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9화
성필은 노크한 후 작업실로 들어갔다.
익숙하디 익숙한 풍경의 BGM으로 ‘우파루파’가 들려왔다. 정지음은 성필이 들어온 것도 모르고 멍하니 모니터만 보고 있었다.
성필은 그를 부르려다가, 조용히 그의 뒤로 다가갔다.
정지음은 마우스를 쥐고 있었다.
하지만 커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정지음은 그렇게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마치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성필이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 형?”
“바빠?”
정지음은 답하지 않았다. 대답하길 피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대신 그는 의자를 돌려 성필과 마주 보았다.
“잠깐 얘기 좀 하자.”
“왜 그래요, 무섭게.”
할 말이 있으면 뜸 들이지 않고 바로 하는 성필이다. 정지음은 성필이 굳이 ‘잠깐 얘기 좀 하자’고 한 것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성필은 그의 앞에 의자를 가져다 앉았다.
“‘애플 크러쉬’ 작업 어떻게 되고 있어?”
“…….”
이번에도 정지음은 대답 대신 행동했다.
그는 ‘애플 크러쉬 버전 26’이라고 적힌 파일을 재생했다. 수정을 거치지 않으면, 이 버전의 ‘애플 크러쉬’가 A&R팀 회의에 제출될 것이었다.
백설하는 정지음이 ‘애플 크러쉬’를 거의 손대지 않았다고 했었지만, 성필이 느끼기엔 반대였다.
거의 완성되었다.
하지만…….
‘너무 무거운데.’
너무 길고 복잡하고 무겁다.
곡 길이는 4분을 넘는다.
현재의 ‘애플 크러쉬’는 가볍게 듣기 힘들 정도로 가득 차 있었다.
온갖 기교와 사운드가 복잡한 시계 장치처럼 정교하게 맞물려 있다. 시간만 확인하면 만족하는 사람에게, 불필요한 기능이 덕지덕지 붙은 크로노그래프를 들이미는 느낌이다.
“별로죠?”
창작자의 창작물을 평가하는 건 항상 조심스러워야 한다. 성필은 정지음의 의중을 몰랐으므로 쓴웃음만 지어주었다.
정지음도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설하가 곡이 완성 안 됐다고 했거든. 그래서 보러 왔어.”
아마 백설하의 ‘완성이 안 됐다’는,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수정해주지 않는단 뜻일 것이었다.
“설하랑 싸웠어?”
“……싸운 건, 아니에요.”
“그럼?”
“…….”
정지음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고해성사를 하듯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도 모르겠어요…….”
* * *
‘애플 크러쉬’의 보컬 라인이 확정된 후, 정지음은 가열하게 작업을 시작했다.
1년 넘는 소녀연맹의 공백기를 깰 타이틀곡이 될지도 모른다. 비록 자신이 미는 곡은 아니더라도, 백설하의 염원이 담겼으니 허투루 작업하고픈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모르겠어.’
대체 어떻게 ‘애플 크러쉬’를 다뤄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여태껏 정지음은 샘솟는 영감으로 곡을 만들어왔다. 손을 가져다 대면 뚝딱하고 곡이 나왔다.
남들한테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정지음은 진실로 자신이 천재라고 생각했다.
‘왜 이러지?’
그런데 ‘애플 크러쉬’만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정지음은 교과서적으로 나가려 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AAA구조의 교과서들이라면 발라드곡 정도밖에 없다. 혹은, 정지음이 열등감마저 품고 있는 전설적인 프로듀서인 정호환의 곡 ‘포트레이트 인 유’가 전부다.
븨이에스의 ‘포트레이트 인 유’를 참고해봤자 그 열화판밖에 나오지 않으리라.
두려웠다.
두려워서, 정지음은 도피했다.
정지음은 본인이 작곡한 ‘우파루파’만 들여다보았다. 혹은 A&R팀이 가져온 곡들만 체크했다.
‘애플 크러쉬’는 보지도 않았다.
“오빠, 어느 정도 완성됐어요?”
백설하가 그리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초조함이 배어 있었다.
정지음에겐 백설하의 불안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에 서린 초조함을 불쾌함이라고 해석했다.
‘왜 이렇게 느리냐’고 타박하는 것으로 들렸다.
“할게.”
그리 퉁명스레 답하기만 했다.
백설하는 알겠다면서 떠나갔다.
그리고 다음 날 찾아와 물었다.
“오빠.”
그리고 그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정지음은 초조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나도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화가 났다.
정지음은 여태까지 AABC 아니면 AAC 구조의 곡만 만들었다. 가장 히트곡이 될 확률이 높은 구조만을 사용해왔다.
‘애플 크러쉬’ 같이 생소한 구조는 머릿속에 넣어두지도 않았었다.
‘왜 이런 곡을 고른 거야.’
어째서 이렇게 이상한 구조를 골랐어.
그리고 왜, 내가 만든 게 아니라 해외 작곡가의 곡을 고른 거야? 내가 못 미덥나?
정지음은 반감이 생겼다.
아니, 배신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정지음에겐 그런 감정을 표현할 용기가 없었다. 하고 싶지도 않았다.
동고동락을 함께 해온 소녀연맹, 백설하에게 어찌 그럴 수 있을까.
‘왜 이런 곡을…….’
정지음은 자기혐오와 재능의 벽 앞에서, 그저 도피만을 반복했다.
‘우파루파’와 함께 현실에서 눈을 돌릴 뿐이었다.
* * *
“어떻게 이 구조를 아이돌 곡에 쓸 수 있는지, 어울리게 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다키스트 ‘더 킹’을 편곡할 때 느꼈던 열등감이 다시 정지음을 휘감았다.
“모르겠어요, 모르겠다고요, 진짜…….”
정지음의 머리로는 ‘애플 크러쉬’를 완성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괴감을 느꼈다.
“저는, 전, 설하가 바라는 걸 들어줄 수가 없다고요…….”
정지음은 뮤직 프로듀서로서의 책임감에 짓눌렸다. 아이돌이 바라는 것을, 그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들어줄 방도가 없었다.
조금만 더 용기가 있었으면, 정지음은 KS 엔터로 달려가 정호환에게 ‘포트레이트 인 유’를 만들 때 어떻게 했는지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설하한테 퉁명하게 굴었던 건 그래서였구나.”
“아무것도 안 보여요. 이거, 이 곡에선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요. 애초에 팝에 쓸 만한 게 아닌데 어떻게, 설하는 대체 왜 이런 걸…….”
“그럼 다른 작곡가한테 넘길까?”
정지음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는 눈만 크게 뜨고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세상엔 여러 종류의 작곡가가 있다.
멜로디를 잘 쓰는 작곡가.
트랙을 잘 만드는 작곡가.
랩 파트를 잘 쓰는 작곡가.
스트링 편곡에, 브라스 편곡에 능한 작곡가.
정지음이 정말 죽어도 못 하겠다면 다른 작곡가에게 넘기는 방법도 있다.
“네가 바라면 그렇게 해도 돼.”
사실 지금까지와 다를 게 없다.
가로 엔터가 여러 작곡가의 멜로디와 트랙, 곡을 사들였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정지음에게 부족한 부분을 돈으로 메꾸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정지음은 시원스레 ‘알겠다’고 하지 못했다. 아니, 안 했다.
“그건 싫지?”
사람은 욕심이 있다.
당연한 일이다.
정지음도 그러하다.
소녀연맹과 함께 신화를 써 내려간 천재 작곡가. 그는 그 타이틀을 계속 유지하길 바랐다.
아니, 타이틀보다는 소녀연맹과 계속 같이 나아가길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넘겨주고 싶지 않다.
“이해해.”
성필이라도 그럴 것이다.
갑자기 정호환이 정신이 나가서 가로 엔터에 오겠다고 하면, 성필은 ‘애들을 잘 부탁드립니다’라며 시원하게 떠나진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가로 엔터에 들러붙어 소녀연맹의 프로듀서로 있고자 하겠지.
“지음아, 나랑 같이해 보자.”
“……형이랑요?”
성필은 정지음과 마주 보면서 앉는 대신, 그의 옆으로 의자를 가져갔다.
둘은 함께 모니터를 보게 됐다.
“형 작곡하실 줄 아세요?”
“아니.”
성필이 쑥스러운 기색으로 웃었다.
“작곡은커녕 다룰 줄 아는 악기도 없어.”
하지만 성필에게는 수십 년간 쌓아온 경험이 있다. 세상 누구보다 가장 강렬히 아이돌에게, 아이돌의 음악에 빠져 살아온 세월이 있다.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 성필은 윤상열에게 음악을 배웠다.
교육받았다는 뜻이 아니다.
‘윤상열이 자랑하듯이 했던 말들. 흘리듯이 던졌던 말들.’
소녀연맹의 ‘아니’는 정지음이 만들었다.
성필이 ‘아니’를 처음 듣고 격렬하게 반응했던 건 윤상열에게 배웠던 지식 덕분이었다.
‘아니’와 같은 스타일의 곡이 대단한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작곡가이자 뮤지션이고 아티스트인, 윤상열에게 배운 것을 써먹고자 했다.
‘난 윤상열을 증오해.’
하지만, 전생의 성필은 내심 윤상열을 동경하고 있더랬다.
손끝에서 아름다운 음악을 밥 먹듯이 만들어내는 그 작곡가를, 성필은 질투하면서도 인정해왔다.
성필은 정지음과 함께 ‘애플 크러쉬’를 살폈다.
그리고 성필은 말했다.
정지음보다 훨씬 경험 많은 작곡가의 조언을, 그에게 들려주었다.
“지음아, 곡이 처음 형태보다 훨씬 복잡해졌잖아. 여기서 더 채우지 말고 빼보자.”
작곡가는 본인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파트에 힘을 준다고 한다.
정지음은 ‘애플 크러쉬’ 전체를 세련된 기교와 고품질의 세션, 트렌디의 끝을 달리는 편곡, 복잡한 코드 진행으로 떡칠해두었다.
그는 어찌해야 할 줄 몰랐기에, 자신이 아는 최고의 방법을 모두 사용했다.
“좋은 재료를 많이 넣을수록 완성도가 올라가는 건 아니잖아.”
성필이 정지음의 손을 마우스 위로 옮겨주었다. 정지음은 두려워하는 듯했다.
자신이 쌓아온 모든 기술을 들이부터 만든 위태로운 유리성. 그것을 무너뜨리는 게 두렵다.
다시 허허벌판을 마주하면 또 어떻게 성을 쌓아야 할지 모를 것 같아서.
“지금 이 곡은 최고의 상태를 목표로 하고 있어. 최고의 퀄리티 말야. 그런데 우리 한번 최고 말고 최선으로 가보자. 조금 서투르고 투박하더라도 해보는 거야.”
성필은 정지음이 두려워하는 것을 대신해 주었다.
“이 사운드는 빼.”
정지음은 벌벌 떨면서도 성필의 말을 따랐다.
그렇게 철거가 시작됐다.
하나둘씩 무너지는 유리성을 바라보며, 성필이 쉬지 않고 말했다.
“지음아, 기본부터 생각해. 대비와 밸런스야. 멜로디가 복잡하면 코드는 간단하게. 보컬을 강조하고 싶으면 동시 발음 악기는 적게. 이게 기본이잖아.”
현재의 ‘애플 크러쉬’는 그 기본이 지켜지지 않았다. 오로지 채워져 있기만 했다.
보컬이 빈틈없이 들어가는 곡이건만, 그것을 받쳐주는 악기 세션 또한 가득 차 있다.
정지음이 어떻게든 곡 자체로 승부를 보겠다고 생각한 게 뚜렷이 보인다.
“애들을 믿는단 게 쉽지 않지.”
성필의 말대로였다.
정지음은 기본을 지키면서 작곡을 해왔다.
이 파트에는 백설하가, 저 파트에는 조아라가, 그리고 또 이 파트에는 장하양이.
이런 식으로 멤버들의 기량에 따라 파트를 구분해서 만들어왔다. 그녀들이 소화할 수 있는 역량을 고려했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백설하가 제시하는 이상은 멀고도 멀어서, 도저히 소녀연맹이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기에 곡만으로 완벽에 다다르고자 한 것이었다.
“그래도 한번 믿어봐. 할 수 있을 거라고.”
마침내 정지음이 쌓은 유리성이 모두 무너졌다. 남은 건 휑하다 싶을 만큼 텅 빈 곡이었다.
오로지 멤버들의 보컬에 의존해야만 곡이라고 불릴 만한 물건이다.
시계를 보니, 몇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정지음은 사운드 하나를 버릴 때마다 몇 분의 시간을 쓴 것이다.
“그런데, 형…….”
정지음이 허탈하게 말했다.
“당장 며칠 뒤가 가이드 보컬 녹음인데. 그때까지 이걸 다듬을 자신이 없어요. 감은 오지만, 아직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실히 모르겠어요. 저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데 설하한테 녹음하러 들어가라고 하는 건…… 그건…….”
정지음은 드디어 뭔가 보일 것 같았다.
일반적인 음악은 분위기를 고조할 때 악기를 더 추가한다. 그런데 그의 눈앞에 있는 ‘애플 크러쉬’는 정반대였다.
반대로 모든 부분이 텅 비어 있었다.
‘애플 크러쉬’를 쓸 때 고려했던 것 중 하나가 모든 파트를 하이라이트같이, 지루한 부분이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모든 부분을 비워야만 했다.
멤버들의 보컬이 더 돋보이도록.
“이건 작곡이나 편곡을 했다고도 할 수 없잖아요…….”
정지음은 확신하고 있었다.
‘애플 크러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채우는 게 아니라 빼는 것이었다.
성필의 조언을 듣고 이것저것 전부 빼버린 이 형태가, 완성된 ‘애플 크러쉬’와 가장 닮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정지음은 죄책감을 느꼈다.
모든 것을 가수에게 맡기다시피한 곡을 쓰는 게 맞나? 이러고도 자신이 작곡가가 맞나? 후일 소녀연맹의 성공에 일조했다고 할 수 있나?
그에 성필이 너무도 간단히 답했다.
“비울수록 울림이 큰 곡도 있는 거야.”
“…….”
정지음은 실이 끊어진 듯 팔을 뚝 떨어뜨렸다.
몇 주간 그의 머리에 박혀 있던 강박증이 일순에 없어진 기분이었다.
그는 전부 놓아버렸다.
“설하를 믿어도 될까요?”
“그래보자. 애들을 기획물이 아니라 아티스트로 생각한다면, 한 번 믿어봐.”
성필은 정지음에게 과한 책임감을 놓으라 말하고 있었다.
곡은 작곡가 혼자 완성하는 게 아니다.
가수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네.”
정지음은 촛불이 꺼지듯 조용하게 답했다.
* * *
백설하를 믿겠다고 했지만, 정지음은 녹음 스튜디오에서 백설하를 마주하자 고개도 들 수 없었다.
결국 ‘애플 크러쉬’는 곡적으로 완성되지 못한 채 녹음 현장까지 끌려왔다.
“설하야 미안…….”
이젠 가이드 보컬 녹음을 미룰 수 없다.
가이드 버전이 완성되어야 안무도 받고, 뮤직비디오 스토리보드도 짜고, 비주얼 요소를 결정하는 등 다음 단계로 이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완벽하진 않더라도, 레코딩은 스케줄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
“아녜요.”
백설하는 어제 ‘애플 크러쉬’의 최신 버전을 전달받았다.
그녀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제까지 받았던 곡들과 판이하게 달랐으니까. 정지음이 ‘백설하 X 돼 봐라’라면서 아예 손도 안 댄 미완성 버전을 주었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게 아니란 사실은 알았다.
“설하야 어때. 할 수 있겠어?”
옆에 있던 성필이 경쾌하게 물어왔다.
백설하가 그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래, 지음 오빠가 나 엿 먹으라고 이런 상태로 곡을 주셨을 리 없지.’
정지음이 ‘어떻게 해야 모르겠다’라고 말한 건 거짓 없는 사실일 터다.
백설하는 정지음을 믿는다.
함께 성공 신화를 써 내려간 작곡가에게 신뢰가 없을 리 없다.
게다가 성필의 중재로 한때의 오해도 푼 참이니, 정지음에게 저의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뭔가 뜻이 있을 거야.’
뭔가 뜻이…….
백설하는 백번을 봐도 그 뜻을 모르겠다. 어제부터 계속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다.
“저기…… 오빠. 이거 디렉션 먼저 주실래요?”
도저히 백설하 혼자 해석하긴 어려운 곡이었다. 그래서 부탁했더니, 정지음은 더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백설하가 당황하면서 성필을 보았다.
성필이 말했다.
“오늘의 보컬 디렉터는 설하입니다!”
“네?”
“네 해석 기대할게!”
“아, 아니, 제가, 아니…….”
지금까지 소녀연맹의 가이드 보컬은 대부분 백설하가 불러왔다.
그녀는 보컬 디렉터가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실력이 출중했었기에, 정말 보컬 디렉터를 두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 곡만큼은 간단한 디렉션이라도 받고 싶었는데…….
그때 백설하가 눈을 퍼뜩 떴다.
애처롭게 고개 숙인 정지음을 보니 깨달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모르시는 거구나.’
이제야 정지음이 왜 이토록 ‘애플 크러쉬’에 관해서 날카로웠는지 이해가 갔다.
그는 처음 겪는 과제를 마주하고 무력감을 느꼈던 것이다. 어떻게든 본인의 능력으로 해결해보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
백설하의 해석력에 운명을 걸기로 한 것이다.
백설하는 가만히 정지음을 보다가, 미소를 머금곤 자신 있게 말했다.
“맡겨두세요! 멋들어지게 부르고 올게요!”
백설하가 녹음 부스로 들어갔다.
그제야 정지음은 고개를 들고 레코딩 엔지니어의 옆에 앉았다. 성필은 정지음의 뒤에 앉아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미안, 설하야.’
성필은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정지음은 죄스러워서 백설하의 눈을 마주치기도 힘들었다.
꽤 많은 작곡가들이 이런 일을 겪는다고 한다.
본인 스스로도 부족함을 아는 곡을 들고 가수를 만나는 일 말이다. 당연하지만, 그럴 땐 작곡가들도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게 최고다’는 확신은 없더라도, 최소한 후회 없는 곡을 가지고 오고 싶었다.
[시작할게요.]
부스 안에 들어간 백설하가 말했다.
레코딩 엔지니어가 OK 사인을 준 후 ‘애플 크러쉬’를 재생했다.
레코딩은 오랜 시간 이어졌다.
원래 예약했던 3시간 30분을 넘어 추가로 또 한 타임을 잡았다.
[키 올려서 다시 불러볼게요.]
백설하는 계속 노래했다.
[방금은 저 혼자 너무 신나서 부른 거 같아서요. 이번에는 낮춰서 해볼게요. 제가 너무 지른다 싶으면 말씀해주세요.]
또 한 타임을 더 잡았다.
백설하는 10시간도 넘게 홀로 노래 불렀다. 누가 ‘더 불러’라고 한 것도 아닌데, 그녀는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고 거듭 노래했다.
정지음은 홀린 듯이 그것을 계속 바라보았다.
드디어 녹음이 끝날 기미가 보이자, 성필이 말했다.
“이제 알겠어? 곡은 작곡가가 미리 완성하는 게 아니란 거.”
가수와 함께 만드는 것이다.
백설하는 정지음이 디렉션을 주지 않았는데도 온갖 기교를 시험하면서 노래했다.
정지음이 할 수 있으리라고 예상조차 못 했던 애드리브까지 신들린 듯 터져 나왔다.
정지음은 감탄을 거듭했다.
‘이게 가수구나.’
가수란 단순히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아니다.
노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다.
백설하는 가수이며, 뮤지션이었다.
정지음은 자신의 손을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기적을 쓴다고 생각했던, 하늘로부터 얻은 재능을 지닌 손.
아니었다.
‘작곡가가 특별한 곡을 쓰는 게 아니야.’
가수가 곡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만약 백설하가 아닌 다른 사람이 ‘애플 크러쉬’를 불렀다면, 그저 그런 곡이 됐을 게 분명했다.
정지음은 ‘애플 크러쉬’에서 무엇이 부족했는지 깨달았다.
부족했던 건 단지 악기 하나, 백설하라는 악기가 없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토록 텅 비게 들렸던 것이다.
‘이게, 이게…….’
정지음은 코끝을 찡그렸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계속 ‘애플 크러쉬’에 태클만 걸었던 과거의 자신이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이게 설하가 계속 봐 왔던 거구나.’
이런 노래가 머릿속에 들어 있으니 얼마나 몸이 달아 있었을까.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 정지음이 얼마나 야속했을까.
“네, 진작 설하한테 불러보라고 할 걸 그랬어요…….”
정지음이 물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준 건 1인데.”
정지음이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설하는 100을 만드네요.”
* * *
녹음이 5시간 정도에 이르렀을 무렵.
이수연 작사가가 레코딩 작업에 도움을 주겠다며 스튜디오를 찾았다.
참고로, 풀 메이크업에 봄기운이 물씬 풍기는 차림새였다. 지금 입기엔 너무 춥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의 옷이었다.
“아, 작사가님 어서 오세요.”
“넵 박 이사님!”
이수연 작사가는 소중한 자신의 거래처와 정성 가득 담긴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곧바로 오늘 이곳에 온 목적, 정지음을 보았다.
정지음은 이수연이 왔는데도 그녀에게 등을 돌린 채였다. 시선은 녹음 부스 안의 백설하에게로만 향해 있었다.
“저, 지음 씨…….”
이수연은 정지음의 곁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정지음은 몇 초간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대강 답했다.
“안녕하세요.”
“…….”
이수연은 그런 정지음을 보자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성필과 손혜빈에게 욕을 쏟아냈다.
‘이게 어딜 봐서 나한테 관심 있는 남자란 거야?! 사, 사람이 왔는데 보지도 않잖아!’
이수연은 너무나 충격받아서 손마저 덜덜 떨었다. 배신감에 절로 욕지거리가 나올 것 같았지만,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는 없었다.
이수연은 정지음의 옆에 앉아 레코딩 상황을 관찰했다.
작사가가 레코딩 현장에 동행하는 일은 드물지 않다. 작사가는 발음과 언어에 신경 쓰는 만큼, 현장에서 즉석으로 가수에게 어울리는 가사로 바꿔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작사가가 듣기에 ‘애플 크러쉬’는.
‘와, 곡 좋다. 팝송 같아.’
부스 안의 백설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혼신을 다해 노래 부르는 중이었다.
단정하게 잘 차려입고 스튜디오로 온 이수연이 미안할 지경이었다.
‘곧 여름이구나.’
백설하의 목소리엔 확실히 여름이 있었다.
곡 자체도 가득 차 있는 듯해서 듣기에 지루한 느낌이 전혀 없었다.
이수연 작사가는 백설하의 노래를 들으며 어느 사실을 잊어버렸다. ‘애플 크러쉬’가 같은 구조만 연속으로 세 번 반복되는, AAA구조의 곡이란 사실이다.
백설하가 부르는 ‘애플 크러쉬’는 변화무쌍, 천변만화를 목소리로 그려내는 듯했다.
변화란 개념을 붙잡아 허공에 박제한, 목소리로 그려낸 총천연색 풍경화였다.
‘이건 진짜 성공하겠다.’
또 소녀연맹이 성공 신화를 써 내려가는 걸까.
이수연은 그 성공에 자신이 한 손 더했단 게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그녀의 시야로 정지음의 표정이 들어왔다. 사랑에 빠진 청년처럼 멍하니 녹음 부스를 보는 정지음이…….
‘……어?!’
이수연은 정지음과 백설하를 번갈아 보았다.
‘설마, 어, 진짜? 거짓말이지?!’
성필은 이 기류를 감지하고 있을까?
이수연이 뻣뻣한 고개를 돌려 성필을 보았다.
그러자, 정지음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열병에 시달리는 듯한 표정의 성필이 있었다.
‘……결국 얼굴이야?’
박탈감이 느껴진다.
자신도 얼굴만으로 남자한테 저런 표정을 짓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세상 사는 게 행복할까…….
“와 씨 말도 안 돼!”
그때 레코딩 엔지니어가 크게 소리쳤다. 그는 소름이 돋는단 듯 어깨까지 쓸었다.
정지음과 성필도 퍼뜩 황홀경에서 벗어났다.
“왜 그러세요?”
“이거 보세요!”
백설하가 노래를 부르면 레코딩 프로그램에는 파장(波長)이 보인다.
진동과 음역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런데.
“완전 똑같아요!”
“어?”
백설하가 바로 전에 불렀던 것과, 방금 불렀던 파트의 파장이 완벽하게 일치했다.
기계가 아니고서야 이럴 수는 없다.
“이, 이게 가능해요?”
“저도 얘기만 들었지 실제로는 못 봤어요. 와, 이게 되는구나.”
그때 백설하가 노래 부르길 마치고, 왠지 모르게 흥분한 채 말했다.
[저, 저 이제 알겠어요! 방금 했던 대로 다시 불러볼게요! 아, 이렇게 하는구나. 어, 이게 제일 좋다. 다, 다시 할게요!]
백설하는 마치 바깥의 상황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잔뜩 흥분했다. 그것을 보자 레코딩 엔지니어가 다시 감탄했다.
“설하 씨 본인도 느끼셨나 봐요.”
놀랍게도, 이후의 녹음도 파장이 완벽히 일치했다.
그렇게 ‘애플 크러쉬’의 가이드 보컬 녹음은 작은 전설을 남기면서 무사히 종료됐다.
* * *
성필과 리카, 일본으로 오다!
“비밀 데이트도 재밌네요!”
“데이트 아니야.”
“아앙 말 좀 맞춰주세요!”
성필은 싱글벙글 종종걸음까지 뛰는 리카를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신나서 죽으려고 하네.’
요즘 소녀연맹의 독재자 백설하의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조아라가 ‘인권유린’이라고 장난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어쩌면 장난이 아닐지도 몰랐다.
‘멤버들이 이렇게나 기량 향상에만 시간을 할애했던 적이 거의 없으니까.’
소녀연맹은 연습생 시절 저리 가라 할 만큼 가혹한 트레이닝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
아무리 일본에 업무적으로 왔다 해도, 리카가 이렇게나 신난 게 이해가 갔다.
두 사람은 웨벡스 사무소로 들어섰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에는 이미 히무라가 있었다.
“바쁘실 텐데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오히려 더 자주 불러주셨으면 해요!”
“하하하, 그렇습니까?”
“네(하이)! 원하신다면 며칠 더 있을 수도 있어요!”
“절대 안 돼.”
“그런(손나)!”
히무라는 여전히 사이좋은 둘을 보며 인자한 미소를 띠었다. 그는 준비해둔 대본을 둘에게 내밀었다.
“얼마 안 걸릴 겁니다.”
성필과 리카가 웨벡스로 온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웨벡스 소속 걸그룹인 ‘에스타스’의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서였다.
“두 분은 에스타스의 퍼포먼스 시연에 심사위원으로 등장하셔서 간단한 코멘트만 해주시면 됩니다.”
히무라가 야심차게 준비한 에스타스 컴백 프로젝트. 그 시작은 텔레비전 시리즈 다큐멘터리였다.
‘야간에 30분 분량으로 주 1회 방영이랬지. 일본에서 보통 이런 칸무리 프로그램은 심야 방영이라던데, 웨벡스가 힘 엄청 썼나 보네.’
한국에도 아이돌 그룹 하나만을 다루는 시리즈 예능들이 있다.
하지만 이번 에스타스의 다큐멘터리는 그런 것들과 결이 다르다. 에스타스의 성장기를 그리게 될 테니 말이다.
말하자면 에스타스란 그룹 하나만 등장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었다.
“박 이사님 이거 보세요!”
리카가 잔뜩 들떠선 대본의 한 부분을 보여주었다. 그곳에는 성필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가로 엔터의 대표 프로듀서, 소녀연맹이란 전설을 맨바닥부터 일궈낸 남자, 그의 이름은 바로 파쿠 센피루! 그가 에스타스를 위해 한국에서 직접 일본으로 날아왔다!]
“가로 엔터의 대표 프로듀서, 소녀연맹이란 전설을 맨바닥부터 일궈낸 남자, 래요!”
“이야, 부끄럽네.”
“저는 작년 일본을 강타한 케이팝 그룹 소녀연맹의 일본인 멤버 리카, 래요! 뭐예요 이게?!”
리카가 히무라에게 소리쳤다.
“제 설명은 왜 ‘일본인 멤버’가 전부인가요! 뭔가 더 그런 게 있지 않나요!”
“예를 들면요?”
“‘전설적인 소녀연맹의 리드 보컬이자 리드 댄서이자 리드 비주얼 이시카와 리카’ 같은 거요!”
“전설적인 리드 포지션 멤버라…….”
왠지 모르게 약해 보이는 타이틀이다.
전설적인 리드 포지션보다는 그냥 메인 포지션인 게 더 임팩트 있을 것 같고 말이다.
“음?”
성필이 이상하단 듯 대본을 파르륵 넘겼다.
“저희 피드백은 대본에 없네요? 정말 저희 감상 그대로 말하면 되나요?”
“예. 그걸 위한 리얼 다큐멘터리니까요. 정말 있는 그대로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어…….”
“걱정하지 마십시오. 말이 송곳이 되어도 좋습니다. 일본의 아이돌 팬들은 성장이란 서사를 매우 좋아합니다. 바닥이 깊으면 깊을수록, 올라갔을 때 더 효과가 좋지 않겠습니까.”
아이돌의 성장 서사는 한국에서도 잘 먹혀드는 패턴이다.
아니, 세계에 보편적으로 통하는 서사다.
국내는 물론 해외 인민이들도 ‘중소기업에서 탄생한 기적’이라는 소녀연맹의 서사를 좋아하니 말이다.
‘소녀연맹 비긴즈’에서도 증명된 바였다.
“그럼 정말 있는 그대로…….”
“부탁드립니다.”
“기준은 케이팝 그룹으로 해도 괜찮나요?”
“오히려 그쪽을 바라고 있습니다.”
성필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그에 히무라 또한 진지하게 답했다.
“박 이사님, 이 일로 저는 에스타스 애들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건 단순히 일본 팬들에게 보여주는 쇼맨십이 아닙니다.”
에스타스가 비약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
그곳에는 시련이 필요하다.
“부탁드립니다.”
* * *
에스타스 컴백 다큐멘터리 촬영 현장.
연습실에는 에스타스의 리더인 유미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고개를 숙인 채였다. 그 뒤로 멤버들이 아기 새처럼 바들바들 떨면서 울먹이고 있었다.
“유미 씨.”
험담에 험담을 이어가던 성필이 드디어 평가의 마침표를 찍으려 했다.
“아니, 에스타스 여러분.”
성필이 동정 한 점 없이 말했다.
“정말 아이돌이 되고 싶으신 거 맞습니까?”
기어코 유미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카메라 앵글 바깥에서 지켜보던 히무라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성필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그를 직원들이 붙잡아 겨우 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