는데…….]

상상 이상으로 많은 노력과 사람들이 필요한 일이었다.

[어려서 아이돌 좋아했을 땐 컴백이 왜 이렇게 느리냐며 회사 탓하고 그랬었는데요. 이젠 이해가 돼요. 6개월에 한 번씩 컴백 하는 거면 ‘와 회사가 진짜 사람을 쥐어짜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요. 네? 아…….]

백설하가 쓰게 웃었다.

[저희 ‘아니’ 다음 ‘롱 포’가 진짜 지옥이었죠. 4개월 만에 컴백했었죠 저희가? 그땐 회사분들이 미울 정도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회사분들도 힘드셨을 거 같아요. 네, 아무튼.]

백설하는 약 2년간의 아이돌 활동으로 많은 지식을 습득해왔다.

그 경험을 살려, 백설하는 프로듀서가 된다.

[저의 프로듀싱, 앞으로 지켜봐 주세요.]

어떤 걸 표현하고 싶으신가요?

[어떤 거? 어, 저는 일단 사랑…… 으로 정했어요. 그게, 저희가 한창 사랑에 관심이 많을 나이잖아요? 20대만큼 사랑에 몰두할 수 있을 시기가 또 없겠죠…….]

백설하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녀는 마치 감옥에 갇힌 죄수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그래서, 지금 저희만이 표현할 수 있는 사랑을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앨범으로 공개하시나요?

[네, 앨범이에요. 볼륨은 미니로 생각하고 있어요.]

앨범 제목은 정하셨어요?

[……다 아시지 않아요?]

[설하야, 이거 팬분들한테 보여드리는 영상…….]

[아, 아! 죄송합니다! 다시!]

백설하가 커트해 달라는 듯 손을 교차한 제스처를 보였다. 물론 보다시피, 전혀 커트되지 않았다.

백설하는 앞머리를 정돈하면서 새로 시작하듯 표정을 다듬었다.

[앨범 제목이요? 제목은…….]

Intro: Love.

[‘인트로, 러브’입니다.]

인트로면, 소녀연맹 3부작 앨범 시리즈처럼 차후에도 앨범 세계관과 스토리가 이어진다는 뜻인가요?

[아, 사실 그 부분은 잘 모르겠어요. 다만 저희 멤버들이 프로듀싱을 맡을 때에도 유기성이 고려되지 않을까 싶어요. 왜냐면, 사랑이란 주제도 저희들이 토론하면서 나온 거거든요.]

설하 씨가 사랑에 관심이 많으셔서 선정된 게 아니라요?

[……네, 뭐, 아무튼. 멤버들이 제가 시작이니까 앨범 이름에 ‘인트로’란 표현이 붙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구요. 저도 좋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정했습니다. 자, 그럼.]

백설하가 일어나 카메라 쪽으로 다가왔다.

[봐주세요!]

또 몇 개월 전.

‘우리들의 프로듀싱’ 최초 컨셉 회의.

백설하는 회의실로 향하는 회사원처럼 품에 서류철을 껴안고 있었다. 그녀가 상기된 얼굴로 카메라를 보았다.

[아, 너무 떨려요. 오기 전에 진정하려구 안 먹던 우유까지 마셨는데…….]

백설하는 회의실 문을 노크했다.

안에는 가로 엔터 여러 파트의 직원들이 있었다. 백설하는 그들에게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면서 본인의 자리에 앉았다.

회의가 시작되자, 백설하는 회의실 전면으로 나가서 본인이 생각한 컨셉 기획을 설명했다.

말하자면, ‘여름’과 ‘사랑’을 본격적인 컨셉으로 확정했단 내용이었다.

그때 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네, 네, 손 이사님.]

카메라가 손혜빈을 비추었다.

그녀는 진지한 표정을 유지하다가, 도저히 못 참겠는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25살이 뭘 안다고 사랑의 기승전결을 표현하겠대! 아하하핰 진짜 나 웃겨 죽겠다!]

백설하의 어벙한 표정이 클로즈업되며.

[……으헤?]

[‘우리들의 프로듀싱’ 프롤로그 끝.]

감상을 마친 김채현의 표정은 복잡미묘했다.

소련이들의 컴백이 확정되었으며, 그 컴백은 여름일 것이다. 빠르게 2개월 내에 컴백할 수도 있단 뜻이다.

그런데 속이 시원하지 않았다.

김채현은 빠르게 댓글을 확인해보았다.

[이거 예능임 진짜임?]

[ㄹㅇ 소련이들이 프로듀싱한다고?]

[설하 귀여어~]

[기대도 되지만 걱정도 되네요.]

[회사가 알아서 잘 관리할 거임.]

[‘노래도 잘 부르는 귀여움 천재’ 보러 왔습니다. ‘귀엽기도 한 노래 천재’가 맞지 않나 싶었는데, 이 영상 보니까 확실히 귀여움이 더 돋보이네요.]

[소련이들이 계절 노래 내는 컨셉은 아니었는데…….]

[소련이들 연애 금지 풀렸음?]

[25살이 표현하는 사랑의 기승전결…….]

댓글 반응도 김채현의 마음처럼 시원스럽지 않았다. 소녀연맹의 컴백을 기뻐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 기쁨에는 걱정이 스며 있었다.

‘진짜로 설하가 프로듀싱을 맡는다고?’

자체 프로듀싱이 가능한 아이돌은 요즘 시대에 드물지 않다. 그것을 세일즈 전략으로 삼는 그룹도 있으니까.

‘우리 애들은 컴백 준비할 때 전기세밖에 안 나온대요. 안무랑 노래를 전부 자기들끼리 만들어서요. 참 대견하죠 ㅠㅠ’라면서 영업 다니는 팬마저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보이그룹에서나 흔한 것이다.

‘걸그룹 중에 자체 프로듀싱하는 애들이…….’

김채현은 손가락을 하나둘씩 접어갔다. 그리고 셋에서 뚝 멈췄다.

돌판에 오래 서식했던 김채현마저도 단 세 그룹밖에 떠올릴 수 없었다. 아니, 그룹으로 세는 것도 민망하다.

그 세 개의 예시조차, 그룹에서 우연히 프로듀싱에 소질과 관심이 있던 이가 한 명씩 포함되었을 뿐이니까.

‘오히려 여자 아이돌은 솔로 컴백할 때 자체 프로듀싱을 많이 하는 편인데…….’

그룹 자체가 프로듀싱에 뛰어든다는 프로젝트는 확실히 아이돌계 역사상 처음이 아닐까 싶다.

‘아, 처음은 아니구나.’

보이그룹 중엔 있었다.

멤버 전원이 프로듀싱 앨범을 보유하고 있으며, 솔로 데뷔까지 했던 그룹이 있다.

그러니, 소녀연맹은 걸그룹 중 최초라고 해야 할 것이다. 솔로 데뷔나 컴백으로 따지면 걸그룹도 있긴 하지만, 이렇게 그룹 전체가 ‘우리 프로듀싱해요!’라고 광고한 경우는…….

‘정말 처음이야.’

그렇기에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근데.’

김채현은 여전히 불안했다.

‘설하가 작곡을 할 수 있어?’

이게 김채현이 불안을 느끼는 지점이었다. 아니, 인민이들이 댓글에서 우려를 나타내는 이유였다.

보통 사람들은 ‘프로듀싱’이라고 하면 자연스레 ‘작곡’을 떠올린다.

‘프로듀서’라고 하면 ‘작곡가’를 떠올린다.

대중은 프로듀싱이란 개념을 잘 모른다. 프로듀싱에 다양한 파트가 있으며, 프로듀싱이란 이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일이란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김채현과 대부분의 사람은, 소녀연맹이 프로듀싱을 한다니 작곡을 한다고 오해하는 것이었다.

‘멤버 전원이 작곡한다는 게…… 말이 돼?’

* * *

홍보팀 강지혜가 올린 안건은 성필을 당황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팬들이 설하가 작곡하는 줄 안다고요?”

“분위기가 그래요.”

그래서 잔뜩 걱정하고 있는 중이라 한다.

그야 아이돌 멤버가 직접 작곡한 곡을 발표하면 팬들은 좋아한다. 하지만 그건 팬들이기에 좋아해 주는 것이다.

보통 아이돌의 작곡 실력이 전문 작곡가에 견줄 정도가 되긴 힘드니 말이다. 아이돌의 자작곡은 팬서비스 차원으로 이해될 때가 많다.

“이건…….”

성필은 강지혜가 정리한 자료를 보고 머리가 복잡해졌다.

‘어디서부터 알려줘야 하지?’

오해가 깊다.

아니, 이건 오해라기보다는…….

‘사람마다 이해하는 게 전혀 다르잖아.’

‘프로듀싱’이란 한마디가 이렇게나 여러 갈래로 해석될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이러면…… 설하가 곡 크레딧 중 작곡에 이름 올리는 걸로도 욕먹는 수도 있겠는데?’

곡의 크레딧을 보면 작곡과 편곡란에 여러 사람이 이름을 올린 경우가 있다. 요즘엔 그런 곡이 대다수다. 공동 작곡이 대세가 되었으니까.

과거엔 아이돌이 작곡을 했다면서 크레딧에 한 줄 이름을 올리면 욕을 대차게 먹던 시대가 있었다.

숟가락만 올렸으면서 당당하게 이름을 박았다며 말이다.

‘프로듀싱을 작곡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잖아. 그냥 작곡이 아니라, 혼자 곡을 쓰는 걸로 생각해…….’

업계인이기에 프로듀싱의 의미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던 성필과 직원들은 예상치 못했던 사태였다.

“어쩌죠?”

강지혜가 물었다.

성필은 멍하니 그녀가 준비한 자료를 읽으면서 말했다.

“해명이라도 올려야 할까요?”

“해명…….”

강지혜가 힘없이 웃었다.

해명이란 단어는 이 상황에서 쓸 법한 게 아니었지만, 그만큼 잘 들어맞는 말도 없었다.

팬들의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선 해명 수준의 노력이 필요하리라.

강지혜가 곤란한 투로 말했다.

“그런데 그걸 구구절절 설명하는 건 좀…….”

소녀연맹 채널 공지사항에 덩그러니 글만 적어두면 얼마나 읽겠는가.

게다가 읽더라도 ‘사실 그게 아니라……’라는 투의 글이 될 것이라, 변명으로 받아들이는 이도 있겠지.

‘프로듀싱하겠다며 호들갑 떨더니 화제 되니까 곧바로 뒤로 빠진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소녀연맹과 가로 엔터가 프로듀싱의 의미를 왜곡시킨다고 여기는 이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프로듀싱을 ‘작곡’이라고 철석같이 믿던 사람에게, ‘실은 프로듀싱은 이런 거야’라고 줄줄이 설명해봤자 뭐라고 받아들이겠는가.

가르치려 든다고 생각해서 날을 세우겠지.

‘이건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리즈 영상이 차례로 올라가면 해결될 문제야. 그 시리즈를 보는 사람들은 설하가 하는 일을 보면서 프로듀싱 과정 전체를 알게 될 거야.’

문제는, 그 오해가 바로잡히기 전에 정보가 확대 재생산되는 것이다.

“지혜 씨.”

마침내 성필의 판단이 섰다.

“팬들의 우려를 없애 드리기 위해서라도, 이건 한번 바로잡고 가야 할 일이에요.”

“역시, 해명문 아, 아니, 설명문을 게시할까요?”

“아뇨. 영상으로 찍읍시다.”

“영상요? 어, 누가 나가나요? 설명하려면 전문 지식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라요.”

조아라가 나갈 것이다.

“……왜요?”

강지혜는 정말 감이 잡히지 않아 되물었다. 이사에게 써서는 안 될 어투인 ‘왜요?’까지 쓰면서.

“제가 유달리 아라한테 프로듀싱에 관련해서 설명해준 적이 많아요.”

‘롱 포’ 때부터 음반 제작 과정 등에 관심을 드러냈던 조아라였다.

성필은 그때마다 성심성의껏 그녀에게 프로듀싱 과정을 설명해주었더랬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조아라는 성필과 할 말이 없을 때면 ‘그건 뭐예요? 이건 뭐예요?’라면서 업계 지식을 물었었다.

“저 같은 늙은 남자가 나가서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 소녀연맹 멤버가 설명하는 게 낫겠죠. 아라라면 대본도 필요 없어요. 바로 찍어서 올립시다.”

“네, 네!”

* * *

[조아라의 프로듀싱 설명회.]

영상 세대가 최대한 집중할 수 있는 최적의 시간.

주어진 시간 단 10분!

정장을 입은 조아라가 칠판 앞에 서서 열변을 토해냈다. 그녀의 눈은 계속해서 앞에 놓인 초시계로 향했다가 카메라 앵글로 가길 반복했다.

[먼저 곡 제작 과정부터 빠르게 훑습니다! 컨셉 설정은 끝냈다 치고!]

조아라의 모습은 대치동 1타 강사를 방불케 했다. 성필이 ‘급한 일이야 이거 해결 못 하면 우리 망해!’라면서 호들갑을 떨었기 때문이다.

[필수요소 아티스트와 곡! 이어서 작곡, 편곡, 보컬 녹음, 곡에 따라 세션 녹음도 필요합니다! 여기서 세션이란 쉽게 말해 악기를 말하…….]

조아라가 지렁이 기어가듯이 칠판에 글자를 적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되지 않자, 그녀는 분필을 부러뜨리고 바닥에 팽개쳤다.

[편곡 편곡 얘기만 들어봤지 정확하게 아는 분들은 적죠? 제가 진짜 쉽게 설명할게요. 음악의 3요소가 멜로디, 코드, 리듬이에요. 악기 편성으로 이 3요소를 표현하는 게 편곡입니다. 네? 더 쉽게요? 동시에 나오는 악기 편성을 조절하는 거요. 그니까, 그니까 서로 안 부딪치게 여기저기 떨어뜨리고 붙여 놓는 거예요. 오케이?]

벌써 3분이 지나갔다.

아직 편곡까지밖에 설명 못 했는데!

조아라가 더 초조한 티로 설명을 이었다.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이 턱을 따라 떨어졌다.

[곡 나왔다! 그럼 레코딩합니다! 여기선 보컬 디렉터랑 프로듀서의 지시에 따라 가수가 레코딩을 진행해요. 그렇다고 레코딩이 진짜 시킨 것만 하는 게 아니라, 가수의 창조성이 발휘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부분…….]

다음!

[레코딩까지 끝냈다 그러면 믹싱 들어갑니다! 뮤직 프로듀싱 전체 과정을 일컫는 프로덕션 중 가장 비중이 큰 파트…….]

다음!

[믹싱에서 신경 써야 할 건 세 개. 위아래, 즉 높이와 주파수 범위. 앞뒤, 즉 깊이와 이펙트. 좌우, 즉 넓이와 패닝…….]

믹싱은 됐으니까 다음!

[마스터링으로 갑니다아아!]

5분 경과!

조아라는 목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설명을 이어갔다.

[마스터링은 녹음된 곡의 톤, 레벨, 곡 간격, 곡 순서를 조절하…….]

[아라야 전문 용어 말고 쉽게…….]

[상품을 예쁘게 포장하는 거예요! 다음!]

곡을 표현하는 비주얼 설정.

[비주얼에도 파트가 많은데, 역시 케이팝에서 가장 중요한 비주얼 파트는 뮤직비디오죠! 이 뮤직비디오에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건 컨셉! 저희 옛날 앨범으로 예를 들면 세계관인데, 곡의 분위기를 표현하는 시각적 스토리와 효과, 장치를 구현…….]

다음!

[의상! 의상은 자체 제작 의상과 기성복 스타일링으로 나눠요. 기성복 스타일링이라고 부르긴 하는데 옷을 그대로 입는 경우보다 수선할 때가 더 많아요. 이 의상도 기획부터 시작하는데…….]

다음!

[메이크업하는 것도 회의가 필요하거든요? 나는 개인적으로 글리터를 좋아해서 눈 주변에…….]

됐고 다음!

[아 맞다 안무! 이, 이건 퍼포먼스 디렉팅 팀을 구성해서 그, 발주를 넣어요! 댄스팀을 몇 개 후보로 올려두고 곡을 보낸 다음 시안을 받거든요? 이 시안을 받을 팀을 선정하는 것도 되게 길고 힘든데…….]

다음!

[시안으로 받은 안무를 그대로 쓰거나 여러 개를 섞어서 만듭니다! 이 과정을 통솔하는 중심 퍼포먼스 팀이 필요해요!]

다음!

[이 안무를 숙련하는 과정에서도 아티스트의 창조성이 발휘되는데. 특히 표정 연기 같은 경우는 시안에도 포함 안 되어 있다 보니 저희의 표현력이 중요…….]

안무는 이제 됐고!

[안무 숙련은 런스루로 가기보다 파트별로 진행하는 편이 완성도를 점검하기 좋…….]

9분 경과!

[이제 말할 만한 거 다 말했어요! 마지막으로 홍보! 아무리 좋은 작품이 있어도 사람들이 안 보고 안 들어주면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모든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해서 홍보합니다! 티저 영상, 티저 이미지, 미디어 기사, 한 명이라도 더 저희를 알 수 있도록 사방팔방으로 다 알려요!]

그리고.

[자, 이게.]

조아라가 숨을 헐떡이면서 말했다.

[프로듀싱의 모든 과정입니다.]

목구멍이 말라서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침을 꼴깍 삼키고 나서야 겨우 여유가 생길 정도였다.

[이 과정을 총괄하고 과정마다 선택을 내리는 직책을.]

조아라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프로듀서라고 부릅니다.]

10분 경과.

조아라의 프로듀싱 설명회, 끝.

* * *

조아라는 정장을 벗어버린 뒤 즉시 편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런데 갈아입자마자 상쾌함은커녕 찝찝함만 들었다.

‘아, 이거 연습할 때 계속 입고 있었었지.’

등 부분이 축축하다.

조아라는 여분을 가지러 갈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어차피 바로 연습하러 갈 테니까 말이다.

그녀는 세면대 옆의 걸이에 정장을 대강 걸어두었다. 그리고 오아시스를 발견한 유목민처럼 어푸어푸 급하게 세수했다.

얼굴을 말끔하게 씻어낸 후 비치된 미니 타올로 물기를 닦았다.

거울을 보니 화장기 하나 없는 메마른 인상의 자신이 나타났다. 얼마나 박박 씻었으면 뭉쳐서 붙은 화장 없이 깔끔했다.

‘음, 쌩얼도 볼만하네.’

조아라는 뷔라이브를 할 때도 화장 없이 나설 때가 많았다. 그 때문에 그녀의 라이브 캡처본은 생기 없는 얼굴인 경우가 꽤 있었다.

그녀의 입술은 다른 이들보다 유난히 살색을 많이 띠어서, 뭐라도 바르지 않으면 귀신처럼 뜬 듯이 보인다.

‘한의사님이 그랬던가. 색조 화장이 붉은 계열이 많은 이유는, 흥분해서 피가 돈 모습을 의도적으로 연출하기 위해서라고.’

입술이나 뺨을 붉게 화장하는 건 ‘나 흥분했어요’란 표현이랑 비슷하다고 했었다.

그래서 상대가 섹슈얼리티를 느낀다고 말이다.

‘그럼 나는 논(Non)섹슈얼하게 보이는 건가?’

리카는 얼굴 혈색이 좋다. 입술도 붉고. 그래서 가만히만 있어도 생기가 넘치듯이 보인다.

조아라가 자신의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잠깐. 그럼 남자도 붉은 계열 립스틱을 바르면 훨씬 매력적으로 보이나?’

방송국에서 마주쳤던 남자 아이돌들의 입술은 유독 붉었던 걸로 기억했다.

떠올리면 입술의 진한 색밖에 안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아저씨 입술도 살짝 붉은 기가 셌었지. 뭐 바르기라도 하나. 아니면 원래 그런 건가.’

입술에 뭘 바르는 거라면,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바르는 건가. 아니면 예의상 꾸미고 오는 걸까.

뭐, 매일 향수 뿌리고 자기 전에 마스크팩도 한다는 사람이니 화장하는 게 놀랍지는 않다.

그때 조아라의 바지 속에 들어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아저씨 수양딸: 너 일 아직 안 끝남? 연습하러 안 옴?]

그 톡을 보는 순간 조아라는 속이 꼬이는 듯했다. 그래, 연습하러 가야지.

연습하러…….

조아라는 정장을 한쪽 팔에 뭉쳐서 품고 화장실을 나섰다. 우연일까, 성필이 지나가고 있었다.

“어, 아라야. 아직 연습실 안 갔네.”

“땀이 많이 나서 세수 좀 했어요.”

“수고했어. 갑자기 부탁해서 놀랐지?”

“놀라긴 놀랐죠.”

10분 이내에 프로듀싱의 과정과 의미를 설명해달라니. 처음 그 부탁을 받았을 땐 무슨 깜짝 시험인 줄 알고 긴장까지 했었다.

사정을 듣곤 바로 알겠다고 했지만 말이다.

“되게 의외였어.”

“뭐가요.”

“너, 내가 했던 얘기들 생각보다 훨씬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구나.”

“기억이야 뭐, 하죠. 회사에 있던 짬밥이 있는데 그 정도는 설명해야지. 내가 괜히 지음 오빠나 유이 언니 찾아가서 괴롭힌 줄 알아요?”

“장하다, 아라야.”

그때 조아라는 시답잖은 의문을 떠올렸다.

‘아저씨가 그냥 아라라고 부를 때랑, 우리 아라라고 부를 때랑 차이가 있나? 그냥 내키는 대로 부르는 건가?’

아마 내키는 대로 부르는 거겠지.

“연습은 어때?”

“그냥저냥이죠. 옛날이랑 비슷해요.”

“설하가 너무 괴롭히지?”

“괴롭힘당하는 건 익숙해요. 여기 처음 들어와서 방송 안무 새로 익히는 거부터가 고역이었는데요 뭐.”

“방송 안무랑 스트릿 댄스가 많이 달라?”

“진짜, 하늘과 땅처럼 달라요.”

“그 정도구나.”

“언제 이것도 설명회 한번 해요?”

성필이 크게 웃었다.

조아라는 그의 입을 보았다. 확실히, 성필의 입술은 혈색이 다른 이들보다 더 강하다.

“그래, 나중에 해보자.”

그때 조아라의 핸드폰이 또 울렸다.

[세상에서 가장 소듕한 나의 카와이 리카쨩(아라쨩 이거 수정하면 절교야!): 아라쨩 보고 싶어 ㅜㅠ]

이제 진짜 가야겠다.

연습하는 일분일초가 소중하니까.

‘어떻게든 쌤이 바라는 수준까지 닿아야 해. 노력해야 해, 노력…….’

숨이 턱 막힌다.

뱃속이 뭐에라도 걸린 것처럼 무겁다.

한 걸음 떼는 것만으로도 힘들다.

그때.

“나 이만 가볼게. 아라야 힘내라.”

성필이 인사하면서 등을 돌렸다.

조아라도 잘 가라고 하려다가, 빠르게 몇 걸음 걸어가 그의 옷소매를 잡았다.

성필이 놀라 돌아보았다.

“아저씨, 나 밥 사줘요. 배고파요.”

“뭐? 점심시간 2시간밖에 안 지났는데?”

“내 나이 때는 배도 빨리 꺼지잖아요. 사줘요.”

“내가?”

성필의 입꼬리가 장난기를 머금으며 휘었다.

“네가 나보다 부자잖아. 요 녀석, 연습 땡땡이 치려고 나 이용하는 거구나. 안 속아.”

성필이 팔을 살짝 당겨 조아라의 손을 떨쳐냈다. 그러자, 이번엔 조아라가 성필의 손목을 잡았다. 놓지 않으려는 듯이 아주 꽉.

성필의 몸이 굳었다.

“아, 아라야?”

“그럼 내가 살게요.”

“어?”

“내가 산다고요. 그럼…… 갈래요?”

성필의 눈썹이 당황으로 몇 번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의 입가가, 이번에는 억지로인 듯 부자연스럽게 휘었다.

“우리 아라, 갑자기 왜 이래?”

그 순간, 조아라가 깨달았다.

성필이 ‘우리 아라’라고 부를 때는, 당황했을 때다.

“가요.”

조아라가 성필의 손목을 잡고 그를 억지로 이끌었다. 그녀의 바지 속에서 핸드폰이 울렸지만,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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