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화
성필은 잠시 전원이 끊긴 기계처럼 움직임을 멈추었다.
예상치 못한 사태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믿었었고, 자기 전마다 석세스 엔터의 몰락을 신에게 빌기까지 한 성필이었다.
즉, 성필이 넋 나간 건 기쁨 때문이었다.
‘드디어…….’
신이 성필의 소원을 이뤄주었다.
어느 누가 복수는 헛된 것이라고 했던가? 이토록 달콤한데 말이다.
물론 성필이 석세스 엔터를 직접적으로 망하게 만든 건 아니었다. 하지만 석세스 엔터 몰락의 단초들을 관찰하면서 남모를 쾌감을 느끼고 있던 건 사실이었다.
‘석세스 엔터는 여러모로 전생과 달라졌어.’
일단 회사가 상장되지 않았다.
김태훈의 공격적인 사업 확장은 그대로이지만, 자금 조달이 원활하지 않았기에 석세스 엔터는 전생에 비해 성장이 더뎠다.
현재도 충분히 크긴 해도, 전생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이건 역으로 내실을 다질 계기가 될 수도 있었어. 하지만, 잘 안 되는 모양이지?’
둘째로, 석세스 엔터 소속 아티스트와 배우들의 행보가 달랐다.
성필이 전생과 가장 크게 이질감을 느끼는 게 바로 이 부분이었다.
그가 아는 드라마나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하나둘씩 다른 경우가 점점 많아졌다.
‘전생에선 내가 미래를 보면서 수공업처럼 배우들을 관리했었으니까.’
석세스 엔터에 들어간 배우는 무조건 성공한다. 그런 미신이 이 바닥에 깔릴 정도였다.
그러나 이번엔 그리되지 않았다.
석세스 엔터는 이름처럼 성공만을 보장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또 다른 점, 바로 아티스트들의 음악적 성과였다. 이건 석세스 엔터에도 일장일단이 있었다.
‘소속 가수들이 전생보다 확연히 적어졌어. 하지만 그만큼 가시적인 성과가 크다.’
성필이 놀랐던 부분 중 하나였다.
특히 글로브가 그러했다.
글로브는 어째선지 전생보다 성장세가 더 가팔랐다. 윤상열이 모종의 이유로 글로브에 신경을 더 쓰기 때문이 아닌가 했다.
비록 윤상열의 능력을 돋보이게 만드는 일이었지만, 성필은 이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글로브 애들이 무너지는 건 보고 싶지 않으니까.’
석세스 엔터에서 고된 생활을 보내는 동시에 그룹이 망하기까지 하면, 너무나 처참하지 않은가.
이것만은 다행이었다.
어쨌거나 종합적으로, 석세스 엔터는 전생보다 못한 성장을 이어가는 중이다.
‘게다가 이 기사는 정말 커.’
석세스 엔터의 적신호라니.
소속 아티스트와 배우들이 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빠져나가고 있다. 외부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큰일인 듯하다.
‘지금까지는 가려왔던 거야.’
석세스 엔터는 거액의 계약금을 들이밀면서 톱스타들을 영입했다.
기간은 고작 1년 정도로 말이다.
톱스타가 기획사에 소속되었단 사실은, 비록 그들이 계약금에 상응하는 성과를 못 내더라도 회사에 이득이다.
그사이에 톱스타의 이름값을 잘 이용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석세스 엔터는 계약금 뿌리기로 명성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어.’
무너진다.
정말로 무너진다.
“형?”
민경섭이 얼떨떨한 투로 성필을 불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성필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지금껏 민경섭이 보지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성필에게선 절대 볼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분위기, 비열함이 서려 있었다. 타인의 실패를 비웃고 행복해하는 것만 같은…….
“응?”
하지만 곧 그 미소는 사라졌다. 성필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어, 뭐, 어때요?”
“어떻냐니. 그저 그러네. 조금 통쾌하기도 하고. 나 놓더니 꼴좋다.”
“그렇게까지 말하고서 ‘그저 그러네’는 아니죠.”
“넌 어때?”
민경섭은 애매모호한 반응을 보였다. 아마 석세스 엔터에서 친분을 쌓았던 이들을 떠올리는 듯했다.
“사람을 그딴 식으로 대하는 회사가 잘되는 게 이상한 거야.”
성필은 민경섭의 어깨를 격려하듯 두드렸다. 그건 마치, 석세스 엔터를 버리고 온 민경섭을 칭찬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일부러 전해주러 와서 고맙다. 일 봐.”
“네.”
민경섭이 떠나가고, 성필은 백설하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자.”
“네.”
백설하는 성필이 석세스 엔터에서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알았다. 가로 엔터의 중역들과 소녀연맹 멤버 전원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백설하는 축하하듯 그에게 마주 웃어 주었다. 타인의 실패에 축하 같은 건 보내고 싶지 않지만, 성필이 기뻐하니 백설하도 기뻤으니.
성필은 자기도 모르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응접실로 들어갔다.
‘그렇구나, 이렇게 되는구나.’
오래도록 성필이 갈구해왔던 한 욕망이 충족됐다.
‘내가 없으면 이렇게 되네.’
이로써 증명됐다.
자신이 석세스 엔터에 주었던 헌신과 노력은, 절대로 윤상열 못지않았단 사실을.
청소년기적인 비대한 자의식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진 않았지만, 성필은 이렇게 빌었다.
‘김태훈, 후회해라.’
나를 놓친 걸, 영원히 후회해라.
* * *
백설하가 작사에 도전하고자 한다. 단순히 가사를 쓰겠단 게 아니라, 본인이 작사한 곡을 이번 앨범에 넣고자 하는 것이다.
성필은 이 상황이 기꺼웠다.
“어떤 게 안 돼?”
“그, 아시다시피 제가 이번 앨범에서 표현하고 싶은 게 사랑의 기승전결이잖아요.”
이번 소녀연맹의 앨범은 테마 자체가 사랑이다. 앨범 전부 사랑에 관한 내용으로 꾹꾹 들어찰 것이다.
“아마 ‘애플 크러쉬’가 기(起)일 거 같아요.”
“음, 사랑하는 마음을 청자에게 고백하는 내용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럼 ‘우파루파’는 뭐야?”
“…….”
‘우파루파’는 가사까지 전부 나왔다.
현재 가로 엔터 내부에서도 유명한 ‘우파루파’란 하이라이트 가사를 제외하고, 대략적인 느낌이 어떻느냐면.
[어떡해 네가 참 야속해
왜 항상 뭍에서만 만나
나 어지러워져
근데 모른 척 괜찮은 척
물을 털어내고 널 만나
네가 멀어지면 허겁지겁
물속으로 풍덩 풍덩 돌아가
우파루파 우파루파 루파 우파루파 루파]
정말 놀랍게도, ‘우파루파’는 단순하게 캐치한 멜로디만 나열한 후크송이 아니었다.
정말 예상외로, 상당히 보편적인 사랑의 감정을 노래하고 있었다.
물속에서 사는 ‘우파루파’가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 계속 육지로 나가다니……. 자기희생적인 사랑의 면모를 잘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귀엽고 발랄하며 청량하기까지 하다.
참고로, 작사는 장하양과 정지음의 공동작업이었다.
장하양은 그렇다 치고, 정지음의 어디에 이렇게나 섬세한 면모가 숨겨져 있었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내가 아는 전생에서 지음이는 작사까지 하진 않았는데…….’
대체 무엇이 정지음을 성장시킨 것일까?
그때 성필은 정지음의 작업실 한구석을 차지한 책꽂이를 떠올렸다. 그 안에는 정지음이 장하양에게 추천받아 읽었던 ‘유리구두’는 물론 많은 만화책들이 있었는데…….
‘순정만화 덕분인가? 그 만화들이 지음이의 감수성을 꽃피운 걸까?’
대단하다, 간접 체험!
“우파루파는…….”
백설하 또한 ‘우파루파’가 매우 정상적인 곡임이 밝혀지자 당황했었다.
듣자마자 ‘안 돼요!’라고 외쳤던 게 미안할 만큼 좋은 곡이었다.
“저는 좀 슬프게 들려요. 전(轉) 아닐까요? 뭔가, 사랑의 초반이 아니라 중후반 같아요. 점점 상대에게 맞춰주는 게 힘들어지는 시점이요.”
“그렇구나.”
성필은 위화감을 느꼈다.
‘얘 연애 안 해본 거 맞나?’
백설하는 사랑의 애매한 시기를 아주 정확하게 캐치하고 있었다. 평소에 로맨스 소설이나 드라마를 많이 보기 때문일까, 연애 감수성이 상당했다.
“저는 전(轉)이나 결(結)에 관한 가사를 써보고 싶어요.”
“곡은 없고?”
“네. 가사 아이디어만 있어요.”
“음, ‘전’과 ‘결’이라.”
아직 기(起)의 경험도 없는 아이에겐 너무 난이도가 높지 않을까.
흔히 대중들은 생각 없이 유행만 좇는다고들 하지만, 상상 이상으로 날카로운 감각을 가지고 있다. 좋은 것과 아닌 것을 귀신처럼 구별한다.
또한, 진실성이 담긴 것과 거짓인 것도 구별한다.
‘당연히 팬들은 아이돌이 보여주는 게 잘 꾸며진 동화 같은 모습이란 걸 알지. 하지만 본격적으로 사랑을 노래한다면, 그리고 그걸 애들이 직접 표현한다면, 사랑의 후반부까지 창작하는 건 무리지 않을까.’
아무리 연애 관련 아이튜브와 영화, 드라마로 단련된 백설하라도 벽에 부딪히지 않을까.
‘설하의 백지 같은 지혜에서 비롯된 가사로 울림을 줄 수 있을지는…….’
장하양은 예외다.
그녀는 실로 작사 천재다.
‘역시 애들한테는 사랑의 경험이 필요해.’
인간을 가장 격렬하며 극적으로 뒤바꾸는 감정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하는 인간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설령 자신이 아닌 것조차도 말이다.
그런 강렬한 경험은 예술가에게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사랑을 한번 할 때마다 인간은 아예 다르게 바뀐다고들 하니까.
“좋아, 일단 해보자. 작사의 기본 원칙은 알지?”
“보편적인 감정을 특별하게 쓰고, 특별한 감정은 보편적으로 쓰기.”
보편적인 감정은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공감할 수 있으니, 눈에 띌 만한 특별한 표현이 필요하다.
역으로 특별한 감정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없기에, 가슴에 쉽게 와닿는 보편적인 표현이 필요하다.
“이번 과제는 보편적인 감정을 특별하게 표현하는 거야. 어느 정도 쓴 건 있어?”
“네!”
백설하가 칭찬을 바라는 듯 자랑스레 쪽지를 내밀었다.
성필은 그녀가 내민 쪽지를 받아들였다.
[응 맞아 난 널 사랑해
백번 물어도 사랑해
그런데 가끔은 아니야
가끔 어쩔 때 오늘 자주
너무 질질 끌어왔었네
너도 느끼고 있지
……(뭘 느끼고 있을까?)]
백설하는 이 지점에서 막힌 듯했다.
“뭘 느끼고 있을까, 라니.”
“그으…… 헤어질 기미라거나 그런 거요. 평범한 표현은 많이 떠오르는데요 가슴에 확 닿는 게 없어요. 그래서 박 이사님 조언을 좀 들으려구요.”
백설하가 맹수의 영역으로 발을 들이듯 아슬아슬한 기색을 보였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성필을 자극하지 않으려 천천히 물었다.
“박 이사님은 연애…… 몇 번 해보셨어요?”
“음.”
성필은 전생까지 포함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하지 않기로 했다.
“세 번.”
“아.”
순간 백설하의 표정이 흐려졌다.
마치 눈이 내린 날, 누구의 발자국도 찍히지 않은 눈밭을 기대하며 나섰다가 이미 선객이 있음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하지만 백설하는 곧바로 ‘그렇겠지’하는 기색을 보였다.
“헤어질 때 어떠셨어요? 그런 뭔가, 있나요? ‘아 우리 곧 헤어지겠네’ 싶은 사인이요. 가장 최근 걸로 말씀해주세요.”
“차였는데.”
“아.”
“다짜고짜 차였는데.”
“아, 죄, 죄송…….”
“진짜 어처구니없이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차였어.”
“…….”
“그래도 작년에 만나서 화해했어. 화해라고 할까, 툭 터놓고 이야기했지.”
옆에는 리카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리카가 성필의 전 애인인 이수림의 그림에 옵션을 걸었었다.
가격이 1,000만 원이라고 했던가.
‘리카가 그걸 샀을까?’
설마.
리카도 그냥 해본 말이었겠지.
상념에 빠져 있던 성필은 백설하가 말이 없단 것을 깨달았다. 정신을 차리니, 백설하는 면목이 없단 듯 고개를 숙인 채 성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성필이 뒤늦게 아무것도 아니란 듯 웃었다.
“뭘 그렇게 미안해하고 그래! 너무 옛날얘기라서 기억도 안 난다. 음, 그래. 있지. 헤어질 때가 되면 기미가 느껴지지. 그러니까 그 느낌은…….”
성필이 ‘아!’하며 감탄사를 뱉었다.
“숙제 같아져.”
“숙제요?”
“응. 그 사람이랑 만나는 게 숙제처럼 느껴져.”
“아, 숙제…….”
백설하는 곧바로 그 감정을 이해한 듯했다.
숙제가 무엇인가.
하기 싫은 것이다.
그래도 해야 하는 것이다.
상대와의 만남이 숙제처럼 느껴지는 순간, 그 관계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게 아닐까.
백설하가 시원스럽게 가사를 썼다.
“어때요?”
[너무 질질 끌어왔었네
너도 느끼고 있지
나랑 만나는 날이 숙제 같지…….]
“코러스 파트는?”
“실라블(Syllable)로 하게요.”
실라블이란, ‘따따따’나 ‘음음음’처럼 의미 없는 말을 가사처럼 부르는 것이다.
악기 중심의 하이라이트, EDM으로 따지자면 드롭(Drop) 파트에 주로 쓰이는 방법이다.
“‘나랑 만나는 날이 숙제 같지’, 괜찮네.”
“에헤헤, 다행이다.”
그때 갑자기 백설하의 눈썹이 우울하게 쳐졌다.
“너무하잖아요 숙제라니……. 애, 애인인데에…….”
“너 울어?”
“너무 심해요 이거…….”
백설하는 진심으로 슬퍼하는 듯했다.
이 무슨 감수성인가?
숙제란 표현이 그렇게나 충격적인가?
“처음엔 그렇게나 사랑했으면서…….”
어제 무슨 드라마라도 본 모양이었다.
감정을 갈무리한 백설하는 여전히 우울한 투로 질문해왔다.
“사랑은 결국 끝날 수밖에 없을까요……. 영원한 사랑은 없겠죠……?”
백설하는 희망을 찾듯 성필을 보았다.
“없긴 왜 없어.”
“하지만, 인터넷에 올라오는 썰들 보면…….”
“설하야 그런 거 너무 많이 보지 마. 물론 그런 게 다 거짓말이란 건 아닌데, 인터넷엔 아름다운 이야기보다 분노할 이야기가 더 많이 올라와. 감동보다 분노가 더 재밌잖아. 직접 겪어보고 생각해야지.”
“……그럼, 직접 겪어본 연애 3회 박 이사님은 영원한 사랑을 믿으세요?”
“왜 비난하듯이 말해. 내가 연애 3회 한 게 아니꼽니?”
“…….”
“대답을 안 해?”
“불공평하잖아요.”
정말 의외의 대답이라, 성필은 놀란 모습을 보였다.
“저희 둘 다 연애 금지 상태잖아요. 근데 이사님은 즐길 거 다 즐기고 금지당한 거잖아요.”
“대신 넌 1년 뒤에 풀리잖아. 아니다, 1년도 안 남았지. 그리고 ‘즐길 거 다 즐기고’라니. 누가 들으면 내가 뭔 방탕아였던 줄 알겠다.”
“불공평해요.”
백설하가 장난스럽게 또 그리 말했다.
성필도 장난으로 답했다.
“그래, 미안하다. 너한테 이런 말 들을 줄 알았으면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면서 살걸.”
“만약 과거로 돌아갈 일이 있으시면 주의해주세요.”
성필은 시원스레 ‘알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무튼, 영원한 사랑은 있을 수 있지. 그런데 조건이 필요해.”
“조건요?”
“두 사람 다 노력해야지. 사랑은 무조건적으로, 거저 유지될 수 있는 게 아니야.”
노력?
백설하는 사랑에 노력이 필요하단 게 이해되지 않았다. 무조건적이기에 사랑이 아니던가?
“내가 아는 분 중에 남 교수님이란 분이 계시거든. 그분은 아내분한테 매력적으로 보이려고 운동하시고 피부 관리하고 스타일링도 계속 신경 쓰셔.”
“와, 대단하시네요.”
“아내분도 마찬가지야. 집 안에서 향수 뿌리시고 화장까지 하셔. 그리고 두 분 각방 쓰시고.”
“네?! 그럼 사이가 안 좋은 거잖아요!”
“건전한 긴장감을 유지하려고 그러신대. 아침에 마주칠 때도 애인 만나러 가듯이 단정하게 하고 거실로 나가신다더라.”
“와…….”
“그 결과, 금실이 좋으시지. 아직도 서로한테 이성적인 매력을 느끼신대. 50이 훌쩍 넘으셨는데도 말이야.”
“확실히 노력이 필요하네요…….”
백설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서로에게 너무나 편해진 나머지, 너무나 편한 차림으로 아무렇지 않게 집을 활보하는 부부.
‘아빠도 젊었을 때 사진은 정말 잘생기셨는데.’
동생인 백수현은 젊었을 적의 아버지와 점점 비슷해지고 있다.
헌병 시절 아버지의 사진을 보면, 사실 군인 컨셉으로 차려입은 아이돌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곤 했었으니.
“노력…….”
백설하는 어쩐지 달관한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끝을 보아버려 권태감에 빠지기라도 한 것일까.
“박 이사님은 노력하실 거예요?”
“나? 개인적으로 남 교수님 존경하거든. 삶의 태도든, 업계 지식이든. 부인이랑 ‘정으로 산다’는 말하는 것보다, 나이 들어서도 불타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쪽이 낫지 않을까.”
“부, 불타는 사랑요…….”
“무슨 생각 했어?”
“아시면서 놀리지 마세요…….”
아까까지 달관한 표정을 짓더니, 이젠 금세 사랑을 동경하는 소녀로 돌아왔다.
‘그렇네, 노력이라.’
전생의 성필은 비록 결혼까지 못 했지만, 연애에 굉장히 큰 노력을 기울였었다.
사랑은 진실로 인간을 가장 격렬하게 뒤바꾸는 감정이다. 사랑이 뭐라고 그렇게나 열심히 운동하고 춤을 연습하…….
‘내 머리에서 나가 조아라!’
백설하는 가사를 몇 번 더 끄적이더니, 도움이 됐다며 성필에게 감사를 표했다.
응접실에서 나와 각자의 방향으로 떠나가기 전, 성필이 백설하를 불렀다.
“힘든 건 없어?”
“힘든 거요? 헤헤, 다 힘들죠 뭐.”
“다 경험이 될 거야. 그거 알아? 비틀즈, 로비 윌리엄스, 마돈나, 애덤 램버트. 내로라하는 싱어송라이터와 아티스트들도, 처음에는 회사의 기획에만 따라 움직였던 아이돌이었던 거.”
백설하는 모호한 미소만 입가에 걸었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소녀연맹이 데뷔하기 이전부터 들어왔었다. 음악사 시간에, 성필이 비틀즈를 예시로 들기에 얼마나 놀랐던지.
“항상 생각하지만, 박 이사님이 드시는 예시들은 너무 거창해요. 비틀즈나 마돈나라뇨…….”
“원래 다들 뭘 시작할 때는 1등을 노리잖아. 시작할 때 ‘난 3등 해야지’란 사람이 어딨어. 꿈은 클수록 좋아.”
“짓눌리겠어요.”
“물론, 난 설하가 거창하게 크지 않아도 좋아. 이대로만 있어 줘도 돼.”
“……알겠네요.”
“응?”
백설하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미간을 찌푸렸다. 마치 성필을 나무라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도 괜찮아’라는 말이, 사랑이 숙제로 변하는 시작인 거 같아요.”
“어……?”
“편하게 느껴지니까 기대고 싶어지잖아요. 그런데, 그럼 안 돼요.”
백설하는 성필에게서 한걸음 물러났다.
“노력해야죠. ‘정들어서 좋다’는 말은 듣기 싫어요. 최고여서 사랑받고 싶어요. 박 이사님이 관성으로 저한테 애정을 주는 건 보기 싫으니까요.”
멍하니 백설하를 보던 성필은 갑자기 입을 손으로 턱 막았다.
‘뭐야 뭐야 이거 뭐야.’
백설하에게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다.
성필은 잘못하면 기쁨의 신음이 입술 사이로 힘없이 새어 나갈 것만 같았다.
그런 볼품없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다. 사랑에 빠진 소년·소녀처럼 동경 가득한 모습 따위, 냉혹한 프로듀서가 보여줄 만한 게 절대 아니니까.
‘설하 너무 멋져 영원히 팬 되고 싶어 진짜 천재만재 평생 아이돌 해줬으면 좋겠다.”
“네……?”
“어, 아.”
자기도 모르게 중간부터 속마음을 바깥으로 낸 듯했다.
성필은 놀라서 변명하려다가, 그냥 시원하게 다 말하기로 했다.
“방금 너무 멋졌어. 진짜, ‘너무’보다 상위급 표현이 있었으면 백번이라도 말했을 거야.”
“그, 그 정도였나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백설하는 방금 자신이 했던 말을 되짚어보듯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때 성필이 힘내자는 의미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부끄러우니까 이만 갈게!”
그러곤 도망가듯이 저 멀리로 빠르게 사라졌다. 백설하는 그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웃다가, 한숨을 쉬었다.
분명 이전 회의 때 성필이 장하양에게 이리 말했었다. 작사로 크레딧에 이름을 올린 건 장하양뿐이고, 대견하니 상을 주겠다고.
백설하가 괜스레 땅을 툭툭 찼다.
‘나는 상 안 주시나……?’
용기 내서 작사도 해봤는데.
* * *
‘더 언노운 싱어’ 촬영이 끝났다.
백설하는 가면을 벗고 대기실로 왔다.
민경섭이 고생했다면서 꽝꽝 얼린 생수병을 내밀었다. 백설하는 그것을 얼굴에 대며 ‘흐아아’란 아저씨 같은 신음을 흘렸다.
공연의 여운을 느끼고 있던 중, 민경섭이 물었다.
“설하야.”
그 부름만으로도 백설하는 그가 무엇을 물을지 알 수 있었다.
백설하 또한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네에…….”
“이런 말 실례될 거 아는데, 그…….”
민경섭이 마지못해 말했다.
“너, 언제 져?”
“……그러게요.”
백설하, ‘더 언노운’ 방어전 삼연패(三連霸)
3회 연속으로 챔피언의 자리를 지켜낸 그녀였다.
“이거 연습하느라고 프로듀싱에 낼 시간도 빠듯하고.”
“그, 그치만 대충할 수는 없잖아요…….”
백설하의 성격상 일부러 지는 짓 따위 못한다. 아니, 안 한다.
그건 상대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으니까.
민경섭은 체념한 듯 말했다.
“그렇지, 그렇지.”
현재 대한민국에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가수.
여제(女帝), ‘노래도 잘 부르는 귀여움 천재’.
현재 음원 차트는 ‘더 언노운 싱어’의 무대 음원들이 대단한 히트를 기록하고 있었다.
특히 ‘노래도 잘 부르는 귀여움 천재’의 무대 음원은, 방송되는 족족 차트 10위권을 뚫고 올라가는 중이었다.
이 정도면 소녀연맹이 차트 10위권을 뚫은 횟수마저 추월할 지경이다. 새삼 미디어의 힘이 느껴지는 대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설마 이렇게나 시원하게 계속 이길 줄은 다들 몰랐으니까.”
“그러니까요. 이대로 한 번만 더 이기면, 아이돌 출신 ‘더 언노운’ 기록 경신이에요…….”
백설하는 노곤한 몸을 의자에 깊이 묻었다. 바로 앞 메이크업 테이블의 조명을 맞으며, 그녀는 거울을 보았다.
권태감에 찌든 여제는 다리를 꼬곤 턱을 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패배를 알고 싶군…….’
예상치 못한 난관.
과연 여제 백설하는 맞수를 만나 패배하고 온전히 프로듀싱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인가?
‘아아, 정상이란 이토록 무료한 것이었나?’
강하다, 백설하!
* * *
소녀연맹의 팬 고3 김채현.
그녀가 선언했다.
“탈케한다.”
탈케.
탈(脫) 케이팝이란 뜻이다.
즉, 케이팝 덕질을 완전히 그만두겠다는 가장 강한 선언인 것이다.
친구인 이선주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왜?”
“왜? 왜냐고? 왜냐고?!”
“공부해야 해서?”
“아니!”
김채현이 억울한 목소리로 외쳤다.
“시X 어떻게 최전성기를 누리는 아이돌 그룹 공백기가 1년을 훌쩍 뛰어넘냐고오오오오오오오! 그 흔한 디지털 싱글 하나 없이! 1년을! 1년으으을! 뭔 회사에 인원이 10명도 안 돼?! 가로 엔터 죽어어어어어어어!”
이선주가 움찔했다.
김채현은 정말 가로 엔터에 불이라도 지를 기세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김채현의 폰에 알람이 떴다. 소녀연맹 공식 채널 새 게시물 알람이었다.
“씨X 또 별 시답잖은 브이로그 영상 같은 거 올라오면 10번 돌려보면서 애들 미모 감상한 다음 가로 엔터에 불 지르고 교도소에 들어가……!”
[컴백 프로젝트 예고, ‘우리들의 프로듀싱’ 프롤로그]
“라고 할 뻔!”
김채현, 케이팝 덕질 복귀 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