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92화 (392/760)

392화

편지를 보고, 웃기지만 성필은 이런 생각을 해버렸다.

‘미녀 여사장님과 퇴근 이후 면담? 밤의 초과근무?’

스스로의 유머 센스에 만족한 성필은 그 생각을 곧바로 없애버렸다.

‘사장님이 하고픈 말이 많으신가 보네.’

성필은 가로 엔터의 스타팅 멤버다. 다른 중역들 앞에서 티는 내지 않지만, 그 사실에 큰 자부심을 품고 있기도 하다.

예로부터 왕조의 개국공신 집안은 세대가 넘어서도 떵떵거리지 않던가. 그만큼 어느 집단의 초창기에 함께 했단 사실은 지대한 의미를 지닌다.

당연히 당사자에겐 훨씬 뜻깊다.

‘사장님이랑 독대는 오랜만이네.’

성필은 따스한 미소와 함께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홍규헌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뭘요. 저를 불러주신 사장님께 더 감사하죠. 다시 말할게요, 감사합니다. 제가 석세스 엔터에 있을 때 불러주신 거요.”

성필이 과거로 돌아온 건, 공교롭게도 한구인에게 영입 제안을 받았을 때였다.

그건 운명일 것이다.

성필이 후회하지 않는 길로 들어설 수 있는 마지막 갈림길.

‘나는 그 분기점으로 돌아왔던 거야.’

그 분기점을 만들어준 장본인인 홍규헌에게는 감사하고 또 감사해도 모자라다.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다.

성필도 홍규헌과 지난날의 회포를 마음껏 풀고 싶었다.

“그래.”

홍규헌은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성필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녀는 두 사람에게만 제스처가 달랐다.

성필과 한구인이었다.

다른 이들은 손을 잡고 격려해주었지만, 둘에게는 어깨를 두드리는 것으로 끝냈다.

두 사람의 취급이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어쩌면 궤를 달리한다는 표식이었다.

성필과 한구인을 제외한 이들은 그것을 보고 납득했다. 두 사람은 가로 엔터의 시작이나 마찬가지인 인물들 아닌가.

“좋아, 그럼…….”

“회식이에요?”

손혜빈이 기대를 잔뜩 담아 그리 말했다.

그러자 민경섭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예정되어 있지 않은 회식을 꺼리는 것이다. 아마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와 선약이 있는 듯했다.

“아니, 회식은 나중에 하자. 우리 새신랑 집안 평온하게 해줘야지.”

“아직 새신랑 아닌데요…….”

“오케이, 해산. 내일도 열심히 일하자.”

“이럴 때는 사장님 재량으로 휴일 만들어주세요.”

“어허, 일해야 돈도 나오지.”

그렇게 홍규헌을 제외한 이들은 사장실을 나왔다.

“성필이 너 오늘도 또 야근하게?”

손혜빈이 짐을 싸면서 물었다. 성필은 전혀 야근하는 사람이 아닌 얼굴로 경쾌하게 답했다.

“응!”

“얘 봐라. 왜 이렇게 귀엽대. 누가 이렇게 귀여우랬어? 어?”

“아잉, 누나 하지 마아.”

“진짜 죽여버리고 싶네. 애교 부리려면 수염 거뭇한 거 좀 깎고 해라.”

“깎은 게 이건데 어떡해……. 뭐 제모라도 받아야 해……?”

“많이 아프다더라.”

“진짜 받으라고?”

“뭘 진담으로 받아들여. 네 나이에 수염 자국 없는 게 더 이상해. 무슨 아이돌 할 것도 아니고.”

손혜빈은 가방을 어깨에 들쳐메고 성필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안뇽! 누나는 집에 가서 혼자 샴페인이라도 깐다!”

“나 오늘 안 돼.”

“누가 같이 마시자고 했냐? 참나.”

“같이 마시자는 뜻이잖아.”

“손혜빈 박사 학위 줄게. 다시 누나 매니저 될래?”

“응 절대 안 해. 누나한테 당한 거 생각하면 아직도 인연 유지하는 내가 용해.”

“그러게나 말이다. 내가 만약 너였으면 내 얼굴 절대 못 봤…….”

성필이 테이블 위의 탁상시계를 무기처럼 뽑아 들자, 손혜빈은 카랑카랑 웃으면서 저만치 도망갔다.

성필은 문 뒤에 숨은 손혜빈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넌 임마 내가 흑역사 안 말하는 것만 해도 연 1,000만 원씩은 줘야 해!”

“안 말한다고 누나가 약속했잖아!”

손혜빈은 웃음을 남기고 사무실에서 사라졌다. 성필은 탁상시계를 테이블에 쿵 두고 화를 삭였다.

“아 맞다.”

손혜빈이 다시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성필은 다시 시계를 집어 들었다.

“또 뭐 또 뭐 또 왜!”

“나 불러줘서 고마워.”

“뭐가.”

“나 SMS 엔터 있었을 때. 불러줘서 고맙다고. 여기 들어와서 참 다행이야.”

“…….”

성필은 시계를 다시 테이블에 두고, 낯 간지러운 티를 내며 드문드문 말했다.

“누나한텐 내가 고맙지. 그으…….”

성필의 뺨이 서서히 붉어졌다.

멤버들에게 부끄러운 말을 할 땐 전혀 이러지 않는다. 성필은 스스로도 이상하다 여기면서, 겨우 말했다.

“춤, 유학 가는 거 꿈이었잖아. 근데, 남아줘서어…….”

전에 손혜빈이 분명 이렇게 말했었다.

성필과 같이 일하고 싶어서 러시아로 가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때를 떠올리니 성필은 또 가슴이 울려왔다.

“고마, 고…….”

“크흨.”

경박한 웃음이 들리자, 성필은 바닥에서 손혜빈에게로 눈을 돌렸다.

손헤빈이 핸드폰 카메라를 이쪽으로 향하면서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지인짜 이래서 너한테서 못 떨어지는 거야. 뭔 10대 소년 고백 타임이야? 너 아직도 나 못…….”

“진짜 죽여버릴 거야아아아아!”

추격전은 손혜빈이 성필보다 빨리 회사에서 탈출함으로써 마무리됐다.

성필은 ‘꺄하하하!’ 웃으면서 도망치는 손혜빈을 향해 불끈 쥔 주먹을 흔들었다.

“가만 안 둬! 내일 오기만 해봐! 가만 안 둘 거야아아!”

성필은 씩씩 분노를 삭이면서 사무실로 돌아왔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성필은 흠칫하면서 걸음을 뒤로 물렸다.

주황색의 절전등만이 켜진 사무실 구석, 창문 앞에 한구인이 서 있었다.

한구인은 성필의 기척을 느끼자 천천히 그쪽으로 돌아보았다. 주황빛이 그의 얼굴에 음영을 드리워 음산…….

‘한 이사님은 왜 배우가 안 되셨지?’

처음 만났을 때도 느꼈는데, 정말 말도 안 되는 피지컬을 타고 태어났다.

성필은 진지하게 한구인을 배우로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오셨습니까.”

“아, 예. 아직 일 남으셨어요?”

“일이…… 남았죠.”

한구인은 창문틀에 두었던 서류 가방을 들고 문 쪽으로 다가왔다.

“가죠, 박 이사님.”

“네? 아, 설마 한 이사님도…….”

“사장님께 불렸습니다. 같이 가시죠.”

성필은 한구인과 나란히 사장실로 갔다.

그와 마주치기 전까지, 성필은 홍규헌과 무슨 이야기를 할까 계속 생각했었다.

힘든 기억, 기쁜 기억, 슬픈 기억, 행복한 기억, 그녀와 나누고픈 이야기는 차고 넘칠 만큼 많았다. 그 기억들을 차근차근 정리하면서 기대에 차 있었는데.

‘한 이사님이 이상해.’

한구인의 표정은 시종일관 굳어 있었다. 왠지 모를 엄숙함마저 감돌아서, 성필은 그에게 말조차 걸지 못했다.

“사장님, 박 이사님과 같이 왔습니다.”

한구인이 노크와 함께 홍규헌의 답을 기다렸다. 약 몇 초의 기다림이 있고, 작게 ‘들어와’라는 답이 돌아왔다.

성필은 한구인의 뒤를 따라 사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달짝지근한 술의 향기가 성필의 코를 휘감았다. 홍규헌은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미안하네. 불러놓고 술 마시고 있어서. 앞에 앉아.”

홍규헌은 두 사람이 앉았는데도 의자를 비스듬히 옆으로 돌리고 있었다. 어딘가 먼 곳을 보는 눈으로, 그녀는 잔을 기울여 위를 술로 채웠다.

그녀는 한숨을 몇 번 쉬었는데, 그럴 때마다 술의 단내가 조금씩 사장실 안에 차올랐다.

상황이 거기까지 이르자, 성필은 이곳에 불린 이유가 단순히 회포를 풀기 위함이 아니란 사실을 눈치챘다.

“신용필이 누구야?”

홍규헌이 처음으로 꺼낸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듣자마자 성필의 머리가 멍해졌다. ‘신용필’은, 성필이 투자…….

“제 대학 선배님이십니다.”

한구인이 답했다.

홍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안심이네. 한 이사가 믿을 만한 사람으로 고른 거지?”

“그렇습니다.”

“알겠어.”

홍규헌이 의자를 두 사람을 향해 똑바로 돌렸다. 그녀와 마주한 성필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슬쩍 뒤로 물렸다.

“소녀연맹이 데뷔하기 전에 가로 엔터로 13억이란 거금을 투자해주신 분이 있다. 그분의 이름은 신용필이시고, 어느 지주회사(주식을 소유하고 그로써 수익을 내는 형태의 회사)의 사장이시다. 그분은 박 이사가 석세스 엔터에서 제작에 일조했던 엡실론을 보고 마음이 동하여 가로 엔터에도 투자하셨다. 한 이사가 그분을 설득하는 것에 성공했었다. 그로써…….”

홍규헌은 목이 탄단 듯 다시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아니, 절반 이상 차 있던 술을 한꺼번에 입 안으로 들이부었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그로써, 소녀연맹의 장기적인 활동을 위한 자금을 마련했다. 대형기획사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 되는 자본이지만, 어중간한 중소기획사에선 상상도 못 할 자본으로 퀄리티 높은 프로듀싱이 가능했다. 그 상태로 2년 이상의 활동을 유지할 자금이…….”

홍규헌은 급히 술을 먹어서인지 딸꾹질을 뱉었다. 얼굴이 나른하게 풀어졌지만 눈만은 형형했다.

“마련됐지. 13억이란 거금은 소녀연맹의 성공에 지대한 역할을 했음이 명확해. 참 은인이지.”

“사, 사장님…….”

성필은 상황을 깨닫고 의자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가 사장 홍규헌을 속였다는 사실이 지금 여기서 드러났다.

30억을 생으로 대출받아 지분을 회수할 정도로 소유욕 가득한 인물에게, 몰래 가로 엔터에 지분 투자했단 사실이 드러났다.

그 장본인은 가로 엔터의 이사인 성필. 지분이 없어도 가로 엔터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프로듀서다.

“제, 제가 이걸 어떻게 말씀드릴지…….”

쉽게 설명하자면, 성필은 왕을 지키겠단 명목으로 지방에서 군사를 양성한 꼴이었다.

당연히 왕은 지방 영주가 군사력을 키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설령 영주가 진정한 충심으로 양병에 힘을 쓰더라도 말이다.

중세기의 모든 내전은 왕과 영주의 권력다툼이었다. 영주들이 병력을 키울 때마다 흔히 썼던 변명이 ‘충성’이었다. 그리고 그 충성들은 오래가지 못하여, 곧 전쟁으로 변했었다.

회사라고 다르지 않다.

회사의 중역이 사장 몰래 지분을 샀다는 건 그런 의미다.

사실상 도전과 다르지 않다.

단순히 인간을 속였다는 도의적 책임만이 있는 게 아니다.

“저는, 저는 사장님을 속일…… 결과적으로는 속였지만요……!”

성필은 흥분하여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목제 의자가 성필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큰소리를 내며 꼴사납게 나뒹굴었다.

한구인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성필은 뻣뻣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저는, 그게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영원히 속일 수 있으리라곤 당연히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무것도 모른 채 지낼 시간이 길게 이어지길 바랐었다.

성필이 홍규헌에게 비밀로 투자했던 이유는, 세 사람의 관계가 바뀌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다.

거울처럼 투명하게 서로가 서로를 비추며, 티 없이 맑게 웃을 수 있는 나날을 바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로써 그 관계는 깨져버렸다.

‘얼마나 상심이 크실까…….’

아무런 맥락도 없이 성필은 그리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자마자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가로 엔터의 전대 프로듀서란 사람이 있었다. 홍규헌은 그를 믿고 전권을 주었었다.

사람을 전적으로 믿는 일이 쉬울 리 없다.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어도 노심초사하는 게 사람의 마음이니 말이다.

홍규헌은 그렇게 했었고, 그 마음은 빛을 발하지 못했었다.

그런데도 성필을 믿어주었던 것이다.

‘나를 동업자라고 해주시면서.’

그리고 홍규헌의 마음은 다시 배신당했다.

성과랄 것도 없이 프로듀싱 권한을 요구했던 성필을 믿었는데, 진심으로 대했는데, 성필은 그녀에게 비밀을 만들어버렸다.

사장으로서 그녀가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을, 그래서 성필이 그녀를 속여가면서까지 진행했던, 그런 일이 밝혀졌다.

‘얼마나…….’

그 사실을 알게 된 홍규헌은 얼마나 괴로울까.

첫 번째 프로듀서는 회사를 망하기 직전까지 몰고 갔다. 그에게 걸었던 기대는 조각났으며, 그는 아무런 책임 없이 회사를 떠났다.

책임은 그를 믿은 홍규헌에게 있으니까.

그리고 두 번째 프로듀서 성필. 그는 회사를 기사회생시켰다. 그에게 걸었던 기대는 기대 이상의 결과를 가져왔으나, 그는 사장을 속였다.

속여서 회사의 지배권인 지분을 취득했다.

심지어 가장 오랜 세월 함께 해왔던 부하인 한구인과 함께, 사장을 속였다.

“…….”

이윽고, 성필은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내가 석세스 엔터를 나왔던 이유는.’

꿈을 위해서.

프로듀서가 되기 위해서다.

‘그리고 또.’

반평생을 믿고 따랐던 형에게 배신당할 미래를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원했던 건…….’

온전히 자신을 맡길 수 있는 집, 회사였다.

헌신에 따른 신뢰와 보상이 돌아오는, 지극히 당연한 관계를 바라왔다.

성필로선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모를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전생을 통틀어 헌신을 바쳤으나 보상은커녕 돌아온 게 배신뿐이었으니까.

지극히 당연한 관계를 만드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아니, 배운 줄 알았지만 실은 아니었다.

성필은 바보같이 다시금 석세스 엔터에서처럼 가로 엔터에 충성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방법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그렇게 바보처럼 한 우물만 파기에,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신뢰와 애정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그는 30살로 돌아온 후, 홍규헌과 만나고, 가로 엔터에 들어오고 나서, 다시금 강아지처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제발 이번 주인은 올바른 사람이길…….

‘드디어 만났는데.’

김태훈을 대신할.

인생을 바쳐 헌신할.

자신을 끝없이 믿어주는.

‘그런 사람을 만났는데…….’

그게 다 깨지기 직전이다.

홍규헌의 거울은 더 이상 성필을 투명하게 비추지 않을 것이다.

“죄송합니…….”

“무릎 꿇지 마.”

홍규헌이 말했다.

성필은 엉거주춤한 상태로 멈춰 있었다. 그녀의 취기 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성필은 그녀의 다음 말을 예상했다.

‘정말 끝이구나.’

여러 경우의 수가 있다.

과거의 일이니 그냥 넘기자, 라고 할 수도 있다. 혹은 이제 주주로서 그만한 대우를 해주겠다, 라고 할 수도 있겠지. 아니면 앞으로도 이 관계를 유지하길 바란다, 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너와 나는 끝이다, 까지 갈 수도 있고.

무엇이든 홍규헌의 진심과는 끝이 엇갈려 있을 것이다. 성필은 영원토록 그녀의 진심은 알지 못할 게 분명했다.

홍규헌은 사장으로서, 회사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성필을 매몰차게 대할 수 없을 테니까.

성필은 영원히 그녀의 가면만을 보아야 할…….

“이 사실을 안 건 1년이 넘었어.”

“……네?”

반응한 건 한구인이었다.

그는 상상도 못 했단 듯 거의 눈을 부릅뜨다시피 하며 홍규헌을 바라보았다.

그에 홍규헌이 픽 웃었다.

“한 이사, 진짜 사람을 바보로 아는구나. 아니면 네 능력을 굉장히 믿고 있거나. 하긴, 미국에서 황금 피라미드로 가는 길을 부드럽게 밟으신 분이니 그럴 만도 하지요.”

“아니, 아니, 그, 아니, 아니, 아니…….”

“우리 애들 데뷔곡이 그렇게 좋아? 뭐어, 아무튼. 나도 놀라긴 했어. 나 하나 속이려고 법인을 만들어놓질 않나. 허수아비까지 세우고. 신용필 씨는 무슨 죄야. 분기마다 우리 회사 와서 ‘허허, 잘되고 있네요’라는 말만 하고.”

“…….”

“어쨌거나 이걸 안 지는 1년이 넘었고…… 박 이사. 계속 그렇게 서 있을 거야?”

성필은 무릎을 꿇기 거의 직전인 상태로 계속 있었다.

“박 이사 허벅지 힘 자랑 안 해도 돼. 서로 벤치스쿼트도 도와줬잖아. 충분히 봤어. 아니면 뭐야, 나한테 더 어필해보고 싶어?”

성필이 스르륵 무릎을 펴서 바로 섰다.

홍규헌은 잔에 술을 채웠다. 그리고 역시나 스트레이트로 위에 때려 박았다.

“나도 고민이 많았어. 이걸 말해야 할까, 아니면 모른 척 넘어가야 할까.”

“사장님, 박 이사님과 저는 정말 불순한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절대로 BG 인베스트먼트가 가지고 있던 30%의 지분을 후일 자금을 모은 후 인수하여 40%가 넘는 지분을 지니고 회사를 위기로 몰아가서 소액 지분투자를 받도록 설득한 뒤 그것을 따로 매수하는 전략을 사용하여 결과적으로 사장님과 프록시 배틀(주주총회에서의 경영권 쟁탈전)을 벌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왜 그렇게 자세한 방법을……?”

“사장님이 저를 의심하실까 봐…….”

“지금 의심이 생겼는데.”

홍규헌은 술내음이 담긴 한숨을 뱉었다.

“내가 이걸 안 지 1년이 넘었단 건, 이 이야기를 꺼내기까지 고민했던 시간이 1년이란 거지. 처음에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더라고. 나를 속이고 회사에 투자해? 그래서 지분을 얻어? 무슨 저의지? 계속 고민했어.”

그녀가 쥔 잔에서 뽀득뽀득 소리가 났다. 그녀는 잔을 계속 손가락으로 훑었다.

“그리고 또 웃긴 게 말이야. 보통 이런 경우라면 무서워야 하거든. 언니 오빠들, 아빠한테도 계속 들었던 이야기가 있어. 대주주란 인간들은 돈만 벌면 만족하는 족속이 아니라고. 결국에는 좋든 나쁘든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 한다고. 권력이 있으면 쓰고 싶은 게 본성이라고 하더라. 박 이사도 대주주잖아?”

“어, 뭐, 그, 그렇…….”

“분명 무서워야 하는데 말야. 안 그렇더라고. 박 이사가 막 나한테 압박하는 모습이 눈에 안 그려져. 내가 너무 순진한가?”

“아주 적확한 판단이십니다!”

“그래, 그게, 그런 내가 웃기기도 하고…….”

홍규헌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한심스럽기도 하더라.”

“…….”

“나는 뭔가를 지배할 자질 따위는 애초에 없었는지도 몰라. 사람의 위에 서려면 가장 필요한 거, 공포가 없어. 박 이사한테 배신당하면, 뭐어, 그걸로도 좋다고 생각했어.”

“사장님…….”

“그 정도가 내 그릇이겠거니 했지. 그래, 이 사실을 안 순간부터 마음을 정했던 거야. 언젠가 한 이사랑 박 이사가 짜고 지분을 잔뜩 모아서, 나한테 경영권을 뺏으려고 해도…….”

“바,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방법은 실제로 제가 쓰려고 기획한 게 아니라…….”

“뺏으려고 해도.”

홍규헌이 잔을 테이블에 쿵 내리쳤다.

“뺏길 생각이었어. 그렇게 다짐했지.”

성필과 한구인이 우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 순간이 오기까지 홍규헌이 했을 마음고생이 머리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작은 체구임에도 항상 차가운 인상에다가 태연함을 가장하지만, 실은 마음이 여리다.

두 남자는 가까이에서 홍규헌을 오래도록 보필해왔기에 그 사실을 알았다.

홍규헌은 무심코 한 농담에도 부하가 상처받았을까 걱정하여 끙끙 앓다가, 결국 따로 다가와 사과하는 타입의 사람이다.

“근데…… 아무리 고민해도 말야. 이 상태로는 찝찝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라. 너희들이랑 같이 있을 때도 내 앞에 유리 벽이 쳐져 있는 거 같았어. 웃어도 웃는 게 아닌 거 같고, 기뻐해도 기뻐하는 게 아닌 거 같았어. 왜일까…….”

홍규헌은 아예 술병 주둥이에 입을 박고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미 그녀의 동공은 흐릿하게 풀려 있었다.

그녀가 칼로 자르듯이 말했다.

“싫어.”

“……예?”

“싫다고. 경영권을 잃고 회사에서 쫓겨 나가는 건 싫어. 돈이 있어도 무슨 소용이야. 아, 여기까지 생각이 닿으니까 알겠더라. 나는 그냥 막…….”

홍규헌이 팔을 좌우로 쭉 펼쳤다.

“이따만하게 성공한 기업을 갖는 것보다! 그래서 나한테 오만 욕을 다 퍼부은 오빠야 언니야들한테 복수하는 것보다!”

“사장님 괜찮으신…….”

“그냥! 그냥, 그냥…….”

그냥.

홍규헌이 고개를 비스듬하게 떨어뜨렸다.

“너희들이랑 다 같이 있는 게 좋은 거야…….”

“…….”

“좋아.”

“……?”

“꿈속에 살고 있어, 나는. 어릴 적에는 막연히 동경했던 아이돌이란 게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보고 있어. 어떻게 정상으로 나아가는지 보면서 살아가고 있어. 꿈이야, 정말로. 꿈을 이뤄주는 요정들…….”

그렇게 홍규헌은 한동안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술병을 쥐고 고개를 떨어뜨린 그녀는 잠든 것처럼 보였다.

성필과 한구인이 눈빛을 교환하고, 한구인이 홍규헌의 어깨로 손을 가져갔다.

그 순간 홍규헌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한구인이 급히 몸을 뒤로 빼자, 그녀는 다시 술을 입 안에 퍼부었다.

“꿈에서 깨기 싫어. 싫으니까, 믿기로 했어.”

홍규헌은 서랍에서 봉투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성필의 가슴팍에 안겼다.

성필이 홍규헌을 쳐다보자, 그녀는 열어보란 뜻으로 턱 끝을 까딱였다.

성필이 봉투를 열고 안에 든 서류를 펼쳤다.

[회사지분 양도계약서]

“시작을 함께해준 프로듀서에 대한, 이번 보너스야.”

서류를 쥔 성필의 손이 떨려왔다.

“만약 내 그릇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크다면, 계속 남아 있어 줄래? 남아서, 계속 프로듀서로 있어 줘. 나한테 계속 꿈을 보여줘.”

“아, 아…….”

성필이 쥔 서류의 끄트머리가 구겨졌다.

“하지만, 저, 혼자 이걸 받는 건, 이게…….”

“저도 가로 엔터 지분이 있습니다.”

한구인은 상황이 갑작스레 잘 풀리자 얼떨떨한 투였지만, 재빠르게 홍규헌에게 호응했다.

“아무렴 개국부터 함께했으니까요. 박 이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이미 있는데…… 지분을 갖고 있는데…… 사장님을 속였는데…….”

“또 속일 거야?”

성필은 흐릿하게 보이는 서류에서 눈을 들어 앞을 보았다. 역시나 흐릿한 홍규헌의 얼굴이 보였다.

“……아니요.”

성필의 만면에 눈물 섞인 웃음이 드리웠다.

“이제 영원히 함께예요 사장님…….”

“……?”

성필은 눈을 감았다.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턱을 타고, 그가 쥔 서류에 한두 방울씩 떨어졌다.

‘이거구나.’

인생에서 갖기 어려운 확신이 성필에게로 찾아왔다.

‘나는 이 순간을 위해 과거로 돌아왔던 거구나.’

성필의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던 김태훈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에게 받았던 은혜.

그와 나누었던 행복.

그에게 당했던 배신.

그리고 고통.

모든 게 지워졌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이렇게 되어야 하는 거구나…….’

인간이란 믿음을 나누면서 행복해지는 게 틀림없다.

이제야 성필은 어째서 리카가 자신에게 그토록 고가의 선물을 줄 수 있었는지. 장하양이 어떻게 차를 사주겠단 말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는지 알게 됐다.

‘내가 애들한테 주었던, 애들이 나한테 받았던, 무조건적인 믿음이란 건…….’

어떤 수를 써서든 갚고 싶어지는 거였다.

그게 돈으로 가능하다면 행복하겠지.

성필은 서류를 껴안고 흐느꼈다.

“사장님 속여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영원히 함께해요. 영원토록 여생을…….”

“박 이사 취했어?”

“취한 건 사장님이잖아요오…….”

“뭐어, 그렇지.”

홍규헌이 이야기의 끝을 장식하듯 맑게 웃었다. 한구인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박수 쳤다.

“구인아.”

한구인이 흠칫했다.

그건 성필도 마찬가지였다. 기쁨으로 흐물거리던 정신이 바짝 차려질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또, 성필아.”

“예? 으에?”

“아니면 오빠라고 불러줄까?”

홍규헌이 서랍에서 술병을 하나 더 꺼냈다. 한구인이 눈을 부릅뜨는 것으로 보아 고가임이 분명했다.

“오늘이야. 오늘만이야. 오늘은.”

홍규헌이 시원스레 술을 개봉했다.

“옛날처럼 셋이서 마셔보자. 격 없이. 옛날부터 이런 자리 꼭 가져보고 싶었거든.”

“그래 규헌아.”

“박 이사는 사장님이라고 불러.”

“하잇(넵)!”

“농담이에요 오빠.”

“우욱.”

“구인이 방금 토했어? 죽을래?”

한구인의 입꼬리가 느릿하게 올라갔다.

“오랜만이네.”

성필은 이번엔 머리에 번개가 꽂힌 듯했다. 한구인이 홍규헌을 향해 반말을 썼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표정이 친근하기 그지없었다.

“이렇게 말하는 건. 처음 만났을 땐 곧잘 애교 섞인 말투도 잘 썼었는데.”

“한 이사님 제대로 평어도 하시네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한국에서 산 지가 10년이 다 되어가니 말입니다.”

“아직 10년도 안 됐었어요?!”

“그야 미국에서 대학원도 다니고 일도 했었으니…….”

“둘 다 그만!”

홍규헌이 빽 소리 질렀다.

“둘이서도 반말 써. 알겠어?”

성필과 한구인은 어색하게 서로를 바라보더니, 기다렸다는 듯 씩 웃었다.

“야 한구인.”

“왜 박성필.”

“으하하하핰!”

“뭐.”

“어?”

“뭐가 웃긴데.”

“어어……?”

“내가 진짜 속에 담고 있던 말 많다.”

한구인이 성필의 잔에 술을 한가득 부었다.

“오늘 다 털게.”

“어, 네, 형…….”

“자 그럼 오빠들. 건배!”

세 사람의 잔이 부딪쳤다.

성필은 고작 수십 분 만에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그리고 지옥의 끝이자 천당의 시작점에서, 성필은 생각했다.

아주 사소한 생각이었다.

‘사장님 말투는 되게 소녀스럽구나.’

그녀의 눈동자는 거울처럼 투명하게 성필을 비추었다.

* * *

“성필아?”

손혜빈은 출근하자마자 책상에 머리를 박은 성필을 발견했다.

“너 왜 그래?”

“아니, 으, 숙취 때문에.”

성필은 어제 집에 어떻게 돌아갔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일어나니 발가벗은 채로 집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실수한 게 없나 한구인에게 연락하니, 본인도 기억이 없어서 모른다고 했다.

거대한 공포를 가지고 홍규헌에게 연락했더니, 자신이 두 사람 전부 집에 잘 들여보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아무튼, 성필은 숙취를 가지고도 다른 이들보다 빨리 출근했다.

“숙취해소 음료 먹고도 잘 안 깨네…….”

“아하, 그래? 우리 성필이 많이 힘들겠네?”

“응…….”

“내가 먹자고 할 땐 빼더니, 누구랑 술을 그렇게 많이 잡수셨어?”

“……으음.”

* * *

리카와 한구인은 1층 홀의 휴게공간에서 실뜨기를 했다. 한구인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리카가 가르쳐준 방법을 복기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한 이사님 제가 가르쳐줄 때 제대로 듣고 계신가요!”

“예. 잘 들었습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군요.”

“아타시(제)가 한 이사님보다 잘하는 게 또 생겼네요!”

“왜 그렇게 저를 이기고 싶어 하시는 겁니까.”

“언젠가 학력으로도 이기는 게 목표예요! 한 이사님은 제 지적 롤 모델이시니까요!”

“그건 기쁜 말입니다만, 가능하시겠습니까?”

“갑자기 오만해졌어?!”

그때 2층에서 성필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박 이사님이 또 손 이사님한테 혼나고 있나 봐요!”

“왜 손 이사님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에? 박 이사님 입에서 비명이 나오게 할 수 있는 건 혜빈 언니뿐이라서?”

“그럴듯하군요. 가끔 아라 씨도 가능하시지만 말입니다.”

“아라쨩이 등을 훑으면 박 이사님 입에서 비명이 자동으로 나오긴 하죠. 아, 거기선 검지를 이쪽으로 넣는 거예요!”

“……리카 씨. 언제까지 놀아드려야 합니까.”

“‘놀아드린다’?! 같이 노는 거 아니었나요!”

“박 이사님이 괴로워하시니 대타로 저를 찾으신 주제에 말씀은 청산유수군요.”

“대타가 아니…… 대타 맞네요!”

“이젠 부정도 안 하십니까.”

리카는 한구인에게서 실을 받아 다시금 실뜨기를 시작했다.

“유우쨩이 올 때까지 같이 놀아주셔야 해요!”

오늘, 유우토가 가로 엔터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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