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96화 (396/760)

396화

위세라는 ‘더 언노운 싱어’의 작가에게 대본을 건네받았다.

만약 백설하가 ‘서쪽의 오 솔레미오’를 꺾고 ‘더 언노운’의 자리에 오른다면, 백설하와 위세라의 짧은 대화를 촬영할 예정이라고 한다.

“설하 씨가 3라운드까지 전부 이겼을 때의 이야기지만요.”

단순 확률 계산으로도 백설하가 ‘더 언노운’이 될 가능성은 적다.

6.25%.

재미로 1,000원 내기를 하더라도 선뜻 걸기 어려워지는 수치다.

과연, 작가도 기대한 티를 내지 않을 만하다.

위세라는 작가에게 받은 대본을 가지고 ‘더 언노운 싱어’의 청중 판정단석으로 왔다.

청중 판정단석이라지만, 평범한 예능의 방청객석과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여기서 내가 노래 부르는 걸 봤구나.’

위세라는 의자에 앉아 주변의 소란을 들었다. 방청객들은 연예인을 보는 것에 잔뜩 들떠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바로 근처에 연예인이 앉아 있건만,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무대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긴, 연예인 판정단 쪽이 훨씬 이름값이 높긴 하다.

당장 무대 옆을 보면 이름만 대면 알 법한 스타들이 가득한데, 주변으로 관심을 돌릴 여유는 없을 터이다.

‘평생 가도 한번 보기 힘든 연예인들이 줄지어 앉아 있으니까.’

위세라는 새삼스레 실망하지 않았다.

아이돌 그룹 멤버의 이름을 대중이 외우고 있다면 탑티어라고 하던가.

글로브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다.

위세라를 아는 이는 케이팝 팬뿐일 것이다.

‘나중엔 다르겠지.’

글로브가 미디어 출연에 힘을 쏟고, 지금보다 유명해지면 부담스러운 수준의 관심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 날이 꼭 올 거야.’

위세라는 잡생각을 지우고 무대에 집중했다.

곧 저기에 백설하가 나올 거라고 생각하니…….

‘우습네.’

‘더 언노운’인 ‘서쪽의 오 솔레미오’를 꺾으면, 그에게 패배한 ‘승리의 여신 니케’를 무대로 부른다고?

그리고 복수 성공을 축하하면서 감동의 재회를 시켜?

‘어처구니가 없어. 심지어 더 언노운 결정전에는 내 가면을 쓰고 나가?’

이 무슨 오만함인가.

본인이 최종전까지 오를 거란 일말의 의심도 없다. 만약 있었다면, 이런 오글거리는 기획을 제작진에게 전달하지도 않았겠지.

정말 오만하…….

‘……나도 그랬잖아.’

위세라 또한 본인이 ‘더 언노운’이 될 걸 의심조차 하지 않았었다.

어쩌면 됐을 수도 있다.

‘서쪽의 오 솔레미오’만 없었다면 말이다. 그야말로 노래하기 위해 태어난 것만 같은, 괴물 같은 성악가만 아니었다면…….

‘언니.’

위세라는 속으로 백설하를 불렀지만, 그다음 이어질 말을 쉽게 고르지 못했다.

가로 엔터까지 찾아가서 백설하가 우승하도록 돕겠다던 그녀였지만, 선뜻 백설하를 응원하기 힘들었다.

‘내가 꺾기 전까지 꺾이지 마라…… 고 했었지.’

그건 위세라 자신의 위신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후일 성필에게 후회의 눈물을 흘리게 만들고, 자신의 발밑에 무릎 꿇고선 ‘제발 프로듀싱하게 해줘 세라야!’라고 울며불며 매달리게 할 계획…….

‘……내가 무슨 생각하고 있었지?’

아, 맞다.

백설하를 응원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후회하는 성필을 너무 자세히 상상하다 보니 그만 원래 하던 생각마저 잊어버렸다. 마치 자기 전 떠올리는 망상처럼 달콤했지만, 지금은 잠시 접어둬야 했다.

위세라는 다시금 생각의 머리를 정상 궤도로 가져왔다.

‘내가 언니를 돕겠다고 한 건, 그랬지. 나한테 지기까지 누구한테도 공식적으로 져선 안 되니까.’

하지만 위세라는 그보다 더 쉬운 방법을 알았다.

자신이 꺾였다면, 백설하도 꺾이면 된다.

둘은 나란히 바닥으로 떨어져 0부터 시작하게 될 것이다.

‘언니가 지면 돼. 언니가 패배하면, 내 굴욕감이 조금은 씻기겠지.’

그럼 왜 백설하를 도와주겠답시고 가로 엔터까지 갔어?

‘솔직히, 팀장님이 나를 착한 애라고 생각해줬으면 해서 갔지. 순수하게 라이벌을 도와줄 수 있는 심성의 소유자라고 생각하게.’

이렇게 실력 있고 착한 아이돌을 버리고 가다니, 나는 대체…… 같은 생각을 해주지는 않을까 기대했었다.

위세라는 양손을 모았다.

이제 신에게 빌 생각이었다.

‘어차피 내가 머릿속으로 하는 생각이 팀장님한테 들릴 리는 없잖아. 언니가 지는 쪽이 훨씬 쉽고 내 위신도 지킬 수 있을 거야. 내가 꺾기 전에 꺾이지 말아? 언제 다시 붙을 수 있을 줄 알고. 나 혼자만 바닥에서 눈물 질질 짜고 있는 꼴로 남긴 싫어. 그러니까 언니.’

그런데…….

‘언니, 그래도 이왕 무대 올라갔으니까 이겨요.’

팔은 안으로 굽는다던가.

위세라는 백설하와 같은 아이돌로서 그녀의 승리를 바라게 됐다.

[첫 번째 무대!]

[‘노래도 잘 부르는 귀여움’ 천재와……!]

* * *

‘요를레히후 나는야 하이디’.

가수 김은정은 대기실에서부터 기력이 없었다. 요 일주일간 ‘승리의 여신 니케’의 가면을 쓴 ‘노래도 잘 부르는 귀여움 천재’와 연습해오면서, 자신이 승리할 가능성이 없단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필 첫 상대에 이런 애가 걸리냐아…….’

김은정은 함께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노래도 잘 부르는 귀여움 천재’ 아니, 백설하를 보았다.

백설하는 공손한 태도로 앉아 모니터의 방송 화면만 보고 있었다. 연습할 때와는 달리 ‘승리의 여신’이 아니라 제대로 본인의 것인 곰돌이 가면을 쓰고 있었다.

어째서 김은정이 백설하의 정체를 미리 알 수 있었냐면, 마지막 연습 때 그녀의 복장 덕분이었다.

김은정의 매니저가 백설하의 정체를 알아냈다.

‘누나! 저 특징적인 신체(순화됨)로 보건대 소녀연맹 설하예요! 음색도 그렇고 확실해요!’

소녀연맹의 백설하.

아이돌이다.

그것을 떠올리자 김은정이 가면이 얼굴이라도 되는 양 마른세수했다.

‘나름 가수인데 아이돌 딱지 붙인 애한테 지면 어떡하냐고오…….’

아니, 잠깐만.

‘일반적으로 세간의 인식은 그렇겠는데. 소녀연맹이란 애들은 일본 국민 가수도 이겼다잖아?’

그러니까 자신이 패배한대도 가수란 이름이 크게 빛바랠 가능성은 낮지 않을까?

그래, 분명 그럴 것이다.

“누나.”

그때 매니저가 김은정을 불렀다.

안 그래도 심란한데, 매니저가 말을 걸자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뭐!”

“난 누나 믿어요.”

“어?”

“난 세상에서 누구보다 누나 공연 많이 본 사람이잖아요. 누나를 믿어요.”

“…….”

김은정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오늘 밤새 매니저에게 음식 심부름을 시키기로 한 계획을 접기로 했다.

그때 백설하에게서 움직임이 보였다. 그녀는 김은정의 매니저가 한 말을 듣고, 본인도 해달라는 듯 성필을 바라보았다.

성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파이팅!”

“…….”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백설하는 실망한 티가 역력했다. 그녀는 다시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그러던 도중 스태프가 스탠바이 사인을 보내왔다. 두 출연자가 일어났다.

백설하가 김은정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김은정은 얼떨떨했다.

선배란 걸 어떻게 알았지? 하긴, 김은정도 백설하의 정체를 아니까 이상한 건 아니다.

게다가 김은정은 특유의 나른하고 통통 튀는 음색으로 유명했으니, 같이 연습하면 모를 수가 없다.

김은정은 아까 좌절해 있던 게 거짓말처럼 백설하의 손을 강하게 맞잡았다.

‘김 매니저가 나를 믿는다잖아. 세상에서 제일 내 공연을 많이 본 애가 나를 믿는다고 했어.’

김은정은 백설하와 악수했다.

“한 살 차이인데 선배님은 너무 딱딱하지 않아요? 반말해요. 데뷔 좀 일찍 한 게 뭔 대수라고.”

“그럴까?”

“끝나고 밥이라도 먹자.”

“이사님, 저 스케줄 괜찮을까요? 확인해주실래요?”

“어?”

진짜 먹자는 뜻은 아니었는데…….

‘누구 한 명 지고 얼굴 맞대면 좋은 분위기는 아닐…….’

아 몰라.

이젠 될 대로 되라지.

“그래, 이긴 사람이 쏘는 걸로 해.”

“비싼 걸로 하자.”

“비싼 거…… 난 상관없어.”

“나도.”

김은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얘 봐. 한마디도 안 지네.’

그래, 마음껏 오만해져 있어라.

‘나도 전심전력을 다할 테니까.’

* * *

먼 과거.

이인성은 백설하를 가르치며 의미 모를 말을 자주 하곤 했다. 아니, 의미는 있지만 초등학생인 백설하가 알기 어려운 말들이었다.

“백설, 고음만이 중요한 게 아니야. 소리를 낮게 내는 것도 중요해. 몇 주 동안은 그걸 연습하자.”

백설하는 인간이 낼 수 있는 가장 작은 음정을 내야만 했다.

악보로 기록할 수 있는 음정 중에서도 가장 작은,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아니야, 더 낮게 할 수 있어! 백설, 네 목소리가 융단처럼 바닥에 깔린다고 생각해!”

백설하는 목소리를 거의 숨소리처럼 줄였다.

“아니 아니! 내가 소리를 줄이랬어? 음정을 낮추랬잖아! 낮게!”

백설하는 계속해서 음정을 낮추었다.

낮추고 또 낮추었다.

하지만 이인성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더!”

백설하는 서러웠다.

스승이 할 수 없는 일을 시킨다고 생각했다.

슬슬 자신에 대한 실망과 스승에 대한 원망으로 가슴이 채워질 즈음, 백설하는 스승이 요구하는 소리를 냈다.

“아?”

백설하 본인조차 놀랄 정도로 낮은음이었다.

목구멍을 헤매다가 겨우 밖으로 뛰쳐나온 찰나의 충돌음. 성도를 미로처럼 방황하던 소리는 출구를 발견하자 헐떡이며 달려 나왔다.

일상의 소음이 모두 사라진 세계.

백설하의 낮은 목소리만이 온 세계를 채웠다. 그건 자연의 법칙에 따라 진공으로 몰려드는 공기와 같았다.

가장 낮기에, 가장 자연스럽게 파고든다.

소리가 세상을 대신했다.

“그래, 그거야…….”

이인성은 눈물을 흘렸더랬다.

백설하는 배웠다.

낮은 곳에 임하는 소리의 거대함을.

* * *

‘요를레히후 나는야 하이디’, 김은정은 분하여 입술을 물었다.

그 앞에는 승리자인 백설하가 당당하게 서 있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표차로 백설하가 승리했다.

분명 같은 곡이었는데, 같이 연습했는데, 백설하는 김은정보다 훨씬 멀리 나아가 있었다.

‘자신 있었는데…….’

가슴을 파고드는 저음이 승부의 향방을 가르는 곡이었다.

김은정이 자신 있는 음역대였다. 본인의 음색에도 잘 어울렸다. 이 곡을 골라준 제작진에게 ‘감사하다’는 말까지 했었는데.

‘졌어…….’

홈그라운드에서 패배한 기분이다.

져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막상 무대에서 패배를 선고당하니, 세상 모든 게 미워질 지경이었다.

백설하는 승리자로서 대기실로 향한다.

패배자인 김은정은 무대에 남아 정체를 밝히고 노래를 불러야 한다.

고개 숙인 김은정과 고개를 빳빳이 든 백설하가 빛과 어둠처럼, 새벽녘에 교대하는 태양과 달처럼 교차했다.

백설하가 읊조렸다.

“선배님의 노래를 좋아해요. 듣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져요. 부러운 음색이에요. 힘들 때, 선배님의 노래에 많은 위로를 받았어요. 고생하셨습니다.”

“……하.”

김은정은 자신의 웃음소리를 듣고 놀랐다. 패배했음에도 쾌활함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백설하 너, 선배님은 뭔 선배님이야. 무대 올라오기 전에 나랑 친구 먹기로 했었잖아.’

긴장을 떨치기 위해 허세라도 부렸던 것일까.

하기야, 김은정도 상처받지 않기 위해 일부러 드센 성격을 연기할 때가 많았다.

‘너도 긴장했었구나.’

김은정은 동질감을 느끼면서 다시 웃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김은정의 웃음이 방아쇠가 되어, 백설하는 완전히 그녀를 지나쳤다.

그러고도 백설하는 나아간다.

나아가서, 2라운드.

‘빌딩 숲을 밝히는 가로등’, 20년 경력의 뮤지컬 배우 구도훈.

백설하의 다음 상대였다.

구도훈은 ‘더 언노운 싱어’의 출연이 결정된 후, 본인이 ‘더 언노운’이 될 걸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노래를 20년 넘도록 불렀다.’

그뿐인가?

뮤지컬 배우라 하면 노래만이 아니라 연기와 춤까지 가능해야 한다.

수십만 자의 대본 텍스트를 머릿속에 입력하고 있는 동시에, 그보다 방대한 양의 연기, 춤의 정보까지 머리와 몸에 각인시켜야 한다.

예능계에서도 적수를 찾기 힘든 신체, 두뇌 노동을 요구하는 분야다.

‘이미 노래로 대성이라 부를 경지에 이르렀어.’

물론, 뮤지컬 배우이니만큼 전문 가수와 노래로 비교하기는 힘드리라.

한 분야의 전문가보다 여러 분야에 발을 걸친 숙련자가 떨어지는 건 상식적으로 자명하다.

하지만, 구도훈은 달랐다.

‘여기에 내 적수는 없다.’

그는 남자로, 최고음이 2옥타브 ‘라’ 이상인 뮤지컬 곡도 무리 없이 무대 위에서 소화할 수 있다.

이는 굉장한 일이다.

사실상 한국에서 대체할 만한 인물이 손에 꼽는 수준이다. 게다가, 그는 거대한 공연장을 오로지 목소리 하나로 채워야 하는 세월을 보내왔다.

성량은 일반적인 가수와 비교 불가능할 수준.

그러니 자신만만하다.

자만할 이유가 충분했다.

‘미안하지만 여기서 떨어져 줘야겠다, 노래도 잘 부르는 귀여움 천재.’

* * *

이인성이 물었다.

“백설, 성구(聲區)를 바꾸는 걸 뭐라고 하게?”

“파사지오요.”

“맞아.”

흉성구, 중성구, 두성구.

음이 올라갈수록 성구를 바꿔야 한다. 성구를 제대로 전환하지 않으면 피치 브레이크가 걸려서 목소리가 갈라진다.

“이를 자연스럽게 하는 게 파사지오 테크닉이지. 그런데, 성구를 바꾸지 않고 음정을 올리는 방법이 있어.”

“어음…… 근데 그건 잘못된 거 아니에요? 막 노래방에서 억지로 목 쥐어 짜내서 고음 부르는 사람들처럼요.”

“원리는 같지만, 달라. 벨팅 보이스라고 해.”

이인성은 아직 벨팅에 관한 학문적인 합의가 나 있지는 않으며, 사람마다 설명하는 게 다르다고 했다.

이인성은 본인이 이해한 벨팅 보이스를 설명해주었다.

“예를 들어, 흉성을 그대로 두성의 음역까지 끌고 올라가는 거지. 흉성이 어때?”

“울려요.”

“낮은 음역대지. 그걸로 음정을 올리면, 쩌렁쩌렁 울리는 고음을 낼 수 있는 거야.”

“그럼 최고잖아요!”

“하하, 그치. 울림이 강하면서도 음정이 높으니까. 어어엄청 파워풀하지.”

“배울래요!”

“그 말만 기다렸다. 근데 바로 할 수는 없어. 일단 두 개의 성구를 섞는 법을 배우자. ‘보체 미스타’란 방법이야.”

“이름이 멋지네요. 배울래요!”

“그래, 넌 뭐든 배우고 싶지?”

이인성은 사랑스러운 제자를 향해 따스하게 미소 지었다.

“내가 가르쳐주는 대로 잘 따라오면, 언젠가 모든 공명을 합쳐서 쓸 수 있을 거야.”

“모든 공명을 합쳐요?”

“응.”

흉부 공명, 비강 공명, 두성 공명.

그 모든 공명과.

흉성구, 중성구, 두성구.

그 모든 성구의 음색을 합친.

“전신공명.”

이건 거기에 이르기 위한 첫 발판이다.

* * *

“어떻게…….”

‘빌딩 숲을 밝히는 가로등’, 뮤지컬 배우 구도훈 패배.

2라운드는 ‘노래도 잘 부르는 귀여움 천재’의 승리로 끝났다.

구도훈은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내 목 컨디션은 완벽했어. 준비한 노래도 완벽하게, 아니. 준비한 이상으로 소화했다.’

근데 어째서?

‘노래도 잘 부르는 귀여움 천재’의 노래가 안 좋았단 건 아니다. 결단코 아니다. 오히려 예상 이상의 강적이었다.

하지만, 구도훈은 본인이 그녀에 비해 부족하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표차가 4배나 나는 거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구도훈은 절망에 어깨를 늘어뜨렸다.

패배자, 그 단어가 그의 머리에 박혔다.

옆으로 승리자인 백설하가 지나쳐갔다.

둘이 교차하는 시점에, 백설하가 말했다.

“선배님, 다시 무대에서 노래 부르시면…….”

탈락자는 무대로 올라 본인을 소개하고, 인터뷰 후 본인이 준비해온 곡을 부르게 된다. 그리고 떠나가는 것이다.

백설하는 그때를 말하고 있었다.

“마이크를 더 멀리 떨어뜨리세요.”

구도훈이 움찔했다.

그리고 그의 머리에 전류가 흘렀다.

‘그렇구나.’

구도훈은 벨팅 보이스를 사용한다.

거대한 성량과 울림으로 고음까지 부르는 게 가능한 방식의 창법이다.

뮤지컬과 같은 노래가 필요한 연기 무대에 적합한 방식으로, 관객석 멀리까지 앉은 사람에게 선명한 목소리를 전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다이나믹 마이크를 쓰고 있어.’

부르는 사람은 모르지만, 다른 사람한테는 목청만 내지르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다.

노래방에서 노래할 때 음정이 찢어지더라도 본인이 모르는 경우와 같다.

다이나믹 마이크는 구도훈의 성량과 공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찢어진 소리를 송출할 것이다. 생목으로 발악하는 것처럼…….

‘본방이라서 더 힘을 줘서…….’

방송 무대 경험 부족이 불러온 실수였다.

구도훈은 그제야 4배라는 표차를 이해할 수 있었다.

“……고맙습니다.”

구도훈이 감사를 전하고, 백설하는 그를 지나쳤다.

이어진 구도훈의 무대는 2라운드와는 전혀 달랐다. 아직은 조금 미숙했지만, 이전보다 훨씬 나아진 기교는 판정단을 놀라게 했다.

[‘빌딩 숲을 밝히는 가로등’, 구도훈 배우의 예명과 같이 따스하게 세상을 밝히는 무대였습니다!]

구도훈은 마지막으로 허리를 굽히며 관중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그는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하며 무대를 내려갔다.

가로등은 밤을 밝혀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하지만 결국 태양의 대체재는 되지 못한다.

가로등이 아무리 밝아도 하늘을 채울 수는 없는 법이다.

태양은 가로등의 빛을 가볍게 누르고, 빛나며 낮을 끌어왔다.

태양, 백설하는 나아간다.

나아가서, 3라운드.

‘겨울을 물리쳐줘 봄노래!’, 유명 발라드 가수 박영모. 그가 다음 백설하의 상대였다.

‘설하야, 네가 올라올 줄 알았다.’

박영모는 이미 백설하의 노래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음악을 위한 동행’을 위해 프랑스로 갔을 적, 그녀의 선명한 노래를 들었었다.

‘이렇게 만나게 되는구나.’

박영모는 아직도 백설하의 목소리가 귀에 선했다. 주변의 선배 가수들도 모두 그녀의 노래를 인정했었다.

태양처럼 파리의 거리를 꿰뚫는 소리의 빛깔.

박영모는 눈을 감고 그때의 기억을 되새겼다. 그때와 비교해서, 백설하는 한층 더 성장했음이 틀림없다.

‘역시, 세월은 사람을 더 무르익게 만드는구나. 하지만.’

세월은 자신도 지지 않는다.

박영모는 1세대 아이돌이 몰락하고 찾아온, 흔히 말하는 ‘소몰이 창법의 시대’에 데뷔한 인물이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범람하는 아이돌들에 지쳐 있었다. 그렇게 음악계의 키는 발라드로 넘어왔다. 사람들은 아이돌이 보여줄 수 없는 진정성과 강렬하고 숙련된 노래를 발라드에서 기대했었다.

‘힘들었지, 그때는.’

박영모도 수많은 발라드 가수 중 한 명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했었다.

그야말로 발라드 춘추전국시대였으니, 어중간한 재능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하지만 박영모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아서, 아직까지 대중에게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계급장 떼고 한판 붙자는 게 이 프로그램의 취지였었지.’

인지도에 기대지 않고 오로지 노래 실력만으로 승패를 가리는 게 ‘더 언노운 싱어’다.

그리고 노래에 자신 있는 박영모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프로그램의 출연을 줄곧 거부해왔었다.

제작진의 열렬한 러브콜이 몇 년을 이어져도 거부만 했었다.

‘1라운드에서 지기라도 하면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으니까.’

가창력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박영모다.

‘계급장 떼고 한판 붙어’서 지면, 가창력의 대명사로서 꼴이 말이 아닐 터다.

그래서 계속 거절해왔었다.

하지만, 이번에 출연 의사를 내보냈다.

‘설하, 너 때문이야.’

박영모는 백설하의 출연 정보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입이 싼 방송국 관계자와의 술자리에서였다.

그것을 듣고, 박영모는 주체할 수 없이 피가 끓는 것을 느꼈다.

‘그때 네 노래를 듣고 생각했어. 정말 계급장을 떼면 누가 위일지.’

이는 젊은 세대를 향한 도전 의식 때문이었다.

박영모는 동시대의 가수들이 하나둘씩 스러지는 와중에도 우직하게 자리를 지켰었다.

그리고 가요계를 아이돌이 채우는 것을 지켜보며 내심 반감을 품었었다. 대체 왜 대중은 저런 음악에 열광하는 걸까…….

높은 수준의 가창력과, 공감할 수 있는 진정성 깊은 가사로는 부족한가?

발라드는 박영모의 인생이었는데, 그 인생을 함께한 이들이 점점 자취를 감춘다.

젊은 세대, 아이돌에게 밀려서 말이다.

‘나도 시대의 변화는 어쩔 수 없단 건 알아. 새로운 세대는 항상 새로운 걸 찾는단 걸…… 알고 있어.’

하지만 늙은 자의 고집이랄까, 자신과 현세대의 노래를 무대 위에서 비교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끓었다.

유치한 투쟁심이다.

‘그런데 다들 궁금해하잖아. 배트맨이랑 슈퍼맨이 싸우면 누가 이기나, 그런 거…….’

박영모도 그러했고, 자신이 이기리라 믿었다.

‘설하야, 너는 아이돌로서…… 아니.’

가수로서 모자람이 없다.

‘하지만 아직은 내가 위야.’

20년의 세월, 가요계의 한편을 차지해온 선배로서. 박영모는 오늘 귀여운 후배님을 이길 생각이었다.

* * *

“뭐? 무대에서 노래하는 게 무서워?”

이인성은 울먹이는 백설하를 귀엽단 듯 바라보았다.

오늘 학원의 원생들이 시민공원 무대에서 공연했다는데, 백설하는 결과가 시원치 않았다는 모양이다.

“오, 올라갔는데 무서워서…… 사람들이 많이 보니까아…….”

“으휴. 뭘 그런 걸로 울고 그래. 백설, 아이돌 될 거 아니야?”

“으응…….”

“나중엔 수천 명이 보는 무대에서도 노래해야 하잖아. 겨우 이런 데서 꺾이면 안 되지.”

백설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분홍빛 미래를 그려주는 게 오히려 독이 되었단 걸 깨닫자, 이인성은 다른 조언을 생각해냈다.

“그럼 무대에 올라가선 이렇게 생각해봐. 나도 학교 평가 시간에 자주 쓰는 방법이거든? 관객과 나 사이에 벽이 있어.”

“벽이요……?”

“응. 투명한 벽. 그래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벽은 앞에만 있는 게 아니라, 뒤랑 옆이랑 위에도 있어. 그래서 그 작은 상자 안에는 너밖에 없어. 이 세상에 너만 있는 거야.”

이인성은 벽을 그리듯이 손을 수평으로 움직였다. 옆에 벽을 치고, 위에 벽을 쳤다. 그리고 마임하는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벽이 있다는 듯 손을 더듬거렸다.

“백설아! 내 말 들려?”

“드, 들려요…….”

“응? 뭐라구?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안 들려!”

“예?”

“아무것도 안 들린다구! 큰 소리로 말해봐!”

“드, 들려요! 들려요!”

“그래도 안 들려!”

제자가 당황하자, 이인성은 실실 웃으면서 투명한 벽을 없애버렸다.

“이 세상엔 나밖에 없어서 말야. 오로지 나만 생각해야 해. 노래 부르러 무대에 올라서 생각할 게 나뿐이다. 그럼 뭘 생각할까?”

“어, 어어…….”

“노래, 를 생각해야지.”

투명 상자는 사람들의 평가 자체를 차단한다.

긍정적인 시선이나 속삭임조차 모두 막아버리고, 무대라는 세계에 가수 홀로 남긴다.

“상자 안은 뭐랄까, 너만의 엔진이 되는 거지. 아니, 네가 엔진이 되는 거야.”

“엔진…….”

“네가 엔진의 중심부에 있어. 네가 만든 투명한 상자는, 그래. 노래를 만드는 엔진인 거야. 네가 완벽하게 통제하는 기계. 오로지 너만이 조종하는 너만의 세계. 그 세계의 목적은…….”

밖으로 노래를 뿜어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엔진인 너는 좋은 노래를 부르는 데만 집중해. 기계는 다른 생각을 안 하잖아. 오직 너한테만 집중, 알겠어?”

“…….”

“왜, 백설이는 기계가 되기 싫어?”

“저는 사람인데요…….”

“하하. 백설아, 성악이 무슨 뜻인지 알아?”

“노래…… 아니에요?”

이인성은 싱긋 웃었다.

“사람의 목은 노래 부르려고 만들어진 게 아니야. 노래란 건 굉장히 비정상적인 거야. 그러니까 노래를 부르려면, 목을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상태로 바꿔야지. 악기로 만드는 거야. 마치 피아노처럼, 누르면 원하는 음이 나오는 상태로. 성악(聲樂)이란…….”

인간의 성대(聲帶)를 악기(樂器)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가수는 기계란 말이 아예 틀린 말도 아니지. 백설, 올라가면 관객 따위는 신경 쓰지 말고 노래에만 집중해. 오로지 노래에만.”

노래만이 너의 세계가 되도록.

* * *

박영모는 허탈하게 웃으면서 백설하의 무대를 감상했다.

‘팝스타 같아.’

실제로 팝스타의 곡을 부르고 있으니, 박영모의 감상은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리라.

백설하는 온전히 무대에 집중하여 노래를 뽑아내고 있었다. 그 음정 중 하나도 맞지 않는 게 없었다.

마치 기계 같다고, 박영모는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기계라 해서 거무튀튀한 납 색의 어두운 빛깔을 말하진 않았다. 백설하는 팝스타와 같은 아우라를 사방으로 뿜어내고 있었으니까.

‘대단하다…….’

00년대 초 가수로 데뷔한 박영모는, 그 나이의 젊은이들이 으레 그렇듯 선진국의 문화를 동경했다.

노래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사람답게, 그가 ‘진짜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만한 아우라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팝스타들의 노래는 ‘진짜’였다.

‘들을 때마다 감탄했었지.’

대중음악의 종주국인 미국의 팝은 언제나 박영모를, 그 시대의 젊은이들을 매료시켰다.

대한민국, 강박증에 걸린 이들의 나라.

강박적으로 경제성장에 몰두했던 것처럼, 대한민국의 음악인들은 강박적으로 음악적 수준 향상에 몰두했다.

팝을 모방하면서.

베끼고, 모방하고, 도둑질하고, 가져와서 조각내고, 다시 붙이고, 재창조하고, 그리고 현재에 이르렀다.

그 모든 행위는 동경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선진 문화에 대한, 한국과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문화적 찬란함에 대한 동경.

‘설하 같은 사람이 정말 나올 수 있구나…….’

팝스타를 동경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다.

그들 모두 너무나 멋졌다. 아름다웠다.

노래를 잘 불렀다. 음악적으로 뛰어났다.

노래, 춤, 패션, 말투, 사상, 모든 게 너무나 세련됐었다.

‘설하 같은 사람이 정말 한국에서도…….’

하지만 팝스타들은 미국이기에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시의 모든 한국인이 그리 생각했다.

미국에서 스타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발굴된다. 지역 씬에서 이름을 알린 이들이 메이저 음반사와 계약하여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각양각색의 재능이 별이 되어 하늘에 걸린다.

그건, 대중음악 인프라를 거의 백 년에 걸쳐 발전시킨 미국이기에 가능하다.

그래서 한국의 프로듀서들은 스타를 발굴하는 대신 만들기로 했다. 문화적 인프라가 빈약하디 빈약했던 한국에선, 미국처럼 별을 입맛대로 건져 올릴 수가 없으니까.

‘한국에서도, 저런 아우라를 만들 수 있구나.’

해외에서 아이돌은 흔히 체육인과 비교된다.

재능이 있는 이를 어릴 때부터 혹독한 훈련 과정에 몰아넣고 완성될 때까지 두드리는 것이다.

노래를 가르친다.

춤을 가르친다.

연기를 가르친다.

팬들에 대한 매너를, 해서 될 것과 안 될 것을 가르친다.

그 과정을 수년이나 반복한다.

노래를 못 부를 수 없다.

춤을 못 출 수 없다.

스타의 자질이 없을 수 없다.

강제로 스타를 만들어내는 체계.

스타 시스템은 한국에서 완성되었다. 공장처럼 스타를 찍어내는 체계가, 정말로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미국이었으면 반독점법으로 고발당해 산산조각 날 게 분명한 한국의 대형 기획사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프로듀싱, 매니지먼트, 퍼블리싱이 일체화된 독점적 기업 형태가 스타 시스템을 지탱한다.

또한, 대한민국 국민들이 그 비인간적인 체제를 용인한다.

‘기계 같아. 아니, 기계잖아.’

사람들의 선망을 이끌어내는 기계다.

백설하는 별이 되기 위해 키워졌다.

‘정말 잘 부르네…….’

박영모는 백설하의 무대에 감탄하는 동시에 설움이 복받쳤다.

자신도 백설하처럼 어린 시절부터 노래를 제대로 배웠다면, 지금보다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자꾸만 후회된다.

00년대 초반, 제대로 된 실용 음악 학원 하나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웠다.

애초에 00년대 후반 오디션 프로그램 붐이 일기까지, 일반 대중들은 실용 음악의 존재조차 모르고 사는 경우가 허다했었다.

‘나도 조금만 더 늦게 태어났으면…….’

지금은 성대와 발성이 습관과 버릇으로 굳어져서, 바꾸려 해도 바꿀 수가 없다.

이 실력은 경험으로 쌓인 것이지, 체계적인 훈련으로 쌓은 게 아니다.

박영모는 위태롭게 쌓인 탑이었다. 더 높게 쌓겠다고 벽돌을 올리면 무너진다. 더는 실력적 향상을 도모할 수 없는 상태다.

박영모는 후배의 찬란함을 보자 회한이 몰려와 눈물이 나왔다. 닦고 싶었지만, 가면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그래, 축하해주자.’

적어도 후배들은 자신처럼 재능에 의지하며 맨땅에 헤딩할 일은 없을 테니까.

백설하의 무대가 끝났다.

박영모는 판정단의 환호 속에 자신의 박수를 시원하게 실어주었다.

마침내 이만한 스타가 탄생할 토양을 만들어낸, 수많은 음악계 선배와 동료들을 향한 감사도 함께였다.

[승자는……!]

간발의 차였다.

박영모는 후련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 * *

이인성은 대기실에서 메이크업을 받았다.

현재 녹화 현장을 보여주는 모니터에서 환성이 들려왔다. 잠깐 상념에 빠져 있던 이인성은 누가 이겼는지 듣지 못했다.

메이크업 스태프에게 물었다.

“‘노래도 잘하는 귀여움 천재’가 3라운드에서 이겼어요.”

“그래요.”

이인성이 은은한 미소를 품었다.

그때 스태프가 망설이는 투로 말했다.

“저, 선생님.”

“네?”

“오늘은 가슴에 장식을 더 다셨네요. 개인적으로 가져오신 건가요?”

스태프는 아까부터 이인성의 가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정교한 세공이 들어간 멋들어진 금속 훈장이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금색 테두리의 꽃잎에 초록 보석을 새겨넣은 훈장이었다. 아무리 봐도 방송국에서 분장용으로 준비할 법한 퀄리티가 아니었다.

“아, 이거요. 프랑스에서 받은 거예요.”

“훈장이에요?”

“하하하, 부끄러운데. 문화공로훈장이라고 해요. 뭔가 문화적으로 좀…… 기여를…… 하하! 제 입으로 설명하려니까 되게 부끄럽다.”

“와아, 대단하세요. 프랑스는 예술의 나라라고 하잖아요. 거기서 받으신 거면 정말 대단한 거 아녜요?”

“뭐, 음, 좀, 음, 에이, 아니에요.”

그러면서도 이인성은 얼굴에서 뿌듯함을 감추지 못했다.

메이크업이 끝나고, 그는 가면을 쓰고 대기실을 나섰다. 그러면서 가슴에 찬 훈장을 손으로 더듬었다.

‘오랜만에 제자 만난다고 멋 부려버렸네. 에휴, 창피해라.’

프랑스 문화 공로 훈장.

총 세 단계가 있다.

첫째, 슈발리에(기사).

둘째, 오피시에(사관).

그리고 현재 이인성이 가슴에 달고 있는 것.

‘코망되르(사령관).’

프랑스 파리 에꼴 노르말 음악원 석좌교수.

팝페라의 황제.

이인성.

그는 빨리 제자를 보고 싶은 마음에 흥겨운 걸음을 내디뎠다. 마치 시원한 밤거리를 걷는 것만 같았다.

문화의 총아는 별빛이 흐르는 밤을 그저 즐거이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유달리 빛나는 별을 만났다.

백설하.

어둠을 배경으로 사제(師弟)가 조우했다.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는 관심사가 아니었다. 둘의 주변으로 투명한 벽이 쳐지고, 곧 그들은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상자 안에서 오로지 서로만을 인식했다.

둘은 가면을 쓰고 있음에도 서로를 알아보았다.

“백설…….”

이인성이 고개를 저었다.

태양을 형상화한 가면이 좌우로 흔들렸다.

“‘노래도 잘하는 귀여움 천재’, 잘 부탁합니다.”

백설하는 한 손에 쥐고 있던 스탠드 마이크의 발판부를 신발 굽으로 툭 쳤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스탠드에 꽂혀 있던 다이나믹 마이크가 뽑혀 나와 백설하의 손에 쥐어졌다.

그녀는 그것을 검이라도 된 것처럼 서늘한 기세로 붙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선생님, 갑니다.”

이인성의 눈이 당황으로 크게 떠졌다.

“그, 그래, 백설…….”

하지만 그의 눈꼬리는 곧 당황을 지워버리고 따스하게 휘었다.

“……공주.”

이인성이 허벅지 옆에 늘어뜨리고 있던 마이크를 입 가까이 가져갔다.

“와라.”

태양과 태양이 마주하고, 세상이 소리의 빛으로 물들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