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00화 (400/760)

400화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됐을까.

석세스 엔터의 부대표, 매니지먼트 총괄, 늙은 남자 박성필은 과거를 되새김질했다.

그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대화였다. 평범하지 않은 건 성필의 기분뿐이었다.

보는 사람마다 놀랄 정도로 성필은 들떠 있었다.

“팀장님 무슨 일 있어요?”

“오, 석세스 엔터의 기둥, 솔로 댄스 가수의 희망, 우리 사랑하는 아름이!”

“진짜 무슨 일 있나 보네요. 뭔데요? 여자친구라도 생겼어요?”

신아름이 털털하게 웃으며 성필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성필은 그 장난을 또 좋다고 받았다.

“아잉 하지 마앙 아름아앙.”

“이런 걸 사내 게시판에 올려야 하는데. 그래서 뭔데요?”

“여자친구 생겼어.”

“아…… 그래요…… 얼마나 지났지.”

“2년인가. 나도 참 많이 참았지.”

“섹드립이에요?”

“하하, 항상 네 창의력에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구나. 그 창의력이 다른 곳에서 발휘되면 좋을 텐데.”

“누군데요.”

성필과 신아름은 자리를 옮겼다.

석세스 엔터의 지하였다. 지하는 연습생들의 공간으로 쓰이지만, 신인개발부의 인원이 자주 들락거리기에 직원 휴게실이 구비되어 있다.

둘은 빈 휴게실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아라 씨 기억나?”

“내가 아는 사람이에요?”

“너 이번에 뮤비 찍을 때 댄스팀.”

“아…… 안대 쓰고 춤추시던 분들?”

“응.”

신아름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댄스팀의 면면을 떠올려보았다. 그런데 짐작 가는 사람이 없었다.

“그중에 팀장님이랑 어울릴 만한 분이…… 아, 모르겠다. 기억 안 나요.”

“사람 얼굴 좀 외우라니까. 톱스타 됐다고 거만해진 거야?”

“사람 이름도 제대로 못 외워서 수첩에 써두고 다니는 팀장님한테 듣긴 싫거든요. 음, 아라 씨? 아라 씨, 아라 씨…….”

신아름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녀는 굳어선 물었다.

“그, 아라 씨……?”

“기억났어?”

“나랑 나이 비슷한…….”

성필이 허허 웃었다. 그는 부끄러운지 신아름의 시선을 피하다가, 깜짝 선물이라도 주는 양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짜잔!”

3시간 후.

성필은 신아름, 조아라와 삼자대면 상태에 빠졌다. 그는 경솔하게 연애 상대를 오픈했던 과거의 자신을 원망하고 있었다.

‘아니…… 나 연애하면 꼭 아름이한테 말해줬었잖아. 소개도 해주고…….’

성필 자신이 부족했던 것인지, 그의 연애는 오래 이어가질 못했었다.

신아름도 헤어진 성필을 달래며 항상 아쉽다고 말해주곤 했었다.

대체 왜일까.

‘나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왜 오래 가지를 못할까……. 다리를 붙잡고 이유를 물어도 이상한 이유만 대거나, 아예 말해주지도 않고…….’

어쩌면 자신은 매력이 없는 게 아닐까.

성필은 안 그래도 우울했는데, 더 울적해졌다.

“내가 뭐, 빨아먹어요?”

사람을 씹어 먹을 듯한 조아라의 어투에 성필은 우울에서 빠져나왔다.

조아라의 저런 모습은 애인인 성필도(사귄 지 얼마 안 됐음) 보지 못했다.

조아라는 신아름에게 쏘아붙이려다가, 고개를 젓곤 목소리를 훨씬 더 키웠다.

“톱스타는 죄다 너 같냐?”

“뭐?”

“사람 보자마자 그딴 식으로 말해?”

신아름은 헛웃음을 뱉었다.

“속이 너무 보이니까 그런다, 왜.”

“네가 뭔데?”

“팀장님 딸이다.”

조아라가 경악했다.

대체 몇 살 때 일을 저질렀으면 신아름만 한 딸이 있느냐는 눈빛이었다.

성필은 변명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차마 ‘아름이는 내 딸이 아니야!’라고 할 수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뭔…… 딸?”

조아라의 눈빛을 그대로 받던 신아름은, 살짝 부끄러웠는지 뺨을 붉히곤 말을 바꾸었다.

“딸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이다. 가족이라고. 근데, 가족한테 모기가 한 마리 붙은 걸 보고 가만히 넘길 수가 있어야지.”

“모기?”

“내 생각으로는, 12살 차이가 극복되려면 남자가 X나 잘생겼거나.”

성필은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그래, X나 잘생기진 않았지.

“진짜 인생을 구해준 정도의 인연이 있거나.”

인생을 구해준 정도의 인연…… 도 없지.

사실 성필과 조아라의 인연은 꽤 얇았다. 그리고 성필은 그 인연이 만들어진 순간도 기억에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옆에 인연이 만들어져 있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도 없이…….

“그거 아니면 없어. 다른 경우는 사람이 아니라 권력과 돈을 본 거지. 너, 팀장님한테 뭘 얻으려고?”

“……하.”

조아라는 자신의 단발을 양손을 써서 뒤로 휙 넘겼다. 열을 식히려고 부채질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빠.”

“으, 응…….”

조아라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성필에게 던졌다.

“그거 용돈으로 써요.”

“나 돈 많은…….”

“나 만날 때 오빠 돈 한 푼 쓰기만 해봐요.”

“너 얼마 전에 전세 얻었다고 돈 없댔…….”

조아라가 노려보자 성필은 고개를 숙였다. 지금은 여자친구의 기를 살려주어야 할 때다.

조아라는 다시 신아름을 보았다.

“됐냐?”

“하이고, 눈물 난다 눈물 나. 베갯머리에서 뭔 지랄을 떨 줄 알고, 그딴 연기 보고 내가 넘어가겠어?”

“아름아 그게 무슨 말버릇…….”

“팀장님도 똑같아! 젊은 여자가 들이댄다고 막 그렇게 따라가고 자존심도 없어요?!”

“나, 나, 나는…….”

엄밀히 말하면 피해자인데…….

“아니, 하, 미치겠네. 오빠 내가 이런 말 듣고 있어야 해? 자기가 딸인지 수양딸인지 하는 년이 나한테 욕 쓰고 개지랄을 떠는데 오빠는 보고만 있어?”

“어, 어어…….”

“팀장님 이년 말하는 거 들었어요? 이딴 년이랑 뒹굴고 살아요? 딱 봐도 배에 구렁이 수백 마리는 들어 있게 생겼는데? 그거 쾌락 그거 걍 다 한 때예요. 그냥 나이에 맞게 살…….”

성필은 생각하길 포기했다.

이곳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그래서 그저 눈을 감고 이 폭풍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팀장님 당장 헤어져요!”

지나가기만을 기다릴 수도 없게 됐다.

“네가 뭔데 헤어져라 마라야 이 썅……!”

잠시 후, 소란을 들은 직원들이 달려와 둘을 물리적으로 말려야만 했다. 그때까지도 성필은 가만히 눈을 감고 있기만 할 뿐이었다.

* * *

“팀장님 뭐 해요. 빨리 냉장고에 넣어요.”

“어?!”

“얼마나 딴생각을 깊이 하면 부르기만 해도 놀라고 그래요.”

“아, 아니. 할게.”

성필은 장 봐온 것들을 펜션 냉장고에 차곡차곡 담아 넣었다.

주로 고기와 음료, 군것질거리들이었다.

“어머니는?”

“방에 짐 풀고 계세요.”

“가서 어머니 도와드려.”

“엄마도 똑같이 말해서요.”

“아. 그럼 일회용품 좀 정리해줄래?”

“네.”

성필, 신아름, 어머니는 함께 한적한 펜션으로 여행 왔다.

깊은 산이라 펜션 주인의 차로 안내받아야 겨우 위치를 알 수 있었다.

들어올 때는 ‘귀찮다’고 생각했었지만, 펜션의 풍경을 보자 그런 생각이 쏙 들어갔었다.

성필은 정리를 마치고 거실의 통유리창을 통해 밖을 보았다.

설국(雪國)이었다.

산등성이까지 아담하게 쌓인 눈이 솜이불처럼 부드럽게 보였다. 성필은 유리창에 손바닥을 댔다. 차가운데, 풍경은 따스했다.

“바비큐는 힘들겠네.”

“비닐 천막 있잖아요. 아까 주인아저씨가 난로도 있댔고요.”

“그래도 추울 텐데. 어머니 생각도 해드려야지.”

“모처럼 대여했는데 즐겨야죠. 정 안 되겠으면 들어와서 먹구요.”

성필이 등을 돌리려던 순간, 겨울바람이 거세게 유리창을 때렸다. 놀라서 돌아보니 바람과 눈이 같이 몰아치고 있었다.

눈발이 거세지려나 싶었는데, 바람이 잦아들자 눈은 이전처럼 흔들흔들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밖에서 놀아도 되겠는걸.”

“그럼 여기 안에만 있게요? 나가서 사진도 찍고 재밌게 놀아야죠. 엄마 데리고 올게요!”

신아름은 신나서 2층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어머니는 신아름과 팔짱을 끼고 아래로 내려왔다. 그녀는 성필과 눈이 맞자, 처음 여행을 떠날 때처럼 미안하단 듯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성필은 쓴웃음을 지었다.

신아름의 어머니는 성필이 신아름과 ‘어울려준다’고 생각한다.

피가 이어지지 않은 남남이니, 성필이 신아름을 대하는 데는 어쩔 수 없이 배려가 들어 있으리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건 성필에 대한 신뢰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어쨌거나 미안한 건 미안한 것이라면서, 성필에게 부채감을 지니고 있었다.

“엄마 눈사람 만들래?”

“얘는. 나이가 몇인데 눈사람이야.”

“나 어릴 때 엄마랑 골목 나가서 자주 만들었잖아. 오랜만에 해보고 싶어.”

“나는 근처까지만 갈게.”

“모처럼 놀러 왔는데 더 멀리까지 가보자! 오면서 호수 예쁘댔잖아. 거기서 사진도 찍고 그래!”

어머니는 딸이 보채자 어쩔 수 없이 옷을 단단히 껴입고 밖으로 나왔다.

성필이 어머니의 곁에 붙었다.

“괜찮으세요?”

“네, 이 정도는…….”

신아름은 한쪽엔 성필, 다른 한쪽엔 어머니와 팔짱을 꼈다. 그리고 바람을 맞아 새빨간 뺨을 씰룩이며 힘차게 외쳤다.

“저기 산 끝까지 가요!”

20분 후.

세 사람은 펜션 안에 들어와 있었다.

“어머니, 여기 손난로예요. 쓰세요.”

“죄송합니다 팀장님…….”

“아녜요.”

산속의 겨울은 어머니에게 너무 혹독했다. 결국 얼마 가 보지도 못하고 돌아와야만 했다.

신아름은 어머니를 억지로 혹사시켰단 생각에 안절부절못했다. 그런 딸을 바라보며, 어머니는 인자하게 웃었다.

“우리 딸, 팀장님이랑 놀다 와.”

“엄마 아프잖아…….”

“아니야, 추워서 그래. 잠깐만 이럴 거야. 나가서 놀다 와. 엄마는 안에서 쉬다가 음식 좀 만들고 있을게.”

“그치만…….”

신아름은 어머니의 계속된 권유에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섰다. 성필은 그녀와 나란히 눈밭을 걸었다.

펜션 마당에 찍힌 발자국은 세 사람의 것이 유일했다. 처음 안내해줄 때 주인아저씨가 찍은 것을 제외하곤 말이다.

“팀장님, 눈사람 만들어주세요.”

“같이 만드는 게 아니라?”

“최대한 크게요.”

“최대한 크게…….”

“저 사랑하는 만큼.”

“그럼 평생을 줘도 모자란데?”

신아름이 신나서 웃었다.

성필은 눈사람의 몸을, 신아름은 눈사람의 머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둘은 나란히 걸으며 눈덩이를 굴렸다.

“아름아.”

“네.”

“연애나 결혼 나이 차는 어디까지 인정할 수 있어?”

“갑자기 뭐예요. 딱히 생각해 본 적 없는데요.”

“띠동갑까지 가면 확실히 이상한 거겠지?”

“아하핰!”

신아름은 웃었다. 하얀 입김이 피었다.

“만약 그게 되려면요. 나이 많은 쪽이 진짜 진짜 예쁘고 잘생겼거나, 아. 한 이사님 정도로 생겼거나. 인생을 구해준 정도가 아니면 사랑이 아니죠. 그 외엔 돈이나 뭐…… 권력? 그런 거 보고 달라붙은 거 아닐까요.”

전생에 들었던 말과 같았다.

“근데 난 딱히…….”

신아름은 무릎 반 높이까지 온 눈덩이를 장갑 낀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둘이 사랑하는 거면 이상하게는 안 봐요.”

“아…… 그렇구나.”

“말투가 왜 그래요.”

“아냐, 아무것도.”

“팀장님.”

“응.”

“연애는 어떻게 하는 걸까요?”

성필은 눈덩이 굴리기를 멈추었다.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라, 그는 숨을 헉헉 쉬어야만 했다.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겼어?”

“팀장님 은근 기뻐 보이네요.”

“곧 연애 금지 끝나잖아. 사랑은 좋은 거야. 넌 젊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나이 한 살 먹을 때마다 사람 한 명씩 바꿔서 연애해봤으면 좋겠어.”

“그런 사람이 있으면 인성적으로 문제 있는 거 아녜요? 어떻게 다 1년도 못 가요.”

“세간엔 그렇게 보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사랑의 추억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해. 해가 갈수록 사랑으로 느끼는 것도 다르니까.”

“그럼 팀장님은 몇 년을 손해 보고 있는 거예요?”

“참 안타깝지 나도…….”

성필은 다시 눈덩이를 굴리기 시작했다. 신아름이 같이 눈덩이를 굴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연애는 어떻게 하는 거냐니. 마음을 전하는 방법 같은 걸 묻는 거야?”

“아니요, 사랑 자체요.”

“사랑해본 적 없어?”

“에로스적인 사랑이면, 네. 없는 거 같아요.”

“아름이 단어 선택이 기가 막히네. 그럼 플라토닉적인 건 있고?”

“음, 팀장님?”

“하하.”

“하하, 뭐요.”

“하하하.”

“뭐야 진짜.”

성필은 눈덩이를 등으로 밀어야 했다. 벌써 크기가 성필의 허리에 닿을 만큼 커졌기 때문이다. 눈이란 게 이렇게나 무겁단 걸 처음 알았다.

“막 드라마 보면 반하는 장면 나오고 그러잖아요. 이해가 안 돼요.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거죠?”

“그거 말고 다른 게 있어?”

“그 사람을 다 알지도 못하잖아요.”

“아, 이해했어. 사람은 10인데, 3만 보고 좋아하는 걸 어떻게 사랑이냐고 하는 거지?”

“으음 좀 다른 거 같기도 하고.”

“10을 전부 사랑하면 가장 좋겠지. 근데 10까지 보려면 결혼하지 않고선 불가능해. 그리고 좋은 점만 보는 게 뭐가 나빠. 환상 속에 살면 좋은 거지.”

“저는…….”

신아름이 눈덩이 굴리는 것을 멈췄다.

“누가 저를 사랑한다고 하면, 기분이 나쁠 거 같아요.”

“왜?”

“저도 저를 전부 몰라요. 그런데 그 사람은 저를 사랑한다고 하잖아요. 너무, 너무…….”

“오만하다?”

신아름은 저 멀리 산을 쳐다보았다.

눈에 덮인 산은 하얗다.

그 안에는 갈색이며 누런색인 나무와 풀이 숨겨져 있을 것이었다. 신아름은 숨을 헐떡이면서 언제까지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새하얀 산의 아름다움을 생각하기보다, 눈으로 숨겨진 겨울의 황폐한 산속을 떠올렸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그 몰골이 드러날 터였다.

“‘네가 좋아’라는 건…… ‘현재의 네가 좋아’라는 거잖아요. ‘영원히 변하면 안 돼’라고 말하는 거 같아요. 그래서, 기분이 나쁘고, 무서울 거 같아요.”

“그럼 언제 어디서든, 어떤 모습의 너든 사랑해주는 사람을 찾으면 되잖아.”

“그런 사람이 어딨…….”

신아름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성필을 보았다. 성필은 끙끙 힘겹게, 자신의 허리 위 높이까지 불어난 눈덩이를 굴리고 있었다.

한겨울인데도 흐르는 땀이 보일 지경이다. 그의 주위로 입김만이 아니라 증발하는 땀이 희미하게 일렁였다.

신아름은 자신의 발밑에 놓인 눈사람의 머리를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굴리기 시작했다.

“팀장님 이제 됐어요.”

“어?”

“이제 됐다고요. 그 정도면 충분해요.”

“너 사랑하는 만큼 크게 해달라면서.”

“그것만 해도 만족해요.”

“이거 신기록이었는데, 아쉽네.”

신아름은 성필이 만든 몸통 위에 자신이 만든 눈덩이를 올렸다.

성필이 큭 웃었다.

“나만 힘들게 했잖아.”

눈사람의 머리가 몸통보다 훨씬 작았다.

“더 굴려서 올까요?”

“아니. 머리가 작아서 그런지, 이 눈사람은 비율이 좋네. 눈사람계의 아이돌로 만들어야겠다.”

“이젠 눈사람까지 프로듀싱해요? 박성필 그는 대체…….”

신아름은 주머니에서 당근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눈사람 머리의 중앙에 꽂았다.

둘은 나뭇가지와 돌로 눈사람에게 메이크업을 해주었다.

눈사람계의 아이돌이 탄생했다.

“아름아.”

“역시 너무 소두예요?”

“아니, 그거 말고. 아까 나이 차가 극복되려면 나이 많은 쪽이 진짜 진짜 잘생겼거나 큰 인연이 없고선 안 된댔잖아.”

“그쵸.”

“그 외엔 돈이나 권력 보고 붙은 거라고. 그럼 돈이나 권력으론 사랑이 안 된단 건데. 그건, 언젠가 사라질 수 있어서 그런 거야?”

“그런 맥락이죠.”

“그렇게 따지면 얼굴도 마찬가지 아니야? 한 이사님도 언젠가 얼굴에서 동양의 신비가 사라지실 텐데.”

어느 순간 둘 사이에서 ‘진짜 진짜 잘생김’의 기준이 한구인이 되었다.

신아름은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그보다 잘생긴 이들을 수도 없이 봤을 텐데도 말이다.

어쩌면 그녀는 사람의 얼굴을 그다지 자세히 기억하진 않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한구인만큼 오래 보아야 기억에 남는 것일까.

“오래 보면, 얼굴 생김새보다 흔적이 보여요. 언제까지나 처음 만났을 때랑 똑같이 보이는 거예요. 사랑하면 그렇지 않을까요?”

“이상하게 얼굴에만 점수가 후하네.”

“나도 팀장님 떠올리면 20대 때 얼굴밖에 안 생각나요. 지금도 별로 다르게 보이진 않고요.”

성필은 진심으로 기뻐서 웃었다.

“그건 흔적이 아니라 사실이거든? 나 피부 관리 얼마나 열심히 하는데. 피부과도 격주로 다녀.”

“진짜 돈 낭비다. 잘 보일 사람도 안 생기는데 그만해요 그거.”

“……그러게. 그, 근데 이미 패키지로 끊어놔서 몇 달은 더 다녀야 해…….”

신아름은 피식 웃더니 갑자기 눈사람을 껴안았다.

“사진 찍어줄까?”

“으, 악!”

신아름은 눈사람에게서 떨어져 몸을 달달 떨었다.

“차가워요!”

“당연하지, 눈사람인데.”

“조아라 걔가 괜한 말 해서…….”

“아라가 뭐랬는데?”

“뭔 인형 하나 안고 기분이 좋다느니 그랬어요. 뭘 안는단 게 이렇게 기분 좋은 건 줄 처음 알았다면서요. 호들갑이란 호들갑은 다 떨고, 진짜 눈꼴 시려서 못 보겠어요.”

“아, 그거 혹시 야자수 프렌즈야?”

“맞아요. 팀장님이 어떻게 알아요?”

“아라가 야자수 프렌즈 사랑하는 거 유명하잖아. 뭐, 기분 좋겠지…….”

조아라가 연습생이던 시절, 그녀에게 사과의 의미로 야자수 프렌즈 굿즈들을 선물했던 적이 있었다.

굿즈를 확인한 조아라는 정말 나사 빠진 사람처럼 좋아했었다.

“아…….”

신아름은 자신의 패딩에 묻은 눈을 바라보았다. 장갑에도 눈이 잔뜩 묻어 있다. 축축해서 추웠다.

“슬슬 들어갈까?”

“네. 그래야겠어요. 춥네.”

“빨리 가자.”

성필이 등을 돌렸다.

“팀장님.”

신아름이 성필을 불렀다. 성필이 돌아보자, 신아름이 팔을 활짝 펼치고 다가오고 있었다.

추워서 몸이 굳었는지 걸음이 느렸다.

성필은 피하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었다.

신아름이 성필을, 아까 눈사람을 안은 것처럼 꼭 안았다.

“진짜네.”

신아름이 성필을 올려다보면서 미소 지었다. 그리고 더 세게 안았다.

“기분 좋아요.”

“……그래?”

“따뜻하고, 아, 진짜 뭐가 있네.”

그렇게 신아름은 한동안 성필을 포옹했다.

“팀장님, 영원히 내 옆에 있을 거죠?”

“영원히는 못 있지.”

“이럴 땐 빈말로라도 해줘야죠.”

“거짓말은 하기 싫으니까.”

“거짓말인 거 알아도, 듣고 싶은 말이 있는 거예요. 해줘요.”

“네가 내치지만 않으면, 영원히 있을게.”

“꼭 한두 마디 더 붙인다니까.”

“영원히 있을게.”

“결혼도 안 할 거죠?”

“좀 봐주라…….”

신아름은 웃으면서 그에게서 떨어졌다.

둘은 서로가 찍은 발자국을 되밟으며 숙소로 돌아갔다.

“팀장님.”

“응.”

“알라뷰.”

“미투.”

* * *

“감사합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장하양은 진소유의 선물을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은 진소유를 향해 흔들었다.

“조금 더 놀다 가지.”

“아니에요. 이미 언니한테 폐를 많이 끼친 거 같아서요.”

마침내 장하양이 KS 엔터로 왔다.

진소유가 장하양에게 케이어스의 앨범과 굿즈를 주겠다고 약속한 지 거의 2개월이 지나서였다.

“전혀 폐 아니야.”

“하지만, 과자랑 차도 얻어먹고…….”

“괜찮다니까.”

“그래도 아닌 거 같아서…….”

“애가 어떻게 이렇게 가드가 높을까.”

“정말 죄송합니다…….”

“너 전혀 죄송한 표정이 아닌 거 아니?”

“면목이 없습니다…….”

“너 연습생 되기 전에 연기했던 애 맞아?”

“이만 가게 해주세요…….”

“이젠 본심도 안 숨기네.”

진소유는 거듭된 5연속 거절에도 얼굴에 그늘 한 점 드리우지 않았다. 그녀는 대신 타깃을 바꾸었다.

“박 이사님.”

장하양과 함께 KS 엔터로 찾아온 성필이었다.

가로 엔터의 매니저들을 업무 외의 일로 운용하여 맨파워 손실을 초래할 순 없다면서, 메인 프로듀서이자 이사인 성필이 장하양의 운전기사가 된 것이다.

“제가 직접 대접해 드리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에리카랑 정 이사님한테 선수를 뺏겼어요.”

“아닙니다. 제 이름을 기억해주시는 것만으로도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제가 이름 한 번 잊어버린 걸로 몇 번이나 우려먹으시게요?”

진소유가 손을 내밀었다.

“항상 ‘유스’로 있어 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인민’입니다.”

“흐음…….”

진소유는 성필이 손에 든 종이백을 보았다. 케이어스 멤버들의 사인본 앨범이 들어 있었다.

성필이 그것을 허리 뒤로 숨겼다.

“소녀연맹 앨범이 더 많습니다.”

“잡덕이시네요.”

“멀티―팬덤이라고 불러주십쇼. 본진은 소녀연맹입니다.”

“‘유스’…… 아니세요?”

“저를 흔들지 마세요!”

진소유는 드물게도 쾌활한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성필이 숨긴 손을 억지로 붙잡고 악수했다.

“앞으로도 ‘유스’로 있어 주셔야 해요. 아시겠죠?”

진소유는 그리 말하며 장하양을 흘끗 보았다. 만약 사람의 기운이 시각적으로 형상화되는 세상이라면, 장하양의 뒤에는 산업혁명 시기 런던처럼 검은 연기로 새까맣게 뒤덮여 있었을 것이다.

진소유는 만족하곤 두 사람을 떠나보냈다.

“언니 보셔서 좋으시겠어요.”

조수석에 타자마자 장하양이 말했다.

“아니야. 좋긴 뭘.”

“친해 보이시던데요. 일본에서도 따로 밥까지 드시고.”

“오늘은 에리카 씨 부탁 때문에 온 거야. 사심 채우려고 온 거 절대 아니…… 사심 채우려는 게 목적은 아니었어. 자, 그럼 갈까.”

“네에 네에.”

장하양은 가는 길 내내 뾰로통했다. 성필은 그녀의 모습이 연기란 사실을 알았다.

요즘 들어 소녀연맹 멤버들이 케이어스를 들먹이며 성필을 놀리는 빈도가 늘었다.

옛날과 다른 점은, 그녀들이 진실로 놀리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단 것이었다. 예전처럼 열등감에서 기인한 게 아니었다.

“저희 라이벌인데도 엄청 친근하셨네요.”

“무표정일 순 없잖아.”

“입이 귀에 걸리셨던데.”

“아니 뭐…… 팬…… 이니까.”

“또 집에 케이어스 포스터 붙여놓으신 거 아니에요?”

“네가 떼래서 다 뗐잖아.”

“앨범은 계속 사시잖아요. 포스터도 올 텐데, 그건 어떻게 하세요?”

“지관통에 보관해두지.”

“박성필 34세, 케이어스 열성팬.”

“하하, 틀린 말은 아니네.”

“연애 안 하신단 것도 케이어스가 있어서 그러신 거 아니에요?”

“에이, 그건 아니지.”

“‘케이어스만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 없어!’ 같은 느낌이죠? 사랑이 대단하세요.”

“하하…….”

“케이어스분들이 부러워요. 본인들을 사랑해서 연애까지 안 하는 팬이 있다뇨.”

“하…….”

장하양은 싱글싱글 웃다가 드디어 본론을 꺼내려 했다.

성필은 케이어스에 대한 팬심을 자발적으로든 타의로든 꺼내고 나면, 소녀연맹 멤버들의 부탁에 물러지는 경향이 있다.

장하양은 이 순간을 기다렸다. 그랬기에 그의 운전기사 역도 흔쾌히 수락한 것이었다.

“저희 여행…….”

“하양아.”

성필이 그녀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장난기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목소리였다.

“나 연애 안 하겠다고 한 거, 그걸로 놀리는 건 그만둬주면 안 될까. 5년 동안 연애 안 하겠단 거, 말이 쉽지 직접 하려면 어렵잖아. 결심하기까지 얼마나 고민했을지 생각해줘. 너희를 위해 꺼낸 거잖아. 나도 힘들단 걸 조금은…… 생각할 수 있으면, 그걸로 놀리진 말아야지. 집에 돌아가도 반겨줄 사람,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거야. 그렇게 계속 사는 거야. 나도 외로워. 그걸 아이돌 좋아하면서 채우는 게 그렇게나…… 그렇게나 안 좋은 거야?”

장하양은 웃는 표정 그대로 얼굴이 굳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성필이 말을 마쳤을 때, 언어가 아닌 소리밖에 낼 수 없었다.

“아?”

그녀의 등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성필은 감정을 삭이는 듯 고개를 숙이면서 목소리를 바닥 끝까지 내리깔았다.

“나를 좀 이해해주면 안 될까…….”

장하양은 직감했다.

성필이 화났다.

‘내, 내가 화나게…….’

자신이 성필을 화나게 만들었다.

처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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