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95화 (395/760)

395화

밤 9시.

가로 엔터에서의 공식적인 트레이닝 스케줄이 끝났다.

가로 엔터의 남자 연습생들은 두 단계로 갈린다. A반과 B반이었다.

이름대로 A반이 더 우수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소위 ‘심화 수업’이라는, 개인의 특성에 맞춘 트레이닝 스케줄이 추가된다.

“후우.”

유우토는 연습실 바닥에 앉아, 수업을 마치고 나서는 댄스 트레이너를 바라보았다.

‘역시, 한국어로 수업하는구나.’

유우토는 눈으로 수업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역시나, 학교에서처럼 만족스럽지 않았다.

‘새로 다니게 된 고등학교에선 말도 제대로 못 하고……. 교과서도 못 읽고……. 그나마 수학 문제는 일본에서 풀어봤던 거랑 비슷하게 생겨서 감으로 어떻게든 할 수 있지만…….’

새삼 언어란 정말 큰 장벽이란 것을 느낀다. 누나인 리카는 어떻게 1년 만에 한국어를 마스터했을까, 존경스러워질 지경이다.

그는 시선을 슬쩍 돌려 김사무엘을 바라보았다. 그도 B반이었다.

‘뭐야. 잘난 체는 잔뜩 하더니, 자기도 B반이네. 난 또 A반인 줄…….’

뭐, 그러면 어떤가.

어쨌거나 자신에게 유일하게 말을 걸어주고, 또 도와주려고 하는 연습생인데 말이다.

‘누나 때문이겠지?’

유우토와 김사무엘의 첫 만남은 오해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김사무엘은 B반의 연습생들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런 그는 새로 들어온 연습생에게 시비 걸린 일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조금 남자다운 방법으로 일을 해결하려고 했는데, 사달이 난 것이다.

‘네에쨩(누나)…….’

‘누가 우리 유우쨩을 울린 거야아아아아!’

유우토가 리카의 남동생이란 것을 안 김사무엘은 사색이 되었었다. 그리고 유우토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을 준비까지 했었다.

하지만 일은 부드럽게 풀렸다.

홍규헌의 앞까지 불려간 두 연습생은, 모든 일이 오해였단 것을 알고 화해할 수 있었다.

‘내가 누나 동생이니까, 사무엘은 혹여나 불이익받을 게 무서워서 나한테 관심을 가져주는 걸 거야.’

하지만 유우토는 그런 관심마저도 달다.

어쨌거나 타지이니, 어떤 이유로든 친구가 있으면 버팀목이 될 것이다.

다른 이들은 유우토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자기 일만 해도 바쁘다는 듯, 주변에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유우토는 일어나서 가볍게 스트레칭했다.

‘자, 그럼 돌아갈…….’

집으로 가려던 유우토는 멈칫했다.

다들 집에 가려는 기색이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무언가 전달 사항이라도 있나? 유우토는 쭈뼛쭈뼛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도 상황을 알 수가 없어, 유우토는 김사무엘에게 다가갔다.

“저, 사무엘.”

유우토가 부르자, 김사무엘은 자연스럽게 번역기 어플을 켰다.

“왜.”

“또 트레이닝 있어?”

“아…….”

김사무엘이 미소 지었다.

왠지 모르게 안타까움이 섞여 있는 듯했다.

“없어.”

“그럼 왜 다들…….”

“자체적으로 연습하는 거지.”

“아, 그렇구나. 사무엘 너도?”

“난 좀 짧게 해. 한 11시까지. 동생을 보러 가야 하니까.”

“11시?!”

“뭘 놀라. 여기 있는 애들 전부 기본 12시 넘어서까지 연습해. 많이 하면 새벽 2, 3시까지 하기도 하고.”

유우토는 얼이 빠졌다.

왜 김사무엘이 자신을 안타깝게 보았는지 알겠다.

그와 화해하고 대화를 나눌 시간이 있었다. 그때 유우토는 언어가 제1의 과제이니, 하루에 한국어 공부만 서너 시간씩 한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애초에 한국어만 그렇게 공부할 시간 따위, 있을 수가 없다.

“다들 필사적이야. 공부 대신 아이돌이 되길 택했으니까. 고3은 보통 새벽 돼서까지 공부하니까, 우리도 비슷한 거지.”

김사무엘이 유우토의 품에 생수병을 안겼다.

“그래서, 넌 가려고?”

“…….”

* * *

유우토는 이제 본인의 집이 된 원룸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닥에 뻗었다.

시간은 새벽 1시가 훨씬 넘었다.

‘죽을 거 같아…….’

방과 후 밴드부 생활은 정말 별 게 아니었단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한국 아이돌은 죄다 이렇게 해서 데뷔하는 거야?’

무슨 스타 양성소도 아니고.

물론 유우토는 ‘소녀연맹 비긴즈’라는 아이튜브 영상 시리즈를 통해, 케이팝 아이돌이 얼마나 고된 과정을 거쳐 데뷔하는지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직접 겪으니, 정말 사람이 못 할 짓이란 게 느껴진다.

‘이런 생활을 몇 년이나…….’

공부는 졸업이라도 있지.

수능은 각이라도 보이지.

연습생은 될지 안 될지도 모르면서 청춘을 갈아 넣는다. 심지어 안 되면 뒤도 없다.

공부처럼 적당한 대학을 맞춰 들어간다, 그런 타협안마저 없다. 연습생이란 나이가 차면 거기서 끝나는 거니까.

‘나, 어쩌면 되게 무모한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아이돌에 도전하는 이들이 1,000명이라면.

100명만이 연습생이 된다.

그중 10명만이 데뷔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름이 알려지는 건 또 그중 1명.

‘0.1%의 확률…… 아니, 그것보다 낮겠지.’

텔레비전에 얼굴 한번 비추는 게 도쿄대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인가.

유우토는 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둠만이 그의 위로 내리 앉았다.

‘노래를 부르려면, 내 목소리를 사람들한테 들려주려면, 이래야 하는 건가. 이렇게 몇 년이나 살아야…….’

새벽이라 그런가, 감성이 차올라서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울지 않았다.

유우토가 바라보는 어둠 속에는 별이 있다. 별의 이름은 리카였다. 유우토는 그 별을 지침 삼아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

‘누나도 이랬던 거야.’

누나인 리카도 다 겪었던 일이다.

‘내가 하기로 했어. 버텨야 해. 아니.’

이겨야 한다.

‘이미 나는 어느 정도 이겼어.’

아이돌 되기 위해 필요한 것.

첫째로 외모다.

아이돌이란 직업은 태어날 때부터 될 수 있는 사람과 될 수 없는 사람이 갈린다.

철저하게 쌓인 재능의 봉건제에서, 유우토는 그나마 위를 바라볼 수 있는 위치로 태어났다.

‘몇 번 더 이기기만 하면 돼.’

‘잘생기게 태어난다’는 극악한 확률마저 뚫은 자신 아닌가. 그에 비하면, 남아 있는 도전 따위 별거 아니다.

‘다른 점은, 태어나는 건 내 노력과는 상관없다는 거지…….’

그래도 뭐, 로또도 당첨되면 축하받는 세상이니.

잘생기게 태어난 자신을 향해 ‘넌 이겼어, 축하해!’란 생각 정도는 할 수 있겠지.

“힘내라 이시카와 유우토! 넌 할 수 있어!”

그래, 할 수 있다.

본인이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더라도.

‘가로 엔터가 내 재능을 봐줬으니까.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 거야. 난 그걸 믿어. 사장님이, 손 이사님이, 나를 불러주신 이유를 믿어…….’

유우토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연습생 D+1.

앞으로 D+ 앞에 얼마나 많은 숫자가 새겨질지, 세상 아무도 몰랐다.

믿음만이 그 인고의 시간을 버티게 할 것이었다. 어쩌면, 결국엔 유우토를 처절하게 배신할지도 모르는 믿음만이.

모든 연습생들처럼, 유우토 또한 배신을 걱정하면서도 믿음의 끝자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기상까지 3시간 30분.

* * *

“와…….”

백설하의 열창이 끝나자 조아라는 손의 지문이 다 닳도록 박수를 쳤다.

눈에는 동경의 빛이 가득했다.

“쌤 진짜 가수로 데뷔해요. 그 재능 두고 왜 썩이고 있어요?”

“가수잖아!”

“아 맞다.”

이틀 뒤 ‘더 언노운 싱어’의 녹화가 있다.

회차 방송은 3주에 걸쳐서 나가지만, 녹화는 하루 만에 끝나게 된다.

즉, 이틀 뒤엔 모든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이틀 뒤, 내가 선생님과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알게 돼.’

대망의 때가 다가오자 기대와 두려움이 동시에 백설하를 휘감았다.

결과를 빨리 확인하고픈 기대와, 패배가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공존했다. 시간이 빨리 갔으면 좋겠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백설하는 모순 속에 있었다.

“나도 언제 쌤처럼 노래할 수 있을까요.”

조아라는 백설하에게 물을 건네며 물었다. 그에 백설하는 성필이 이전에 해주었던 당부가 떠올랐다.

모든 멤버들이 메인 포지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해달라는, 그야말로 꿈과 같은 이야기였다.

“연습하면 돼.”

“아니, 연습해도 쌤처럼 되려면 힘들죠. 쌤이 나만큼 춤추는 정도?”

“그, 그건 그러네…….”

역지사지로 생각하니 바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와닿았다.

백설하는 조아라의 춤을 보며 감탄할 때가 많았다. 소녀연맹의 안무는 그렇다 쳐도, 조아라의 프리스타일 댄스는 정말 눈이 번쩍 뜨일 정도다.

‘사람들이 아라의 춤을 많이 안 봐주는 게 아쉬워.’

세상 사람 전부 조아라가 얼마나 재능 넘치는 인간인지 알아주길 바란다.

“뭘 인정하고 있어요.”

“응?”

조아라가 백설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내가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나처럼 못 된대요. 쌤은 할 수 있어요.”

“아라야…….”

“하루에 16시간 정도 연습하면 몇 년 뒤에?”

“못 된단 뜻이잖아!”

“들인 시간이 있으니까요.”

조아라가 피식 웃었다.

그 말대로였다.

소녀연맹의 메인 보컬과 메인 댄서인 둘은 알게 모르게 서로를 존경하고 있었다.

서로가 각자의 분야에 들인 시간과 노력이 얼마나 큰지 알기에,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근데 꼭 나만큼 될 필요는 없잖아요. 아니, 되지 마요.”

“어?”

“쌤 춤 실력이 나만큼 되면 메인 댄서 조아라도 없을 거 아녜요. 난 걍 쩌리 되는 건데.”

백설하의 정신에 번쩍 번개가 쳤다.

‘그러게. 다들 각자의 자리가 있기에 의미가 있는 건데…….’

만약 실력이 비슷비슷해진다면, 개성이란 게 있을 수 있을까? 서로가 더 빛나는 자리란 게 없어지지 않는가.

그건…….

‘아니, 아니야. 이사님이 하셨던 말씀을 기억해.’

서로가 더 빛나는 자리. 각자만의 자리.

그대로 고정되면, 소녀연맹이란 팀의 색깔에는 발전이 없을 것이다.

장르적으로 다양해져도 구조적으로는 동일하기에, 소녀연맹의 곡은 최종적으로는 비슷한 색을 띨 가능성이 높아진다.

‘못 하는 거랑 안 하는 건 달라.’

소녀연맹은 최소한 안 하는 것이어야지, 못 하는 것이어선 안 된다.

“요 녀석.”

백설하가 장난스레 조아라의 정수리를 톡, 손날로 쳤다.

“그래서, 나 연습하지 말라구?”

“동맹 맺을래요? 난 노래 연습 안 할게요. 쌤은 춤 연습하지 마요.”

“얘가 보컬 트레이닝 안 하려고 쌤한테 꼼수 부리네.”

“그럼 긴장해요.”

“응?”

조아라가 도전적으로 주먹을 들여보았다.

“메인 보컬 자리 내가 뺏을 거니까요.”

“……하.”

“방금 비웃었어요?”

“아니. 고민했어. 내가 메인 댄서랑 보컬 다 차지하면 아라는 정말 어쩌지? 그런 고민. 리카도 그렇고 아라도 그렇고, 정말 다들 주제 파악이 안 되네.”

“……크흨.”

조아라가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앙다물었다.

“쌤 그런 컨셉 하나도 안 어울려요.”

“자기가 먼저 했으면서…….”

“아니다. 어울린다고 해야 하나. 귀엽네요.”

“…….”

백설하는 숙소 화이트보드에 ‘리더한테 귀엽단 말 사용 금지’를 추가해야 하나 진심으로 고민했다.

“뭐, 연습 더 할 거예요?”

“아니. 목 아껴야 하니까 그만할래.”

“난 여기서 춤 좀 출 건데, 쌤은요?”

“난 오늘 끝.”

“그래서 언제 메인 댄서 되게요.”

“곧.”

성필의 부탁이니까, 반드시.

“그래요 그럼.”

조아라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작별의 의미로 손을 흔들었다. 백설하는 손을 흔드는 대신 포옹으로 화답하고 연습실을 나섰다.

‘휴가인데, 별다를 게 없네.’

모처럼 받은 휴가를 죄다 방송 준비로 쓰고 있다. 아직 멤버들과 여행 계획만을 짰을 뿐, 구체적으로 언제 가겠단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다.

그건 이유가 있었는데, 백설하가 자신이 ‘더 언노운’이 될지도 모른다며 설레발을 쳤기 때문이다.

‘가능성이 낮다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그러니 덜컥 구체적인 날짜까지 정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애들이 말한 거 진짜일까.’

여행을 간다면 운전기사는 성필로 하자,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조아라가 특히 그 제안에 열정적이었다. 장하양은 ‘이사님한테 실례가 아닐까요’라면서 소극적이었으나, 막상 여쭤본다면 말리진 않겠다고 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지…….’

가로 엔터의 이사를 운전기사로 부려 먹는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에 조아라는 ‘같이 놀러 가는 거면 부려 먹는 게 아니다’라는 논리로 대응했었지만.

‘그거나 그거나 마찬가지지.’

성필이 어린아이인 소녀연맹과 놀러 가는 게 재미있을 리 없다.

‘그나마 성인인 내가(소녀연맹 전원은 성인이다) 있으니 낫겠지만…….’

그때 백설하의 눈에 익숙한 모습이 잡혔다.

유우토였다. 그는 지친 눈빛으로 한 걸음 두 걸음 계단을 내려오는 중이었다.

‘아, 정말 왔구나.’

유우토가 온다는 소식에 리카가 들떴던 게 아직도 눈에 선하다.

리카는 만났다는 모양이지만, 아직 다른 소녀연맹 멤버들은 유우토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었다.

‘많이 컸네.’

옛날에 가로 엔터로 왔을 때는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어린애였었는데, 이젠 제법 남자인 티가 났다.

‘그리고…….’

괘씸하다.

감히 누나의 동료들에게 인사 한번을 안 하러 와? 이건 사회생활의 예의가 없는 것이다.

리카의 언니로서, 이 부분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만 했다.

농담이고, 그보다는 리카의 동생이란 점에서 말이라도 한번 걸어보고 싶다. 앞으로 같이 지낼 테니 말을 트는 것도 좋을 테고 말이다.

“유우토!”

백설하가 능숙한 일본어 발음으로 유우토를 불렀다. 그러자 유우토는 깜짝 놀라 백설하를 보더니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만 꾸벅 숙이고 허둥지둥 계단을 내려왔다. 다리에 근육통이라도 있는 듯 움직임이 더디기 그지없었다.

‘……뭐야.’

고작 고개만 꾸벅?

‘이, 이건 진짜 예의가 없는 거 맞지? 뭐라고 해도 되는 거지?’

낯가림이 심하다기엔 유우토의 태도가 심히 예의가 없었다.

‘나, 나는 리카의 언니인데. 아니, 같은 회사 선배인데 저렇게…….’

연예계의 철통같은 위계질서에 적응한 백설하로선 유우토의 행동에 어이가 없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이건 정말 그냥 보아줄 일이 아니었다.

“유우토!”

백설하는 성큼성큼 유우토에게로 걸어갔다. 그러자 유우토가 뒤를 돌아보더니, 아까보다 안색이 창백해져서 더욱 빨리 계단을 내려갔다.

마침내 2층에 도달한 그는 허겁지겁 1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선배를 봤으면 인사를 제대로 해야지!”

계단으로 내려가기 전, 백설하가 유우토의 손목을 잡아 세웠다.

“으에, 에, 에에에…….”

유우토는 귀신에게라도 잡힌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는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팔을 흔들었으나, 백설하는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선배가 아니더라도 예전에 봤잖아! 고개만 꾸벅 숙이는 건 아니지!”

“에…….”

“‘에’가 아니야! 너 다른 분들한테도 이렇게 행동해? 아니지? 그러면 안 돼!”

“아니, 아, 아니이…….”

“내가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는데, 네가 리카 동생이니까…….”

유우토는 패닉에 빠졌다.

그의 머릿속엔 오직 김사무엘이 했던 ‘소녀연맹 대선배님들과 한마디라도 섞었다간 즉시 퇴출’이란 말밖에 없었다.

김사무엘과의 오해로 다툼을 벌였던 때도, 사장실에서 다시금 들었던 말이었다.

‘한마디라도 섞으면 퇴출!’

안 된다.

그래선 안 된다.

만약 누가 이 광경을 보기라도 한다면, 유우토는 오명을 뒤집어쓸 게 분명하다.

사실이 아니더라도 의심을 피할 수 없다.

‘안 돼. 나는 아이돌이 돼야 해! 고작 이 정도 시련에 무너질 수는 없어! 절대로!’

그렇다면, 먼저 자신의 무고함을 알려야 한다.

“다스케테에에에(도와줘어어어)!”

유우토가 울먹이면서 비명을 내질렀다. 그를 잡고 있던 백설하는 얼이 빠졌다.

“……어?”

그때 복도 모퉁이에서 소리를 듣고 한구인이 달려 나왔다.

“무슨 일입니까!”

그리고 한구인은 보았다.

울먹이는 유우토와. 그런 유우토의 손목을 거칠게 잡은 백설하를.

한구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설하 씨 어째서!”

“으헤?”

“뭔데, 누가 소리쳤어!”

같은 모퉁이에서 성필도 나타났다. 그 또한 한구인처럼 사태를 파악했다.

성필은 다리가 풀려 휘청거리고, 풀 데 없는 안타까움을 담아 말했다.

“대체 설하야 왜! 1년만 더 참으면 됐는데! 1년만 더 있으면……!”

“느, 느헤?”

“어째서 이런 짓을!”

“누군가요!”

매니저팀 대기실에서 매니저 김수희를 괴롭히고 있던 리카마저 나타났다.

그녀는 백설하와 유우토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처절하게 외쳤다.

“손나아아아아(그러어어언)!”

그 순간 아까까지 복도에서 성필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장하양마저 모퉁이에서 나타났다.

그녀 역시 모든 상황은 단숨에 파악했다.

장하양이 양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파이팅!”

* * *

[징계 건의서]

[건명(件名): 성추행]

[건의일시: 20XX.0X.XX]

[징계안건 및 요구양정: 근신]

[징계 대상자

소속: 소녀연맹

직명: 리더

성명: 백설하]

[경위: 20XX.0X.XX. 미디어 감상실로 가던 연습생 이시카와 유우토(이하 유우토)에게 백설하가 다가와 손목을 잡고 강압을 행사……(생략).]

“저 놀리는 데 맛 들이셨네요…….”

백설하는 진이 다 빠져선 성필이 가져온 서류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심지어 이렇게 정성스레…….”

“옛날에 아라한테 썼을 때 효과가 좋더라고. 재미없어?”

“성추행했다는 데 재밌어할 사람이 어딨어요!”

백설하는 테이블에 올렸던 서류를 쥐고 마구마구 구긴 다음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아무튼 뭐, 내가 우려하던 상황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저도 깜짝 놀랐다구요…….”

세상에, 연습생 사이에 소녀연맹과 대화하면 퇴출이라는 규정이 있을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일본 활동에서 돌아온 날에도, 소녀연맹을 발견했던 남자 연습생이 네발짐승처럼 기어서 3층으로 도망간 일이 있었다.

오늘은 그때 받았던 충격보다 훨씬 컸었다.

백설하는 마음을 간신히 다스리고, 아직도 장난스러운 미소를 띤 성필을 불렀다.

“이사님.”

“응?”

“저,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부탁인데요.”

“아휴, 설하 부탁이면 뭐든 해주지.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게.”

“저희 다 같이 여행 가는데 운전해주시면…….”

“보자 보자 하니까 못 하는 말이 없네.”

“여, 역시 그렇죠오…….”

“운전 때문에 그렇지? 그건 확실히 문제겠네. 차라리 교통편이 편한 펜션으로 알아보는 쪽이 낫지 않아?”

“네, 그럴게요.”

“아니면…… 매니저들한테 부탁할까?”

“그래도 괜찮을까요?”

“비활동기이니 매니저들도 공휴일을 지켜주고 있거든. 그러니까 평일이면 괜찮아.”

“아, 말씀드려보길 잘했어요.”

좀 아쉽긴 하지만.

“알겠지 유우쨩!”

응접실 문이 열리고 리카와 유우토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쁜 누나들이 말을 걸어도 절대로 대답하면 안 돼! 맛있는 거 준다고 해도 따라가면 안 돼!”

“으, 응, 누나.”

유우토는 머쓱해하며 응접실로 들어왔다. 리카는 유우토를 남기고 떠나가려던 중, 백설하와 눈이 맞았다.

그리고 협박하듯이 자신의 눈과 백설하의 눈을 번갈아 검지로 가리켰다.

‘지켜보겠다’는 뜻이었다.

백설하의 얼굴이 또 우울해졌다.

“죄송합니다, 누나…….”

유우토가 죄송스럽단 듯 허리를 숙였다.

“아니야, 나도 그런 룰이 있는 줄은 몰랐어. 사과할게.”

“…….”

“…….”

성필은 몸을 일으켰다.

“둘이 적당히 얘기하다가 나가. 난 일 때문에 먼저 가볼게.”

백설하와 유우토가 나가는 성필을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 그리고 응접실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막상 둘 사이를 터주려고 자리를 마련했건만, 둘 사이에 할 이야기가 있을 리 만무했다.

백설하가 말을 걸었던 건, 그냥 지나가는 길에 유우토가 보였기 때문이었으니까.

“그으, 유우토는 가수 된다고 했었지 않아? 밴드부도 했었고.”

“네, 대선배님.”

“아? 아, 응. 아이돌로 괜찮은 거야?”

“오히려 아이돌이니까 좋아요.”

“어? 뭐가?”

“아이돌이 되면 더 많은 분이 제 노래를 들어줄 거니까요. 누가 뭐래도, 아이돌은 그러니까…… 일반 가수보다는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해야 할까요…….”

백설하는 이해가 잘 안 됐다.

아이돌이 되고 싶어서 되는 게 아니라,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아이돌이 된다고?

백설하와는 다른 케이스였다. 그녀는 물론 노래를 좋아하지만, 노래를 배웠던 건 아이돌이 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유우토는 그와 정반대였다.

그는 노래를 위해 아이돌이 된다.

“노래를 부르고 싶은 거지?”

“네.”

“하지만, 아이돌은 노래 말고도 여러 가지를 해야 해. 춤도 추고, 연기도 하고, 팬과 소통하고, 정말 여러 가지로…….”

“제 노래를 듣는 분들이 많아진다면, 오히려 뭐든 하고 싶어요.”

그 말은 백설하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마치 폭포와 같았다.

첫 번째 울림은 에리카로부터 왔었다. 샤워실에 떨어지는 물 한 방울처럼 얕지만,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울림이었다.

두 번째 울림은 위세라로부터 왔었다. 여름날의 소나기처럼 굵고 힘찬,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울림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유우토였다.

‘노래를 들려줄 수만 있으면…….’

노래로만 승부할 필요는 없다. 애초에 그건 바보 같은 생각이다.

가장 중요한 건 많은 사람들이 듣는 것이다.

백설하가 만난 모든 이들이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난…….”

“예?”

“아, 아니야.”

이런 고민을 연습생에게 말해봤자 뭐 하겠는가. 아니, 후배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이야기를 돌려야 한다.

그때 문득, 백설하는 성필이 장난으로 작성했던 징계 건의서를 떠올렸다.

“미디어 감상실 가려고 했어?”

“아, 네. 앨범을 들으려고요. 거기 스피커가 좋대서.”

“가지고 있어? 어떤 거야?”

유우토는 메고 있던 메신저 백에서 앨범을 한 장 꺼냈다.

백설하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그녀는 유우토가 내민 앨범을 받았다.

“아리…….”

팝스타 ‘아리아나 그란데’의 애칭이었다.

백설하도 가지고 있는 앨범이다.

그 앨범 커버는 굉장히 도발적이었다.

상반신을 탈의한 아리아나 그란데가 어둠을 배경으로 가슴을 팔로 감싸서 가리고 있었다.

가슴이 굉장히 크다.

“가슴…….”

“커, 커버 때문에 산 거 아녜요!”

백설하는 생각에 빠져 대답이 없었다. 유우토는 그것을 무언의 힐난이라고 받아들였다.

“물론, 레코드샵에 가서 커버 때문에 눈에 띈 건 사실인데요! 사실이긴 한데요!”

“역시 눈에 띄는구나…….”

“당연히 눈에 띄었지만! 그렇지만! 저는 팝스타의 명성을 듣고 그 음악적 성과에 대한 의심 없이 구매한 거…….”

“눈길이…… 가는구나…….”

눈 다음은 귀일 것이다.

시선을 끌면, 그 시선이 노래를 향한 관심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가슴이 크단 건 좋은 거네…….”

“이, 일반적으로는 네, 선호되는 경향이…….”

“나도 가슴 큰 남자가 좋아.”

“……예?”

“아니, 흉근이 도드라진 남자가 좋아.”

백설하는 앨범을 쥐고, 왠지 벅찬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유우토는 그녀의 말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

“키 큰 남자가 좋, 아니, 175센티미터 이상이면 돼! 나도, 나도…… 두 사람이 노래를 부르면, 이왕이면 몸 좋고 잘생긴 남자한테 눈이 갈 거야…….”

백설하는 동경하는 팝스타의 앨범을 꼭 쥐었다.

“그래. 팝스타들도 이래. 그런데 내가 뭐라고…… 나 따위가 뭐라고…….”

“대선배님?”

“애초에 이 세계는 고집을 부려서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아닌 거야. 이길 수 있다면, 자그마한 관심이나 시선도 끌 수 있다면, 합법의 테두리 내에서 뭐든 해야 해! 아니!”

백설하는 벌떡 일어났다.

“내게 주어진 매력을 써야만 해! 고마워 유우토.”

“예? 어, 그,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요…….”

“이만 가볼게.”

백설하가 응접실을 떠났다. 유우토는 그녀가 나간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 앨범은……?”

이게 삥 뜯긴다는 걸까.

유우토는 소중한 앨범이 없어졌단 사실에 울적해졌다.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중, 자신의 가슴에 눈이 갔다.

운동하지 않아서 평평하기 그지없는 가슴이다.

“……!”

그래, 알아냈다!

‘아이돌의 조건! 우상이 되는 법!’

유우토가 벌떡 일어났다.

‘흉근이 필요해!’

모든 여자의 눈을 사로잡을 근육이 필요하다!

‘당장 운동을 시작해야겠어!’

유우토는 응접실을 나섰다.

그리고 달렸다.

그가 중얼거렸다.

“흉근이 필요해. 더 큰 흉근이…….”

달려라 유우토!

* * *

사무실에 있던 성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둘러보면서, 사무실의 이들에게 호소했다.

“아, 아니에요. 제가 안 그랬어요…….”

성필의 앞에는 초롱초롱한 눈빛의 백설하가 있었다. 그녀는 아까부터 일장 연설을 펼쳤다.

“이사님, 결정했어요. 이사님 말씀이 맞아요. 이 세계는 가진 걸 제한해서만 싸울 수는 없어요. 제게 주어진 무기를 써야만 해요.”

“여러분 믿어주세요. 제가 안 말했어요…….”

성필은 거의 울먹였다.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을래요. 자랑스러워할래요. 이사님 말씀대로요.”

“제가 아니에요, 저는 이런 말 한 적 없어요…….”

“더는 안 감춰요. 당당하게 드러낼래요. 왜냐하면, 이게 제가 가진 매력이니까요.”

“제발 믿어줘어…….”

“저, 드러내겠습니다!”

백설하는 그리 선언하곤, 혼자만 후련해져서 사무실을 나갔다.

남겨진 성필의 어깨 위로 누군가 손을 올렸다. 한구인이었다.

“박 이사님.”

“하, 한 이사님……. 한 이사님은 믿어주시는 거죠? 제가 설하한테 저런 말 한 거 아니에요 정말로…….”

“알겠습니다. 일단 진정하시고, 저를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징계 건의서]

[건명(件名): 성희롱]

[건의일시: 20XX.0X.XX]

[징계안건 및 요구양정: 경고]

[징계 대상자

소속: A&R팀

직명: 메인 프로듀서

성명: 박성필]

[경위: 20XX.0X.XX. 박성필 이사는 언어적으로 소녀연맹 멤버 백설하에게 신체적 매력 노출의 당위성을 지속적으로 설파했으며, 이는 개인의 신체를 직접적으로 언급했으리란 추측이 가능하므로……(농담).]

* * *

‘더 언노운 싱어’의 메인 PD는 백설하가 입은 의상을 보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사실, 의상은 특별할 게 없었다.

아이돌리시하다고 표현하면 적당했다. 하지만 그것을 입은 사람이 백설하였다.

“이, 이이, 시안이랑 다르, 다른데요오……?”

PD는 예상치도 못했던 상황이라 말까지 더듬었다.

백설하의 모습이 어떻느냐.

지극히 아이돌다웠다.

가죽 디스코팬츠에, 마찬가지로 검은 가죽의 탱크톱이다. 그것뿐인데, 그 위에 귀여운 곰돌이 가면을 씌운 것만으로도 신체를 더욱 부각하게 되었다.

곰돌이 가면을 넘어 백설하의 목소리가 울렸다.

“저는 아이돌이니까요. 아이돌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내 봤어요. 이 복장으로 나갈게요.”

“…….”

PD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음방에도 내보내는 복장인데, 설마 예능에서 이 의상을 내보냈다고 부르지야 않겠지만.

‘그래, 방통위 한번 다녀오자.’

결심을 마친 PD가 다시금 물었다.

“그럼, 그 옷으로 확정인가요? ‘노래도 잘 부르는 귀여움 천재’.”

백설하, 곰돌이 가면의 눈이 성필을 향했다. 성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설하는 아이돌로서 무대에 오릅니다.”

가수들의 무대에, 아이돌이 오른다.

“그리고 미리 말씀드렸던…….”

“네, 가능합니다. 만약 ‘더 언노운’ 결정전까지 오르시면, 글로브 세라 씨의 가면이던 ‘승리의 여신 니케’를 쓰셔도 됩니다.”

이는 제작진들 사이에서도 호평인 기획이었다. ‘승리의 여신 니케’의 친구인 ‘노래도 잘 부르는 귀여움 천재’가 복수전을 펼치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성필과 백설하는 기획실을 나섰다.

나오자마자 성필이 물었다.

“설하야, 준비됐어?”

백설하는 ‘승리의 여신 니케’의 가면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것을 성필에게 조심스레 넘겼다.

“네.”

백설하가 자신의 가면을 다시 조정했다.

곰돌이가 형형한 안광을 토해냈다.

“저, 아이돌이 됩니다.”

아이돌로서 이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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