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화
‘새 차가 필요하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 의도가 무엇일까?
일단 화자가 어떤 사람인지 살펴야 한다.
‘하양이가 말했지.’
방금 몇억이란 돈을 손에 쥔 20대 중반의 젊은이다. 그런 그녀가 성필에게 ‘차가 필요하냐’고 했다.
의도가 명확했다.
“하양아 네 마음은 알겠는데, 괜찮아. 안 해줘도 돼.”
성필은 세상의 모든 욕망을 털어버린 듯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고, 장하양은 백설하와 함께 보았던 연애 관련 아이튜브 영상을 떠올렸다.
선물을 주겠단 말에 상대가 관심 없단 듯 ‘아니야’라고 말하면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했었다.
과연 정말 필요 없다는 건지, 아니면 속물처럼 보이기 싫은 건지 면밀한 판단이 필요했다.
“이사님 차 오래 타셨잖아요.”
“그렇긴 한데, 너한테 받고 싶진 않아.”
“네……?”
“하양아, 아니. 리카도 잘 들어. 김칫국 마시는 걸 수도 있는데, 지금 내가 하는 얘기 다른 애들한테도 꼭 해줘.”
성필은 둘을 가까이 불러 모으고 진중히 말했다.
“너희가 나한테 고마워하는 건 알아. 그 감사를 선물로 전하고 싶은 것도 알고. 기뻐. 무지 기뻐. 월급 받고도 부모한테 돈 쓰기 아까워하는 사람도 있단 걸 생각하면, 너희가 얼마나 심성이 곱고 나에 대한 마음이 큰지 알겠어.”
“이사님 미리 할 말 준비해오시기라도 했나요! 혀가 한 번도 안 멈춰요!”
“리카, 내가 진지한 이야기 하잖아.”
성필은 찔려서 괜히 목소리를 깔았다.
사실, 성필은 이런 날을 내심 기대했었다.
‘우리 애들이 나한테 고맙다고 막 선물 주면 어쩌지?’라면서, 밤에 침대에 누워 설렌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이렇게 말하면서 거절해야지’라고 생각해왔다.
들키면 창피할 것이다.
“일단, 나한테 굳이 선물 줄 필요 없어. 의무처럼 느끼지 않아도 돼. 왜냐하면 나는 회사에서 돈을 받잖아.”
소녀연맹을 영입하고, 프로듀싱하고, 케어하는 건 성필의 일이다.
정당한 대가를 받고 수행하는 업무다.
그에 소녀연맹이 괜한 부채감이나 사사로운 감사를 가질 필요는 없다. 건조하게 표현하자면, 성필과 소녀연맹은 비즈니스적인 사이일 뿐이니까.
“그걸로도 충분해.”
“……그러니까.”
장하양은 얼굴이 빙판처럼 굳어서 말했다.
“회사에서 돈을 받으니, 제 선물은 필요가 없다는 말씀……?”
“어어, 뭐, 그렇게 되지. 근데 요지는 그게 아니라, 너희가 나한테 부채를 느낄 필요가 없다는 거…….”
장하양이 성필의 손에 들린 쇼핑백에 눈을 주었다. 그곳엔 ‘입생로랑’의 마크가 여백을 남겨두고 고풍스레 새겨져 있었다.
성필의 눈도 장하양을 따라 쇼핑백에 박혔다.
“…….”
“…….”
“……이건 말이지, 하양아. 리카가 저지른 죄악의 대가를 받은 거야.”
“죄악?! 제 눈물이 그 정도로 더러운가요!”
“화장이랑 콧물은 왜 빼.”
“콧물이란 단어 쓰지 마세요! 그리고 하양 언니!”
리카가 장하양의 손을 맞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차는 아니잖아요 차는!”
“아니야……?”
“차는 엄청 고가의 물건이에요! 가족 사이나 되어야 겨우 주고받을 수 있는 거라구요!”
장하양은 ‘이사님은 나한테 가족이야’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저 한숨으로 아쉬운 마음을 흘려보냈다.
“저가형 입생로랑 정도가 적당해요!”
“그런 식으로 들으니까 좀 섭섭하다 리카야.”
“이사님은 뭘 바라시는 건가요?! 정말 차인가요!”
장하양은 성필과 리카가 티격 거리는 것을 복잡미묘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마음을 접은 듯 굳은 표정을 갈무리하더니, 산뜻한 투로 말했다.
“이제 이사님은 리카랑 식사하러 가시나요?”
“아니, 나는 회사 돌아가야 해.”
“에에, 아타시(저)랑 종일 노는 거 아니었나요! 자유이용권 끊은 줄 알았는데!”
“리카, 밥은 언니랑 먹자.”
“좋아요! 먹고 쇼핑해요! 이사님은 사축답게 일이나 하러 가세요!”
“서러워 죽겠네…….”
리카는 장하양에게 달라붙어 오늘의 위시 리스트를 줄줄 읊었다. 듣자 하니, 정산받으면 사고 싶은 물건을 일기장에 적어왔다는 모양이다.
성필은 이야기만 들어도 뿌듯했다.
‘다행이다, 정말.’
멤버들을 영입할 때만 해도, 그녀들이 망하진 않을까 노심초사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마음껏 쇼핑도 할 수 있게 되다니. 감개무량하다.
‘이젠 애들한테 지갑 취급받을 걱정도 없겠지.’
멤버들에게 한두 푼씩 쓰는 건 은근히 성필에게 경제적 타격을 주었었다. 하지만 이젠 그런 신세도 끝났다.
‘월마다 앨범 대여섯 장씩은 더 살 수 있겠어.’
소녀연맹에게도, 성필에게도 기쁜 날이다.
* * *
“읏차.”
숙소 현관에 한가득 쇼핑백을 내려놓은 리카와 장하양은 땀을 닦았다.
대부분이 리카의 짐이었다. 장하양의 것은 한 손으로도 들 수 있을 만큼 적었다.
둘은 짐을 각자의 방으로 옮기고, 산 물건을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다.
백설하는 아직 숙소로 돌아오지 않았기에, 장하양은 정적 속에서 오늘 산 물건들을 개봉했다.
먼저 핸드폰이었다.
애플폰 최신 모델이다.
‘유심을 빼고, 여기에 넣고…….’
껐다 켰다를 반복하니 개통이 됐다.
장하양은 아이튜브에서 요금제 바꾸는 법을 검색하고, 요금제도 새 핸드폰에 알맞은 것으로 변경했다.
‘다음은…….’
애플폰과 같은 회사의 스마트 워치였다.
장하양은 그것을 손목에 두르고 전원을 켰다. 초기 세팅을 완료하니 수십 분이 훌쩍 흘러가 있었다.
“…….”
스마트 워치 바탕화면을 소녀연맹의 단체 사진으로 바꾸었다. 장하양은 워치를 바라보면서 싱글싱글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뒤를 홱 돌아보았다. 문은 굳게 닫혀 있고, 복도에서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워치 배경 화면을 다른 사진으로 바꿨다.
성필과 함께 찍었던 연습생 시절의 사진이었다. 그것을 멀거니 바라보던 장하양은, 어느 순간 짙은 창피함을 느끼곤 배경 화면을 바꾸었다.
‘또 다음은…….’
애플폰과 같은 회사의 블루투스 이어폰이었다. 이어폰을 착용하고 소녀연맹의 ‘아니’를 재생했다.
장하양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 이게 30만 원대 이어폰…….’
지금까지 자신은 어둠 속에서 살고 있었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2만 원대 줄 이어폰만 썼었으니, 확실히 어둠 속에서 살고 있던 건 맞았다.
‘어, 으어?’
안 들리던 소리까지 들린다.
‘아니’가 이런 곡이었나 의문이 들 정도다.
‘기기에 따라 사운드 차이가 이렇게 커?’
괜히 정지음이 수십, 수백만 원짜리 음향기기를 계속 사들이는 게 아니었다.
한구인은 기기가 새로 들어올 때마다 정지음의 작업실 근처에서 절규하곤 했었다. 장하양은 그런 한구인을 보면서 불쌍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곡 퀄리티를 위해 꼭 필요한 거였어.’
장하양은 만족스레 이어폰을 케이스에 넣었다.
이상이 장하양의 위시 리스트였다.
온몸에 최신 디지털 기기를 두르니, 왠지 모르게 신세대가 된 것 같기도 했다. 실제로 신세대가 맞으니, 이제야 유행의 대열에 꼈다고 해도 좋으리라.
‘이제 5년 정도는 문제없어.’
장하양은 오늘 산 물건을 반드시 5년 이상 쓰리라고 다짐했다. 애초에 그만큼 길게 쓸 생각이 아니었으면 사지도 않았다.
“하아.”
장하양은 나른한 한숨을 뱉으며 바닥에 풀썩 누웠다.
‘이게 금융치료라는 거구나.’
돈을 쓰니 기분이 좋다.
하지만 이왕이면 다른 사람의 기뻐하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은 못 하게 됐네.’
정산받기 전의 소녀연맹 멤버들은 가난했다.
멤버들의 보컬 트레이너로서 급료를 받는 백설하를 제외하곤, 다들 수십만 원 정도의 용돈으로 살아갔다.
장하양은 그런 멤버들에게 자그마한 것이라도 베풀길 바랐었다. 만약 큰돈이 생긴다면 꼭 그러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젠 멤버들 전부 부자가 됐네.’
그럼, 이제 멤버들에게 뭘 해줄 수 있을까.
‘이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장하양은 아직도 꿈만 같다.
아이돌이 되지 않았다면 이만한 돈을 평생 쥐어보기나 했을까?
성필과 만나지 않았다면, 멤버들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여전히 아르바이트 대타나 하며 굶주렸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머리털이 삐쭉 선다.
올바른 선택을 한 자신이 대견하며, 이 선택으로 이끌어준 성필이 고마우며, 선택을 함께해준 멤버들이 사랑스럽다.
그래서 마음을 전하고 싶은데…….
‘돈은 행복의 큰 부분인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 부러워할 엄청난 금액을 손에 쥐었으나, 큰 감흥은 없었다.
분명 돈은 생명이자 삶의 필수 요소인 줄 알았는데. 그래서 가지면 가질수록 행복해지는 물건인 줄로만 알았는데.
‘눈이 뜨이는 기분. 세상이 밝아지면서, 더는 어둠 속에 웅크리지 않아도 되는…….’
그런 전능감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었다.
아니, 적어도 진정한 자유를 느낄 거라고 예상했었다.
장하양은 돈이 없단 게 얼마나 커다란 족쇄가 될 수 있는지 안다. 모든 사고방식이 돈으로 직결되어 움직이며, 매분 매초 돈에 대한 걱정으로 편할 날이 없는 삶을 살았으니까.
‘달라진 게 없어. 나는 돈이 필요한 게 아니었나? 돈보다 더 바라는 게…….’
장하양은 옆으로 돌아누웠다.
고민을 거듭하던 차, 그녀는 문득 생각나서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백화점에서 나온 이후 계속 궁금했던 것을 검색했다.
“언니 어떤가요!”
갑자기 리카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장하양은 깜짝 놀라서 손에 쥔 폰을 바닥에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그녀는 솥뚜껑처럼 커진 눈으로 리카를 보았다.
여러 명품 브랜드의 옷을 누더기처럼 걸친 리카였다.
패션을 딱히 공부하지 않은 장하양이었지만, 온갖 브랜드 마크가 여기저기 노출된 몰골이 썩 좋지 않단 건 알 수 있었다.
“인간 명품 리카예요!”
“으, 응, 멋지네.”
“반응이 떨떠름하네요.”
“안 빨고 바로 입게?”
“세탁기에 넣었다가 헤지면 어떡해요!”
“그럼 안 빨게?”
“한번 입고 버릴 거예요!”
“리카…….”
장하양이 허탈하게 웃었다.
‘진짜는 아니지?’란 눈으로 쳐다보니, 리카가 배시시 웃었다.
“농담이라구요! 돈이 생겼다고 바로 낭비벽이 생기진 않아요! 이미 인터넷에서 세탁법도 다 검색해뒀어요!”
“리카 통장 압수해야 하나 고민했어.”
“헤헤, 음?”
리카는 바닥에 떨어진 장하양의 핸드폰을 발견했다. 하필 리카의 발치까지 굴러와 있었다.
“산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떨어뜨리시나요!”
“너 때문에 놀라서 떨어뜨린 거…….”
리카가 장하양의 폰을 주웠다. 그곳엔 방금까지 장하양이 검색했던 내용이 나타나 있었다.
[매니저 계약서.
갑과 을은 상호 신의성실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계약한…….]
“에, 언니 따로 매니저라도 두실 건가요?!”
장하양이 허겁지겁 리카의 손에서 폰을 빼앗았다.
“궁금해서 검색한 거야.”
“불만이 있으면 경섭 오빠한테 말씀하세요!”
“아하하, 그런 거 아니라니까.”
리카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면서 방을 나갔다. 장하양은 그녀가 나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다가, 방에 혼자 남자마자 다시 폰에 집중했다.
“1인 기획사…….”
연예인이 직접 설립하고 대표가 되어 매니저를 둔다.
사실상 매니저와 연예인으로만 구성된 원맨팀이다. 유명한 연예인의 경우에는 매니저만 열 명 단위로 두기도 한다는 모양이다.
‘1대1 계약.’
언젠가 소녀연맹도 해체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자연스레 성필은 다른 아이돌 그룹을 맡게 되겠지. 그럼 성필과 소녀연맹의 접점은 사라지지 않을까.
설령 소녀연맹의 멤버들이 개별 활동을 한다 하더라도, 매니지먼트와 프로듀싱은 가로 엔터의 다른 전문 인력이 맡을 가능성이 높았다.
성필의 전문 분야는 아이돌 그룹이니까.
“계약.”
장하양이 나지막이 말했다.
“일대일 계약…….”
정보를 더 찾아보던 장하양은 갑자기 짜증스레 핸드폰을 침대 위로 던졌.
‘아니!’
던지려다가 조심스레 올려두었다.
방금 산 폰을 험하게 다룰 수는 없다.
그리고 장하양 본인도 폰처럼 침대 위로 올라갔다. 누운 채 천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산을 받았다.
엄청난 돈을 손에 거머쥐었다.
하지만.
‘마음이 빈 거 같아.’
성필이 자신에게 보내는 신뢰의 증표.
만약 아이돌로 기대 이상의 수익을 올리지 못할 시 성필이 그에 들인 노력을 돈으로 보상하겠다, 그런 계약이다.
그런 계약이 있었다.
이젠 없다.
‘끊어졌어…….’
이제 성필과 장하양의 사이엔 아무것도 없다.
정확히는, 남들과 다를 게 없다.
* * *
퇴근 시각 이후, 사장실에는 가로 엔터의 중역들이 모여 일렬로 서 있었다.
성필, 한구인, 손혜빈, 민경섭, 정지음.
“나도 여기 있는 거 맞아요……?”
정지음은 대형견 우리에 들어온 소형견처럼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었다.
이곳에 모인 인원뿐 아니라, 사장실이란 공간 자체가 정지음을 겁먹게 만들었다.
정지음은 사장실이 익숙하지 않을뿐더러 사장인 홍규헌과도 접점이 거의 없다. 애초에 평소에 마주치는 경우 자체가 드무니, 그녀를 보는 게 부담스럽다.
“너 왜 이래.”
민경섭이 정지음에게 어깨동무하며 안심시켰다.
“술자리에선 사장님이랑 말만 잘 하더만.”
“그건 술의 힘을 빌려서 그런 거고요. 아니, 아무리 봐도 오늘 이거 모인 거요…….”
가로 엔터의 순익 전환.
그 역사적인 해를 기념하여 중역을 불러들인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
“한낱 뮤직 프로듀서가 오는 건…….”
“야, 지음아.”
민경섭이 어깨동무한 위로 손혜빈의 팔도 올라왔다. 정지음은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 더 움츠러들었다.
“우리 남자 연습생 애들이 뭐라고 말하고 다니는 줄 아냐?”
“네……?”
“네 작업실로 불리면 데뷔 확정이래.”
정지음은 이해가 안 돼서 눈만 끔뻑였다.
“뭐라고요……?”
“네가 가로 엔터 뮤직 프로듀서잖아. 사실상 모든 음악이 네 손을 거치니까. 연습생들 눈에는 네가 데뷔의 키를 가진 사람으로 보이는 거지.”
“어, 어어? 아니, 내 작업실로 불리면 데뷔 확정? 그, 그거 전에 사무엘이 부른 거 말하는 거죠? 그건 걍 남자 보컬 필요해서 잠시 부른……!”
“애들한텐 다르게 보이나 보지. 아니, 회사 사람들한텐 다 그렇게 보일걸.”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정지음을 귀여운 동생처럼 대하지만, 다른 직원들은 전혀 아니다.
항상 작업실에서 은둔자처럼 생활하는, 음악에 미친 뮤직 프로듀서.
소녀연맹의 히트곡을 연달아 제작한 전무후무한 천재이자 가로 엔터의 기둥.
누구도 정지음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다.
민경섭이 장하단 듯 정지음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그러니까 평소에도 얼굴 찌푸리고 다니지 말…… 아니다. 넌 그냥 찌푸리고 다녀. 햇볕도 보지 말고. 넌 추레한 게 더 포스 있어.”
“그치? 지음이 얘 키 크고 비쩍 말라서 그런가 은근히 퇴폐미가 있다니…….”
문이 열리자 다들 즉시 잡담을 멈추고 똑바로 섰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
홍규헌은 바쁜 걸음으로 부하들 앞에 섰다.
그 순간, 성필이 만면에 미소를 걸고 박수 쳤다.
“사장님, 축하드립니다!”
그와 동시에 짠 것처럼 다들 박수를 보냈다. 홍규헌은 얼떨떨하게 박수를 받아들이다가, 얼굴을 붉히면서 손을 내저었다.
“됐어, 그만해.”
민경섭이 휘파람을 불면서 흥을 돋우었다.
“연예기획사 미녀 사장! 억대 자산가!”
“아 진짜, 그만해애…….”
그만하라고 하면서도 홍규헌은 기쁜 티를 숨기지 못했다. 대놓고 칭찬하는 게 썩 기분 나쁘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그저 대단하다 홍규헌!”
손혜빈은 치어리더가 야구 선수를 응원하는 것처럼 펄쩍펄쩍 뛰었다.
“철혈사장 홍규헌 영원히 사랑해!”
“진짜 내가 미치겠다…….”
홍규헌은 이젠 맨눈으로 이 광경을 볼 수가 없었다.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면서 어떻게든 헤픈 웃음을 감추었다.
그럼에도 귀가 붉어져서, 그녀가 기뻐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홍규헌의 딸랑이인 한구인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30살인데도 20대처럼 보이는 최강 동안 미녀……!”
한구인이 배를 부여잡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만하라고.”
다들 입을 꾹 다물고 군인처럼 각 잡고 섰다.
한구인이 일어나 다시 자리 잡고 나서, 홍규헌은 자신의 앞에 선 면면을 차분하게 관찰했다.
그리고 분위기를 풀려는 듯 손뼉을 쳤다.
“그래, 결국 여기까지 왔네. 다들 고생 많았어.”
홍규헌은 사장실 서랍에 두었던 편지 봉투 다섯 개를 꺼냈다. 그녀는 정지음의 앞에 서서 봉투를 손에 직접 쥐여주었다.
“내 직접 쓴 편지랑 마음을 담은 선물이야.”
“얼마예요?”
정지음은 홍규헌을 대하기 어렵다고 했던 게 다 거짓말인 듯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은은한 웃음이 퍼져 나갔다.
“지금 볼래?”
“네? 그, 그래도 돼요?”
“봐.”
정지음은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곱게 접힌 편지와 수표가 들어 있었다.
금액을 본 정지음이 다리를 후들거리면서 비틀거렸다. 옆에 있던 민경섭이 그를 부축했다.
“야 얼마야! 얼마인진 말하고 쓰러져!”
“몰라요,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정지음 너 왜 그래.”
홍규헌은 정지음의 손을 꽉 붙잡고 똑바로 일으켰다. 물론 정지음의 키가 훨씬 컸기에, 일으킨다기보다는 당기는 것에 가까운 행위였다.
“음원으로 억까지 벌어봤으면서.”
소녀연맹 음악의 크레딧 대부분에 이름을 올린 정지음은, 음원과 앨범 수익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하지만 정지음이 번 억이란 돈은 차근차근 쌓인 것이었다. 이처럼 한 번에 커다란 돈을 쥔 적은 없었다.
“제, 제가 잘못 본 거 아니죠……?”
“기뻐하는 모습 보니까 나도 기분이 좋네. 정지음.”
홍규헌이 정지음의 손을 붙잡았다.
홍규헌의 손은 차가웠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따스했다.
“아이돌의 비주얼이 육체라면 음악은 영혼이겠지. 너는 소녀연맹의 영혼 그 자체야.”
“사장님…….”
“네가 우리 회사로 온 건 큰 행운이었어. 나한테도, 애들한테도. KS 엔터 이직 제안까지 받고도 남아 있었지. 해준 것도 얼마 없었는데 말야. 내가 지금 주는 돈도 KS 엔터가 해주려던 거에 비하면 턱없겠지만, 조금이나마 보상이 됐길 바라.”
정지음은 가로 엔터에서 보내왔던 세월이 떠올라 눈물을 글썽였다. 홍규헌은 마지막으로 그의 손을 꼭 잡고는, 후련하게 풀어냈다.
“앞으로 만들 음악도 기대할게.”
다음으로 홍규헌은 민경섭의 앞에 섰다. 그에게 봉투를 쥐여주고 손을 잡았다.
“우리 매니지먼트 팀장.”
“예, 매니지먼트 팀장입니다. 이사는 언제 시켜주시려고요.”
“박 이사의 원수, 석세스 엔터를 등지고 나온 인재.”
“예, 우라기리모노(배신자) 민경섭입니다.”
“와줘서 고마워. 마음고생 많았을 텐데.”
그 말대로였다.
민경섭은 소녀연맹의 스케줄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던 때가 많았다. 바빠서가 아니라, 널널해서.
가로 엔터는 소녀연맹이 앨범 작업에 들어갈 때면 웬만한 스케줄을 전부 거절하고, 멤버들에게 작업에만 집중할 것을 요구했었다.
업계 짬밥이 찬 민경섭이 보기엔 비효율적이었다. 소녀연맹의 스케줄을 분초로 쪼개서 짜면, 작업과 돈 되는 업무를 병행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많은 기획사가 그렇게 한다.
그러면 가로 엔터의 순익 전환과 멤버들의 정산도 더 빨라졌을지도 모른다.
“답답한 것도 많았겠지만 잘 참아줬어.”
“우리 애들 음악이 잘되는 게 먼저죠.”
“그래도 몰아칠 때는 잘 몰아치잖아.”
민경섭은 소녀연맹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했다.
매니지먼트란 단순히 소녀연맹의 상태를 관리하는 게 아니라, 그녀들이 수익을 낼 수 있는 효율적인 스케줄을 짜는 행위다.
멤버의 컨디션과 능력, 최적의 동선이나 소녀연맹의 이미지 등 수많은 조건을 고려하여 소녀연맹을 매니지먼트한다.
“우리 애들이 한 번도 고꾸라지지 않은 건 민 팀장님의 덕이 커.”
매니지먼트란 눈에 띄는 일이 아니다.
소녀연맹이 멀쩡히 활동하는 건 당연하게 생각된다. 하지만 멀쩡하지 않으면 화살이 매니지먼트팀에게로 향한다.
오직 오명만이 자신의 것이 되는, 매니지먼트란 그런 일이다.
잘한 일은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고생했어.”
그런데 홍규헌은 민경섭을 알아주었다. 그래서 이렇게 무거운 자리까지 불러주었다.
민경섭은 물기 섞인 숨을 뱉었다.
“아녜요, 제가 뭘요…….”
“그래도 해외 투어를 한 달 만에 다 돌도록 한 건 좀 무리수였어. 애들 다 힘들어 죽겠다잖아.”
“아니 그건 한 이사님이 회계연도 맞춰야 한다면서 압박한 거예요!”
“여기서 저를 걸고 넘어지십니까…….”
“오, 재무팀과 매니지먼트팀 간에 알력 다툼이 있었나 보네.”
“어, 아니, 농담이었어요. 그것도 고려한 게 맞긴 한데.”
“그래. 앞으로도 우리 애들 건강할 수 있게 열심히 일해줘. 이 돈으로 신혼집 구하는 데 보태고.”
“……감사합니다.”
다음으로 홍규헌은 손혜빈 앞에 섰다.
“손 이사.”
“넵, 사장님!”
“언니.”
“네?!”
“뭐어, 언니는 맞으니까. 내가 계속 반말하는 거 신경 안 거슬렸어?”
“에이, 귀여운 동생이 애교부리는 느낌이죠.”
“…….”
“아하하, 농담!”
“장하양이 문제네. 다들 농담을 아무렇지 않게 해. 뭐어…….”
홍규헌이 손혜빈의 손에 봉투를 쥐여주고,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맞잡았다.
“손 이사 정말 열정적이야. 혼자 러시아도 가고, 일본도 가고, 전국 방방곡곡 돌아다니면서 참 열심히도 일했지.”
손혜빈은 꽂히는 게 있으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아라베스크’ 뮤비 촬영을 위해 러시아에 직접 섭외하러 가기도 했었다. 유우토를 영입하려 일본에서 오래 지내기도 했었다.
앨범 디자인, 비주얼 파트 일을 하느라 전국을 돌면서 생활했던 때도 있었다.
“애들한테 춤도 짬짬이 가르치고. 박 이사가 그랬었나. 손 이사는 박 이사가 못 보는 걸 본다고. 양 눈으로 비교했었는데.”
“하하, 지금 떠올려도 부끄럽네요.”
“처음엔 디자인 쪽 일만 맡기려고 했었는데 말야. 지금 보니 그때 내가 편협했구나 싶어. 막상 시켜보니 다 잘하잖아. 팔방미인이야.”
“미인인 걸 이제 아셨어요?”
“손 프로듀서.”
이번에야말로 손혜빈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런 공치사에 익숙하지 않았는데, 프로듀서라는 과분한 이름을 받자 기어코 웃음이 터져 나온 것이다.
부끄러웠다.
“제가 무슨 프로듀서예요. 프로듀싱 일을 하는 건 맞긴 하지만요.”
“지금까지도 잘해왔고, 앞으로도 잘할 거라고 믿어. 누가 뭐래도 손 이사는 소녀연맹의 비주얼, 육체를 만들어낸 사람이잖아. 어디 가서 ‘내가 소녀연맹 프로듀서다’라고 자랑하고 다녀도 돼. 고마워, 정말.”
“네, 뭐.”
손혜빈은 맞잡은 홍규헌의 손을 주물거렸다.
괜히 할 말이 없어서 하는 행동이었다.
“감사합니다, 네…….”
“손 이사는 돈 많을 테니까 보너스는 안 넣었어.”
“아 그건 아니죠!”
“아하하, 농담.”
“하양이가 문제 맞는 거 같아요.”
다음으로 홍규헌은 한구인 앞에 섰다.
그녀와 동고동락했던 세월이 긴 한구인은 벌써부터 눈물을 줄줄 흘릴 준비를 마쳤다.
한구인이 잡아달란 듯 손을 내밀었다. 홍규헌은 그 손에 봉투를 쥐여주고, 한구인의 어깨만 두드렸다.
“한 이사는 내 마음 잘 알지?”
“예……?”
“따로 말은 안 할게.”
“그런(손나)!”
“다들 한 이사가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지?”
‘네!’라는 일치된 대답이 튀어나왔다.
“일 뺏겼다면서 부하 노려보기나 하고 말야. 아주 일하려고 태어난 사람 같아.”
“그건…….”
한구인이 말을 멈추었다.
홍규헌은 고개를 비스듬하게 숙이고 자꾸만 숨을 헛쉬었다. 들어가는 숨에 여름날의 비처럼 습한 것, 울음이 섞여 있었다.
한구인은 홍규헌과 오랜 시간을 보내왔다. 그녀의 실패도, 그리고 지금의 성공도 함께했다.
그건 홍규헌도 마찬가지였다. 그랬기에, 이 순간 한구인을 보니 감정의 변화를 참기 힘들었다.
자칫하면 울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손을 잡는 따위의 행동은 하지 않는다.
“고마워, 한 이사. 그때 날 안 떠나줘서.”
“……아닙니다. 가로 엔터가 제집인데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래.”
홍규헌은 한구인의 어깨를 팡팡 두드리고 빠르게 다음으로 넘어갔다.
다음, 성필에게로.
성필이 빙긋 웃으면서, 용돈을 바라는 아이처럼 양손을 내밀었다.
홍규헌은 픽 웃으면서 그의 손에 봉투를 쥐여주었다.
“지금 열어봐도 돼요?”
“당연하지.”
성필은 정말 깜짝 놀랄 자신이 있었다. 정지음보다 훨씬 더 말이다.
그렇게 홍규헌의 자존심을 살려줄 생각이었다.
“박 이사한테는 참 할 말이 많아.”
성필은 뿌듯하게 미소 지으면서 봉투를 열었다. 수표는 없고, 편지만이 있었다.
“고마운 것도, 미안한 것도 많지.”
성필이 편지를 꺼냈다.
“겨우 몇 분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성필이 편지를 펼쳤다.
[끝나고 남아.]
그것만이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