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08화 (408/760)

408화

‘애플 크러쉬’의 보컬 라인이 완성됐다.

정지음은 피곤한 눈을 문지른 후 파일을 저장했다. 파일 이름을 타이핑하는 그의 손가락이 덜덜 떨려왔다.

[애플 크러쉬 ver.26]

버전 26.

그 이름대로, 애플 크러쉬는 무려 26차례에 걸친 수정을 가한 곡이었다.

버전 1과 비교하면 다른 곡이 아닌가 싶을 만큼 변화가 격렬했다.

“오빠.”

정지음이 옆을 보니, 마찬가지로 피로한 기색의 백설하가 손바닥을 내밀고 있었다.

정지음이 그녀와 시원하게 손뼉을 부딪쳤다.

“고생 많았어 설하야.”

“오빠두요.”

아직 애플 크러쉬는 온전히 완성된 곡이 아니었다.

그들이 수정을 반복했던 건 오로지 보컬 라인만을 위해서였다. 노랫말이 들어갈 멜로디 말이다.

‘애플 크러쉬’는 소녀연맹의 보컬적 기교를 극한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즉, 보컬이 이 곡의 알파이자 오메가였다.

보컬 라인의 완성이란 곧 곡 작업이 절반 이상 끝났음을 의미했다.

“이제 가사 받을 수 있겠다.”

“그러게요. 기한 못 맞추는 줄 알고 매일 떨었어요.”

백설하가 폰으로 달력을 확인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근래 프로듀서의 고통을 절실히 체험했다.

프로듀싱이란 한 번에 여러 분야가 동시에 진행된다. 그 모든 것을 일일이 확인하고 감독하며 컨펌까지 하려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다.

‘그나마 나는 박 이사님이 도와주셔서 살 만한 거지. 박 이사님은 지금까지 이걸 혼자 전부 하셨단 거잖아.’

옛날에 성필이 프로듀서란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해준 적이 있었다. 멤버들이 ‘프로듀서가 뭐 하는 사람이야?’란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박 이사님이 실망한 티를 내셨지.’

그럴 만하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건만, 멤버들은 프로듀서가 정확히 뭔지조차 몰랐으니.

조아라는 ‘연습실 훔쳐보는 사람’이라고 농담을 던지기까지 했었다. 아무리 농담이더라도 그때 성필의 기분은 좋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가사 받고 가이드 보컬 녹음까지 끝내면 안무 붙이고 본격적인 연습 시작이지?”

“네.”

“레코딩은?”

“멤버들 실력이 갖춰졌을 때요.”

“그래. 설하가 귀신처럼 가르치고 있으니까 곧 할 수 있겠지.”

“귀신처럼이라뇨…….”

둘은 시답잖은 대화로 완성의 기쁨을 나누었다. 그리고 백설하는 다른 일을 보기 위해 작업실을 나섰다.

정지음은 평소처럼 홀로 남겨졌다.

그는 애플 크러쉬 버전 26을 재생했다.

‘보컬 라인은 완성.’

이제 남은 건 곡 자체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정지음이 생각하기에 그건 보컬 라인을 만드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될 터였다.

‘설하는 이상이 높아.’

정지음은 멤버들이 ‘애플 크러쉬’를 온전히 소화할 수 있으리라곤 여기지 않았다.

분명 레코딩 과정에 들어가면 문제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올 것이다. 백설하가 보컬적인 부분을 수정하는 건 불가피하다.

백설하의 포부가 보컬로 승부를 보는 것이라면, 정지음은 역으로 접근한다.

‘곡에서 승부를 봐야 해.’

‘애플 크러쉬’의 성패는 작곡에 달려 있다.

정지음은 방금 일을 끝냈음에도 쉬지 않고 작업에 매달렸다.

* * *

어느 순간 곡은 당연하다는 듯이 ‘애플 크러쉬’로 불렸다.

장하양은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어쨌거나, 소녀연맹 ‘애플 크러쉬’ 가사 키워드 회의가 시작됐다.

“사랑을 표현하는 여러 방법이 있지.”

성필이 회의의 서두를 열었다.

“오늘 너희들한테 요구할 건 가사 전체를 생각하는 게 아니야. 너희가 가사를 완성된 형태로 쓸 수 있으면 가장 좋겠지만, 작사가님께 맡기는 편이 완성도가 더 높을 테니까.”

그엔 반대 의견이 없었다.

소녀연맹의 다음 타이틀이 될지도 모르는 곡의 가사다. 누구든 선뜻 나서서 ‘제가 적을래요!’라고 하지 못했다.

“내가 바라는 건, 사랑을 표현하는 키워드야. 너희 나이대에 맞는 사랑을 표현할 가슴 설레는 단어와 문장이 나올 거라고 믿어.”

성필은 멤버들의 면면을 차례로 보았다.

옛날에 ‘롱 포’ 가사 아이디어를 얻을 때는 이 자리에 손혜빈이 있었다. 멤버들이 쉽게 입을 열지 못했었기 때문이었다.

‘부끄러워서였겠지.’

남자인 성필보다는 여자인 손혜빈에게 가감 없이 아이디어를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그땐 손혜빈이 아이디어 수합을 맡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애들도 나를 더 친근하게 여겨주고 있으니까, 이번엔 내가 맡아야지.’

소녀연맹의 메인 프로듀서인 성필 아닌가.

가사는 노래의 영혼이다. 메인 프로듀서로서, 멤버들의 영혼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싶었다.

그게 추후 프로듀싱 과정에 큰 도움이 되리란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자, 얘들아.”

성필이 본격적인 회의의 시작을 알리며 화두를 던졌다.

“사랑이란?”

굉장히 포괄적인 질문이었다.

사랑이란…….

어른에게 물어도 쉽게 답이 나오지 못할 질문. 그렇기에 좋았다. 상상력을 제한하지 않으니까.

그때 장하양이 손을 들었다.

“오, 작사 천재 하양이.”

“아하하, 작사는 설하 언니가 전문적으로 배우시잖아요. 천재는 과해요.”

“설하는 아직 직접 작사한 경험은 없잖아. 크레딧에 이름 올린 건 하양이가 유일해.”

백설하는 장하양과 자신을 비교하는 성필의 말을 그냥저냥 흘려들었다.

성필은 백설하가 작사에 도전하도록 경쟁심을 부추기는 것이다.

‘작사는 준비가 끝났을 때 하고 싶어.’

백설하는 자신이 작사에 큰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장하양처럼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대담성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작사를 본격적으로 하는 건 이수연 작사가에게 더 배우고 나서일 것이다.

‘이사님의 도발엔 안 넘어…….’

“그렇게 생각하니까 하양이 되게 장하네. 상이라도 줄까?”

‘……안 넘어간다구.’

백설하가 시무룩 입술을 삐죽였다.

장하양은 그런 백설하를 귀엽단 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까 하려던 말을 이었다.

“먼저, 사랑하는 사람에게 품는 마음을 주제로 얘기해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선배님들 곡 가사를 보니까, 주로 곡 화자의 마음만 고백하는 게 많더라구요.”

“괜찮네요! ‘사랑이란?’ 같이 성의 없는 질문보다 훨씬 나아요!”

“리카, 그거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야?”

“성의 없는 프로듀서 박 이사님의 질문보다 백배 나아요!”

“그래, 리카야. 네가 제일 먼저 말해봐라.”

리카는 자신이 지목당하자 일순 당황했지만, 금세 미소를 되찾았다.

“‘롱 포’ 때랑은 달라야 하죠?”

리카가 악동처럼 웃었다. 그러자 성필의 머릿속에서 당시 리카가 냈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분명 그때 리카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배하고 싶네요…….’

라고 했었다.

성필은 리카를 향해 마주 웃어주었다.

‘참, 미래 리카의 남편이 누구일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선택한 연인이니 잘 생활하시길 바랍니다.’

성필은 잠시 리카의 미래 연인에게 응원을 보냈다.

과연, 현재의 리카는 사랑에 대한 관점이 어떻게 변했을까. 곧 연애 금지가 풀리는 청춘은 사랑을 무엇이라고 생각할지, 성필도 흥미가 갔다.

“안달복달 못하는 거 보고 싶어요!”

“아, 그렇구나.”

2년 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성필의 앞에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됐단 것일까.

“그으…… 그것도 좋긴 한데. 근데 설하야.”

“네?”

“‘애플 크러쉬’의 가사가 직접적인 유혹이어야 할까?”

“이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아니에요. 그래도 리카 얘긴 끝까지 들어보고 싶어요.”

“그러게. 의도치 않게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수도…….”

“잔뜩 기대해서 다가오는 상대한테 차갑게 ‘아니’라고 퉁명스레 밀어내서 실망하는 거 보고 싶어요! 혼나서 꼬리 내린 강아지처럼요! 그리고 저는 바로 다독여줘서 상대가 기뻐하는 거 보고 싶어요! 혼났다가 쓰다듬어주면 꼬리 흔드는 강아지처럼요!”

“그건 나중에 리카가 솔로 데뷔했을 때 소재로 쓰자.”

“에, 벌써 거기까지 기획하고 있는 건가요! 저희가 번 돈이 허투루 쓰이는 거 같지 않아서 안심이네요!”

“뭔데. 왜 리카만 솔로 데뷔시켜줘요. 아저씨 리카 편애해요?”

멤버들의 짓궂은 핀잔에도 성필은 허허 웃기만 했다.

얼굴도 모르는 미래 리카의 연인이 불쌍하기만 하다.

“음, 근데 나쁜 감성은 아니야.”

“에?”

성필이 진지하게 답하자 오히려 리카가 놀라버렸다. 성필은 수첩에 리카가 말한 것을 그대로 메모했다.

“리카가 말하는 건 밀당이잖아. 뭐, ‘더 더 다가와 봐 옳지 옳지 잘한다 이제 가’라던가.”

성필이 ‘애플 크러쉬’의 멜로디에 맞춰서 즉석 가사를 노래하자 멤버들이 ‘오오’하면서 감탄했다.

“팀장님 작사가로 데뷔하시게요? 입에 좀 달라붙는데요?”

“옳지 옳지 잘한다.”

성필이 능글맞게 웃으면서 그리 말하자 신아름이 어깨를 쓸었다.

“와아.”

“어때, 느낌 좀 있어?”

“소름 돋는데요?”

“…….”

“젊은 애한테 작업 거는 아저씨 느낌?”

박성필, 작사가 데뷔 포기!

“리카, 더 말해봐.”

“계, 계속 쓰실 건가요……?”

“응? 써야지. 아이디어 회의잖아.”

리카는 드물게도 창피해하고 있었다.

아니, 왠지 모르게 만족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

“에에헤, 아타시(저)의 비밀스러운 취향이 밝혀지는 거 같아서 부끄럽네요…….”

“자기표현이 곧 아티스트십 아니겠냐. 이대로 네 취향을 전국 방방곡곡 알려버리자.”

“좋아요! 맡겨두세요!”

30초 후.

“리카 너 나 가지고 장난치냐?”

“장난 아닌데요!”

“뭔 너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라도 보고 왔어? 자꾸 이러면 나 그냥 나간다?!”

“장난 아니니까 그 수첩에 쓰세요!”

“그거 쓰기만 해봐요.”

신아름은 공포에 질려 리카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리카의 눈을 손으로 가려 성필과 이어지는 시야를 차단했다. 순수한 성필을 리카로부터 보호하려는 것 같았다.

“내가 선물해준 수첩에 그딴 천박한 말 절대 못 써요.”

“천박?! 아름이 히도이(너무해)!”

“리카가 무릎 꿇고 빌어도 안 써.”

“에엑 그 정도인가요?! 꽤 보편적인 사랑 아닌가요!”

결국 성필의 수첩에 남은 건 ‘밀당’이라는 단어뿐이었다.

밀당은 가사에 꽤 자주 쓰이니까 말이다.

“저, 저기…….”

백설하가 소심하게 손을 들었다.

그녀는 리카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막고 싶지 않았지만, 이 부분은 꼭 짚고 넘어야겠다 싶었다.

“내가 표현하고픈 사랑은, 그러니까, 밀당이라거나 남녀 간 연애의 기술보다느은…….”

백설하는 알맞은 말을 찾았다.

“그, 그러니까 디즈니 애니메이션처럼 그런 느낌……. 막 세상이 반짝거리고, 여름 바람이 불어오는 파라솔 아래에 같이 앉아서 손을 잡거나, 그런 느낌으로…….”

“백설하, 포브스 선정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25살.”

“어?!”

“다들 동의?”

다들 조아라의 선언에 동의했다.

“근데요.”

신아름이 무심히 말했다.

“쫌 너무 순애보적인 스타일은 싫은데요.”

“아, 그, 그래……?”

“쌤 의견이 싫단 게 아니라요. 걸그룹 노래 중에 막 ‘나 청순가련해요’ 이런 쪽. 솔직히 잘 표현할 자신도 없고요.”

확실히, 백설하도 하늘하늘한 치마를 입고 수줍게 사랑을 고백하는 소녀연맹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몸에 딱 달라붙는 제복을 입고 퍼포먼스로 무대를 압도했던 소녀연맹이 그런 모습을 보이면, 팬들이 좋게 받아들여 줄지도 미지수다.

소녀연맹 앨범의 수록곡에는 그와 비슷한 느낌이 좀 있긴 하지만…….

‘응?’

백설하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왜 이걸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지.

‘청순이 아니라 섹슈얼리티를 강조해야 하잖아.’

그래도 그런 옷, 언제 한번 입어보고 싶긴 하다…….

“음?”

옆에서 자꾸 사각사각 소리가 들렸다.

백설하가 보니, 장하양이 수첩에 또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신아름이 질린단 듯 말했다.

“언니 또 그림 그려요?”

신아름의 핀잔 섞인 질문에 장하양이 홱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다섯 쌍의 눈빛.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한 장하양이 슬금슬금 수첩을 숨기려고 했다.

“한 번 봐요.”

“아!”

신아름은 장하양이 어쩔 새도 없이 수첩을 가져가 읽었다.

또 사과가 그려져 있었다.

이번에는 손이 사과를 움켜쥐고 있단 게 전과 다른 점이었다. 전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사과 그림만 가득했었으니까.

“또 사과예요? 사과에 얼마나 꽂혔길래.”

“아, 아니…….”

성필과 멤버들도 장하양이 그린 그림을 보았다.

누군가 사과를 손아귀에 쥐고 있었다.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저…… 저도 정말 이상한데요. 이 ‘애플 크러쉬’란 곡 듣고 설하 언니 프로듀싱 방향 들으면, 왠지 모르게 계속 사과가 생각나요.”

“이 사과가 ‘너’의 모티프라고 했나? 사과를 ‘너’의 상징물로 정하자고?”

“네에…….”

성필은 자신이 입은 옷을 보았다.

이번에는 붉은 패딩이 아니라 파란색 코트였다.

“굳이 사과가 아니어도 괜찮아요. 블루베리라거나, 과일이면 뭐든…….”

왠지 모르게 회의실이 싸늘했다.

성필은 히터 온도를 높이고 코트를 더 꽉 여몄다.

“아하하, 이상하네요. 가사가 나오기도 전에 비주얼라이즈가 먼저 생각나서…….”

“아,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뮤비 스토리보드 먼저 짜고 곡을 만드는 경우도 많아. 그럼, 하양이는 뮤비에 넣고 싶은 장면이 있는 거야?”

“네, 그…….”

장하양이 창피하단 듯 얼굴을 붉혔다.

그에 성필이 진지하게 말했다.

“하양아, 네 생각을 표현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마.”

“박 이사님 아타시(제)가 의견 냈을 때는 부끄러움을 알라고 하셨잖아요!”

“그야 사랑에 대해 말하는 건 부끄러울 수도 있어.”

“무시당했네.”

“하지만 하양이의 아이디어는 굉장히 귀중해.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시기의 너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인 거야. 그러니까 들려줘.”

지금의 장하양이 표현하는 사랑이란.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사랑이란.

“……네.”

장하양도 표정에서 부끄러움을 지웠다.

“일단, 사랑 노래니까 사과나 과일들이 ‘너’의 상징인 거예요. 그 과일들을…….”

* * *

“박 이사님, 회의 끝나셨습니까?”

한구인은 복도에 성필이 보이자마자 기대감을 한껏 안고 다가갔다.

소녀연맹 멤버들의 첫 번째 가사 키워드 회의가 끝난 참이다.

한구인도 소녀연맹이 표현하고픈 것을 알고 싶었기에, 성필이 나오는 것을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아, 네. 방금요.”

성필은 피곤한 기색이었다.

‘3시간이나 멤버분들과 대화를 나누셨으니 힘드시겠지.’

한구인이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그 아이디어를 정리해서 바로 작사가분들에게 의뢰하는 겁니까?”

“아니요. A&R팀에서 또 정돈해야죠. 애들이랑 회의도 몇 번 더 해봐야 하고요.”

“그렇군요.”

한구인의 시선은 성필이 손에 든 수첩으로 향해 있었다.

“보실래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네, 뭐…… 괜찮겠죠.”

한구인은 기쁘게 성필의 수첩을 받아 읽었다. 잠시 후, 그가 손을 떨면서 수첩을 반납했다.

“저, 저는 잠시 쉬어야겠습니다…….”

성필은 저 멀리 떠나가는 한구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뒷모습이 처량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아니면 성필의 마음이 처량하여 처량하게 보이는 것일까.

성필은 다시 수첩에 쓰인 것을 읽어보았다.

[즙을 짜…….]

수첩을 덮었다.

전생을 합쳐 아이돌 산업에 몸을 담은 지 어언 20년 이상.

성필은 이 현상을 철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렇군…… 이건 소녀연맹의 정체성을 본격적으로 선언하는 계기야. 더는 소녀에만 얽매이지 않겠다는, 더는 헤매지 않겠다는 성숙한 여성으로서의 자기 선언이다. 또한, 일반 관념적인 성역할을 뒤집어 여성 또한 과감하며 이기적이고 파괴적인 소유욕의 주체가 될 수 있단 걸 표현했군. 그래, 유혹하기보다 쟁취하는 거다. 이건 확실히 걸그룹으로선 대담한 도전이네. 이렇게까지 강렬하게 사랑을 갈구하다니…….’

그래, 그렇구나.

성장했구나, 얘들아.

‘이게 내가 키운, 내가 프로듀싱한 아이돌이구나…….’

성필은 퀭한 눈을 한 채 비틀비틀 앞으로 나아갔다.

* * *

이수연 작사가는 동료들과 함께 쓰는 작업실로 출근했다.

아침 일찍 왔기 때문인지 동료들은 없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본인의 자리에 앉아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커피를 끓여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가로 엔터로부터 온 의뢰 메일을 열었다.

‘가로 엔터…….’

가로 엔터의 뮤직 프로듀서 정지음.

가로 엔터란 글자만 보아도 정지음이 떠오른다.

‘안 돼!’

이수연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뤄지지 않은 채 방치된 짝사랑만큼 사람의 마음을 달아오르게 하는 것도 없다던가.

현재 이수연의 마음이 그러했다.

원한다면 만날 수 있을 텐데.

그럴 수 있을 텐데.

거절당하는 게 너무 무서워…….

‘그만! 진짜 그만해! 오늘은 일하려고 왔어!’

가사를 쓰자.

일을 하자.

내 인생의 전부를 하자!

이수연은 메일에 적힌 가사 키워드와 곡의 대략적인 컨셉을 읽었다.

‘와, 여름에다가 사랑? 기대되네. 소녀연맹이 이렇게 대중적인 주제로 다가갈 줄은 몰랐는데.’

이수연도 아이돌을 좋아해서 이쪽에서 일하고 있다. 당연히 소녀연맹에게도 관심이 있다.

‘진짜 기대된다. 소녀연맹의 사랑은…….’

키워드를 읽어가던 이수연이 눈을 비볐다.

그리고 다시 보아도, 메일에 적힌 키워드들은 바뀌지 않았다.

이수연이 하하 웃었다.

‘롱 포보다 더 강하네…….’

‘롱 포’의 가사 아이디어를 보곤 숙녀연맹이라고 칭했었는데.

이건 대체 뭐라고 할까?

멍하니 키워드를 반복해서 읽던 이수연. 그녀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역정을 냈다.

“그렇게 남자를 가지고 놀고 싶은 거야?!”

작사가 이수연, 자신이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보곤 혼란에 빠지다.

* * *

날씨가 좋았다.

성필은 오랜만에 회사 건물 밖의 테라스석에 앉았다. 의자가 차갑다고 느꼈던 것도 잠시, 알맞게 내리쬐는 햇볕이 성필을 노곤하게 만들었다.

그때 바람이 성필의 머리칼을 쓸었다.

‘오, 봄바람이다.’

바람이 불어오기에 추울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따뜻했다.

그렇다, 봄이다.

이 봄이라는 야릇한 계절에 가장 빨리 반응하는 건 첫째로 사랑하는 젊은이들의 마음이요.

둘째가 음원 차트였다.

성필은 생각난 김에 차트를 훑었다.

‘의외네.’

음원 차트에는 대놓고 봄을 노리고 나온 곡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나 봄이라서일까, 사랑이 주제인 곡들은 차트 곳곳에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예 제목 자체에 사랑이란 단어가 포함된 곡도 많이 보였다.

생뚱맞은 곡도 있었다.

‘켈리 클락슨의 Stronger.’

백설하가 출연한 ‘더 언노운 싱어’의 더 언노운 결정전이 방영된 후, ‘Stronger’는 단숨에 음원 차트의 상위권으로 역주행했다.

그만큼 백설하의 무대는 임팩트가 컸으며, 세간의 반응도 뜨거웠다.

‘설하 정체가 밝혀졌을 때가 기대되네.’

TOP100 차트를 쭉 훑던 성필의 눈에 ‘케이어스’란 이름이 들어왔다.

‘아직도 데뷔곡 카오스가 30위권에 있잖아.’

‘가이아’는 50위권.

가장 최근에 나와 현세대 걸그룹으로선 신화적인 판매량을 달성했었던 앨범의 타이틀곡, ‘타임’은 50위권 끝에 간당간당 걸려 있었다.

한 그룹의 타이틀곡들이 시간이 오래 지나서도 전부 차트에 걸려 있다니, 대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에 비해 소녀연맹의 곡들은 전부 차트 아웃되어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소녀연맹이 한국에 앨범을 안 낸 지가 1년이 훌쩍 넘었으니까.

컴백하면 이전 앨범의 곡들도 반사효과를 받아 차트 등반을 하곤 한다.

케이어스도 몇 개월 전 발표했던 ‘타임’의 영향을 받아 여전히 차트에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누가 뭐래도, 현세대 최고의 걸그룹이 될 게 명확한 이들이니까.

‘빠르면 5월, 늦어도 6, 7월엔 우리도 컴백해야지.’

길고 긴 공백기를 깨고 소녀연맹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성필은 부디 좋은 결과가 나오길 바랐다. 아니, 바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혼신을 다하여 일에 매달리고 있다.

이전과 다른 점은, 그가 메인 프로듀서로서 전제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않고 있단 것이다.

‘내가 가장 앞에서 이끌지 않고, 가로 엔터의 각 파트가 발맞춰 나아가는 중이야.’

성필은 지도력을 보이기보다 프로듀싱을 보조하는 역할에서 그치고 있다.

백설하의 자율성을 살리는 의미인 동시에, 가로 엔터의 각 파트가 성장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물론 성필이 이전 앨범처럼 동분서주하며 온갖 부문에 관여하면 일이 훨씬 빠를 것이다. 통일성 있게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고.

하지만 성필은 그러지 않았다.

예전부터 꼭 이러리라고 결심해왔다.

‘윤상열처럼 되진 않을 거야.’

윤상열은 능력 있는 프로듀서다.

전생에서 그것을 뼈저리게 깨달아 왔다.

그는 혼자 있는 것만으로도 팀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원맨팀으로 석세스 엔터의 모든 프로듀싱 부문을 통제했었다.

그렇기에, 회사는 윤상열의 수족 이상의 일을 하지 못했다.

‘석세스 엔터는 KS 엔터보다 몸집이 커졌었지. 하지만 결국엔 KS 엔터와 같은 문화적 성과를 이룰 수 없었어. 덩치만 클 뿐, 리더로서 업계에 지도력이나 영향력을 행사하지도 못했고.’

전생의 석세스 엔터는 누더기를 덧대 크기만 부풀린 것에 불과했었다.

김태훈의 공격적인 사업 확장.

윤상열이란 개인의 힘에 기댄 아티스트들의 성장.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가로 엔터가 KS 엔터 같은 창조 능력을 배양하기 위해선, 한 명이 이끄는 시스템이 굳어지면 안 돼.’

성필은 프로듀서로서 감독 역할을 끝내기로 했다. 이젠 서포터가 되어, 가로 엔터 직원들의 역량이 극대화되도록 도와줄 생각이었다.

‘아직까지는 잘되고 있어.’

백설하를 소녀연맹의 첫 번째 프로듀서로 임명하고 진행되는 컴백 준비.

아직까지는 별다른 마찰이 보이지 않는다.

프로듀서에겐 여러 업무가 있다.

첫째는 예산 관리.

‘이건 내가 도와주는 중이고.’

두 번째는 인력 관리.

‘적재적소에 잘 분배돼 있지.’

세 번째는 시간 관리.

‘아직 일그러진 부분은 없어. 스케줄은 예상대로 진행되는 중이야.’

네 번째, 프로덕션 관리.

음악의 제작 과정 전체를 통솔하는 것.

거창하지만, 성필이 프로덕션 관리의 핵심 요소로 꼽는 것은 단순했다.

자존심 강한 예술가들 사이를 잘 조율하며 프로덕션이 원활하게 흐르도록 하는 것. 그게 전부다.

‘이것도 설하라면 걱정 없지.’

그 부드러운 성격의 백설하가 누구를 상처 입힐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게다가 업무에 관련된 한 할 말은 하는 아이이니, 백설하 본인의 멘탈도 크게 걱정하진 않는다.

‘다 잘되고 있…….’

“여기 계셨네요.”

기분 좋게 봄바람을 맞던 중, 뒤에서 백설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필이 돌아보기도 전에 백설하가 성필의 맞은편에 앉았다.

“나 찾았어?”

“네. 여기 계신다고 해서 왔어요.”

성필은 시간을 확인했다.

이 시간이면 A&R팀과 곡에 관련한 회의를 하고 있어야 할 텐데.

‘아, 잘 풀려서 빨리 끝났구나.’

곡 작업이란 참 묘한 것이다.

안 풀릴 때는 몇 달을 끌기도 하고, 한 번 순풍을 타면 수십 분만에 끝나기도 한다.

“이사님. 저…….”

백설하는 곤란한 듯했다.

이 이야기를 해도 될지 안 될지 모르겠단 듯, 그녀의 입술은 목소리를 흘리길 주저하고 있었다.

“개인적인 일이야? 뭐, 날씨가 좋으니까 드라이브하고 싶다거나. 한 바퀴 돌고 올래?”

성필의 장난에도 백설하는 묵묵부답이었다.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성필은 뻘쭘하여 미소만 지었다.

“무슨 일이야?”

성필이 묻자, 백설하는 결심한 듯 드디어 입을 열었다.

“지음 오빠가…….”

이야기는 짧았다.

다 들은 성필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단 것처럼, 백설하가 들려준 이야기를 본인의 입으로 되물었다.

“지음이가, 네 곡에 일부러 신경을 안 써준다고?”

“네. 지음 오빠는…….”

백설하가 테이블에 올려둔 자신의 손을 꼬옥 쥐었다.

“지음 오빠는 ‘우파루파’를 저희 타이틀곡으로 밀고 계시잖아요.”

“그래서 일부러 ‘애플 크러쉬’에는 신경을 덜 쓴다고? 지음이가 태업한다는 뜻이야?”

본인의 욕망을 이루려고?

“네.”

백설하가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플 크러쉬’요. 가이드 녹음이 코앞인데, 아직 전혀 완성이 안 됐어요. 그런데도 오빠는, 지음 오빠는…….”

계속 ‘우파루파’만 손보고 있다.

“너무하잖아요 이건……. 곡 선정 투표가 곧인데 아직도 이러면 그냥 ‘애플 크러쉬’는 버리란 뜻이잖아요…….”

“지음이한테도 말해봤어?”

“…….”

“해봤구나.”

그리고 만족스러운 답을 못 받은 모양이다.

성필이 일어났다.

“내가 지음이한테 말해볼게.”

성필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 정지음의 작업실로 향했다.

프로듀서의 업무 중 하나, 프로덕션 관리. 그 핵심은 프로덕션 팀원들 사이의 갈등을 잘 조율하는 것.

‘다 잘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백설하가 들려준 말은 충격적이다.

게다가 끔찍하기까지 하다.

뮤직 프로듀서가 본인의 호오(好惡) 때문에 아티스트의 요구를 묵살하고 있단 거니까.

만약 그게 사실이면…….

‘그냥 넘어가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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