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화
소녀연맹은 예상치 못했던 금액을 보고, 문장 그대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기뻐해야 하나? 감동해야 하나?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이렇게 가만히 있어야 하나?
“아직은 경황이 없으시겠죠.”
한구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런 감정적 동요가 없어 보이는 그이지만, 실은 소녀연맹과 비슷할 정도로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미리 알고 왔음에도 평정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몇 번이든 다시 보십시오. 그게 여러분의 노력으로 얻어낸 보상입니다.”
보상.
그 단어에 멤버들이 반응했다.
지금껏 그녀들이 아이돌 활동을 노동으로 인식하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노동이란 대가가 돌아와야 정상이 아닌가.
소녀연맹은 뼈를 깎는 트레이닝을 감내하고, 무대에서 퍼포먼스를 펼치고, 팬들과 소통하는 일상을 보내왔다.
그러고도 10원짜리 하나 손에 쥐지 못했었다.
그녀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아이돌로 산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마음껏 기뻐하셔도 됩니다.”
이런 말은 웃길지도 모르지만, 소녀연맹은 지금까지 자기만족을 위해서 일해왔다.
언젠가 노력에 대한 대가를 손에 쥐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아이돌로 지내는 순간이 행복하기만 했다.
정산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도 이만한 금액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그런데…….
“이, 이거, 이거 이상해요!”
조아라가 소리쳤다.
“너무 많잖아요!”
그녀의 외침에 멤버들이 가진 충격이 전부 드러났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어째서 이만한 돈을 가질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던 것이다.
순식간에 통장에 몇억이 박혔다.
그저 하루하루를 살았을 따름인데 말이다.
연습실에서 연습하고, 무대에서 노래 부르고 춤추며, 때론 방송이나 라디오에 나가서 웃고 떠드는.
그런 일에 억의 가치가 있었나?
평범한 사람이 수십 년을 일해도 손에 쥐기가 어려운 금액을, 자신들이 가지는 게 합당한가?
고작 20대에?
“너무 많다고요…….”
조아라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동시에 기뻐서 흐느낌을 내뱉었다.
정산금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노력에 이만한 가치가 있단 게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어느새 회의실에는 울음기가 조금씩 퍼져 나가고 있었다.
“아라 씨.”
한구인은 찡 아려오는 콧잔등을 누르곤 말했다.
“자본주의는 특별한 재능에 반드시 보상을 제공합니다. 대체가 불가능할수록 그에 대한 보상도 커지죠. 여러분의 재능은 가치가 있으며, 세상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이게 여러분의 재능과 노력에 대해 사회가 주는 보상입니다.”
세상을 더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들어준 것에 대한 보상.
“자랑스러워하시기 바랍니다.”
멤버들은 더는 울음을 참기 힘들었다. 그리고 서로를 껴안으며 마음껏 기쁨을 만끽했다.
* * *
홍규헌과 한구인은 사장실 책상에 마주 보고 앉았다.
둘은 업무 이야기를 하면서도 오랜만에 골머리 썩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가 어디에 놀러 갈지 정하는 것처럼 시종일관 즐거움이 따라다녔다.
업무의 주제가 희망찼기 때문이다.
“임원 상여금은 어느 정도로 할까?”
역사적인 소녀연맹의 정산일이다.
소녀연맹과 회사와의 수익 분배 비율은 7대3이다. 소녀연맹 각 멤버가 억 단위의 정산금을 받았다면, 가로 엔터의 순익은 수십억이었다.
그 대부분은 회사의 유지와 발전에 쓰일 것이다. 하지만 일부는 가로 엔터의 성장에 지대한 공헌을 한 임원에게로 돌아가야만 했다.
“아무래도…….”
한구인은 평소라면 절대 보여주지 않을 모습까지 보였다.
볼펜 끝을 가볍게 입에 문 그는, 연애편지를 쓰기 위해 앉은 청년처럼 눈에 꿈이 담겨 있었다.
그런 그가 해맑게 미소 지었다.
“저는 조금만 있으면 됩니다.”
“무슨 용돈처럼 말하고 있어.”
어차피 어른들은 아이들이 ‘조금만 주셔도 돼요’라고 해도, 본인의 체면을 위해 고액권을 흔쾌히 꺼내 드는 법이다.
가로 엔터의 큰 어른인 홍규헌도 그럴 예정이었다.
“역사적인 날이야. 역사적인 해고. 고생한 사람들한테 크게 써도 돼.”
이는 단순히 기분이 좋으니까 돈을 많이 주겠단 게 아니었다.
가로 엔터를 이렇게나 키운 능력 있는 이들에게는 합당한 보상이 필요하다.
사람이 언제나 꿈만으로 견딜 수는 없다. 자신이 이룬 성과에 대한 눈에 보이는 보상이 필요하다.
‘부하의 성과는 상사에게 축복이면서도 독이 될 수 있어.’
요즘 흔히 나오는 말 중에서 ‘내가 성장할 수 있는 회사’란 것이 있다.
격변의 시대, 사람들은 더는 회사에 맹목적인 충성과 희생을 바치길 거부한다.
한 회사에 뿌리 박는 것보다,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 더 높은 곳으로 가길 바란다. 그리고 회사에게도 본인의 능력을 펼칠 기회를 주길 요구한다.
‘부하가 성과를 내면 그만한 보상을 해줘야지. 다른 데 갈 수 없도록.’
옛날에는 한 회사에 목숨이라도 바칠 기세로 있는 게 당연했던 터라, 회사원들은 마땅한 대우를 받지 못했었다.
하지만 요즘은 아니다.
위험부담은 있더라도,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당당히 자리를 박차고 떠나갈 수도 있는 세상이다.
‘굳이 그런 게 아니더라도, 뭐라도 더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고.’
홍규헌은 이 상황이 너무나 기뻤다.
자신과 성필, 한구인이 사장실에 모여 점심으로 물리디물린 자장면을 먹는 게 일상이었는데.
이젠 상여금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그럼 이 정도는 어떻습니까?”
한구인이 조심스럽게 수첩에 숫자를 적었다.
그것을 본 홍규헌의 표정이 팍 굳었다. 한구인이 당황하면서 재빨리 숫자를 지웠다.
“아닙니다. 이건 역시 너무 많…….”
“아냐. 괜찮아. 한 이사 그만큼 받고 싶구나? 뭐, 스포츠카라도 하나 뽑으려고?”
“저는 정말 괜찮습…….”
“됐어. 한 이사 좋은 차 한 대 뽑아줘야지. 그래, 마음껏 사. 아주 그냥 몇 년 뒤엔 차 전시관도 차리겠네.”
“…….”
홍규헌은 풀이 죽은 한구인을 보고 피식 웃었다.
“직원 보너스도 정해야지.”
“정말 제가 말씀드린 금액으로 가실 겁니까?”
“한 이사가 고민해서 내놓은 의견이잖아. 그렇게 할게.”
한구인은 걱정스레 홍규헌을 바라보면서도 내심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나의 새로운 파트너가 생기는구나. 잘 가렴, 요하나(현재 차 이름)…….’
한구인은 새로운 애마(愛馬)가 될 ‘에마(Emma)’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그녀와 함께 새 삶을 시작할 것이다.
함께 바다도 보러 가고, 함께 산도 가고, 함께 클래식 공연장도 가고, 함께 해협을 건너 일본도 가고…….
“연차에 따라 이 정도면 괜찮을까?”
한구인은 홍규헌이 책정한 보너스 금액을 보고 행복한 상상에서 깨어났다.
“살짝 많은 느낌입니다. 모든 직원이 같은 금액입니까?”
“공헌도도 고려해서 늘릴 사람은 늘려야지. 이건 기본적인 하한선이야.”
한구인의 ‘살짝 많은 느낌’은 경리인 권아인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재무팀은 그야 회사가 유지되기 위해 필수적인 부서이지만, 소녀연맹의 성공에 공헌했다고 말하기 어려운 게 경리인 권아인 아닌가.
그런 그녀에게도 이 정도의 보너스를 지급하는 건 과하다고 생각했었다. 심지어 다른 이들과 같은 수준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하지만 다른 분들은 공헌도를 계산해서 늘린다고 하시니.’
한구인이 보기에, 홍규헌은 굉장히 신난 듯했다. 사람은 기분이 좋을 때 돈을 쓴다던가. 그 말이 현재의 홍규헌에게 딱 맞았다.
“이만큼은 줘야지. 다들 노력했는데 말야. ‘한국에서 오너십이 가능한가’가 경영계 화두잖아. 뭐어, 직원들이 정말 가로 엔터를 자기 회사라 생각하고 일하지는 않겠지만 말야.”
홍규헌은 직원마다 적당한 수준의 보너스를 계속 수첩에 써 내려갔다.
“적어도 ‘이 회사 다니길 잘했다’고는 생각해줬으면 해.”
한구인은 은은하게 웃었다.
“다들 그러실 겁니다. 반드시. 저도 그렇고요.”
“뭐야, 아부하는 거야?”
“아닙니다.”
“아니긴. 뭐어, 아무튼 오늘 퇴근 전에 임원들 사장실로 오라고 해.”
“사기 진작과 격려를 위해 연설하실 생각이십니까?”
“연설이라고까지 할 거창한 건 아니고. 그동안의 노고를 나눠보고 감동하자는 거지. 특히 박 이사가 기대되네. 스타트 멤버니까.”
“그렇습니다. 그때를 떠올리면…… 이렇게 됐단 게 믿기지 않습니다. 정말 모든 분이 힘내주셔서 올 수 있던 것 같습니다.”
“그래. 박 이사는 더 그럴 거야. 회사의 위기에 당당히 자기 지갑도 열고.”
“그러…….”
한구인의 입매가 부자연스럽게 굳었다. 그런 그를 보면서, 홍규헌은 아까와 다름없이 평온히 말했다.
“박 이사는 가로 엔터에 진짜 오너십을 가지고 있으니까, 오늘 이 순간이 더 뜻깊겠지.”
한구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사장님이 알고 계셔.’
성필과 한구인이 그녀를 속이고, 가로 엔터에 투자한 사실을 알고 있다.
* * *
장하양에게 돈이란 생명과 같은 것이었다.
돈이 없으면 죽는다. 그런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 뿌리 박혀 있다.
생명 유지에 필요한 곳에 돈을 쓰긴 꺼리지 않지만, 없어도 그럭저럭 살 만한 물건에 돈을 쓰진 않는다.
하지만 그녀도 언제나 돈을 아끼고 싶은 것만은 아니었다.
‘사고 싶어.’
길거리나 인터넷을 돌아다닐 때마다 장하양은 사고 싶은 게 생긴다.
모든 사람이 그럴 것이다.
미디어와 광고는 공기 수준으로 생활 전반에 퍼져 있으며, 인간의 소비를 미덕처럼 생각하게 만드니까.
사람들은 ‘필요 없어’ 대신 ‘저거 있으면 좋겠다’라고 먼저 생각한다.
장하양도 그러했으며, 자연스레 소비에 대한 욕망이 숨 쉬듯이 꿈틀거리곤 했다.
‘근데…… 비싸.’
장하양은 ‘비싸’란 한마디로 자신의 욕구를 전부 억눌러왔다. 그게 억울하지는 않았다. 아끼는 일이야 옛날부터 쭉 해왔던 것이었으니까.
돈이 없어서 서럽진 않다.
하지만 돈이 생기면 하고 싶은 게 있긴 하다.
장하양은 학창 시절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땐 학생들이 반장으로 당선되면 피자나 햄버거 같은 것을 반에 돌리곤 했다.
장하양은 어떤 아이가 반장으로 당선된 것보다, 모두에게 비싼 먹을거리를 돌리며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게 훨씬 부러웠다.
그래서 상상하곤 한다.
‘하양아 고마워!’
주변에 베풀어 감사받는 자신을.
기뻐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상상하면, 장하양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져간다.
그런 꿈을…… 자주 꾸었다.
“장하양.”
“아?”
바로 앞에서 들리는 사장 홍규헌의 목소리에 장하양이 눈을 번쩍 떴다.
자신은 누워 있고, 눈앞에서 홍규헌이 내려다보고 있는 중이다.
“사, 사장님? 제가 왜…….”
“너 기절했어.”
“왜요……?”
“계속 울더니 픽 쓰러졌다던데. 아직도 몸 안 좋나? 근육 보면 안 그런 거 같긴 한데.”
홍규헌은 율무차를 데워 장하양에게 가져다주었다.
장하양은 황송하단 듯 그것을 받았다. 그녀의 어색한 태도를 본 홍규헌이 실없이 웃었다.
“오늘따라 왜 그래? 방금 깨어나서 정신이 없나?”
“아, 아뇨.”
드라마에 보면 사장에게 과할 정도로 굽실거리는 캐릭터들이 꼭 나온다. 장하양은 그것을 보면서 ‘배알도 없나’란 생각을 자주 했었다.
‘근데 이제 알겠어…….’
돈을 주는 분에게는 자연스레 굽실거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돈’을 떠올리자 장하양의 심장이 다시금 쿵쾅거렸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
“사, 사장님. 저 혹시, 저 오늘 정산받았었나요?”
장하양은 최악의 가정을 떠올렸다.
억 단위의 정산을 받은 게 전부 꿈이었고, 현실의 자신은 여전히 평소대로 사는 것이다.
아직 정산금을 써보지도 못했건만, 꿈에서나마 손에 쥐어보았다고 박탈감이 엄청났다. 제발 꿈이 아니길 바란다.
“무슨 정산. 너네 아직 빚이 한가득인데.”
“끼아아아아아아아악!”
“농담.”
“…….”
“이제 네 농담이 어떤 느낌인지 알겠지?”
다행이다.
장하양은 뺨을 쓸면서 현재의 감각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뺨에 닿는 손가락이 차가워서 기분이 좋다.
‘현실이구나.’
장하양이 눈을 가만히 감았다. 기절하기 전에 엄청 울었다고 했던가. 그래서 그런지 더 이상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가슴을 가득 채우는 온기만이 있었다.
‘나, 드디어 사람이 됐어. 돈을 벌 수 있게 됐어. 감사합니다 이사님. 저한테 아이돌이 되라고 해주셔서 정말 감사…….’
감사…….
‘이사님?’
장하양은 연습생이 될 적 성필과 계약을 맺었었다.
성필은 만약 장하양이 아이돌로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때까지 쏟은 노력을 돈으로 보상해주겠노라고 했었다.
그리고 현재 장하양은 들인 노력 이상의 돈을 벌어 버렸다. 적어도 그녀는 그리 생각했다.
‘그럼 더 이상 이사님이랑 나는…….’
돈, 즉 생명으로 묶인 사이가 아니다.
성필이 주는 신뢰의 증거였던 계약이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어버렸다.
아니, 의미를 초과 달성하고 사라졌다.
“…….”
“안색이 많이 안 좋네. 시간 신경 쓰지 말고 푹 쉬어. 어차피 사장실 소파 아무도 안 쓰…….”
장하양이 벌떡 일어나 소파에 걸려 있던 외투를 어깨에 둘렀다.
“괜찮아?”
“네, 괜찮아요. 사장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혹시 박 이사님 어디 가셨는지 아시나요?”
장하양은 성필이 백설하와 ‘더 언노운 싱어’와 관련해서 미팅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뜻밖이었다.
“백화점 갔어.”
“백화점요?”
“리카랑.”
“둘이서요?”
“그렇대. 리카가 무슨 박 이사 옷을 더럽혔었다는데. 그거 갚겠다고 데려갔어. 뭐어, 일하는 시간이긴 한데. 리카 걔가 부탁하는 거 보니 무시하는 것도 영 그러…….”
쾅!
장하양이 사장실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곤 바람처럼 사라졌다.
* * *
성필은 리카와 함께 백화점의 입생로랑 매장으로 왔다.
“그날의 빚을 오늘 모두 갚을 거예요!”
리카는 그리 말하며, 눈에 휘둥그렇게 뜨일 만큼 비싼 티셔츠를 사준다고 했다.
성필은 티셔츠가 비싸봤자 얼마나 비싸겠냐고 생각했다. 설령 비싸더라도 십만 원대일 거라고 예상했다.
‘그것도 비싼 거지.’
성필은 자신을 끌고 싱글벙글 백화점으로 들어가는 리카를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딸이 첫 월급을 받았다고 선물을 사주려고 하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뿌듯함이 혈관 구석구석 채워지는 듯했다.
“제 목표는 백만 원짜리 셔츠예요!”
“에이, 무슨 셔츠가 백만 원이나 해. 그 얇은 천 조각이…….”
입생로랑 티셔츠 1,009,000원.
“진짜네?!”
매장에서 가격을 확인한 성필이 입술을 벌벌 떨었다.
이 얇은 천이, 마트에서 사면 1만 원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옷이, 무려 100만이란 단위를 달고 있었다.
“리, 리카, 나 이런 거 필요없…….”
“이거 주세요!”
성필이 경악하여 리카가 손에 든 지갑을 콱 쥐었다.
“너 미쳤어?! 이런 거에 무슨 100만 원 돈을 쓰려고 해!”
‘이런 거’라는 말을 들은 입생로랑의 매장 직원이 어색하게 웃었다.
“셔츠 사드린다고 했잖아요!”
“했는데 이건 진짜 말도 안 되잖아! 이 돈이면 평생 입을 셔츠 다 사겠다!”
“이사님이 명품은 가치가 있다고 하셨잖아요! 계량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구요!”
“나는 그런 가치 필요 없어!”
“마하라 디자이너님한테는 명품을 좋다고 받으셨잖아요!”
“……그건 우정의 징표였어.”
“저도 우정의 징표예요!”
직원은 두 남녀의 코미디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대체 남자가 밤일을 얼마나 잘하면 여자가 돈을 저렇게 거리낌 없이 쓸까?’
리카가 손목을 붙잡은 성필의 손을 떨쳐냈다.
“됐으니까 놓으세요! 아타, 아니, 저는 이미 마음을 정했습니다!”
본인의 정체가 발각될까 시그니처 말투를 황급히 거둔 리카는, 재빨리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
“끼에에에에엑!”
성필이 리카의 손목을 비틀어 손에서 지갑을 빼냈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미식축구 선수처럼 재빨리 매장에서 도망갔다.
“도둑이얏!”
리카가 그 뒤를 쫓았다.
직원들은 그들이 나간 입구를 보며 떨떠름하게 허리를 굽혔다.
“아, 안녕히 가세요…….”
잠시 후, 한바탕 전투라도 치른 몰골의 두 사람이 돌아왔다.
리카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돈하면서, 지친 낯빛으로 티셔츠를 하나 골랐다.
그나마 저가인 480,000원 상당의 티셔츠였다. 그리고 하나 더해, 20만 원 중반대의 카드 지갑을 선택했다.
“계산해주세요!”
리카는 호기롭게 카운터에서 계산을 요청했다. 그리고 귀부인이라도 된 듯 우아하게 카드를 내밀었다.
자본주의 미소를 지으며 카드를 긁은 직원이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결제가 되지 않습니다.”
“손나(그런)!”
리카는 삐질삐질 땀을 흘리면서 카드를 확인했다. 몇 초의 간격을 두고 그녀의 핸드폰에 알람이 왔다.
[결제 요청 거부 안내.
이시카와 리카 고객님께서 요청하는 결제 요청이 등록된 일일 결제 한도를 초과하여 거부되었음을 알립니다.]
“이사님. 이거 왜 이러나요?”
“아, 이거. 너 체크카드지? 아마 네 부모님이 이거 만들어주실 때 하루 결제 한도를 정해두신 거 같은데. 아마 수십만 원 정도로.”
“…….”
리카는 창피한 듯 배시시 웃고는, 직원을 향해 말했다.
“계좌 이체도 받으시나요!”
“죄송합니다만 고객님, 본점에서 제공해드릴 수 없는 서비스입니다.”
* * *
“리카, 고마워.”
성필은 양손에 쇼핑백을 들고 미안함이 가득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12살이나 어린 아이에게 고가의 선물을 받으니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물론 리카가 나한테 선물을 준 건 단순한 호의가 아니긴 하지.’
데뷔 때 티셔츠를 화장, 눈물, 콧물 범벅으로 만들었단 건 핑계에 불과했다.
리카는 그 사건을 계기로 성필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기를 찾아줘서 고맙다, 고 했었지…….’
자신을 아이돌의 길로 들어오게 해준 것에 대한 감사.
그리고 훌륭한 아이돌로 만들어줘서 너무나 고맙다고,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감사를 돈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걸 알기에 성필은 부담스러운 동시에 기뻤다.
“근데 리카, 아까부터 뭘 그렇게 봐?”
리카는 성필에게 선물을 사준 직후에는 세상 떠나갈 듯이 자신의 경제력을 자랑했었다.
그런데 얼마 후에는 핸드폰만 보고 있었다.
“에에…… 잘 안 되네요.”
“뭐 하는데 그래. 내가 도와줄게.”
“신용카드 만들고 있어요!”
성필이 리카의 핸드폰을 빼앗았다.
조아라가 강력 추천했던 야자수 은행 어플이 켜져 있었다. 손가락 몇 번 움직이는 것으로 신용카드를 만들 수 있는 아주 흉악한 서비스가 보였다.
“아앗, 돌려주세요!”
“어린애가 무슨 신용카드야.”
“아타시(저)는 어른이에요! 더는 일일 한도 30만 원짜리 체크카드로는 살아갈 수 없다구요!”
성필은 어플을 간단히 살폈다.
리카가 외국인이라 바로 카드를 만들 수 없던 모양이다. 정말 다행이다.
‘세상 좋아졌네.’
은행 어플에 이런 기능이 있다니.
리카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이들도 간단하게 신용카드를 만들 수 있단 뜻 아닌가.
한때의 물욕에 눈이 멀어 신용카드를 마구잡이로 만들 아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너 한 이사님한테 재무 상담이라도 받아.”
“아, 그러네요! 저도 이제 돈을 관리해야 할 몸이니까요!”
성필은 간단히 ‘부모님께 맡겨’라고 할 수 없었다.
오랜 시간 부모를 믿고 돈을 맡겼다가 쓰디쓴 배신을 맛본 연예인이 얼마나 많던가.
성필이 직접 여러 번 뵙기까지 한 이시카와네 집안을 불신하는 건 아니지만, 돈 문제는 가족끼리라도 신중해야 한다.
성필은 리카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이사님.”
“또 왜.”
“안 기쁘신가요?”
“응?”
이제 보니 리카는 성필의 안색을 면밀하게 살피고 있었다.
‘아, 그렇네.’
리카가 갑자기 억 단위의 손에 넣었더라도, 수십만 원의 돈을 쓴 게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리카의 입장에서 정말 큰마음 먹은 것이다.
그런데 성필의 반응이 영 애매하니, 리카로선 당황스러울 게 분명했다.
“기쁘지. 왜 안 기쁘겠어. 근데 비싼 걸 받아서 기쁜 건 아니야. 난 리카가 근처 포장마차 오뎅을 사줬어도 기뻤을 거야.”
“거짓말하지 마세요! 사장님이 돈은 마음이라고 했어요! 오뎅이랑 입생로랑은 안 같아요!”
“맞는 말이네……. 그래도 뭐 좀 변명해보자면, 리카.”
나는 네가 나를 위해 선물을 생각해줬단 게 기뻐. 무엇을 살지 고민해주고, 이곳까지 같이 와줬단 사실이 기뻐. 그리고 선물을 사줄 수 있게 됐단 게.
“네가 이 돈을 벌기까지 들였던 노력을 알아서 더 기뻐. 고마워, 네 노력을 나한테 써줘서.”
“에…….”
드물게도 리카는 진심으로 부끄러워했다.
처음엔 ‘비싼 걸 사주면 이사님도 좋아하시겠지’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금액에 걸맞은 반응을 보여주길 바랐다.
그런데 성필이 해준 말은, 고작 돈에 놀란 것보다 훨씬 마음에 와닿았다.
성필은 리카가 정산금을 받기까지 들여왔던 시간과 노력, 눈물을 봐주었다. 그 고통으로 얻어낸 돈을 자신에게 써주었단 게, 성필은 기쁜 것이었다.
“에, 음, 마아(뭐어)…….”
그야 성필은 항상 소녀연맹의 노력을 알아준다. 그녀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게 성필이다.
그래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들으니 감상이 전혀 다르다.
알아주어서, 기쁘다.
“아시니까 다행이네요! 앞으로 그 티를 입고 지갑을 쓸 때는 아타시(저)의 고생을 기억해주세요!”
“당연하지. 그럼 이제 숙소에 데려다줄까?”
“벌써요? 이왕 같이 나왔는데 더 있어요!”
“나 직장인이야. 슬슬 가야…….”
“이사님.”
익숙한 목소리가 앞에서 들려왔다.
장하양이었다. 겨울임에도 얼굴 곳곳에 땀이 흐르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땀 때문에 뺨에 붙은 머리칼을 손으로 훑어내고는, 성필에게로 다가왔다.
“하양아? 여긴 어떻게…….”
“사장님한테 들었어요.”
“아…….”
성필은 폰을 꺼내어 장하양에게 연락이 왔나 살폈다. 장하양의 몰골을 보니, 자신을 찾기 위해 땀 꽤나 뺀 듯했기 때문이다.
‘하양이한테 미안하네. 내가 무음으로 해뒀나?’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든 업무 관련 연락을 받기 위해, 성필은 핸드폰을 무음으로 설정해두는 일이 없다.
장하양에게 연락이 왔었다면 못 받았을 수 없다. 그리고 장하양에게는 문자나 톡 하나 오지 않았었다. 당연히 전화도 없었다.
“하양아. 나 어떻게 찾았어?”
“돌아다니면서요.”
“왜 연락 안 했어?”
장하양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액정이 거미줄처럼 조각 나 있었다.
백설하가 장하양 대신 정산금을 확인해줄 때 박살 난 것이었다. 저것 때문에 터치가 안 되는 듯했다.
“이게 잘 안 눌려요.”
“그래서 우릴 찾아다녔다고?”
이렇게 넓은 백화점에서……?
대체 무슨 집념인가.
아마 장하양이 자신을 찾아다닌 이유는 예사롭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장하양이 저런 개고생을 감내할 리 없잖은가.
“어, 하양아 그래서…….”
성필이 장하양에게 용무를 물어보기 전, 리카가 말을 가로챘다.
“언니 이제 몸은 괜찮으신가요!”
“응. 다 나았어.”
“언니도 같이 밥 먹……!”
“이사님, 차 안 필요하세요? 새 차요.”
박성필, 리카, 경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