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80화 (380/760)

380화

먼 과거. 양소민이 중학생이며 성필이 20대 중반이던 시절.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과거의 순간을, 양소민은 사소한 것 하나 빼놓지 않고 기억했다.

“소민아, 나랑 체스 둬볼래?”

처음 성필이 그리 말했을 때 양소민은 굉장히 당황했었다.

양소민은 붙임성이 없던 터라 다른 연습생들과 말도 잘 섞지 못했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데리러 오기 전, 연습실 구석에 앉아 폰만 꼼지락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성필이 찾아와서 체스를 두자고 한 것이다.

“네, 네?”

양소민은 구형 폴더폰을 덮고 공벌레가 몸을 말듯이 어깨를 움츠렸다.

‘호, 혼내시는 건가?’

어머니가 데리러 올 때까지 오늘 연습에서 미흡했던 부분을 점검하진 못할망정, 핸드폰으로 게임이나 하고 있느냐.

성필이 그리 말하는 건가 싶었다.

양소민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녀는 버릇처럼 눈을 내리깔고 목소리를 떨었다.

“죄, 죄송합…….”

“짜잔.”

성필이 등 뒤에 숨기고 있던 체스판을 꺼냈다. 과한 광택 처리가 된 싸구려 목제 체스판이었다.

양소민은 겉모양만 보고도 그 체스판이 중국에서 생산된 것임을 알아챘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체스 좋아하지? 소민이랑 같이하려고 하나 샀어. 근처 마트 보드게임 코너에 갔는데 안 팔아서, 여러 군데 돌아다녀서 겨우 산 거야.”

석세스 엔터의 매니저.

항상 싸늘하고도 격한 모습을 보여주는 성필이, 양소민 자신과 체스를 하려고 직접 체스판까지 사 왔다.

혼내는 것일 리 없다.

“해볼래?”

성필의 물음에 양소민은 쭈뼛쭈뼛 답했다.

“네…….”

양소민은 어쩌다 보니 석세스 엔터의 연습생이 되었다. 학교를 마치면 이곳으로 와서 즐겁지도 않은 연습을 한다.

주말에도 어김없이 온다.

어디건 마찬가지지만, 매일이 지옥이다.

그렇지만 성필이 체스를 하자고 권해준 그 날은, 그날만은 조금 달랐다.

“하, 할래요.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뻣뻣하게 안 있어도 돼. 노는 건데 뭘. 아, 그리고 나 좀 잘할 수도 있다? 나 인터넷에서 체스 공략 보고 왔거든.”

“……크흨.”

“웃어?”

“죄, 죄송합니다…….”

성필은 평소와는 달리 친근하게 웃어주었다.

양소민은 아이돌 따위에 관심도 없었다. 애초에 세상 모든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저 학교를 마치고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무료 체스 프로그램으로 컴퓨터와 체스를 두는 것. 그게 인생의 낙일 뿐인 아이였다.

양소민의 어머니는 딸에게 관심이 지대했다.

중학생이 된 딸의 외모가 주변과 비교하여 월등히 뛰어난 것을 확인한 후로는 더했다.

“멋지다…….”

어느 날, 양소민의 가족은 저녁을 먹으면서 텔레비전을 보았다. ‘음악세상’이 하고 있었다.

양소민은 음방 1위인 ‘다키스트’의 무대를 보며 무심코 그리 말했다.

어머니는 딸의 ‘멋지다’가 ‘다키스트가 멋지다’가 아닌 ‘아이돌이란 건 멋지구나’로 이해했다.

딸이 아이돌이 되고 싶은 거라고, 아이돌에 재능이 있는 거라고 멋대로 비약시켰다.

“나 못 해! 안 갈래!”

어머니는 딸을 억지로 여러 기획사에 데리고 다니며 오디션을 보게 했다.

억지로 학원도 다니게 했다.

그날부터 양소민의 세계는 지옥과 가까워졌다. 원치도 않은 것에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쓰는 것만큼 인간을 괴롭게 만드는 것도 없으니까.

“소민아 넌 할 수 있어. 우리 딸, 힘내.”

그렇게 양소민은 오디션을 참 많이도 보게 됐다. 당연하게도, 배운지 얼마 안 된 춤이나 노래로 결과가 좋을 리 없었다.

심지어 자신감이나 개성도 없었으니, 기획사들은 양소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양소민은 오디션을 싫어했지만, 어떤 것에서 떨어진다는 게 기분 좋은 경험일 리 없었다. 그녀는 지쳐갔고, 자신에게 실망했고, 더욱 세상에 흥미를 잃어갔다.

그러던 도중 석세스 엔터가 양소민을 합격시켜 연습생으로 받아들였다.

“팀장님.”

양소민이 고등학생이며 성필이 30살에 다가갈 무렵, 두 사람은 체스를 두며 이야기했다.

몇 년 동안 성필은 양소민을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성필이 끙끙 앓으면서 퀸을 움직였다.

“응?”

“왜 그때 저한테 체스 두자고 해주셨던 거예요?”

“나도 모르겠다. 그때 안 그랬으면 이렇게 매일 연전연패하진 않았을 텐데.”

양소민의 손에 들려 있던 나이트가 성필의 퀸을 잡아먹으려다 움찔 멈추었다.

양소민은 손을 미세하게 떨곤, 원래 가려던 경로 대신 다른 곳으로…….

“접대하지 마. 퀸 잡을 수 있는 거 뻔히 보이잖아.”

“…….”

양소민의 나이트가 성필의 퀸을 먹었다.

“난 왜 이렇게 시야가 좁을까. 상대 말 위치 계산은 기본인데.”

“과, 과로 때문에 그러신 거예요. 재미…… 어, 없죠? 다른 거 해요…….”

체스에서 퀸이 잡힌 건 곧 패배나 다름없다. 미들 게임은 물론 엔드 게임에서 이길 가능성이 전무하다.

성필은 자신의 킹을 스스로 쓰러뜨림으로써 패배를 선언했다.

“한 판 더 하자.”

“…….”

“소민아. 내가 너한테 한번도 이긴 적이 없긴 한데, 재미없다거나 의미 없다고 생각하진 않아.”

성필이 체스판의 말들을 다시 배열했다.

“나는 말야, 인생에서 진정으로 원했던 걸 얻지 못했던 적이 한 번도 없어. 자뻑처럼 들리겠지만, 정말 그래. 항상 이겨왔어. 그런데 체스는…….”

거듭된 패배는 성필에게 겸손해지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성필은 양소민을 바라보았다.

이 작은 체구의 소녀는, 체스판 위에선 성필보다 수천 배는 대단한 인간으로 변모한다. 그녀는 장군이고 왕이며 황제다.

성필은 양소민을 보며, 인간은 보이는 것 이상의 잠재력을 가진 존재란 사실을 배웠다.

“왜 너한테 같이 체스하자고 했는지 물었었지? 사실대로 말하면, 네가 불쌍해서였어. 항상 혼자만 있고, 연습 때도 혼나고, 우울한 표정만 짓고 다니니까. 내가 친해지고 놀아줘서 조금이나마 밝아졌으면 하고 바랐어.”

너무 단도직입적인 답이라 양소민은 할 말을 잃었다.

“그래 뭐, 선생들이 학생들한테 관심 가져주고 신경 써주는 그런 느낌이었지.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하면, 소민이랑 친해져서 가장 덕을 본 건 나인 거 같아.”

체스판의 말들이 다시 제각기 위치를 잡았다. 성필은 규칙적으로 줄지은 판 위를 뿌듯하게 바라보고, 시선을 올려 양소민을 바라보았다.

“소민이한테 여러 가지로 많이 배웠어. 고마워. 처음엔 그래, 좀 오만한 마음가짐이었지. 친하게 ‘지내줘야지’란 그런 거. 하지만 지금은 소민이랑 이렇게 보내는 시간이 좋고, 조금은 밝아진 소민이를 봐서 더 좋고, 여하튼 그래.”

“…….”

“좀 기분 나쁘지?”

“아뇨…….”

“항상 하고 싶은 말이었는데 이제 하게 되네. 다시 부탁할게.”

“네?”

“대등한 입장에서.”

성필이 손을 내밀었다.

“소민아, 나랑 체스 둘래?”

성필은 이전처럼 양소민을 학생이나 어린아이로 대하지 않았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그녀에게 요청하고 있다.

이 시간을 이어 나가고 싶어서.

양소민도 그것을 알았다. 그래서, 기꺼이 성필의 손을 맞잡고 악수했다.

“네!”

다시 한판이 시작되었다.

게임이 중반에 접어들자 양소민이 물었다.

“왜 저를 연습생으로 받아주셨어요?”

“오늘 아주 궁금한 거 다 물어보네.”

당시 오디션 심사위원으로 성필도 참석했었다. 그리고 양소민의 영입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게 성필이었다.

“그걸 이제 와서 묻는 거야?”

“헤헤…….”

사실 계속 물어보고 싶던 것이다. 다만 물어볼 용기가 없었을 뿐이었다.

양소민은 긍정적인 답을 기대했다. 혹시 자신에게 엄청난 잠재력이 보였다거나, 다른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아우라가 있었다거나.

“그야 통과시킬 이유가 하나도 없긴 했지.”

“…….”

양소민이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성필은 그것을 귀엽단 듯 보았다.

“춤도 못 춰. 노래도 못 해. 개인기도 없어. 명백히 그날 오디션 참가자 중 하위권…… 중하위권? 그랬었으니까.”

“그런데 왜요, 왜 받으셨어요…….”

“진짜 더럽게 하기 싫어하는구나 싶어서.”

“……네?”

“아이돌에 관심도 없고 되고 싶지도 않은데, 오디션에 필사적이었잖아. 연습을 게을리한 상태에서 온 것도 아니고.”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고 싶지 않은데 왜 저렇게 노력했을까? 그리고 왜 오디션에 전심전력으로 임할까?

“상처받을 수도 있는데, 사실대로 말해도 돼?”

“이미 상처받았는데요…….”

“‘아, 얘는 그냥 시키면 하는 애구나’라고 생각해서 받았어. 아이돌을 싫어하건 뭐건 위에서 시키면 열심히 하는 애니까. 성실, 중요하잖아? 노동자로서 최고의 미덕이지. 1년 365일 트레이닝 뺑뺑이 돌리려고 했지.”

“너무해요오…….”

양소민은 이런 답을 기대한 게 아니었다.

‘굉장한 아우라나 존재감을 느꼈다’ 같은 답은 아니더라도, ‘내 마음에 들었다’ 정도는 기대했었으니까.

그런데 돌아온 답이 이거라니…….

“뭐, 농담이고.”

“아…….”

양소민이 안도하여 가슴을 쓸어내렸다.

“트레이닝 뺑뺑이 쪽이 농담이라고. 나머진 다 진담이야.”

“…….”

“소민이는 굉장히 열심히 노력해. 의지도 있어. 그런데 하나가 없었어. 그것만 있으면 되는데 말야. 그리고 내가 그걸 채워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것만 있으면, 소민이는 완벽한 아이돌이 된단 판단이었지.”

“……뭔데요?”

성필이 씩 웃으면서 말했다.

“소민아, 네 목표가 뭐야?”

그에 양소민이 반사적으로 답했다.

석세스 엔터에 들어왔을 때부터 성필에게 질리도록 들어왔던 말을, 일말의 고민도 없이 꺼냈다.

“세계 최고의 아이돌…….”

그제야 양소민은 성필이 말한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눈치챘다.

“목표…….”

양소민은 시키는 건 전부 하는 아이였다. 그래서 어머니가 아이돌이 되라고 하는 것도 큰 반항 없이 성실하게 수행했다.

본인은 괴롭지만, 그녀의 몸은 착실히 아이돌에 다가가고 있었다.

성필은 그 괴로움을 없애줄 방법을 알았고, 그래서 양소민을 받아들였고, 마침내 그녀의 괴로움을 없앴다.

“어때, 누가 억지로 시켜서 하는 것보다야 지금이 훨씬 낫지?”

“하, 하지만 저는 애들 중에서 특출나게 뛰어난 것도 아니구…….”

“소민이처럼 성실히 하면 언젠가는 닿을 수 있을 거야. 적어도 멈춰 있거나 뒤로 가는 건 아니잖아.”

“데뷔할 수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는데…….”

양소민은 무릎 위에 손을 얹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면서도 눈을 흘끗 위로 돌려 성필을 보았는데, 그가 ‘할 수 있어’라고 말해줄 걸 기대했기 때문이다.

성필이 머쓱하게 말했다.

“그건 그렇지.”

“…….”

“소민아 파이팅! 더 열심히 해서 데뷔조로 뽑히는 거야!”

“…….”

“세계(Globe)를 노리자!”

약 5분 후, 가차 없는 체크메이트.

성필은 또 패배를 맛보았다.

이렇듯 양소민에게는 성필과의 추억이 많았다. 어쩌면, 그녀는 석세스 엔터에서 신아름 다음으로 성필과 오랜 시간을 보낸 연습생일지도 몰랐다.

성필은 양소민과 친구가 되어주었다.

성필은 양소민에게 목표를 주었다.

성필은 양소민에게 꿈을 주었다.

그런 성필을, 양소민은 오늘 만난다.

바쁜 걸음으로 회사를 나섰다. 겨울바람에 폐가 쓰려오는 것도 잊고, 그녀는 하얀 입김을 규칙적으로 뱉으면서 달렸다.

김태훈이 알려준 카페로, 달렸다.

카페로 들어갔다.

구석 자리에서 김태훈이 손을 흔든다. 그리고 그 앞에는 성필의 뒷모습이 있다.

양소민은 앞머리를 정돈하면서 떨리는 걸음으로 그쪽을 향해갔다.

충분히 가까워졌을 때, 양소민은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로 그를 불렀다. 수년의 그리움과 반가움을 담아서.

“팀장님!”

김태훈이 말했었다.

‘소민아, 시간 괜찮아?’

그가 말했었다.

‘박 팀장 보러 갈 건데.’

그가 분명히.

‘한번 얘기해보려고.’

말했었다.

‘다시 우리 회사로 올 거냐고.’

성필이 고개를 돌렸다.

33살의 성필은, 양소민이 보기에 처음 봤을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의 시간은 멈춰 있어서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앞으로 나아가길 바라지 않아서, 그녀는 과거만을 바라보고 있다.

양소민 자신은 여전히 학생이고, 성필은 여전히 20대이다.

그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오늘부터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성필이 다시 돌아오기만 한다면.

“아, 죄, 죄송합니다. 연습이 늦게 끝나서요. 팀장님 아, 안녕하세요. 오랜만, 그, 잘 지내셨죠……?”

성필이 돌아오기만 한다면,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양소민의 시간은 봄볕을 맞고 녹아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 * *

글로브(Globe)는 성필이 지은 그룹 이름이다. 세계적인 아이돌이 되겠단 포부를 담은, 성필과 김태훈의 꿈이 담긴 이름이다.

그룹 멤버 한 명 한 명은 성필이 품은 꿈의 조각들이다.

신아름을 대신한 라희.

세라.

정진.

유현.

노아.

지유.

소민…… 양소민.

꿈의 조각 중 하나가 성필의 앞에 있다.

“잠시 얘기 나눠.”

김태훈은 몸을 일으켜 자리를 떠나갔다. 그가 어디로 가는 건지, 성필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의 정신은 오로지 양소민에게로 쏠려 있었다. 그녀는 성필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괜히 앞머리만 만지작거리면서 테이블을 보았다.

“전에는 죄송했어요. 갑자기 집에 찾아가서 많이 놀라셨죠?”

부끄럽거나 당황하면 말을 더듬곤 하는 양소민. 그녀는 방금 조금도 더듬거리지 않았다.

성필과 만나면 할 인사를 머릿속으로 수백 수천 번은 되새긴 것이리라.

“다행이에요. 팀장님이랑 대표님이 이렇게 만나서 이야기도 나누시고. 팀장님 떠나시고 대표님도 많이 힘들어하셨어요.”

툭, 양소민의 말이 끊겼다. 그녀는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아까보다 물기가 서린 목소리를 내었다.

“저희도 히, 힘들었구요…….”

저희, 글로브.

성필은 전생을 떠올렸다. 글로브와 함께 동고동락했던 나날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처음 음악 방송에서 1위를 했던 때, 그녀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울었었다.

성필은 아예 자리에 주저앉아서 오열했었다. 그런 성필을 글로브 멤버들이 달래주었었다. 자신들보다 나이 많은 어른이 바닥에 널브러져 오열하는 것을 보고 계속 울 수는 없었으니까.

또, 앨범 판매량이 처음으로 10만의 벽을 넘었을 때도 떠올랐다.

이제 자신들도 월드 클래스라면서,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지 모른다면서, 글로브는 성필을 향해 장난스레 뻗댔었다.

연말 대중음악 시상식에서 대상을 받았던 때도 있었다.

일곱 명이서 트로피 하나를 붙잡고 하늘 높이 별을 향해 뻗었었다.

회사 직원들은 가마를 빌려, 정말 그녀들을 태우고 회사를 돌아다녔었다. 성필이 가장 앞에서 가마를 끌었었다.

글로브 멤버들은 한 명씩 가마에 타서 울고 웃고, 그리고 한 명도 예외 없이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7년 차, 그녀들에겐 마지막 기회인 때가 떠올랐다.

글로브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케이어스를 이기지 못했었다. 그게 한스럽다면서, 멤버들은 저마다 굵은 눈물을 떨어뜨렸었다.

그때의 양소민은 성필에게 이리 물었었다.

‘제가 부족했던 걸까요……?’

지금의 양소민도 똑같이 물었다.

“제가 부족했었나요……?”

성필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과거를 회상하는 동안 양소민의 이야기는 하나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리라. 그녀는 웃음으로 만든 가면을 쓰고, 미리 준비해온 가식적인 말을 했을 뿐이었으니까.

지금이, 슬픈 표정을 짓는 지금이 양소민의 진심이었다.

“제가 부족해서…….”

양소민은 눈가를 닦았다.

“아니, 죄송해요. 세라 언니가, 세라 언니가 그랬어요. 팀장님은 꿈을 이루러 가신 거라고요. 석세스 엔터에선 할 수 없는 일을 하러 가신 거라고요. 그러니까 원, 원망 안 해요…….”

양소민은 괜한 이야기를 했다는 듯 서서히 새어 나오는 울음을 삼키고 환하게 웃었다.

“저도 팀장님 마음 알아요. 그래도, 돌아오셨으면, 좋겠어요.”

굳이 김태훈을 만나러 왔단 건 성필이 흔들리고 있단 증거일 것이다.

양소민은 그리 믿었다.

성필이 석세스 엔터로 돌아올 확률이 0은 아니라고. 아니, 꽤 높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게, 성필이 아닌가.

현재 글로브 멤버들에게 그토록 마음을 주었었던 성필이니까. 안 돌아오고 싶을 리 없다.

“오실…… 건가요……?”

성필은 답하지 않았다.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양소민의 얼굴도 어두워져 갔다. 그리고 그녀는 깨달았다. 깨달아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기로 했다.

설득.

“오시면 더, 더 열심히 할게요.”

성필의 이상이 높단 건 안다.

“팀장님이 만족하실 때까지.”

그래도 닿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저는 아직도 부족하지만, 더 노력할게요.”

지금보다 훨씬 더.

“세계 최고가 될게요…….”

그러니까 제발 돌아와 주세요.

너무 힘들어요.

제가 아이돌로 있고 싶던 곳은, 팀장님이 없는 곳이 아니에요.

제발…….

“소민아.”

마침내 성필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양소민은 그의 심중을 짐작했다.

더는 흐느낌을 참을 수 없었다.

기대했던 만큼 더 서러워졌다.

“왜 아름이만 데려가신 거예요……?”

목소리를 내려던 성필의 입이 꾹 닫혔다.

“저한테도, 말씀해주셨으면, 갔을, 텐데.”

신아름보다 부족한 건 안다. 그래도 성필이 불러주길 바랐다. 불러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결국 성필이 가져간 별의 조각은 하나뿐이었다. 글로브의 리더가 됐을, 석세스 엔터에서 가장 뛰어났던 연습생.

“갔을 텐데…….”

양소민은 무릎 위에 올려둔 주먹을 부서져라 꽉 쥐었다. 눈을 질끈 감으면서 울음을 참았다.

닫힌 눈꺼풀이 어둠을 보여주었다. 그것을 스크린으로 삼아 과거의 기억이 솟아올랐다.

성필의 집으로 갔을 때, 핸드폰과 연동된 그의 태블릿엔 사진이 계속해서 업로드되었었다.

성필이 찍은 야유회의 사진이었다.

그 사진들엔 행복한 얼굴의 신아름이 많이도 있었다.

양소민은 계속 생각했다. 저곳에 있는 게 신아름이 아니라 자신이 될 수도 있었으리라고.

하지만 결국은 이 모양 이 꼴이다.

“옛날이랑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어요…….”

어머니가 아이돌이 돼라며 막무가내로 떠밀었을 때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 여전히 양소민은 외롭고 고통스러우며 억압받는다.

“제가, 제가 너무…….”

양소민은 흐느끼면서 말했다.

“제가 너무 한심스러워요……. 아름이만큼 뛰어났으며언…… 제가 그랬으면…….”

“소민아.”

성필이 양소민의 어깨를 붙잡아 그녀의 떨림을 멈춰 세웠다. 그녀는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성필을 바라보았다.

“나는, 성공할 거야. 소녀연맹으로, 성공할 거야.”

성필은 무표정으로 띄엄띄엄 말했다. 그 기계적인 말투는 그가 어떤 감정을 참고 있으리라 예상하게 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어서, 석세스 엔터 지분을 사들일 거야. 지분을 계속 모아서, 석세스 엔터 이사회에 우리 사람을 앉힐 거야. 이사를 계속 늘리고 늘려서, 대표를 바꿀 거야.”

성필의 목소리에 떨림이 끼어들었다. 그곳에 담긴 건 자기혐오였다.

이토록 괴로워하는 양소민에게 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이것뿐이라는 게, 너무나도 혐오스럽다.

“바뀐 대표한테 지시할 거야. 석세스 엔터를 팔라고. 그러면 우리가 살 거야. 우리, 가로 엔터가. 그러면 소민아, 그때 만나자. 그때 같이 있자. 함께 옛날처럼 세계를 보고 나아가자.”

그러니까, 소민아.

“나는 석세스 엔터로 안 가.”

성필은 말을 쉬었다.

그는 두려웠다. 이 말을 양소민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서.

하지만 해야만 했다.

인간 대 인간으로, 그녀에게 부탁했다.

“소민아, 기다려줄래?”

양소민의 흐느낌이 잦아들었다. 그녀는 짧게 웃음을 뱉곤, 눈물 위에 미소를 걸었다.

“팀장님, 저는 이제까지 세계 최고의 아이돌이란 게 제 꿈인 줄 알았는데요. 아니었네요.”

양소민이 훌쩍이며 말을 이었다.

“제 꿈은 팀장님한테 있었나 봐요. 팀장님 꿈을 빌리고 있었나 봐요…….”

미소가 걸렸던 그녀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녀는 어깨에 얹어진 성필의 손을 부드럽게 털어내고, 말했다.

“팀장님, 저는 아이돌이 싫어요…….”

성필은 그대로 굳었다.

메두사의 눈을 바라본 사람처럼 굳어버렸다.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아이돌이 싫다’고 말하는 아이돌에게, 성필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이돌이란 게 너무 싫어요…….”

이번에야말로 성필은 울고 싶었다.

별의 조각이, 자신이 별이란 사실을 혐오하고 있었다. 빛이 바래가고 있다.

그 순간, 양소민이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도망가고 싶지 않아요. 정말 싫어하는 아이돌에서 도망가기 싫어요. 싫어하니까, 이기고 싶어요.”

성필이 가만히 있자, 양소민은 몸을 일으켜 직접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그의 손을 이리저리 만져서 악수하는 모양새로 만들었다. 그녀가 손을 흔들어 악수했다.

“기다릴게요.”

양소민이 눈물 범벅인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너무 늦으시면 안 돼요.”

환하게, 웃었다.

“박 이사님.”

* * *

밤 9시가 넘었다.

글로브 멤버들은 연습실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때 연습실 문이 열리면서 어깨와 머리에 눈을 맞은 양소민이 들어왔다.

바닥에 벌러덩 누워 있던 정진이 킥 업으로 순식간에 일어났다.

“소민아 방금 윤상열 그 새끼가 뭐라고 했는지 알…….”

양소민은 정진을 무시하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정진이 멍하게 그녀가 들어간 곳을 바라보았다.

“쟤도 윤상열 닮아가네.”

“아하핰! 그거 너무 모욕적야!”

노아는 1초 동안 크게 웃고 갑자기 정색했다.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요즘 감정 연습을 한다면서 저러는 일이 잦았다.

“너 정말 연기하려구? 진지하게?”

유현이 노아에게 묻자, 노아는 일본인 특유의 ‘에에’라는 소리를 내었다. 몇 번 고개를 갸웃한 그녀는 자랑스레 가슴을 두드렸다.

“진지하진 않지만 연기해요! 연기자로 성공하면 윤 씨한테 발광 당하는 일도 없지 않나!”

“얜 왜 한국어가 안 늘지.”

“소민이 왜 이렇게 안 나오지.”

지유가 탈의실을 보면서 말했다.

“성필 오빠 만난 얘기 듣고 싶은데.”

“리얼 옴? 진짜 팀장님 오나!”

“오빠 보고 싶다.”

불안하게 탈의실을 보던 위세라는 기다리지 못하고 일어났다. 그녀는 탈의실 문을 노크하면서 양소민을 불렀다.

“소민아, 괜찮아? 오늘…….”

양소민이 탈의실에서 나왔다.

연습하기 위한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그녀는 밴드로 머리를 질끈 묶고는 연습실 중앙으로 걸어갔다.

여섯 명의 멤버들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연습 언제 해요? 다들.”

“으음.”

리더 라희가 무겁단 듯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녀가 일어나 엉덩이를 털자 하나둘씩 몸을 세웠다.

“소민이도 왔으니 슬슬 할까. 어때요 언니들?”

“그래, 많이 쉬었잖아.”

“12시까지 연습 너무 힘들다! 고향이 그리워!”

라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들 대형을 잡았다. 그때, 라희는 거울에 비친 양소민의 표정을 보곤 뒤로 돌았다.

“시작하기 전에 구호 외치고 하자 다들. 디테일 점검은 빡세니까 기합 올려야지.”

라희가 손을 앞으로 뻗었다.

몇몇은 부끄럽단 기색을 비쳤지만, 리더의 제안을 존중했다.

“소민아?”

양소민은 겹쳐진 여섯 개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것을 보다가, 천천히 가장 위에 손을 올렸다.

글로브가 중앙에 모인 손을 보고 동시에 말했다.

성필이 생각했던 구호를.

“We are the world!”

일곱 개의 손이 하늘 높이 뻗어 올라갔다.

“Globe!”

세계가 될 일곱 명의 소녀들.

* * *

양소민이 떠나간 자리엔 성필과 김태훈이 다시 마주보게 되었다.

성필은 자신의 의지를 명확하게 표현했다.

김태훈이 아쉬워했다.

“며칠 더 생각해봐. 소민이랑 얘기해봐서 알겠지만, 애들이 너를 많이 그리워하고 그런다. 너도 아쉽잖아. 이미 이뤄놓은 게 있어서 결정하기 쉽진 않겠…….”

“대표님.”

김태훈이 멈칫했다.

“……뭐? 대표님, 나?”

“네, 대표님.”

“호칭으로 거리 두는 거야?”

“그래야죠. 이제 남남이니까요. 어떻게 석세스 엔터 대표님한테 버릇없이 말하겠어요.”

김태훈은 안타깝단 듯 성필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섭섭하네.”

“김 대표님, 윤상열 PD한테 말 좀 전해줄 수 있어요?”

“뭔데?”

성필은 싱긋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대표님이랑 윤 PD님한테 다 해당되는 말이겠네요. 짬짬이 여행지 알아보거나 취미 좀 늘려보세요. 사는 게 지루하지 않게.”

김태훈은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성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성필이 가볍게 말했다.

“5년 이내에 두 분 다 실업자 되실 거예요.”

윤상열이 KS 엔터에선 제 발로 나왔다고 했던가?

이번엔 그런 변명 따위 통하지 않을 것이다.

“제가 쫓아낼 테니까요.”

“……하.”

김태훈은 어이가 없단 듯 짧게 웃었다. 성필도 마주 웃어주었다.

* * *

“이제 시작이네.”

회의실엔 가로 엔터의 중역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사장인 홍규헌을 비롯한 성필, 한구인, 손혜빈, 민경섭, 정지음까지.

“참, 이건 또 도전이야. 애들 데뷔시킬 때도 그랬지만.”

홍규헌은 옅은 불안을 담아 말했다. 그에 한구인이 들뜬 기색으로 답했다.

“오히려 저는 기대됩니다. 멤버분들이 어떤 무대와 퍼포먼스를 연출하실지 말입니다.”

손혜빈은 어색하게 웃었다.

“‘롱 포’ 때 애들한테 받은 아이디어 보시고도 그런 말씀 하시는 거예요?”

“윽, 머리가…….”

한구인은 멤버들이 지닌 심연을 보고 수십분 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적이 있었었다.

겨우 잊고 있었는데, 그 기억이 무의식의 밑바닥에서 올라와 다시 한구인을 괴롭혔다.

“근데 확실히 이목은 끌릴 거예요.”

민경섭이 말했다.

“여자 아이돌이 ‘나 프로듀싱 해요’라고 알려진 경우는 진짜 거의 없잖아요. 심지어 저희처럼 ‘우리 프로듀싱 할 겁니다’라고 선전포고하듯이 광고한 그룹도 없고요.”

“그치. 여러모로 한 획을 긋겠지.”

“걱정되기도 해요. 아이돌 컨셉이랑 무대가 이상하면 기획사가 보통 욕먹잖아요. 그런데 이 기획이 공개되면, 곡이 망했을 때 애들이 욕먹을 테니까…….”

“아티스트로 인정받고 싶은 거잖아요.”

정지음이 담담하게 말했다.

“자기 창작물에 책임을 지는 것도 아티스트의 일이죠.”

“지음이 너 좀 매정하다?”

“뭘 걱정하고 그래요. 우리가 다 도와줄 건데.”

“……그렇지, 우리.”

민경섭이 성필을 보았다.

성필은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고.

“다녀왔습니다!”

다섯 명의 소녀들이 들어왔다.

성필이 차분한 투로 일어났다.

“잘 왔어 얘들아. 콘서트 잘했어?”

“당연하죠!”

“그래, 그럼 시작하자.”

“방금 왔는데요?!”

성필이 홍규헌에게 눈짓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회의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모았다.

“프로젝트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작.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