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9화
“프로듀서로서 게으르신 거 아님미까?”
성필과의 통화 중, 진저는 그리 말했었다.
올해 소녀연맹의 컴백을 준비하지 않은 괘씸한 프로듀서를 향한, 그리고 이제는 스스럼없이 전화할 수 있는 사이가 된 성필에게, 나름 재치를 살린 한마디를 던졌다고 생각했다.
[하하…….]
그에 성필은 웃음을 보였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와 통화하는 진저의 입엔 미소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 직후.
[네, 대화해서 즐거웠고 이제 끊겠습니다.]
성필이 너무나도 차갑고 사무적인 투로 말했다. 진저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예?”
폰을 공손하게 바로잡고 귀에 더 가까이 붙였다. 혹시 성필이 근처의 지나가던 다른 사람에게 말한 건가, 아니면 장난을 치는 건가.
그때까지도 진저의 입꼬리는 삐뚤빼뚤 어색하게나마 올라가 있었다.
[다음에 다시 연락주세요.]
또 사무적인 투의, 감정이라곤 하나도 담기지 않은 답이 들려왔다.
“잠…….”
진저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그녀는 통화가 종료된 폰의 액정을 바라보았다. 검은 화면엔 자기 얼굴만이 반사되어 비쳤다. 그리고 즉시 자신이 생각 없이 뱉었던 말이 머릿속을 채웠다.
‘프로듀서로서 게으르신 거 아님미까?’
게으르다.
감히 13살이나 높은 어른에게 할 만한 말이 아니었다. 그것을 깨달은 진저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자신의 잘못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진저는 성필의 앞으로 조아라가 다가오는 상황 따위 볼 수도 없었고, 당연히 알지도 못했으니까.
‘사, 사과해야 해. 잘못했다고…….’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진저의 검지가 멈췄다.
바로 통화해도 될까? 안 받는 거 아닐까? 설령 받더라도, 성필의 말투가 아까처럼 차가우면 어떡하지?
진저는 울상을 짓곤, 통화 대신 메시지를 보내려고 했다.
부족한 한국어 작문 실력으로 띄엄띄엄 글을 쓰던 그녀는, 곧 눈을 질끈 감으면서 사과문을 전부 지워버렸다.
‘고작 글 따위로 사과할 수 없어…….’
진저는 답을 찾지 못하고 홀로 우두커니 서서, 심장이 곤죽이 되는 기분을 맛보았다.
* * *
“진저, 무슨 일 있어?”
화장품 광고 촬영 후에도 진저의 기분은 나아 보이지 않았다. 에리카가 걱정스레 물었지만, 진저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에리카가 보기에 보통 일이 아니었다.
‘꼭 인터넷에 자기 이름 처음 검색했을 때 같잖아.’
진저는 ‘또 짱깨년이야? 제발 니네 나라로 꺼져 바퀴벌레야’란 글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한두 개가 아니었기에 더욱 충격이었다.
진저는 자신이 미움받는 이유가 중국인이기 때문이면, 영원히 미움받아야 하냐면서 에리카의 품에 안겨 오래도록 울었었다.
‘그때랑 비슷해.’
리더로서 멤버의 컨디션 저하나 멘탈 스트레스는 간과할 수 없었다.
“진저, 신경 쓰이는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
숙소로 돌아가자마자 에리카는 진저의 방으로 찾아가 그리 말했다.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온기를 전달했다.
진저는 처음엔 아무것도 아니라고 잡아떼다가, 곧 고운 눈매를 일그러뜨리면서 말했다.
“제가 잘못을 저질렀슴미다…….”
“내 방에서 DIY 폰 케이스 도색 방송하다가 바닥에 얼룩 남긴 거면 신경 안 써도 돼.”
“그건 별로 미안하지 않슴미다…….”
“…….”
“그게…….”
진저는 성필과 있던 일을 들려주었다. 상대가 성필이란 사실은 숨기고서 말이다.
“연락해서 사과해야 하는데 너무 무섭슴미다. 어떡하면 좋을지 전혀 모르겠슴미다…….”
“음.”
에리카는 따스하게 미소 짓고 진저의 손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잘 해결될 거라면서 그녀를 쭉 안심시켰다.
다음 날.
“매니지먼트 1팀 집합!”
1팀장이 케이어스 담당 매니저들을 집합시켜서 책임을 물었다. 대체 너희들이 어떻게 관리했으면 진저가 남자친구를 만드냐고 말이다.
매니저들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꾸중이 끝나곤 다들 군인처럼 신속히 진저에게로 달렸다. 선두엔 1팀장이 섰다.
1팀장은 연습실에 폭풍처럼 돌입하여 진저를 찾았다.
“진저, 이리 와.”
진저는 밀폐된 방 안에서 매니저 대여섯과 1팀장을 마주하게 되었다.
“진저, 지금이라도 안 늦었다. 연애하지? 빨리 상대 밝혀. 너 이거 명백한 계약 위반이야. 내가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된다고 했잖아. 1년만 더 기다리면 네가 뭘 하든 신경 안 쓴다고 했잖아. 오히려 우리가 도와준다고도. 그런데 그사이를 못 참고 회사와의 신뢰 관계를…….”
“무슨 소림미까 대체…….”
“아하,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키워준 은혜를 이렇게 갚아? 그래, 줄리엣도 가문의 은혜를 저버리고 사랑을 택했었지. 하지만 회사와의 믿음 앞에서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야.”
“무, 무섭슴미다…….”
“빨리 말해!”
“모름미다, 저는 모르는 일임미다…….”
진저는 몇 시간에 걸친 심문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가 1팀장에게 잡혀가서 오래도록 나오질 않으니, 김민주도 걱정하게 됐다.
“진저 그런 기색 없지 않았나?”
“원래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잖아.”
진소유는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폰이 생겼다고 정신이 해이해진 거지.”
“그럴 애가 아닌데…….”
“얼마나 같이 지냈다고 그럴 애가 아니래? 사람 속 아무도 모르는 거야.”
“…….”
김민주는 진소유의 어깨 너머로 그녀의 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진소유는 톡 하는 중이었다.
[하양아 일본 날씨는 어때?]
[오늘 치바에 눈 내렸다던데 큰일은 없지?]
[혹여나 일본 사람들이 텃세 부리지는 않고?]
[하양아 우리 앨범 받으러 KS 엔터에 온다면서.]
[언제 올 거야?]
[역시 내가 가는 편이 나을까?]
[회사까지 찾아가면 모양새가 그러니까 숙소로 가는 게 좋겠지?]
[하양아.]
[하양아?]
[많이 바쁜가 보네.]
[하양아 그런데…….]
김민주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인 장하양을 불쌍하게 여겼다. 어쩌다가 진소유 같은 사이코한테 찍혀서…….
“에리카.”
진소유는 요가를 하며 몸을 푸는 에리카를 불렀다. 에리카는 고난이도의 자세를 유지하면서도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답했다.
“응, 소유야 왜?”
“치바 날씨는 겨울에 어때?”
“나야 모르지.”
“많이 추울까?”
“나 교토 출신이야.”
“하아…….”
1시간 후, 진저가 눈에 띄게 수척해져선 1팀장으로부터 해방됐다.
듣자 하니 밥을 먹은 후 또 1팀장에게 불려간단 모양이다. 어쩌면 매니지먼트 이사인 남홍범에게 갈 수도 있고 말이다.
진저는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에리카에게 터덜터덜 다가와 안겼다.
“에리카 언니 이상함미다…….”
“진저, 어쩌다가 이렇게 됐니?”
“모르겠슴미다, 아무것도 모르겠슴미다……. 저, 저는 연애 같은 거 안 하는데……. 남자 아이돌들이 말 걸어도 중국어로 대답하면서 만리장성 세웠단 말임미다…….”
“고생했어 진저.”
“너무 억울함미다 언니…… 안 그래도 힘든데에…….”
기어코 진저는 에리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렸다. 에리카는 자애롭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게, 안 그래도 우리 진저는 그분한테 사과해야 해서 힘들 텐데.”
“이젠 모르겠슴미다 왜 이렇게 된 건지……. 삼재에 들어선 거 같슴미다, 부적이라도 사야 함미다……. 이래선 박 이사님한테 영원히 사과도 못 하겠슴미다…….”
“…….”
에리카는 동요한 티를 내지 않고 진저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었다.
“바아…… 박 이사님한테 게으르다고 말한 거야? 13살이나 위인 어른이시잖아.”
“그렇슴미다.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거 같은데…….”
“으휴, 괜찮아. 잘 될 거야. 언니가 도와줄게.”
식사 후, 1팀장은 진저에게 찾아와 사과했다.
“진저, 미안하다. 내가 다른 애들이랑 헷갈렸어.”
“……지금 연애 금지 걸린 거 KS 엔터에 케이어스뿐이잖슴미까.”
“아, 연습생 중에 말야.”
“연습생이랑 케이어스랑 헷갈림미까?”
“…….”
“팀장님 그래서 저를 3시간 동안 방 안에 박아두고 그렇게 구박하신 검미까? 팀장님 비타민 챙겨 드심미까? 뇌세포가 많이 자취를 감춘 거 아님미까? 제 시간은 어떡하실 검미까? 제가 거리로 나가서 버스킹만 해도 시간당 100만 원은 거뜬하게 벌 텐데?”
“……미안.”
“미안으로 될 일이 아니잖슴미까―!”
“진저.”
에리카가 진저와 1팀장 사이에 끼어들어 중재했다.
“이제 됐어. 그만해.”
진저는 에리카의 품에 안겨 끌려가면서, 눈물을 흘리는 동시에 1팀장에게 울분을 토해냈다.
“저주한다! 1팀장님을 저주합니다! 오해로,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저한테 그렇게 심한 말을 한 겁니까! 제가 중국인이라서 그런 겁니까! 저를 뭘로 보고! 나를 뭘로 생각하고오오!”
“진저 알겠어. 고생했어.”
“에리카 언니 저 너무 억울합니다! 너무 억울해서어……!”
“네 마음 다 알아. 고생 많았어.”
진저는 에리카에게 안겨 꺽꺽 울었다.
아무튼 그렇게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고, 다음 날 진저는 에리카에게 조언을 잔뜩 얻었다.
“직접 찾아가서 사과드리는 거야.”
에리카는 진저에게 종이백을 안겨주었다. 에리카가 직접 고르고 산 사과 선물이었다.
“저, 저 이런 거 언니한테 받는 건 너무 미안함미다……. 제 일인데 언니가 돈을 쓰시고…….”
“아니야. 우린 한 그룹이잖아. 난 진저가 빨리 박 이사님이랑 화해하고 후련해졌으면 좋겠어.”
“언니……. 역시 믿을 건 언니랑 과즙미 뿜뿜 케이어스의 비타민 민주 언니뿐임미다…….”
“나는?”
진소유의 물음에 진저는 짤막하게 ‘소유 언니도 좋슴미다’라고 답했다.
에리카는 진저의 복장을 어머니처럼 세심하게 점검해주었다.
머리에 쓴 털모자가 귀를 덮도록 꾹 내려주고, 옷깃도 바람에 풀어지지 않도록 꽉 여며주었다. 목도리도 예쁘게 매듭을 지어서 묶어주었다.
에리카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진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예쁘다, 우리 진저. 잘하고 와.”
“다, 다녀오겠슴미다!”
진저는 호기롭게 회사를 나섰다.
에리카는 손을 흔들면서 진저를 배웅했다. 그 옆에 서 있던 진소유가 퉁명스레 말했다.
“에리카, 교토 사람은 앞뒤가 다르대. 사실이야?”
“그거 편견이고 지역감정 조장 발언이야. 한국에서 경상도 전라도 운운하는 거랑 똑같아.”
“그냥 물어본 거야. 앞으론 안 할게.”
* * *
“죄송함미다 박 이사님, 면목이 없슴미다…….”
“뭐가…….”
성필은 뒤를 보았다. 여전히 정지음과 이재호가 지켜보고 있었다.
“일단 여기서 말고요. 걸어요.”
성필은 진저를 데리고 주차장까지 걸었다. 그리고 차 근처로 와서 다시 물었다.
“뭐가요?”
성필은 정말 몰라서 물은 것이었다. 진저가 사과할 일 따위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진저는 다르게 받아들였다.
‘네가 뭘 잘못했는지는 알아?’라는 뜻으로 들렸다. 진저는 선물이 든 종이백을 더 꼭 껴안으며 어눌하게 답했다.
“정말 죄송함미다. 그, 그렇게 말하면 안 됐슴미다. 저보다 나이도 엄청나게 많으신데…….”
“엄청나게 많진 않…… 아니, 그러니까 뭐가요?”
“죄, 죄송함미다. 그, 나이가 적당히 많으신데…….”
“그건 아무래도 됐고요. 왜 사과하시는지 전혀 모르겠거든요.”
성필은 초조하게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혹시나 김태훈과의 약속에 늦을까 싶어서, 그의 발은 조바심을 담아 자꾸만 갈팡질팡했다.
진저는 더 기가 죽었다.
성필이 ‘그건 아무래도 됐고요’, ‘왜 사과하시는지 전혀 모르겠거든요’라고 하며, 조바심이 잔뜩 나서 진정하지 못하는 모습.
진저는 그것을 보자 준비해왔던 말도 다 잊어버린 채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성필이 사과를 받아줄 생각이 없는 듯하다.
“사과, 사, 사과의 선물…… 임미다…….”
“그러니까 뭘…….”
성필은 이유를 물어보는 것을 관두고 일단 진저의 선물을 받았다.
“진저 씨 죄송한데 제가 바빠서 나중…….”
“향수임미다!”
진저는 성필이 자리를 피하려 하자, 이렇게 마주한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흡연자인 박 이사님한테 맞는 선물일 거라고 에리…… 제, 제가 준비했슴미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 담배 끊었어요.”
“네?! 아, 바, 바꿔오겠슴미다!”
“아녜요 감사합니다. 아니, 그런데 진짜…….”
성필은 급박한 투로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자신의 앞에 선 절망한 표정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성필의 얼굴 또한 절망으로 차 있었다. 그는 사정을 다 들어보고 싶었지만, 이젠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성필이 진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차를 향해 몸을 반쯤 돌렸다.
“얘기는 나중에 더 들을게요. 정말 죄송해요. 가보겠…….”
“박 이사님!”
그때 주차장의 차 사이에 숨어 있던 한 남자가 등장했다. KS 엔터 신인개발부의 신태웅이었다.
“신 트레이너님?!”
조아라가 미국으로 댄스를 배우러 갔던 시절, 진저와 동행했던 KS 엔터의 직원이었다.
성필은 그와 샌프란시스코의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면서 친분을 쌓았었다.
신태웅이 성필의 곁으로 다가와 옷깃을 꾹 잡았다.
“어린애가 뭣 모르고 한 일이잖아요. 애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조금만 너그럽게 봐주세요.”
“그러니까 뭘요?!”
성필은 신태웅이 자신을 물리적으로 제지하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가 잡은 옷깃을 거칠게 털어버리고 차를 향해 몸을 돌렸다.
“박 이사님 제가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검미까!”
이젠 진저까지 성필의 외투 끝자락을 잡았다. 성필이 거의 울 듯이 돌아보니, 진저가 옷자락을 잡고 땅에 발을 꽉 박고 있었다.
“크, 큰 잘못이긴 함미다! 감히 공자의 도를 어겼으니 잘못이 큼미다!”
“아니 진짜 괜찮아요! 저는 정말 정말 괜찮아요! 그러니까 제발 놔주세요!”
“이대로 가서 다신 안 만날 생각 아님미까! 잠시만 얘기해주십시오! 제가 정말 다 잘못했슴미다! 뭐든 할 테니까 잠시만 얘기를!”
“저도 부탁드릴게요!”
신태웅이 진저와 힘을 합해 성필을 붙잡았다. 그리고 한술 더 떠서 무릎까지 꿇었다. 성필이 아무리 앞으로 힘을 줘도 나아갈 수가 없었다.
“샌프란시스코의 정을 생각해서라도요!”
“난 다 용서했다니까요?!”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용서했단 사람은 화를 내지 않슴미다!”
“맞아요 박 이사님! 케빈을 떠올려서라도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케빈은 또 누군데요!”
“아라 씨 통역이었던 미국인이요!”
“잘도 기억하 아니 저는 정말 진짜 다 됐으니까, 약속 있어요 약속! 자꾸 이러면 저 정말 화냅니다?!”
“박 이사님 무릎 꿇으면 됨미까? 제가 꿇으면 기분이 풀리시겠슴미까?”
“안 꿇어도 돼요!”
그 촌극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정지음과 이재호의 보고를 듣고 밖으로 나온 홍규헌이었다. 그녀는 저 멀리 주차장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세 사람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사장님.”
“어, 정 PD.”
“저거, 제 부족한 상상력으로나마 추측하건대, 아무리 생각해도…….”
“음.”
KS 엔터의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와 케이어스의 진저가 성필에게 달라붙어 있다.
남자는 무릎을 꿇었고, 진저는 몸을 천천히 낮추는 게 곧 꿇을 기세였다.
성필은 그 둘을 난처한 듯이 보는 중이었다.
“성필이 형이 계속 우울했던 게, 설마…….”
정지음으로선 당연히 떠올릴 수밖에 없는 가정이었다. 그는 정호환에게 KS 엔터 입사 제안을 받았던 적이 있었으니까.
A&R 팀 이재호가 소심하게 말했다.
“저, 그래도 회사 앞까지 와서 회사의 중추인 프로듀서를 영입하려는 건 너무…….”
“정호환 이사님은 아예 회사 안까지 들어와서 나한테 오라고 하셨었어.”
“아…….”
이재호는 엔터 업계의 비정함에 전율했다.
셋은 쭉 주차장에서 벌어지는 인재 유출의 현장을 바라보았다.
정지음이 아까보다 확연히 낮은 온도의 목소리로 물었다.
“사장님, 어떡하실 거예요.”
“……생각해봐야지.”
* * *
김태훈은 성필의 요구대로 한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고, 당연히 사람들의 대화가 만들어내는 소음도 컸다.
김태훈은 창가 쪽에 앉아 수시로 시계를 확인했다. 약속 시간이 30분이 지났는데도 성필은 안 오고 있었다.
커피를 한 잔 더 주문하고 느긋이 기다렸다.
“오.”
창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올해 눈은 좀 빠른가.’
어쩌면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수도 있겠다.
약 10분 후, 카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들어온 이는 성필이었다.
성필은 피곤한 눈가를 매만지면서 어깨와 머리에 묻은 눈을 무심하게 털었다. 신발 밑창에 묻은 눈을 카펫에 닦은 후 주변을 살폈다.
김태훈과 성필의 눈이 맞았다.
성필은 바로 자리로 가지 않고 카운터에서 음료를 주문했다. 그는 음료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음료가 나오고서야 김태훈의 자리로 왔다.
“늦어서 미안해요.”
“아니야.”
김태훈은 시계를 확인했다.
“겨우 45분이잖아.”
“……후우.”
그에게 이런 말은 정말 하고 싶지 않았지만, 성필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진짜 미안해요.”
“괜찮다니까. 어서 앉아. 밖에 많이 춥지?”
두 남자가 4년 만에 마주 보았다. 둘은 서로를 자세히도 관찰했다.
김태훈은 성필이 이전보다 성숙한 것을 알아챘다. 성필의 얼굴에는 4년이란 세월이 거짓 없이 박혀 있었다.
주름이나 피부의 탄력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성필이 겪어왔던 경험이 얼굴에 박혀, 이전보다 인간적으로 농후한 분위기를 풍겼다.
“많이 달라졌네.”
“형도요.”
“오랜만에 만나는데 술이 없어서 아쉽지 않아?”
“형이랑 술 먹고 싶은 마음 없어요.”
“그래. 나는 중국집 생각했어. 너 백주 좋아하잖아. 그렇게 먹고 싶다고 했던 것들 마음껏 시켜주려고 했는데.”
“내가 뭐가 예뻐서요?”
“그치. 네가 예쁘거나 귀여운 타입은 아니지.”
“농담 따먹기 그만합시다. 왜 불렀어요?”
“석세스 엔터로 돌아올래?”
성필이 인상을 팍 썼다. 코로 숨을 깊이 들이쉬고, 입으로 숨을 깊이 내쉬었다.
“석세스 엔터로 돌아오라고요? 언제는 나 보면서 형 마음이 어떤지 알고 싶다면서요. 후회나 그런 것들요.”
“그것도 있고. 이게 본론이지. 먼저 말했으면 안 온다고 했을 거잖아.”
“상열이 형도 이거 알아요?”
“모르지.”
“내가 알리면 어쩌게요?”
“안 알릴 거잖아.”
“맞아요. 난 그런 인간이 아니죠.”
“…….”
“…….”
“상열이가 있는데 어떻게 석세스 엔터로 불러들일 거냐, 그런 건 안 물어?”
“안 갈 거니까 물을 필요가 없죠. 본론 끝났으면 이제 내 차례 맞아요?”
“……그래.”
성필은 가슴속에 무겁게 자리 잡은 말을 겨우 목구멍 밖으로 내뱉었다.
“대체 글로브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아니, 형이 알고 있긴 해요?”
“알지 그럼. 이제 석세스 엔터가 커지긴 했어도, 글로브니까. 석세스 엔터 밑의 레이블들이 아니라, 석세스 엔터에서 직접 만든 그룹이니까.”
김태훈이 괜히 옷깃을 정리하며 말했다.
“당연히 알지.”
“상열이 형이 뭐 하고 있는 거예요? 뭐 진짜 애들한테 쌍욕하고 머리라도 박게 해요?”
성필이 생각하는 최악은 때리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이 만들어지고 뉴스 면에서 절대 사라지지 않는 사내 갑질이, 기획사의 아이돌에게만 향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건 순진하기 그지없다.
아이돌도 유의미한 가치를 창출하기 전엔, 결국에는 을일 수밖에 없다.
기획사의 관리 속에서 화초처럼 자라 세상 물정에 어두운 아이돌들이라면, 더욱 갑질에 취약하다.
“그 정도 인간은 아니었잖아요.”
“너 나가기 전까지는 그랬지. 쌍욕…… 사실, 상열이는 욕하진 않아. 체벌도 안 하고. 당연히 때리지도 않지.”
“그럼요?”
“말뿐이야. 너도 알겠지만, 사람들은 고작 말에 큰 상처를 받잖냐. 회사에 속한 연습생들은 더 그렇고. 일반 회사에서 상사한테, 아니 하물며 동료한테 ‘왜 이렇게 일을 못 해?’라고만 들어도 죽고 싶은데…….”
아이돌의 정신적 지주나 마찬가지여야 할 프로듀서가 ‘왜 이것밖에 안 되냐?’는 투로 계속 말하면, 아이돌은 어떤 심정이 될까?
“가끔 뉴스에서 엘리트 체육인들 얘기 나오잖아. 코치가 욕하고, 체벌하고. 그러다 문제 되면 ‘금메달 따게 해주려고 그랬다’고 하고. 실제로 성적이 좋았던 경우도 있지. 내가 보기에 상열이는 그런 경우거든.”
글로브가 윤상열의 밑에서 실제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럼 그의 방법이 맞는 거 아닌가?
사회에서 문제가 된 코치가 ‘내가 금메달 따게 해줬다. 국민들도 한국이 금메달 따서 좋아하지 않았느냐. 근데 이제 와서 나한테?’라고 말하는 상황이다.
“그럼…….”
성필이 분노로 목소리를 떨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양소민과 위세라가 떠올랐다.
“그걸, 형은 가만히 두고요?”
“뭐라 했다가 상열이 삔또 나가면? 유능한 인간이야. 성격만 안 좋지.”
“주변에선 뭐라 안 해요?”
“할 사람이 없어. 너 외엔 없었지. 다들 짬이 부족하거든. 상열이랑 비등한 능력을 가진 인간도 없고. 상열이가 어떤 애인지 알아? 총괄 프로듀서로 그룹이랑 아티스트 총합해서 열 개도 더 관리해. 진짜 인간이 아냐.”
“지금 상열이 형.”
성필은 입술을 짓씹었다. 그리고 마침내 호칭을 바꾸었다.
“윤상열 두둔해요?”
그에 김태훈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두둔하긴. 그게 안 좋다고 생각해서 널 찾아왔는데. 네가 우리 회사에 들어와서…… 글로브만 어떻게 좀 해주라. 걔들이 자꾸 내 눈에 밟혀. 우리 별로 안 컸을 때부터 연습생으로 받아서 키운 애들이잖아. 정말 딱 걔네들만 적당하게 관리해줘. 있잖아, 옛날처럼. 프로듀서 윤상열, 매니저 박성필.”
“…….”
“그게 다가 아니야. 아예 너한테 레이블 하나를 떼어줄게. 네가 대표야. 지원도 빵빵하게 해줄게. 정말이야. 아무렴.”
소녀연맹을 만든 프로듀서님 아닌가.
“가로 엔터보다 훨씬 나을 거다. 뭣하면, 내가 가로 엔터 인수해줄까? 그쪽 지분 구조 알려주면 어떻게 해볼게. 좀 오래 걸리더라도. 이 제안이 지니는 가치를, 넌 알겠지. 그러니 가타부타 설명하진 않을게.”
김태훈은 몸을 슬쩍 뒤로 뺐다. 성필에게 생각할 장소를 마련해주려는 것처럼.
“형.”
하지만 성필은 생각 따위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 성필아.”
“나 가로 엔터로 와서 꿈 하나 더 생겼는데 들려줄까요?”
“꿈?”
“형이 금은보화를 산더미처럼 내놓아도 난 절대 안 넘어가요. 형이 가진 것들 나중엔 전부 내 거가 될 거거든요.”
김태훈이 쓰게 웃었다.
“아…… 그래? 현금으로 언제 수천억을 모으겠니, 성필아. 가로 엔터가 그 정도가 되려면 3대 기획사…… 아니. KS 엔터급은 돼야 할 텐데. 그래, 정말 꿈이네.”
꿈은 허황될 때 쓰는 말이다.
그렇지만, 성필은 꿈을 몇 번이고 이뤄왔다.
“그보다는, 지금 잡을 수 있는 걸 잡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글로브 애들 눈에 안 밟혀? 나는 지금도 마음이 너무 아픈데.”
“그럼 형이 알아서 하……!”
“팀장님!”
성필이 우뚝 멈췄다.
김태훈이 다정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성필이 뻣뻣하게 뒤로 고개를 돌렸다.
막 뛰어와서 볼이 발그레하게 물든 양소민이 있었다. 그녀는 바람으로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돈하면서 수줍게 웃었다.
“아, 죄, 죄송합니다. 연습이 늦게 끝나서요. 팀장님 아, 안녕하세요. 오랜만, 그, 잘 지내셨죠……?”
성필이 다시금 고개를 돌려 김태훈을 보았다. 김태훈이 양소민에게 하는 것처럼 다정한 미소를 띠었다.
“애들 얘기 듣고 싶다면서. 직접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