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99화 (399/760)

399화

케이어스 김민주는 욕조에 물이 차기를 기다렸다.

수위가 높아지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젖은 몸이 점점 떨려왔다.

김민주는 당장 버피 테스트 30회를 완료했다. 몸도 따뜻해졌고, 욕조에 물도 다 찼다.

따뜻한 물에 어깨까지 몸을 담그니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운동 때문에 생긴 근육통이 전부 씻겨 내려가는 것 같다.

“…….”

그녀는 아무런 생각 없이 충동적으로 머리끝까지 물속에 묻었다.

눈을 감고 물의 온기만을 느끼자, 그녀의 의식은 멀고 먼 과거까지 흘러 들어갔다.

현재는 매니지먼트 1팀장이 된 이에게 캐스팅 제안을 받아 연습생이 되었을 때였다.

새파란 신입이었던 그녀는 주간 평가 때 KS 엔터 신인개발부 직원들 앞에서 댄스 퍼포먼스를 선보였었다.

‘잠깐.’

어느 직원이 노래를 멈추고 김민주를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근엄했는데, 이유가 있었다.

주간 평가임에도 정호환이 참석했었기 때문이다. 본인의 유능함을 어필할 생각인지, 여느 때보다 연습생을 지적하는 타이밍이 빨랐다.

‘왜 몸을 그렇게 크게 쓰지? 배운 대로 하지 않고.’

갓 연습생이 된 김민주는 주눅 들지 않고 답했다.

‘어렸을 때 사교댄스 배웠어요. 왈츠였는데, 거기 쌤이 스윙을 크게 주면 크게 줄수록 춤이 예뻐진댔어요. 실제로 제가 보기에도 그랬고요.’

‘아니…… 방송 안무는 사교댄스랑 달라.’

‘뭐가요?’

‘뭐?’

‘뭐가 다른데요?’

그 되바라진 답은 신인개발부 직원들을 언짢게 만들기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들은 김민주의 잘못을 하나하나 지적하기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을 알았다.

‘그래.’

아무런 말도 없이 스킵하는 것이다. 더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김민주는 꾸벅 인사하고 퇴장했다.

‘국대로 뽑힐 수도 있었다지.’

‘아직도 여기가 운동장인 줄 아나 봐요.’

‘존심이 덜 꺾였네.’

‘버릇이 없어.’

인성은 데뷔조 선발에서도 중요한 부분이다.

오랫동안 신인개발부에 몸담고 있던 이들은, 인성이 고쳐지지 않는 부분이란 것을 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어쩌면, 김민주는 그날로부터 데뷔조가 될 가능성이 0이 됐을 수도 있었다.

그때.

‘잠깐만, 김민주…… 민주야.’

정호환이 김민주를 불렀다.

연습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구석. 그곳으로 가던 김민주가 다시 중앙으로 돌아왔다.

여기저기서 당황한 기색이 퍼졌다.

신인개발부 직원들은 물론 연습생들마저도.

‘이사님이 부르셨어?’

‘왜지……?’

정호환은 월말 평가엔 빠짐없이 참석한다. 하지만 그는 말이 없기로 유명했다.

한마디 부탁해도 무표정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는 단지 볼 뿐이었다.

그런 정호환이 김민주를 불렀다.

‘네.’

‘운동신경이 굉장히 좋구나. 근력과 유연성도, 센스도 있어.’

‘멀리뛰기 했었어요.’

‘그렇구나.’

정호환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그는 코를 긁적이곤 담백하게 말했다.

‘넌 아마 뭘 해도 잘했을 거다. 몸을 쓰는 거라면 뭘 도전했어도 세계급으로 놀았을 거야. 아이돌 연습생으로 진로를 정한 이유라도 있니?’

‘딱히요. 멀리뛰기 그만두려던 때 캐스팅받아서, 그냥 도전했어요.’

그야말로 최악의 답이다.

‘아이돌이 평생의 꿈이었습니다!’라고 부르짖어도 모자랄 판국이다. 그런데 ‘그냥 도전했어요’라니?

김민주를 아니꼽게 보았던 신인개발부 직원들조차 그녀를 안타깝게 여길 정도의 참사였다.

정호환 이사에게 밉보일 테니, 그녀는 아무리 노력해도 데뷔조에 포함되지 못 하리라.

그녀의 날개는 여기서 꺾였…….

‘그래, 고맙다.’

정호환의 말은 그게 끝이었다. 그는 손을 저어 김민주가 다시 대기석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날 김민주는 정호환이 했던 ‘고맙다’의 의미를 계속 곱씹었다.

아마 ‘어디서든 성공할 수 있었을 텐데, 그만한 재능이 있는데, 아이돌을 목표로 해줘서 고맙다’는 뜻일 것이다.

‘…….’

정호환의 한마디는 김민주의 가슴에 큰 파문을 만들었다.

그렇다. 김민주는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가족에게 인정받지 못했었다. 무릇 가족이라면, 딸의 도전에 한 번쯤은 ‘응원한다’고 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정호환의 ‘고맙다’는, 김민주가 바라왔던 무조건적인 믿음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그녀에게 주지 않았던 것이었다.

“후우.”

김민주는 욕조의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급하게 숨을 쉬었다.

산소를 갈구하던 폐가 기쁨에 소리쳤다. 그녀의 몸 구석구석 호흡의 행복이 퍼져나간다.

이 행복은, 과거 정호환이 해주었던 ‘고맙다’는 말과 비슷했다. 당연하게 얻어야만 했던 것을 비로소 얻게 된 자의 행복 말이다.

‘고작 말 한마디에 내 인생이 결정되었어.’

시작은 가벼웠지만, 과정은 무거웠다.

김민주는 욕조 밖으로 나와 거울 앞에 섰다.

미(美)를 위해 극한으로 단련된 몸이 보였다.

김민주는 아이돌이 되기 위해, 아이돌로 있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해왔다.

그녀는 과자를, 한낮의 산책을, 자기 전 침대 위에서의 독서를, 친구와의 잡담을, 생일의 조각 케이크를, 평범한 인간관계를, 무료한 여유를, 많은 것을 버리고 여기까지 올라왔다.

괴로운 나날이었다.

쉬고 싶은 생각을 많이 했다.

지금조차 그러했다.

알람이 울렸다.

목욕을 끝낼 시간이다.

끝낸 후엔 컨디션 조절을 위해 딴짓하지 않고 자야만 했다.

‘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김민주는 그 생각을 능숙하게 머리 안쪽에 구겨 넣었다.

김민주는 샤워 가운을 두르고 샤워실을 나섰다. 샤워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진소유는 더는 못 참겠단 듯 빠르게 샤워실로 들어갔다.

김민주는 머리를 말리고 마스크팩을 얼굴에 붙인 후 침대에 고요히 누웠다.

‘내일도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이 삶을 이어 나가야 한다.

괴롭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다.

김민주는 평행세계란 것을 상상해본다. 그곳엔 메달리스트 김민주가 한 트럭만큼 있을 것이다. 어디서든 성공한 김민주가 산처럼 쌓여 있을 것이다.

그 모든 미래를 버리고 아이돌이 됐다.

미안해서라도 쉴 수 없다.

알람이 울렸다.

김민주는 마스크팩을 벗고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침대로 돌아와 고요히 누웠다.

‘오늘도 나는 한 계단 더 올라갔어.’

강철처럼 벼림을 반복하는 일상, 높이 올라가는 나날이 김민주의 행복이다.

‘신아름…….’

눈꺼풀이 보여주는 어둠을 배경으로 신아름이 떠올랐다. 사람을 노려보는 듯한 날카로운 고양이상의 여자다.

‘너도 나처럼 빈틈없는 나날을 보내겠지.’

KS 엔터 설립 이래 최고의 천재라고 불리는 김민주. 그녀는 다종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회사 내에서도 적수를 찾기 힘든 재능을 보인다.

백척간두에 선 그녀는 외롭다.

다들 그녀를 별종 보는 듯하여서,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

하지만 김민주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나처럼 빈틈없는 나날을 보내왔겠지.’

김민주는 자신과 비슷한 인간이 세상에 또 존재한다는 사실에 위로받았다.

그리고 잠에 빠져들었다.

밤 9시 45분이었다.

* * *

밤 9시 45분, 신아름은 칼로리가 족히 500은 될 법한 초콜릿 케이크를 해치웠다.

“아 씨, 먹지 말걸. 괜히 속만 더부룩하네.”

“아름이 진짜 나빠!”

곁에 있는 리카가 징징거렸다.

리카가 한 입만 달라고 해도 절대 주지 않았던 신아름이었다.

“우리 사이가 겨우 그거밖에 안 돼?! 내가 이렇게나 애원했는데! 무릎 꿇고 머리도 박았는데에!”

“그러게.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줄걸.”

“그 말이 더 상처받아!”

리카는 엉엉 우는 시늉을 하면서 조아라에게 안기러 갔다.

“냉장고에 하나 더 있어. 그거 먹어.”

“아름이 천사!”

리카는 냉장고에서 케이크를 꺼내 신줏단지라도 된 것처럼 머리에 이고 호다닥 침실로 달려갔다.

홀로 거실에 남은 신아름은 의자를 앞뒤로 까딱이면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냈다.

‘하나도 행복하지 않네. 활동기엔 그렇게나 먹고 싶었던 건데.’

뭐랄까, 요즘 신아름은 쾌락에 절어 있었다.

정산과 휴가도 받았겠다, 그녀는 정말로 욕망에 충실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먹고 싶은 건 마음껏 먹었다.

자고 싶을 때 마음껏 잤다.

놀고 싶을 때 마음껏 놀랐다.

그런데도 가슴이 공허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기분이다. 심지어 밑이 심하게 빠져 있어서, 물을 동이째 들이부어도 조금도 차 있는 시간이 없는 기분이다.

신아름은 케이크 박스를 버리고 방으로 돌아갔다. 조아라와 리카가 재잘재잘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야 신아름 이거 봐라.”

조아라가 오늘 배송된 야자수 프렌즈 인형을 보여주었다. 크기가 거의 조아라의 상체만 했다.

그녀가 인형을 양팔로 꾹 안았다.

“흐아…… 미쳤어 이거…….”

“아라쨩 카와이(귀여워)!”

“뭐가 미쳤어. 네가 미쳤다고? 그건 아는데.”

“아니 이거 진짜 신기하다고. 뭔가, 뭔가를…….”

조아라는 어찌나 흥분했는지 말까지 더듬었다.

“뭔가를 안는단 게 이렇게 기분 좋은 건 줄 처음 알았어…….”

신아름의 표정이 경멸로 물들었다.

“사람이 제 나이 때 연애를 못 하면 망가진다더니 진짜인가 보네. 하다 하다 인형 안고 대리만족하는 애는 처음 본다 진짜…….”

“너도 해봐.”

조아라가 인형을 신아름에게 던졌다. 신아름이 날아오는 인형을 손바닥으로 퍽 쳐냈다.

단무지를 모티프로 한 야자수 프렌즈 인형이 바닥에 꼴사납게 뒹굴었다.

“단무(야자수 프렌즈 캐릭터 이름)야아아아아!”

“그렇게 안는 게 좋으면 리카나 안아.”

“얘는 딱딱하잖아!”

“여자애한테 딱딱하다는 표현은 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리카는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더니, 아까 했던 말을 살짝 바꿔서 반복했다.

“여자 어른한테 딱딱하다는 표현은 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귀여운 애한테 왜 그러냐아…….”

“에, 아타시(나)?”

조아라는 리카를 무시하고 구석에 널브러진 단무를 주워 품에 안았다.

리카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마아(뭐어), 인형은 귀여우니까!”

“앞으로 얘랑 잘 거니까 리카 넌 네 침대로 가서 자.”

“그거 태워버릴 거야아아아아!”

조아라는 단무를 안고 아예 뽀뽀까지 해댔다. 신아름은 진심으로 그런 조아라의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다.

평소에 온갖 센 척은 다 하고 다니면서, 왜 인형한테는 저러지?

아니, 사람이 바뀐 걸까?

22살이 되도록 남자 손 한 번 못 잡아(성필, 한구인, 댄스 파트너들 제외)보더니 맛이 가버렸나?

“이건 진짜 큰일이다. 너 연애 금지 풀리자마자 바로 남자 만나. 더 그대로 있다간 돌아버리는 거 아냐?”

“네 걱정이나 해. 남자 못 만나서 돌아버린 건 내가 아니라 너 아니냐? 히스테리란 히스테리는 다 부리는 년이.”

“내가 뭐…….”

“키스도 해본 적 없으면서.”

신아름의 말문이 턱 막혔다.

불현듯 야유회 때의 일이 생각난다.

신아름은 ‘21살 동안 연애 한 번 못 해봤대!’라면서 놀리는 민경섭의 명치를 주먹으로 가격했었다.

장난이었지만, 신아름도 예상치 못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확실히, 22살 먹도록 키스 경험도 없단 건 신아름의 역린이었다.

아니, 20살 이상 모든 이의 역린이었다.

“제 나이 때 연애 못 해서 망가진 건 너잖아.”

조아라가 승리를 예감하여 씩 미소 지었다.

리카는 둘 사이에 껴서 신아름에게 받은 케이크를 팝콘처럼 포크로 와그작와그작 먹었다.

신아름은 갑자기 허허 웃더니 말했다.

“딱히, 필요 없는데.”

“‘뜨악희 피류읍는드에’.”

“남자 만나고 싶단 생각 해본 적도 없고.”

“‘느암자 믄느그 스픈 승극 해브은 즉도 읍고’.”

“지금은 일에 집중하고 싶고, 또…… 난 가족만 있으면 돼.”

“……가족?”

조아라가 신아름 성대모사를 멈추고 반문했다.

“그러고 보니 너 이틀 뒤에 아저씨랑 너네 어머니랑 여행 간댔지.”

“그치. 난 걍 가족들 챙기고 사는 게 행복해. 어차피 남남한테 왜 사랑 주고 마음 주냐?”

“아저씨도 나중에 다른 사람이랑 결혼할 건데.”

“응 절대 아니야 팀장님 영원히 결혼 못 해. 영원히 나랑 엄마랑 살아.”

“이사님 불쌍해…….”

“네가 막는다고 사람 마음 어떻게 막아져.”

“응 내가 막아 팀장님이랑 연애하는 인간들 내가 죄다 떨어뜨릴 거야 영원히 나한테서 못 떨어져.”

“아저씬 전생에 뭔 죄를 졌길래 이런 애랑 엮였냐.”

“그럼 박 이사님 평생 독신이야? 히도이(너무해)!”

“어차피 결혼은 자식 얻으려고 하는 거 아냐? 자식 생겼는데 결혼 왜 함?”

갑자기 방 안에 정적이 일었다.

그러곤 다 같이 웃기 시작했다.

신아름의 아무 말 대잔치는 기어코 모두를 웃겨버렸다.

조아라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웃어댔다.

“너, 너어…… 뭐 아저씨 애인한테 돈 싸대기 날리면서 헤어지라고 하게? 미치겠다 진짜아…….”

“오, 그거 괜찮은데? 진짜 해볼까? 아, 내가 팀장님 전 애인한테 그거 못해본 게 한이다.”

“아타시(나) 그분 직접 봤었는데 엄청 기 세 보였어! 아름이가 졌을 거야!”

웃음은 천천히 잦아들었다.

갑자기 조아라는 힘이 빠져서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단무 인형을 껴안고 뒹굴었다.

“이제 휴가도 2주 조금 더 남았네.”

“아라쨩, 아름아 내일 아타시(나)랑 놀러 갈까?”

“싫어.”

“단칼에?! 아라쨩 뭐야! 내일 뭐 하려는 거야!”

“회사 가서 춤이나 좀 추게.”

“그럼 춤추고 밥 먹어!”

“그래, 뭐.”

“얏타(해냈다)! 아름이는?”

“나도 갈게. 조아라, 나랑 오랜만에 듀오 댄스 연습해볼래?”

“그럼 리카가 질투하는데.”

“괜찮아! 가끔은 빌려줄 수도 있어!”

“내가 무슨 물건이냐…….”

* * *

조아라와 신아름이 휴게실에서 점심 식사를 한단 소식이 성필의 귀로 들어왔다.

마침 식사를 마친 참이라, 성필은 휴가를 알차게 보내는 멤버들의 상태도 파악할 겸 휴게실을 찾았다.

들어오자마자 강렬한 떡볶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성필의 등장과 동시에 바쁘게 로제 떡볶이를 흡입하던 조아라와 신아름이 뚝 멈춰 섰다.

“…….”

성필은 흘끗 테이블 위를 보았다.

박스의 수로 보건대, 튀김과 순대는 기본이요 플러스 알파까지 아주 꽉꽉 채워서 주문한 모양이다.

“어, 먹어 먹어. 휴가잖아. 신경 쓰지 마. 그냥 얼굴이나 보려고 왔어.”

“…….”

“…….”

조아라와 신아름은 전혀 죄책감 느낄 이유가 없지만, 성필의 등장만으로도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거의 음식을 해치운 마당이라 그만둘 수도 없어서, 둘은 테이블 위의 음식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신아름의 옆, 같은 소파에서 묵묵히 있던 성필이 입을 열었다.

“너희들 휴가 잘 보내…….”

갑자기 성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몸무게 몇이야?”

“바로 물어요? 실례예요 실례. 아저씨는 기본 사회생활 예의도 몰라요? 사람한테 몸무게를 묻는 건…….”

“조아라 얘 무서워서 휴가 시작되고 한 번도 안 재봤어요.”

“너도 안 쟀잖아!”

“그렇군, 그랬어…….”

성필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뭐, 괜찮아 괜찮아. 휴가잖아. 마음껏 놀고먹기도 해야지.”

성필은 대수롭지 않단 듯 하하 웃었다.

“그래서…….”

그리고 다시 표정이 진지해졌다.

“몸무게 재볼래?”

“내가 왜요?”

“여기 체중계 있어요.”

휴게실 다른 자리에서 조용히 커피를 음미하던 매니저 안이상이 테이블 아래에 있는 체중계를 가리켰다.

옆에 앉은 매니저 김수희가 의아한 듯 물었다.

“이게 왜 여깄어?”

“얼마 전에 남자 연습생들이 여기 먹을 거 있나 들락거리더라고. 그 얘기 준성 씨한테 하니까 동기부여 겸 가져다 두셨어. 유혹 올 때마다 체중계에 올라가 보라고.”

신준성은 신인개발팀의 직원이었다.

신아름과 조아라는 연습생 시절이 떠오르는 이야기를 듣자, 그날의 힘겨움이 떠올라 기분이 울적해졌다.

“그렇대.”

성필이 체중계 쪽으로 고개를 까닥했다.

“안 해요. 남들 앞에서 몸무게 공개하라고요?”

“난 아는데?”

“나도.”

조아라가 두 매니저를 째려보았다.

매니저들은 감히 가로 엔터의 기둥에 대항하지 못하고 딴청을 피웠다.

“아저씨, 이렇게 남들 앞에서 압박 주는 거 인권침해예요.”

“그렇대요, 여러분.”

“하이잇(네엡)!”

매니저 안이상과 김수희가 헐레벌떡 휴게실을 나갔다.

“됐지?”

“와, 새삼스레 아저씨가 높은 사람인 거 알겠네. 그래도 안 해요.”

“어쩔 수 없지…… 휴가니까…….”

“내 배 보지 마요.”

“이해해…….”

“거기서 눈 더 내리면 한의사님한테 징계 건의서 받아올 거예요.”

“아 걍 한번 재면 되지 왤케 튕겨.”

신아름은 별거 아니란 듯 체중계를 끌고 와 그 앞에 섰다. 그녀는 신발을 벗고 체중계에 올랐…….

“잠만.”

신아름은 양말을 벗었다. 그리고 올랐…….

“잠만요.”

신아름은 귀찌를 빼고 스웨터까지 벗었다.

그리고 올랐…….

“진짜 마지막.”

신아름은 주머니에 들어 있던 지갑과 핸드폰까지 빼놓고 체중계에 올랐다.

성필이 조마조마 체중계의 눈금을 보았다.

“……휴우.”

“겨우 3kg 쪘네. 옷 다 벗으면 2kg? 봤죠 팀장님? 전 휴가 때도 프로페셔널하게 관리한다고요.”

신아름은 해냈단 듯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리고 성필과 기쁨의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것을 보자 조아라도 용기가 생겼다.

‘쟤는 나보다 군것질도 더 많이 했잖아. 그럼 내가 덜 쪘겠네?’

좋아.

“나도 할게요.”

“묘하게 자신 있는 표정이 열받네.”

조아라는 콧방귀를 뀌면서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당당히 올라섰…….

“잠만.”

조아라는 양말은 물론 패딩과 후드, 바지까지 벗어버렸다.

“너 뭐 하는 거야 왜 바지를 벗어?!”

성필이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안에 트레이닝 레깅스 입었어요.”

“얘 숙소에선 내복 입고 있어요.”

“아 그건 왜 말하는데!”

한겨울 휴게실.

나시와 레깅스 차림이 된 조아라가 체중계에 올랐다. 그녀는 살짝 떨렸으나, 신아름의 선례도 있으니 두려움 없이 체중계에 올랐다.

눈금이 훌쩍 오른쪽으로 뛰었다.

“…….”

“…….”

“…….”

3인의 침묵.

성필이 겸연쩍은 듯 시선을 피하고, 아까보다 훨씬 쾌활해진 투로 말했다.

“휴가잖아!”

“…….”

“뭐, 뭐어…… 7kg 정도면 금방 뺄 수 있어. 앨범 활동기까진 멀었으니까 천천히 빼자.”

“…….”

“그으, 너희 헬스장에 천국의 계단 그거 하루에 30분, 40분 정도 매일 하면 돼. 별거 아니야.”

“…….”

“어쩐지 우리 아라 요즘 건강미가 막 넘친다고 했어! 이야 우리나라가 아이돌 몸매에 조금 더 관용적인 사회가 되면 우리 아라 인기가 하늘처럼 치솟을……!”

조아라가 성필의 어깨를 팍팍 때렸다. 성필은 공벌레처럼 몸을 말고 그녀의 공격을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신아름은 믿기지 않는단 듯 아직도 눈금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있었다.

“술이 살이 많이 찐단 게 진짜였구나. 이젠 입에도 안 대야겠다.”

“우리 아라가 아니, 아라가 숙소에서 술을 자주 마셔?”

“이삼일에 한 번씩? 자기 전에 캔맥주 마셔요.”

“이삼일에 한 번씩이면 크게 문제는 안 될…….”

“통통한 걸로 네 캔씩요.”

“아라 너 미쳤어?!”

조아라는 쑥스럽단 태도로 실실 웃더니, 엄지를 치켜세웠다.

“휴가니까요!”

“프로듀서 재량으로 소녀연맹 멤버 조아라의 휴가는 오늘부로 종료다.”

“맘대로 하셔요.”

“진짠데? 당장 운동하러 가.”

“야 신아름 너 때문이잖아!”

“뭐래. 지가 올라가 놓고선.”

조아라와 신아름이 투닥거렸다. 그러던 도중, 조아라는 멈칫하면서 테이블 위의 물티슈를 가져왔다. 그리고 신아름의 입가를 닦았다.

신아름이 깜짝 놀라 조아라의 손을 쳐냈다.

“너 뭐 하냐?”

“입에 떡볶이 양념 묻었어.”

“그럼 말을 하지 네가 왜 닦아!”

“얘는 호의를 베풀어줘도 뭐라고 하네.”

“팀장님 요즘 얘 진짜 이상해요. 자기가 제 엄마라도 된 줄 알아요. 막 언니들처럼 챙겨주는데 뭐 잘못 먹은 거 같다니까요?”

“아라가 챙겨주면 좋은 거지 왜 그래.”

“방금 얘 하는 거 봤잖아요!”

신아름이 조아라의 손에 들린 물티슈를 뺏더니, 법정에 제출하는 증거품이라도 되는 양 흔들었다.

“이딴 짓을 스스럼없이 한다니까요!”

“얘는 잘해줘봤자 아무런 쓸모도 없네. 앞으로 절대 안 한다.”

“그래 하지 마.”

“쓰읍, 오기 생기네. 야, 너 더 묻어있다. 닦아 줄게 이리 와.”

조아라가 신아름에게 달라붙어 장난쳤다. 신아름은 정말 질색이란 듯 어떻게든 떨어지려 했다.

그 모습이 마치 리카와 조아라의 초창기 모습 같았다.

성필은 그것을 흐뭇하게 보았다.

둘이 친하게 지내는 모습은, 다른 이들보다 성필에게 훨씬 특별하게 다가온다.

‘전생이랑 정말 달라졌네.’

다행이다.

정말로…….

* * *

전생.

석세스 엔터 응접실.

조아라와 신아름이 마주 보았다.

신아름은 팔짱을 끼고 조아라를 노려보다가, 말을 화살처럼 톡 쏘았다.

“너 뭐 하는 년이냐?”

조아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요?”

“팀장님 붙잡아서 인생 좀 펴보려고?”

“오빠가 왜 팀장…….”

“오빠? 하, 참나. 티비에 나가고 싶으면 연기나 더 연습해 남자를 꼬시지 말고. 늙은 남자한테 꼬리 쳐서 빨아먹으려는 거 뻔히 보이거든? 젊음을 그따위로밖에 못 써먹냐?”

조아라의 옆에 앉은 늙은 남자 성필의 얼굴은 한없이 우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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