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화
“심지어 다 팝송이잖아요. 이걸로…….”
경연에서 이길 생각인가?
위세라는 백설하가 진심으로 경연에 임하고 있는지 의심될 지경이었다.
음악과 문화엔 국경이 없다지만, 언어는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커다란 장벽으로 작용한다.
당연히 외국어보다는 한국어로 노래 부르는 게 청중이나 판정단에게 호소하기 훨씬 쉽다.
가사가 노래의 영혼이라면, 팝송을 부르는 건 청중에게 가수의 영혼을 전달하기 훨씬 어렵게 만드는 일이다.
“하, 하지만 팝송이잖아.”
백설하가 소심하게 항변했다.
“영어잖아…….”
미국의 팝이 월드뮤직의 타이틀을 얻을 수 있던 이유는, 영어가 세계공용어나 다름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계에서 영어를 공교육 과정에 포함하지 않는 나라가 드물다.
설령 공부와 연이 없는 이들이라도 영어 단어나 문장 몇 개 정도는 어렵지 않게 알고 있다.
즉, 영어로 된 음악은 자동적으로 세계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국 대중음악이 발달하지 않은 나라는 음원 차트가 아예 미국 팝으로 도배되는 경우도 있다.
“저도 여기 있는 노래들 알긴 하는데요. 그래도 팝송으로 하는 건 좀 난해하지 않나 싶은데. 지금이라도 바꾸는 게…….”
위세라는 백설하의 표정을 보곤 이야기를 멈추었다. 백설하가 사탕을 빼앗겨 억울해하는 아이 같이 입술을 꾹 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세라는 질문의 방향을 바꾸었다.
“왜 팝송으로 정했어요?”
“……디바.”
“네?”
“팝 디바들…… 어렸을 때부터 동경했어.”
백설하가 고른 곡의 주인들은 전부 내로라하는 팝스타들이다.
테일러 스위프트.
핑크(P!nk).
켈리 클락슨.
노래 하나로 세상의 정상에 선 인물들.
성필은 옛날에 아이돌을, 가수나 배우 등 연예인을 현대의 영웅이자 신이라고 했었다.
세상 모든 이들이 그 존재를 알며, 사람들은 텔레비전과 인터넷이란 신전 앞에서 끝이 없을 찬양을 바친다.
팝스타들은 진정한 현대의 신이다. 미디어란 이름의 올림포스에서 고고하게 빛나는 성좌들.
“만약 누구랑 노래로 싸워야 하면, 팝스타의 노래로 싸우고 싶어…….”
심지어 상대가 스승이라면, 자신이 아는 최고의 노래들로 맞붙고 싶다.
한국의 사람들만 알 곡이 아니라, 세계를 휩쓸었던 히트곡 정도는 되어야 상대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노래에만 한정하면,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들의 곡으로…….”
위세라는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뭐라고 할 게 아니네.’
저렇게나 확신이 있고, 본인이 부르고 싶어 한다. 타인이 가타부타하는 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위세라는 폰으로 백설하가 택한 곡들을 한 번씩 들어보기로 했다.
팝스타들의 곡이 응접실 안을 채웠다. 그것을 들으며, 위세라는 초등학생으로 돌아간 기분을 느꼈다.
“진짜 오랜만이네요. 오랜만에 들어도 좋다.”
“그, 그치?”
“네. 막 옛날 생각도 나고요. 주마다 빌보드 차트 확인하면서 거기 나온 곡들은 전부 긁어서 MP3에 넣었었는데.”
“응 응 맞아!”
“검색해서 찾느라 얼마나 고생했다고요.”
“응?”
“이런 음원 다운받는 사이트들은 전부 영어로 돼 있잖아요? 초딩이 뭘 알겠어요. 여기저기 눌러보다가 막 악성 프로그램 깔리고 난리도 아니었…….”
“불법 다운 받았어?”
“네?”
“음원 사이트에서 안 사고……?”
“아니, 한 곡에 몇백 원이잖아요. 비싸서…….”
“당장 사과해! 그분들한테 사과해!”
“그땐 다 그렇게 했…….”
“사과해!”
사과했다.
백설하의 억울함 가득 서린 외침을 듣자 사과하지 않곤 배길 수 없었다.
“요즘도 그러는 거 아니지?”
“아니 옛날얘기 한 번 했다고 사람을 뭔 범죄자처럼 대해요! 워터 멜론 정기 결제로 당당하게 듣고 있습니다 네! 됐어요?!”
“그래야지.”
“하아, 진짜.”
위세라는 백설하의 선곡 리스트를 다시 훑었다.
“근데 언니, 이거 다 제대로 부를 줄은 아세요? 어려운 곡들인데.”
“응.”
“자신만만하네요. 그럼 됐고, 의상은요?”
“보여줄까?”
성필이 폰으로 백설하의 의상 사진을 보여주었다. 하늘하늘하고 품이 큰 분홍색의 공주님 드레스였다.
그것을 본 위세라의 얼굴이 썩어갔다.
“이딴 걸 입고 노래 부른다고요?”
“이딴 거라니…….”
“이거 제작진 쪽에서 만든 거죠? 팀장님이 있는데도 이런 걸로 결정했어요?”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긴요!”
위세라가 화난 듯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쿵 쳤다.
“아이돌이잖아요! 아이덴티티를 확 드러내야죠! 뭣보다 이거 옷이 너무 구려요! 무슨 100년 전 동화 속 공주님 옷이에요? 언니는 이걸로 됐어요?”
“난 괜찮은데…….”
위세라는 뒷목을 잡고 탄식했다.
“의상도, 비주얼도 무대의 큰 파트예요. 이런 이상하게 품이 넓은 옷으로 잘도 아우라가 생기겠어요. 여기의 어디가 괜찮단 건데요?”
“그게, 제작진 작가분께서 내 신체적 특징이…….”
백설하는 부끄러운 듯 말을 더듬었다.
“안 드러나는 편이 좋을 거라고 하셔서……. 정체가 노출될 수도 있으니까……. 그, 그리고…….”
“그리고, 뭐요.”
“나도 작가님 말씀에 동의해. 아니, 이렇게 하고 싶어. 난 내 노래만으로 평가받길 원해.”
“……하.”
위세라가 비웃듯이 눈꼬리를 세웠다.
“‘내 노래만으로 평가받길 원해’? 아하, 알겠다. 언니 그런 타입이구나.”
“으, 응?”
“대중음악을 얕보는 건 ‘서쪽의 오 솔레미오’가 아니라 언니였네요. 언니, 잘 들어요. 어떤 수단을 써서든 관심과 주목을 모아야 해요. 그게 우리의 지상과제라고요. 왜 아이돌을 예쁘고 잘생긴 사람으로만 뽑겠어요? 관심받기 쉬우니까 그런 거라고요!”
백설하는 당황했다.
왜 위세라가 화내는지도 알 수 없었다. 오히려 백설하는 자신의 이런 의지와 결심을 위세라가 지지할 줄 알았었다.
“이제 사람들이 좀 알아주니까 허파에 바람 차서 ‘난 노래로만 평가받을래’ 이러는 거예요? 언니가 좋아하는 팝스타들은 뭐 얼굴 없는 가수래요?”
“…….”
“얼굴이랑 몸도 우리 무기예요. 언니, 나는 사람들이 내 노래를 듣고 춤을 봐주기만 하면.”
위세라가 당당히 선언했다.
“발가벗고 거리를 돌아다닐 수도 있어요.”
“세라야 그건 아니지.”
“팀장님 나도 알거든요?! 비유잖아요 비유! 이 언니 생각하는 거 봐요! 다른 뮤지션들은 공연장에 10명 불러 모으는 것도 걱정할 판국인데, 자기는 가슴에 기름기 흐르니 아니, 배에 기름기 찼으니까 저런 배부른 말이나 하……!”
“내가 나빠?”
위세라는 소리치던 것을 멈추었다. 대신, 올라오는 울분을 막느라 바들바들 떠는 백설하에게 집중했다.
“노래로 평가받고 싶은 게 그렇게…… 큰소리 들을 일이야……?”
위세라는 한숨을 쉬고 초조한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리고 겨우 마음을 가다듬곤 백설하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도 언니가 왜 그런지 알아요. 언니 같은 사람들 많이 봤어요. 한국에선 가수가 되는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이 아이돌로 데뷔하는 거니까, 어쩔 수 없이 아이돌을 택한 애들요. 아이돌이 되겠다면서 아이돌을 깔보는 애들도 꽤 봐왔어요.”
“나는 깔보는 게 아니라…….”
“알아요, 언니.”
위세라가 단칼에 백설하의 말을 끊었다.
“본인이 보여주고 싶은 것보다, 의도치 않았던 부분이 부각되면 속상하죠. 제 말은, 그걸 받아들여야 한단 거예요. 어떤 부분으로든 사람들이 관심을 준단 건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저는요. 설령 언니한테 관심 가지는 10명 중 한 명만 언니 노래에 관심 있고, 나머지는 다 가슴만 본다고 해도…….”
“봐봐 너도 가슴부터 꼽잖아!”
“그게 100명이 되면, 10명이 언니 노래를 들어주는 거잖아요. 1,000명이면 100명이 들어주는 거고요.”
“…….”
“언니, 그게 무기예요. 뮤지션이 처음으로 할 줄 알아야 하는 건 노래가 아니에요. 관심을 끄는 거예요. 누가 들어줘야 노래도 부를 수 있잖아요.”
백설하는 여전히 꿍한 표정이었다.
위세라도 이해했다. 백설하는 이런 고민을 아이돌이 된 순간부터 쭉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제대로 이야기를 섞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인간이 몇 마디 해봤자 얼마나 효력이 있겠는가.
그래도…….
“노래 잘 부르는 사람 따위 세상에 얼마든지 있어요. 그러니까 노래‘도’ 잘 부르고, 얼굴‘도’ 예뻐야 스타가 되는 거예요. 노래‘도’ 잘 부르고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으면 더할 나위 없겠죠. 거기에 춤도 잘 추고 팬서비스 정신까지 투철하면…….”
그게 바로 아이돌이다.
“언니는 아이돌이잖아요.”
백설하는 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위세라가 한 말은, 마치 성필이 할 법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백설하는 성필이 한 것 같은 저 충고를 향해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지금 위세라가 해준 말은 과거에 성필이 위세라에게 해준 조언일 수도 있었다.
“자, 얘들아.”
성필이 정리하듯이 손뼉을 쳐서 주의를 모았다.
“서로의 철학을 공유하는 것도 좋지만, 세라는 오늘 설하 도와주러 온 거잖아. 도와줘.”
“그 말투 뭐예요. 지금까진 도움 안 됐단 것처럼.”
“더 열심히 도와달란 거지. 그럼 의상은 어떤 게 좋겠어?”
셋은 그 후로 짧게 경연 전략에 대해 토의하고, 다음은 그냥 잡담을 떨었다.
사실상 성필과 위세라만 말하는 수준이었다. 백설하는 어두운 얼굴로 위세라의 말만 곱씹었다.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위세라가 한 말은.
‘에리카가 했던 말이랑 비슷해.’
에리카는 노래만으로 평가받겠다느니, 그런 생각을 하면 끝이 없다고 했었다.
케이팝은 넓은 범주이니 어느 하나에만 얽매이는 건 잘못됐다고 말이다.
‘내가…… 이상한가?’
* * *
위세라는 가로 엔터를 나섰다.
따스한 히터 공기로 채워져 있던 건물을 빠져나가자마자 차가운 한기가 피부를 찔렀다.
위세라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어두운 길을 걸었다.
‘팀장님이 태워준다고 할 때 알겠다고 할걸.’
괜히 오기 부렸다.
‘아니, 아니야.’
성필은 적이다.
위세라는 성필을 적으로 인식했고, 언제가 그의 눈에 후회의 눈물을 맺히게 할 예정이었다.
더 이상 그의 온기를 갈구할 수만은 없었다.
‘오늘까지만이야. 그래, 방금 나눴던 대화가 끝이야.’
그리고 적으로서, 위세라는 백설하를 평가해보았다. 절로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웃겨.’
좋다면서 아이돌이 된 주제에, 막상 인기가 있어지니까 배가 불렀다.
백설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사람들에게 알려지길 바랐던 시절이 말이다.
‘우리 일은 소비되는 거야.’
가진 모든 걸 끌어모아서 사람들이 눈독 들일 상품으로 변하는 게 스타의 일이다.
오직 노래만으로 상품적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건, 세상에서도 선택받은 인간들 뿐일 것이다.
아예 그런 걸 바랐다면 클래식 쪽으로 갔어야지. 아니, 클래식조차도 얼굴이 잘생기고 예쁘면 유리하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에 열광하니까.
‘진짜 웃겨.’
저딴 사고방식으로는…….
‘나는 노래가 정말 좋았어.’
문득 아까 백설하가 했던 말이 떠올라, 위세라의 발걸음이 늦어졌다.
‘학교에 있으면서도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정말 미칠 거 같았어. 죽을 만큼 부르고 싶었어. 너무 부르고 싶어서 수업 시간에 소리 지른 적도 있어.’
위세라는 그녀에게 ‘노래 연습을 얼마나 하냐’고 물었었다. 그랬더니 백설하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부터 했었다.
‘왜 있잖아, 그런 애들. 공부를 정말 재밌어서 하는 애들. 이해가 안 가지만 그런 애들도 있는 거야. 내가 그랬어. 노래를 사랑했어.’
백설하는 연습을 자주 하지는 않는다고 했었다. 아침의 음정 훈련은 빼먹지 않지만, 옛날처럼 많이 부르지는 않는다고 말이다.
위세라는 내심 백설하를 이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았었다. 분명 연습량만큼은 자신이 더 높으니, 얼마 안 가 차이가 확연히 벌어지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이젠 안 그래. 노래가 삶이 된 기분이야. 이해…… 해? 그러니까, 노래를 부르면 막 어릴 때처럼 엄청 즐겁지는 않아. 그렇다고 노래 부르는 게 싫다거나 지겨운 건 아니야. 노래가 삶 자체가 돼서…… 있잖아. 노래를 안 부르면 기분이 안 좋아.’
그래, 위세라는 백설하에게 연습량으로 이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았었다.
하지만 이어진 백설하의 이야기를 듣고는, 전혀 이긴 기분이 들지 않았다.
‘노래가 삶이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나한테 노래를 부르지 않는단 건…… 죽으려고 벼랑 위에 선 기분인 거야.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져. 그래서 기분이 안 좋아질 거 같으면 노래 불러. 그러면 압박감은 없어져. 즐겁진 않아. 그렇다고 지겹지도 않아. 으음, 뭐라고 할까. 밥을 먹는 거랑 비슷해. 헤헤, 이상한가?’
위세라는 아이돌이기에, 뮤지션이기에 백설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대성해서까지 노래 부르는 게 즐거운 사람은 대가(大家)일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 예술적 천수를 누리며 행복하게 노래하는 인간들.
루이 암스트롱, 냇 킹 콜, 에디트 피아프.
“온니 일찍 왔다!”
“응.”
석세스 엔터로 온 위세라는 노아를 가볍게 안아주곤, 보컬 연습실로 들어갔다.
숨 막히게 좁은 장소다.
들어가 있는 거라곤 전자 피아노 하나와 그 앞의 의자뿐, 두 사람이 들어가면 가득 찰 것만 같다.
위세라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도’를 눌렀다.
“……흐후.”
절로 한숨이 나온다.
‘하기 싫다’는 마음이 가장 처음 든다.
‘그래.’
루이 암스트롱, 냇 킹 콜, 에디트 피아프. 이런 이들은 대가이다.
그리고 백설하는 일류다.
노래를 삶으로 삼은 자.
위세라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괴롭게 연습을 거듭하여 일류가 되고픈 자신은, 자신 따위는, 영원히 백설하와 같은 일류의 발끝도 따라갈 수 없단 사실을.
그걸 깨달아버렸다.
“하…….”
위세라는 연주를 시작했다. 그리고 노래 불렀다.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만 하는 일을, 오늘도 끈기 있게 해야만 한다.
그게 일류의 발끝이나마 따라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괴롭지만 하는 것.
‘노래 부르는 게 즐거워?’
나도 한때는 즐거웠지.
‘참, 좋겠다. 일이 되어서까지 노래를 사랑할 수도 있고. 누구는 노래방도 가기 싫은데.’
그런 멘탈의 소유자이니, 노래로만 평가받고 싶단 배부른 소리를 할 수 있는 거구나.
위세라는 백설하를 이해했다.
“세라야.”
글로브의 지유가 문을 빼꼼 열었다.
“너 여기 예약한 시간 지났어.”
위세라는 피아노 치던 것을 멈추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 손가락이 저리고 손목이 지끈거렸다.
“다음으로 언니가 써?”
“응. 근데 너 계속할 거면 계속해. 난 다른 데서 하면 돼.”
“오늘은 만석 아닌가 보네.”
“엡실론 민혁 선배님이 예약해놓고 도망가셨어. 하나 비어 있어.”
“PD님한테…….”
윤상열한테 뭔 말을 들으려고 도망을 갔나. 그렇게 말하려던 위세라는 고개를 저었다.
보이그룹 엡실론은 윤상열이 석세스 엔터에 없었을 적에 만들어졌다.
윤상열은 엡실론을 프로듀싱하지만, 그들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비유하자면 윤상열은 새아빠라고 할까, 자신의 피가 섞이지 않은 이들에게 애정을 쏟지 않는 것이다.
‘애정?’
글로브는 자신이 그런 단어를 떠올렸단 게 웃겼다.
자신이 받는 게 애정이라면, 제발 그만 받아도 된다고 호소하고 싶었다.
“오늘 어디 갔다 왔어?”
지유는 위세라를 향해 500㎖ 생수병을 가볍게 던졌다. 피아노 위에 둔 생수병이 다 빈 것을 보고, 자신이 마시려던 물을 넘긴 것이다.
위세라는 그것을 한 손으로 받아내곤 마른 목을 축였다.
“걍 놀다 왔어.”
“어디?”
“언니가 알아야 해?”
“이런 거 물어볼 때 대답 피하면 연애랬는데.”
지유는 글로브 내에서도 입이 싸다.
괜히 없는 말 지어내면 쉽게 들킬 것이고, 말을 피하더라도 이상한 소문이 글로브 멤버들에게 퍼질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위세라는 사실을 말했다.
“박 팀장님 보러 갔, 아니. 소녀연맹 설하 언니 보러 갔어요. ‘더 언노운 싱어’ 관련해서…….”
“오빠?”
지유는 ‘백설하’라는 이름을 듣지도 못한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인지, 대뜸 성필부터 불렀다.
“어디서 봤어?”
“가로 엔터.”
“회사에 직접?”
“어.”
“만나주셔?”
“그럼 소금 맞고 쫓겨날까 봐?”
“음, 그렇구나.”
지유는 활짝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문이 닫힐 때까지 그녀의 밝은 얼굴은 틈 사이로 계속 비쳐왔다.
마침내 문이 다 닫히고, 위세라는 다시 정적 속에 남겨졌다.
위세라는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연습해야 해. 당장 과제도 며칠 뒤고.’
과제라니.
아이돌로 데뷔하면 더는 이런 연습생 느낌이 나는 단어와는 영원히 떨어질 줄 알았건만.
위세라는 아이돌이 되어서도 연습생과 같은 스트레스 안에서 살아간다. 오히려 연습생일 때보다 더 압박감이 심하기도 했다.
연습생 때는 연습생의 고민만 있었지만, 이젠 아이돌의 고민까지 얹어졌으니까.
위세라는 연주했다.
건반 소리에 맞춰 윤상열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내가 버클리에 다닐 때지. 노래 수업을 들었어. 내가 노래 부르니, 교수가 말하더군. 왜 그렇게 불렀냐고. 내가 노래 부를 때마다 그 말만 계속 반복했어.’
위세라는 반주에 맞춰 노래 불렀다.
‘어처구니가 없지. 이유를 말하면 왜 그렇게 생각했냐고 또 묻거든. 끝이 없는 질문이야. 그걸 한 학기 동안 반복했어.’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다.
‘왜 그랬을까. 이 대답을 바로 들을 수 있는 것부터 너희는 행운아다. 그 교수는 학생들이 괴롭게 깨닫기를 바랐던 거다. 노래에서 중요한 건 단지 배운 테크닉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노래의 화자에 공감하고 그 삶을 노래하는 거라고. 단 하나의 곡만 수백 번, 수천 번 반복하면서 그걸 깨닫길 바랐던 거지. 내가 그걸 깨닫는 데는 3개월이 걸렸지만…….’
부르고, 또 부르고.
‘너희는 방금 20초 만에 깨달음을 얻은 거다. 자, 그럼.’
부르고.
‘노래해라.’
위세라는 노래했다.
자신이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화자의 가사를 처절하게 따라불렀다.
[친구여
우리는 자유롭게 태어났으니
너의 네온 빛이 계속 밝게 빛나게 하렴]
자유를 모르는 자가 자유를 노래한다.
오랜 연습으로 목이 다 갈라졌다.
오랫동안 쌓은 기교가 전부 무너지고, 그녀의 목에서 나오는 건 감정뿐이었다.
위세라는 마침내 노래의 화자를 모방할 수 있게 됐다. 그의 감정을 불러낼 수 있게 됐다.
거듭된 연습 끝에 남은 건 없었다. 오히려 다 잃었다. 위세라의 가슴이 비어버렸다.
‘너희는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웃음에서부터, 애인을 향한 달뜬 속삭임까지 전부 낼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원하는 결과를 내야 해. 그걸 위한 연습이다.’
위세라는 생각했다.
이건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가 아니야.
내가 원했던 목소리가 아니야.
내가 연습했던 시간은 이걸 위함이 아니었는데, 내가 아닌 것을 모방하기 위해 노래 불렀던 게 아닌데.
나를 표현하기 위한 노래였는데…….
하지만, 바로 지금이 자신의 프로듀서가 원하는 상태일 것이다.
위세라, 그녀의 인생이 쌓아 올린 그녀만의 목소리가 허물어지고 탄생한 폐허.
그 위에 윤상열은 새로운 탑을 쌓아갈 것이다.
위세라가 자조했다.
‘설하 언니, 좋으시겠어요. 아직도 노래 부르는 걸 괴롭지 않게 할 수 있으니…….’
세상을 향해 피어나기만 숨죽이고 기대하던 꽃봉오리는, 누군가의 손에 거칠게 뜯겨 억지로 잎을 드러냈다.
더는 노래를 사랑하지 않게 된 가수는 달이 머리 위에 걸리도록 연습을 이어갔다.
괴롭게도 계속.
* * *
괴롭게도 계속, 성필은 눈빛이 형형한 백설하의 선언을 들어야만 했다.
제발 그녀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성필은 사무실 사람들에게 항변하듯이 말했다.
“아, 아니에요. 제가 시킨 거 아니에요…….”
성필은 어떻게 돼도 좋다는 듯, 백설하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다.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을래요. 자랑스러워 할래요. 이사님 말씀대로요. 더는 안 감춰요. 당당하게 드러낼래요. 왜냐하면, 이게 제가 가진 매력이니까요.”
백설하가 상쾌하게 외쳤다.
“저, 드러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