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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83화 (383/760)

383화

위세라는 냉혹한 승부사다.

타고난 직관으로 사태를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나며, 이성적 추론을 배제하고 감정적으로 즉각 판단을 내린다.

신속한 행동은 덤이다.

나쁘게 말하면 중요할 때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신뢰했고, 감정을 따라서 나쁜 일을 겪었던 적이 별로 없다.

시골 고향에서 아이돌이 되기 위해 상경했을 때처럼.

‘사진 찍어야 해!’

성필과 백설하가 데이트하는 사진만 확보할 수 있다면, 위세라는 성필에게 무엇이든 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열애설이 걸그룹에게 얼마나 치명적인가? 심지어 같은 회사 사람과의 열애설이라면?

소녀연맹이 박살 날 수도 있는 대사건이다.

‘팀장님은 소녀연맹을 지키기 위해, 모순적이게도 소녀연맹을 버리게 될 거야.’

위세라가 침을 꼴깍 삼켰다.

‘내가 버리게 만들 거야…….’

만약 이 계획이 성공하면, 위세라는 분명히 성필에게 미움받을 것이다.

‘사람 마음 따위 얼마든지 바꿀 수 있어!’

성필에게 자신의 진심을 꾸준히 전해주면, 그도 결국엔 용서하게 될 것이다.

허락받는 것보다 용서받는 게 쉽다고 하지 않는가. 중요한 건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위세라는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폰을 꽉 쥐었다. 카메라 앵글도 이상하게 떨려온다.

‘내 손가락아 제발 진정해!’

손가락이 멋대로 움직여서 줌인하거나 이상한 필터 효과를 덧씌우고 있다.

최대한 신속해야 한…….

“안녕 세라야.”

위세라의 손이 텅 비었다. 그녀가 허망하게 앞을 보았다.

실수로 카메라를 줌인 한 줄 알았는데, 실은 성필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던 것이다.

“도, 돌려줘요!”

위세라가 손을 뻗자, 성필은 낚싯대를 올리듯이 위세라의 폰을 높이 들고 흔들었다.

위세라는 성필의 앞을 폴짝폴짝 뛰어다니면서 핸드폰을 되찾으려 했다. 어찌나 필사적인지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내 폰이에요! 돌려줘요!”

위세라의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키 157cm.

평균보다 작다는 게 이렇게나 서러운 건 처음이다. 조금만 더 컸다면 대의를 이룰 수 있었는데!

“노아야!”

위세라는 즉각 계획을 수정했다.

노아에게 사진을 찍게 하면 된다. 이미 성필과 백설하는 멀찍이 떨어졌지만, 위세라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머리가 열기로 가득해서 시야마저 흔들리는 형편이었다.

“빨리 사진 찍…….”

“저도 잡혔다요.”

노아는 백설하에게 팔이 붙잡혀 있었다.

“…….”

위세라는 절망하여 씩씩 분을 삭였다. 그런 그녀의 앞으로 성필의 그림자가 졌다.

그가 다시 말했다.

“안녕, 세라야.”

위세라는 분함과 슬픔, 그리고 반가움이 섞여서 답했다.

“안녕하세요…….”

* * *

네 사람은 근처의 한적한 카페로 왔다.

성필은 쓴웃음을 지으며 앞에 앉은 노아와 위세라를 바라보았다. 사실, 성필은 그녀들과 카페에 올 생각은 없었다.

‘팀장님 커피 사줘. 주세요. 오랜만이다!’

노아는 성필을 다시 만난 게 반갑기 그지없는지, 대뜸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었다.

하지만 성필은 백설하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온 것이다. 갑자기 옛 인연을 만나 시간을 보내는 건 백설하에게 실례이다.

그랬더니 노아가 말했다.

‘그럼 나중에 만나요. 약속! 여기 캘린더에 적어줘다.’

백설하와 시간을 보내러 왔으니, 오늘은 너희들과 담소를 나눌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다른 날에는 괜찮다는 뜻이다. 노아는 그리 생각해서 성필과 약속을 잡으려 했다.

성필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사적으로 글로브 멤버들을 만나는 건 좀…….’

심지어 백설하의 앞에서 만날 약속을 잡는 건 너무하단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소녀연맹은 성필이 케이어스와 기묘한 친분을 유지하는 것을 아니꼽게 보고 있다.

그런데 그 기묘한 친분에 글로브까지 추가되면, 소녀연맹의 기분이 어떨까. 심지어 글로브는 성필이 이전에 속해 있던 기획사의 아이돌인데 말이다.

‘이런 비유는 이상하지만, 우리 애들은 아빠가 전처의 아이를 보러 가는 기분이 아닐까.’

프로듀서인 성필에게 애정이란 양분을 아낌없이 받고 성장한 소녀연맹이다.

그렇기에 그녀들은, 성필이 과거에 글로브 멤버들에게도 같은 애정을 주었으리란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성필이 글로브와 친근한 관계를 보이는 건, 케이어스와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내가 케이어스분들이랑 친분을 유지하는 것보다도, 글로브와의 친분을 드러내는 게 더 기분이 안 좋을 거야.’

성필이 내심 갈팡질팡하고 있자, 옆에 있던 백설하가 따스하게 말했다.

‘괜찮아요’라고.

성필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백설하의 온기 서린 미소를 보자 그녀의 넓은 마음에 기대고 싶어졌다.

그래, 이번 한 번만. 나중에 따로 만날 바에야 오늘 이야기를 나누고 깨끗하게 헤어지자.

‘설하가 괜찮다면, 알겠어.’

‘설하 온니 역시 보이는 것만큼 마음이 넓어요. 특별히 팀장님과의 관계를 눈감아줘요!’

그렇게, 네 사람은 카페로 오게 됐다.

“먼저.”

성필이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나랑 설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야.”

“어처구니가 없군. 그 말을 믿으란 건가?”

“…….”

성필은 노아의 이상한 말투에 대해 해명을 요구했다. 그에 위세라가 답했다.

“요즘 갑자기 연기를 하고 싶대요. 없는 시간 쪼개서 옛날 사극도 찾아보고 그래요.”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믿겠다. 그리고 잊겠다. 기억이 많으면 슬픔도 많으니.”

노아의 진지한 표정이 순식간에 떨어져 나가고, 옛날에 성필이 자주 보았던 싱글벙글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어떤가요. 한류 배우가 될 자질이 보이나!”

“연기는 일본 가서 하자.”

“남들이 안 된다고 했을 땐 별로 안 슬펐는데, 팀장님이 안 된다고 하니까 슬프네요. 네, 그만둡니다.”

노아는 짐짓 우울한 척하면서 녹차를 홀짝였다. 위세라는 그런 노아의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팀장님 봬서 그런가, 얘 오늘따라 텐션이 높네.’

원래도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은 언변의 소유자이지만, 평소에는 찾을 수 없던 기쁨이 엿보인다.

“그래 뭐, 다들…….”

잘 지내지?

형식적인 인사말이다. 하지만 성필은 끝내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얼마 전에 만났던 양소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야기로 유추하건대, 글로브는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듯했다.

윤상열의 폭거를 막아줄 사람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전생에선 성필이 그 역할을 했었지만, 이번엔 누구도 윤상열에게 반대하지 못하고 있었다.

“설하 언니.”

성필의 곤란한 기색을 읽은 듯, 위세라는 대화의 타깃을 백설하로 바꾸었다.

갑자기 불린 백설하는 당황했다. 이야기의 흐름이 자신에게 오리라곤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 내가 언니였구나…….’

혹여라도 위세라나 노아가 동갑이거나 연상일 가능성을 점쳐보기도 했었지만, 어김없이 백설하가 나이가 많았다.

‘하긴, 우리랑 같은 시기에 데뷔한 아이돌 중에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씁쓸한 사실이 백설하를 또 주눅 들게 했다.

백설하의 유일한 희망은 진소유뿐이다. 자신보다 나이가 한 살 많은, 동시기에 데뷔한 아이돌 말이다.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할게요. 단도직입적으로, 언제부터 팀장님이랑 사귀었어요?”

“어?!”

“누가 먼저 대시했어요?”

“어, 아니…….”

“언니죠?”

왜 그렇게 생각하지?!

보통은 남자 쪽이, 그리고 나이가 많이 쪽이 대시했다고 생각하지 않나?

‘나, 나한테 무슨 분위기 같은 게 있나? 남자에 환장하거나 연애에 굶주린 것 같은 아우라라도 나오나?’

“오늘도 무슨 팀장님 잡아먹으려는 거 같은 옷 입고 계시고.”

백설하가 고개를 숙여서 자신의 차림을 보았다. 성필을 잡아먹으려는 듯한 복장…….

“아, 이건, 이거는! 어쩔 수, 그, 오랜만에 노는 거니까!”

“오랜만에 둘이 보내는 휴일이니까 확실하게 하겠다고요? 연애 금지 있지 않아요? 팬들을 배신하고도 죄책감 하나 없이 위풍당당한…….”

“세라야, 아니라니까.”

“제가 그걸 믿을 거 같아요 팀장님?”

“그래, 물론 설하 옷이 사람 죽이려고 작정한 옷이긴 해.”

“네?!”

“하지만 알아줘. 설하는 누구보다 순수하단 걸. 막 내려서 거리에 얕게 쌓인 순백의 눈보다 순수해.”

“그런 걸 왜 말하시……!”

“설하는 순수하게 꾸미고 싶어서 꾸민 거야.”

“누가 봐도 이상한 마음 먹고 있는 거 같은데요.”

“맞다 맞다! 이 날씨에 기모 레깅스도 없이 치마 입는 인간들은 제정신이 아닌 거예요.”

“어?!”

“사랑 때문에 정신을 잃은 거지.”

위세라는 자신의 젊고 팔팔한 아들을 노리는 30대의 애 딸린 이혼녀를 보는 듯한 어머니의 눈빛을 띠었다.

그녀의 눈이 백설하의 이모저모를 훑었다. 백설하는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쥐구멍이 있으면 들어가서 숨고 싶었다.

‘치마 따윌 입는 게 아니었는데…….’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으면 절대 안 입었다.

“얘들아, 재미없어.”

성필이 한마디 했다.

그러자 백설하를 수치심에 죽게 만들려는 것만 같던 두 콤비가 입을 다물었다.

성필이 석세스 엔터를 떠나간 지 4년이 넘었건만, 그녀들은 아직도 성필의 말버릇이나 행동을 기억하고 있었다.

‘재미없어’란 말은, 성필이 연습생들을 훈계하기 전에 자주 했던 말이었다.

위세라와 노아의 몸에 새겨진 기억은, 성필이 그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풀이 죽게 만들었다.

“아니라고 했잖아.”

둘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오늘 나온 건 설하랑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런 거야.”

“…….”

“설하의 패셔너블한 옷만으로 지레짐작하는 건…….”

쾅!

백설하가 테이블을 쿵 소리 나게 짚으면서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은 홍당무보다 더 붉어져 있었다.

머리로 피가 쏠려 열이 났다. 그 열기가 백설하의 눈에 눈물까지 나게 만들었다. 열을 식히기 위해 몸에서 물을 배출하는 것이다.

“저, 저어, 화장실…….”

백설하가 비틀비틀 화장실로 향했다.

성필이 한숨을 쉬었다.

“봐봐. 설하 화났잖아.”

“박 팀장님 마지막 말이 쐐기다. 그리고, 믿어요. 도저히 여자친구의 반응이 아닌 거예요.”

그때 위세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화장실이요.”

“나도 가…….”

위세라가 째려보자 노아가 엉덩이를 자연스레 의자에 붙였다.

“모처럼 팀장님이랑 만났으니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까워요. 팀장님, 오늘 하루를 불태워요!”

성필은 화장실로 향하는 위세라를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위세라는 백설하에게 개인적으로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듯했다.

성필이 있는 곳에선 하지 못하는 말이 있는 것이다.

“팀장님, 정진이가 윤 씨를 ‘씹새’나 ‘그 새끼’라고 불러요. 물론 틀린 말은 없지만, 어른한테 그렇게 말하는 건 조금 불편해. 어떻게 하나요?”

“맞는 말이잖아. 그렇게 부르게 둬.”

“역시 그렇다. 사실, 정진이는 회사 들어온 초반엔 팀장님도 ‘씹새’라고 불렀었어요.”

“……괜찮아, 미움받는 건 익숙하니까.”

“아하핰! 그 말투 뭐예요!”

“맞다, 말투하니까 생각났는데 나 일본어 배웠다?”

“에에, 우소데쇼(거짓말이지)!”

노아가 순식간에 일본어를 썼다. 그 순간 성필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노아 목소리가…….’

한국어를 쓸 때는 발음이 어눌했었기에, 그녀의 목소리 또한 이상하게 들렸었다.

그런데 일본어를 쓰자, 그녀의 목소리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곱디고운, 비단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성필은 자기도 모르게 더듬거리며 일본어로 말했다.

“배웠, 배웠어. 소녀연맹이 일본에서 활동해야 했어서.”

“……크흨.”

노아가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이젠 팀장님이 저처럼 변하셨네요? 저 한국어 안 는다고 그렇게 타박하시더니, 이제는 제가 팀장님한테 뭐라고 해야겠네요, 헤헤.”

그 뒤로 노아는 청산유수처럼 말을 쏟아냈다. 성필은 정상적인 노아의 발음과 목소리에 홀려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기계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계속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러던 도중, 갑작스레 노아가 슬픈 미소를 지었다.

“팀장님.”

“응?”

“팀장님이 나가시기 바로 전에요.”

노아가 테이블 아래에 모은 손을 꼬물거렸다.

“윤 씨랑 싸웠었잖아요. 연습생들 앞에서요.”

“……아, 그랬지.”

연습생이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은 것으로, 윤상열이 성필에게 뭐라고 했었다.

뭐라고 할 수야 있지만, 굳이 연습생들이 보는 앞에서 말한 게 문제였다.

연습생들에게 ‘박성필은 나보다 아래다’라는 걸 보여주려는 얄팍한 수작이었으니까.

“그게 트리거였죠?”

“트리거…… 라고까지 할 거창한 건…… 뭐, 그럴지도 모르겠다. 쌓였던 게 폭발한 건 그때니…….”

“그때 음식 배달시켜서 먹은 거 저예요.”

노아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 하지만 눈은 흐르는 폭포처럼 아래로 떨어지기만 했다.

“계속 생각했는데요.”

노아는 울음을 털어버리려고 웃음을 억지로 짜냈다.

“그 일이 없었으면요. 제가 배달 음식 따위 안 시켜 먹었으면, 팀장님이 남아 계시지 않았을까아……. 계속 생각했었어요. 그래서요, 저…….”

노아가 코끝을 찡그렸다. 울음을 참을 때 그녀의 버릇이었다.

성필은 그녀를 혼낼 때, 그녀가 이러는 모습을 자주 보았었다.

“멤버들한테 너무 미안하고오…… 그러네요!”

노아가 일부러 활기차게 말했다. 그녀가 손부채로 얼굴을 식혔다.

“이런 말 할 생각 하나도 없었는데! 일본어 쓰니까 생각만 하던 게 말로 계속 나오네! 팀장님 때문이잖아요, 어쩔 거예요 이 분위…….”

“아니야, 노아야. 네 탓 아니야.”

노아의 움직임이 멈췄다.

“네 탓 전혀 아니야. 그 일이 아니었더라도, 난 나갔을 거야.”

어차피 석세스 엔터를 나갔을 것이다.

이 말을, 성필이 회사를 나갔기에 고통받는 노아에게 할 만한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성필은 노아가 가진 죄책감을 없애주고 싶었다. 고작 몇 마디로 눈물까지 흘릴 정도면, 노아가 가진 죄책감은 엄청날 테니까.

“그러니까 네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아.”

노아는 울음을 참기 위해 얼굴을 한껏 찡그렸다. 그리고 다시 한국어로 돌아와, 밝게 말했다.

“역시, 그렇다.”

“그런 거야.”

“팀장님.”

“응.”

“오랜만에 보니까 좋아요. 앞으로도 3개월에 한 번쯤은 만나서 회포도 풀자요.”

“……그래.”

백설하와 위세라가 돌아올 때까지, 성필과 노아는 시답잖은 대화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 * *

백설하는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이만한 투쟁심을 면전에서 받는다면 누구든 그럴 것이다.

위세라의 눈동자에 불꽃이 서려 있었다.

“팀장님을 후회하게 만들어줄 거예요.”

선전포고처럼 강렬하며, 시처럼 감각적인 이야기의 끝에서, 위세라가 그리 말했다.

성필을 후회하게 해주겠다고.

“우릴 놔두고 가버린 거, 아주 땅을 치고 후회하게 만들 거라고요. 최고의 아이돌?”

시대가 새겨주는 오직 하나뿐인 이름.

“그거 저희가 될 거니까요.”

백설하는 위세라에게서 소녀연맹 멤버들의 모습을 보았다.

진저를 보는 조아라.

진소유를 보는 장하양.

김민주를 보는 신아름.

그리고, 방향성은 다르지만 같은 성질을 지닌 백설하. 자신이 에리카를 볼 때와 비슷하지 않을까.

위세라에게선 ‘타도 케이어스’를 부르짖던 소녀연맹의 조각이 보인다.

“나중에 울면서 돌아와도 소용없어요. ……계속 울면서 매달리면 몰라도, 아무튼 그래요.”

“……세라, 씨?”

“세라라고 불러도 돼요.”

“어, 응. 세라야. 그런데…… 그걸 왜 나한테 말해?”

“……팀장님한테 직접 말할 수는 없으니까요.”

백설하는 ‘내가 샌드백인가……’, ‘내가 만만한가……’라고 생각하면서 시선을 내렸다.

그래, 이런 말을 성필 앞에서 직접 하기란 힘들겠지. 누가 ‘너 후회할 거야’ 같은 대사를 당사자 앞에서 맨정신으로 할 수 있겠는가.

백설하는 위세라가 보내는 투쟁심, 분노, 슬픔,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답했다.

“저, 그, 미안…….”

글로브 멤버들이 성필의 공백을 얼마나 크게 느끼고 있는지 여실히 알겠다.

그래서 백설하는 무의식적으로 사과했다. 사과해야만 할 것 같았다.

“뭐가요? 팀장님이랑 같이 있는 게 미안하단 거예요? 참…… 아니, 됐어요. 상관없어요. 더 언노운 싱어 나가시죠?”

“어, 어떻게 알아?”

“작가님한테 들었어요.”

위세라가 엄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도 나가요. 언니보다 한 회차 빨리. 우승해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어?”

현재 ‘더 언노운’은 베테랑 가수 주성이다.

위세라는, 고작 데뷔 2년 차 아이돌 그룹 멤버 주제에 베테랑 가수를 꺾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엄청난 자신감이다.

그리고, 위세라는 그런 능력이 있었다.

글로브의 메인 보컬이며, 노래를 삶이자 업으로 택한 인간이다.

글로브가 되고는 성대마비가 올 정도로 매일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왔다. 위세라는 자신의 기량이 기술적인 부분에서 직업 가수에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했다.

“올라와요, 패배하러.”

도발이며, 참으로 예의가 없다.

백설하는 위세라를 정면으로 볼 자신이 없어서 눈을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허벅지 옆에 꼭 붙인 위세라의 주먹이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얼마나…….’

성필이 나갔던 것을 얼마나 마음에 두고 있으면, 처음 말을 섞어보는 백설하에게 이런 이야기까지 할까.

4년간 묵혔던 원망, 그리움, 슬픔, 분노, 애증을 성필 본인에게는 표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 아바타나 다름없는 백설하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짓이라도 안 하면 버틸 수가 없어서…….’

백설하는 위세라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동정하게 된다.

역지사지로 생각해보면, 백설하 또한 성필이 갑자기 떠나간다면 위세라처럼 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갑자기 성필이 케이어스 담당으로 간다거나 하면, 백설하는 복수를 위해 칼을 갈 게 분명하다. 그리고 위세라처럼 ‘후회하게 해줄 거야’ 같은 마음을 먹겠지.

그렇기에 백설하는 위세라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작게 말했다.

“응, 올라갈게.”

솔직히, 뿌듯하기도 했다.

‘내가 누군가의 목표가 됐구나.’

소녀연맹은 다른 아이돌이 우러러보는 위치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언제든지 추월당할 수도 있다.

위에 선다는 건 그런 뜻이다.

소녀연맹이 케이어스를 추격하는 것처럼, 글로브는 소녀연맹을 따라오려고 한다.

‘에리카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소녀연맹은 항상 뒤에 있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아니었어.’

소녀연맹은 다른 이들보다 크게 앞질러 있다. 이 시대, 이 세대에서 최고의 아이돌이란 이름에 가장 가까운 이들 중 하나다.

“기다리고 있어 줘, 세라야.”

백설하는 싱긋 웃었다.

“패배하러.”

위세라의 얼굴이 굳었다가, 곧 울그락불그락해졌다. 그녀는 성필 앞에선 절대 보이지 않을 표정을 지었다.

위세라가 분노로 치를 떨면서.

“소녀연맹 메인 보컬.”

웃었다.

“한 명만 꺾으면, 나머지는 다 이기는 거죠? 쉽네. 1, 2라운드에서 떨어지지나 마요.”

“응, 너두.”

* * *

“가자, 노아.”

화장실에서 돌아온 위세라는 노아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아아아앙 아직 팀장님이랑 얘기 덜 한 거요!”

“연습하러 가자.”

“오늘 쉬는 날인데에에!”

노아는 위세라에게 끌려가면서도 성필에게 팔을 흔들면서 인사했다.

어떻게든 자신의 커다란 아쉬움을 표현하고 싶은지, 마구잡이로 손 키스까지 날렸다.

“팀장님 커피 잘 마셨어요. 다음엔 제가 살게요.”

위세라는 그 인사와 함께 카페에서 나갔다. 백설하는 카페의 유리벽 너머로 사라지는 노아를 보면서 말했다.

“원래 일본인은 귀여운 걸까요? 리카도 그렇구…….”

“그럼 설하도 일본인이야?”

백설하는 성필을 뚱하게 쳐다보다가 말했다.

“소데스(그렇습니다).”

“얏파리(역시).”

“솔직히 저 귀엽다는 거 편견이고 프레임이거든요?”

“아하하핰! 진짜 귀여워 죽겠다 진짜!”

“…….”

백설하는 지금이라도 일본으로 가서 카와이 계열 아이돌이 될까 고민했다.

약 1초의 고민 끝에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그와 동시에 성필이 말했다.

“슬슬 진지한 이야기 해 볼까?”

“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오늘 만난 이유는 백설하의 베개를 사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성필이 프로듀서로서 리더인 백설하와 할 말이 있다고 해서다.

백설하는 자세를 바로 하고 성필을 또렷이 응시했다.

“설하야, 네 꿈은 최고의 아이돌이지? 아니, 애들이 다 그렇지?”

역시나 꿈 이야기부터 하는구나.

옛날의 백설하는 ‘최고의 아이돌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었다.

너무 오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백설하는 최고의 아이돌이 되기로 결심했으며, 지금도 자신은 최고의 아이돌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얻어야 할 건 사람들의 인정뿐이야.’

백설하, 현재도 최고의 아이돌이라 자신하는 그녀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동자에서 총기가 빛났다.

“네, 최고의 아이돌이 꿈이에요!”

“불가능해.”

“……네?”

“정확히는, 지금으로선 불가능해.”

성필이 테이블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렸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가까워지는 성필의 눈동자를 보며, 백설하는 깊은 혼란을 느꼈다.

‘불가능하다’고? 지금으로선 불가능해?

무슨 소리…….

“소녀연맹은 완벽하지 않아. 최고라 불릴 수 없어. 개개인으로서도, 그룹으로서도. 내가 지금부터 말할 건…….”

소녀연맹이 최고가 되기 위해 극복해야 하는 약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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