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93화 (393/760)

393화

유우토가…… 와야 하는데…….

“왜 안 오나요!”

“저한테 소리치셔도…….”

기어코 유우토는 가로 엔터의 공식 출근 시각이 되어서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리카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30분 후.

“리카 씨 이제 저 좀 보내주십시오!”

리카는 어쩔 수 없이 한구인을 떠나보내야 했다. 그리고 그녀는 집 나간 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입구를 배회했다.

‘유우쨩한테 사고라도 난 걸까?’

참지 못한 리카는 유우토를 마중하러 나간 매니저 김수희에게 연락했지만, 아직 유우토가 도착하지 않았단 답만을 얻었다.

그렇게 약속 시각보다 한 시간이나 지난 10시가 되었다. 휴가라 해도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작업실 가서 지음 오빠라도 괴롭혀야겠다…….’

* * *

“죄송합니다! 주, 중요한 날인데 늦잠을 자버려서!”

차를 타고 가로 엔터로 향하는 길, 유우토는 차 옆자리에 앉은 슈이치에게 연신 사과했다.

유우토는 한국어가 불가능하기에 통역인 슈이치가 옆에 있어야만 했다.

“아닙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죠. 사장님께는 잘 말씀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마침내 부모님을 설득하여 한국에서의 연습생 생활을 하게 된 유우토.

그는 한국에 온 첫날부터 지각해버렸다.

9시 30분으로 예정되어 있던 사장 홍규헌과의 면담도 점심 이후로 밀리게 되었다.

‘어떡하지? 약속도 못 지키는 애라고 생각되는 건 싫은데…….’

유우토는 끙끙 앓으며 홍규헌에게 뭐라고 변명할지 계속 고민했다. 그러다 보니, 아주 옛날에 보았던 홍규헌의 얼굴이 머릿속을 어렴풋하게 채워갔다.

쌉싸름한 어른의 향기(담배 냄새)를 풍기던 홍규헌이 팔레트에 떨어뜨린 물감처럼 기분 좋게 아른거렸다.

“…….”

미움받기 싫어…….

유우토는 한숨을 푹 내쉬고 앞을 보았다. 운전 중인 매니저 김수희와 백미러를 통해 눈이 맞았다.

유우토는 한국어 회화 어플로 배운 간단한 단어를 말했다.

“죄송합니다, 누나.”

“아, 아녜요!”

김수희는 백미러를 통해 유우토에게 눈인사를 전하고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얘가 리카 동생이야?’

남매가 닮는다던가.

유우토는 리카와 비슷한 분위기가 있었다. 리카처럼, 외모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하여 쉽게 다가가지 못하게 만드는 아우라가 있다.

만약 리카가 사교성이 좋지 않았다면, 김수희는 지금까지도 그녀에게 말 한마디 붙여보지 못했을 것이었다.

‘누, 누나라고 했지…….’

회사의 연습생에게 이런 마음을 품는 건 분명 잘못됐겠지만, 김수희는 봄날의 꽃가루처럼 넓게 퍼지는 자신의 마음을 감추기 힘들었다.

이 느낌을 뭐랄까…….

‘학교 다닐 때.’

학교 한두 명씩 꼭 있다.

주변과 비교되지 않는, 그야말로 군계일학과 같은 외모의 소유자가 말이다.

그들의 곁은 꽃이 피듯 화사한 공기가 감돈다. 김수희는 그런 이들과 복도에서 마주치기만 해도 일상에 산뜻한 향신료가 한 방울 떨어진 기분을 느꼈었다.

아름다움이란 그렇게나 커다란 힘이다.

‘괜히 팬들이 아이돌 얼굴 보고 국보로 지정해야 한다고 하는 게 아니지…….’

김수희도 동감했다.

비록 유우토는 일본의 국보겠지만, 한국에서도 국보 취급을 받아야 한다. 당당히 리카의 옆자리에서 빛날 자격이 있었다.

“감사합니, 하므니, 합니다, 누나.”

회사 주차장에 도착하자 유우토가 다시 감사를 전해왔다. 김수희는 자기도 모르게 헤벌쭉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그녀는 일 때문에 계속 차에 남아 있고, 슈이치가 유우토를 데리고 회사 입구에 섰다.

“비밀번호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잘 외우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가로 엔터의 문이 열렸다.

유우토는 이전에도 이곳에 온 적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게임의 새로운 스테이지를 마주하는 듯하다.

‘여기가 가로 엔터.’

향후 몇 년간 아이돌이 되기 위해 분투해야 하는 장소. 앞으로 질리도록 이 풍경을 눈에 담게 될 것이다.

“이시카와 씨가 주로 시간을 보낼 곳은 3층입니다. 남자 연습생 연습실과 휴게실이 모두 있죠. 휴게실에 미니 냉장고가 있지만, 연습생이 많은 터라 안에 든 게 금방 동납니다. 그런 경우엔 귀찮으셔도 1층 휴게실까지 오셔서 음료를 가져가셔야 합니다.”

유우토는 홀린 듯이 슈이치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으려던 찰나, 지하 작업실 입구에서 A&R 팀의 이재호가 나왔다.

“슈이치 씨! 잠깐 이쪽으로요!”

“아.”

슈이치는 유우토를 보면서 머뭇거리더니, 손가락으로 그가 가야 할 장소를 가리켰다.

“계단을 올라 왼쪽으로 쭉 가시면, 문패에 ‘휴게실’이라고 써진 곳이 있을 겁니다. 그곳에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안내해주셔서 감사해요.”

“예, 그럼 가보겠습니다.”

슈이치가 사라지고, 유우토는 홀로 계단을 밟으면서 올라갔다. 점점 그의 걸음이 빨라지고, 곧 무도회장의 왈츠처럼 상쾌하고 가벼워졌다.

시작이다.

‘내 꿈을 향한 도전은 오늘부터 시작이야!’

유우토는 2층에 발을 디뎠다.

이제 한 층을 더 올라가서…….

‘어?’

저 멀리 복도에서 리카의 옆모습이 보인다. 그녀는 어느 직원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리카의 표정으로 보건대 심각한 이야기는 아닌 듯했다.

유우토는 반가움을 느꼈다. 그녀를 향해 다가가면서 인사하려던 찰나.

“위험해!”

갑자기 3층 계단에서 손이 뻗어와 유우토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납치하듯이 위로 끌고 올라갔다.

“다, 당신 누구야! 우웁, 웁!”

유우토는 정체 모를 인간에게 잡혀 발버둥 쳤다. 설마 새 시작을 선언하자마자 강도에게 당하다니!

“크읍!”

유우토는 자신의 입을 막은 손을 깨물었다. 괴한이 신음을 흘리며 유우토를 놓았다.

‘시, 신고해야……!’

유우토는 폰을 꺼내 110(일본의 112)을 누를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겁먹은 눈빛으로 계단 위쪽을 바라보았다.

“당신 뭐 하는 사람……!”

“너 뭐 하는 거야!”

상대가 적반하장으로 화냈다.

유우토는 한국어를 몰랐지만, 그가 굉장히 당황했으며 화내고 있단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그, 김사무엘이 말했다.

“새로 온 연습생? 여기 룰 못 들었어?”

“하, 하이(네)?”

“뭔 인사를 갑자기…….”

김사무엘은 자신의 검지에 난 유우토의 이빨 자국을 보더니 불쾌하단 듯 인상을 찌푸렸다.

“모처럼 구해줬더니.”

김사무엘이 한숨을 쉬면서 손을 털었다.

“소녀연맹 대선배님들과 한마디라도 섞으면, 즉시 퇴출이다. 기억해.”

“…….”

유우토는 눈을 끔뻑이다가, 다시 말했다.

“하이(네)?”

김사무엘이 눈을 부라렸다.

“너 나한테 시비 거냐?”

* * *

백설하는 누군가가 ‘에리카와 친구냐?’라고 묻는다면, 두말할 나위 없이 이렇게 답할 것이다.

‘응!’

에리카와는 ‘음악을 위한 동행’부터 친구가 되었다. 요즘은 연락이 뜸해지긴 했어도, 에리카는 먼저 백설하에게 다가온 소중한 인연이다.

촬영 후에 먼저 연락이 와서 자주 통화하거나, 휴일에 만나고, 또 연락을 주고받았다.

오늘은 그런 에리카와 오랜만에 만나는 날이었다.

‘이번에도 15일이네.’

에리카는 무슨 숙제처럼 15일마다 백설하에게 만나자고 한다.

‘숙제…… 란 단어는 에리카한테 실례겠지?’

숙제가 아니라, 바쁜 와중에도 어떻게든 백설하 자신과 만나고 싶은 것일 터이다.

세상에 인간관계를 숙제처럼 유지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누가 시키거나 부탁해서 친구가 된 것도 아니고 말이다.

“정말요?”

“응, 그렇다니까. 박 이사님 정말 나 놀리려구 회사 오시는 거 같아.”

“재밌으시네요.”

감각적인 인테리어와 은은한 조명의 카페.

시끄럽지도 너무 조용하지도 않은 주변의 소리.

무엇보다, 앞에 앉은 친구가 에리카인 것이 백설하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에리카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기술이 있는 것만 같다. 백설하는 그녀와 대화하는 와중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그 시간의 행복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나도 에리카처럼 말을 잘하고 싶어.”

“으음, 말이란 건 하는 것보다 듣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경청의 기술이란 말도 있으니까요.”

“기, 기술?”

“그렇다고 제가 언니 말을 기계적으로 듣는단 뜻이 아니라요.”

에리카가 백설하의 보드라운 손을 가볍게 쥐었다. 그리고 피아니스트가 건반을 수평으로 쓸 듯이 간질였다.

분명 자신이 문제겠지만, 백설하는 에리카의 손길에서 묘한 색기를 느껴버렸다. 백설하의 손에서 긴장 때문에 땀이 배어 나왔다.

백설하는 자신이 긴장하고 있단 사실을 에리카가 알까 봐 심장이 벌렁거렸다.

“대화할 때는 신경을 집중한단 뜻이에요.”

“아, 그게 기술이구나…….”

“모치론(물론) 언니는 집중하려고 안 해도 집중이 되죠.”

에리카가 백설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백설하는 그녀의 시선이 박힌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래로.

“어딜 보는 거야?!”

“박 이사님이 언니 놀리려고 회사 오실 만하네요. 반응이 재밌어요.”

“재, 재밌…….”

또 놀림당했단 생각에 풀이 죽으려던 백설하의 뇌리에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잠깐.’

백설하는 이런 취급을 자주 받아왔다. 다들 한결같이 백설하의 반응이 재밌다고 했었다.

지금까진 억울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어쩌면, 이게 내가 가진 무기가 아닐까?’

다른 사람에게 놀림 받는 게 자신의 진정한 강점이 아닐까.

그로써 인간관계를 보다 윤택하게 가져갈 수 있다면…….

“…….”

그건 싫은데…….

이왕이면 놀림 받기보다 놀리고 싶다.

“언니.”

에리카가 백설하의 손을 놓았다.

에리카의 손가락은 잔 끝에 달라붙은 물방울처럼, 백설하의 손등에서 떨어지기 전까지 끈적한 움직임으로 여운을 남겼다.

“재밌는 사람이란 건 우스운 사람이랑은 전혀 다른 얘기예요.”

“응?”

“우스운 사람이란 건 말 그대로 우스운 거지만, 재밌는 사람은 같이 있으면 즐거운 사람을 말해요. 언니. 저는 언니랑 있으면 즐거워요.”

백설하가 뺨을 붉혔다.

“다른 분들도 그런 걸 거예요.”

“그, 그럴까?”

“네. 그러니까 앞으로는 박 이사님이 놀리실 때 마음껏 우스워지세요.”

“우습단 거잖아?!”

“아, 실수. 재밌는 꼬라지를 보여주세요.”

“한국어나 더 배워!”

에리카의 눈썹이 흥겨움을 담아 흔들렸다. 백설하도 즐거워하는 그녀를 보니, 뾰로통했던 입가가 기쁨으로 휘었다.

“저기, 에리카.”

백설하는 비밀 이야기라는 듯 그녀에게로 상체를 가까이 가져갔다.

“언니 조심!”

“아!”

테이블에 둔 아메리카노잔이 백설하의 가슴에 부딪혀 쓰러질 뻔했다.

백설하는 잔을 옆으로 치우고, 다시 비밀 이야기를 하려 상체를 앞으로 뻗었다. 에리카도 그녀에게 귀를 더 가까이 가져갔다.

“나 사실 ‘더 언노운 싱어’ 나가.”

“대외비 유출로 PD님한테 신고하면 되나요?”

“아, 안 돼!”

“안 되는 걸 왜 말씀하셨어요. 손바닥 내미세요.”

“우…….”

백설하가 손바닥을 내밀자, 에리카는 그녀의 손바닥을 빨대로 찰싹 때렸다.

“재밌겠네요. 저도 나가보고 싶었는데.”

“그런데 왜 안 나갔어?”

“으음…….”

에리카가 백설하의 손바닥을 때렸던 빨대로 자신의 입술을 꾹꾹 눌렀다.

“그냥 ‘해보고 싶다’ 정도여서요. 그런 거 있잖아요. ‘어디 어디 놀러 가보고 싶어’ 같은 손나 칸지(그런 느낌)?”

“아아, 대충 알겠어.”

“정작 가지는 않을 거면서 ‘어디 갈래’, 사지는 않을 거면서 ‘이거 사고 싶어’. 그 정도죠. 언니는 아니었어요?”

“나는…….”

백설하는 폼을 잡기 위해 헛기침까지 하며 목청을 다듬었다. 그리고 허리에 손을 얹고 위풍당당히 선언했다.

“나는 내 노래만으로 인정받고 싶어.”

“아, 노래로.”

“그런 거…… 있잖아? 뭔가 아이돌이니까 못할 거다 같은 시선…….”

“알죠.”

“조, 조금 오글거릴 수도 있는데 그런 인식을 조금이나마 없애고 싶달까…….”

“흐음.”

에리카가 크게 동조하지 않자, 백설하는 괜히 제 발 저려 더 빠르게 이야기했다.

“아, 아무튼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좋겠어! 나는 노래를…….”

아니.

“노래도 잘 부른다구. 에리카는 그런 거 없어? 에리카도 노래 잘하잖아. 인정받고 싶다거나.”

“글쎄요.”

에리카는 입술을 누르던 빨대를 티슈 위에 올려놓았다.

어이없게도, 백설하는 그 빨대를 보며 ‘저거 팔면 십만 원 넘겠지?’라는 생각을 해버렸다.

“저는 딱히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어요. 사람들이 제 노래를 알아줬으면 한다느니, 그런 거요.”

“아, 그래…….”

“언니는 이런 느낌 아니세요? ‘아이돌도 가수야! 뮤지션이야! 왜 안 알아줘!’ 같은 거.”

정곡이었다.

하지만 에리카가 모사한 말투는 어쩐지 어린애가 투정하는 느낌이라, 백설하는 인정하기가 꺼려졌다.

“케이팝이란 건 아주 큰 카테고리잖아요. 케이팝 아이돌 말예요. 거기엔 노래도 있고, 춤도 있고, 음악이 있고, 비주얼, 아트워크, 뮤직비디오, 의상, 메이크업, 퍼포먼스, 연출, 이 모든 게 있어요. 아이돌은 그 집합체고요. 그러니까, 굳이 노래 하나만 딱 짚어서 ‘이걸로 인정받을래’ 같은 생각은…….”

에리카가 쓴맛을 담아 입꼬리를 올렸다.

“언니, 그러면 끝이 없어요. 하나를 만족해도 다른 하나가 불만으로 변해요. 그러니 어쩌겠어요, 적당한 부분은 적당히 넘길 줄 알아야지.”

“……에리카.”

“네.”

“그럼, 에리카는 뭘로 인정받고 싶어? 아니, 어떤 아티스트로 기억되길 바라는 거야?”

“아이돌, 사쿠라바 에리카.”

에리카는 고민 없이 웃어 보였다.

“아이돌이란 단어 하나만 붙어주면 만족해요. 그런 생각해보신 적 있어요? 한 50년 뒤의 사람들은 현재의 대중음악을 뭘로 기억할지. 대중음악사라는 책이 간행되면, 이 시대의 챕터명은 뭘지.”

“그건…….”

음원 차트를 보면 답이 나온다.

“‘아이돌의 시대’로 기억될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아이돌이란 이름만 바라요. 이왕이면 제 이름이…….”

사쿠라바 에리카, 케이어스.

“시대를 대표했으면 좋겠네요. ‘아이돌?’ ‘케이어스!’라고요. 챕터의 시작 부분에 제 사진이 작게나마 붙어 있었으면 더 좋지 않을까 해요. 요약하자면, 저는 사소한 인정보다는 아이돌로서 받는 전체적인 평가가 중요해요.”

“……그렇구나.”

백설하는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박 이사님한테는 왜 자꾸 노래를 들려주려고 하는 거야?”

“그거랑 이건 다른 이야기예요.”

그런가?

“그런 거예요.”

그렇구나.

둘은 카페를 나섰다. 나오기 전, 에리카는 아메리카노를 한 잔 더 테이크아웃했다.

밖으로 나오니 한겨울의 추위가 백설하의 코트를 뚫고 들어왔다. 그녀가 몸을 떠니, 에리카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를 내밀었다.

“한 입 드세요.”

“으응, 고마워…….”

백설하는 컵을 받아들고 입으려 가져가려 했다. 그 순간, 검은색 컵리드에 선명히 찍힌 입술 자국이 보였다.

선분홍색, 에리카의 립스틱이었다.

“언니?”

에리카가 부르자, 백설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헤헤 웃고는 컵리드에 입을 대…….

“아, 안 먹을래. 괜찮아.”

“한 모금이라도 드시지. 춥잖아요.”

“아냐.”

백설하는 다시 잔을 에리카에게 넘겼다.

‘가, 간접 키스도 첫 키스니까…….’

아껴둬야지.

* * *

“이건 내가 만질 게 아니야.”

정지음이 팔짱을 끼고 당당하게 선언했다. 백설하의 얼굴에 당황이 서렸다.

“네, 네?”

“내가 감히 만질 게 아니라고.”

“그치만 편곡을 해야 하는데요…….”

백설하는 ‘더 언노운 싱어’에서 부를 2라운드, 3라운드, 그리고 혹시나 있을 ‘더 언노운 결정전’ 곡을 정하여 정지음에게 편곡을 부탁했다.

당장 며칠 뒤엔 무대에 서야 한다.

그런데 정지음은 매몰차게 ‘안 된다’고만 하는 것이다.

“그냥 원곡으로 가자.”

백설하는 성필에게 도움을 바라는 눈길을 주었다. 하지만.

“맞는 말이야.”

“네……?”

“설하야, 네가 고른 곡들이 뭐야?”

“팝송요…….”

“맞아, 팝!”

팝이란 흔히 대중가요를 일컫는 단어지만, 아무런 수식이 없으면 자연스레 ‘미국 대중음악’을 뜻한다.

미국의 음악 자체가 곧 세계의 대중음악인 것이다.

“미국의 팝은 곧 월드뮤직. 대중음악의 탄생지이자 현재에도 문화적인 패권을 유지하는 국가의 음악……. 숨 쉬듯 자연스럽게 최첨단의 기교와 기술이 탄생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문화적으로 진보한 나라의, 또 해마다 천재들이 탄생하는 그런 나라의 음악이야. 고작 지음이 따위가 어떻게 만져볼 수가 없지.”

“형 나 진짜 회사 그만두는 꼴 보고 싶어요?”

“농담이고.”

성필은 헤실헤실 웃으면서 말했다.

“설하야, 네가 이 곡들을 고른 이유는?”

“어, 음, 제가 좋아해서요.”

“좋아하는 이유는?”

“그으, 모르겠어요. 그냥 좋아해요. 소, 솔직히 추억보정도 들어간 거 같구…….”

“맞아, 추억. 추억은 추억일 때 아름답지. 원곡으로 승부를 펼치는 쪽이 나을 거야.”

“하지만 역대 출연자분들은 옛날 곡을 가져올 때면 꼭 현대적으로 편곡했는데요…….”

“네가 고른 곡이 현대적이지 않아?”

아니다.

지금 들어도 좋다.

백설하가 고른 팝송은 당대에도 대히트를 기록했던 것들이다. 지금 나오더라도 빌보드 차트를 휩쓸 게 틀림없다.

“그러니까.”

정지음이 백설하를 가리키며 말했다.

“만져야 할 건 설하지.”

“저를 만진다구요?!”

“이쯤 되면 설하가 일부러 귀여운 척을 하는 게 아닌가 의심될 정도네.”

“지음이 말은, 신경 써야 할 건 편곡이 아니라 설하 네 보컬이란 뜻이야.”

“제 보컬…….”

“물론…….”

정지음은 쓰게 웃었다.

“내 기량이 모자란 탓도 있어. 이 곡들을 어떻게 만져야 할지 감도 안 와. 이 상태로 완성되어 있다, 고 표현하면 좀 와닿을까 모르겠네. 뮤직 프로듀서로서 무책임하지만, 설하한테 맡기고 싶어. 보컬 쪽에 변화를 주거나 힘을 쓰는 걸로 가닥을 잡자.”

온갖 기적을 만들어낸 뮤직 프로듀서, 정지음의 말이라면 신뢰할 수 있다.

백설하는 떨떠름해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고른 곡이 그 정도인가?’

곡은 완성됐다.

그러니 신경 써야 할 건 보컬뿐.

백설하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그때 작업실 문이 열리고 권아인 경리가 고개를 내밀었다.

“박 이사님. 글로브 세라 씨가 오셨는데요.”

“……또요?”

“네? 아, 네, 뭐, 또 오셨나 보네요.”

“근데 왜 그걸 아인 씨가?”

“잠시 쉬러 휴게실 들렀다가…….”

“알겠어요.”

“그리고 이사님.”

“네.”

“저희 안내 데스크는 안 만드나요? 직원도 뽑는 편이 안 좋을까요?”

“허어, 경리가 감히 이사한테 회사 발전에 대한 건의를?”

“인격 비하로 고용노동부에 신고하겠습니다.”

“긍정적으로 고려할게요. 하지만, 자주 휴게실에 쉬러 가는 아인 씨가 있으면 안내 데스크는 필요 없을지도…….”

“두 시간 만에 쉬는 거거든요?!”

권아인이 나가고, 백설하가 의아한 투로 말했다.

“세라가 또…….”

“일단 가보자.”

이번엔 위세라도 이전처럼 문밖에서 기다리지 않았다. 한겨울 추위가 거세긴 한가 보다.

성필과 백설하가 나타나니 위세라는 코를 훌쩍이며 굳은 걸음으로 다가왔다.

“티, 팀장님 안녕하세요.”

“많이 춥지? 근데 석세스 엔터도 널널한가 보다. 은근히 자주 오네.”

“이제 저희 안 불쌍하게 여기기로 작정이라도 한 거예요 뭐예요. 심한 말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시간 내서 온 거죠.”

위세라가 검지로 백설하를 똑바로 가리켰다.

“언니를 위해 직……!”

백설하가 위세라의 검지를 손바닥으로 쳐냈다.

“삿대질하지 마.”

“……넵.”

세 사람은 응접실로 향했다.

히터 바람에 몸이 녹은 위세라는 아까보다 기세가 살아났다.

“후후, 제가 언니한테 좋은 정보를 가져왔어요. 뭐, 적당히 고마워해요. 이왕이면 많이. 팀장님도요.”

“세라 최근 만났을 때보다 밝아졌네. 남자친구라도 사귀고 있어?”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요.”

위세라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고민하더니, 옛날의 그녀가 떠오르는 밝은 웃음을 보여주었다.

“밝아졌으면…… 이제 팀장님이랑 맘대로 만날 수 있어서 그런가? 옛날엔 오작교로 떨어진 거 같았는데, 요즘엔 어떻게든 찾아올 수는 있게 됐잖아요.”

헤헤 웃으면서 그리 말하는 위세라는, 성필의 가슴을 울적하게 만들었다.

만약 그녀의 말이 진담이라면, 고작 ‘만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밝아질 만큼이나 석세스 엔터에서의 삶은 고달프단 뜻이겠지.

백설하는 왠지 모르게 가라앉으려는 분위기를 바꾸려 밝게 말했다.

“좋은 정보란 건 뭐야?”

“놀라지 마요. 이번 ‘더 언노운’은 무려 제 상대였던 ‘서쪽의 오 솔레미오’예요. 결국 ‘더 언노운’이 됐어요.”

“그거 유출해도 돼……?”

“어, 별로 안 놀라네. 이해해요. 그만한 보컬 실력을 가졌으니 쉽게 우승을 점칠 수 있었겠죠. 하지만 이것도 알았을까요?”

위세라가 음흉하게 웃었다.

“‘서쪽의 오 솔레미오’의 정체. 지피지기라면 백설하, 아니, 백전백승이란 말처럼 상대를 알면 이기기 더 쉬워지…….”

“알아.”

“거짓말!”

백설하가 정체를 말하니, 위세라는 허탈하여 몸을 축 늘어뜨렸다.

“이, 이거 때문에 방송국에 죽치고 있었는데…….”

“그으, 미, 미안.”

“……됐어요.”

위세라는 좌절을 모르는 아이였다. 그녀는 바로 다음 계획으로 들어갔다.

“그럼 얘기가 빠르겠네요. 상대를 분석해서 최적의 수를 찾아요.”

“……저, 왜 이렇게까지 해줘?”

“이긴다고 했잖아요. 저는 말만 툭 던져놓고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도와드려야죠.”

“귀찮게…….”

“귀찮아?!”

성필은 백설하와 위세라의 대화를 흥미 깊게 보았다. 놀랍게도, 백설하가 위세라를 놀리고 있었다.

백설하 1승.

“아무튼!”

위세라는 자신이 준비해온 것들이 전부 쓸모없어지자 토라진 듯했지만, 의지를 다지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선곡이 중요해요. 이인성은…….”

“이인성 선생님.”

“이, 이인성은…….”

“선생님.”

“……선생님은, 한국 가요엔 박식하지 않아요. 지금까진 말도 안 되는 보컬 실력으로 이겨왔지만, 대중음악을 얕보고 있어요. 대중음악은 한마디로 퍼포먼스! 강렬함이 중요해요! 그곳에 승리의 열쇠가 있…….”

“나 이미 곡 정했는데.”

“하아, 이럴 줄 알았으면 노아랑 마트나 갈걸. 내가 미쳤다고 시간 다 버려놓고 여기 왔지.”

위세라는 한숨을 토하곤, 백설하에게 곡 리스트를 알려달라고 했다.

백설하가 그것을 보여주었다.

“……뭐예요 이게.”

위세라는 어이없어했다.

“무슨 90년대생 추억의 MP3 곡 모음집이에요? 들고 나갔다간 틀 소리 듣기 딱 좋겠네.”

백설하가 무릎 위에 손을 올려둔 채 울먹였다.

위세라, 1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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