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화
휴가를 받은 조아라.
그녀는 매일 스튜디오에 가서 춤을 추겠단 호언장담이 무색하게 여행을 왔다.
일본, 리카의 집으로.
“음…….”
창문으로 비치는 햇볕에 눈을 뜨니 익숙한 감각이 몸을 사로잡았다.
어깨에 리카의 팔이 감겨 있다. 자연스럽게 팔을 떨쳐내고 침대 아래로 발을 디뎠다.
시원하게 기지개를 켠 그녀는 침대 옆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와, 다시 봐도 방 구조가 미쳤네.’
특히 침대 옆의 커다란 창문이 마음에 든다. 무슨 소설 속 주인공이 살 법한 집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바로 햇볕을 맞을 수 있다니. 얼마나 낭만적인지 모르겠다.
‘그에 비해 숙소 침실은 작은 창문이 하나 나 있는 게 전부고. 태양이 뜨는 방향으로 나 있는 것도 아니고.’
평소 아침엔 일어나고도 눈이 피로했었다. 그런데 태양 빛을 한번 눈에 담으니, 잠이 전부 달아나 정신이 말짱해졌다.
리카는 이런 환경에서 십수 년을 살아온 거겠지.
‘그러니까 아침마다 눈을 잘 뜨지.’
조아라는 목을 좌우로 꺾으며 문으로 다가갔다. 그러던 도중, 자신이 하의를 입고 있지 않단 사실을 깨달았다.
조아라는 문고리로 가져가려던 손을 뺐다.
“아라쨩!”
그때 리카가 소리소문없이 조아라의 뒤에서 포옹했다. 당연히 조아라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야 뭔데! 너 자던 거 아니었어?!”
“아라쨩이 몰래 이상한 짓 안 할까 기대하면서 자는 척했어!”
“기분 나빠.”
“히도이(너무해)!”
둘은 세면을 마치고 1층으로 내려갔다.
평일인지라 리카의 아버지는 일하러 갔고, 어머니가 두 사람을 위한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머, 아라 씨 일찍 일어나셨네요.”
“예에, 뭐…….”
이 집에 머무른 지도 사흘째지만, 아직도 조아라는 적응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애초에 친구의 집에 며칠이나 머문다는 게 처음인 탓도 있었다. 평범한 경우가 아니기도 하고 말이다.
‘나 방해되는 건 아니겠지?’
식탁에 앉아서도 조아라의 팔에 매달려 싱글거리는 리카를 보면, 리카는 조아라를 방해라 여기지 않는 게 확실했다.
하지만 다른 가족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그래도 오늘 돌아가니까 뭐.’
조아라는 일본에서의 마지막 아침 식사를 충실히 음미했다. 그러던 도중, 유우토가 눈을 비비면서 식탁으로 왔다.
“여어, 유우토.”
“안녕하세요 누나…….”
겨우 사흘이지만, 유우토는 조아라에게 꽤 익숙해졌다. 이젠 조아라가 양아치 말투를 쓰면서 겁을 줘도 도망가지 않았다.
첫날과 비교하면 크나큰 발전이었다.
“리카, 엄마는 나갔다 올게. 아라 씨랑 재밌게 놀아. 아라 씨도 마지막 날이니 좋은 추억 남기길 바랄게요.”
“잘 갔다 와!”
“다녀오세요.”
어머니가 나가자, 리카는 유우토에게 말했다.
“유우쨩, 오늘 어디 나가?”
“놀러 가자고? 안 돼. 학원…….”
“나갈 거면 빨리 나가! 아라쨩이랑 비밀스럽고 오붓한 시간 보내야 해!”
“…….”
아무도 없는 집에서 뭘 하려고?
유우토는 픽 웃었다. 어차피 리카가 조아라에게 던지는 성애적인 암시는 전부 농담이란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아라 누나도 힘들…….’
테이블 아래로 리카가 조아라의 허벅지를 쓰다듬는 게 보였다. 그것을 조아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농담이 아닌가?!’
유우토가 두려워하던 때, 갑자기 리카가 ‘아!’ 소리를 내더니 밥을 매우 빠르게 먹었다.
밥그릇을 쿵 내려놓은 리카는 벌떡 일어났다.
“유우쨩 정리 부탁할게!”
“누나 자기 그릇은…….”
“어제 한 이사님이 보내달라고 한 거 안 보내드렸어! 혼날지도 몰라!”
리카는 2층으로 우당탕탕 올라갔다.
그렇게 식탁에는 조아라와 유우토만이 남았다.
유우토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깨작깨작 밥을 먹었다. 그다지 붙임성이 없는 유우토는 친하지 않은 누나를 상대로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할 재주는 없었다.
“야.”
그런 유우토를 배려한 것인지 조아라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아, 네, 누나.”
“너 춤은 계속 배우냐?”
유우토의 젓가락질이 멈추었다. 그의 눈동자에 수심이 그득해졌다.
“네, 배우고 있어요.”
“계속 부모님한테 비밀로?”
“…….”
“우리 회사 오라는 제안은 거절했다면서. 혜빈 언니가 그렇게까지 하는 거 되게 드문 일인데.”
조아라는 추궁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아무렇지 않게 식사에 집중하면서, 어디까지나 식탁 위의 잡담이란 듯 가볍게 말했다.
그런 배려 때문일까, 유우토의 입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아니, 이 이야기를 계속 누군가에게 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사실, 부모님은 아세요. 제가 댄스 학원 다니는 거요.”
“오오, 잘된 거 아냐? 그런데도 계속 다니는 거면 허락은 받았단 거잖아.”
“네, 허락받았죠.”
“축하한…….”
“일본에서 연예인이 되는 건요.”
조아라는 유우토의 의중을 단숨에 파악했다.
“한국으로 가겠다고 말씀드렸었구나?”
“…….”
그랬다.
유우토는 손혜빈의 강렬한 공세에 이기지 못하고, 한국으로 가겠단 마음을 굳혔었다.
축제에 함께 간 날이 결정적이었다.
손혜빈의 말솜씨는 푸르고 투명한 꿈을 품은 젊은이의 마음을 그대로 홀려버렸었다.
비록 손혜빈에게는 ‘안 된다’고 했었지만, 아이돌이 되고픈 유우토의 마음은 계속 강해졌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부모님께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하하…….”
이시카와네 집에는 리카라는 어엿한 성공 사례가 있다. 하지만 리카의 성공은 기적적인 일에 불과하다.
동생인 유우토도 리카처럼 성공하리라곤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당연히 부모님은 반대했다.
“일본이라면 괜찮지만, 한국은 안 된다고 하셨어요. 일본에서 연예인에 도전하는 것도 학교를 졸업한 후라고 하셨고요.”
“그래서 포기한 거야?”
“포기할 수밖에 없잖아요…….”
부모님이 반대하는데 뭐 어쩔 수 있겠는가.
“저는 누나처럼 집 마당에 드러누워서 16시간 동안 오열할 순 없어요…….”
“……?”
리카가 그랬었다고?
조아라는 리카의 부모님이 어린 딸의 타국행을 어째서 찬성했는지 계속 궁금했었다.
상식적으로 당시 리카의 ‘한류 배우’란 꿈 자체도 터무니없고, 중학교도 겨우 졸업한 아이가 외국에서 홀로 산다는 것도 터무니없었다.
‘근데 마당에서 16시간 동안 드러누워 오열하면, 부모도 어쩔 수 없었겠네.’
설령 딸이 아니라 생판 남이 그러더라도 부탁을 들어줄 만했다.
“뭐, 그래도 아이돌이 되고 싶은 거지? 일본에서 연예인에 도전하는 건 인정받았다면서. 그런데, 네 얼굴은 전혀 개운해 보이지가 않는데.”
유우토는 말없이 식사를 이어갔다.
“너 공부 꽤 잘하지? 장래는 정했어?”
“공부랑…… 가수 준비랑 병행하면서…….”
“그런 정신 상태로 뭐든 되겠냐.”
“……알아요.”
어느 하나에만 정신을 쏟아도 모자랄 판인데, 두 개 다 할 순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유우토는 두 개 다 해야만 했다.
부모의 바람이자 미래의 보험인 공부. 그리고 자신의 꿈인 가수를 동시에 준비해야만 한다.
“야 유우토.”
조아라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마치 한심스럽다는 태도여서, 유우토는 어깨를 움츠렸다.
자신이 한심하단 건 자신이 가장 잘 안다.
남들이 인생을 걸고 도전하는 목표를 취미 생활하는 기분으로 임하니, 잘될 리가 없다.
“결국 부모님이 문제잖아. 그런 거 간단해.”
“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대. 네 진심을 전해.”
“하, 하지만 이미 부모님께는 말씀드렸…….”
“내가 옛날에 썼던 말 있는데, 알려줄까?”
* * *
조아라와 리카의 일본 여행이 끝났다. 여행이라고 해봤자 리카의 집에 머물면서 여기저기 놀러 다녔을 뿐이지만 말이다.
조아라는 가로 엔터의 앞에 서서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역시 고향 공기가 제일 좋네.”
“소다나(그렇네).”
“여기 네 고향 아니거든?”
“아타시(나)는 세계시민이야! 어디든 내 고향이라구!”
두 사람은 바로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회사로 왔는데, 이유가 있었다.
한구인의 호출이 있었기 때문이다.
둘은 회사로 들어가면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다.
“한 이사님이 무슨 일로 부르셨을까?”
“몰라. 새로운 강의 프레젠테이션이라도 하려는 거 아닐까.”
“우린 이미 그런 나이는 지났는데! 지식 따위 얼마든지 혼자 쌓을 수 있어!”
그때 리카가 곰이라도 마주친 것처럼 우뚝 멈췄다. 조아라는 그녀가 바라보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성필이 직원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리카와 조아라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리카가 음흉하게 웃으면서 성필에게로 다가갔다. 약 절반쯤 접근했을 때, 그녀는 팔을 활짝 펼치고 성필의 등을 향해 돌진했다.
“이사님 안녕하……!”
그 순간 성필이 뒤로 홱 돌아보더니, 리카에게 안기지 않기 위해 어깨를 감싸고 빙그르 돌았다.
리카가 허공을 안았다.
“왜 피하시나요!”
“리카, 너 몇 살?”
“22살!”
“나 몇 살?”
“34살!”
“너 성인이야 아니야?”
“성인이요!”
“성인 남녀끼리 뒤에서 안는 경우는?”
“친구랑 애인!”
“애인밖에 없거든?”
“못 본 지 오래됐는데 반갑지도 않나요!”
“반가워. 그러니까 악수하자.”
리카가 퉁명스레 성필과 악수했다.
“박 이사님은 아셔야 해요. 딸이 더 이상 반갑게 달려오면서 안아주지 않게 된 아버지의 슬픔을요! 좋을 때는 짧다구요!”
“진작 지났어야 했는데, 왜 아직도 안 지나고 있을까. 아, 이제 됐어요. 가셔서 일 보세요.”
성필은 직원을 떠나보내고, 이번엔 조아라를 보았다.
조아라가 빙긋 웃었다.
성필도 빙긋 웃어주었다.
그리도 동시에 둘 다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아저씨 뭐, 옛날이랑 똑같네요.”
“너도. 여행은 어땠어?”
“좋았는데 회사 오니까 바로 기분 안 좋아졌어요. 휴가인데 사람 이렇게 막 불러도 돼요?”
“싫으면 가든가.”
조아라가 성필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성필은 그녀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평범한 악수였는데, 갑자기 조아라가 성필의 손을 꽉 쥐고 자신에게로 당겼다.
성필은 허벅지에 힘을 꽉 주고 버텼다.
조아라는 끌어당기려고, 성필은 벗어나려고 했다.
“……두 사람 뭐 해요?”
리카가 보기엔, 둘이 서로의 손을 잡고 가만히 있는 게 보일 뿐이었다.
성필이 말을 더듬었다.
“너, 너, 뭐 해. 빨리 안 놔?”
“리카 말 못 들었어요? 좋은 때는 짧다고요.”
“리카는 돼도 너는 안 돼!”
“……?!”
조아라가 충격받아서 성필의 손을 놓았다. 성필은 덫에서 풀려난 곰처럼 허겁지겁 뒤로 물러났다.
“뭐, 왜요? 왜……?”
“리카는 순수한 마음씨를 지니고 있는데 넌 아니잖아. 내가 당황하는 거 보면서 놀릴 생각인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아니 그건 맞는데!”
“맞아?!”
“차별하면 안 되죠!”
“안 했어. 리카 포옹도 물리쳤잖아.”
“오케이.”
조아라가 빠르게 인정했다.
“차별하는 아저씨랑 더 말하기 싫어요. 빨리 한의사님 있는 데 말해요.”
“회의실에 계셔. 참고로 아름이랑 언니들은 이미 다 기다리고 있단다.”
“안내해요.”
“하잇(넵)!”
성필이 조아라와 리카에게로 허리를 숙이며, 호텔 보이처럼 그녀들을 공손히 안내했다.
그러자 리카와 조아라가 황당해했다.
“아저씨 오늘 뭐 잘못 먹었어요?”
“아니, 이래야지. 가로 엔터를 지탱하는 기둥이신 소녀연맹인데.”
“비꼬는 건지 칭찬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칭찬이야.”
“기쁘게 받아들일게요!”
끼아아아아아아아악!
복도 건너에서 들리는 비명에 세 사람이 잔뜩 긴장했다. 모퉁이에서 익룡이 튀어나와도 놀라지 않을 정도의 괴성이었다.
쿵쿵쿵쿵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손혜빈이 나타났다. 그녀의 얼굴이 기쁨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누나?”
손혜빈은 성필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렸다. 그리고 펄쩍 뛰어 그에게 안겼다.
성필은 손혜빈이 떨어지지 않게 꽉 안고는 겨우 버텨 섰다.
“박 이사님 히도이(너무해)!”
“이게 진짜 차별이지.”
“누나가 기습한 거잖아!”
“성필아!”
손혜빈이 과도하게 밝은 어투로 성필을 불렀다. 그녀는 성필에게 안겨 양손으로 그의 뺨을 꽉 붙잡았다.
“으, 으어?”
“온대!”
누가?
“유우토가 오겠대! 우리 회사에!”
* * *
자식이 부모를 마주하고 진지한 분위기에서 해야 할 이야기란 무엇이 있을까.
삼수 도전.
부모의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와의 결혼.
정체성 고백.
혹은, 부모가 자연스레 납득할 수 없는 꿈을 피력할 때이다.
“후우…….”
유우토는 무릎을 꿇은 채 바닥만 보았다.
앞에서 아버지 켄타로의 무거운 한숨이 담배 연기처럼 불쾌하게 가라앉았다.
“그 이야기는 전에 끝난 거 아니었냐, 유우토.”
“다시 생각해보니까, 역시…….”
“굳이 한국으로 가야 할 이유는? 너는 노래를 하고 싶은 거잖냐.”
켄타로의 고압적인 말투에 아내인 에미는 그의 어깨를 쓸면서 진정시켰다.
켄타로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아까보다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노래하는 걸로 충분하다면, 일본에서도 가능할 텐데. 한국이어야만 하는 거냐?”
“저는 아이돌이 되고 싶어요.”
“한국의?”
“네, 누나처럼.”
‘누나처럼’이란 말에 켄타로가 마른세수했다. 그의 머릿속에 소녀연맹의 콘서트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호기롭게 한국으로 떠났던 누나가 그토록 찬란히 빛나게 되었다면, 동생인 유우토도 피가 끓을 게 분명했다.
켄타로는 그것을 확실히 알았다.
“유우토. 네 누나, 리카가 성공한 건 굉장히 특수한 경우다. 애초에 연예인이란 직업을 갖는 것부터 어려울뿐더러, 그 안에서 성공하기란 그야말로 사막에서 바늘 찾기다.”
“알아요.”
“네가 이 나라에서 학업을 병행하며 가수를 목표로 한단 건 막지 않겠다. 아니, 고등학교만 무사히 마치면 어느 정도는 지원해줄 수도 있어. 그렇지만 모든 걸 버리고 한국으로 떠나는 것만큼은 안 된다. 그리고…….”
켄타로는 반박 대신 설득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너는 공부도 곧잘하니까, 이대로만 하면 성공한 인생을 살게 될 거다.”
“성공한 인생…….”
“공부라는 건 상위 10% 안에만 들어도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어. 사회가 그렇게 짜여 있으니까. 그에 비해 노래는 어떠냐. 상위 10%로 풍족하긴커녕 배를 곯진 않을지 고민해야지. 네가 바라는 건 1%보다도 적은 비율의 인간일 텐데…… 내가 보기엔 가망이 적구나.”
“가망이 적어도, 할래요.”
“실패하면?”
“실패해도 괜찮아요.”
“뭐가 괜찮단 거냐 대체…….”
켄타로는 아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기가 힘들었다. 이제껏 열심히 본업에 매진했던 아들이 누나의 성공에 눈이 먼 것으로만 보였다.
자기도 그리될 수 있으리라고 철석같이 믿는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똑바로 말하마. 네 누나는 운이 좋았던 거야.”
“알아요. 그래도 해보고 싶어요.”
“너도 운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냐?”
“아뇨. 안 좋아도 돼요. 도전해보고 싶어요.”
“망하면?”
“망하면 평범한 회사라도 들어가서…….”
“평범한 회사도 못 가!”
기어코 참지 못한 켄타로가 역정을 냈다.
“그럼 블랙 기업이나 막노동이라도 할게요!”
유우토가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 광경은 켄타로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무엇을 시키든 군말 않고 따랐던 아들이 소리를 질렀단 건, 켄타로가 일생 동안 겪은 충격 중 두 번째로 강렬한 것이었다.
첫 번째는 리카가 16시간 동안 마당에서 뒹굴며 오열했던 것이다.
“저는, 저는 그래도 돼요!”
유우토는 꿈에 벅차 눈물까지 흘렸다.
이 눈물을 진심의 상징으로 삼아, 부모에게 마음이 닿길 바랐다.
“지금의 꿈이…… 지금 제가 가진 꿈만으로도…….”
유우토는 울음을 삼키고 또박또박, 한 글자 한 글자씩 씹듯이 말했다.
“내가 도전했단 사실만으로도…… 저는 평생을 살아갈 자신이 있어요…….”
미래에 후회해도 좋다.
‘하지 말걸’이라고 후회해도 얼마든지 괜찮다. 하지만 ‘해볼걸’이란 후회를 달고 살고 싶진 않다.
“아빠, 내가 이대로만 가면 성공한 인생을 살 거라고 하셨죠? 의사든 변호사든, 대기업의 멋들어진 사원 돼서 성공할 거라고요? 근데, 아빠, 엄마…….”
유우토가 굵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말했다. 조아라가 가르쳐준 말을.
“나는 내가 하기 싫은 일로 성공하기 싫어요…….”
* * *
“하이고, 얘 동생 온다니까 신났네.”
“흐헤.”
조아라는 리카의 뺨을 주욱 꼬집었다. 그런데도 리카는 싱글벙글 미소만 매달고 있었다.
동생이 같은 회사의 연습생이 된단 게 그렇게나 기쁜 것일까.
“당연히 신나지! 남매 아이돌이야! 그리고 아타시(내)가 유우쨩 곁에 있으면 파렴치한 여자들이 달라붙는 것도 막을 수 있어!”
“파렴치한 여자?”
“아라쨩 같은?”
“언젠 내가 멋지다더니. 나도 네 동생한테 관심 손톱만큼도 없어. 그런 어린애…….”
“유우쨩은 아라쨩이 아는 것보다 훨씬 멋지거든?! 그리고 3살 차이에 무슨 어린애야! 그럼 박 이사님한테 아라쨩은 신생아게?”
“……그건, 또, 아니지?”
“의외로 수긍이 빠르네.”
조아라는 성필의 이야기가 나온 김에 그가 앉은 쪽을 보았다.
성필은 회의실 구석 자리에 백설하와 나란히 앉아 ‘더 언노운 싱어’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 곡은 어때?”
“제가 선호하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설하가 선호하는 스타일은 지금 너무 올드해. 무슨 10년 전 곡들만 다 골라놨어.”
“그, 그치만 제 추억의 노래들인데…….”
“틀.”
“네?!”
성필과 백설하는 옛날보다 훨씬 친근해 보였다. 요즘 ‘더 언노운 싱어’ 때문에 자주 만났기 때문일까. 멤버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유대감 같은 게 생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야 신아름.”
조아라는 만만한 신아름을 불렀다. 신아름은 핸드폰 게임을 하다가 짜증 난단 듯 미간을 찌푸렸다.
“뭐요.”
“아저씨가 너랑 요즘 잘 안 놀아주는데 괜찮음? 쌤이랑만 다니잖아.”
“어, 맘껏 다니라고 해. 나 팀장님이랑 여행가기로 했어.”
“둘이……?”
“너 뭐래냐.”
신아름은 ‘아, 죽었네’라고 말하며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툭 던졌다.
“엄마 모시고 가지.”
“뭔, 아저씨도 진짜 지극정성이네.”
“지극정성이지. 가족이니까.”
조아라는 신아름이 자주 이야기하는 가족이란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성필은 피도 이어지지 않은 신아름과 저토록 친근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일까. 남의 집 가족까지 챙긴단 게 보통 일이 아닐 텐데 말이다.
‘어릴 때부터 봐서 그런가…….’
저렇게나 가깝다면, 나중에 자연스럽게 결혼까지 갈 수도 있는 거 아닐까 싶다.
그만큼이나 친밀하게 지내고 있으니…….
“아름아.”
장하양이 신아름의 손등을 톡톡 두드려 불렀다. 신아름이 돌아보니, 장하양이 단아하게 웃고 있었다.
“나도 같이 갈까?”
“어디요. 우리 가족 여행 가는 곳에요?”
“여행은 사람이 많을수록 좋잖아.”
“……진심이에요?”
신아름은 장하양이 ‘농담!’이라고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런데 장하양은 눈을 피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신아름을 쳐다볼 기세였다.
어느새 둘은 눈싸움을 하게 됐다.
슬슬 피로가 쌓여갈 즈음, 장하양이 말했다.
“농담!”
“슬슬 하양 언니 농담은 농담이 아니게 들리는데. 언니, 숙소에만 있어서 심심한 건 알겠지만요. 우리끼리도 놀러 가기로 했잖아요. 조아라, 너 운전 연습은 하고 있어?”
“아니.”
“경섭 오빠가 차 빌려줬잖아?”
“그거 앞 범퍼 찌그러뜨렸어.”
“…….”
불쌍한 민경섭.
호기롭게 조아라의 연습에 차를 빌려줬다가 이런 사달이 나는구나.
‘절대 얘가 운전하는 차에는 안 타야겠다.’
이번에 조아라가 운전하는 차에 탄다면, 찌그러지는 건 범퍼가 아니라 사람일지도 몰랐다.
“아니 근데 주차장 입구가 너무 좁았다고.”
“아하하, 아라한테 운전 맡기면 안 되겠다.”
“아 몰라. 못 믿음 맡기지 마요. 나도 하기 싫어요. 누구 운전해 줄 사람 없나. 나이도 좀 있고 운전 경험도 있…….”
“소유 언니!”
리카가 소리쳤다.
조아라는 자신의 예상과 다른 답에 어이없단 시선을 던졌다.
“소유 언니 면허증 있으셔! KS 엔터에 연습생으로 있을 때 들었어! 운전도 많이 해보셨대!”
“왜?”
“에? 몰라. 아르바이트라도 한 거 아닐까?”
무슨 아르바이트?
리카는 신나서 장하양에게 부탁했다.
항상 장하양을 못 만나 안달인 진소유라면 운전기사 역을 흔쾌히 맡아줄지도 몰랐다.
“언니! 소유 언니한테…….”
“싫어.”
장하양의 즉답에 리카가 실망을 표했다.
“그럼 정말 운전할 사람이 없는데.”
“나 할 수 있다고. 범퍼 찌그러뜨린 건 경섭 오빠한테 미안하긴 한데, 진짜 할 수 있…….”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웬일로 패기가 넘치는 한구인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여기저기서 들리던 잡담이 일제히 사라지고, 다들 그만을 바라보았다.
한구인이 중앙에 서서 미소를 지었다.
“오늘 여러분을 이곳에 한데 모신 건…….”
조아라가 손을 번쩍 들었다.
“예상, 새 수업 생김.”
“하하,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아닙니다. 아라 씨, 혹시 제 수업이 그리워지신…….”
“절대 아닌데요.”
“…….”
한구인이 혼난 강아지처럼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무튼…… 여러분이 드디어 첫 정산을 받을 날이 다가왔습니다.”
멤버들이 깜짝 놀랐다.
리카는 ‘정산’이란 말을 듣자마자 벌떡 일어나 성필을 검지로 가리켰다.
“삿대질하지 마.”
“박 이사님, 준비하세요!”
“뭘?”
“백화점에 가는 거예요! 드디어 박 이사님한테 입생로랑 티셔츠를 사드릴 수 있게 됐어요!”
“왜?”
“왜?! 그날의 감동을 잊으신 건가요!”
가로 엔터에는 전설이 있다.
리카가 데뷔의 감격에 못 이겨, 성필의 티셔츠에 화장과 눈물 콧물을 잔뜩 묻혀놓았단 전설이다.
“아, 그거. 안 사줘도 괜찮은데.”
“안 괜찮아요! 당장 시동 걸어두세요!”
“정산을 언제 받을 줄 알고 그래.”
신아름이 잔뜩 흥분한 리카를 붙잡아 앉혔다.
“맞아요! 언제인가요!”
“음…….”
한구인은 손목시계를 흘끗 보더니, 활짝 웃었다.
“지금입니다.”
멤버들의 핸드폰에 일제히 알람이 왔다. 폰에 깔린 은행 어플 알람이었다.
성필에게도 왔다.
“팀장님한테는 왜 와요?”
“오늘 월급날이라서.”
“아…….”
멤버들은 기대감을 안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동안 한구인은 설명을 이었다.
“여러분의 정산은 분기마다 있을 겁니다. 일사 분기, 이사 분…….”
“얼마일까?”
“적어도 천은 넘어야지 않겠냐?”
아무도 한구인의 설명을 듣지 않았다. 그녀들은 금액에만 눈이 팔려, 숫자만 보고 싶을 따름이었다.
“천만 원이면 이사님한테 입생로랑 티셔츠 사주고도 돈이 남네!”
“그 정도면 차도 사겠다. 바로 매장 가야지.”
“아라쨩, 차는 중고차부터 사. 새 차가 망가지면 마음이 아플 거잖…….”
“저, 언니.”
장하양이 핸드폰을 백설하에게 보여주었다. 그녀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제, 제가 눈이 안 좋아졌나 봐요. 대신, 대신 좀, 봐주실, 시, 시겠어요……? 단위가, 잘 안 보여요. 눈이 침침해서…….”
어차피 멤버들에게 들어온 돈은 다 같을 것이다. 그럼에도 백설하는 굳이 장하양의 핸드폰을 보면서 단위를 읽어갔다.
왜냐하면, 백설하도 도저히 믿을 수 없었으니까.
“쉼표가…….”
하나.
둘.
셋.
백만 단위는 넘는다.
“영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그리고 가장 앞에 숫자가 붙어 있다.
“어, 어어…….”
백설하가 장하양의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할부 기간이 지나고도 3년 넘게 말짱히 사용했던 폰의 액정에 와장창 금이 갔다.
하지만 장하양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다들 그러했다.
“어, 억…….”
첫 정산, 단위는 억이었다.
한구인이 말했다.
“여러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