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81화 (381/760)

381화

‘우리들의 프로듀싱’.

성필이 소녀연맹을 만들기 전부터 구상했던 프로젝트다.

주요 골자는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프로듀싱 권한을 쥐고 스스로의 아이디어로 곡을 내는 것이다.

‘자신이 생각했기에 자신이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는, 성필이 멤버들에게 강조해왔던 아티스트십을 표현할 기회다.

“프로듀싱이란 무엇이냐. 그냥 뜻이랑 똑같아. 제작이야.”

컨셉, 곡, 안무, 의상, 뮤직비디오, 무대, 퍼포먼스, 홍보 전략 등 모든 프로덕션 과정을 총괄하는 것이다.

물론 소녀연맹은 프로듀싱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나 능력이 부족하다. 갑자기 일을 맡는다더라도 잘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니까 내가 도와줄 거야.”

소녀연맹의 메인 프로듀서, 성필이 멤버들의 곁에 꼭 붙어서 모든 과정에 손을 빌려줄 것이다.

“당연하지만, 너희들의 의견이 전부 받아들여지지는 않아. 나조차도 그랬어.”

회의에서 이사, 팀장들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사장인 홍규헌의 허락이 떨어져야 한다.

그 기준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사람들에게 먹히는가. 시장을 움직일 수 있는가. 단도직입적으로, 사람들의 지갑을 열 수 있느냐야.”

소녀연맹이 만들어온 이미지를 배반하진 않나 고려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결과적으로 ‘좋으면’ 통과된다.

“얘들아, 프로듀싱은 그냥 ‘이거 해야지’라고 생각해서 뚝딱뚝딱 진행하는 게 아니야. 많은 고민과 노력이 필요해. 무엇보다, 책임감을 가져야 해.”

만약 소녀연맹이 실패했다면 그 책임의 대부분은 기획사인 가로 엔터로 돌아갔을 것이다.

바로 이게 아이돌이 평범한 아티스트와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아이돌의 실패는 본인의 탓이 아니라 회사의 탓으로 받아들여진다. 회사의 기획 실패가 가장 큰 이유가 되기에, 팬들도 아이돌이 아니라 회사를 욕한다.

“하지만 아티스트, 뮤지션들은 그러지 않잖아.”

앨범이 안 팔렸다? 아티스트 탓이다.

무대가 안 좋다? 아티스트 탓이다.

망했다? 아티스트 탓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성공도 아티스트의 것이 돼. 얘들아, 너희들이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많이 할 건 창작이 아니야. 프로듀싱은 온전한 창조가 아니라 선택의 연속이야.”

어떤 곡을 받지?

어떤 안무를 받지?

어떤 의상을 입지?

어떤 무대 장식을 쓰지?

어떤 뮤직비디오를 만들지?

어떤 서사를 가지지?

“가로 엔터의 직원들이 생각해내는 수천수만 개의 의견 중, 성공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길을 선택하는 거야.”

A&R 팀, 비주얼 팀, 매니지먼트 팀, 홍보팀, 모든 부서의 인원들이 저마다의 의견을 가지고 다른 부서와 협력하거나 갈등을 빚을 것이다.

“그 중심에 너희가 있어. 너희가 선택해야 해. 누구의 의견이 더 그럴듯한지, 누구의 의견은 받아들이면 안 되는지. 이게…….”

프로듀싱이다.

성공으로 이어질지 실패로 이어질지 모를 갈림길을 수십 번이나 만난다.

모든 선택에 후회가 남을 것이다.

가지 않은 길의 결과는 어땠을까 자꾸 후회하면서도, 그 후회를 느낄 새 없이 또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서야 알게 될 것이다.

“너희가 옳았는지 틀렸는지.”

때론 기뻐서 울 수도, 때론 슬퍼서 울 수도 있다. 책임은 무거운 짐이면서 찬란한 왕관이다.

“이 프로젝트에 앞서서 내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은 하나야. 최고가 아니라 최선을 택해. 너희의 꿈이 최고의 아이돌이라면 그래야만 해. 시간은, 5년은 짧아. 언제까지고 갈림길 앞에서 고민하고, 최고의 상황이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릴 수만은 없어. 최고를 만드는 것도 아티스트의 능력이지만, 최선을 고르는 게 더 중요해. 자, 그럼…….”

성필은 멤버들은 쭉 둘러보았다.

잔뜩 긴장한 다섯 명의 소녀들. 그녀들은 성필의 입만 보고 있었다.

성필은 입을 열었다.

“누가 먼저 할래?”

소녀연맹의 첫 번째 프로듀서를 정해야 한다.

* * *

백설하는 회의실에 깔린 무거운 공기를 느꼈다. ‘누가 먼저 할래?’란 질문을 받고, 멤버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마치 선생님이 칠판에 모르는 문제를 적어놓고 ‘누가 풀래?’라고 물은 상황 같다.

학생들은 눈을 피한다. 존재감을 죽인다. 자신이 뽑히지 않기를 기다리면서.

‘첫 번째는 부담되지.’

백설하도 그랬다.

‘우리들의 프로듀싱’이란 프로젝트가 진행될 거란 이야기는 꽤 오래전부터 들어왔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직면하니 준비 따윈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았다.

‘무서워…….’

자신의 선택으로 소녀연맹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다. 본인이 프로듀싱을 맡은 앨범의 판매량이 저조하면 얼마나 절망적일까?

‘원래는 연습만 열심히 하면 됐는데.’

이제는 책임을 져야 한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백설하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의 두려움이 그대로 드러났다.

자신을 뮤지션이라고 칭해왔던 백설하다. 그런데 진짜 뮤지션, 아티스트가 될 기회가 오니 도망가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표현하고 싶은 게…… 있긴 있지만…….’

첫 번째는 싫다.

아마 모든 멤버들이 백설하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음, 지원자가 없네.”

성필이 그리 말하자 멤버들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럼 설하부터 하자.”

성필이 너무나 가볍게 말했다.

“……으헤?”

백설하가 어벙하게 답했다. 성필이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하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리카가 벌떡 일어나 크게 박수쳤다.

“이 결정을 지지합니다!”

조아라도 리카를 따라 박수쳤다.

“역시 이런 무거운 자리엔 쌤이 가야죠.”

장하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외엔 없어요.”

신아름이 휘파람을 불었다.

“쌤 멋지다! 소녀연맹 리더!”

그러자 임원들도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축하해 설하야.”

손혜빈이 만면에 웃음을 띠며 프로듀서 백설하를 축복했다.

“믿고 있었습니다 설하 씨.”

한구인은 다 큰 자식이 찾아온 듯 뿌듯한 눈빛으로 백설하를 보았다.

민경섭과 정지음은 풍악이 울리는 것처럼 환호하며 프로듀서 백설하의 탄생을 축하했다.

“뭐어…….”

홍규헌은 살짝 어이가 없단 투로 말했다.

“그럼 결정된 건가?”

“네, 사장님.”

성필이 진중히 선언했다.

“‘우리들의 프로듀싱’ 첫 번째 순서는 소녀연맹의 리더, 백설하입니다.”

몰아치는 박수와 환호, 휘파람 속에서 백설하는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절벽에 서서 태풍을 맞는 수행자와 비슷했다.

그런 백설하가 말했다.

“으헤?”

으엥?

* * *

“다들 너무해애……!”

회의가 끝나고 연습실로 돌아오자마자, 백설하는 장하양에게 안겨 오열했다.

장하양은 거의 한 시간 동안 백설하를 달래야만 했다.

백설하는 멤버들을 손가락질하면서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

“왜 나한테에……! 왜 나한테……! 너무해……!”

“왜 우리한테 그래요. 아저씨가…….”

신아름이 조아라의 옆구리를 찔러서 입을 다물게 했다.

백설하는 충분히 억울할 만했다.

‘우리들의 프로듀싱’ 첫 타자가 되기 싫은 건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성필이 백설하를 지목하자마자 다들 기대했단 듯이 박수를 치다니.

백설하는 세상으로부터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언니, 괜찮아요.”

장하양은 백설하를 안고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언니는 잘하실 수 있을 거예요.”

“흐끅, 으흐윽, 하양아아…….”

백설하가 장하양의 가슴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너도 한통속이었잖아!”

진정되나 싶었는데 또 백설하가 울기 시작했다. 멤버들은 그녀에게 다가가 등을 쓸어주거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방금 내 엉덩이 토닥인 거 누구야?!”

“신아름이요.”

“조아라가 했어요.”

“이거 성추행……!”

“큰일이에요 큰일!”

물을 가지러 간 리카가 연습실로 헐레벌떡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은 뛰어와서인지, 아니면 무언가 이상한 것이라도 보았는지 새빨갛게 달아 있었다.

“아타시(제)가 엄청난 걸 봤어요! 대사건이에요!”

“그래? 이쪽이 더 큰 일일걸?”

“에, 뭔데?”

“쌤이 방금 우리 중 한 명한테 성추행당했대.”

“에엑?”

“그리고 범인은 너야.”

“에에에에에엑?!”

조아라가 리카를 구속해서 바닥에 눕혔다. 리카는 ‘아타시(나)는 무죄야아앗!’이라면서 목청을 높였다.

그런 꼴을 보니, 백설하의 울음도 어느새 그쳐 있었다.

“진짜 대사건이라니까!”

간신히 무죄 방면된 리카가 다시금 기세를 키웠다.

“방금 한 이사님이랑 권아인 경리님이 같이 얘기하는 거 들었는데……!”

리카가 본 상황은 이러했다.

휴게실에서 마주 보면서 이야기하는 두 남녀. 리카는 그들에게 꾸벅 인사하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냈다.

그리고 리카가 휴게실을 나가려 문 앞에 선 순간, 뒤에서 한구인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집에 보내지 않을 겁니다.”

눈물범벅이 된 백설하가 옆에 있던 장하양의 어깨를 팍팍 쳤다.

“아파요 언니…….”

“하, 한 이사님? 두 분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어?! 세, 세상에, 세상에 이런……!”

연애 이야기가 나오자 백설하의 텐션이 급격히 높아졌다. 벌써 그녀의 머릿속에선 뱀처럼 얽힌 한구인과 권아인이 그려졌다.

띠동갑 수준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사랑의 결실을 맺…….

‘망상 그만해!’

백설하는 망상이 너무 자세하고 세세해서 얼굴까지 붉어져 버렸다.

“뭐, 한의사님이면 그럴듯하네.”

조아라는 한구인과 권아인 사이의 나이 차이를 생각해보았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절대 이뤄질 수 없을 차이였지만, 한구인의 외모를 생각하면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누가 먼저 대시했을까? 역시 한의사님이겠지?”

“도둑놈이얏!”

“리카.”

장하양이 낮게 부르자, 리카는 자신의 발언을 수정했다.

“도둑님이얏!”

장하양이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와, 근데 한 이사님 진짜 박력 있다.”

신아름이 실실 웃으면서 한구인의 성대모사를 했다.

“‘오늘은 집에 보내지 않을 겁니다’.”

멤버들이 동시에 기쁨의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아아악!”

“쌤 목소리가 너무 크…….”

기차 경적과 맞먹을 듯한 백설하의 비명에 신아름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백설하의 기색이 이상했다.

백설하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이제 보니 비명도 기쁨의 비명이 아니라 진짜 놀라서 내지르는 비명이었던 것 같다.

신아름과 멤버들은 백설하가 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구인이 서 있었다.

“……아름 씨, 방금 저 따라 하신 겁니까?”

한구인은 성필에게 ‘한 이사님 로봇 아니세요?’라며 놀림 받곤 한다.

안 그래도 로봇처럼 딱딱한 말투에 살짝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한구인이다. 그런데 신아름이 한구인 자신의 말투를 유머 소재로 쓰고 있는 모습을 보니, 우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 어, 아, 아니…….”

신아름이 당황해서 변명하려던 때, 리카가 위풍당당 한구인 앞에 섰다.

“도둑님!”

“예?”

“이미 다 밝혀졌어요! 아인 언니랑 무슨 사이신가요! 알려주지 않으시면 사내 게시판에 다 퍼뜨릴 거예요!”

“무슨 소리십니까.”

“아앙 그냥 들려주세요오! 궁금하단 말이에요!”

한구인은 자초지종을 듣고 피식 웃었다.

“오늘 야근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던 겁니다.”

“누가 야근하자는 말을 ‘오늘은 집에 보내지 않을 겁니다’라고 하나요?! 보통 인간의 감성이 아니라구요!”

“…….”

“하, 한 이사님이 보통 인간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었어요!”

“괜찮습니다.”

“알아주셨네요!”

“전에도 리카 씨는 저한테 ‘공감 능력이 너무 없으세요’라고 하셨으니까요. 리카 씨가 저한테 쌍욕을 하시더라도 충격받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리카 너 진짜 너무한다. 한의사님한테 그렇게 말했어?”

“그렇게 안 봤는데 리카…….”

“아, 아니에……!”

리카의 머릿속에 과거가 스쳐 지나갔다.

성필이 백설하에게 연락받았을 때, 한구인이 ‘그린라이트 아닙니까?’라고 했던 때였다.

실제로 리카는 한구인에게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리카는 변명을 그만두고, 만화처럼 자신의 머리를 콩 때렸다.

“에헷!”

“진짜인가 봐. 피도 눈물도 없는 년.”

“아라쨩 말이 심하잖아?!”

아무튼, 한구인은 연습실로 오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여러분들이 사용하시는 계좌에 변동 사항이 있는지 조사하기 위해 왔습니다. 한 번씩 봐주십시오.”

“이런 걸 한 이사님이 직접 하세요……?”

나름 이사인데.

“예, 뭐, 제가 해야지 어쩌겠습니까.”

멤버들은 한구인이 준 서류를 쓱 훑고 문제가 없으면 옆으로 넘겼다.

마지막 차례인 조아라가 서류를 읽고 손을 들었다.

“나 바뀌었어요. 얼마 전에 야자수 뱅크 카드 만들어서요. 보여줄까요?”

“괜찮…….”

조아라가 핸드폰 케이스에서 체크카드를 뽑아 보여주었다. 단무지가 모티브인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어때요, 귀엽죠?”

“예.”

“한의사님도 하나 만들어요. 노란색은 내 거니까 안 겹치게 다른 걸로요.”

“저는 괜…….”

“아 만들라고요! 사람들이 많이 써야 야자수 회사가 새 캐릭터도 뽑고 상품도 많이 만들 거 아니에요!”

“한 이사님 얘한테 뭐라고 좀 해줘요.”

신아름이 지친 투로 말했다.

“우리한테 자꾸 야자수인지 카카오인지 하는 거 카드 만들라고 해요. 이 정도면 야자수한테 뒷광고 받은 거 아녜요?”

“아니 귀엽잖아. 이렇게 귀여운데 왜 안 만들어?”

“아라쨩이 더 귀여운데!”

한구인은 21살들의 대화를 보고 귀엽단 듯 미소 지었다. 그는 조아라에게 펜을 빌려주어 새로 만든 계좌를 적으라고 한 뒤 서류를 돌려받았다.

“그래서 아인 언니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예, 절대 아닙니다. 애초에 나이 차가…….”

“사랑에 나이는 상관없어요.”

다들 뜬금없이 끼어든 장하양을 보았다.

장하양은 다시금 명확히 말했다.

“사랑에 나이는 상관없어요.”

“……예, 맞는 말씀입니다. 아무튼 더 변동 사항이 있으신 분이 없으면 가보겠.”

“사랑에 나이는 상관없어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별일이네요. 재무팀은 야근 잘 안 하잖아요. 칼퇴의 대명사 같은 곳 아닌가.”

“아름 씨, 말씀에서 악의가 느껴지는군요. 맞는 말씀입니다만, 곧 회계 연도가 끝나지 않습니까.”

“회계 연도요?”

“회계에서 재무제표를 계산하는 기간…….”

“알겠어요.”

“……아신 겁니까?”

“네. 그냥 해가 바뀌었단 거잖아요.”

한구인이 감탄했다.

“그러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여러분, 올해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멤버들은 떠나가는 한구인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던 차, 한구인은 문 앞에 멈춰서 별거 아니란 듯 말했다.

“그리고 아까 회의에서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1월 1일부터 1월 31일까지 여러분에게 휴가가 주어집니다. 즐거운 휴가 보내시길.”

한구인이 미소 지으면서 연습실을 나갔다. 그는 잠시 연습실 문 앞에 서 있었다.

잠시 후, 다섯 명의 기쁜 비명이 문을 뚫고 새어 나왔다. 한구인은 아까보다 짙게 웃곤 연습실 앞을 떠났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한구인은 걸으면서 멤버들의 계좌와 인적 정보가 적힌 서류를 보았다.

‘그리고, 이제 그 고생의 보답을 받으실 겁니다.’

* * *

“뭔가 한 이사만 두고 온 거 같아서 걸리네.”

홍규헌은 무릎을 굽혔다 펴면서 간단하게 스트레칭했다. 성필은 그녀의 모습을 유심히 보았다. 그리고 예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사장님. 왜 헬스장에 젊은 여성분들은 항상 따로 옷을 가져와서 입는 거예요?”

성필이 짐(Gym)의 풍경을 전체적으로 둘러보았다. 홍규헌의 시선도 그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퇴근하고 함께 운동하러 왔다. 바디 프로필을 목표로 같은 짐에 등록한 지 어언 1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젊은 남자보다 젊은 여자들이 개인 옷을 입는 경우가 더 많잖아요.”

“뭐어, 박 이사는 왜 그런다고 생각해?”

“딱히 고민해본 적은 없는데…….”

“줄 움직인다.”

성필은 줄이 줄어든 만큼 앞으로 걸었다.

세 발자국 걸어서, 다시 멈췄다.

두 사람은 러닝머신을 기다리는 줄의 중간에 있었다.

“이래서 퇴근 시간 딱 맞춰서 오기 싫었는데. 무슨 백화점 명품관 오픈런하는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죠. 신년 다가와서 등록한 사람들이 늘었잖아요.”

“그래서, 이유는?”

“아무래도 여자들이 청결에 더 민감한가요? 헬스장에서 나눠주는 옷을 더럽다고 생각해서…….”

“예뻐 보이려고 개인 옷 가져오는 거야.”

“…….”

성필은 홍규헌의 차림새를 보았다.

배꼽 위까지 올라오는 검은 레깅스에 크롭티를 입고 있다.

평소 홍규헌은 몸을 갑옷처럼 감싸는 정장을 입는다. 그러니 처음 홍규헌의 운동복 모습을 보았을 때, 성필은 혼자 민망해져서 눈 둘 곳을 찾을 수 없었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지만, 왠지 모를 배덕감마저 느꼈었다.

“그럼 사장님도…….”

“그리고 뭔가 자존심이 있지.”

“자존심요?”

“몸이 좋은 남자들은 개인 옷 입고 오는 경우가 많잖아. 그런 거지.”

성필도 우락부락한 어깨 깡패 형님들의 딱 달라붙는 옷을 보고 감탄한 적이 많다.

당장 성필의 앞에도 그런 형님이 서 계시다.

“남자 여자 다 저마다의 전투복이 있는 거야. 애초에 박 이사도 지금 개인적으로 가져온 옷 입고 있잖아. 뭐야 이게.”

홍규헌은 성필의 민소매 티를 가리켰다. 성필의 티 옆구리 부분은 겨드랑이부터 갈비뼈까지를 노출하고 있었다.

“이건 무슨 미학적 효과가 있는 거야? 그냥 겨드랑이에 땀 잘 마르라고 이렇게 만든 건가?”

“등 근육 보이잖아요. 보이십니까, 제 광배근과 활배근이.”

“한 이사가 없어서 그런가, 박 이사가 오늘따라 기가 살았네.”

“바디 프로필 찍기로 한 때가 다가오잖아요. 알 수 없는 자신감이 막 솟아나고 그래요.”

둘은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러닝머신 위에 올랐다.

“사장님 시속 11km로 경주?”

“박 이사, 오래달리기는 근육이 더 적은 쪽이 유리한 건 알아?”

“12km로 경주?”

“그냥 10km로 가볍게 하자.”

“넵.”

홍규헌은 달리는 성필을 흘끗흘끗 보았다. 딱히 그의 광배근인지 활배근이 신경 쓰이는 건 아니었다.

‘긴장한 게 얼굴에 다 드러나네.’

오늘따라 성필은 한숨이 많았고 자주 자신의 손을 조몰락거렸었다.

‘걱정되겠지.’

아이돌 멤버에게 프로듀싱 권한을 부여한다는 사상 초유의 프로젝트가 개시되기 직전이다.

물론, 흔히 ‘자체 제작 아이돌’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계속 존재해왔다. 스스로 프로듀싱을 하여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아이돌들이, 분명 있다.

‘그런데 이건 경우가 다르지.’

자체 제작 아이돌은 회사가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아이돌이 프로듀싱에 두각을 나타내어 곡을 쓰고 작사도 하고 의상도 준비하고 무대도 연출하고, 그런 경험과 실적이 쌓여 회사가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성필이 하려는 건 그것과 정반대다.

‘프로듀싱에 재능이 있어서 기회를 주는 게 아니라, 프로듀싱을 하길 바라서 기회를 주는 거.’

그렇기에 도전이다.

물론 홍규헌은 성필이 소녀연맹을 믿는단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믿음과 불안은 별개다.

부모가 자식의 성공을 믿지만,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것처럼.

“박 이사, 혹…….”

그때 러닝머신의 거치대 위에 올려둔 성필의 폰이 진동했다. 액정에 떠오른 이름을 보자마자 성필의 얼굴이 확 펴졌다.

홍규헌은 소녀연맹 멤버에게 전화가 왔나 싶었는데.

“네, 에리카 씨 안녕하세요!”

“…….”

홍규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달리는 것에 집중했다.

“아니, 숨 거칠게 쉬는 건 달리고 있어서 그런 거예요. 네? 진저 씨 노래 부르는 영상이랑 호흡 거친 거랑 무슨 상관…… 네. 아무튼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연락하셨…… 맞습니다. 토모(친구)끼리 연락하는 데 이유는 필요 없죠 네.”

“…….”

홍규헌의 가슴속에서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당장 얼마 전, 진저와 KS 엔터의 직원이 가로 엔터까지 찾아왔었다.

아직도 그때의 일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그런데 성필이 케이어스 멤버와 사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것을 보니, 홍규헌은 심란해졌다.

‘진짜 KS 엔터가 박 이사를 빼가려는 거야? 말이 안 되잖아. 케이어스가 왜 다른 회사 이사한테 이렇게 친근히 대하냐고.’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

KS 엔터가 성필의 팬심을 파악하고 케이어스에게 지시를 내린 거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네?!”

성필이 놀라서 휘청였다. 그는 급히 러닝머신의 속도를 줄이고 되물었다.

“정말 설하가 그랬어요?”

* * *

숙소로 돌아온 멤버들은 들떠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야말로 지구를 한 바퀴 돈 해외 투어를 끝냈더니 무려 1개월의 휴식을 얻었다.

콘서트에서 체력을 많이 써서 그런지, 얻어낸 휴식이 더욱 달콤했다.

백설하는 침대에 누워 꿈을 그렸다.

“하양아, 우리 다 같이 여행 갈까?”

“여행이요?”

장하양이 책을 읽다 말고 백설하를 보았다. 백설하는 얼굴 가득 행복을 담고 있었다.

“응. 펜션 빌려서 고기도 구워 먹구, 밤에 와인도 마시구, 얘기도 하구…….”

“펜션이면, 운전은 누가 해요?”

“아라가 하면 되지 않을까? 운전면허 있으니까. 차는 렌트하고. 아, 돈은 걱정 마. 리더가 다 낼게!”

“애들이랑 얘기해보셨어요?”

“응? 아니.”

장하양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언니는 우리 전부 당연히 갈 거라고 생각하시네.’

백설하는 일말의 의심도 없었다.

‘놀러 가자!’라고 하면, 당연히 다들 ‘네!’라고 말하며 따를 줄 아는 것이다.

온전히 얻은 1개월의 휴가다.

과연 1년 365일 계속 같이 있는 멤버들과 보내고 싶을까?

소녀연맹 멤버들은 친하다. 하지만 그게 영원히 붙어 있겠단 뜻은 아니다. 관계 유지를 위해선 때론 떨어지는 것도 필요하다.

‘나는 갈 거지만…….’

동생 라인도 다들 갈지는 모르겠다.

장하양은 순진무구한 기대를 품은 백설하의 얼굴을 보며 인자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저 미소를 지키는 게 장하양의, 동생의 의무일 것이다.

“헤헤, 기대된다. 뭐 먹을까?”

“언니, 저 잠시 화장실 좀…….”

장하양은 백설하보다 앞서 동생들을 설득(물리적 의미 포함)하려고 방을 나섰.

“어, 박 이사님이다.”

방을 나서려다가 장하양이 스르륵 들어왔다.

“화장실 안 가?”

“살짝 더 참고 싶은 기분이에요.”

“어…… 그래?”

백설하는 전화를 받았다.

휴가 때문에 들떠 있어서 그런지, 그녀는 ‘우리들의 프로듀싱’ 첫 타자가 된 부담감도 전부 사라져 있었다.

오로지 행복만을 담아 말했다.

“안녕하세요 이사님!”

[설하야 넌 휴가 없다.]

“네?!”

백설하, 절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