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화
다들 백설하가 보여주었던 노래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녹화 현장은 새로운 ‘더 언노운’의 탄생을 예감하며 깊은 흥분에 빠져 있었다.
다시 가면을 쓰고 무대 근처의 대기석으로 온 백설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녀는 원형 의자에 앉아 가지런히 다리를 모았다. 그리고 다리 위에 올려둔 마이크를 기도하듯 경건하게 붙잡고 있었다.
‘될지도 몰라.’
백설하는 여전히 심장이 쿵쾅거렸다.
심장의 박동 때문에 시야가 흔들거린다.
아직도 자신의 목에서 그러한 노래가 뿜어져 나왔단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 아니.’
백설하는 단언했다.
‘최고였어.’
그리고 확신했다.
‘나는 옛날의 선생님을 넘어섰어.’
백설하는 동경했던 선생의 뒷모습을 넘어 한 차원 더 높은 단계로 도약했다.
항상 동경해왔던 우상을 뛰어넘었다고 확신하는 기쁨. 그것은 단순한 성취감과는 궤를 달리했다.
마치 껍질 벗은 것처럼, 자신은 이날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란 확고한 예감이 들었다.
백설하는 우화(羽化)했다.
‘내가 이길지도…… 정말 이길지도 몰라.’
백설하가 승리를 믿는 이유는 자신의 기량이 향상됐기 뿐만은 아니었다.
환경을 믿기 때문도 있었다.
‘방송 무대는 나의 영역이야.’
지금까지 수백 번의 방송 무대에 올라왔다.
그 경험은 결코 무시할 게 아니었다.
만약 무대가 오페라 극장이었다면 백설하의 잠재력이 100% 발휘될 수 없는 것처럼…….
‘선생님도 이런 종류의 무대에선 기량을 완전히 발휘하실 수 없을 거야.’
고작 몇 번 선 것만으로 온전히 적응할 수 있을 리 없다. 그게 백설하가 자신의 승리를 믿을 수 있는 이유였다.
‘서쪽의 오 솔레미오’, 이인성이 MC의 소개를 받으면서 무대 위로 올라섰다.
그는 스탠드 마이크 앞에 서서 자세를 경건히 바로잡았다.
‘선생님, 어떤 노래를 부르실 건가요.’
백설하는 최고의 경연용 곡을 가져왔다.
파워풀한 동시에 강렬한 댐핑과 기교를 자랑할 수 있는 곡이다.
이인성은 어떨까?
‘남자 가수가 경연에 가져올 곡이라면 록 사운드 기반이거나 발라드겠지.’
이인성이 그중에서 경연에 알맞은 곡을 택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지금까지의 무대를 돌이켜보면, 선생님이 고르셨던 곡은 선생님의 연세를 반영하듯이 올드한 것들이었어. 선생님이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곡들. 내가 골랐던 것처럼…….’
적어도 백설하가 골랐던 팝스타의 곡들은 아직도 시간의 흐름 앞에 무뎌지지 않았다.
미국의 놀랍도록 발전했던 사운드 엔지니어링 기술은 10년의 세월을 넘어서도 크게 빛바래지 않는다.
하지만 이인성이 택했던 곡들은 아니었다.
‘선생님이 승리했던 이유는 압도적인 가창력 때문. 만약 그것뿐이라면…….’
가면 속 백설하의 눈동자가 형형한 의지를 뿜어냈다.
‘승리는 제가 받아가겠습니다, 선생님. 저의 나라에서, 저의 무대에서, 제가 이기겠습니다.’
이윽고, 곡이 흘러나왔다.
첫 음을 듣자마자 백설하가 당황했다.
‘뭐야?’
바이올린. 첼로. 콘트라베이스. 그리고 금관 악기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팝이라고 부를 수 없다. 록도 아니다. 발라드도 아니다.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그런 장르에서 쓰지 말란 법은 없지만, 이 주선율을 너무나도…….
‘클래식해.’
클래식하고, 단조롭다.
거기까지 떠올린 백설하는 놀랐다.
‘이건 오페라 곡이다.’
현대에 이르러 창작된 대중음악은, 가수의 목소리뿐 아니라 사용된 악기조차 음악의 주인이라고 불릴 만하다.
아예 하이라이트에서 가수의 보컬을 제외하고, 일렉트로닉 뮤직의 하이라이트 표현 방식인 ‘드롭’만 넣은 곡이 있을 정도이니.
가수의 목소리는 그러한 악기들과 함께 곡을 구성하고, 함께 달려간다.
‘그런데 이 곡은 아니야.’
배경에 깔린 악기들은 어디까지나 단조롭다. 단조롭고 조촐하여,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하다.
악기들은 물이다.
그 위에 배를 띄우려 한다.
‘배를…… 그 배는…….’
곧이어, 이인성이 입을 열었다.
[Ave Maria―
(마리아여, 당신께 하례하나이다)]
성가(聖歌)가 울려 퍼진다.
이인성은 제자와 싸우기 위해, 자신의 영역을 무대 위로 가져왔다.
* * *
천상의 목소리, 라는 단어가 있다.
미디어에서 너무나 흔히 인용되는 문구이기에 이젠 사람의 마음을 울리지도 못하게 된 단어다.
천상에서 내려온 목소리라는, 천사가 부르는 듯한 노래를 표현하기 위한 단어다.
그토록 흔해 빠진 단어가 모든 관중의 머릿속에 동시에 떠올랐다.
[Maria―]
이것을 노래라고 할 수 있을까.
오로지 ‘아베 마리아’뿐인 가사를 가진 노래를, 노래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노래였다.
노래로서, 사람들의 가슴에 스며들 듯이 다가온다. 천상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머리에도 빛을 선사한다.
“어흑…….”
누군가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는 손목에 감고 있던 묵주를 손으로 가져와 두 손을 경건하게 모았다.
그렇게,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천주교도들이었다. 그들은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비치는 신의 자비, 태양빛을 보고 있었다.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
천사가 마리아를 향해 했던 말이 신자들의 머릿속에 흘러나온다.
아니, 말뿐이 아니다.
2,000년 전 그날의 풍경이 그려진다.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만국 만인의 원죄를 지고 죽어버린 신.
그 신을 잉태한 복된 여자의 모습이 노래로써 그려지고 있다.
독실한 천주교도들은 눈물을 참지 못하고 고개 숙여 찬양한다.
[Ave Maria―]
그토록 격렬히 반응한 건 천주교도만이 아니었다. 다른 종교를 믿거나 종교가 없는 이들조차 이인성의 노래에서 무언가를 느꼈다.
그것은 성스러움이었다.
이인성의 목소리는 에코 효과를 준 것처럼 공기를 타고 사방으로 울렸다. 공간 자체가 진동하는 것처럼 청명하게 퍼진다.
기계로 만지지도 않은 목소리일 텐데, 그것을 언제까지고 나아갈 것처럼 공기 중을 항행한다.
[A―]
단 한 음절만 있어도 그것을 성가(聖歌)였다.
진실로 천상에서 내린 목소리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가장 앞자리에 앉아 있던 청중이 미세하게 몸을 떨었다. 팔걸이에 올려두었던 그의 손은, 어째서일까, 팔걸이를 꽉 쥐고 있었다.
팔걸이는 그의 압력을 받아 흔들렸다.
그 반응은 1,000년 전 성당에서 처음으로 합창단의 노래를 들은 농부의 것과 비슷했다.
장원 사제의 말로만 들어왔던 성령을 진정으로 체험하게 된, 처음으로 신성을 느껴본 이의 반응이었다.
[Mari―]
예로부터 노래는 신과 가장 가까운 기술이었다.
불규칙하며 혼돈적인 인간의 정신이, 질서정연한 신의 법칙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노래는 종교의 것이었다.
가톨릭의 성가도.
유가의 아악도.
세상 모든 노래는 종교를 기반으로 유지되어 왔으며 발전해왔다.
아니, 종교가 노래를 놓아줄 수 없었다. 신을 직접 체험케 하는 기적을, 감히 놓을 수 없던 것이다.
[Ave―]
현대인은 음악에 무감각하다.
음악은 언제 어디서든 들을 수 있기에.
진미(珍味)도 매일 먹으면 평범한 음식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그리하여 현대인은 자극적인 음악에만 반응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인성의 노래는 지극히 담백함에도, 모두의 뇌리에 깊은 전율을 심어주었다.
노래의 원형을, 노래의 목적을, 노래란 이렇게도 아름다운 것이었단 사실을 일깨워준다.
유럽 음악의 시작에서부터 단 한 번도 실전되지 않은 성악(聲樂)이란 기술은, 수십만 명의 범재와 수천 명의 천재를 거쳐, 현대까지 끈질기게 이어져 내려와.
[Maria―]
이인성에게 전달되었다.
인류가 쌓아온 문화(文化)의 결정체였다.
그는 인간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 천상까지 닿는다.
천변만화(千變萬化)한 인간성을 지우고, 영원불변한 신성을 듣는 이에게 선사한다.
하지만…….
* * *
‘노래도 잘 부르는 귀여움 천재’와 ‘서쪽의 오 솔레미오’가 동시에 무대에 올랐다.
전광판에 숫자가 떠오른다.
판정단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승리는 ‘노래도 잘 부르는 귀여움 천재’에게로 돌아갔다.
‘당연하…… 구나…….’
백설하는 퀭한 눈으로 ‘서쪽의 오 솔레미오’, 이인성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가면으로 가려져 있어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선생님의 무대엔 엔터테인먼트가 결여되어 있었어.’
이인성은 단지 ‘잘 부른다’란 감상만을 불러일으켰다.
당연히, 예능 무대에 잘 부르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설령 인류 문화의 총결산과 같은 기술을 보여주더라도, 관객이 기대하는 건 자기 자랑과 같은 기교의 향연이 아니니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엔터테이너로서의 자세가…….’
이인성에게는 부족했다.
하지만, 백설하가 생각하기에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결과였다. 그녀는 빛이 빠져나간 눈으로 전광판을 보았다.
‘표차가 네 배나 나잖아…….’
스승을 네 배 차이로 이겨버렸다.
정말 말도 안 된다.
백설하는 소리치고 싶었다.
‘어떻게 그런 무대를 보고도 나한테 투표할 수가 있어? 다들 느끼지 못한 거야? 선생님이 달하신 경지를, 인간이 닿을 수 있는 최고의 단계를, 다들 느끼지 못한 거야?’
이인성의 노래는 기록으로 남겨야 할 유산 수준이다.
그것을 목도하고도, 사람들은 백설하 자신의 무대에 표를 준 것이다.
부조리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 부조리는 오로지 백설하만의 것이었다.
그녀는 얼마 전 깨달은 사실을 다시금 뼈저리게 느꼈다.
‘노래를 잘 부르는 것만으로는 안 돼. 안 되는 거야. 정말, 안 되는 거구나.’
아이돌은 아티스트.
그리고 엔터테이너다.
대중의 관심을 받고 살아가며 무대 위에 서는 존재는 기교를 단련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 기교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
그 사실을, 백설하는 새삼스레 되새기게 되었다.
‘선생님이 모르실 리 없어.’
그런데 어째서…….
[‘더 언노운’은 ‘노래도 잘 부르는 귀여움 천재’입니다!]
어쨌거나, 사람들은 새로운 ‘더 언노운’의 탄생을 축하한다. 백설하는 흩날리는 꽃가루를 멍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 * *
이인성은 대기실 중앙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그는 천천히 메이크업 테이블로 눈을 돌렸다.
‘서쪽의 오 솔레미오’ 가면이 놓여 있었다.
그는 테이블로 다가가 가면을 집어 들었다. 태양을 형상화한 가면은 인조 코튼 소재로 만들어져 있어서, 쓰고 노래를 부를 때 굉장히 더웠었다.
마치 한여름의 햇볕을 그대로 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닌가.’
백설하의 노래를 들었기 때문에 가슴이 뜨거워졌던 것일까.
이인성은 미소를 지으면서 가면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이제 곧 멀리 그리고 오래 떠날 몸으로, 미련이 남을 만한 기념품을 챙겨 갈 생각은 없었다.
“선생님!”
그때 벌컥 문이 열리며, 허겁지겁 땀만 닦고 온 듯 말이 아닌 몰골의 백설하가 나타났다.
가면을 오래 쓰고 있었기 때문에 헤어스타일링이 무너진 지 오래였다.
그녀는 뺨에 거추장스럽게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낼 생각도 하지 않고 이인성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왜 선곡을 그런 걸로 하셨어요!”
이인성은 오랜만에 제대로 대면하는 제자를 바라보았다. 근엄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그였지만, 현재 그의 얼굴은 놀람으로 가득했다.
오랜만에 재회한 백설하가 토해내는 박력 때문이었다.
“설하야.”
뒤늦게 따라온 성필이 백설하를 이인성에게서 떼어냈다.
“그렇게 여쭈면 친구도 도망가겠다. 진정하…….”
“저한테 일부러 져 주실 생각이셨던 거예요? 선생님이 아무리 잘 불러도 경연에 오페라를 가져오면……!”
“일부러 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어.”
백설하가 흠칫했다.
이인성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백설. 나는 내가 싸울 무대도, 싸울 상대도 고르지 못했어. 그래도 평가받고 싶은 사람은 정할 수 있어. 나는 관중석에 앉은 사람에게 내 노래를 보이고 싶었던 게 아니야. 평가받고 싶은 사람은 그이들이 아니었어. 백설, 너였어.”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제자와의 재회다.
익숙지도 않은 노래를 부르고 싶지 않았다.
“노래는 이야기라고 한다면, 너한테 건네는 첫마디가 나한테 어색한 거여선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 일부러 질 생각 없었어. 난 최선을 다했고, 최고를 보여줬어. 그래서, 백설.”
이인성이 제자를 향해 물었다.
“오랜만에 이 선생님의 노래를 들어 본 감상은?”
백설하는 이제야 이인성이 ‘아베 마리아’를 선곡한 이유를 알았다.
그는 경연을 위해 노래하지 않았다.
제자를 위해 노래했다. 무대에 상관하지 않고 자신이 보일 수 있는 최선을 보였다.
그렇기에 이인성의 무대는 ‘네 배 차이로 패배한 무대’로 평가받지 않는다.
애초에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더 언노운’ 결정전은 생판 모르는 타인들의 평가를 받기 위한 결투 같은 게 아니었다.
재회한 사제(師弟)의 진솔한 대화였다.
익숙하지도 않은 분야의 노래를 부르고 싶지 않을 만도 하다.
“……감동했어요.”
백설하는 감상을 짤막하게 말했다.
이인성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백설, 아주 잘 컸네. 아주 어엿한 숙녀가 됐어.”
백설하는 답하지 않고 아랫입술만 씹었다.
그 뾰로통한 모습에서, 이인성은 과거의 백설하를 발견했다. 그가 미소 지었다.
“삼십 분 정도는 대화할 수 있을까.”
“네? 어, 어디 가세요?”
“미국.”
“미국……? 그, 그치만 오랜만에 뵀는데. 조금이라도 시간을…….”
“매정하다고 생각하진 마. 같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짧으면, 밀도는 비례해서 높아지거든. 자, 오랜만의 해후를 꽉꽉 채워보자.”
이인성은 밝게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백설하가 맞은편에 앉았다.
“왜…… 가시는 거예요?”
“미국. 아마 꽤 오랫동안 미국에서 활동할 거 같아. 그게, 좀 자랑 같은데, 그래미 어워드 심사위원이 됐어. 나도 미국 음악산업계에 당당히 들어선 거야. 보답해야지.”
“…….”
“여기 이거 봐라. 프랑스에서 받은 훈장이야. 문화공로훈장이라고 해서, 문화적으로 크게 기여한 사람한테만 주는 거야. 대단하지?”
“…….”
“백설, 어디 가서 마음껏 자랑해도 돼. 네 스승이 이렇게나 잘난 사람이라고.”
백설하는 머리가 복잡한지 아무런 답도 없었다. 그런 백설하를 향해, 이인성은 이어서 말했다.
“나도 자랑할게. 백설, 네가 내 제자라고.”
그제야 백설하가 반응했다.
‘네 노래가 좋았다’ 같은 흔해 빠진 칭찬보다, 방금의 말이 훨씬 더 가슴에 깊이 다가왔다.
“자랑스럽다, 백설.”
“…….”
백설하는 스승의 칭찬을 듣고 눈가에 물이 맺혔다.
“선생님, 저 아이돌이 됐어요.”
“대견해.”
“노래도, 부르고 있어요.”
“꿈을 이뤘구나.”
“하지만 부족해요. 선생님, 저에게 가르침을 주실 수 없을까요?”
“넌 부족한 게 없어.”
“아, 아니에요. 선생님 노래를 듣고 알았어요. 저는 아직 한참 멀었어요. 선생님으로서, 저보다 먼저 그리고 멀리 이 길을 걸으신 분으로서, 마지막 수업을…….”
이인성이 무릎 위에 손을 가지런히 올렸다.
“그럼, 첫 번째 수업을 시작하자.”
“……네?”
“이전의 나는 선생이라 불릴 자격도 없었어. 스승이라 칭하기엔 너무나 부족했지. 너에게 가르쳐주었던 모든 게, 지금의 내게는 부끄럽게만 여겨져. 그럼에도 넌 이렇게나 잘 컸고. 이미 청출어람이지.”
“그런 게, 그럴 수가…….”
“그러니, 이게 첫 번째 수업이야. 가수로서 너에게 해주는 첫 번째 수업.”
두 사제(師弟)는, 마침내 진정한 스승과 제자로서 마주 보았다.
백설하는 이인성이 진심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눈에도 진지함이 배었다.
“부탁드립니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이인성의 고민은 길었다.
이윽고 그가 입을 뗐다.
“백설, 나는 노래에 삶을 바치겠다고 맹세했어. 그래서 계속 노래했어. 그런데, 아니었어.”
“네?”
“나는 음악을 하고 있던 거야. 음악을 사랑해서 노래했던 거야.”
음악이란 뭘까.
“내가 생각하기에 음악이란, 듣기 좋은 거야. 듣기 좋은 걸 인위적으로 만든 거. 그럼 또 듣기 좋다는 건 뭘까. 사람이 들어서 좋은 거…….”
애인이 속삭이는 사랑.
가족의 따스한 한마디.
친구의 별것 아닌 농담.
“음악은 노래와 악기의 힘을 빌려 인간을 재현하는 게 아닌가 싶어.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짧고 유한한 시간 동안, 나와 관련 없는 사람의 마음마저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소리.”
그래서 음악은 사람을 기쁘게 하고.
슬프게 하고.
감동하게 하고.
또, 행복하게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노래를 불렀지만 음악을 하진 않았어. 내가 추구했던 건 기술이지 음악이 아니었어. 내가 감탄했던 노래는 기교일 뿐 마음이 아니었어. 내가 바랐던 노래는 음악성이 결여되어 있던 거야. 그걸…….”
이인성이 백설하를 가리켰다.
“백설, 너를 보고 방금 깨달았어. 나는 지금 비로소 가수가, 음악가가 된 걸 거야. 분명. 과거의 너에게 가르쳐주었던 건 기교뿐이었지. 내가 더 성숙했다면, 더 가치 있는 걸 가르쳐줬을지도 모를 일이야. 그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
“난 세계를 바쁘게도 돌아다녔지.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걸 들었으며, 많은 걸 봤어. 세계에선 전쟁이 일어나고, 어린아이가 총을 쥐고, 노인은 굶주리며, 젊은이는 죽어가. 그런 모습을 듣고 보아왔던 거야.”
이인성이 우울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가 자신의 손을 매만졌다.
“그런데도 난 노래 부를 뿐이었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어 나가며 고통받는 마당에, 내 노래엔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오랜 시간 괴로워하고 고민하면서도 노래를 놓지 못했어.”
그런데 이제 알았다.
“미래가, 우리 후손들이 현재를 어둡게만 기억하지 않도록. 우리는 음악을 해야 하는 거야. 우리의 시대에 상처만이 새겨지지 않게. 역사에 새겨진 상처가 별자리로 기억되도록, 우리는 노래를 불러야 해.”
이인성이 상쾌하게 고개를 들었다.
“백설, 난 드디어 음악가가 된 기분이야. 그리고 이 음악으로 너에게 말을 걸었어. 음악은 언어고, 이야기야. 음악이 이야기라면, 분명 이런 생각이 들겠지.”
대답하고 싶다고.
“내 노래를 듣고, 네 대답을 들려주길 바랄 거야. 이야기란 그런 거니까. 하지만 여기선 듣지 않을게.”
이인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시간이 꽤 흘렀다.
“너는 분명 더 높은 곳에서 나와 다시 만날 수 있어. 지금보다 더 상냥한 사람이 되어서, 상처를 별자리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되어서.”
이인성은 테이블에 놓인 자신의 가면을 집어 백설하에게 내밀었다.
“소녀연맹 설하, 미국에서 기다릴게.”
그렇게 이인성은 대기실을 나갔다.
백설하는 가만히 의자에 앉아 이인성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가 입을 연 건 이인성과 대화했던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나서였다.
“이사님.”
“응.”
“미국에서 기다리신다는 건…….”
성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미 어워드를 말씀하셨던 거겠지.”
이인성은 그래미 어워드 심사위원이 되었다고 했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활동할 거란 말도 덧붙였었다.
백설하가 물었다.
“그래미라는 건 정확히 어떤 건가요.”
“……그래미는.”
그래미 어워드는 미국 음악산업을 대표하는 시상식이다.
미국 음악산업을 대표한다는 건, 사실상 세계의 음악을 대표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빠르든 늦든, 세계 각지의 음악은 미국을 뒤따라가 가게 되어 있으니까.
지구를 대표하는 시상식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그만큼 아메리칸 팝의 영향력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다.
음악산업 그 자체인 시상식.
“어떻게 갈 수 있어요?”
“레코딩 아카데미란 게 있어. 그래미의 모든 분야는 레코딩 아카데미의 회원들에게 심사되어서 선정돼. 아마, 이인성 선생님도 레코딩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신 거겠지.”
이 레코딩 아카데미의 선정위원들은 미국 음악 시장의 산증인들이다.
연예계, 음악계, 음반 산업의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이들만이 선정위원으로 등극한다.
한때 반짝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오랜 세월 음악적 성과와 안목, 능력을 증명한 이들만이 레코딩 아카데미의 정회원인 선정위원이 될 수 있다.
“즉, 레코딩 아카데미는 미국 음악 산업을 대표하는 역사적인 인물들이 있는 곳이야.”
그야말로 신들의 전당이다.
그들은 천상의 권좌에 앉아 신의 자리에 도전하는 이들을 굽어본다.
“그런 사람들이, 그래미 각 분야의 모든 출품작을 심사하고 선정해. 그리고 뽑힌 것들은 투표 멤버라고 불리는, 그래미에서도 가장 높은 등급의 인물들이 표를 던져 수상작을 선정하는 거지.”
이인성은 이 투표 멤버의 자격을 얻은 것이다.
그래미의 권위는 이러한 절차에서 나온다.
음악 역사 그 자체인 인물들, 음악의 신들이 직접 심사하고 투표하기에.
“노미네이트되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럽기 그지없는…… 그런 시상식이야.”
전 세계에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는 팝스타들조차 그래미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필요는 없지만 원한다, 라고.
그래미는 ‘필요하다’고 해서 도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저 가게 진열장에 비치된 귀금속처럼 선망의 눈길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팝스타들조차 감히 그래미를 두고 ‘갖겠다’는 표현을 쓰지 못한다. ‘원한다’가 고작이다.
“아이돌이 받은 적이 있나요?”
“세계로 범위를 넓히면, 서양의 보이밴드와 팝 아이돌조차 노미네이트된 사례가 손에 꼽아.”
“한국인은요?”
“사운드 엔지니어링과 오페라 부문에서는, 수상받은 적이 있어.”
“케이팝 아이돌은요?”
성필은 한번 호흡을 가다듬고, 말했다.
“WTP가 한 번 노미네이트된 사례가 유일해. 극히 최근의 일이고, 극히 이례적이야. 다들 말이 되지 않는 일이라면서 놀랄 정도로.”
그래미 어워드는 긴 역사와 전통, 거대한 권위를 지닌 시상식이다.
그런 만큼 트렌디하지 않다.
보수적이란 뜻이지만, 굳어 있단 뜻은 아니다.
그래미 시상식의 심사위원인 레코딩 아카데미의 회원들은 긴 세월 음악계에 몸을 담아왔다. 그러니, 반짝하고 사라지는 스타와 장르를 수도 없이 보아왔다.
고작 불길 한번 일었다고 움직이지 않는다.
“힙합이란 장르가 생겨나고 올해의 노래, 올해의 레코드에 선정된 것조차 최근의 일이야.”
신들의 전당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선, 그 장르가 한때의 돌풍이 아닌 영속적으로 이어질 거란 확증이 필요하다.
그래미는 그야말로 꿈의 영역, 세계의 음악인이 바라 마지않는 최고의 영예이다.
자신이 밤하늘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성좌가 되었다는, 무엇보다 가장 확실한 표식.
역사에 이름을 새길 자격이 있다는, 신으로부터의 인정이다.
“케이팝 아이돌이 노미네이트된 건 딱 한 번…….”
백설하는 그리 중얼거리다가, 물었다.
“저희가 갈 수 있을까요?”
성필이 답했다.
너무도 간결하고, 확실하게.
“갈 수 있어.”
“…….”
스승은 매정하다시피 했다.
옛 제자와의 해후를 고작 30분 만에 마쳤으니.
하지만 그는 제자가 기억하는 것처럼 여전히 좋은 스승이었다.
스승은 제자에게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을 남겼다.
백설하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대기실을 나섰다.
“가요.”
다음 목표가 정해졌다.
“어서.”
신들의 전당.
천외천(天外天).
그래미 어워드.
이인성이 한 첫 번째 수업의 이름은 ‘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