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06화 (406/760)

406화

소녀연맹 휴가 종료.

“이게 직장인의 마음이구나.”

조아라는 밴에서 내리자마자 툴툴댔다.

그녀는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었다.

거의 밤낮이 뒤바뀌어 생활하다가 정시에 출근하려니 몸이 안 따라주는 것이었다.

“어제 마지막이라고 술 잔뜩 먹더니 꼴좋네.”

“나 토할 거 같은데 네 옷 좀 빌려줘.”

“응 바닥에다 맘껏 해.”

조아라가 신아름을 붙잡고 토하는 시늉을 했다. 신아름은 이제 이런 처지가 익숙한지 반항도 하지 않았다.

“으, 추워요!”

리카가 따스한 백설하의 품에 달려들었다. 백설하는 리카를 꼭 안아주며 회사로 들어갔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1층 홀은 적막이 감돌았다.

“저희 정말 휴가가 끝났네요.”

장하양이 졸린 눈을 비비며 말했다.

그녀는 소녀연맹 중 백설하를 제외하고 가장 규칙적인 생활을 지킨 멤버였다.

하지만 하루 이틀 조금씩 기상 시간이 늦어지더니, 휴가가 끝날 때쯤에는 10시에 일어나는 게 기본이 되었었다.

그런 장하양의 눈꺼풀은 무거웠다.

“정신 차려!”

백설하가 장하양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짝!

홀 전체를 울릴 만큼 큰 마찰음이 퍼졌다.

장하양은 눈이 보름달만큼 커져선 백설하를 보았다. 백설하도 당황하면서, 장하양의 엉덩이를 때렸던 자신의 손을 보았다.

“와, 하양 언니 뭔데. 이 날씨에 스키니진 하나만 입고 있는 거예요? 소리 죽이네!”

“아라야 그렇게 말하지 마…….”

“근데 진짜 바지 안에 아무것도 없다고요? 기모 바지도 아니고? 언니 뭔데요.”

“추우면 몸이 에너지를 많이 쓰니까, 살이 덜 쪄.”

“진짜 상상도 못 했던 이유다.”

장하양은 자신의 엉덩이로 슬슬 다가오는 조아라의 손을 쳐내곤 도망가듯 계단을 올랐다.

멤버들도 그녀를 따라 2층으로 향했다.

가로 엔터에서 유일하게 소녀연맹만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1번 연습실.

그곳엔 이미 선객이 있었다.

“응? 일찍 왔네.”

민경섭이었다.

그는 종이를 가위로 오리는 중이었다.

신아름이 호기심을 가지고 그에게 다가갔다.

“오빠 뭐 해요?”

“너희 휴가 복귀했으니까 연습실 시간표 업데이트해야지.”

“이거 매니지팀이 하는 거였구나. 심지어 팀장인 오빠가 하네요.”

“내가 일찍 와서 하는 거야.”

“종이 아깝다. 전에 권아인 경리님이 그냥 시간표를 화이트보드로 바꾸는 게 낫겠다고 하던데.”

민경섭이 무릎을 탁 쳤다.

“맞네! 왜 그걸 생각 못 했지?”

민경섭은 허망하게 자신이 오린 종이를 바라보았다. 주마다 바뀌는 연습실 이용 시간표는 만들기 어렵진 않지만 귀찮았다.

매번 종이랑 잉크도 낭비되고 말이다.

“역시 권 경리가 총무 일도 해서 그런지 이런 걸 잘 생각하네. 근데 너희 권 경리한테 경리님이라고 불러?”

“그럼요?”

“너희랑 동갑이잖아.”

“에!”

리카가 놀라서 물었다.

“아인 언니가 저랑 동갑이라구요?! 그럼 지금까지 아타시(저)는 대체……?”

“웃기다 너네.”

“경리님이라고 부르는 게 어때서요.”

조아라가 말했다.

“나이 같다고 다 말 놓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아라 말도 맞네.”

민경섭은 오린 시간표를 들고 일어났다. 신아름이 그것을 보여달라고 했다. 민경섭은 기꺼이 보여주었다.

“음?”

신아름이 당황했다.

“뭐예요 이거.”

예전보다 소녀연맹의 이용 시간이 확연하게 줄어 있었다. 그런데 그 빈 시간에 무언가가 채워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번 주에 우리 바빠요?”

“그러네. 너흰 아직 전달 못 받았구…….”

“민 팀장님.”

백설하가 민경섭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제가 말할게요.”

“아, 그럴래?”

민경섭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연습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멤버들은 설명을 요하듯 백설하를 바라보았다.

곧게 선 그녀의 모습에선 평소엔 느낄 수 없는 위압감마저 있었다.

‘어, 이런 느낌 언젠가…….’

그 순간, 조아라는 언제 백설하의 이런 모습을 보았는지 깨달았다.

소녀연맹이 데뷔하기 전, 장하양이 연습생으로 들어오고 나서 보았던 월말 평가 연습 시간이었다.

중구난방으로 향하는 의견, 저마다 따로따로인 연습, 그것을 보다 못한 백설하는 멤버들을 강압적으로 다스렸었더랬다.

“들어.”

갑자기 백설하가 노래했다.

가사는 없었다.

하지만 그 청명한 목소리는 어디까지고 올곧게 뻗어나가 멤버들의 귀를 날카롭게 때렸다.

마치 물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귀가 먹먹하단 착각이 들 정도의 공명.

심신을 채우는 노랫소리에 멤버들은 얼이 빠졌다. 그리고 백설하는 이제 충분하다고 여겨 노래를 멈추었다.

“이 정도가 너희들이 도달해야 할 수준이야.”

“……하이(네)?”

리카가 못 들은 척 반문했다.

백설하는 그것을 무시했다.

“물론, 너희는 연습하면 이 정도야 할 수 있어.”

“못 하…….”

“내가 바라는 수준이란, 무대에서 퍼포먼스로 이걸 재현해야 한다는 거야.”

멤버들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우리들의 프로듀싱’ 첫 번째 프로듀서로서 너희에게 요구한다.”

백설하.

“너희는 매일, 매일, 매일, 보컬을 연습해야 해. 그 어떤 것보다 우선해서. 비어 있는 연습실 시간은 너희가 보컬 트레이닝해야 하는 시간이야. 각각 우수한 트레이너님들이 붙어서 가르쳐주실 거야. 자, 얘들아.”

독재 ON.

“열심히 하자.”

철혈의 지배자가 거짓임이 분명한 미소를 지었다.

* * *

가칭, 제1회 백설하 프로듀싱 회의.

참석한 이들은 각 파트의 대표자들과 그 보조인들이었다.

A&R팀 성필, 정지음, 이재호.

비주얼팀 손혜빈, 이유이, 직원 한 명.

소녀연맹 멤버 전원.

그리고 이번 회의에만 한정적으로 매니지먼트팀에서 팬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는 직원인 김승욱도 참여했다.

‘승욱 씨의 일은 팬들의 니즈를 파악하는 거니까.’

종일 SNS와 커뮤니티의 바다를 탐험하는 동시에 탐닉하는 김승욱의 의견은 고려할 가치가 있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성필이 개회를 선언했다.

석세스 엔터에선 A&R팀원들의 기획을 차례로 올리면서 심사하는 형태로 진행했었다.

하지만 가로 엔터는 먼저 멤버들의 의견을 듣는 식으로 진행한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주도권이 백설하에게 있단 것일까.

“설하가 떠올린 건 일단 컨셉이 여름이라는 거. 그리고 복장으로 멤버들의 섹슈얼리티를 드러낼 수 있을 것. 이 정도네.”

“엣찌(음란)!”

“섹슈얼리티요?”

조아라는 초조한 티를 내며 백설하를 보았다. 백설하의 존재감을 다시 한번 파악한 조아라는 더욱 초조해졌다.

“뭐 어쩌려고요? 진짜 헐벗고 무대 올라요?”

“아라 머릿속의 섹슈얼리티는 뭘까, 정말 궁금하다.”

“그 왜 있잖아요, 중소 기획사들처럼…….”

“우리도 중소 기획사인데.”

“말꼬리 잡지 말고요! 아니 쌤 진짜 그런 쪽으로 가게요?”

백설하는 자신이 생각하는 섹슈얼리티를 사진 자료와 함께 제시했다.

조아라도 그것을 보더니 안심했다.

“그냥 자연스럽게 드러내자는 거네요.”

“조아라 넌 술살 없어지고 나서야 드러낼 수 있겠네. 보컬 트레이닝보다 그게 먼저 아니야?”

“뭐래. 사실 지금이 내 전성기인데. 그쵸 아저씨?”

“아니.”

성필이 진지하게 답했다.

“단도직입적으로, 현재의 아라가 무대 위에 올라가면 직캠 영상이 온갖 커뮤니티에서 조리돌림당한다.”

“너무 직설적이잖아요!”

“참, 카메라란 게 이상한 물건이야.”

“나 상처받았어요.”

“전성기란 건 ‘어느 정도’ 동감하지만…….”

“어느 정도는 동감해요?”

조아라가 자신만만하게 백설하를 보았다.

“왜 날 봐……?”

“뭐, 아저씨가 그렇대요.”

“전성기란 건 ‘일부’ 동감하지만 아이돌적인 전성기는 아니야.”

“표현 바꾸는 거 열받네.”

아무튼, 멤버들은 백설하가 제시하는 섹슈얼리티를 이해하게 됐다.

소녀연맹은 여태껏 멤버 개개인이 지닌 고유한 매력을 드러내는 것에 소극적이었다. 특히 신체적 비주얼로 말이다.

소녀연맹의 세계관을 표현하는 게 지상과제가 되어, 컨셉이 잡힌 옷만 입었던 것이다.

그 기류를 이번에 바꾸자는 게 백설하의 의견이었다. 섹슈얼리티란, 멤버 본연이 가진 매력을 발산하자는 뜻이다.

“그럼 여름을 어떻게 표현할 건가, 그거부터 생각해봐야겠지.”

“여름…… 너무 포괄적이네요.”

비주얼팀의 이유이는 수첩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름 하면 역시 수영복이 아닐까 해서, 멤버들을 모델로 여러 수영복을 그려보았다.

확실히 온전한 수영복을 입고 무대에 올라간 걸그룹은 없지만, 수영복 모티프의 무대 의상은 꽤 있는 편이었다.

“여름하면 바다죠!”

리카가 활기차게 외쳤다.

“이에(아니), 바다밖에 없어요!”

어쩐지 리카의 목소리엔 억울함이 담겨 있었다. 야유회 때 바다가 아니라 계곡으로 갔었기 때문일까, 이번에 그 한을 풀고자 하는 건 아닐까 싶었다.

“하긴, 여름 컨셉 하면 바다지.”

바다는 매우 굉장히 아주 흔히 쓰이는 여름의 모티프다.

많은 걸그룹의 여름 앨범이 파란색 계열로 디자인된 것만 보아도, 바다가 얼마나 사람들의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식상하다.”

정지음이 단칼에 리카의 의견을 잘라버렸다.

“손나(그런)!”

“바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게 필요해. 창의성을 더 발휘해봐.”

“타토에바(예를 들면)?”

“우파루파.”

백설하가 마시던 물을 뿜었다.

그녀가 콜록콜록 기침하면서 손을 저었다.

“괘, 괜찮, 회의 계속하…….”

장하양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백설하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백설하는 쉽사리 사레를 그치지 못했다.

“우파루파…… 귀엽네요!”

귀가 얇은 리카는 바로 우파루파에 넘어갔다.

멤버들도 ‘우파루파 귀엽지’란 분위기였는데, 신아름만 예외였다.

‘우파루파가 뭐야?’

신아름은 테이블 밑으로 폰을 꺼내어 우파루파를 검색했다. 그리고 경악하면서 폰 화면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들이밀었다.

“이게 뭐가 귀여워?!”

“이건 야생 우파루파고. 이거 봐.”

“개귀여워!”

신아름도 곧 우파루파의 귀여움을 알게 됐다.

그에 백설하는 위기감을 느꼈다. 음흉하게 미소 짓는 정지음을 보니 위기감은 배가 됐다.

‘편곡의 천재 치논쨩(정지음의 새로운 별명)이 밀어주기 시작하면…….’

이 싸움, 백 퍼센트 불리해진다!

백설하가 허둥지둥 반격하려던 순간.

“근데.”

손혜빈이 시큰둥하게 물었다.

“지음이 그 우파루파란 곡 계속 밀잖아.”

“곡도 있나요!”

“응, 있어. 막 계속 ‘우파루파 우파루파’하는 곡 있거든.”

“듣고 싶어요!”

“들어볼래?”

정지음이 기다렸다는 듯 스피커에 자신의 노트북을 연결했다. 그리고 ‘우파루파’를 재생했다.

아직 하이라이트 멜로디 라인만 붙어 있어서 느낌을 자세히 파악할 수는 없었다.

멤버들의 머릿속에 남은 건 필사적으로 ‘루파 우파루파 루파!’라고 외치며 기이한 춤을 추는 정지음뿐이었다.

“이런 곡이야.”

“응, 근데 지음아.”

“네, 손 이사님.”

“우파루파가 주제면, 가사는 어떻게 돼?”

“……가사요?”

“그러니까, 애들이 우파루파인 컨셉이야? 우파루파 의인화? 아니면 애들이 우파루파를 대상물로 두고 노래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우파루파가 무슨 여름의 상징 같은 거라서 집어넣은 거라든가.”

정지음은 거기까지 생각하진 않았었다.

그저 ‘우파루파’란 단어와 멜로디에 꽂혔을 뿐이었다.

“아직 거기까지는……. 그래도 지금 당장 떠올리면…….”

가요는 일반적으로 청자를 특정하지 않는다.

가요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 1위, 2위가 ‘너’와 ‘나’다.

‘너’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 게 보통이다.

그러니, 손혜빈이 예시로 들었던 ‘우파루파를 대상물로 둔다’는 가사는 가능성이 낮았다.

“아마 애들이 우파루파가 된…… 그런 느낌 아닐까요?”

“좀 그렇지 않아?”

정지음의 표정이 굳었다.

백설하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손혜빈을 응원했다.

“전 앨범에서는 부당한 압제에 맞서 싸웠던 소녀연맹이 갑자기 우파루파가 돼서 돌아와 봐.”

“컨셉 배반이네요.”

팬 매니저 김승욱이 한마디 거들었다.

“아직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지만, 우파루파 컨셉으로 티저만 올라와도 욕을 많이 먹지 않을까요. 특히 소녀연맹은 해외 팬이 많고, 그렇게 팬을 끌어들인 기제가 파워풀한 퍼포먼스 아니겠습니까. 일본 쪽은 어떨지 몰라도, 해외에서도 반응을 기대하긴 어려울 거 같습니다.”

김승욱의 지원사격에 백설하는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에 비해 정지음은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그런데.”

김승욱이 한마디 더 붙였다.

“매니지먼트팀인 제가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는데, 곡 정말 좋은데요?”

“어……?”

그 시점에서 김승욱은 요령 좋게 빠졌다.

멤버들 사이에서도 ‘노래는 좋아’란 말이 오고 갔다. ‘노래는 좋아’라니…….

‘사실상 곡이 알파이자 오메가인데, 곡이 좋다는 말이 나오면…….’

소녀연맹은 정말 될지도 모른다.

우파루파!

“성필인 어때?”

손혜빈이 성필에게로 대화의 주도권을 주었다. 성필은 백설하의 기색을 살폈다.

백설하는 누가 보아도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설하도 아마 누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야. 소녀연맹이 1년간 끌어온 색깔을 갑작스레 너무 바꾸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야.”

맞아요!

백설하가 성필을 속으로 응원했다.

“난 여름 컨셉 키워드를 먼저 잡기 전에 설하의 생각을 듣고 싶어. 설하야, 구체적인 아이디어가 있어?”

“아직은…….”

“그럼 범위를 좁히자.”

성필은 능숙하게 백설하가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도록 도왔다.

“설하가 생각하는 곡은 어떤 걸 노래해?”

“어떤 걸……?”

“아니, 그보다 더 좁히자. 누구한테 노래해?”

누구한테 노래하느냐.

백설하는 아이돌 곡의 가사들을 떠올려보았다.

대부분은 정체를 특정할 수 없는 ‘너’를 향한다. 혹은 불특정 다수에게 ‘무엇무엇을 하자’라고 말한다. 그것도 아니면 ‘나는 이래’라며 주체성을 강조한다.

예를 들자면.

너와 함께 바다를 보고 싶어, 혹은.

우리 함께 바다를 보자, 혹은.

나는 바다를 봐.

‘확실히, 화자와 청자의 설정은 곡의 이미지에 큰 영향을 주는구나.’

백설하는 너무 큰 것부터 생각했단 것을 깨달았다. 새삼 자신의 부족함이 느껴졌다.

성필이 질문의 범위를 좁히지 않았다면, 백설하는 아직도 ‘무엇을 표현할까’라는 흐리멍덩하면서 추상적인 주제에 매달렸을 것이다.

“저는…… ‘너’에게 노래하고 싶어요.”

“왜?”

“아마, 저는, 그러니까, 사랑을…….”

여름 하면 떠오르는 가슴 설레는 분위기를 표현하고 싶다.

후덥지근한 밤공기에 실려 전해지는 설렘.

뜨거운 태양과 대비되는 바다와 강의 시원함. 그 아름다운 대비가 전해주는 로맨틱함.

“사랑을, 아니, 아예 정열적인 사랑은 아니구요. 애매모호한 설렘…….”

“썸?”

“써, 썸도 아니구…….”

“짝사랑?”

백설하가 손뼉을 쳤다.

“네, 네네! 짝사랑이요! ‘너’한테 노래하는 거예요! 여름의 로맨틱을, 여름의 풍경을 그리면서 사랑도 한 스푼 넣어서요!”

“유혹하는 노래가 되겠네.”

“아니에요!”

백설하는 마침내 자신이 표현하고픈 것을 찾았다.

“저는 여름의 배경에 사랑하는 마음만을 덧칠할 거예요! 풍경화처럼 담담한 묘사만 있는…….”

여름의 청량한 분위기 속에 사랑하는 사람의 수줍음이 들어간, 그런 노래를 만들고 싶다.

“그러니까 우파루파는 아니에요!”

“아니야……?”

정지음이 다시금 시무룩해졌다.

성필은 대견하단 듯 백설하를 보면서도, 일단 그녀를 진정시켰다.

“그렇게 단칼에 끊으면 안 되고. ‘우파루파’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잖아. 설하 생각은 잘 알겠어. 일단 앉아.”

“네?”

백설하는 아래를 보았다. 어찌나 흥분했던지, 자기도 모르는 새에 일어나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다시 앉았다.

“다들 설하 생각은 알겠지?”

“감이 잘 안 잡히는데요.”

조아라가 그리 말하자, 성필은 컨셉 상관없이 백설하의 의견에 일치하는 아이돌 곡들을 들려주었다.

가사가 주로 ‘내 심장이 떨려’라던가 ‘난 타오르고 있어’ 등등, 사랑의 마음을 선언하는 가사가 주였다.

“오, 진짜 상대한테 직접적으로 말하는 부분이 없네. 신기하다. 그냥 되는대로 사랑 노래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이런 거까지 생각하는구나.”

“프로들을 너무 얕보는 거 아니냐…….”

“그럼 쌤은 이런 자기선언적인 가사에 여름 분위기 살리는 가사를 넣겠단 거죠?”

갑자기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조아라가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 뭐요.”

“아라쨩이 ‘자기선언적’이라고 한 거 때문에 그래!”

“그게 뭐.”

“어려운 단어라서 다들 놀란 거야!”

“날 얼마나 바보라고 생각하면……?”

“언니 뭐 해요.”

그때 신아름이 장하양에게 물었다.

아까부터 장하양은 회의에 참여하기보다, 혼자서 수첩에 무언가를 그리거나 쓰고 있었다.

신아름은 참다 참다 못해서 장하양에게 말한 것이었다. 그녀의 목소리엔 은근 책망하는 기색마저 있었다.

“응?”

“뭐 하길래 자꾸 고개 숙이고 있냐고요.”

성필도 장하양이 계속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장하양은 신아름의 말을 듣더니,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죄송합니다. 언니가 여름 컨셉이라고 하실 때부터 자꾸 뭐가 떠올라서요.”

“아, 아냐 하양아. 좋은 생각 있으면 들려줄래?”

장하양은 자신이 수첩에 쓴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뇨, 너무 막 생각한 거라…….”

“그게 오히려 좋아!”

“그래도…….”

“줘봐요.”

신아름은 장하양의 수첩을 휙 빼앗았다.

과연 장하양이 얼마나 대단한 것을 떠올렸기에 회의도 전부 무시했는지 궁금했다.

수첩을 본 신아름이 난색을 표했다.

“이게 뭔……?”

“나도 보여줄래?”

신아름이 성필에게 수첩을 넘겼다.

장하양은 자신의 수첩이 회의실을 이리 저리 돌아다니자 안절부절못했다. 기어코 수첩이 성필의 손에 넘어갈 땐 고개도 못 들었다.

성필은 수첩을 살폈다.

[사과 주스.

애플 주스.

Apple juice.

apple crush.]

사과가 들어간 단어들과 함께 사과 그림이나, 유리잔에 담긴 액체 그림들이 가득했다.

성필이 픽 웃으며 말했다.

“하양이 스티브 잡스 팬이야?”

“아하하……. 여름이라고 하니까 목이 마르더라구요. 마실 거 하니까 주스가 떠오르고, 여름이니까 사과…….”

“사과가 왜?”

“빨개서…… 태양 같아서요…….”

장하양의 귀여운 발상에 다들 옅게 웃었다.

“근데 여기 애플 크러쉬는 뭐야?”

“에, 박 이사님 그것도 모르시나요!”

리카는 자신의 지식을 자랑할 때가 오자 당당히 일어섰다.

“크러시는 ‘과즙’이란 뜻도 있어요! 애플 크러시는 사과즙 음료예요!”

“오, 리카 걸 크러쉬.”

“제 과즙?! 변태이신가요!”

“오, 창의력 대장. 리카도 하양이만큼 순수했으면 좋겠다.”

“아하하.”

“에에, 순수한 쪽보다 잘 아는 쪽이 낫다구요. 처음부터 배우려면 힘들고 귀찮으니까요.”

회의실이 침묵에 잠겼다.

리카가 변명했다.

“‘아는 게 힘이다’ 모르시나요?! 베이컨 경과 소크라테스가 경악하겠어요! 것보다 다들 짠 것처럼 조용하는 거 소름 돋거든요?! 죄다 머리에 음란한 거밖에 안 들었어!”

성필은 리카의 변명을 한 귀로 흘렸다. 그리고 장하양이 수첩에 적어 넣은 귀여운 단어와 그림들로 머리를 정화했다.

“먹을 거 모티프도 꽤 많았지. 옛날에는.”

“아, 진짜 최악이지.”

손혜빈이 질색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내가 영원히 최악으로 꼽을 가사가 ‘나 꽤 맛있어’거든. 듣자마자 돌아버린 줄 알았어.”

“그건 너무 노골적이긴 했지.”

멤버들은 두 사람이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장하양의 낌새가 이상했다.

그녀는 두 이사의 대화가 이어질수록 안색이 안 좋아졌던 것이다. 누가 보아도 그녀가 어색하게 미소를 유지하고 있단 게 느껴졌다.

그 낌새를 눈치챈 성필은 다시 수첩을 보았다.

애플 크러시…….

“아, 아니, 그게요.”

장하양이 모두의 시선을 받으면서 변명을 시작했다. 아까 리카보다 훨씬 필사적이었다.

“언니가 ‘너’라는 청자를 두고 곡을 전개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그, 그런데 아이돌 뮤비에선 상대의 모습을, 걸그룹이면 남자의 모습을 등장시키지 않잖아요. 그럼 가사에서는 자꾸 ‘너’에 대해 말하는데, 뮤비에선 상대가 안 보이면 이상하니까…….”

장하양은 그 ‘너’를 과일로 형상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름이니까, 태양이고, 태양은 사과고…….”

사과가 바로 ‘너’인 것이다.

소녀연맹은 ‘너’에게 노래 부르고 말이다.

확실히 사과는 ‘남자 대상’이 아니니, 뮤직비디오에 얼마든지 등장시킬 수 있다. 보는 사람도 그 상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테고 말이다.

“그, 그리고 여름을 시각이나 촉각으로 형상화한 가사가 많잖아요?”

장하양은 가사를 자주 써서 그런지 다른 이들보다 아이돌 곡의 가사를 더 자세히 살폈었다.

그래서 여름 노래의 특징을 쉽게 캐치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저는 미각으로 형상화하려고……. 뭐, 뜨거운 맛, 여름의 맛, 사과 맛, 사과주스, 과즙 맛…….”

장하양이 성필을 보았다.

붉은 패딩을 입고 있는 성필을.

“사과 껍질, 빨가니까요. 벗겨서, 과즙, 뭐, 대상과 유혹, 성취의 모티프가 될 수 있을…….”

성필이 패딩의 지퍼를 턱 끝까지 올리고 옷깃을 더 강하게 여몄다.

그야말로, 여름이었다.

“결정됐네!”

손혜빈이 들뜬 기색으로 외쳤다.

“이번 컴백곡 주제는 사과를 따서 먹는 건가요!”

“아니, 리카. 사과를 따먹든 갈아서 먹든 곡의 비주얼라이즈야 나중에 가서 생각하고. 주제가 정해졌잖아. 사랑!”

사랑과 여름이다.

소녀연맹은 ‘롱 포’에서처럼 다시금 사랑을 표현하게 될 것이다. ‘롱 포’처럼 세계관으로 한정된 상황에서만 사랑을 부르짖지 않고, 나이대의 감성에 맞춰 노래하게 될 것이다.

“동서고금 만국 만인이 공감할 수 있는 주제. 거기에 배경이 여름이라면 이건 뭐, 실패할 수가 없지!”

“어, 누나 그럼…….”

성필은 옅게 불안을 느끼며 물었다.

“‘롱 포’ 때처럼 애들한테 사랑에 관한 아이디어 받을 거야? 그걸로 가사를…….”

“얘는, 뭘 그런 걸 묻고 그래. 당연하지.”

성필은 멤버들의 얼굴을 차분히 둘러보았다.

‘롱 포’ 가사 참고자료로 쓰기 위해 그녀들에게 수합했던 아이디어들이, 성필의 머리에서 되살아났다.

성필의 시선이 조아라에게서 딱 멈추었다.

“뭐요.”

“…….”

성필이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아, 머리 아파.’

소녀연맹, 돌고 돌아 다시 사랑.

거기에 여름 한 스푼 끼얹은 곡을 만들 것이다.

“반대예요!”

여름에 사랑 한 스푼 끼얹은 곡을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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