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화
“아뇨!”
백설하가 대뜸 외쳤다.
‘우파루파’란 단어만 반복하며 노래하던 두 남자가 움찔했다.
“이걸로 안 해요!”
“안 해……?”
정지음이 시무룩해져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곤 비 맞은 강아지처럼 백설하를 올려다보았다.
“아, 아예 안 하겠단 건 아니지만, 이렇게 바로 결정하고 싶진 않아요! 경우의 수가 많잖아요!”
곡 하나 들어보고 곧바로 결정할 수는 없다.
소녀연맹의 컴백곡이 아닌가.
비록 천재적인 뮤직 프로듀서 정지음이 만들고, 마찬가지로 천재적인 아이돌 프로듀서 성필이 인정했더라도 바로 오케이 해선 안 된다.
안 된다기보다, 백설하는 쓰고 싶은 곡이 있었다.
“오빠, 전에 제가 봤던 곡 들려주세요.”
성필은 백설하가 당연하단 듯 곡을 요구하는 것을 보곤 놀랐다.
설마 휴가 기간 중에도 정지음과 협의하면서 곡을 살펴봤으리라곤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의 태도가 기뻤다.
‘설하라면 어색하게 웃으면서 우파루파도 괜찮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백설하는 다른 멤버들보다 심지가 약한 이미지가 있다.
적어도 성필이 본 백설하는 그러했다.
성필이 조금 삐친 티나 실망한 기색을 보면, 백설하는 금방 성필의 기분을 맞춰주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업무 외적인 부분에서일 뿐, 진지한 업무가 주제로 올라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백설하는 프로로서 일에 임하는 것이다.
‘분위기에 휩쓸리진 않네.’
성필은 은근히 백설하를 시험하겠단 생각에서 과도하게 ‘우파루파’를 띄워준 것이기도 했다.
성필은 정지음이 우파 좌파 운운할 때 미래를 봤었다. 놀랍게도, 소녀연맹은 우파루파란 곡을 앨범에 넣어 컴백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진짜 정말 말도 안 되는데, 가사가 논란이 되고…….’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던 미래였다.
사소한 말이나 태도로 논란이 되었던 아이돌이 많긴 하다. 그런데 설마 이런 이유로 논란이 되리라곤 상상하지도 못했다.
‘아무튼, 우파루파는 소녀연맹의 곡이 된다.’
그런데 그건 수록곡일까?
타이틀곡일까?
그것도 아니면 더블 타이틀?
‘애초에 설하가 미니 앨범으로 할지, 아니면 싱글로 할지, 그것도 아니면 디지털 싱글로만 발매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야.’
성필은 아쉬움을 느꼈다.
이왕 미래를 본다면, ‘우파루파’가 성공했는지 아닌지 정도는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전에 설하가…… 그거 말이구나.”
정지음은 금방 오디오 파일을 찾아냈다.
성필은 모니터 화면 안의 커서가 오디오 파일로 다가가는 것을 눈으로 좇았다.
과연 백설하가 이토록 마음에 두고 있는 곡이란 무엇일지 매우 기대됐다.
‘설하가 선택한, 설하가 표현하고픈 음악은 과연 어떨까.’
이 순간은 특별하다.
백설하가 가진 안목과 아티스트십을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커서가 오디오 파일 위에서 멈추었다.
그러고 정지음은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뮤직 프로듀서로서 이건 추천 안 해.”
“……어?”
작업실 내의 공기가 굳었다.
정지음은 아까까지 신나게 우파루파 노래 부르며 춤췄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한없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가 마지막 남은 가벼운 공기마저 없애버리려는 듯 다리를 꼬았다.
“다리 풀어.”
“네, 형.”
정지음이 다리를 풀었다.
“추천 안 한다…… 는 건 조금 유하게 들리려나. 나는 반대하고 싶어.”
백설하는 명백히 당황하고 있었다.
설마 정지음이 시작부터 반대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백설하는 겨우겨우 마음을 다잡고 물었다.
“왜, 왜요?”
“형도 들어보면 아실 거예요. 재호는 이미 알지?”
“예. 전에 들어봤으니까요.”
곡이 재생됐다.
듣다 보니, 성필은 왜 정지음이 그토록 단호하게 반대를 외쳤는지 알 수 있었다.
일단 이 곡에선 정지음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A&R팀이 움직여 사들인 곡 같았다. 국내 작곡가의 곡일 수도, 외국 작곡가의 곡일 수도 있다.
‘아마 외국, 미국 쪽 같아.’
이 곡은 케이팝의 느낌 자체가 적다.
누가 들어도 하이라이트라 느낄 수 있는 두드러진 절정이 없다.
케이팝의 특징으로 꼽히는 변화무쌍하고 돌발적인 장르적 변환도 없다.
귀를 사로잡는 아트적인 사운드 변신, 청자를 놀라게 만드는 장치 또한 없다.
이 곡은 놀랍도록 반복적이다.
한없이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비트. 귀에 영원히 남게 만들겠다고 선언하듯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 멜로디만이 있다.
‘간단해.’
너무 간단하고 단순하며 차분한 곡이다.
그러나 그 멜로디는 명확하게 귀로 들어온다. 들어올 수밖에 없다. 계속 반복되니까.
곡이 끝났다.
“지음아 이거…….”
성필이 얼떨떨한 투로 말하자, 정지음은 이해했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AAA 구조 곡이네?”
‘우파루파’는 현대 팝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인 AABC를 따랐었다.
그런데 백설하가 고른 곡은 AAA 구조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 같은 구조가 곡이 끝날 때까지 반복되는 형태다.
“설하야.”
“알아요.”
AAA구조가 주로 사용되는 장르는 발라드다.
하나의 감정을 차분하고 끈질기게 가져가야만 하는 장르에서, 이 AAA구조는 빛을 발한다.
하지만 아이돌이 이 구조를 곡에 쓸 수는 없다. 일단, 대중들이 아이돌의 곡에 기대하는 건 단번에 귀를 사로잡을 수 있는 자극이니까.
‘아이돌 노래는 곧 댄스곡이나 마찬가지야.’
사람들은 진득하게 들어주지 않는다.
지겹다면 바로 다음 곡으로 넘겨버릴 것이다.
그런데, 굳이 이런 것을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다. 백설하는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이야기는 바로 다음으로 넘어간다.
“안다니……. 설마 내가 전에 했던 말 때문이야? 그거 때문에 이걸 골랐어?”
백설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필이 했던 말, 아니.
부탁이었다.
모든 멤버를 메인 포지션에 버금갈 실력을 키워달라는, 프로듀서의 간곡한 부탁 말이다.
“처음으로 도전할 건 보컬이에요.”
백설하는 소녀연맹의 첫 번째 프로듀서가 되고, 성필에게 부탁받은 순간부터 결심했었다.
“제가 도전할 과제는 보컬…….”
그러니 이 AAA구조의 곡을 골랐다.
곡 전체가 같은 선율을 공유한다면, 과연 어떻게 벌스와 하이라이트를 나눌까?
하이라이트란 이름 그대로 곡의 분위기와 감정을 폭발시켜야 하지 않는가. 만약 곡이 같은 선율만을 반복한다면, 하이라이트를 벌스와 다르게 구성할 방법은 하나뿐이다.
“저희 멤버들을 보컬적으로 성장시킬 거예요. 그래서 이 곡을 완성할 거예요.”
AAA구조 곡에서 하이라이트와 벌스를 구분하는 유일한 방법, 바로 보컬이다.
대표적으로 두 가지 수가 있다.
A(벌스) ― A(벌스) ― A(하이라이트).
첫 번째는 마지막 A(하이라이트)에서 옥타브 자체를 높이는 것. 음정 자체가 오르니, 이전의 벌스와는 아예 다른 분위기가 되어버린다.
발라드에서 사용하는 방법이다.
두 번째는 유니즌(모든 악기가 같은 음정을 연주하는 것)이다. 즉, 멤버들이 한번에 하이라이트를 부르면 된다.
“설하야 네가 하는 말은, 하이라이트에서 유니즌을 택할 거란 뜻이지?”
“아뇨.”
“그럼?”
아까까지 귀엽게 우파루파를 흉내 내던 백설하는 없었다.
그녀는 최고의 아이돌을 목표로 하는 이로서, 최고의 아이돌에게 걸맞은 기교를 사용할 것이다.
“옥타브도 높이고, 유니즌도 쓸 거예요.”
성필은 멍하니 백설하를 바라보았다. 할 말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정지음을 보았다.
정지음이 어깨를 으쓱였다.
“제 마음 알겠죠?”
쉽게 말해서, 백설하가 선정한 목표는 이렇다.
멤버 전원이 백설하에 버금가는 보컬 기량을 지니고, 이 곡을 소화할 수 있을 것.
그래야만 완성할 수 있다.
* * *
“설하가 그랬어? 포부가 엄청 크네!”
손혜빈이 대견하단 듯 웃자 정지음이 질색하면서 답했다.
“그렇게 웃을 일이 아니잖아요…….”
“지음이 너, 설하가 어려운 길로 가는 게 그렇게 싫어? 아님 그냥 그 곡이 싫은 거야?”
“제가 ‘우파루파’를 미는 건 맞는데, 그 곡이 싫단 건 또 아니에요.”
“그럼 그냥 순수하게 애들이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네?”
“못한다기보다는…… 뭐…… 만족할 결과물이 안 나오지 않을까요…….”
그리 말하며 정지음은 성필을 흘끔거렸다.
성필은 작업실의 미니 냉장고를 뒤적이고 있었다. 그는 칼로리 제로 탄산음료를 꺼내어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러고도 성필은 답이 없었다.
손혜빈이 대화를 이었다.
“네가 프로그램으로 만져주면 되는 거 아냐?”
“소녀연맹은 라이브 퍼포먼스가 가능하도록 하는 게 방침이잖아요.”
“그렇긴 한데 뭐…… 가능한 한도 내에 어떻게든 해야지.”
“‘한도 내에’라면서 가볍게 여길 게 아니에요, AAA구조란 건요. 괜히 발라드에서 자주 쓰이는 게 아니라니까요.”
발라드 가수급의 보컬 기량이 없고선 제대로 살릴 수 없는 곡 구조다.
“성필아, 그렇다는데?”
기어코 손혜빈이 성필을 불렀다.
정지음의 푸념을 모른 척하고 있던 성필도 대화에 낄 수밖에 없게 됐다.
손혜빈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지음이 얘기 듣고 보니까, 확실히 아이돌한테 그 곡 구조를 쓰는 건 힘들겠는데. 우리 메인 프로듀서님 생각은 어때?”
“전례가 있어.”
“어?”
“설하도 전례를 듣고 고른 걸지도 몰라.”
“지음이도 알았어?”
정지음은 당황하다가, 마지못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데? 전례가 있으면, 그 그룹은 AAA구조 곡으로 실패했던 거야?”
“아뇨. 실은…….”
“대성공이었어.”
성필이 답했다.
“전무후무한 대성공이었어.”
“와, 누군데? 나만 모르는 거야? 그렇게 특이한 곡이면 내가 모르는 게 이상한데.”
“그 곡은 AAA구조라고 생각할 수 없으니까. 귀가 닳도록 들어보지 않고선 모르지.”
“제목이 뭔데?”
“‘포트레이트 인 유’.”
손혜빈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크게 놀랐다.
전무후무한 대성공을 이루었던 ‘포트레이트 인 유’는 AAA구조의 곡이었다. 그러나, 듣는 누구도 선율이 계속 반복된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선율이 단순하고 반복돼도, 보컬은 안 그랬으니까. 보컬만으로 곡 특유의 지루함을 없애버린 거야.”
‘포트레이트 인 유’는 걸그룹의 곡이다.
전무후무한 대성공이란 건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미국 전체 음원 사이트에서 가장 많이 스트리밍된 케이팝 걸그룹 곡’이란 타이틀을 달고 있으니 말이다.
그 곡의 주인은…….
“케이어스의 선배 그룹이 주인이지. KS 엔터가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3세대 걸그룹.”
븨이에스.
그녀들 네 명은 케이어스만 한 댄스 퍼포먼스 능력은 없었고, 지금도 동생 그룹처럼 격렬한 퍼포먼스는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보컬적인 기량에서는 케이어스를 아득히 넘어서고도 남았다.
븨이에스는 상업적 그룹을 넘어 예술의 경지에까지 들어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포트레이트 인 유’는 발매된 해에 음원 수익 1위까지 했었어. 초동 판매량은 그 시절 그룹들이 그렇듯이 만 단위에서 놀았지만, 명실상부 케이팝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곡이야.”
확실히 AAA구조의 곡은 성공 사례가 있다.
하지만 그 사례란 게, 도저히 참고할 수 없을 만큼 드높은 곳에 존재했다.
“이젠 목표가 케이어스를 넘어서 븨이에스야? 어떻게 우리 애들은 부딪치고 깨질 벽만 찾는 거 같냐.”
‘그래서’라며, 손혜빈은 물었다.
“만약 설하 목표가 ‘포트레이트 인 유’ 수준의 음악적 완성도면, 불가능한 거 아니야? 지음이 의견이 맞잖아.”
“그렇지. 소녀연맹은 븨이에스가 아니야.”
“그럼…….”
“븨이에스가 아니니까, 다른 방식의 표현법을 찾아야지.”
“뭐?”
“누나, 음악의 길은 한 갈래가 아니잖아.”
너무나 당연한 소리다.
애초에 모든 음악은 같을 수가 없다.
아이돌 히트곡 거의 대부분이 AABC 구조를 따르지만, 전부 다 다른 매력이 있지 않은가.
성필이 흥분한 투로 말했다.
“단지 설하는 살짝 더 어려운 길로 들어가려는 것뿐이야. 누나, 안 궁금해? 우리 애들이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낼지 궁금하지도 않아? 지음이 너는? 이걸 그냥 쳐낼 거야?”
손혜빈과 정지음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소년처럼 흥분해서 말을 쏟아내는 성필을 보고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손혜빈과 정지음은 서로를 보면서 쓰게 웃었다. 그래, 어차피 곡을 하나로 확정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만들다 보면 알겠지!”
“그러게, 성필이가 맞다. 세상사 한 가지만 정해놓고 가는 거 아니잖아? 부딪치면서 배우는 것도 있지.”
“누나, 초 치지 마.”
“그럼…….”
정지음은 담담하게 현 상황을 받아들였다.
“A&R에서 컴백곡들 걸러내서 선정하는 건 다음 얘기로 치고요. 설하가 특정한 곡만 얘기하자면, 주제는 여름인 거죠?”
“그렇지.”
“역시 키워드 하나라도 있는 게 낫겠어요. 저도 손을 좀 봐야죠.”
“그건…… 애들 휴가 끝나고 나서 회의 때 정하자. 아님 설하한테 미리 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아 맞다.”
손혜빈이 문득 생각났단 듯 정지음에게 물었다.
“‘가사’라고 하니까 떠올랐거든. 이수연 작사가님이랑 뭐…… 어떻게 돼가?”
과거, 성필과 손혜빈은 동맹을 맺었었다.
바로 ‘정지음 모쏠 탈출’ 동맹이었다.
두 사람은 소녀연맹의 일본 활동이 끝나자마자 작전을 개시했었다. 이수연 작사가와 정지음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둘은 꽤 여러 번 둘이서만 밥을 먹거나 여기저기 다녔다는 모양이다.
성필도 기대감을 안고 정지음의 답을 기다렸다.
“어떻게 돼가냐뇨?”
정지음이 어벙하게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에이, 능청 떨긴. 둘이 사이 어디까지 나갔냐고.”
“무슨 소리예요?”
“어?”
“이수연 작사가님이랑 저랑 뭐 있었어요?”
“아니, 둘이 자주 밥 먹고 그랬잖아.”
“자주…… 예요 그게? 몇 번 안 만났고, 다 일 때문이었는데요.”
‘미친 모쏠 X다 X끼.’
손혜빈이 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이수연도 성필과 손혜빈이 만든 ‘정지음 모쏠 탈출 동맹’의 존재를 알고 있다.
처음 손혜빈이 접근했을 때 이수연은 아니라면서 둘러댔었다. 하지만 곧 얼굴을 붉히면서 자신의 연심을 토해냈었다.
‘기회가 있으면, 네, 좋겠네요…….’
이수연도 정지음과 비슷한 과였다.
항상 어두운 작업실에서 가사만 쓰다 보니 사람을 만날 곳도 없고, 대화를 나누는 것도 같은 작업실의 동료들뿐이다.
그녀는 매일 같은 하루를 보내면서, ‘우연히 정지음과 마주칠 일은 없을까’라는 헛된 기대만 품고 있던 것이다.
참으로 불쌍하기 그지없었다.
손혜빈은 속이 뒤집힐 정도로 눈치 없는 정지음의 답을 듣고는, 뒤집힌 속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그녀는 간신히 진정하고 다시 물었다.
“에이, 지음아 어떤 사람이 업무로 밥을 그렇게 자주 먹어?”
“그냥 같은 업계인으로서 이런저런 얘기 나눈 거죠…….”
정지음은 이 대화가 불편한 듯했다. 아니,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설마 이수연 작사가랑 나랑 잘될 분위기였나?’라고 착각해서 들어댔다가 대차게 까일 미래를 벌써부터 두려워하는 것이다.
손혜빈은 그런 정지음의 숙맥 기질…….
‘아니다.’
손혜빈은 그런 정지음의 풋풋함을 이해했다.
“아닐걸? 넌 관심도 없는 이성 업계인한테 자꾸 밥 먹자고 할 수 있어?”
“손 이사님 아니, 누나 자꾸 왜 그래요.”
“지음아 한번 연락이라도 드려봐.”
“형까지 자꾸……. 연속해서 밥 먹자는 걸로 호감이 있는 거면 형은 우리 애들한테 대체 대시를 몇 번 받은 거예요?”
성필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하하, 그러게?”
멋쩍게 그리 웃어버렸다.
‘박성필 이 X신 X끼.’
손혜빈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정지음 모쏠 탈출 동맹’은 조금 더 존속을 이어갈 분위기였다.
* * *
이음 엔터 대표 김명운은 회사 건물의 연습실로 헐레벌떡 들어왔다.
연습실 문 옆에는 시간표가 있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모든 시간에 ‘우효민’이란 이름이 박혀 있었다.
사실상 이음 엔터는 김명운과 우효민의 1인 기획사나 마찬가지였다.
“효민아!”
김명운이 문을 벌컥 열자 연습하고 있던 우효민이 깜짝 놀랐다.
“대표님?”
“우리 컴백일 잡자!”
우효민은 김명운의 이렇게나 밝은 표정을 오랜만에 본 것 같았다.
프로젝트 포유로 탄생한 그룹, 포유가 해체되고 난 후. 우효민은 김명운의 이음 엔터에 남고 싶다고 말했었다.
김명운은 처음엔 거절했었다.
온갖 이유를 들어가면서, 이음 엔터에 있어봤자 우효민의 미래엔 도움이 안 된다고 철벽을 쳤었다.
하지만 우효민은 막무가내였었다.
‘대표님이랑 일하고 싶어요.’
김명운은 계속 거절했다.
지금의 유명세를 가지고 다른 회사의 데뷔조에 들어가는 편이 훨씬 나을 거라면서 말이다.
그에 우효민이 물었다.
‘대표님은 저랑 일하고 싶으세요?’
그로써 김명운은 함락되었더랬다.
그때가 김명운이 그늘 한 점 없이 환하게 웃은 마지막 날이었다.
그렇게 우효민과 김명운의 즐겁고도 힘든 나날이 시작되었다.
솔로로 데뷔한 우효민은 그럭저럭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아직 솔로 아이돌 가수로서 자리매김은 하지 못했다.
“드, 드디어 컴백이네요!”
“그래. 여름이야!”
“여름!”
우효민의 얼굴에서 천천히 기대감이 사라졌다.
“여름이면…… 진짜 걸그룹 지옥이잖아요…….”
“아냐 아냐. 내가 기획사 관계자들 다 만나면서 빅데이터를 냈거든?”
“사람 혼자 조사한 걸 빅데이터라고 하진 않…….”
“봐봐!”
김명운이 볼펜으로 한땀 한땀 작성한 서류에는, 유명 걸그룹들의 대략적인 컴백 일자가 쓰여 있었다.
“거의 다 여름을 피하고 있더라고!”
“어? 이, 이게 말이 돼요? 왜?”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오는 거지. 왜, 재작년 봄은 걸그룹들이 거의 컴백 안 했었잖아. 지금이 그 타이밍이야!”
“그, 그 말씀은……!”
“올해의 섬머퀸은 너야, 효민아!”
김명운과 우효민은 기쁨에 겨워 춤췄다.
여름! 얼마나 많은 행사와 얼마나 많은 축제가 있던가!
곡 하나만 제대로 히트해도 이음 엔터의 앞날에는 먹구름 따위 없으리라.
우효민이 김명운과 손을 맞잡고 춤추느라 바닥으로 나풀나풀 떨어진 서류.
그곳에는 걸그룹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고, 그 밑에는 대략적인 컴백 시일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케이어스와 글로브, 소녀연맹의 정보는 없었다. 김명운은 끝끝내 그들의 정보를 알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뭐, 무슨 큰 상관이 있겠는가. 만리장성처럼 드높은 3대 기획사와 유명한 중견 기획사의 탑티어 걸그룹들이 여름에 컴백하지 않는다는데.
아마 신성 같은 그 세 그룹도 여름에 컴백하진 않으리라. 설마 잭팟처럼 동시에 컴백하겠어?
“꼭 섬머퀸이 될게요!”
“그래, 성공해서 이 지긋지긋한 곳을 벗어나 신사옥으로 가자!”
힘내라 이음 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