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84화 (384/760)

384화

“설하야, 소녀연맹 멤버들 포지션 한번 말해볼래?”

백설하는 손가락을 하나씩 짚어가면서 답했다.

“저는 메인 보컬이구…….”

리카는 리드 보컬, 리드 댄서.

신아름도 리드 보컬, 리드 댄서.

조아라는 메인 댄서, 서브 보컬.

장하양은 메인 래퍼, 서브 보컬, 메인 비주얼.

“설하야, 메인 비주얼이란 포지션은 없어.”

“네? 아, 네, 그렇네요…….”

장하양이 매일 ‘저는 메인 비주얼이니까요’ 같은 말을 하고 다녀서, 백설하는 자기도 모르게 메인 비주얼이란 포지션이 진짜 있는 거라고 생각해버렸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하양이가 메인 비주얼이면 나는 리드 비주얼이나 서브 비주얼인가…….’

애초에 개성이 명확한 비주얼에 등급을 가리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뭐, 그치. 네가 말한 게 맞아.”

성필은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갔다.

“하이라이트는 설하가 부르고, 랩 파트나 저음역대는 하양이, 도입부랑 브릿지에선 아라가 많이 들어가고, 아름이랑 리카는 벌스에서 자리를 많이 차지해.”

“네에…….”

“여기서 질문. 이 구성의 문제점이 뭘까?”

문제점?

백설하는 교수에게 질문받은 학생처럼 골똘히 생각을 거듭했다.

‘우리 포지션의 문제점?’

…….

그다지 떠오르는 게 없다.

개인적으로, 백설하는 소녀연맹의 구성이 거의 완벽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음악적으로 이만큼 각자의 역할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경우는, 걸그룹 전체를 통틀어도 매우 드물 게 분명하다.

‘리카랑 아름이가 결정적이지.’

리드 보컬인 둘은 노래의 허리가 되어준다.

벌스에서 하이라이트로 이행하는 부분을 부드럽게 이어주어, 곡에 위화감이 없도록 만든다.

‘저마다 개성도 뚜렷하고.’

무엇 하나 문제랄 부분이 없는데…….

백설하는 모르겠단 뜻으로 헤헤 웃었다.

그녀의 답을 진지하게 기다리던 성필은 참지 못 하고 픽 웃었다.

“설하야, 곤란할 때 웃지 마.”

“네, 네?”

“귀여워서 나도 웃음이 나오네. 그럼 설하 포지션 하나 추가할까?”

메인 큐트.

“싫어요!”

“그래. 아무튼 이 구성의 문제점은, 구성이 있단 것 자체가 문제야.”

“……?”

“노래의 구간을 각자의 타입에 맞춰서 세분화하는 건 그 자체가 문제라고.”

설령 소녀연맹이 장르적, 음악적으로 전혀 다른 노래를 시도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비슷하게 들릴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모든 노래에서 같은 구성을 가지고 갈 테니 말이다.

“소녀연맹 노래를 많이 듣는 사람들은, 설령 신곡이더라도 ‘여기서 설하가 나오겠네’라거나 ‘여긴 하양이가 나오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어. 예측 가능성이 생기는 거야.”

“하,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곡의 하이라이트에 장하양이나 조아라를 넣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혹은 무겁게 목소리를 내리깔아야 할 때 리카를 집어넣을 수도 없다.

곡의 조화와 완성도를 해칠 테니까.

“그야 멤버들이 다 보컬 능력이 뛰어나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럴 수 없잖아요.”

백설하는 소녀연맹의 리더다. 그리고 리더로서, 성필의 주장이 불합리하게 들렸다.

오케스트라 구성의 곡이 다 비슷비슷하게 들린다고, 교향곡에서 리듬을 담당하는 콘트라베이스를 멜로디라인에 세울 수는 없지 않은가.

“애, 애초에…….”

백설하는 소심하게 반항했다.

“아이돌이 음악의 완성도를 유지할 수 있는 건, 멤버들이 가진 출중한 능력을 부각하기 때문이잖아요…….”

“보통은 그렇지. 너희를 뽑을 때 음악적 조화를 고려한 것도 사실이야. 그런데, 설하야.”

성필은 곤란하단 기색을 내비쳤다.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게 미안하기 그지없단 듯했다.

그럼에도 성필은 말했다.

“케이어스 멤버들의 포지션을 말해볼래.”

“…….”

백설하의 머리가 비었다.

케이어스 멤버들의 포지션?

“케이어스는…….”

그 답을 알기에, 백설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포지션을…… 따로 안 정해뒀어요…….”

“맞아.”

케이어스는 공식적으로 포지션을 알리지 않고 있다. 기획사가 포지션을 정하기 귀찮아서 내버려 두는 걸까?

“케이어스가 포지션을 공표하지 않는 이유는, 모든 멤버가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야.”

데뷔 초기에 보컬적 역량이 모자랐던 진저도, 현재에 이르러선 완벽한 한국어 발음을 구사하게 됐다.

그에 따라 보컬적 기량이 상당히 높아졌다. 여느 그룹의 메인 보컬에 필적할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도 진저는 평소에 발음을 뭉개서 말한다. 성필도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케이어스는 틀에 갇힐 필요가 없는 거지. 굳이 말하자면, 설하야.”

성필은 목소리에 미안함을 담았다.

“케이어스는 모두가 설하만큼 노래를 부르고, 모두가 아라만큼 춤을 추는 거야.”

“…….”

“이번 컴백곡 ‘타임’에서도 소유 씨가 랩으로 하이라이트 맡은 거 들었지?”

“……네.”

백설하는 할 말이 없었다.

항상 타도 케이어스를 부르짖는 소녀연맹이다. 그녀들은 각자의 라이벌을 마음속에 두고, 그 라이벌을 쫓기 위해 연습에 매진한다.

그룹으로선 케이어스에 근접했다고 생각했다. 비록 여러 지표에선 떨어지지만, 우리 다섯 명이라면 케이어스를 넘어설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소녀연맹은 현재, 개개인의 역량으로 케이어스를 넘지 못해.”

성필은 겸연쩍게 시선을 돌렸다.

“너희들이 자주 하는 말 있잖아. 최고의 아이돌이 되려면 케이어스를 넘어야 한다고. 나는 케이어스를 넘는 게 곧 최고의 아이돌이 되는 거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만약 너희들이 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러네요.”

백설하가 서글픈 기색으로 담담히 인정했다.

“다키스트 선배님들도, 그랬어요.”

멤버 전원이 메인 보컬, 메인 댄서, 메인 래퍼이자 비주얼이라고.

수만 개의 보석 중에서도 거르고 걸러진, 세상에 단 다섯 개뿐인 별들이라고.

최고의 아이돌이란 이름을 얻었던 이들은 포지션 따위에 구애받지 않았었다.

“안일…… 했네요.”

선례를 보았음에도, 백설하는 현재에 만족하고 있었다. 각자의 개성을 살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성필은 고개 숙인 백설하를 안쓰럽게 보았다. 그러면서도 이야기를 이어갔다.

“내가 전에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작하면서 너희들한테 해줬던 말 기억해? 시간이 없으니, 최고보다 최선을 택하라고. 역으로 말하면, 시간이 있다면 최고를 택해야만 해. 그리고 너희한테는 시간이 있어.”

우리들의 프로듀싱이 시작되기 전의 시간이, 분명히 주어졌다.

“곡의 장르를 다르게 하더라도, 포지션이 고정되면 구성적으로 비슷해진다. 이 단점을 과감하게 수용한 아이돌들이 대부분이야. 대신 주어진 구성에서 최선을 택하지. 멤버들의 장점을 살리는 쪽으로 말야. 나쁘단 게 아니야. 그게 옳아. 대부분의 그룹이 그랬어. 그 안에서도 다양성을 줄 방법은 수도 없이 많이 존재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최고의 이름을 얻고 싶다면, 아이돌에게 태생적으로 주어진 듯한 그 한계를 넘어야만 한다.

“설하야, 내가 소녀연맹의 첫 번째 프로젝트 프로듀서인 너한테 당부하고픈 말은 이거야. 아니, 부탁하고 싶어.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도록 해줘.”

백설하는 멤버들에게 ‘쌤’으로 불린다. 그녀는 멤버들을 가르치는 입장이었다. 그렇기에 성필은 그녀를 첫 번째로 선택했다.

“특정한 악구, 특정한 퍼포먼스, 특정한 음역대를, 특정한 멤버만이 소화하지 않도록. 강제로 파트를 골고루 분배하라는 건 아니야. 그냥, 염두에 두라는 거야.”

이게 최고라고 불리기 위해 멤버들이 넘어야 할 첫 번째 한계, 약점이다.

백설하가 허탈하게 웃었다.

“너무 어렵잖아요…….”

“알아, 어렵지. 그, 설하야.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원래 너희들의 데뷔까지 2년은 더 트레이닝시키려고 했었어.”

“네?!”

“그 계획대로 했으면 너희는 이맘때 데뷔했겠지.”

“저 20대 중반인데요?!”

하지만 성필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회사 사정을 고려해서 소녀연맹의 데뷔를 당겨야만 했기에.

멤버들이 다 모이고, 소녀연맹은 고작 1년의 트레이닝만을 거치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었다.

“물론 너희는 내 기대 이상이었어. 대단했지.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전부 극복하고 지금 이 자리에 있어. 그러니까 앞으로도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성필은 가끔, 그 계획이 예정대로 진행되었다면 어떤 미래가 펼쳐졌을지 그려보곤 한다.

기술적으로 성필이 만족할 수준에 이른 소녀연맹은 어떤 퍼포먼스를 보여줄까.

“상상해봐. 너희가 이제껏 보내온 2년이란 세월 전부 트레이닝으로만 채워지는 거야.”

“끔찍해요…….”

“대신, 케이어스한테 자격지심을 느끼는 일도 없었겠지.”

“…….”

“설하야, 대학도 4년이야. 석사까지 합치면 6년. 뭐, 논문도 써야 하니까 7년. 만약 소녀연맹 트레이닝 기간이 도합 3년이 됐으면, 설하는 아이돌 되려고 트레이닝만 몇 년을 한 거야?”

10년이 넘는다.

10년 동안 아이돌이 되기 위해 트레이닝을 거듭한 백설하는, 아마 아이돌계에서 상대를 찾기 힘들 만한 기량을 갖추게 되었을 것이다.

“거의 아이돌 박사지. 물론 너희는 데뷔하고 2년 동안 트레이닝만으로 배울 수 없는 걸 배웠어. 멘탈, 마음가짐, 무대 장악력, 아이돌로서의 존재감이나 아우라, 팬을 대하는 자세, 여러 가지로. 나는 거기에 더해서, 더 나은 실력을 요구하는 거야.”

“……전 멤버가 메인 포지션이 될 수준으로요?”

“어, 그렇지. 전 멤버의 메인 포지션화.”

“제, 제가 프로듀싱하는 앨범이 나올 때까지 그게 될까요…….”

“당연히 ‘우리들의 프로듀싱’이 진행되는 모든 기간을 포함하지. 설하는 중심을 잡아줘. 묵직하게. 알겠지?”

“…….”

백설하는 성필의 요구를 다시금 곱씹어보았다.

처음 들었을 때는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지만, 어차피 소녀연맹의 목표는 케이어스가 아닌가.

최소한 능력적으로는 동급에 올라서야 제대로 된 승부가 가능할 것이다.

‘그래,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야.’

성필이 요구하는 길을 걷는 건 매우 힘들겠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다.

소녀연맹은 최고에 이르러야만 하니까.

백설하가 의지를 다지며 주먹을 쥐었다. 그 주먹을 성필을 향해 내밀었다.

성필은 그 주먹을 보다가 소박하게 웃었다. 에리카가 성필을 볼 때마다 하는 제스처였기 때문이다.

“해볼게요. 리더니까요. 리더로서 멤버들을 이끌게요.”

“부탁할게, 소녀연맹 리더.”

둘의 주먹이 부딪쳤다.

“맡겨만 주세요.”

목표, 전 멤버의 메인 포지션화.

그 과정은 고통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얻는 건 명확하다.

소녀연맹의 음악적 다양성 증가.

자신의 개성을 잃지 않고 다양성을 추구하는 건, 아티스트가 무엇보다 미덕으로 삼아야 할 일이잖은가.

* * *

장하양은 백설하가 가져온 장미 무늬 베개를 이리저리 만져 보았다.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누워보거나, 얼굴을 묻고 엎드리기도 했다.

“하양아 언제까지 할 거야……?”

백설하는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장하양의 기행…… 아니, 베개 검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메모리폼 베개라고 하셨죠?”

“어, 응.”

“좋네요. 박 이사님이 추천해주셨다고 하셨나요?”

“아니, 추천해주신 건 아니구. 내가 골라서 사주셨어.”

장하양은 가만히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다가, 갑자기 자신의 책상으로 향했다.

드디어 끝난 건가 싶었는데, 장하양이 향수를 가져와 베개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뿌려도 되는지 묻는 듯 백설하를 바라보았다.

백설하가 반색했다.

“아, 그거 하양이가 침대에 뿌리는 거지? 응, 내 베개에도 뿌려줘. 잘 때 하양이 향기 나겠다, 헤헤.”

“네에, 뭐어, 아하하, 그렇죠.”

백설하의 장미 무늬 베개에 장하양의 향수가 뿌려졌다. 장하양은 그 베개에 또 얼굴을 묻고 엎드렸다.

“……하양아.”

“네헤?”

베개에 얼굴을 묻은 장하양은 왠지 모르게 몽롱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지간히 저 향수의 향기를 좋아하는 듯했다.

“만약 하양이가 나처럼 노래 부를 수 있으면, 역시 하이라이트도 맡아 보고 싶지?”

“아하하.”

장하양이 옆으로 누워 침대 밑에 앉은 백설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장하양이 나긋하게 미소 지었다.

“제가 언니처럼 부를 순 없을 거예요. 노래를 배워온 기간이 몇 년씩이나 차이 나니까요.”

“그, 그래도. 데뷔 연차가 쌓이면 말야…….”

“그러면 언니도 점점 더 노래를 잘 부르게 되시잖아요.”

장하양이 체념한 어투로 말했다.

“따라잡을 순 없죠. 아킬레스랑 거북이가 달리기 시합하는 것처럼요.”

“……응? 아, 아킬레스?”

“언니.”

장하양이 짐짓 화난 표정을 지었다.

“한 이사님 수업 때 배웠잖아요. 제논의 역설요. 한 이사님이 슬퍼하시겠어요.”

“아, 아아, 맞다. 기억나!”

“무슨 내용이었는데요?”

백설하는 당황해서 눈을 크게 뜨곤, 면목이 없단 듯 시선을 피했다. 그러면서도 꿋꿋하게 대답을 짜냈다.

“아킬레스랑 거북이가 달리기했는데, 아킬레스는 도중에 잠들어서…….”

“아이소포스도 그리스 사람이긴 하죠. 제논이랑 동향 사람이니까, 절반은 맞춘 걸로 해드릴게요.”

“아, 아이소포스?”

“이솝 우화요. 이솝, 아이소포스.”

“어?”

“토끼와 거북이요.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토끼와 거북이가 그리스 얘기였어?! 별주부전은 우리나라 거잖아!”

“언니, 별주부전은 토끼 간 얘기잖아요.”

“아.”

장하양은 사랑스럽단 듯 백설하의 머리를 껴안았다.

“옛날엔 백치미라는 말이 이해가 안 갔는데, 이제 이해가 가요.”

“내가 멍청하다고?!”

“아하하, 나중에 언니랑 떨어져서 살면 슬퍼서 어떡할까요.”

백설하는 화난 척하면서도 장하양의 품에 몸을 맡겼다.

“……하양아.”

“네, 언니.”

“이제 5년 남았네.”

“벌써 헤어질 거 생각하시는 거예요?”

백설하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최고가 될 수 있겠지?”

“당연하죠.”

장하양은 가슴에서 백설하를 떼어냈다. 그리고 애정이 담긴 눈길로 언니를 바라보며, 그녀의 뺨을 엄지로 조심스럽게 쓸었다.

“언니가 계시고, 아라가 있고, 아름이가 있고, 리카가 있어요. 박 이사님과 한 이사님, 사장님이랑 지음 오빠, 경섭 오빠도 계세요. 가로 엔터가 있어요. 저희들은 최고가 될 거예요. 그래서 언젠가, 이렇게 불안했던 나날을 안주 삼아 즐겁게 이야기할 거예요.”

“하, 하양아…….”

백설하가 장하양의 품에서 슬쩍 떨어졌다.

“왜 그러세요?”

“아, 아니. 가까이서 보니까 너무 예뻐서…….”

“네? 아아…… 아하하. 제가 배려가 부족했네요.”

장하양이 엄지와 검지로 각을 세우고 자신의 턱에 가져다 댔다.

“소녀연맹 메인 비주얼이니까요.”

“하양아, 오늘 박 이사님한테 들었는데 메인 비주얼이란 포지션은 없…….”

“제가 메인 비주얼이에요.”

“…….”

백설하는 픽 웃으면서 장하양이 누운 침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하양아 이제 나도 그 베개 베보…….”

“이거 제 거예요.”

“어?!”

“내일 제가 똑같은 거 사서 드릴게요.”

“…….”

잠시 후.

“에, 하양 언니 왜 바닥에서 주무시고 계시나요?”

리카가 언니 라인의 방 옆을 지나가다가 수상한 낌새를 느끼곤 안으로 들어왔다.

백설하는 손을 털곤, 장하양의 옆에 떨어진 베개를 가볍게 주워 들었다.

“많이 졸린가 봐.”

“바닥이 보일러 때문에 따뜻하긴 하죠!”

그래, 소녀연맹에는 모두가 있다.

시대가 점지해준 듯한 재능 넘치는 이들이 모여 있다.

그중에서도 백설하는 리더로서 모두를 이끌 것이다. 그녀는 반드시 모두를 데리고 정상에 오르겠노라고 다짐했다.

쓰러진 장하양을 보면서, 다짐했다.

“어, 저 어째서 바닥에……?”

“우리 하양이 많이 졸렸구나. 언니가 도와줄게, 침대로 올라가자.”

“머리가…… 아파요…….”

“언니 해외 투어 때 병 걸리신 거 아닌가요! 다른 나라에서 풍토병 걸리는 일은 흔하댔어요!”

“아, 그런가 정말……?”

“감염될지도 모르니까 가까이 오지 마세요!”

“아하하…….”

“왜 껴안는 건가요?! 노, 놓으세, 끼에에엑!”

* * *

연말.

소녀연맹은 성필의 권유로 심리상담을 받게 됐다.

‘현대인은 감정에 솔직해지는 법을 잘 모른대. 감정에 상처를 입어도 무딘 채로 있는 거야. 이제 아이돌 2년 차니까, 너희들도 가슴 속에 담아둔 상처가 꽤 있을 거야.’

이른바 전문적인 멘탈 케어였다.

멤버들은 내원하여 차례로 상담을 가졌다.

두 번째 차례인 조아라가 상담실에서 나오자, 다음 차례인 리카가 들어갔다.

“야, 신아름.”

조아라는 신아름의 옆에 앉아서 말했다.

“넌 정기적으로 상담 받으러 가지?”

조아라의 눈가는 살짝 붉어져 있었다.

처음 상담을 받는단 말을 들었을 때, 그녀는 ‘난 정상인데 무슨 상담? 괜히 돈만 버리는 거 아니야?’라면서 불쾌함을 표현했었다.

그런데 막상 상담사와 대화를 나누니, 자기도 모르는 상처를 알게 되어 눈물까지 몇 방울 흘렸다.

“원래 이런 거야?”

“난 상담사가 아니라 정신과 의사 보러 가는데?”

“……어, 그러냐?”

“너처럼 눈물 짜던 시기는 지났어. 약도 잘 챙겨 먹으니까.”

신아름은 몇 년 동안 정신과에 꾸준히 다니고 있다. 의사의 말로는 상당히 좋아졌다고 한다.

좋아지지 않으면 아이돌 일은 못 할 테니, 그 말이 맞을 것이었다.

그때 리카가 나왔다.

조아라가 흥미를 가지고 물었다.

“야 리카, 어땠어?”

“에…… 평범?”

“안 울었어?”

“안 울었는데?”

“……그래?”

리카가 해맑게 웃었다.

저 웃음을 보니 알겠다.

리카는 상처 따위 안 가지고 있다. 있더라도 쉽게도 흘려보낼 수 있는 성정의 소유자다.

“설마 아라쨩 울었어?”

“뭐, 울었지. 보기랑 다르…….”

“보기랑 똑같이 여리네! 아라쨩은 누가 소리만 질러도 햄스터처럼 도망갈 거야!”

조아라가 리카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잠시 후 백설하가 상담받고 나왔다. 그녀 또한 조아라처럼 살짝 감정이 격앙된 상태였다.

백설하는 울었단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코를 훌쩍임으로써 모든 게 들통났다.

“하, 하양아 상담 잘 받아. 좋은 분이셔.”

장하양은 말없이 미소를 지으면서 백설하를 포옹해주었다. 그러자 백설하는 또 눈물샘이 터지려고 했다.

“나, 남들 다 보는데 왜 이래애…….”

“쌤, 우리가 남이에요?”

“즈루이(치사해)! 매일 언니들끼리만 껴안고 친하고! 나이 어리다고 차별하면 안 돼요!”

리카까지 쪼르르 달려가서 백설하를 안았다. 백설하는 이번엔 정말 참을 수 없었다.

“고마워 얘들아…….”

진짜 백설하가 울자 리카는 당황했다. 대체 안에서 무슨 얘기를 들었던 것일까?

백설하는 장하양과 리카의 온기를 차분히 느꼈다. 그 온기만이 자신을 살아있게 한다는 것처럼.

“언니, 저 가야 해요.”

“미, 미안. 잘하고 와.”

장하양이 상담실 안으로 들어갔다.

네 명의 멤버는 대기실 의자에 나란히 앉아서 담소를 나누었다.

“하양 언니도 울까요?”

“난 하양이가 운 거 ‘아니’로 데뷔 준비할 때랑 음방 1위 했을 때만 본 거 같아. 또 콘서트 때랑.”

“하양 언니 정도면 철의 여인 아녜요?”

장하양은 언니로서 동생들에게 모범을 보이려 한다. 누구보다 강인하게 소녀연맹을 뒷받침하는 게 장하양이다.

그녀가 고작 상담으로 울 거라곤 아무도 생각할 수 없…….

──!

상담실 벽을 뚫고 오열이 들려왔다.

“…….”

“…….”

“…….”

“…….”

멤버들은 당황하여 서로를 쳐다보곤, 상담실 벽에 귀를 붙였다.

벽이 두꺼워 오열은 아주 작게만 들렸지만, 장하양의 목소리가 확실했다.

“저 상담사 뭔데……?”

* * *

연예인 전문 상담사라고도 불리는 그녀는, 오늘 다섯 명의 아이돌을 맡기로 했다.

대중의 관심이란 태양처럼 따스하면서도 북풍처럼 차갑다. 그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연예인은 정신이 건강하기 어렵다.

‘내가 도와줘서 조금이라도 자신의 마음에 솔직해진다면, 그걸로 족해.’

상담사는 그런 마음으로 이 일을 하고 있다.

백설하와의 상담을 마치고, 상담사는 자신의 소명을 되새겼다. 그리고 다음 차례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장하양이었다.

상담사는 친절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이쪽에 앉으시면 돼요.”

“잘 부탁드립니다.”

몇 분 후, 상담사는 이 일을 시작하고 가장 큰 난관에 부딪혔다.

상담사는 압도당했다.

폭포처럼 눈물을 흘리면서 오열하는 장하양에게. 그저 메뉴얼적인 질문을 몇 개 던졌을 뿐인데, 그게 송곳이 되어 부풀 대로 부푼 장하양의 상처를 터뜨렸다.

겨우 질문 몇 개로 터질 만큼, 장하양은 한계에 몰려 있던 것이다.

“태어나서 사랑다운 사랑이라곤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저에게 그분의 사랑은 너무나 밝고 아름답고 또 가시처럼 따가웠습니다. 저 같은 인간이 그토록 무거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두려웠습니다. 장난과 불의 신 로키가 흥미로 뿌려버린 사랑은 언젠가 온 것처럼 가볍게 사라질 걸 알기에, 저는 더 노력해야만 했습니다. 이 사랑이 거둬지지 않게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담사는 종이에 필기했다.

아니, 필기하는 척했다.

‘너무 무거워!’

자신이 감당하기 너무 무거운 인간이란 것을, 상담사는 순식간에 파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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