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03화 (403/760)

403화

“리카 향수……?”

그야 리카에게선 향기가 난다.

하지만 성필은 그 향기를 특정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한 적이 없었다.

사람의 향이란 건, 신경 쓰지 않는 이상 항상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장하양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저랑 통화하실 때 리카가 왔나 보네요.”

“아, 어.”

성필은 얼떨떨한 투로 답했다.

“제가 오는 걸 허락하신 이유도…….”

장하양이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리카가 왔기 때문이었네요.”

성필이 귀한 시간을 내어 집까지 찾아온 리카를 문전박대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리고 리카를 집 안에 들였다면, 장하양에게만 ‘오면 안 돼’라고 해선 안 된다. 불공평하니까.

성필이 장하양의 방문을 허락한 건 그녀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연히 리카가 성필의 집에 쳐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장하양은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두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리카한테는 감사해야겠네요. 실례하겠습니다.”

장하양은 쇼핑백을 두 개 들고 있었다.

큰 것과 작은 것 중, 장하양이 작은 것을 성필에게 내밀었다.

“방문 선물이에요.”

“고마워.”

성필은 종이백의 틈으로 안에 든 것을 보았다. 사각기둥 형태의 박스가 들어 있었다.

“술이야?”

“네. 박 이사님 백주 좋아하시죠?”

“기억하고 있었네.”

성필은 와인이나 양주보다 백주를 좋아한다. 이는 전생에서 들인 습관 때문이었다.

석세스 엔터 초창기에, 김태훈은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중화 음식점으로 성필을 데려갔었다. 그때마다 백주를 시켜주었던 것이다.

성필의 입맛은 백주에 길들어 있었다.

“이사님에 관한 거니까요. 기억하고 있죠. 저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응, 들어와.”

성필은 장하양과 함께 안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평소보다 훨씬 조심스럽고 단아한 태도였다. 한 걸음 움직이는 것에서도 기품이 흘러넘쳤다.

그런 장하양이 괴물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움찔 멈춰 섰다.

식탁에 백주를 올려둔 성필은 그런 장하양을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왜 그런지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니, 아니나 다를까 성필의 바디 프로필이 있었다.

‘아, 저거 치워놨어야 했는데.’

리카가 봤을 때도 부끄러웠는데, 바디 프로필을 장하양에게도 들켜버렸다.

리카는 괜찮다. 친구에게 자랑하는 느낌이니까.

하지만 장하양에게 보이는 건 상당히 부끄러웠다. 자랑을 듣고 싶지도 않은 사람에게 계속해서 자기 자랑 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빤히 보면 부끄러운데.”

장하양은 흠칫 정신을 차리곤 성필이 서 있는 식탁으로 다가왔다. 그러던 도중 참지 못하고 또 고개를 돌려 바디 프로필을 보았다.

“외투 벗을래?”

“네?!”

장하양이 화들짝 놀라면서 현실의 성필을 보았다. 그러자 옷걸이를 든 성필이 보였다.

“벗을 거면 안방에 걸어줄게.”

“아…… 괜찮아요.”

“그래?”

성필은 자신의 패딩만 옷걸이에 걸어 침실에 가져다 두었다. 그리고 거실로 돌아왔다.

장하양은 여전히 쇼핑백을 들고 식탁 앞에 쭈뼛쭈뼛 서 있었다.

“앉아.”

“네.”

둘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성필은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괜히 손깍지를 끼고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역시, 내가 먼저 말해야겠지.’

그 순간, 장하양이 고개를 아주 깊이 숙였다. 사죄라고 부를 법한, 엄숙함마저 느껴지는 동작이었다.

“이사님, 죄송합니다.”

“하양아 고개 들어!”

성필은 놀라서 허겁지겁 장하양의 어깨를 잡고 그녀의 상체를 일으켰다.

장하양의 표정은 한기가 느껴질 만큼 굳어 있었다. 어째서 이런 표정을 짓고 있을까, 성필은 짐작 가는 게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거야.’

성필은 장하양의 사정을 알고 있다.

처음 장하양을 만났을 때, 그녀는 사근사근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처음 만난 성필에게도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아마 그녀는 사람과 갈등을 만드는 것 자체를 피하기 위해 성격을 바꾸어왔을 것이다.

누구와도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물렁한 성격 말이다. 그건 곧, 타인을 화나게 만들지 않는단 뜻이었다.

그렇다면 장하양이 화난 사람을 본 적은 언제일까. 그녀는 누구를 화나게 만들었을까?

‘부모.’

장하양의 아버지와 어머니다.

그녀는 가정에서 사랑다운 사랑을 받지 못하며 자랐다고 했다. 그녀가 보았던 부모는 항상 분노에 가득 차 있었고, 그 분노는 부당하게 장하양을 향했던 적이 많았었다.

장하양은 분노한 부모에게 어떻게 행동했을까.

과연, 화난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을까.

‘아니, 없었을 거야…….’

옛날에 장하양은 말했었다.

자신에게 분노가 쏟아지면, 분노가 지나갈 때까지 바짝 엎드리는 수밖에 없었다고 말이다.

장하양은 그런 방법밖에 모르는 인간이다.

그러니, 성필이 화난 것을 본 그녀는 두려움에 떨며 바짝 엎드리는 것밖에 하지 못한다.

“…….”

거기까지 파악한 성필은 조심스럽게 대화를 시작했다.

그녀에게 ‘화를 낸다’는 것은 무엇인지 가르쳐주어야 했다.

‘사람이 화를 낸다는 건.’

상대가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게 두렵다, 혹은 자신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두렵다는 뜻이다.

두려워서 가시를 세우는 것이다.

때론 그 가시를 방어하기 위해서만 쓰지 않고, 상대를 의도적으로 찌르는 데 쓰기도 한다.

그게 분노이다. 그리고 분노는 대화로, 서로에 대한 이해로 풀 수 있다.

“하양아, 네가 그 말을 했을 때 말야.”

“네.”

“나도 모르게 울컥하더라. 나는 내심 사랑은 포기하고 있었거든. 세이코 씨한테 드렸던 말씀을 너도 직접 들어서 알겠지만, 나는 너희한테 전심전력을 쏟고 있어. 쏟고 싶어.”

성필은 깨어나서 잠들 때까지 소녀연맹을 생각한다. 그런 정신으로 사랑까지 하는 건 불가능하다. 아니, 상대에게 실례일 것이다.

그리고…….

“너희한테 최고의 아이돌이란 꿈을 말하면서, 나 혼자 애인한테 정신이 팔리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해. 최고의 아이돌은 너희들만 잘하는 걸로 되는 게 아니잖아. 프로듀서인 나도 최선을 다해야 해.”

그러니, 성필은 자신의 삶을 프로듀싱에 갈아 넣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5년 동안 연애하지 않겠다’고 입 밖으로 선언하니까…… 무섭더라고.”

뭐야.

정말로?

나 진짜 5년 동안 연애를 안 해?

그럼 소녀연맹이 활동을 끝내면 38살 혹은 39살이잖아.

그래도 되는 거야?

“이제까지 신경도 쓰지 않았던 족쇄가 갑자기 느껴지기 시작했어.”

성필은 전생에서 보았던 미래를 기억했다.

석세스 엔터에서 쫓겨나고 홀로 은둔하는 삶. 당시의 성필은 뼈에 사무치도록 외로워했었다.

아이돌에 삶을 바쳤는데, 결국 자신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은 영원히 삶의 동반자도 없이 홀로 늙어 죽겠구나. 그 미래가 두려웠다.

그래서 성필은 30살로 돌아오고 나서 전생처럼 홀몸으로 사는 것만은 피하겠다고 다짐까지 했었다.

그러나 성필은 결국 같은 삶을 반복했다.

똑같이 아이돌에 삶을 바치고 있다.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게 행복하고, 또 두려워.’

최고의 아이돌을 프로듀싱한 다음이 그려지지 않았다. 프로듀서인 성필은 성공적인 커리어를 쥐고 업계의 별로 군림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 박성필의 곁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소녀연맹도, 직장 동료들도 저마다의 삶을 찾아갈 텐데 말이다.

“하양이 네 말은, 그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었던 거야. 무서워져서, 나도 모르게 너한테 푸념하고 말았네. 하지만 네 잘못이 아니야. 어차피 결정된 일에 화를 낸 내 쪽이 잘못인 거지. 하양인 아무런 잘못도 없어. 내가 사과할게. 미안해.”

성필이 고개를 숙이려던 순간, 그보다 빨리 장하양의 손이 성필의 어깨를 잡았다.

성필은 고개를 숙이지 못하고 장하양과 눈을 맞췄다.

“아니에요 이사님.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이사님이 얼마나 힘드실지 생각도 못 하고, 이상한 농담이나 하고. 제가 잘못했어요.”

“아냐. 내가 뭐가 힘들어. 힘든 건 너희지. 인생의 황금기를 연애 금지에 묶여 있잖아. 연습생까지 합해서 거의 5년간을……. 그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어색함 때문이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더는 사과 따위 필요 없었다. 마치 운명 공동체처럼, 둘은 서로의 심정을 손에 닿듯이 알 수 있었다.

장하양은 성필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이사님. 저…….”

장하양은 더는 아까처럼 삭막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다. 대신 인간다운 감정이 흘러넘치는 생기 가득한 얼굴이었다.

성필은 그녀를 보면서 안도했다.

장하양이 성필 자신을 이해해줬구나 싶어서, 타인에게 이해받는단 사실이 기뻐서, 안도할 수 있었다.

“응, 하양아.”

성필은 온기가 서린 목소리로 답해주었다.

“저도 5년 동안 연애 안 할게요.”

“뭔 개소리야?!”

“네……?”

“아, 미안. 그, 5년 동안 연애 안 하겠다니?”

“이사님의 결심에 대한 제 답이에요.”

장하양은 진지해 보였다. 그게 성필을 더 당황시켰다.

“최고의 아이돌을 프로듀싱하기 위해 삶의 중요한 부분을 포기한 이사님처럼, 저도 진지하게 제 꿈을 바라보고 있어요. 다른 곳에 한눈팔 생각은 접을게요.”

“안 돼!”

“왜요?”

“왜냐니? 왜냐면, 왜냐면…….”

성필은 헐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넌 가사 쓰잖아…….”

장하양은 얼떨떨하게 눈만 끔뻑였다. 그녀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가사요?”

“응. 하양아, 이건 미신 같은 게 아니라. 사랑을 해본 사람은 정말 가사의 결이 달라져. 넌 젊어. 하나라도 더 경험해 봐야 할 시기야.”

“하지만…….”

“하지만이고 뭐고! 올림픽 메달리스트들도 연애 금지 같은 건 없어! 다 할 거 하고 연습하고 메달도 딴다고!”

“그럼 이사님은요?”

“나는 프로듀싱에 집중하기 위해서만 연애 안 하겠단 게 아니야! 일어나서 잘 때까지 너희만 생각하는데, 그런 정신 상태로 애인을 대하는 건 실례라고 생각해서 안 하는 거야! 너랑은 경우가 달라!”

“일어나서 잘 때까지……?”

“그, 그래. 말이 좀 이상하긴 한데, 그래.”

“그럼 저랑 같네요.”

장하양이 별거 아니란 듯 가볍게 웃었다.

“저도, 일어나서 잘 때까지 제 꿈만 생각해요.”

“…….”

“저희가 같이 꾸는 꿈이요. 이사님이 저한테 꾸길 허락해주신, 저한테 주신 꿈. 그러니까 저도 약속할게요.”

장하양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5년간, 한눈 안 팔고 제 꿈만을 보기로요.”

성필은 그녀의 손가락을 보다가,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서 고개를 저었다.

“너 이러다가 나중에 연애한다고 하면 얼마나 창피할지 예상이나 가?”

“저는 한번 결심한 건 꼭 지켜요.”

장하양이 재촉하듯 손가락을 더 가까이 내밀었다.

성필은 그녀의 그 제스처가, 진지함이 담겼으면서도 소박한 미소가, 그녀의 말과 의지 하나하나가, 정말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프로듀싱하는 아이돌이 꿈을 말하며 연애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이렇게나 꿈에 진지한 아이를 어떻게 어여삐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고맙다. 정말 고마워서 애틋함마저 생긴다.

‘내 꿈을 같이 꿔준다고 하면서, 그 꿈을 이렇게나 진지하게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성필은 기뻐서 어쩔 도리가 없을 정도였다.

그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어쩌면, 하양이의 이 말은 1년 뒤에 흐지부지될 수도 있어.’

어느 날 갑자기 ‘아하하, 이사님 저 연애 시작했어요’라면서 멋쩍게 고백할지도 모른다.

성필은 어처구니없단 투로 그녀를 놀리겠지. 그러면서도 축복해주면서, 그녀의 사생활을 존중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렇다. 사랑이란 고작 약속으로 막을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너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다?”

하지만 성필은 분위기에 휩쓸려 장하양과 약속한다.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해서, 이 행복을 완성된 형태로 마음속에 간직하고 싶었기에.

“최고의 아이돌이 되는 거야.”

“네, 반드시. 함께 우리의 꿈을 이뤄요.”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이 있단 건 얼마나 기쁜 일일까. 그 꿈을 이렇게나 아름다운 형태로 간직할 수 있는 건 또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둘은 새끼손가락을 걸고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었다.

성필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혹여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냥 연애해도…….”

“그럴 일 없어요. 지켜야 하니까 약속이잖아요. 아시겠죠, 이사님?”

“나 말고 널 걱정해야지. 하아…….”

“왜 그러세요?”

“작사 때문에.”

“그거 진심이셨어요? 사랑하면 노랫말을 더 잘 쓴다는 거요?”

“당연히 진심이지. 진짜야 그거. 내가 아는 기획사 대표분 중에는, 회사 아이돌들한테 연애 많이 하라고 권장하는 분까지 있어.”

“와, 대단하시네요. 그런데 저는 걱정 안 하셔도 괜찮아요.”

“자신만만하네.”

“‘에피타프’랑 ‘도미노’ 보셔 놓고서도 걱정하시는 거예요?”

“……그러게.”

성필은 아직도 그 두 가사를 생각하면 충격을 받는다. 어떻게 사랑을 그토록 애절하면서도 폭력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지 놀랍기만 하다.

“아, 맞다.”

장하양은 가져온 쇼핑백 중 나머지 하나를 식탁에 올렸다.

크기가 꽤 컸다.

“이게 뭐야?”

장하양은 기대하란 듯이 안에서 흰 박스를 꺼냈다. 백색의 포장을 벗기자 그것의 정체가 드러났다.

“자동 식물 재배기예요.”

“자동 식물 재배기? 그런 것도 있어?”

“네. 물만 맞춰주면 자동으로 식물한테 빛도 쬐어주고 영양도 공급해줘요.”

“와, 세상 진짜 좋아졌다.”

장하양은 박스를 뜯고 식물 재배기를 꺼냈다. 겉보기에는 가로로 긴 흰색 꽃바구니처럼 생겼다.

“여기, 식물 키트예요.”

성필은 구성품인 식물 키트를 받았다.

비닐 포장에는 ‘튤립’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것을 재배기 안에 넣으면 되는 듯했다.

“백주는 방문 선물이고, 이건 제 사과의 선물이에요.”

“사과 선물까지는 괜찮은데…….”

“이사님.”

장하양이 식물 재배기의 전원을 켜면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진지했다.

“저한테 튤립은 의미가 깊은 식물이에요. 이유, 아세요?”

“내가 너한테 처음으로 선물해준 꽃이잖아.”

“기억하시네요.”

“기억 못 할 수 없지.”

“이사님과의 추억 한 장마다, 저한테는 튤립이 한 송이씩 있었어요. 이사님한테도 튤립이 특별한 꽃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튤립으로 이사님을 기억하는 것처럼, 이사님도 튤립으로 저를 기억해주세요.”

“사과의 선물 맞아? 나한테 요구가 많잖아.”

장하양이 배시시 웃었다.

“식물은 매일 자라는 걸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져요. 선물 맞죠?”

“하긴, 그렇지. 나도 애완식물 길렀었으니까 잘 알아.”

갑자기 장하양의 표정이 싸악 굳었다.

“전 여자친구분한테 받으셨다던 거요?”

“어? 으, 응.”

“이건 시들게 하시면 안 돼요.”

“자동으로 길러주는 데 시들게 만드는 게 더 힘들겠지…….”

“꼭이에요. 만약 시들 거 같으면 저 불러주세요.”

“뭐 하게?”

“박제해서 이사님한테 다시 드릴게요.”

“그렇게까지……?”

“한 송이 한 송이가 저예요.”

장하양이 식물 재배기를 성필 쪽으로 밀었다.

“한 송이 한 송이가 저와의 추억이구요. 소중하게 여겨주셔야 해요. 그리고 아침마다 자라는 걸 보면서 기뻐해주세요.”

“그래, 알겠어. 고마워.”

“저도 매일매일 나아질게요. 최고의 아이돌을 위해서.”

“……응.”

성필이 수줍게 미소 짓자, 장하양이 씩 웃었다.

“그럼 화해한 기념으로 술 마실까요? 제가 가져온 술 평이 좋아요.”

“아, 미안. 나 술은 안 마셔.”

“네?!”

“그게…….”

성필은 새로 PT를 등록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권강철 트레이너의 이야기도 말이다.

‘회원님 오늘 컨디션은 어떠십니까? 네? 술을 드셨다고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정말 무서운 분이셔.”

“하루 정도는…….”

“그리고 내가 마시면 너는 누가 데려다줘?”

“그럼 저만 마실까요?”

“……???”

그게 같이 술 마시는 건가?

“또, 내 집에서 둘만 마시는 건 모양새가 이상하잖아.”

“이사님 저를 여자로 보세요?”

“쓰읍, 이상한 논리 쓰지 마.”

“그럼 한강으로 갈까요? 이전처럼 돗자리 깔고 거기서 마시면 괜찮죠?”

“이 날씨에 거기서 술 마시면 둘 다 입 돌아가서 죽어.”

“……그럼, 이 술은 이사님 혼자 드시거나 나중에 제가 다시 왔을 때 같이 마셔요. 다른 분이랑 드시면 안 돼요.”

“더는 선물이 아닌데?”

“제가 드린 거니까 제 맘대로예요.”

그러고도 둘은 달이 기울도록 대화를 이어 나갔다. 술은 필요 없었다.

대화 자체가 둘을 기분 좋게 취하도록 했다.

같은 꿈을 꾸는 사이란 건, 술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는 관계니까.

* * *

장하양을 숙소까지 데려다준 후 성필은 집으로 돌아왔다.

불이 꺼져 있어 어두운 데다 텅 비었지만, 성필은 적적함이나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다.

성필은 방금까지 장하양이 앉아 있던 자리로 갔다. 식탁 위에는 식물 재배기가 올려져 있었다. 그것을 손으로 가볍게 쓸었다.

그때 성필의 전화가 울렸다. 장하양인가 싶었는데, 권강철 트레이너였다.

[하하하, 회원님 잘 지내셨습니까!]

“네, 오랜만입니다 트레이너님.”

[다름 아니라, 이번에 권소윤 트레이너에게 PT 20회 등록하셨지 않습니까?]

“그렇죠.”

[제가 이번 주에 부상에서 회복해서 돌아오게 됐거든요. 사실, 권소윤 트레이너가 제 동생입니다. 저 대신 다른 지점에서 대타로 와 있던 거거든요. 아직 수습이라 해당 지점에 고정 회원분이 안 계셔서요.]

“아아, 그래요?”

[옙. 아무래도 동성에게 받는 쪽이 트레이닝 효율성이 높다 보니, 회원님이 원하신다면 트레이너를 저로 교체할 수 있단 사실을 알려드리려 연락했습니다! 물론, 회원님이 원하시면 계속 권소윤 트레이너가 배정될 수 있습니다! 예, 그걸 여쭈려 연락드리게 됐습니다!]

성필은 창문을 식물 재배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옆의 튤립 식물 키트로 눈을 돌렸다.

성필은 키트를 뜯으면서 말했다.

“그럼 권소윤 트레이너님은 어떻게 되시나요?”

[원래 지점으로 돌아가서 트레이너 일을 계속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권소윤 트레이너가 받은 일이니, 저에게 돌아오는 금액에서 일부를 권소윤 트레이너에게 수수료로 주게 되고요.]

“음…….”

성필은 짧은 고민 끝에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 말씀은…….]

“잘 부탁드립니다, 권강철 트레이너님.”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 트레이너 권강철, 반드시 회원님을 피트니스 선수권으로 올려보내 드리겠습니다!]

“하하,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

[빈말 아닙니다. 회원님은 하실 수 있으십니다!]

“…….”

짧은 대화를 마치고, 성필은 전화를 끊었다.

성필은 캘린더 앞에 섰다.

2월, 소녀연맹의 휴가가 끝난다.

“프로듀싱, 시작이다.”

성필이 자신의 뺨을 약하게 짝짝 양손으로 쳤다.

“최고의 아이돌!”

사나이 가는 길에 사랑이 무슨 필요가 있을쏘냐. 진흙탕 걷는 길, 발에 꽃향기가 없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도다.

‘힘내라 박성필!’

최고의 아이돌을 프로듀싱하는 그날까지.

* * *

장하양이 숙소로 돌아왔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리카가 본인의 방에서 나와 장하양에게로 달려가 안겼다.

“언니 왔나요!”

“응, 리카. 잘 있었어?”

“하이(네)! 박 이사님이랑 화해는 잘 하셨나요!”

“잘됐어. 리카 덕분이야.”

“에헤헤, 다행이……!”

“리카, 아침에 박 이사님 댁에 갔다면서? 나한테는 말도 안 하고.”

장하양의 싸늘한 말투에 리카가 움찔했다.

“그, 그건 박 이사님이 다쳤다고 하셔서예요!”

“박 이사님한테 연락도 안 드리고?”

“…….”

“리카, 우리 잠시 대화를 나눠볼까? 나, 네 기준을 잘 모르겠어서 그래.”

“하, 하이(네)…….”

약 30분 후, 리카는 볼이 홀쭉해져서 방으로 돌아왔다.

조아라가 그녀의 초췌한 몰골을 보곤 물었다.

“누구한테 맞았어?”

“이에(아니)…….”

“뭐, 하양 언니랑은 얘기해봤고? 아저씨랑 잘 화해했대?”

“응, 만사 해결이야.”

“근데 별로 안 기뻐 보이네. 너 걱정 많이 했었잖아.”

“베츠니(별로), 기뻐.”

리카는 침대로 뛰어 다이빙했다.

“기쁘지, 당연히.”

두 사람이 화해했다는데 왜 안 기쁠까.

* * *

KS 엔터 프로듀싱 1팀 전체 회의.

상석에 앉은 정호환이 선언했다.

“컴백은 여름입니다.”

회의 테이블에 자리 잡는 게 허락된 중역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총괄 프로듀서인 정호환이 굳이 ‘여름’을 언급했다는 건, 케이어스의 컴백 컨셉은…….

“저, 이사님.”

누군가가 소심하게 손을 들었다.

“케이어스는 계절 컨셉을 맞춰서 컴백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아니, 그것보다는 계절 컨셉 자체가 독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흔히 ‘섬머퀸’이라고 불리는 타이틀이 있다.

여름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걸그룹에게 붙는 영광스러운 타이틀이다.

그리고 대형 기획사의 걸그룹들은 유독 이 ‘섬머퀸’ 타이틀에 약한 모습을 보였었다.

아무리 잘 기획하고 준비하든, 어째선지 중소나 중견 기획사에게 밀리는 것이다.

어쩌면 대놓고 여름 분위기를 강조할……, 직설적으로 말해서 섬머틱하고 건강한 비주얼을 구현할 용기가 부족해서일 것이다.

“지금까지처럼 아트적인 부분에 집중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도전해보고 싶어졌거든요.”

정호환은 장난감을 앞에 둔 어린아이처럼 쾌활하게 말했다.

“케이어스는 어떤 여름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다.

회의실 모두의 머리에 ‘여름’이란 단어가 박혔다.

“만들어 봅시다. 섬머퀸.”

* * *

“요지는 간단하다.”

윤상열은 글로브 멤버들을 모아두고 말했다.

“여름 컨셉이라는 건 결국 이 싸움이야.”

그가 정신 사납게 왔다 갔다 하던 것을 멈추고, 멤버들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가장 강렬하게 유혹하고 매혹하는 그룹이 이긴다.”

글로브의 리더, 라희가 주먹을 꼭 쥐었다.

윤상열의 선언으로서 확실시됐다.

‘컴백은 여름이야.’

마침내 정해졌다.

* * *

“설하야, 네게 프로듀싱 권한을 준다지만 기한은 무제한이 아니야.”

휴가가 끝나기 며칠 전, 성필은 백설하만 불러서 따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필은 회의실 스크린에 달력을 띄우고 기한을 표시했다.

“여름까지다.”

“그럼, 기한을 고려했을 때 빠르면 봄이고 느리면 여름이 되겠네요.”

“응. 둘 다 계절을 많이 타지.”

“노래가 계절은 안 탈 수는 없긴 하죠.”

“프로듀싱을 하겠다면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기한 설정이야. 컴백일을 딱 맞춰두고, 역순으로 계산해서 모든 스케줄을 정하는 쪽이 가장 좋지. 그리고 타이틀을 정한다면, 크게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

계절의 특성을 드러내느냐, 아니면 드러내지 않는가.

“소녀연맹은 지금까지 계절과 무관한 컨셉의 곡들만을 노래했어.”

“소녀연맹의 세계관이 주요한 골자였으니까요.”

“맞아. 그런데 그게 끝났어. 그 세계관을 이어갈 수도, 새로운 앨범의 세계관을 정할 수도, 아니면 대중영합적인 계절 노래를 만들 수도, 모든 게 너한테 달려 있어. 설하야.”

성필은 백설하 쪽으로 다가갔다.

“생각해둔 건 있어?”

백설하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듯했다.

그런 백설하의 태도를 보자 성필은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여태껏 그녀도 놀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제대로 진지하게 프로듀싱에 대해 생각해주고 있었어.’

성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백설하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이사님이 전에 가르쳐주셨었잖아요. 프로듀싱은 여러 방법으로 시작될 수 있다고요. 그걸 곡으로 한정하자면, 가사 키워드에서 시작할 수 있고. 멜로디에서 시작할 수 있고. 트랙에서 시작할 수 있고. 제목에서 시작할 수 있고. 마지막으로 컨셉에서 시작할 수 있다고요.”

“외에도 비주얼 컨셉이나 복장, 아예 세계관을 설정하고 그에 맞춰서 할 수도 있지. 어디서든 시작할 수 있어. 그래서, 설하 너는?”

“저는 컨셉을 먼저 생각했어요.”

“말해줘.”

과연 ‘우리들의 프로듀싱’ 첫 번째 타자, 백설하는 어떤 컨셉을 생각해왔을까.

성필은 그녀의 아티스트십을 믿었다.

아이돌로서 그녀의 안목을 신뢰한다.

‘설하는 많은 걸 배웠어. 그러니까 분명 알 거야.’

무엇이 자신에게, 소녀연맹에게 가장 잘 들어맞는지.

자기 자신이기에, 자신이 생각했기에, 자신이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

백설하는 반드시 그것을 찾아낼 수 있다.

분명 성공으로 이어지는 최선의 길로 나아갈…….

“‘섹시’예요.”

백설하가 말했다.

“여름이 승부처예요!”

박성필, 혼절.

백설하는 현재 걸그룹계에서 사장된 컨셉인 ‘섹시’를 들고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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