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화
기억이 안 난다는 답을 듣자마자 성필의 머릿속을 백설하가 가득 채웠다.
수심에 잠겨 억지로 밝은 척하는 백설하. 그런 그녀를 떠올리자 절로 성필의 얼굴이 구겨졌다.
‘안 돼.’
이래선 안 된다.
‘이인성 선생님이 너를 기억도 못 하더라’라는 답을 가지고 가면, 백설하의 멘탈은 땅까지 처박힐지도 몰랐다.
‘남은 방법은 거짓말이야.’
물론, 성필은 거짓말을 싫어한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선의의 거짓말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으로서 할 수 있단 뜻이다.
이왕이면 진실만으로 살고 싶다.
‘그러니 진실을 만들자!’
어떻게든 이인성의 입에서 ‘어렴풋이 기억난다’ 정도의 말은 나오게 해야 한다.
“잘 생각해보시면 안 될까요? 설하요 설하. 지금 아이돌 하고 있는데요, 어렸을 때도 예쁘고 귀여웠을 게 분명하거든요. 학생 중에서도 눈에 띄게 고아하며 아름다웠던 애가 있지 않았을까요?”
성필의 속사포 같은 질문에 이인성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성필은 절박하기까지 보였던 터라, 이인성은 ‘설하’란 인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큰 죄처럼 생각하기까지 했다.
최대한 기억을 되짚어 ‘설하’란 이름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그,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네요…….”
이인성은 기어코 백설하를 기억하지 못했다.
성필은 허탈하여 등을 의자에 꾹 붙였다.
‘설하야, 미안하다.’
결국, 너에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게 됐구나.
‘인성 씨랑 말을 맞춰야 해.’
성필은 이인성에게 주려고 가져온 소녀연맹의 1집 정규 앨범을 가방에서 꺼냈다.
이인성이 제자의 앨범을 받으면 기뻐하리라 생각해서 가져왔던 것이다.
“저어…….”
성필은 쭈뼛쭈뼛 앨범을 그에게 내밀었다. 이제부터 그는 염치없는 부탁을 해야만 했다.
만약 백설하를 만나게 된다면 아는 척을 해달라는 것이다. 백설하가 상처받지 않도록.
“이건 소녀연맹 앨범인…….”
“잠시만요.”
갑자기 이인성이 표정을 굳혔다. 그는 입밖으로 ‘설하’란 말을 계속 꺼내면서 미간을 좁혔다.
그러다가 물었다.
“설하란 분의 성이……?”
“‘백’이요.”
“백…… 설하.”
이인성이 손뼉을 크게 쳤다.
“백설!”
“네?”
“백설! 백설이!”
이인성은 얼굴을 환하게 폈다.
“공주!”
그에 반해, 성필의 얼굴은 기묘한 의문만 띠고 있었다.
“……공주?”
백설공주?
* * *
대학생인 이인성은 현재 생활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성악을 배우는 몸으로써, 한국에서 음악을 공부한단 사실 자체가 불만이었다.
‘유학 가야 해.’
한국의 클래식계는 우물이다.
이 우물을 탈출하여 바다로, 유럽이나 미국으로 가야만 한다. 그게 자신이 세상에 이름을 알릴 유일한 방법이었다.
우물 안에서 용이 되어 봐야, 밖으로 나가면 뱀 취급이나 받을 게 뻔했다.
‘돈을 모으자.’
이인성은 유학 자금을 모으기로 했다.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대학도 전액 장학금을 주는 곳으로 왔었다. 유학 비용을 대는 것도 홀로 감당해야만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노래뿐이라, 자연스레 노래 관련 아르바이트를 찾게 됐다.
그렇게 보컬 트레이닝 학원에 취직했다.
“제가 가르쳐도 되는 거 맞나요? 저는 성악…….”
“아 괜찮아요 괜찮아. 실용 음악이나 성악이나 둘 다 노래 아닙니까. 어차피 여기 오는 거 다 애들이라, 잘 알지도 못해. 그리고 결국엔 노래 잘 부르는 게 목표인 애들이니까. 이 선생은 적당히 한국 가요나 저기 어디냐, 미국에 팝송 같은 거 외우고 그래봐요.”
“……예.”
이인성이 할 수 있는 일 중에선 그나마 가장 벌이가 좋은 것이었다. 그렇게 이인성은 실용 음악 보컬 트레이너가 되었다.
그 첫 제자가 바로 백설하였다.
“백설하요!”
그녀는 이름을 묻자 위풍당당히 그리 말했다.
처음 보는 이인성을 보고도 낯을 가리지 않는 모습이, 그녀가 얼마나 사랑받으며 살았는지 단숨에 알 수 있었다.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이라고?’
이인성은 백설하를 보고 당황했는데, 아무리 봐도 백설하는 초등학생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중학생은 됐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아무튼, 그는 수업을 시작했다.
“자, 이건 콘코네(성악용 교재)란 거야. 이걸로 연습하자.”
“네!”
이틀 뒤.
“엄마 나 그만 다닐래!”
백설하가 엄마를 끌고 와 이인성에게 삿대질했다. 이인성은 어쩔 줄 몰라했다.
원장은 백설하의 어머니를 설득하고, 백설하는 원망하는 눈초리로 이인성을 노려보았다.
‘아니, 왜…….’
이인성은 하던 대로 했다.
하던 대로,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밟아 온 성악의 길을 그대로 가르쳤던 것이다. 엄격한 선생님들에게 배웠던 그대로 말이다.
물론 이인성은 성품이 온화했기에, 자신의 선생님들처럼 체벌, 욕, 무시 같은 저열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단지 될 때까지 붙들어 뒀을 뿐이었다.
“대학생이시라고요? 가르쳐본 경험은 있으시고요?”
백설하의 어머니는 이인성을 못 믿는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분 나쁘게 훑었다.
이인성이 쩔쩔매는 모습을 보자, 백설하는 이제껏 쌓아왔던 울분이 풀리는 듯 얼굴이 밝아졌다.
“불러 봐요.”
백설하의 어머니가 그리 말했다.
“한번 불러보라니까? 우리 애 가르칠 실력 있나 없나 보게.”
이인성은 황당했다. 다짜고짜 노래를 부르라니. 모욕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인성 쌤, 한번 해줘요.”
원장이 눈치를 주니 어쩔 수 없었다.
이만큼 좋은 일자리는 다시 구하지 못할 테니, 고객의 비위를 맞춰주어 위기를 모면해야 하리라.
이인성은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화를 참아냈다. 화를 내면 안 된다. 소리 지르면 안 된다. 성대가 상하니까.
그래서 이인성은 노래 불렀다.
“……아.”
약 3분의 시연 후, 어린 백설하는 눈물을 한 방울 톡 떨어뜨렸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어머니에게 말했다.
“엄마, 나 계속 다닐래…….”
그날부터는 순조로웠다.
백설하는 이인성의 가르침을 계율처럼 따랐다.
식단에 유제품과 채소를 많이 넣고, 아침마다 근력 트레이닝도 했으며, 무엇보다 가르침에 어긋남 없이 노래를 불렀다.
“쌤 이거 봐요!”
어느 날 백설하가 이인성의 앞에서 팔 굽혀 펴기를 했다. 바닥에 무릎을 대지 않고서.
“우와 이게 뭐야!”
이인성은 진심으로 놀랐다.
완전한 팔 굽혀 펴기가 가능한 초등학생을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고작 한 번이지만, 아직 2차 성징도 오지 않아 근육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은 초등학생이 할 법한 동작이 아니었다.
“헤헤, 열심히 했어요!”
백설하는 한 번의 팔 굽혀 펴기를 하고서 팔을 덜덜 떨고 있었다.
이인성은 아낌없이 박수를 쳐주었다.
“백설, 쫌 하네.”
“이제 저도 쌤처럼 될 수 있겠죠?”
“그건 힘들지!”
백설하를 뾰로통하게 이인성을 흘겼다. 그 모습이 귀엽기 그지없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백설하의 노래 실력도 빠르게 향상되었다. 이인성이 놀랄 만큼 대단한 발전이었다.
“백설이 아이돌 한다고 했지?”
이인성은 은근한 기대를 담아 물었다.
현재 백설하의 상태라면, 성악으로 넘어가도 큰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어린 시절부터 재능을 갈고 닦아 온 이들의 틈바구니에 넣어도 살아남을 수 있을 가능성이 보인다.
“네.”
하지만 백설하는 너무나 간단히 ‘아이돌이 되겠다’고 했다.
이인성은 ‘성악 해볼래?’라고 묻지 않았다. 대신, 제자의 꿈을 응원해주기로 했다.
“그래, 될 수 있을 거야. 이렇게나 예쁘고 열심히 노력하고 노래도 잘 부를 가능성이 있는데, 못 될 리가 없지.”
“마지막이 이상한데요.”
“분명 될 수 있어. 영화에 나오는 공주님처럼 하얗고 예쁘잖아. 백설이…….”
“쌤 오늘따라 왜 저 띄워줘요. 오늘 또 여자친구가 불러서 빨리 가봐야 해요? 진짜 학원비 도둑이야. 나도 눈 감아 주는 거 한두 번이에요.”
이인성은 쓰게 웃었다.
그는 얼마 안 있어 미국으로 간다.
커티스 음악원에 오디션 영상을 보냈더니, 실기 시험을 치러 오란 통보가 날아왔다.
만약 통과한다면, 이인성은 전액 장학을 받으면서 성악을 공부할 수 있게 된다.
“백설.”
“네?”
이인성이 백설하의 머리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쓸었다.
“기대할게. 나중에 텔레비전에 나와서, 공주님처럼 예쁜 모습으로 노래하는 거야.”
“난 공주님보다 마녀가 좋아요.”
“그럼 백설 공주도 싫어?”
“백설 공주는 좋아요! 그럼 내가 텔레비전 나올 때 되면 쌤처럼 노래할 수 있어요?”
이인성은 평소처럼 ‘그건 힘들지’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진심을 담아 말했다.
“당연하지, 백설.”
아니.
분명히, 나보다 훨씬 더 잘 부르게 될 거야.
* * *
소녀연맹의 앨범을 받은 이인성은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렸다. 심지어 꺽꺽 소리를 내며 흐느끼기까지 했다.
앞에 앉은 성필이 뻘쭘할 정도였다.
주변의 시선이 따가워서, 성필은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다.
“아이돌이 됐구나, 결국에…….”
성필의 예상이 맞았다.
제자가 꿈을 이룬 것에 실망하는 스승 따위 존재할 리가 없다.
‘설하가 같이 왔어야 했는데.’
그래서 백설하가 이 광경을 직접 봤어야 했다.
성필은 백설하를 데려오지 않은 게 못내 아쉬웠다.
이인성은 10분 만에 울음을 그치고, 붉어진 눈으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백설이…… 아니라, 설하가 무서워한다고요? 제가 실망할까 봐?”
“네. 좀 이상하죠? 프로듀서인 제가 이런 말하는 것도 그렇지만, 노래를 정말 잘 부르거든요.”
“그 뒤로도 10년 넘게 연습했다면, 정말 그렇겠네요.”
“애가 많이 긴장해요. 그러니까, 혹시 무대 전에 만나서 같이 말씀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이인성은 티슈로 눈물을 닦고 환히 웃었다.
“그건 안 되겠습니다.”
“……네?”
“방금 정했어요.”
이인성은 앨범을 성필에게 돌려주었다.
“무대에서 설하를 만날 때까지, 소녀연맹의 노래는 안 들을 겁니다. 직접 듣고 싶어요. 설하가 어떤 노래를 부르는지, 앞에서 직접 듣고 싶어요.”
십수 년 만의 재회이다.
이인성은 그 재회를 디지털 사운드로 먼저 체험하고픈 생각이 없었다.
육성으로 듣고 싶었다. 그녀가 걸어온 길과, 그녀가 들여온 노력과, 그녀가 이뤄낸 꿈을.
“그럼, 설하를 아예 안 만나실 생각이세요?”
“무대가 끝나면 만나봐도 좋겠죠.”
성필은 이제야 확신했다.
아직 이전 회차의 ‘더 언노운’ 방어전은 방영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인성이 이토록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결과는 명확했다.
‘주성이 패배했구나.’
이인성은 ‘더 언노운’에 오른 게 틀림없다.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이인성이 겸연쩍게 물었다.
“네, 말씀하세요.”
“제가 최종전에서 ‘주성’이란 분과 붙었거든요. 아, 이거 말해도 되나? 아니다, 잊어주세요. 죄송합니다.”
“이미 다 들키셨어요. ‘더 언노운’ 되셨죠?”
“으아…….”
이인성은 곤란하단 듯이 하하 웃었다. 그리고 아까보다 목소리를 낮추고 다시 물었다.
“‘주성’이란 분과 붙었는데, 나중에 따로 어떤 분인지 찾아봤거든요. 되게 유명한 분이시더라고요. 정확히 감은 안 잡혀도, 대단한 가수란 사실은 알 수 있었어요.”
“그렇죠. 요즘은 신보를 발표 안 하셨는데요. 20대 중반부터 그 위로 모르는 사람이 아마 없을 거예요. 히트곡이 꽤 있어서, 멜로디만 듣고도 아는 사람이 많아요. 당연히 실력도 우수하고요. 성종 자체가 저음역에 맞춰져 있는데, 고음을 시원스레 뽑을 수 있단 게 강점이에요.”
“와, 대단하네요. 20대 중반 위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가수라뇨. 저보다 훨씬 대단한 분이셨네요.”
“그냥 분야가 달랐던 거죠.”
“저, 그리고…….”
이인성은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뗐다.
“실례가 안 된다면요. 그분이랑 백설…… 하 중에 누가 더 잘 부르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음.”
대중음악, 팝의 발전은 곧 음향 기술의 발전과 맥을 같이 했다.
음향 증폭이 불가능한 시대에는 공명을 극대화하여 목소리를 키우는 게 가수의 제1과제였다.
성악가들이 성량을 키우는 이유이다.
하지만 팝 싱어들은 다르다. 음향 기술의 발전으로, 굳이 성량을 키울 필요가 없어졌다. 마이크 가까이 입을 가져다 대고 노래를 부르면, 드넓은 축구장 전체를 울릴 수도 있다.
‘대중음악에서 가수의 능력을 판가름하는 건, 기교보다는 개성.’
타고난 목소리와 갈고 닦은 개성적인 발성법이 가수의 성패를 좌우한다.
여하튼 사람의 귀를 사로잡고 매혹하는 게 팝 싱어들의 제1과제다.
그리고 개성이란, 사람들의 평가가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누군 좋아하고 누군 싫어하니, 호불호가 극명한 영역이다.
‘설하랑 주성 씨 중에 누가 더 잘 부르냐고 하면, 대중음악의 관점에선 마땅한 답을 줄 수 없지.’
하지만 성필이 생각하기에.
“비슷할지도 몰라요.”
그에 이인성이 옅은 미소를 보였다.
“설하는 저를 이기고 싶어 하나요?”
“적어도 인성 씨한테 지고 싶어 합니다. 그 이전에 탈락하길 바라지 않고요.”
“이왕이면 저를 이길 각오로 무대에 올랐으면 합니다. 하지만 주성 씨랑 비슷하다고 하면…….”
이인성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무대와 연출에 신경을 더 쓰셔야 할 거예요.”
“자신감이…….”
성필은 허허 웃었다. 노래 이야기가 나오니 이인성의 기세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아예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자신감이, 굉장하시네요.”
“하하, 제자와 같은 무대에 올라 승패를 가리는 스승의 심정을 생각해주세요.”
“……아.”
이인성은 테이블 위로 손을 모았다. 그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호언장담이라도 안 하면 불안해서 견디기 힘들어요. 무슨 창피예요. 제자한테 지면…….”
백설하가 제자로서의 체면을 세우고 싶어 하는 것처럼, 이인성은 스승으로서의 체면을 세우고 싶어 한다.
사실, 이미 백설하의 바람은 이뤄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인성이 그녀에게 실망할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이인성은 달랐다.
“저를 아직도 기억해서, 저한테 안 좋은 말 들을까 봐 떠는 애인데…….”
이인성은 과거의 우상으로 남아 있기 위해, 백설하와 전력으로 싸워야만 했다.
아이돌이 훨씬 더 익숙할 방송 무대, 백설하의 홈그라운드에서 말이다.
“그런 애한테 부족한 모습을 보여줄 순 없잖아요…….”
“그 말씀, 설하한테 전하는 게 좋을까요?”
“아뇨! 이런 생각한단 거 자체가 제 위엄을 깎아 먹는 거니까요! 그냥…….”
이인성은 옅게 웃었다.
“제가 백설이를 기억한단 것만 전해주세요. 꿈을 이룬 걸 축하한다고도요. 만남은 무대 뒤에 할게요.”
* * *
백설하는 ‘더 언노운 싱어’ 무대 연습을 위해, 휴가임에도 회사에 출근했다.
그녀가 연습실에서 목을 풀고 있자니 성필이 들어왔다.
아침잠이 많은 백설하는 그때까지도 약간 몽롱한 상태였는데, 성필을 보자마자 태양을 본 것처럼 잠이 확 달아났다.
“안녕하세요 이사님.”
“설하도 안녕. 시간 있어?”
“제 스케줄 다 아시면서.”
“사실 내가 어제 우연히 이인성 선생님을 만났거든.”
“네?!”
백설하는 성필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넋이 나갔다. 성필은 이인성에게 백설하의 근황을 전부 이야기했다고 한다.
백설하는 충격받고 바닥에 털썩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곤 문어처럼 팔과 다리를 파닥거리면서 앙탈 부렸다.
“왜, 왜애……! 왜 이사님 마음대로오……!”
“선생님이 너 자랑스럽대. 꿈을 이룬 거 축하한다고도 말씀하시더라.”
백설하, 성불.
그녀는 언제 앙탈을 부렸냐는 듯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눈물을 글썽이며 성필에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아까는 왜 내 마음대로 얘기했냐면서 옹알거렸잖아.”
“아무래도 좋아요……. 저, 저 마음이 많이 편해졌어요. 정말, 심리 상담받았을 때보다 훨씬 좋아요…….”
인간은 상상력이 있기에 공포를 느낀다. 공포를 상상할 수 있는 인간만이 살아남아 유전자를 후세에 남길 수 있었다.
그 능력은 인간의 생존에 유리하지만, 안전이 보장된 현대에 와선 스트레스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백설하는 이인성의 반응을 상상할 여지가 전부 사라지자, 보리수나무 아래의 부처처럼 평온해졌다.
“저 이제 아무런 걱정 없이 연습에 매진할 수 있겠어요. 지든 이기든 최선을 다할게요. 선생님한테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겠단 마음으로요.”
“그래, 그 마음가짐이…….”
“설하…… 아, 박 이사님.”
안이상 매니저가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 매니저님?”
“지금 밑에 글로브의 세라 씨가 와 계시거든요. 설하 씨 뵙겠다면서요.”
성필과 백설하가 서로를 보았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1층으로 내려갔다.
안이상의 말대로, 가로 엔터 입구에는 위세라가 서 있었다. 그녀는 종이백을 들고, 한눈에 보아도 처량한 분위기를 처절히 내뿜었다.
백설하가 쭈뼛쭈뼛 그녀의 앞에 섰다.
“세, 세라야?”
“…….”
“그으…….”
백설하는 성필을 보았다.
성필이 말했다.
“세라야, 일단 들어올래?”
위세라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백설하의 앞으로 다가왔다. 백설하는 맹수라도 다가온 듯 고개를 뒤로 홱 뺐다.
“비웃어요.”
“……응?”
“마음껏 비웃어요. 당당하게 우승자로 기다리겠다면서, 1라운드에서 탈락했잖아요.”
위세라는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더니 갑자기 소리쳤다.
“비웃으라고!”
1층 홀에 정적이 내리 앉았다.
아침의 여유를 만끽하던 직원들도 전부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위세라는 시선 따위 아무렇지도 않단 듯 열기가 담긴 숨을 씩씩 내쉬었다.
“안 비웃어.”
백설하가 나지막이 말했다.
“비웃을 생각 없어.”
위세라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게, 백설하의 표정이 진지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올바르게 응시하는 투명한 눈동자를 보니, 이곳에 오기까지 품었던 부정적인 감정이 녹아버리는 듯했다.
비웃을 생각이 없다, 라…….
어째서일까. 위세라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묻고픈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
위세라는 종이백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더 언노운 싱어’에서 사용했던 가면이었다. 승리의 여신 니케를 상징화한 가면.
위세라는 그 가면을 백설하의 가슴팍에 안겼다.
“받으…….”
위세라는 가면을 가볍게 백설하의 품에 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예상보다 입체감 있는 백설하의 가슴 때문에 각도가 빗나갔다.
퉁, 하고 가면이 튕겨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
“…….”
위세라가 바닥의 가면을 주워 다시 백설하의 가슴팍에 조심스레 안겼다.
“아직 승부 안 끝났어요.”
“아, 어.”
“둘 다 져서 뻘쭘하게 웃고 싶진 않아요.”
“어?”
위세라는 겨우 웃었다. 억지로 폐에서 웃음을 쥐어 짜내 입가에 걸었다.
“계속 생각해봤는데요, 역시 목표를 누가 먼저 따는 것보다야 내가 처음인 게 낫겠더라고요.”
위세라가 가면에서 손을 뗐다.
백설하는 품에 ‘승리의 여신 니케’의 가면을 안았다.
“절대 지지 마요.”
“어……?”
“언니 이기는 건 내가 처음일 거니까. 1대1로, 정정당당하게. 그러니까 누구한테 지는 꼴 못 봐요. 내가 따기 전에 따이지 마요. 알겠어요?”
“어어…….”
“알겠냐고요!”
위세라의 호통에 백설하는 군인처럼 각을 바로잡았다.
“으, 응!”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선언해버렸다.
위세라는 퀭한 눈으로 백설하를 응시하곤, 다음으로 성필을 보았다.
“팀장님.”
“응.”
“원래, 여긴 저주하러 오려고 했어요. 어차피 설하 언니도 질 거라고. 그런 말 하려고 했거든요.”
“…….”
“근데, 응원했어요.”
그건 훗날을 위해서다. 백설하의 가치가 높아지고 높아졌을 때 꺾어버리려고.
“그냥, 그랬어요.”
아무리 위세라가 성필을 원망하고 있더라도, 그의 앞에서 담당 아이돌을 저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위세라는 성필이 떠나간 것을 안 좋게 보지만은 않았다. 그가 석세스 엔터를 나가 꿈을 이룬 모습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그러니, 성필의 꿈 자체인 백설하를 어떻게 그의 앞에서 저주하겠는가.
“설하 언니가, 팀장님이 담당하는 아이돌이 이기길 바랄게요.”
위세라는 등을 돌리고 비척비척 저 멀리로 나아갔다. 그녀의 모습이 작은 점으로 변하자, 백설하는 품에 안겨진 니케의 가면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승리의 여신은 백설하에게 안겨 해맑은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마치 ‘이겨’라고 말하는 듯했다.
“……이사님.”
“응.”
“저 방금 세라한테 약속했었죠?”
“그랬었지.”
백설하는 위세라에게 약속했다.
‘서쪽의 오 솔레미오’, 이인성을 이기겠노라고.
그냥저냥 넘길 만한 약속이 아니었다. 위세라가 이곳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곱씹었을지 생각한다면, 절대 가볍게 넘겨선 안 된다.
백설하는 위세라의 선전포고를 기억하니까.
위세라는 쓰디쓴 패배와 실패를 전신에 두르고도, 라이벌인 백설하를 응원하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
‘자기가 꺾을 때까지 꺾이지 말라고…….’
그런 기대를 받고 있다.
백설하는 니케의 가면을 머리에 올렸다.
“겨우 마음이 편해졌었는데에…….”
그녀는 앓는 소리를 하며.
“이렇게 되면, 이긴단 마음으로 할 수밖에 없잖아요…….”
가면을 썼다.
승리의 여신 니케.
* * *
‘더 언노운 싱어’ 1라운드 첫 연습일.
가수 김은정은 지정된 연습실에서 목을 풀었다. 매니저는 시종일관 그녀의 옆에서 딸랑거렸다.
“누나, 저번 회차엔 가수가 상대적으로 많았으니까 이번 회차엔 적을 수도 있어요. 아나운서나 개그맨, 배우도 자주 나오니까요.”
“그러게. 가수로 나와서 못 이기면 그렇긴 하지. 최소 2라운드까지는 가야잖아. 1라운드는 거저면 좋겠는데.”
“누나가 운이 좋으니까 상대도 잘 걸릴 거예요.”
“누굴까?”
그때 연습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김은정은 혹시나 업계 선배일지도 모른다 생각하여 슬금슬금 일어났다. 그리고 몸이 굳었다.
“안녕하세요.”
‘승리의 여신 니케’의 가면을 쓴 누군가가 말했다. 가면을 통한 목소리라 무겁게 들렸다.
“……가면 쓰시고 연습하시게요?”
“네.”
“아, 예에…….”
미친년이구나.
김은정은 그리 생각했다.
‘왜 굳이 연습할 때도 가면을 쓰지? 아예 없는 경우는 아니라고 듣긴 했는데…….’
김은정이 예상할 만한 가능성은 하나였다.
본업은 가수이지만, 라이브에 자신이 없을 경우. 그래서 같은 가수를 보기엔 창피해서 정체를 숨기는 것이다.
‘뭐야, 그런 거야?’
김은정은 기분이 살짝 좋아졌다. 매니저도 그녀를 보면서 엄지를 들어주었다.
‘좋아, 1라운드는 꽤 쉽게 가져가겠어. 2라운드까지 가서 체면은 살리겠네.’
그렇게 연습이 시작되었다.
10분 후.
‘아, 졌네.’
김은정, 1라운드 패배 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