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화
장하양은 타인의 감정에 민감하다. 타인의 감정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왔다.
그렇기에 사람을 대할 때 조심스럽다.
타인과 자신 사이에 선을 그어두고, 선 밖의 상대를 면밀하게 관찰한다.
마치 맹수를 대면하는 것처럼 말이다.
일반적인 인간의 사고방식이 아니다.
인간이 태어나 처음으로 접하는 외부 세계는 부모다. 어린 시절, 부모는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받아들여 주는 존재다.
인간은 그런 존재를 경험했기에, 속마음을 전혀 알 수 없는 타인에게도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이 서로 이해할 수 있단 사실을 믿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장하양은 그럴 수가 없다.
항상 선을 그어놓고 그 이상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선 안으로 들어갈 용기 없이, 선 밖에서 상대를 면밀히 관찰하는 게 습관이자 삶이었다.
그런데…….
‘이사님이 화나셨어?’
어느 순간, 장하양은 성필과 자신 사이에 그어져 있던 선을 넘어버렸다.
아니, 지워버렸다.
그래서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을 했다.
상대를 전적으로 신뢰하기에, 습관과도 같았던 감정 읽기를 하지 않았다.
너무 편안했으니까.
“이사니…….”
장하양은 반사적으로 성필에게 사과하려다가, 그만 입을 닫았다.
그와 자신 사이의 거리가 수백 미터는 떨어진 듯이 느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다시 선이 그어졌다.
‘무서워.’
오랫동안 잊고 있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장하양에게 타인이란 기본적으로 두려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속에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모르니까.
장하양은 성필은 관찰했다.
그는 화가 난 듯했다.
그럼 사과해야 하는데.
‘모르겠어…….’
사과 다음이 어떻게 이어질까.
성필을 화나게 했다는 초유의 사태를 두고 장하양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냥 사과로 괜찮은가? 말만으로 충분한가?
장하양은 확신할 수 없었기에 두려웠다. 그와의 사이에 그어진 선이 장벽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양아.”
회사에 도착하고, 성필은 웃는 낯으로 말했다.
“내가 했던 말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나도 참 어른스럽지가 않았네. 미안.”
“아…… 네. 아녜요. 제가 더 죄송하죠.”
“들어가자.”
둘은 차에서 내려 회사 건물로 걸어갔다.
장하양은 그의 곁에서 걷지 않고, 한걸음 뒤에서 그를 따랐다. 곁에 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 * *
숙소로 돌아온 장하양은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이사님이 화를 내셨으면…… 나한테 소리치고 욕이라도 하셨으면…….’
그럼 용서라도 제대로 빌 수 있었을 텐데.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니, 정말인가?’
성필이 속 좁은 인간이 아니란 건 안다.
하지만 평소 성필의 모습만을 자료로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아무렴, 장하양은 성필을 처음으로 화나게 만들었지 않은가.
‘왜 생각을 못 했지?’
세이코 앞에서 벌어졌던 성필의 ‘5년간 연애 안 해요’ 선언.
그것을 듣고도, 장하양은 그의 심정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그저 그의 선언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까만 생각했었다.
‘이사님이 가볍게 그런 말씀을 하셨을 리 없잖아. 아니, 세상 누구라도 그런 말을 가볍게 할 수는 없어.’
인간은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다던가.
애정의 욕구는 인간성의 가장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성필은 그것을 5년간 포기하겠다고 한 것이다.
‘나는 왜…… 어째서…….’
소녀연맹 멤버들이 보는 성필이 어떻느냐.
그는 이성애란 감정이 없는 듯한 인간이었다. 그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정욕의 폭풍에 휩쓸리지 않는 자처럼 보였다.
여자에게 치근덕거리는 것을 본 기억은 없다.
누군가에게 호감을 표하는 것도 본 적이 없다.
사랑 때문에 고민하는 것도 들은 적 없다.
‘오직 아이돌, 꿈만이 삶을 살아가는 연료인 사람…….’
그런데, 아니었다.
당연히, 사람인 성필은 사랑에 굶주리고 있다. 그가 솔로가 된 지 아마 7년이 넘었을 것이다.
아이돌 그룹이 하나 만들어지고 사라질 시간이다.
괴롭겠지. 당연히 고통스럽겠지.
‘난 그걸 생각도 못 하고 이사님을 놀리기나 하고…….’
장하양이 눈을 질끈 감았다.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떨어졌다.
“하양아?!”
방으로 들어온 백설하가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서쪽의 오 솔레미오’ 가면을 책상에 올려두곤, 재빨리 장하양이 누운 침대 옆에 쪼그려 앉았다.
“하양아 왜 그래. 왜 울어? 어디 아파? 약 사다 줄까? 아니, 약이 있는데…….”
“언니 저 어떡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뭐가? 이 언니한테 다 털어놔! 뭐든 내가 해결해줄게!”
사정을 전해 들은 백설하는 난감해했다.
“그렇, 그, 그렇구나…….”
해결해주겠다고 자신만만히 선언했건만, 백설하가 해결해줄 수 없는 일이었다.
“확실히 하양 언니가 잘못하셨네요!”
어느새 튀어나온 리카가 당당히 선언했다.
“남성은 여성보다 성적 충동의 빈도가 2배 이상 높다는 연구 결과가 1960년부터 1990년까지의 관련 논문 통계적 집합으로 나와 있어요!”
“그런 걸 어떻게 알아……?”
“궁금해서 검색해봤어요! 사회적 통념인지 과학적 사실인지 궁금하잖아요! 하지만 아타시(저)는 역시 여성의 욕구를 죄악시하는 사회적 선입견이 작용한 게 아닐까 생각하…….”
각설.
“솔직히 언니한테 실망했어요!”
장하양은 리카의 말에 충격받았다. 그녀는 눈물 때문에 코를 훌쩍이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박 이사님의 열정 넘치는 선언을 듣고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뇨! 저는 감동까지 했다구요!”
“그렇구나, 그렇겠지, 그런 거구나…….”
“애초에 저희가 자꾸 케이어스를 물고 늘어지는 것도 잘못이에요! 데뷔 초기엔 그럴 수 있었다지만, 이젠 아니지 않나요! 다시 생각해도 하양 언니의 발언에 화가 나요!”
장하양은 할 말이 없었다.
“세상 누구도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거에 대해 뭐라고 할 자격은 없어요! 이사님의 케이어스 사랑을 존중해드려야죠!”
“으응…….”
“아니, 존중이란 말도 필요 없어요! 당연한 거예요! 박 이사님은 소녀연맹을 너무 너무 너무 사랑해서 연애까지 안 하시겠다고 선언하셨잖아요!”
장하양은 그 순간 전율과 비슷한 떨림을 느꼈다. 성필이 연애하지 않겠단 말에만 신경이 꽂힌 나머지, 그가 왜 그랬는지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맞아, 박 이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 이유는…….”
“저희는 그만큼 사랑받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간식처럼 깨작깨작 케이어스 덕질하는 정도는 애교로 볼 수 있어야죠!”
여자 아이돌 팬덤이 하는 말 중에 이런 게 있다.
주식으로 남돌을 덕질하면서, 간식으로 여돌을 덕질한다고 말이다.
장하양은 리카의 ‘성필 주식 소녀연맹, 간식 케이어스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렇게 따진다면, 성필이 케이어스를 덕질하는 것에 큰 배신감을 느낄 필요도 없지 않은가.
“요약하자면, 하양 언니는 박 이사님이 주시는 관심과 애정에 너무 익숙해져서 실례를 저지른 거예요! 사과해야 해요!”
장하양은 거칠게 눈물을 닦고 결연한 눈빛을 띠었다.
“맞아. 지금 당장 찾아뵈러 가야겠어.”
“에, 그건 아니죠!”
“하지만…….”
“마, 맞아 하양아. 시간도 늦었구, 따로 박 이사님 댁에 가는 건 실례잖아.”
“……네.”
“내일 회사로 가서 잠시 시간을 달라고 부탁드리자.”
“그냥 말만 전하는 걸로 괜찮을까요?”
“언니가 박 이사님께 준 심대한 심적 피해를 고려하면 선물이 필요해요!”
“역시 차가…….”
“차는 과하다니까요! 그런 걸 받으면 가족이라도 저의를 의심할 거예요! 마음이 들어간 소박한 선물이 최고예요!”
그렇게, 장하양은 다음 날 성필에게 사과하기로 결심했다.
혼자 가는 게 무섭다고 했기에 백설하가 같이 가주기로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신아름은 심드렁했다.
“팀장님이 괜찮다고 했으면 괜찮은 건데요. 들어보니까 걍 말실수…….”
“이게 어떻게 그냥 말실수야!”
“네, 다시 생각하니까 사과하는 게 낫겠네요. 잘 풀리길 바라요.”
신아름은 흥분한 장하양을 상대하는 게 귀찮았기에, 그냥 그녀에게 맞춰주었다.
다음 날.
장하양과 백설하는 함께 성필을 찾았다.
“성필이 안 왔는데?”
손혜빈이 가볍게 답했다.
장하양이 당황해서 물었다.
“왜…… 왜요?”
“나도 오늘 들었는데, 성필이 휴가 썼대.”
“이유는…….”
“모르겠다 나도. 되게 갑작스러워서. 연락도 사장님한테만 했다던데? 기한도 안 정해졌고.”
장하양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또한, 그녀의 뒤에 선 백설하도 불길함을 감지했다.
사무실을 나온 두 명은 한동안 침묵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백설하가 힘겹게 입을 뗐다.
“아, 아무래도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처를 많이…….”
선물을 양손으로 공손히 들고 있던 장하양은 파들파들 떨다가.
“아…….”
“하양아!”
그대로 쓰러졌다.
* * *
점심시간.
성필은 집의 침대에 엎드려 누워 홍규헌과 통화했다.
[박 이사, 몸은 좀 어때?]
“그럭저럭 괜찮아요.”
[병원에선 뭐라고?]
“그냥 인대가 살짝 놀란 거래요.”
[인대가 놀라기도 하는구나. 그러게 왜 놀래키고 그래. 애 불쌍하게.]
“하하, 재밌네요.”
[억지로 웃어주는 게 더 상처받는 거 몰라?]
“의사 선생님이 3일 약 먹으면서 쉬면 괜찮아질 거라고 하셨어요.”
[예상했던 것보다 짧잖아. 다행이네.]
“천만다행이죠.”
성필은 어제 퇴근한 후 짐으로 향했다. 그리고 데드리프트를 하다가 그만 다치고 말았다.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명백하게 운동을 속행할 수 없는 상태였다.
게다가 걷는 것조차 힘들었기에, 옆에서 함께 운동하고 있던 홍규헌은 즉시 그에게 휴가를 주었었다.
[아무튼 몸조리 잘해.]
“최대한 빨리 복귀하도록 할게요. 저 없으면 일 잘 안 돌아가잖아요.”
[A&R팀에 물어보니까 너 없어도 된다던데?]
“너무해애…….”
[그만큼 상사가 편히 쉬길 바라는 거지. 그동안 열심히 했잖아.]
“넵, 그럼 저도 휴가 즐길게요. 침대에 줄곧 누워서요.”
[그래. 평소 못하던 취미 생활도 좀 즐기고 그래.]
“야호! 케이어스 클립 정주행 시작이다!”
[박 이사가 KS 엔터 본사 건물 벽돌 수십 개는 쌓았을 거다.]
“가로 엔터가 더 큰 신사옥으로 이전하는 날이 오면, 건물 벽돌은 수천 개 정도 제가 쌓을게요. 염려 마세요.”
[……듬직하네.]
“살짝 감동하신 거 맞…….”
[몸조리 잘해, 박 이사.]
통화가 끝나고, 성필은 다시금 하릴없이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몸이 재산이야.’
괜히 심심하다면서 이것저것 하는 만행 따위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성필은 의사의 조언대로, 3일 동안 무리하지 않고 누워만 있을 작정이었다.
3일 후, 성필은 성공적인 요양을 마치고 다시 병원을 찾았다.
“통증은 없으시고요.”
“네.”
“엑스레이 촬영 사진에서도 이상은 없거든요. 예, 일상생활 가능하실 듯합니다. 약은 이틀분 더 처방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성필은 다시 건강을 되찾은 게 흥겹기 그지없었다. 그러고도 주말을 낀 휴가가 4일이나 더 남아 있었다.
하지만 성필에게 잘된 일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업무가 곧 행복이었으니까.
성필은 집으로 돌아왔다.
이젠 익숙해진 적막이 반겨주었다.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방에서 혼자 밥을 먹고, 컴퓨터로 취미 생활을 즐겼다.
그는 집으로 돌아온 후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회사 가고 싶어.’
적적하다.
아니, 외로웠다.
성필은 새삼스레 회사의 식구들이 그리웠다. 그렇게 그는 외로움에 파묻혀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성필은 아침을 먹은 뒤 헬스장을 찾았다. 얼굴이 익은 직원과 인사한 후, 카운터에서 상담을 받았다.
“PT 1회 끊으려고요. 데드리프트 자세 좀 봐주셨으면 해서요.”
“PT 1회, 알겠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세요.”
직원이 모습을 감추고, 성필은 홀로 남아 시간을 때웠다. 카운터 테이블에 덧씌워진 유리판으로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전생에서도 이 나이대 이 얼굴이었나?’
조아라에게 배운 피부관리 비법을 사용해왔으니, 분명 피부 상태가 전생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래도 역시 노화는 못 피하지.’
성필은 젊었을 적보다 선명해진 주름을 손으로 슬슬 쓸었다. 그러던 도중, 장하양과 있던 일이 떠올랐다.
‘내가 너무 민감하게 반응했던 거 같아.’
당연히 장하양은 악의가 없었을 것이다.
평소처럼 격의 없이 성필과 잡담을 떨 생각이었을 텐데, 얼마나 당황했을까.
‘다 내 자격지심이지…….’
성필은 당시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곱씹어보았다. 정말, 속에서 필터로 거를 새도 없이 울컥했었다.
‘전생에선 결혼 못 했던 걸 후회했었지.’
과거로 돌아오고 나선, 이번엔 제 나이 때 짝을 찾기로 결심했건만.
‘전혀 안 달라졌잖아.’
여전히 성필은 아이돌에 몰두하고 있다.
그게 씁쓸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난 망가진 거야.’
아이돌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다.
성필은 아이돌을 직접 프로듀싱한다는 것에 굉장한 만족을 느꼈다. 그야말로 꿈속에서 보내는 나날이다.
‘나는 아마, 우리 애들과 함께했던 기억만으로도 평생을 살아갈 수 있겠지.’
성필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만족해야만 하는 욕구들을 희생하여 아이돌에 대한 열정으로 바꾼다.
그것을 억울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난 영원히 이럴 수밖에 없는 인간이야. 내가 제대로 사랑할 날 따위, 앞으로도 안 찾아오…….’
……전생의 조아라와 같은 일이 없다면.
‘안 찾아오겠지. 그게 억울하진 않아. 오히려 기뻐. 삶을 꿈에 바친다는 건 멋진 일이잖아. 한눈팔지 않고 꿈의 레일만을 달려 나간다는 건 굉장히 멋진 거야. 내가 망가진 거라면, 앞으로 백번을 태어나도 계속 망가진 상태로 있을 거다.’
그런데, 그럴 텐데, 성필은 장하양의 농담에 진지하게 화를 냈었다.
‘회사로 가면 사과해야겠다. 하양이는 벌써 잊었겠지만, 진심으로 다시 사과해야겠…….’
“안녕하세요 회원님.”
성필은 당황했다.
맞은편에 앉은 여자는 트레이너들이 입는 백색의 타이트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트레이너가 여자다.
“어, 아, 예, 안녕하세요. 저, 혹시 권강철 트레이너님은…….”
“권강철 트레이너님은 살짝 부상을 당하셔서 쉬는 중이세요.”
“아, 그렇구나.”
성필은 금세 당황을 지웠다.
딱히 성필은 ‘트레이너가 여자라서 못 미덥네’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보통 이성 트레이너는 잘 배정 안 해주는데? 그리고 오면서 스케줄 빈 거 같은 남자 트레이너들도 봤는데…….’
그 순간 성필은 직감했다.
성필이 바디 프로필을 찍을 수 있도록 채찍질을 마다하지 않았던 베테랑 트레이너, 권강철 트레이너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회원님, 바디 프로필 찍으신 거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여기서 PT를 끝내시기보다는, 지속적으로 관리하실 수 있도록 이어가는 편을 추천드립니다! 지금 하시면 제가 한 달에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지인 할인을 사용해서 매우 저렴한 가격에……!’
‘괜찮습니다. 저는 이제 이 생활을 이어갈 용기가 없어요…….’
권강철 트레이너는 굉장히 실망한 기색이었다. 하긴, PT를 따는 건 트레이너 개인의 수입과 짐 전체의 매출에 관여되는 것이니까.
트레이너도 일종의 영업 사원이다.
최대한 고객을 끌어들여야 하는데…….
‘그렇군.’
성필은 이해했다.
‘여자 트레이너를 붙여줘서, 나한테 PT를 더 등록하게 만들 속셈이다.’
성필은 속으로 코웃음 쳤다.
‘난 이미 아이돌 프로듀싱에 내 모든 열정을 바친 몸. 이런 핑크 비즈니스에 넘어가지 않는다.’
어쨌든, 성필은 미소를 띠었다.
여자 트레이너가 해맑게 웃으면서, 보관하고 있던 성필의 트레이닝 자료를 훑었다.
“PT 1회 신청하신 거죠?”
“네.”
“데드리프트 자세 쪽 봐주셨으면 하는 거 맞으실까요?”
“네.”
성필은 데드리프트를 하다가 다쳤었다.
데드리프트는 성필이 꼭 하는 운동이었는데, 이는 권강철 트레이너 때문이었다.
‘데드리프트는 제 생각으로 세상에서 가장 효율적이면서 자극이 죽이는 운동입니다. 꼭 일주일에 한 번 이상 하세요!’
그런데 성필은 데드리프트를 할 때마다 영 찝찝했다. 자극은 오는데, 이 자세가 맞는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은 것이다.
권강철 트레이너도 데드리프트를 지도할 때마다 성필의 자세를 자주 지적했었다.
배워도 배워도 몸이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번에 다친 것도 감을 잃었기 때문이리라.
“알겠습니다. 그럼 회원님, 가실까요?”
트레이너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면서 일어났다. 성필은 그녀를 따랐다.
의도한 게 아니지만, 성필은 그녀의 뒷모습에 눈이 갔다. 트레이너답게 극도로 단련되어 있었다.
‘체형이 전생 아라랑 비슷하시…….’
성필은 고개를 저어 그 생각을 떨쳤다. 하지만 눈이 향하는 방향만은 떨치지 못했다.
“회원님, 이쪽으로.”
트레이너가 안내한 곳은 VIP룸이었다.
그곳을 마주한 성필은 멈칫했다.
“아…….”
“회원님?”
VIP룸은 PT회원들이 사용하는 공간인데, 성필은 주로 이곳에서 운동 전에 마사지를 받았었다.
성필의 상태가 어느 정도 궤도에 들어서고 나선 권강철 트레이너가.
‘회원님! 이젠 몸을 미리 풀어오시길 바랍니다! 이제까진 15분을 마사지로 썼지만, 이젠 그 15분도 운동으로 돌려서 50분 동안 풀로 땀 흘리는 겁니다! 바디 프로필까지 얼마 안 남았잖습니까, 하하하!’
라고 했었다.
‘그래, 이런 것도 있었지.’
성필은 ‘그냥 바로 운동하죠’라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는 새에 안쪽으로 발걸음하고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마사지 테이블에 엎드려 누웠다.
트레이너가 콜라겐 크림을 꺼내며 물었다.
“회원님, 히프(Hip) 터치 괜찮으신가요?”
“아…… 네. 괜찮습니다.”
“알겠습니다. 시작할게요.”
처음은 종아리였다.
성필은 오랜만에 느끼는 타인의 손길에 기분이 좋아졌다. 왠지 모르게 계속 권강철 트레이너가 떠올랐다.
‘제가 이곳을 누르면 신기한 일이 일어날 겁니다. 자, 보십……!’
“허윽……!”
“히, 힘이 너무 강했나요?”
트레이너가 성필의 둔근을 꾹 누르자, 성필은 절로 야릇한 신음이 흘러나와버렸다.
“아, 아니요. 아닙니다.”
성필은 부끄러웠다.
‘여자라고 생각하지 마. 이분은 프로로서 내 몸을 만지고 계신 거야. 그, 그래. 권강철 트레이너님이 처음 마사지해주셨을 때도 이랬잖아.’
그녀의 손길은 점점 위로 올라왔다.
종아리, 허벅지, 힙, 등, 어깨.
“뒤로 돌아 누워주세요.”
어깨, 목, 머리.
마사지를 받으면 받을수록 성필의 정신은 잘 벼린 칼처럼 날카로워졌다.
권강철 트레이너에게 마사지받을 때는 몸이 노곤해졌지만, 이번엔 반대였다.
‘나는 연애 세포 같은 건 다 죽어버렸어. 그렇잖아. 근처에 멋진 여성분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 유이 씨가 나한테 데이트 신청(아님)하셨을 때도 살짝 들떴을 뿐이었어. 세이코 씨…… 세이코 씨는 뭐…… 그랬고……. 또, 사장님처럼 아름답고 강인하고 동경할 만한 분한테도 몇 번밖에 흔들린 적 없어. 그래, 난 프로듀싱 머신이다. 이성에게 느끼는 설렘 따위, 내가 가는 길에 방해만 될 뿐…….’
마사지가 끝났다.
“회원님, 일어나시구요. 이쪽으로.”
그렇게 데드리프트 강의가 시작되었다.
먼저 트레이너가 시범을 보였다.
“자, 회원님.”
다음으로는 성필이 했다.
무게를 많이 드는 것보다 자세에 집중한 강의였다. 평소보다 훨씬 낮은 무게였지만, 반복 행동이 많다 보니 지치는 걸 피할 수는 없었다.
잠깐의 휴식.
성필은 멍때리면서 허공을 보았다.
“아으, 부끄럽네요.”
갑자기 트레이너가 그렇게 말했다.
성필은 영문을 몰라 그녀를 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당황했다.
“저거 보고 계시던 거 아닌가요?”
성필은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회원들이 무료함을 달랠 수 있도록 천장 곳곳에 설치된 스크린. 그중 하나에서 여성부 피트니스 대회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여러 명이 서 있는데, 자세히 보니 그중 한 명이 현재 성필을 지도하는 트레이너였다.
신체를 최대한 드러내도록 면적이 적은 비키니 차림이었다.
“아, 저거 보고 계시던 거 아니셨네요…….”
“저기 저분이 트레이너님이세요?”
“아, 네. 되게 옛날이네요.”
스크린에 나오는 모습은, 확실히 현재의 그녀보다 젊었다.
스크린의 그녀가 뒤로 돌아 둔부를 강조했다. 결이 보일 만큼 극한으로 단련된 근육이었다.
“지금은 안 하세요?”
“준비는 하는데, 옛날만큼은 안 되죠 솔직히. 젊은 게 깡패니…… 아, 젊을수록 퍼포먼스가 높으니까요.”
성필은 스크린을 집중해서 보았다.
그러자 트레이너가 손뼉을 쳤다.
“회원님, 이제 휴식 끝! 다시…….”
“멋지네요.”
“네?”
“노력한 게 보여요. 뭔가, 운동이란 건 결과가 눈에 보이니까요. 저렇게나 노력할 수 있단 게 정말 멋져요.”
“하하…… 다 옛날이죠 뭐.”
성필은 다시 바를 들었다.
“아뇨, 회원님! 약지가 여기 까슬까슬한 부분에요!”
그녀가 직접 성필의 손가락을 잡아서 위치를 옮겨주었다. 그녀와 닿은 성필이 움찔했다.
“네, 네. 다시 잡을게요.”
PT가 끝나고, 성필의 자세는 제대로 교정되었다. 둘은 카운터의 빈자리로 돌아와 마주했다.
“몇 세트 더 들어보시면 감이 확실히 잡히실 거예요.”
“넵, 감사합니다.”
“바디 프로필 찍으셨다고 하셨죠? 그럼 이젠 관리는 안 하시는 건가요?”
“어, 음…….”
성필이 고민하는 티를 내자, 트레이너가 기다렸다는 듯 치고 들어왔다.
“회원님 여기서 조금만 더 하시면 정말 아마추어 대회도 노려보실 수 있으실 거예요! 여기서 그만두는 건 너무 아깝잖아요, 그쵸? 고민되시면 10회만 더 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지금 하시면 제가 한 달에 한 번 쓸 수 있는 지인 할인으로 해드릴게요. 10회에 50만 원, 정말 싸죠?”
“네, 싸네요.”
“아, 그럼?”
성필이 결연하게 말했다.
“20회 하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회원님!”
성필은 그녀의 미소를 보자 가슴 한구석이 밝아지는 듯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나, 이 사람에게 호감이 있다!’
트레이너가 잘 부탁한단 듯 손을 내밀었다.
“트레이너 권소윤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어이어이 성필, 5년 동안 연애 안 하겠단 약속은 어디 간 거야?!
“그럼 일주일에 2회로 괜찮으실까요?”
“3회도 됩니다!”
성필, 눈에 뵈는 게 없어지다!
* * *
다음 날도 휴가였다.
성필은 바디 프로필을 찍고 나서 포기했던 자기관리 식단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고구마, 삶은 달걀, 사과.
물리디 물려서 앞으로 그 세 개는 먹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오늘은 전혀 물리지 않았다.
성필은 방의 한 벽면에 걸린 자신의 바디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았다. 모던한 액자에 담긴 근육질의 자신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자, 행복하게 운동하러 가볼까.’
즐겁게 식사를 마친 그는 나갈 채비를 마쳤다. 운동복이 든 메신저백을 메고 집을 나서려던 순간, 전화가 걸려 왔다.
‘하양이네?’
정확히 9시에 전화가 왔다.
이 시간쯤이면 성필이 일어났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어, 하양아.”
[안녕하세요 박 이사님. 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왜 그렇게 사무적으로 말하고 그래. 하양이 전화는 언제든지 되지.”
[아하하.]
장하양은 살짝 뜸을 들이곤 여느 때보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허리는 괜찮으세요?]
“결국 사장님이 그거 퍼뜨리셨구나. 내 자존심이 또 무너지네. 응, 거의 다 나았어.”
[거의 다…… 완전히는 아니고요?]
성필은 아직 하루분의 약이 남아 있었다.
완전히…… 는 아니겠지.
어제 운동도 평소보다 훨씬 조심했었으니.
“응, 아직 약 먹고 있어.”
[제가 혹시 병문안 가도 될까요?]
“뭐? 병문안?”
[그, 병문안은…… 그게…….]
장하양이 심호흡하는 소리가 전화를 넘어서까지 전해졌다.
[전에 있던 일, 정식으로 사과드리고 싶어서요. 박 이사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제가 견디기 힘들어서…….]
“……아, 그거. 하양아 난 괜찮아.”
[제가 안 괜찮아요.]
장하양의 어투는 단호했다.
[이사님, 정말 죄송해요. 저는 이사님이 어떤 심정으로 그런 약속을 하셨는지도 모르고. 농담이나 던지고. 저는 정말, 정말로, 그러면 안 됐는데…….]
성필은 쉽사리 그녀에게 돌려줄 답을 찾지 못했다. 그녀가 전화하기까지 얼마나 고민했으며, 또 얼마나 괴로워했겠는가.
성필 또한 죄책감이 들었다.
‘내가 그때 어른스럽게 대처를 잘 못 했구나. 하양이랑 더 이야기를 나눴어야 했는데.’
장하양은 매사에 진지한 아이다.
재미없는 농담을 자주 던지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아주 진지하고 깊이 고민한다.
‘나와의 관계를 소중하게 여겨주니까, 자그마한 오해도 남기고 싶지 않은 거겠지.’
그 마음은 고맙다.
그리고, 그렇게나 마음을 쓰게 만들었단 사실이 미안했다.
“네 마음은 알겠어. 근데 병문안은, 내 집에 올 필요까지는 없어. 집까지 찾아와서 사과할 정도로 큰일 아니야 정말로. 오히려 내가 미안하네.”
[사장님한테 허락은 받았어요.]
“뭐? 사장님한테 허락? 내 집에 오는 걸? 그걸 왜 사장님한테 여쭤?”
[전에 박 이사님 집에 블루레이 보러 갔을 때도, 박 이사님이 사장님께 허락받으셔서 저도…….]
“아아, 그게 그렇게 되는구나. 음, 그래도 하양아 이런 일로 오는 건 역시…….”
그때 성필의 집에 초인종이 울렸다.
뭐지?
“하양아 잠시만.”
성필은 현관에 서 있던 터라 바로 문을 열 수 있었다.
“이사님 안녕하세요!”
리카였다.
“허리를 다친 이사님한테 아타시(제)가……!”
성필은 즉시 장하양과의 통화를 음소거 모드로 만들었다.
“병 수발을 들려고 왔어요!”
“…….”
“마음껏 고마워하세요!”
“연락도 없이? 아니, 뭔데 이건.”
“‘이거’?! 그 말투는 너무하잖아요! 아타시(제)가 아팠을 때 이사님은 뭐 연락하고 오셨었나요!”
소녀연맹이 ‘아라베스크’를 준비할 때의 일이었다. 확실히, 그때의 성필은 회사 일도 내팽개치고 리카가 걱정되어 숙소를 찾았었다.
“마아(뭐어), 이해해요! 제 우정의 무게에 감동해서 할 말도 없으시겠죠! 자, 어서 말하세요! ‘밖이 추우니까 안으로 들어와’라구요!”
“…….”
성필은 가만히 리카를 보다가, 통화 음소거 모드를 해제했다.
”어어, 그으, 그럼 올래?’
[정말요? 가도 될까요?]
“응. 와도 될 거 같다.”
[네, 그럼 지금 바로……!]
“지금 바로는 말고. 저녁쯤 괜찮아?”
[네! 저녁에 갈게요!]
통화를 끊고, 성필은 다시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트레이너 권소윤이었다.
“네, 트레이너님.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 PT는 캔슬할게요. 1회 차감하셔도 됩…… 아뇨, 그러면 죄송해서. 트레이너님도 스케줄이 있으실…… 네, 네에, 감사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네, 트레이너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네엡.”
성필은 통화를 전부 마쳤다.
리카가 안절부절못하는 게 보였다.
“바쁘시면 미리 말했어야죠!”
“네가 맘대로 쳐들어왔잖아.”
“으우…… 그, 그럼 갈까요……?”
성필은 메신저백을 휙 던져버리고 쏜살처럼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대에 풀썩 점프하고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당겼다.
“간호해라!”
“하이잇(네에엡)!”
실버타운 메이트, 극적 상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