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7화
어쩌면 백설하는 스승을 상대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리고 싸우기 전에 상대를 파악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멤버들은 언니를 도우려 상대의 정보를 찾으려 했다. ‘더 언노운 싱어’에 나오려면 어느 수준의 인지도는 반드시 확보해야 하니, 인터넷에 정보가 뜰 것이다.
“언니, 저 사람…… 저분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그게, 이름은 기억나는데 성이 안 떠올라…….”
그의 이름은 ‘인성’이었다.
백설하는 그를 ‘쌤’이라고 불렀었지만, 학원 사람들이 그를 ‘인성 쌤’이라고 꼬박 꼬박 이름을 붙여 불렀기에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이름이 인성이면 찾기 힘들겠는데요.”
“그게 뭐가 어렵다고 그래. ‘사람 인성’이라고 치면 되잖아!”
리카는 자신만만히 검색창에 ‘사람 인성’이라고 쳤다.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래서 ‘사람 이름 인성’이라고 쳤는데, 웬 작명 관련 글만 잔뜩 떠올랐다.
“힘든 싸움이 되겠어.”
멤버들은 이름 ‘인성’을 고정값으로 설정하고 그럴듯한 성을 하나씩 붙여나갔다.
그를 찾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수십 초였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성씨라는 김, 이, 박부터 조사하니 금방 나왔다.
“언니, 이분 아니세요?”
장하양이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위키백과에 올라온 사진을 보자마자 백설하가 놀라서 손뼉을 쳤다.
“맞아 맞아 이분이야!”
그의 이름은 ‘이인성’이었다.
멤버들은 재빨리 그 이름을 검색하여 위키를 쭉 훑어보았다.
장하양이 관심을 가진 건 그의 학력이었다.
“이분 한국에서 음대 중퇴하시고 미국으로 가셨어요.”
“아, 갑자기 학원을 나가셨던 게 그거 때문이었구나. 공부하러 가신다고 했던 거 기억나.”
“커티스 음악원…… 이란 곳에서 성악과를 졸업하셨대요.”
그다음 이탈리아에서 석사를 땄다. 그리고.
“프랑스 에꼴 노르말 음악원 성악과 최고 연주자 과정 졸업이시고…….”
장하양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지금 교수신데요?”
“교, 교수?”
“석좌교수시래요.”
“석좌교수……?”
“교수란 게 30대에도 될 수 있는 거였구나.”
하긴, 한국의 실용음악과 같은 곳은 교수들의 나이대가 젊은 편이다.
“나는 교수랑 싸우는 거야……?”
이전에 성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백설하는 아이돌이 되기 위한 트레이닝을 거의 10년 동안 했으니 아이돌 박사나 마찬가지라고.
그런데 이젠 진짜 노래 하나만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인간과 같은 무대에 오르게 됐다.
안 그래도 과거의 우상이던 스승과 대결을 벌일 수도 있단 사실에 속이 쓰리건만. 그 스승은 옛날보다 훨씬 대단해졌다.
“쌤.”
조아라가 호들갑을 떨면서 백설하를 불렀다.
“이분 웬만한 나라의 예술극장에 전부 올라 봤대요. 뉴욕 카네기 홀부터…….”
영국 런던, 오스트리아 빈, 프랑스 파리, 일본 도쿄, 중국 베이징, 대만 타이베이, 호주 시드니, 당연히 한국의 서울도 있다.
‘국립’과 ‘예술’이 붙은 무대엔 거의 다 올라 봤으며, 모든 무대에서 매진을 기록했다.
“세계에서도 놀라는 대기록이라는데요?”
“어……?”
백설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리고 정상급 오케스트라들이 못 불러서 안달인 사람이고…….”
“에엑?!”
안 그래도 정신이 사나운데 리카가 소리치자 백설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분 대통령 직속 문화발전자문회의 위원이세요!”
“어?!”
이젠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다.
가수로서의 업적은 그렇다 쳐도, 설마 대통령에게 자문까지 하는 사람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와.”
신아름이 감탄의 신음을 흘렸다.
백설하는 이제 놀랄 게 남아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교수를 하고 있는, 정상급 무대를 전부 밟아본, 대통령 직속 회의 자문위원인, 그런 인간이 무엇을 달성했든 더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신아름이 웃으면서 핸드폰 액정을 보였다.
“이걸 밈이 아니라 실제로 보네.”
[포브스 선정 금세기 최고의 오페라 가수 30인.
―이인성]
백설하, 혼절.
* * *
성필은 거의 울 듯한 기세인 백설하와의 통화를 끝냈다.
상대가 자신의 스승이었던 이인성이며, 너무 대단한 사람이라 어떻게 보아도 자신이 질 것이라고 한다.
‘설하가 울 만하네…….’
이인성의 프로필을 확인한 성필마저도 혀를 내둘렀다.
다음 날, 성필은 가로 엔터 사람들과 함께 이인성과 위세라의 무대를 감상했다.
무대 시작 전, 이인성 ‘서쪽의 오 솔레미오’는 예상치 못한 허당끼로 판정단을 웃겼다.
손혜민마저도 무대 위에 서서 우왕좌왕하는 이인성을 보면서 피식했다.
“이런 쪽 방송 무대엔 큰 연이 없는 사람 같네.”
이인성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은 그의 어리숙함을 그저 웃기게만 본다.
하지만 정체를 아는 이들은, 저 어리숙함을 다르게 볼 것이다.
미디어에 모습을 드러낼 필요도 없이, 세계의 유명 콘서트장을 전전한 그는 방송 장비들이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상대가 글로브 세라랬지?”
“응.”
무대가 시작됐다.
이인성은 첫 소절부터 판정단의 혼을 빼놓았다. 극초반임에도 폭발하는 그의 가창력은 모두를 놀라게 하기 충분하고 넘쳤다.
편집 때문에 더 임팩트가 컸다.
시작 전에는 이인성의 허당끼 있는 모습을 부각했으니, 그의 프로페셔널한 모습이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인성의 차례가 끝나고 위세라가 노래했다.
“잘 부르네.”
손혜빈이 짤막하게 평가했다.
메인 보컬이라 불리기 부족함이 없는 실력이다.
청중과 판정단은 위세라의 노래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주었다.
하지만 결과는 냉혹했다.
위세라는 몇 배가 넘는 표차로 패배했다.
이인성은 대기실로 돌아가고, 위세라는 무대에 남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승리의 여신 니케’는 1라운드부터 패배하여 초라한 조명을 맞고 서 있다.
“뭔가…….”
한구인이 침울하게 말했다.
“보기 안쓰럽습니다.”
아마 한구인은 위세라의 모습에 백설하를 겹치고 있을 것이다.
그는 이미 이인성이 ‘더 언노운’이 될 것을 확신했다. 그렇다면, 백설하는 3라운드를 모두 승리하더라도 이인성을 만날 것이다.
만나서, 패배하겠지.
한구인은 위세라의 초라한 모습에 백설하를 덧씌웠다. 그래서 더욱 안타까웠다.
화면의 위세라가 가면을 벗었다.
판정단이 혼비백산 화들짝 깜짝 놀라면서 ‘글로브의 세라?!’라고 외쳤다.
‘더 언노운 싱어’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는 반응으로, 예나 지금이나 적응이 안 되는 과한 리액션이었다.
[네, 세라입니다. 아…….]
담담하게 소감을 말하던 위세라는 어느 순간 목소리를 떨었다. 그녀는 마이크를 가슴께에 꼭 쥐고, 이내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것을 지켜보는 판정단과 청중이 심히 당황했다. 지금껏 무대에서 탈락하여 운 사람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베테랑 가수는커녕 가수 할아버지가 와도 1라운드에서 탈락하곤 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런 이들도 아쉬워만 하지 울지는 않았었는데, 위세라는 울고 있다.
[죄, 죄송합니다. 아직, 아, 아직 더 보여드리고 싶은 모습이 많았는데…….]
가로 엔터의 이들도 침묵을 지키면서 위세라의 말을 기다렸다.
[죄송합니다, 노래 부르겠습니다…….]
위세라의 이별 무대가 시작됐다.
자막으로는 젊은이의 패기와 혈기를 칭찬하는 내용이 떠다녔다. 위세라의 눈물을 감동적으로 포장하고 있다.
경연에 져서 우는 참가자는 언제든지 화제가 되는 법이니까.
“진짜 잘 부르네…….”
위세라는 2라운드에 부를 생각이었던 발라드로 무대를 펼쳤다.
청중은 그녀의 세련된 기교와 감미로운 목소리에 후한 평가를 주었다.
떨어져서 아깝다고, 무대를 더 보고 싶었다고, 다음에도 기회가 있으면 꼭 나와달라고.
그렇게 위세라를 달랬다. 그리고 위세라는 퇴장했다. 더 보고 싶든 어떻든 결국엔 패배했으니까.
다음으로 판정단은 ‘서쪽의 오 솔레미오’의 정체를 점쳐보았다.
아무도 맞추지 못했다.
“손 이사님,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한구인이 손혜빈에게 물었다.
성필은 일부러 ‘서쪽의 오 솔레미오’의 정체를 모두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과연, 손혜빈도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 알 거 같은데.”
그때 홍규헌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인성 아니야?”
“어?”
“박 이사도 알아?”
“어…… 사실 저 설하한테 저분 정체 미리 들었거든요. 맞추는 사람이 나올 거라고 생각을 못 했어서, 조금 놀랐어요.”
성필은 이인성이 백설하의 스승이란 이야기를 모두에게 해주었다.
“사장님은 어떻게 아세요?”
“이인성 저 사람 가톨릭 성가 컴필레이션 앨범 같은 데 꼭 들어가 있어.”
“가톨릭 성가요?”
“응. 이인성이 가톨릭 신자라서 그런지, 그쪽 계열 곡을 꽤 불렀거든.”
홍규헌이 옷깃 안에 숨기고 있던 ‘예수 고상 목걸이’를 꺼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모습을 금속으로 만든 물건이었다.
“나 신자(信者)잖아.”
기독교도, 정확히는 천주교도인 홍규헌이다. 기도할 때 가끔 찬송가, 성가를 듣곤 한다.
그래서 이인성이 부른 가톨릭 성가를 꽤 알고 있다는 모양이다.
“근데 살짝 헷갈렸었어. 목소리가 내가 듣던 거랑은 달랐어서.”
“맞아요.”
손혜빈이 말했다.
“저 사람 일부러 자기 목소리대로 안 부르고 있어요. 조금씩 바꿔서 불러요.”
“누나, 그걸 알아?”
“알지. 나도 가수였잖아.”
“댄스 가수…….”
“댄스 가수는 가수 아니란 거야?!”
아무튼, 손혜빈은 설명을 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고 있어. 당연히 목소리에 변조를 주면 본 실력을 못 발휘해.”
“무슨 만화나 소설 같군요. 가진 힘의 50%만 쓴다거나 그런 겁니까?”
“한 이사님 그런 것도 읽으세요?”
“리카 씨가 자꾸 귀찮, 아니, 열성적으로 추천해주셔서 그만…….”
그만…… 한구인은 서브 컬쳐를 눈에 담게 된 것이다. 얼마나 리카가 귀찮게 했으면 ‘고전 아닌 소설은 안 읽는다’는 한구인이 만화책을 읽게 됐을까.
“아무튼 뭐, 대단한 사람이란 거네.”
그렇다. 이인성은 대단한 사람이다.
결론이라곤 그것뿐이었다.
그때 갑자기 손혜빈이 성필의 어깨를 마사지하듯 주물렀다.
“너 표정이 왜 그렇게 심각해? 설하 걱정하는 거야?”
손혜빈이 웃었다.
“벌써 걱정할 필요는 없지. 저 사람이 ‘더 언노운’이 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고. 되더라도, 설하가 3라운드까지 못 갈 수도 있잖아? 사실, 못 갈 가능성이 훨씬 높지.”
아이돌 출신이 ‘더 언노운’이 된 경우는 손에 꼽는다.
노래 하나만을 보며 업으로 삼은 이들의 틈바구니에서 아이돌이 살아남기란 쉽지 않다.
‘더 언노운 싱어’의 평가 기준에 춤과 표정 연기 같은 게 추가된다면 또 몰라도 말이다. 그런 기준이 생긴 시점에서 이미 ‘싱어’가 아니긴 하지만.
“이번에 설하가 여기 나간 것도 팬서비스 차원 아니야? 베테랑 가수들도 도중에 떨어지는 게 이 방송이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응.”
손혜빈의 이야기를 들으니, 성필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사실 성필이 가로 엔터 사람들과 위세라와 이인성의 무대를 굳이 같이 본 건, 승리할 대책을 강구하기 위함이었다.
이인성을 이길 대책 말이다.
‘근데 누나 말이 맞아. 이인성이랑 설하가 어떻게 될 줄 알고 미리 대책을 짜?’
이인성이 떨어질 수도 있고, 그런 백설하도 마찬가지였다. 둘이 만나게 될 가능성은 확률적으로 상당히 낮다.
성필의 과민반응이 확실했다.
하지만, 성필은 과민반응 할 수밖에 없었다.
‘통화할 때 설하 목소리가…….’
공포에 질려 있었으니까.
* * *
“애들은 어때?”
성필은 조수석에 앉은 백설하에게 물었다. 백설하는 차 안을 이모저모 둘러보다가, 성필의 질문을 받곤 놀라서 어깨를 떨었다.
“네, 네?”
“애들은 잘 쉬고 있냐고. 무슨 생각하길래 놀라고 그래?”
성필은 백설하가 보았던 부분을 가볍게 훑었다. 딱히 평소와 다른 건 없었다.
백설하는 성필의 차에 자주 탔기에 신기할 거라곤 없을 텐데.
“아, 그게, 방금 알았는데요. 이사님 차에 선팅 돼 있는 거 맞죠?”
“응. 되어 있긴 한데 밖에서 자세히 보면 보여. 선팅된 걸 이제 알았어?”
“유심히 본 적이 없어서…….”
“설하는 아직 여유가 있나 보네.”
백설하가 두 눈을 꿈뻑였다.
“네?”
“차 선팅에 정신이 팔리고. 난 설하 상담해주려고 이 먼 길까지 왔는데, 올 필요 없었나?”
성필은 소녀연맹의 숙소 근처에 차를 대고 백설하를 태운 채였다.
이사로서 백설하를 가로 엔터에 불러도 됐겠지만, 소녀연맹은 휴가 중이니 성필이 직접 움직였다.
“아녜요 여유 하나도 없어요! 그, 그냥…….”
“그냥?”
“이이, 이렇게 차 안에서, 그, 보고 얘기하고 하니까…… 연예인들 비밀 데이트하는 거 같다…… 는 생각이 들어서…….”
“정말 설하 얘기는 매일이 새롭네. 처음 카페에 불렀을 때 한 얘기도 그렇고, ‘롱 포’ 뮤비 촬영할 때랑…….”
“그 얘기는 왜 하세요오! 아, 안 하기로 했는데에!”
백설하는 아랫입술을 꾹 물면서 부끄러움을 참았다.
성필은 백설하를 5시간도 쉬지 않고 놀릴 수 있지만, 오늘은 그러려고 온 게 아니었다.
“그래서 설하야, 어떤 게 걱정돼?”
성필은 멤버들의 목소리만으로도 감정을 유추할 수 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럴 수 있다. 목소리에는 감정이 짙게 배 나오는 법이니까.
하지만 성필은 훨씬 더 섬세하게 멤버들의 감정을 파악하는 게 가능하다.
그런 성필이 듣기에, 통화할 당시 백설하는 거의 패닉 상태였었다.
“…….”
백설하는 대답 대신 침묵만을 내보냈다.
그녀는 성필이 멤버들의 감정에 영향을 받는단 사실을 알았다. 멤버들이 기뻐하면 기뻐하고, 슬퍼하면 슬퍼한다.
그런 성필에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건, 그에게 짐을 지워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항상 침착하게(백설하의 생각) 중심을 잡고 강인한 리더를 연기했었는데…….
“무서, 워서요.”
마침내 백설하가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전에 말씀드렸지만요. ‘서쪽의 오 솔레미오’, 이인성 선생님은 저한테 처음으로 노래를 가르쳐주신 분이에요.”
동네 학원에서의 인연은 백설하의 인생을 크게 바꿔놓았다.
아이돌이 되겠단 포부를 지니고 보컬 학원에 등록한 그녀는, 예상치 못하게 험난한 코스를 밟게 됐다.
성악용 교재로 공부하고, 식단을 관리받고, 아침마다 해야 할 근력 트레이닝까지 전수받았으며, 사소한 습관 하나하나까지 배웠다.
그 모든 게 현재의 백설하를 만들었다.
“처음엔 힘들었지만요, 실제로 노래를 잘 부르게 되니까 나중엔 오히려 좋았어요. 다시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 되시는 분이에요.”
고작 학생 한 명에게 쏟기엔 과도한 정성이었다. 당시 대학생이던 이인성은 젊었던 만큼 열정도 컸던 모양이다.
굳이 석좌교수 직책까지 맡은 것을 보면, 교육이나 연구에도 뜻이 있던 건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저를 격려해주셨던 거예요.”
설하야, 넌 할 수 있어.
세상에 노력으로 안 되는 건 없어.
가장 소중한 건 노래를 사랑하는 마음이야.
네가 빛날 미래를 기다린다.
네 가슴 안에는 태양이 있어.
그 빛을 끌어내기만 하면 돼.
“그게…… 옛날 기획사 연습생이란 건 뭐랄까…….”
“나도 알아.”
백설하는 지금은 사라진 기획사의 연습생이었다. 과거엔 연습생을 심리적, 육체적으로 모질게 대하는 것을 큰 잘못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 당시의 학교만 하더라도 체벌이 당연하다고 했으니.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는 정신 나간 이야기를 선생이든 학부모든, 심지어 학생들도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었다.
세상이 그러하니, 전문 교육자도 아닌 이들이 연습생을 어떻게 대했을지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꿈을 볼모로 잡고, 또한 자신들이 투자한 돈에 눈이 멀어, 연습생을 험하게 대하는 인간들이 많았다.
“제 주변은 그렇게 좀…… 험했거든요. 그 가운데서 이인성 선생님은 굉장히 고마운 분이셨어요.”
백설하는 기획사에서 소개해준 보컬 트레이너를 거부하기까지 했었다.
보컬 트레이닝이라고 해봤자, 여러 명을 모아두고 돌아가면서 노래를 점검하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백설하는 노래만은 사비를 들여 계속 이인성에게 배웠었다.
그러다가, 이인성이 떠나게 됐다.
“아마 외국에 공부하러 간다고 하셨던 거 같아요. 위키백과 보니까 실제로 미국에서 공부하셨구요.”
이인성이 떠나갈 때 백설하에게 한 말이 있었다.
그는 백설하가 ‘저도 선생님처럼 될 수 있어요?’라고 물을 때마다 ‘그건 힘들지!’라며 장난스레 말했었다.
그런데 그날만은 달랐다.
이인성은 백설하에게 말했다.
‘당연히 될 수 있지. 기대할게.’
백설하의 꿈은 아이돌이다.
무대에서 찬란한 빛을 받으며 수만 명의 찬사 속에서 살아가는, 그런 아이돌이다.
하지만 노래로 분야를 좁히면, 백설하의 꿈은 다르게 설명된다.
어렸을 적의 추억이 더해졌기에 실제보다 대단하게 느껴지는 것이겠지만, 당시의 이인성처럼 노래 부를 수 있는 게 백설하의 꿈이었다.
“듣는 순간 몸이 저릿거리고, 귀가 황홀함에 먹먹해지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그런 노래예요.”
그와 헤어지고 십수 년 동안, 백설하는 그러한 노래를 들은 적이 없었다.
백설하는 자신의 기억 속에만 있는, 존재조차 확신할 수 없는 이상향을 쫓아왔다.
“그런데 그 꿈이 진짜 나타났어요.”
백설하는 어제 악몽을 꾸었다.
무대 위에 홀로 선 그녀.
관객석에는 이인성이 앉아 있다. 20대의 모습 그대로 말이다.
백설하는 노래 부른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퍼포먼스다’라고.
노래가 끝나자마자, 이인성은 말했다.
‘실망이구나, 설하야.’
백설하는 울면서 일어났었다.
“다, 당연히 선생님처럼 될 수 있다고, 제가 그렇게 될 수 있다고 해주신 분인데. 기대한다고 해주셨는데…….”
꿈이 직접 ‘실망이다’라고 말한다면, 백설하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일 것이다.
“이기고 싶어요…….”
백설하는 이인성이 ‘더 언노운’이 될 것을 의심치 않았다. 베테랑 가수 주성은 패배하고 이인성의 발밑에 깔릴 것이다.
“1라운드, 2라운드, 3라운드 전부 이기고, 선생님한테 가고 싶어요. 적어도 선생님한테 져야…….”
체면이 살 것이다.
백설하는 위세라를 보고 공포에 떨었었다. 자신도 저런 꼴이 나진 않을까 해서 너무나 두려웠다.
백설하가 허탈하게 웃었다.
“저, 이해하기 힘든 마음이란 건 알아요……. 그렇게나 어릴 때 일을 뭐 그렇게 신경 쓰냐구 생각하실 수도 있단 거, 알아요…….”
백설하는 성필이 이해해주길 바랐다. 그래서 비유를 들었다.
성필이 ‘최고의 아이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어’라고 말한 뒤, 백설하를 몇 년간 떠난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백설하의 무대를 보게 되는 상황인 것이다.
“정말, 저는 정말 절박해요 이사님. 마, 만약 이사님이 저한테 ‘실망이다’라고 말씀하시기라도 하면 저는…….”
거의 신내림 받은 듯 막힘없이 말하던 백설하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저는?”
성필이 물어도 백설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 초 후 더듬더듬 말했다.
“저, 어, 저는, 그으, 많이 슬플 거라구요…….”
“슬프겠지.”
“네에…….”
“근데 내가 미쳤다고 설하한테 ‘실망이다’라고 하겠어?”
“네?”
“하아, 설하야 너는…… 걱정이 너무 많아.”
“네, 네?”
“옛날부터 생각했지만, 설하는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 같아.”
이는 성필만이 아니라 멤버들도 가지고 있는 생각이었다.
소녀연맹이 한 달 휴가를 선언하는 영상에서도, 장하양이 백설하를 떠올리면서 ‘언니는 이상이 너무 높다’고 하지 않았던가.
백설하는 너무나 높은 곳을 바라보기에,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는 법이 없다. 아니, 불만족을 넘어서 자신을 믿기 힘들어한다.
‘설하는 모순적이야. 스스로는 본인의 수준을 알고 있으면서도, 남들은 평가에 박할 거라고 생각해.’
그 간극이 백설하를 괴롭게 한다.
타인의 인정이 표면화되어야만 겨우 가슴을 쓸어내리는 타입이다.
성필이 유난히 백설하에게 애정을 쏟고, 칭찬을 많이 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이인성 선생님이 너를 보면 실망하겠어? 대한민국에 소녀연맹 모르는 사람 찾기가 힘들 거야. 노래를 안 들어보더라도, 소녀연맹이란 이름은 알 사람들이 가득해. 그런 소녀연맹의 리더를, 선생님이 자랑스러워할까 아니면 실망할까?”
“…….”
예상대로 백설하는 쉬이 답을 내지 못했다. 언제는 ‘저는 이미 최고의 아이돌이에요’라고 선언했으면서.
성필은 그런 백설하가 안쓰럽기도 했고 귀엽기도 했다.
‘……귀여워?’
왜 이런 생각을 했지?
항상 귀여움 천재라고 부르다 보니까, 무의식적으로 백설하의 모든 행동이 귀엽다고 느껴지는 건가?
‘언어는 세계를 규정한다더니…….’
싫어하는 사람한테도 ‘저 사람 좋아’라고 반복해서 생각하면 정말로 좋아진다고 한다.
성필의 뇌리에는 ‘백설하=귀여움’이라는 공식이 박혀 있는 듯하다.
“아무튼, 어, 설하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자신감을 가지란 거야. 혹시 내가 너 영입할 때 기억나?”
“……또 그걸로 놀리시려구요?”
앞만 보던 백설하가 드디어 성필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새초롬하게 눈을 흘겼다.
“아라랑 가로 엔터 사람들이 고백해서 데려온 인재라면서 장난치곤 하는데. 나는 널 데려올 수 있었으면 고백은 무슨, 뭐든 했을 거야. 정말로 뭐든지 해서라도 데려왔을 거야.”
“뭐든지……?”
“예를 들면 이벤트 업체 불러서, 전광판에 설하 얼굴 띄우고 꽃잎 흩날리게 하고 폭죽 터뜨리고 무릎 꿇고 꽃다발 주면서 반지까지 꺼낼 수도 있었어.”
“그건 진짜 고백이잖아요?!”
“내 마음이 그랬단 거야. 그러니까, 내가 그때 봤던 빛을 이인성 선생님이 못 볼 리가 없어. 분명 뿌듯해하실 거야. 아니, 이미 네 소식을 듣고 대견해하실 수도 있지.”
“…….”
백설하는 여전히 확신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오히려 아까보다 상태가 더 심각해졌다.
무언가를 상상하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성필이 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성필은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그래. 사람 마음이란 게 알기가 참 어렵지. 호언장담하는 나도, 실은 이인성 선생님이 어떨지 모르겠어.”
“…….”
“설하야, 내 말 듣고 있어?”
“…….”
“설하야?”
“아, 네? 죄, 죄송해요. 잠시 딴생각하느라…….”
성필은 그녀를 이해했다. 이인성에 대한 고민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겠지.
“연애를 예로 들면, 좋아하는 상대의 마음을 알려면 어떡해야 할까?”
“어…… 우리 집에 동그랑땡 먹으러 올…….”
“그래, 그런 방법도 있지. 그런 나사 빠진 제안에 응하는 순간부터 그냥 오늘부터 1일이지. 좋은 은유적 제안이야. 근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 물어보는 수밖에 없단 거야.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없으니까.”
“설마…….”
“직접 뵈러 갈까?”
“안 돼요!”
백설하가 즉시 거절했다.
이인성을 만나는 게 두려운 것인데, 예정된 것보다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에 성필이 간결히 말했다.
“그럼 답 나왔네. 최고의 무대를 준비해서, 꼭 선생님을 뵙자.”
“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는데, 알려줄까?”
백설하는 간절함을 담아 성필을 바라보았다.
“도망가는 거야. 아예 출연을 취소하는 거지. 어때?”
그 순간, 백설하는 깨달았다. 자신이 이인성과의 만남을 두려워하는 것뿐 아니라 기대하고 있단 사실을.
출연을 취소한다? 그런 일은 당하고 싶지도 않고, 당연히 스스로 취소하고 싶지도 않았다.
백설하는 성필이 도망이란 선택지를 알려주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마음을 확신하게 됐다.
‘난 그냥 이사님한테 어리광 부리고 싶었던 거구나…….’
너무 불안해서 어쩔 도리가 없으니, 성필에게 연락해서 약한 소리를 마구 해버렸다.
선생님을 보는 게 두렵고 무섭다니 뭐니.
하지만 결국, 백설하는 이인성을 만나고 싶은 것이었다.
“어때, 취소해줄까?”
성필이 태연하게 말했다.
“제작진 쪽에는 내가 대타 소개해줄 수도 있어. 신뢰를 좀 잃긴 하겠지만. 그래도 설하가 정말 못하겠다면 취소해줄게. 모처럼 휴가기도 하…….”
“아뇨.”
백설하는 이제껏 보여주지 않던 결연한 투로 말했다.
“취소 안 해요. 선생님을 뵐 거예요. 꼭 뵐 거예요.”
성필은 장하단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수는 노래로 말해야지. 선생님한테 시원하게 보여드려.”
“……이사님.”
“응, 설하야.”
“그래도 무서워요오…….”
그날, 성필은 백설하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녀의 실력에 대한 찬송가를 거의 수십 번은 바쳐야만 했다.
* * *
성필은 ‘더 언노운 싱어’를 방영하는 방송국 앞 카페에 있었다.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석 잔째 마시는 중이었다.
근처에는 여러 기획사에서 영업을 뛰러 온 매니저들이 가득했다.
저마다 삼삼오오 어느 PD가 어디로 갔다느니, 무슨 PD는 오늘 기분이 안 좋다느니, 어디 프로그램에 구멍이 났다느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성필의 핸드폰이 울렸다.
[성필아.]
성필의 매니저 친구인 유하음이었다.
그는 현재 담당 아이돌 일로 방송국 안에 있었으며, 동시에 성필의 부탁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이인성이란 사람 방금 들어왔어. 미팅실 가는데?]
“오케이, 땡큐.”
성필은 연락을 받자마자 방송국으로 안으로 향했다.
방송국은 비상사태를 대비해서 외부인이 길을 찾기 어렵도록 설계되어 있다. 하지만 성필은 그런 방송국 내부를 제집 돌아다니듯 다녔다.
이인성이 들어갔다는 미팅룸의 근처에서, 성필은 그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약 30분 후, 이인성은 ‘더 언노운 싱어’ 작가와의 만남을 마치고 미팅룸을 나왔다.
성필은 그의 뒤를 밟았다.
이인성은 바로 돌아가는 대신 방송국 1층의 카페로 들어갔다. 성필은 그의 행동을 쭉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근처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성필이 서글서글 인사하자 이인성은 살짝 놀라선 그를 바라보았다.
이인성은 어린아이처럼 밝은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 이인성이 미소를 지었다.
“네, 안녕하세요.”
“팝페라 가수인 이인성 님 맞으시죠?”
이인성이 놀랐다. 그리고 굉장히 기뻐했다.
“와, 한국 와서 저 알아본 분 처음 봬요! 사, 사인이라도 해드릴까요?”
이인성은 급히 품 안에서 종이와 펜을 꺼냈다. 그는 허둥지둥 종이를 펼치다가 그만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후로도 그는 굉장히 소란스럽게 행동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성필은 어쩐지 백설하가 떠올랐다.
‘뭘까, 이 기묘한 데자뷔는.’
부모와 자식만 닮는 게 아니라 스승과 제자도 닮는 걸까?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박성필입니다.”
이인성은 부탁도 하지 않은 사인을 성필에게 건넸다. 성필은 그것을 웃으면서 받아들고, 다음으로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가로 엔터 박성필 이사님…….”
“네. 소녀연맹이라는 걸그룹 들어보셨나요?”
“어…… 아니요. 죄송합니다. 한국 대중음악 쪽에는 큰 관심이 없어서요. 기분 상하셨다면 사과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아닙니다. 저, 혹시 잠깐 대화 가능하신가요? 정말 짧게도 괜찮은데요.”
“그럼요. 저를 알아보신 분이면 한 시간도 가능하죠.”
다행히 스케줄이 바쁘진 않은 것 같다.
성필은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소녀연맹을 모르는구나.’
일단, 성필은 그 사실을 속 쓰리게 받아들였다.
옛 스승이 제자의 활약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다는, 그런 형편 좋은 이야기는 펼쳐지지 않을 듯하다.
그럼 다음 계획으로 넘어가야겠다.
“설하 기억하세요?”
이인성이 눈빛으로 ‘네?’라고 물었다.
“설, 하. 옛날에 학원에서 보컬 트레이너이시지 않으셨어요?”
“아…… 그건 또 정말 옛날이네요. 그때 가르쳤던 학생인 거죠? 설하.”
성필은 불안하게 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설하는 과거의 우상에게 어떻게 평가받을지 몰라서 무서운 거야.’
그래서 성필은 이 자리에 왔다. 미리 이인성에게서 백설하에 대한 평가를 들으려고 말이다.
‘솔직히 설하의 걱정이 과도하긴 해.’
옛날에 본인이 가르쳤던 아이가 아이돌이 됐다.
심지어 한국은 물론 세계에서도 인지도를 형성한 아이돌이 된 것이다.
이인성이 성악만이 진정한 노래라고 생각하는 외골수가 아니고서야, 백설하에게 실망할 리가 없다.
‘옛 제자가 꿈을 이루고 나타났는데 실망하는 선생이 있을 리가 없어. 심지어 그 제자가 아직도 선생을 존경하고 있다면.’
그건 상식에 가까운 추리였다. 하지만 백설하는 그 상식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니 내가 미리 결론을 낸다.’
그리고 백설하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어, 그녀가 가진 불안을 없애버릴 것이다.
‘먼저, 인성 씨가 설하를 기억하고 있는가.’
이인성이 자신을 기억한단 사실만으로도 백설하는 기뻐할 게 틀림없.
“죄송합니다. 기억이 안 나네요.”
이인성이 쓴웃음을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