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화
“토모다치(친구)…….”
성필은 습관처럼 에리카와 주먹을 맞추었다. 그녀는 해맑게 웃더니, 다음으로는 백설하와 가볍게 포옹했다.
“설하 언니 안녕하세요.”
백설하는 에리카에게 안겨 생각다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째서 에리카가 이 시기에 방송국에 있는 걸까? 케이어스는 앨범 활동기가 지났으니, 방송에 출연하지도 않을 텐데 말이다.
‘설마…….’
최악의 가정이 백설하의 뇌리를 스쳤다.
‘에리카도 더 언노운 싱어에 나오는 거야?’
눈앞에 벽이 나타난 기분이다.
위세라와의 대결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돌고 돌아 또 케이어스와 맞붙게 됐다.
‘……아니야.’
백설하의 눈동자에 빛이 깃들었다.
‘오히려 잘됐어.’
노래라면, 오직 노래뿐이라면 자신은 케이어스에 지지 않는다. 케이어스의 누구와 비교하더라도, 최소한 뒤떨어질 일은 없다.
백설하는 그리 자신했다.
‘여기서 확인하자.’
백설하는 HPT 뮤직 어워드가 끝났을 때를 바로 어제 일처럼 기억한다.
그때도 에리카가 갑자기 성필에게 ‘토모다치’라고 말하며 다가왔었다. 그리고 성필을 이끌고 주차장 구석으로 갔다.
잠시 후, 귀가 번쩍 뜨이는 에리카의 노랫소리가 들려왔었다. ‘음악을 위한 동행’ 때는 능력을 숨겼던 것이었는지, 그때보다 훨씬 발전한 기교였었다.
‘하지만 안 져.’
에리카가 상대라도 움츠러들 일은 없다. 오히려 빨리 맞붙고 싶다.
백설하는 강렬한 투쟁심을 느꼈다. 위세라에겐 미안하지만, 그녀와 마주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어쩌면 위세라가 자신을 볼 때 이런 감정이었지 않았을까.
“응.”
백설하가 약간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 에리카.”
에리카는 백설하와의 포옹을 풀었다. 그러자 성필이 기다렸다는 듯 질문했다.
“촬영 있으세요?”
백설하는 기대를 담아 에리카의 답을 기다렸다.
“네, 라디오요.”
백설하의 몸에서 힘이 쫙 빠져나갔다.
“멤버들이랑 같이 왔어요. 지금은 촬영 끝났고요. 언니는 왜 오셨어요?”
“나, 나?”
백설하는 성필을 보았다. ‘더 언노운 싱어’ 출연 사실을 밝혀도 괜찮겠냐는 뜻이었다.
성필이 고개를 저었다.
‘더 언노운 싱어는 출연자들끼리도 정체를 모르니까. 예외적으로 1라운드 듀엣 무대를 준비한 상대를 제외하곤, 누가 나왔는지 모르고 무대에 오르지.’
외부에도 출연 사실이 밝혀지는 건 피해야 했다. 정체를 밝히지 않는 게 아이덴티티인 프로그램인데, 출연자가 출연 사실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건 실례니까.
“방송 미팅 있어서 왔어요.”
에리카는 싱긋 웃을 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관심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백설하를 배려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또 언니랑 프로그램 한번 촬영하고 싶네요. 언니 일본에서 돌아오셨을 때 예능 많이 나오셨었잖아요.”
“응, 그랬었지.”
“국뽕연맹이라고 불리시고요.”
백설하는 뭐라 답할 수가 없었다.
소녀연맹이 당시 국뽕의 대명사처럼 된 건 일본에서의 성과 때문이었으니까.
일본 대표 가수라고 할 수 있는 세이코를 이긴 게 소녀연맹이다. 그것을 일본인인 에리카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우리 경연 전에 세이코 선배 팬이라면서 아이튜브 커버 영상도 올렸었지.’
그것을 보고 새삼 세이코란 가수가 대단하단 것을 깨달았다.
일본의 90년대생들에게 세이코는 어린 시절 추억의 큰 부분이 아닐까 싶다.
백설하가 2세대 아이돌 노래를 들으면 학생 시절이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때 뵀으면 좋았을 텐데요. 아! 제가 너무 오래 잡고 있었나요? 바쁘신 거 아니에요?”
“아냐, 아직 시간 더 있어.”
“맞다. 언니 멋졌어요.”
“응?”
에리카가 기타를 연주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일렉 기타요.”
“아…… 콘서트? 재밌게 봤어?”
“네. 재밌었어요.”
이후, 둘은 콘서트를 주제로 이야기했다.
백설하는 처음 에리카에게 품었던 투쟁심은 온데간데없이 즐겁게 대화했다.
헤어져야 할 시간이 오자 에리카는 아쉽단 듯 백설하의 손을 꼭 맞잡았다.
“언니 다음에 꼭 다시 봐요.”
“응!”
“그리고 박 이사님.”
“네?”
“소유가 저한테 부탁한 건데, 딱히 박 이사님한테 말씀드릴 생각은 없었거든요. 그래도 이왕 박 이사님 만났고, 약속을 어기는 것도 그러니까, 말할게요.”
성필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떴다.
진소유가 자신에게 부탁할 만한 게 있나?
“하양 언니한테 KS 엔터로 찾아오시라고 말씀 좀 전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아.”
무슨 소리인지 금방 이해했다.
‘소유 씨가 하양이한테 케이어스 앨범이랑 굿즈 준다고 했었지. 아직도 하양이는 그거 받으러 안 갔구나…….’
진소유는 열정이 대단했다.
어찌나 대단한지 앨범을 전해주러 직접 소녀연맹의 숙소까지 가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장하양의 철벽 때문에 끝끝내 숙소 위치는 알지 못했다.
“네, 하양이한테 전할게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시간 괜찮으시면, 하양 언니 오실 때 박 이사님도 같이 와주실래요?”
“저요? 제가요?”
“네, 저 보러요.”
백설하가 경악하여 둘 사이를 번갈아 보았다.
성필도 당황한 건 매한가지였다.
“왜……?”
“왜라뇨. 토모(친구) 보러 오는 데 꼭 이유가 필요한가요? 아니면, 박 이사님 혹시 친구가 놀러 오라고 하면 ‘왜?’라고 물으시나요?”
성필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이에요.”
에리카가 기뻐하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사실 이유가 있죠. 제가 노래 불러드릴게요.”
백설하가 다시 한번 경악했다.
세상에, 케이어스가 개인적으로 노래를 불러준다고? 대체 왜? 뭐 사랑의 세레나데라도 불러주려고?
“전보다 더 잘 부르니까, 기대해주셔야 해요. 꼭 박 이사님이 감동해서 우시도록 노력할게요.”
“울어야 해요?”
당연한 거 아니야? 진저 노래 듣고는 울었으면서 내 노래로는 안 울어? 말이 안 되잖아? 울어야 하냐고? 울어야 하냐고? 울어야 하냐고 물었어? 굳이 물어야 알아?
“하하, 굳이 우실 필요는 없죠. 리카랑은 잘 지내시죠?”
“리카랑은 항상 똑같죠.”
“응원할게요.”
에리카는 마지막으로 성필과 주먹을 맞부딪치고 떠나갔다. 성필은 사라지는 에리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백설하가 해명을 요구했다.
“왜 에리카가 이사님한테 노래를 불러준다고 해요……?”
“연습이야.”
“네?”
백설하는 성필이 부질없는 변명이나 할 줄 알았다. 케이어스와는 지극히 건조한 관계이니, 팬과 아티스트의 관계이니, 자기는 소녀연맹뿐이니, 그런 것들 말이다.
그런데 나온 답은 이해할 수 없는 ‘연습이야’였다.
“설하야, HPT 뮤직 어워드 끝나고 기억해? 주차장에서.”
“……네.”
“그때 에리카 씨가 말하더라고. 손에서 놓지 않고 싶은 걸 찾았다고. 너희한테 1위 한번 뺏겨보고 알았대.”
에리카는 최고의 자리를 바란다.
“그런 거 알아? 수십 판 내리 지다가 한번 이긴 사람이 ‘너 나한테 졌잖아, 이젠 너랑 안 해’라고 하는 거. 에리카 씨는 수십 판 내리 이긴 사람인데, 제 발 저린 거 때문에 자꾸 나한테 저러시는 거야.”
비록 한 번 졌지만 여전히 케이어스는 최고라고. 자신이 그 증명이라고.
에리카는 성필에게 계속 어필한다.
어찌 보면 어린애 같은 사고방식이다. 동시에 프로 메달리스트도 가지기 힘든 탁월한 경쟁심이다.
“내가 영원히 인정하지 않을 걸 아니까.”
“뭘요……?”
성필은 맑게 웃으면서 백설하가 앞으로 나아가도록 부드러이 등을 밀었다.
“케이어스가 최고라는 거.”
“…….”
“어떻게 케이어스가 최고겠어?”
소녀연맹이 있는데 말이다.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은 없다.
소녀연맹이 있는 한, 케이어스는 영원히 태양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알겠…….”
“그래서 에리카 보러 KS 엔터 가실 거예요? 하양이가 KS 엔터 갈 때 같이요?”
“……뭘 그런 걸 물어보고 그래.”
성필이 결연히 답했다.
“당연히 가야지.”
“…….”
백설하는 리카에게 전화하여 사건 개요를 짧게 전달했다. 그리고 통화를 스피커 모드로 바꾼 후 성필에게 내밀었다.
[우라기리모노(배신자)!]
“응 네가 뭐래도 무조건 갈 거야. 막을 테면 막아보든가.”
[어쩔 수 없네요. 이 순간부터 박 이사님 보이콧에 들어갑니다! 아타시(저)랑 24시간 동안 말할 생각 하지 마세요!]
“24시간 동안 리카 목소리 못 듣는 거야? 그건 너무하잖아. 벌써부터 쓸쓸해…….”
[……톡이랑 문자는 돼요!]
“쉽네.”
[저한테 하신 말씀인가요?!]
* * *
‘더 언노운 싱어’ 미팅은 4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을 법한 작은 방에서 진행됐다.
제작진 측에서 온 건 작가 한 명뿐이었다.
“안녕하세요 박 이사님.”
작가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성필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성필은 잠시 그가 누구인지 떠올리는 시간이 필요했다.
“……아, 정재성 작가님!”
“하하,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리카가 ‘프로젝트 포유’에 나가는 게 결정되었을 적, 리카를 인터뷰하러 왔던 작가였다.
“우와, 공중파 오셨구나.”
“감사합니다. 어쩌다 보니 또 경연 프로그램 맡게 됐네요. 제가 경연이랑 연이 깊나 봐요. 이야, 시간 정말 빨라요. 처음 가로 엔터 갔을 때 놀랐던 게 어제 같은데요.”
“놀라셨다고요?”
“소녀연맹 멤버분들이 클래식인가? 그거 강의 듣고 계셨을 때요.”
“아…….”
한구인의 음악사 수업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땐 아름 씨가 없으셨네요. 아무튼, 이렇게 잘돼서 다행입니다. 국뽕연맹!”
정재성 작가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자 백설하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저 국뽕연맹이란 이름은 들어도 들어도 익숙해지지를 않았다.
성필과 정재성은 반가운 해후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미팅에 들어갔다.
“일단 기본적인 프로그램 구조부터 말씀드릴게요.”
백설하는 운이 좋다면 총 3라운드를 치르게 될 것이다.
1라운드에선 듀엣 무대로 승패를 가린다.
“예외적으로, 듀엣 무대를 펼치는 분의 정체만 알게 될 거예요. 일주일 정도 같이 연습할 텐데, 그동안 계속 가면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그렇죠. 답답할 테니까요.”
“원하시면 철저하게 정체 숨기셔도 돼요. 같이 모여서 연습할 때도 가면이나 마스크, 선글라스 쓰고 계신다거나요.”
“그런 분이 있으셨어요……?”
“놀랍지만, 있으셨습니다. 굉장한 신비주의자셨어요. 덕분에 듀엣 상대분도 방송 나가기 전까지 어떤 누구랑 싸웠는지 모르셨어요.”
그건 그것대로 대단한 일이다.
왜 그렇게나 정체를 숨기고 싶어 했던 것일까.
“1라운드 듀엣 무대엔 저희가 랜덤으로 곡을 드려요. 기본적으로 저희 작가팀이 회의를 통해 결정하는데요. 출연자분들의 개성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곡으로 준비할 겁니다.”
정재성은 질문이 있으면 하라는 듯 백설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백설하는 궁금하던 것을 바로 물었다.
“편곡은 어떻게 진행하나요?”
‘더 언노운 싱어’의 무대는 원곡을 그대로 사용하기보다, 퍼포머의 특성에 맞게 편곡하는 경우가 많다.
편곡은 퍼포머의 보컬만큼이나 승부에 큰 영향을 끼치곤 했다.
“듀엣 상대분이랑 의논해서 정하시면 돼요. 저희 방송국 쪽에서 따로 편곡 인력과 컨택해드릴 거고요. 상대분이랑 합의가 있으면, 잘 아시는 편곡가한테 맡기셔도 됩니다.”
백설하는 정지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가로 엔터의 인물이니, 상대편이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팔은 안으로 굽는단 속담이 있지 않은가.
백설하와 같은 회사의 인물이 편곡자가 되면, 상대편은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혹여나 백설하에게 너무 유리한 판이 깔릴까 봐 말이다.
“‘더 언노운 싱어’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판정단 투표로 그 자리에서 바로 결과가 나와요.”
“지면…….”
“지면 가면 시원하게 벗으시고, 노래 한 번 부르시고, 또 시원하게 퇴장하시면 됩니다.”
씁쓸한 결말이다.
하지만 1라운드에서 탈락한다고 크게 속 쓰릴 필요는 없다. 유명 가수조차 1라운드에서 탈락한 케이스가 허다했으니 말이다.
“2라운드부터는 본인이 직접 고른 곡으로 무대에 서실 거예요. 여기서부터는 쉽습니다. 그냥 준비하신 곡을 부르면 되니까요. 3라운드 결승도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이렇게 3라운드까지 올라가면 대망의 더 언노운 흥…….”
“주성 선배님이랑 붙는 거죠?”
“……‘흥미만발 재미만발 딴따라’랑 붙으실 겁니다. ‘더 언노운’이 이번 회차에 바뀌지만 않으면요.”
“아, 네, 그, 그렇네요.”
이게 ‘더 언노운 싱어’란 프로그램의 구조이다. 이후로도 정재성은 주의사항이나 참고사항을 정성 들여 설명했다.
“다음으로 의논해야 할 건 설하 씨의 예명이랑 가면 디자인인데요. 미리 생각해두신 거 있나요?”
“음, 딱히 없어요.”
“그럼 저희가 알아서 준비할 건데, 괜찮으시겠어요?”
정재성은 백설하와 성필을 번갈아 보았다.
그때 성필이 목청을 가다듬으며 이목을 끌었다.
“혹시 ‘노래도 잘 부르는 귀여움 천재’ 어떨까요?”
“그거 진짜 하는 거예요?!”
“오, 좋네요.”
“좋다고요?!”
“이게 원래 약간 B급 감성 들어가는 게 좋거든요. 맥락 없는 예명이 대세랄까.”
“…….”
“본인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도 좋지만, 아예 반대로 가는 것도 좋아요.”
정재성은 오직 백설하의 외면만 보았다. 그녀의 귀여움을 모르기에, ‘귀여움 천재’란 예명은 그녀의 정체성과 반대된다고 생각했다.
“그럼 ‘노래도 잘 부르는 귀여움 천재’로 갈까요?”
“네, 그렇게 부탁드립니다.”
“…….”
백설하는 할 말이 많단 듯 입술을 뻐끔거렸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아 몰라. 될 대로 돼라.’
이렇게 된 이상 연기할 수밖에 없다.
귀여움 천재를!
대체 자신이 얼마나 귀엽단 건지는 모르지만, 아니. 분명 회사 사람들과 멤버들이 씌운 프레임이겠지만, 이렇게나 집요하면 한 번쯤 어울려 줄 수도 있다.
“네, 될게요. 귀여움 천재.”
백설하가 성필과 정재성에게 번갈아 윙크했다. 그 모습이 눈꺼풀 경련이 온 사람 같아서 이상하게만 보였다.
두 사람 다 대꾸 대신 말없이 수첩에 필기하는 척했다.
“…….”
모처럼 귀여움 천재가 되기로 했는데, 반응이 없자 백설하는 울적해졌다.
세 사람은 가면 디자인에 대해 30분 정도 토의했다. 결과, 보기만 해도 귀여운 곰돌이 모양의 가면으로 결정됐다.
“그런데에…… 그, 정체를 안 들켜야 하잖아요?”
정재성이 곤란한 투로 말했다.
“좀 신체적 특징도 가릴 수 있게…….”
“신체적 특징요?”
백설하는 아래를 보았다. 자신의 가슴을.
“네.”
백설하가 뭐라 하기 전에 성필이 재빨리 말했다.
“의상은 품이 넓고 하늘하늘한 쪽으로 할게요.”
만약 백설하가 아이돌리시한 복장을 입으면, 그녀의 실루엣만으로 정체를 유추하는 사람이 생길 것이다.
아니, 소녀연맹 백설하를 안다면 가면을 쓰더라도 못 맞출 수가 없다. 반드시 들킨다.
그만큼 백설하의 존재감은 압도적이다.
“저, 그…….”
회의가 끝날 기미가 보이자, 백설하는 줄곧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전(前) 회차 촬영은…… 끝났나요?”
“전 회차?”
정재성은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전 회차 때 아시는 분이 나왔나 보네요.”
“아니, 아니, 그게, 어…….”
“누군지 짐작은 가요.”
“…….”
백설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가 전 회차 출연자 중 알 인물이라면, 같은 아이돌 출신인 위세라밖에 없을 것이다.
정재성은 그리 예상하는 듯했다.
‘내, 내가 잘못한 거겠지……?’
위세라가 본인의 출연 사실을 타인에게 알렸단 의미가 될 터이니, 혹시나 불이익이 있지는 않을까.
백설하가 명확하게 말하진 않았지만, 충분한 암시는 됐다.
“괜찮아요. 지인들한테 말할 수도 있죠. 저희 제작진이 유출 경험이 너무 많다 보니, 이 정도는 애교로 받아들여요. 어디 보자, 전 회차는 곧 촬영 들어가요. 촬영한 건 3주에 걸쳐서 방영되고요.”
“……감사합니다.”
회의가 끝나고, 성필과 백설하는 방을 나섰다.
“이사님.”
“응?”
“세라, 결승까지 오를까요? 주성 선배는 이길까요?”
“흐음…….”
누구든 그렇겠지만, 성필은 쉬이 결과를 점칠 수 없었다.
위세라의 보컬은 아이돌계에서 수준급이다. 성필이 나오기 직전의 석세스 엔터에서도, 기교로는 위세라에게 손댈 부분이 없다고 판단했을 정도니까.
“모르겠네. 여차저차 결승까지 올라갈 확률은 꽤 된다고 생각해.”
“세라를 좋게 보시네요.”
“노래 잘 부르니까.”
기획자들 사이에서 메인 보컬이 될 인재는 비주얼적으로 모자란 부분이 있어도 꼭 영입하란 말이 있다.
메인 보컬의 존재가 음악의 승패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세라는 연습생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부동의 메인 보컬 후보였지.’
백설하가 부단한 노력으로 현재의 수준에 이르렀다면, 위세라는 아예 노래 실력을 타고났다.
노래방 가는 것을 좋아할 뿐이었던 위세라.
그녀는 혼자 노래를 연습하면서 온갖 안 좋은 버릇과 습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노래를 처음 듣고, 성필은 위세라의 성공을 확신했었다.
‘세라는 수백 마력(馬力)의 괴물 머신이나 다름없었어. 녹이 슬어 있고 부품이 몇 개 잘못 조립되어 있었을 뿐.’
그리고 그녀는 석세스 엔터에서의 고된 트레이닝을 거치면서 말끔하게 다시 태어났다.
마침내 자신의 본래 능력을 모두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설하가 무(無)인 상태에서 탑을 쌓아 올라갔다면, 세라는 이미 쌓인 탑에서 불필요한 걸 덜어내는 과정을 거쳤어.’
어느 쪽이 보컬리스트로서 역량이 뛰어날지, 성필도 주목하는 바였다.
“……이사님.”
“응?”
“이번에는 안 말해주시네요.”
“어, 뭘?”
“평소에 제가 이런 질문을 하면…….”
백설하가 은은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저를 믿는다고, 제가 이길 거라고…… 해주셨었는데…….”
“…….”
둘은 침묵 속에서 걸었다.
그 시간이 성필에게도, 백설하에게도 매우 길게 느껴졌다.
그때 성필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러면 안 되지.’
백설하가 상대해왔던 건 명백한 외부 세계였다. 그렇기에 성필은 그녀가 세계를 상대로 싸우더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응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상대는 글로브의 위세라였다.
성필의 마음속에 아직도 깊게 자리하고 있는, 그의 아픈 손가락이다.
하지만 이젠 그래선 안 된다.
“내가 지켜본 바로는, 설하가 이겨. 이길 거야. 그렇게 믿어.”
“엎드려 절받기잖아요…….”
“무슨 소리야. 미래에 돔 투어로 100만 관객을 동원할 아이돌을 누가 이기겠어? 애초에 물어볼 필요도 없지.”
“……하여튼.”
백설하는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옆에서 걸어가는 성필의 어깨를, 자신의 어깨로 장난스레 툭 쳤다.
“말만 잘하시네요.”
백설하도 성필이 한 것처럼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그럼요. 누가 저를 이기겠어요.”
최고의 아이돌.
미래에 돔 투어로 100만 관객을 동원할 뮤지션을, 감히 누가 이길 수 있을까.
* * *
‘더 언노운 싱어’의 촬영은 점심이 지난 낮부터 밤까지 이어진다.
위세라는 아침에 회사로 와서 초조한 시간을 보냈다. 오늘만큼은 윤상열도 위세라에게 시간을 의미 없이 보낸다며 뭐라고 하지 않았다.
위세라는 아티스트 휴게실의 소파 한구석을 차지하고, 계속 만트라(확신, 집중, 깨달음을 위해 반복해서 말하는 짧은 단어나 어구)를 외웠다.
“나는 이겨. 나는 이겨. 나는 이겨. 나는 이겨. 나는 이겨. 나는 이겨. 나는 이겨. 나는 이겨. 나는 이겨. 나는 이겨. 나는…….”
이긴다.
위세라는 눈꺼풀을 천천히 내렸다. 어두운 장막에 성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긴다, 이겨서.’
위세라가 눈을 번쩍 떴다.
‘팀장님이 후회하게 만들 거야.’
그러니 세상아 보아라. 알려라. 나의 승리를.
위세라는 벌떡 일어나 휴게실을 나섰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던 도중, 위세라는 윤상열과 마주했다.
“안녕하세요.”
“어.”
윤상열은 무심하게 위세라를 지나쳐갔다.
둘이 교차하는 순간, 위세라가 걸음을 멈추었다.
윤상열은 위세라의 ‘더 언노운 싱어’ 출연 사실을 안다. 그럼에도 아무런 격려나 응원, 하물며 ‘우승 못 하면 안 된다’라는 흔하디흔한 협박도 없었다.
윤상열은 위세라에게 큰 기대가 없는 것이다.
‘윤 PD님이 나한테 관심 있을 때는, 글로브의 퍼포먼스가 관련되었을 때뿐.’
즉, 도구로써 사용할 가치가 있을 때뿐이다.
그 사실이 새삼스레 슬프지는 않다.
윤상열과 지낸 시간이 오래되어, 위세라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도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윤상열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인 도구지만, 그래도 알아줬으면 한다.
“PD님.”
위세라가 그를 부르며 뒤로 돌아보았다.
윤상열도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짜증스레 고개를 돌려 위세라를 바라보았다.
“저 오늘 ‘더 언노운 싱어’ 촬영 가요.”
“알아.”
차갑기 그지없는 말투다.
만약 성필이었다면 격려해줬을 텐데. 기대해줬을 텐데.
물론 윤상열에게 그런 따스함을 바라지는 않는다. 그에게 무지갯빛 기대를 품는 건 이제 그만두었으니까.
기대를 품었다가 좌절한 적이 너무 많고, 그에 따라 상처도 많이 품었으니까.
‘그러니까 이제 머리가 꽃밭인 기대 따위 하지 않아. 언젠가 윤 PD님이 우리한테 친절해질 거라고, 우리를 존중해줄 거라고. 그딴 기대는 절대 안 해.’
하지만, 알아줬으면 한다.
비록 글로브는, 자신은 도구지만, 그렇기에 알아줬으면 한다.
“이기고 올게요.”
당신이 다루는 도구는, 당신이 평가하는 것만큼 쓸모없지 않다고.
딱 거기까지만 바란다.
“…….”
윤상열은 대답 없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갈 길로 향했다.
위세라도 별다른 말 없이 다시 가던 길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매니저와 함께 방송국 스튜디오로 갔다. 듀엣 상대와 함께 좁은 대기실에서 함께 기다렸다.
상대는 30대 후반의 남자였다. 그 외엔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모르는 걸 보면 유명한 사람은 아니야.’
‘더 언노운 싱어’에는 언더씬의 가수들도 간간이 나온다. 저 남자도 그런 인물일 것이다.
위세라는 괜히 상대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어차피 대단한 인물은 아닐 것이고, 대단한 인물이더라도 문제이다. 위세라는 상대의 명성에 겁을 집어먹는 타입이니,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이다.
“저, 세라 씨 죄송합니다.”
상대는 침묵을 견디기 버거운지 헐거운 미소를 지으면서 사과해왔다.
“네?”
“제 컨디션 때문에 듀엣 연습도 따로 못했잖아요. 반성하고 있습니다. 가수로서 컨디션 관리는 기본인데.”
“아, 네에.”
“아휴, 죄송해서 면목이 없네요. 그래도 제가 무대 동선이랑 연출, 파트 배분은 완벽하게 외웠습니다. 간단하기도 하고요.”
그의 사과는 매니저를 통해서 여러 번 들었다. 처음 대기실로 왔을 때도 들었고 말이다.
굳이 다시 이야기할 필요는…….
“아.”
위세라는 자신의 매니저가 취한 제스처를 보고, 상대가 또 사과한 이유를 알았다.
매니저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훑는 동작을 하고 있었다.
‘내 표정이 문제였구나. 계속 저분을 째려봐서…….’
상대도 한참이나 어린애가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니,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니었을 것이다.
“저, 지금이라도 맞춰볼까요?”
상대가 제안했다.
위세라는 고민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리허설 가서 맞추면 되죠.”
다른 출연자와 다르게, 위세라와 상대는 같이 듀엣 연습을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기실에서 급하게 맞춰보긴 싫었다.
아예 모르는 채로 오르는 게 멘탈적으로 나을 것이다.
‘나의 리듬을 유지하자.’
위세라는 눈을 감고 자기암시를 걸었다.
‘이겨야 하는 이유.’
성필이 떠오른다. 그를 후회하게 해줄 것이다.
윤상열이 떠오른다. 그의 인정을 얻어낼 것이다.
소녀연맹이 떠오른다. 그녀들을 이길 것이다.
마지막으로 글로브. 사랑스러운 우리 멤버들.
‘이겨야만 해.’
이곳에서의 승리는 글로브가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는 발판이 될 것이다.
‘나는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노래를 불러왔어. 무대에 서기 위해서, 목에 피가 맺히도록 노래를 불러왔어.’
그러니 쓰러지지 않는다.
넘어지지 않는다.
패배하지 않는다.
“나는, 이겨.”
만트라를 작게 읊조리며, 위세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태프의 안내를 따라 무대로 향했다.
리허설이다.
아직 연예인 판정단과 방청객은 오지 않았다.
위세라는 익숙하게 인이어를 점검하고 마이크를 부드럽게 손에 쥐었다.
하지만 상대는 인이어를 몸에 다는 스태프의 손길을 어색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딱 봐도 무대 경험이 없는 듯했다.
‘대체 뭐야 저 사람은?’
뭐, 됐다.
무대 경험이 없다면 가수로서 그리 인지도가 있는 편은 아니란 거겠지. 아니, 아예 없을지도.
어쩌면 배우일 수도 있겠다. 배우들도 ‘더 언노운 싱어’에 인지도 벌이를 위해서 나오곤 하니까.
[리허설 시작합니다.]
스태프가 위세라에게 마스크를 씌웠다. 그녀의 예명은 ‘승리의 여신 니케’였다. 가면 또한 니케를 본따서 만들었다.
‘나는 이긴다.’
노래가 흘러나온다.
고음역대가 인상적인 00년대 초반 발라드 록밴드의 곡이다. 웬만한 가수도 소화하기 어려워하는 곡이다.
하지만 위세라는 연습생 때 이미 마스터한 곡이었다.
‘나는 이긴다.’
위세라는 눈에서 불꽃을 태웠다. 마이크를 자연스레 잡고, 대본대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1절의 시작을 장식하는 건 상대다.
상대인 남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면서 마이크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 모습조차 어설프고 웃기기 짝이 없다.
‘이겼다.’
그 모습을 보고 확신했다.
상대는 가수는커녕 노래방조차 가본 적이 없는 인물이다.
위세라는 가면을 써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면 자신의 비웃음이 카메라에 찍혔을 테니까.
‘1라운드는 거저로 이겼…….’
그 순간, 위세라의 시야가 불타올랐다.
귀가 타오른다.
모든 감각이 선명하게 연소(燃燒)한다. 산소를 처음 만난 불씨처럼, 위세라의 감각은 거대한 불길과 빛에 잠겨서 타오름을 반복했다.
위세라는 귀와 눈을 덮친 빛을 보면서 생각했다.
‘태양이다.’
저 노래는, 태양이다.
* * *
소녀연맹은 위세라가 출연한 ‘더 언노운 싱어’를 함께 모여 보았다.
1라운드 첫 번째 무대에는 ‘승리의 여신 니케’, 즉 위세라가 나왔다.
상대는 ‘서쪽의 오 솔레미오’란 예명을 썼다.
“어, ‘오 솔레미오’ 학교 음악 시간에 배웠던 거 같은데.”
조아라는 그 단어의 뜻을 기억하려 애썼다. 그때 백설하가 답했다.
“‘나의 태양’이란 뜻이야. 이탈리아어고.”
“쌤 이탈리아어도 알아요?”
“학교에서 ‘오 솔레미오’로 가창 시험 봤었거든. 거기서 나 만점 받았었어.”
‘오 솔레미오’란 단어를 보니, 백설하는 추억 속에 잠겼다.
당시엔 노래를 본격적으로 배우던 때였기에, 백설하의 ‘오 솔레미오’는 단연 반에서 가장 뛰어났다.
음악 선생님조차 기립 박수를 보냈으니, 백설하의 실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시작한다.”
장하양이 말하자 다들 텔레비전에 집중했다.
고난도의 록 발라드 전주가 흐르자, 멤버들은 ‘오오’ 소리를 내면서 감탄했다.
가로 엔터에서도 과제곡으로 다뤘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멤버들은 저 곡이 얼마나 끔찍하면서 어려운지 잘 알았다.
한번 부르면 목이 쉴 정도였으니.
“세라인가 걔가 저걸 부를 수 있…….”
순간, 다들 입을 다물었다.
화면에선 ‘서쪽의 오 솔레미오’가 노래하고 있었다.
전기 신호를 받고 소리로 변환되어 나오는 노래는, 마치 오페라 극장에서 듣는 듯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약 20초간 노래한 ‘서쪽의 오 솔레미오’가 차례를 위세라에게 넘겼다. 위세라는 몇 걸음 앞으로 나와서,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빛이 훨씬 약하다.
상대에 비하면, 위세라는 빛이 바래 있다.
“뭔데. 저 사람.”
조아라는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입은 ‘서쪽의 오 솔레미오’에 대한 감탄을 말했지만, 내심 위세라를 불쌍히 여겼다.
아니, ‘서쪽의 오 솔레미오’와 붙게 될 모든 출연자가 불쌍할 지경이다.
“진짜배기 가수가 나왔…….”
“쌤…….”
다들 백설하를 보았다.
“네?”
방금 백설하가 ‘쌤’이라고 했었다.
그 단어를 백설하가 쓰니 위화감이 엄청났다. 모두의 쌤인 백설하가, 다른 누군가를 향해 ‘쌤’이라고 부르니 말이다.
“쌤, 선생님…….”
조아라는 어리둥절하여 텔레비전에 비친 남자를 가리켰다.
“저 사람이요?”
백설하가 미세하게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이야. 내, 선생님…….”
태양을 삼켜라. 그리고 빛을 노래해라.
백설하에게 이 말을 가르쳐주고, 백설하에게 처음으로 노래를 가르쳐준.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