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화
“왜 연락했어요?”
[이번에 소녀연맹 콘서트 봤어. 좋더라. 역시 음방 무대랑은 맛이 완전히 달라. 나도 오랜만에 꽤 재밌었다.]
“왜 연락했냐고요.”
전화 너머로 김태훈의 씁쓸한 웃음이 전해졌다. 성필의 적대적인 태도에 당황한 것이리라.
성필은 자신의 어투가 너무 공격적이었나 생각해보았다.
‘아니.’
오히려 성필은 자신의 입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김태훈에게 존대하는 게 입에 익고 또 익어,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형’이란 호칭과 존대를 포기하지 않는 입이 원망스러웠다.
[시간 괜찮으면 만나서 얘기나 할까 싶네.]
“무슨 얘기요.”
[이런저런. 우리가 끝을 좋게 맺진 않았잖아.]
“이제 와서 엉킨 매듭 그나마 좀 예쁘게 다듬어보자고요?”
[성필아, 네 마음 어떤지 안다. 그래서 나도 화해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 안 해.]
김태훈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성필이 아무리 쏘아대도, 그는 아주 약간의 동요조차 보일 기미가 없었다.
[아마 날 많이 미워하겠지. 이제 와서 내가 ‘좋게 이야기해보자’라고 하면, 네가 석세스 엔터를 나가서 품었던 4년의 마음이 어떻게 되겠어. 그 4년을 이해하고 존중해.]
“진짜…….”
혀에 기름칠한 말솜씨는 예나 지금이나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럼 뭔데요? 왜 지금 와서 날 찾는데요?”
[글쎄.]
김태훈이 뜸을 들였다.
성필은 그 의도를 알았다. 김태훈은 성필이 감정적으로 말을 쏟아내지 않고 냉정하게 머리를 굴릴 시간을 주는 것이다.
김태훈은 성필이 결국 자신을 만나게 되리란 것을 약 30초 전부터 확신했다. 성필도 그러했는데, 이유가 명확했다.
‘내가 전화를 안 끊고 있는 거…….’
성필은 계속해서 ‘왜’라고 묻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이어지는 ‘왜’의 끝에서, 성필은 결국에 김태훈을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었다.
[구체적인 이유를 댈 순 없겠네. 난 그냥 만나보자는 거야. 그게 다야. 내가 가진 후회나 아쉬움을 네 앞에서 다시 보고 싶은 거지. 너도 그러고 싶은 감정이 있잖아. 원망이든, 분노든, 여러 가지로…….]
“알겠어요.”
이번에는 김태훈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성필이 이렇게 빨리, 흔쾌히 받아들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고맙다 성필아. 그럼…….]
“나 지금 일본이에요. 내일 돌아가요. 내일 돼요?”
[되지.]
“근데요 형.”
[어, 성필아.]
“내가 형을 만나러 가는 건 옛날 일을 되짚으려는 거 따위가 아니에요.”
김태훈을 만나서 ‘그때 날 왜 안 잡았어요?’ 같은 질문을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성필이 그를 만나는 유일한 이유는.
“궁금해서요. 내가 나간 뒤에 애들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서, 그게 다예요.”
대체 뭔 일이 있으면 양소민이 성필의 집으로 도망 오기까지 했었는지.
위세라는 어째서 그토록 슬픈 표정으로 성필을 바라보았는지.
그리고 또 어떤 일들이 있는지.
‘그 이야기들이 내 연료가 될 거다.’
가로 엔터를 키우고 또 키워서, 언젠가 석세스 엔터를 손아귀에 넣는다.
성필이 나간 후 석세스 엔터가 어떻게 변했는지. 그 이야기는 성필을 위한 연료가 될 것이다.
[그렇지, 궁금하겠지. 알겠어, 그러자.]
성필은 김태훈과 약속 장소와 시각을 정한 뒤, 잠시 현관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품을 뒤졌다.
담배는 없었다. 리카가 끊으라고 했으니까.
대신, 성필은 낮게 노래 불렀다.
“너희들은 올바른 답만 원해. 입을 닫고 순간만 느껴.”
영원히 세상에 나타나지 못할 케이어스의 노래를, 성필은 조용히 내리 불렀다.
1절을 다 부르고도 떨림이 가라앉지 않았다. 성필은 흥얼거리면서 아무 멜로디나 찾았다.
그러던 도중 무의식적으로 소녀연맹의 ‘아니’가 입 밖으로 나왔다. 허밍을 이어가다, 성필은 문득 깨달았다.
‘애들 보고 싶어.’
어느새 떨림은 멎어 있어서, 성필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 * *
치논은 한식을 준비해놓았다.
“고바야시 씨가 고생해주셨어요.”
“한식은 처음이라 어떨지 모르겠네요. 책을 보면서 했는데 입에 맞으셨으면 좋겠어요.”
가정부인 고바야시가 내놓은 한식은, 솔직히 말해서 한국인이 만든 것보다 훨씬 보기에도 좋고 맛도 있었다.
한국의 음식점에서도 보기 힘든 비주얼에 성필과 멤버들이 감탄을 표했다.
“무슨 레스토랑 가야 나올 법한데요?”
조아라의 칭찬에 치논은 다행이라며 빨리 들라고 했다.
식사가 시작되었다.
성필은 한 입 먹을 때마다 연신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치논은 다이나믹한 성필의 표정 변화를 보고 기쁜 듯 미소 지었다.
“세이코 씨.”
“네……?”
성필이 부르자 세이코는 기운이 빠져서 답했다. 성필이 나간 사이에 멤버들과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아까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떻게, 한국 요리는 입에 맞으세요?”
“네 맛있네요…….”
세이코는 성필과 대화하는 중에도 소녀연맹의 눈치를 보았다.
‘애들이 나한테 말 걸지 말라고 하기라도 했나?’
성필은 이참에 멤버들과 세이코 사이의 경직된 관계를 조금이나 풀어주려 했다. 그래서 일부러 세이코에게 더 많이 말을 걸었다.
세이코는 성필과 말을 많이 섞는 게 기쁜 기색이었지만, 여전히 소녀연맹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성필이 세이코와 멤버들 사이의 대화를 트게 해주려 해도, 별다른 차도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성필도 어느 정도에 이르러선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식탁 위의 분위기가 싸늘한 건 아니었다. 이 자리의 주최자인 치논이 탁월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헤에, 대단해.”
치논은 리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김없이 놀라움을 표했다.
“직접 앨범을 프로듀싱하는 거야?”
“네(하이)! 저희만의 색을 표현하는 거예요!”
“대단하다. 리카쨩은 하고 싶은 거 있어?”
“저는 일단 언니들한테 귀여운 옷을 입히고 싶어요! 치마도 입히고 프릴에 레이스가 달린 옷을 잔뜩 준비할 거예요! 막 애교 섞인 목소리로 귀여운 노래도 부르고요!”
프로듀서인 성필은 자신의 복장이 터지는 소리를 리카가 들어주길 바랐다.
“귀여운 거?”
“네!”
“하지만 리카쨩은 귀여운 건 안 어울리는걸?”
“네?”
“리카쨩은 멋지잖아. 보는 것만으로도 동경하게 돼.”
리카는 ‘멋져, 내가? 멋져?’란 말을 반복하더니, 기세등등한 표정을 지으면서 가슴을 쭉 폈다.
“확실히 그런 면모가 있죠! 귀여운 것도 좋지만 멋진 쪽이 더 낫겠네요!”
성필의 복장이 터지는 것을 멈추었다. 그는 안심하여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백설하와 눈이 맞았는데, 그녀도 가슴을 쓸어내리는 중이었다.
둘이 서로를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귀 얇은 애가 무슨 프로듀싱이야.”
“아라쨩 나(아타시)는 귀가 얇지 않아! 당장 취소하지 않으면 아라쨩 수영복 입혀서 무대 위에 올려보낼 거야!”
“내가 프로듀싱할 차례 되면 너한테 뭐 할 줄 알고?”
“얘들아…….”
성필이 슬픈 투로 말했다.
“모처럼 얻은 기회인데 서로에 대한 감정은 섞지 말자.”
“농담으로 하는 말이죠 아저씨.”
“그러고 보면.”
성필이 세이코에게 말했다.
“세이코 씨는 데뷔할 때부터 쭉 프로듀싱을 해오셨죠? ‘롯폰기의 아방튀르’도 작사, 작곡 다 본인이 하셨잖아요.”
“……당연하지 않아요? 프로듀싱이란 이름을 붙이는 것도 거창한데요.”
“그게 어떻게 당연해요.”
음악 산업이 고도화되고 각 업무가 극도로 세분화된 세상이다.
곡 하나마저 홀로 작곡하는 경우가 드물다. 도입부 A는 누가 하고, B는 또 누가 하고, 이런 식으로 수많은 인원이 제작에 투입된다.
“프로덕션 과정에서 중심을 잡고 스태프들을 통솔하는 건, 두말할 나위 없이 대단한 거예요.”
“……그렇죠, 대단하죠!”
세이코는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자신감을 내보였다.
그녀는 성필의 칭찬이 딱히 칭찬으로 들리진 않았다. 당연하게 해야 하는 일을 했던 것인데, 그걸로 어떻게 칭찬받겠는가.
그냥 물을 마셨을 뿐인데 주변에서 ‘대단해!’라고 해주는 듯하다. 하지만 일단 칭찬받으니 기분은 좋았다.
“애들한테 해줄 조언 없으세요? 팁이라던가. 프로덕션은 이 과정으로 하면 좋다. 이렇게 해야 한다. 그런 거요.”
“어…….”
세이코는 눈썹을 이리저리 찌푸렸다.
“방법?”
그녀는 고민을 거듭했다. 그리고 나온 말이라곤 참으로 영양가가 없었다.
“그냥 하면 되는데요?”
“……그냥요?”
“음, 저처럼 대단한 사람이 아니고선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요.”
세이코는 급히 입을 막고 발언을 수정했다.
“다들 알겠지만요! 그으, 길이 보이지 않나요? 뭔가, 앨범을 만들려고 결심한 순간부터 ‘이렇게 가야지’란 길이 보여서요. 그냥 그대로 따라가면 되죠.”
“아…….”
“모르겠나요?”
“알겠어요.”
성필이 세이코에게 공감하자 멤버들이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성필이 대답하기 귀찮아서 그냥 세이코에게 맞춰준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길이 보이고, 그냥 거기를 따라가면 된다고?
세이코가 자신의 천재성을 과시하려는 게 아니고선 설명되지 않을 만큼 비상식적이다.
“선배님.”
조아라가 세이코를 불렀다.
세이코는 소녀연맹 멤버 중 한 명이 자신을 불렀단 게 놀랍고 또 기뻐서, 선배의 아우라를 한껏 풍기면서 미소 지었다.
“네 아라 씨. 궁금한 게 있나요?”
“그 길이란 거요, 기준이 뭐예요?”
“기준?”
“어디로 가는 길인데요?”
“어디로 가냐뇨.”
세이코가 이상하단 듯 말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이죠.”
“…….”
조아라는 ‘아 예’라고 답하곤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그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는데, 세이코의 이야기는 너무 추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성필이 보충 설명했다.
“얘들아, 세이코 씨는 시대의 축복을 받으신 분이야.”
세이코가 재빨리 고개를 돌려 바닥에 식혜를 뿜었다. 세이코는 의자에 일어나 안절부절못하면서 걸레를 찾았다.
치논이 고바야시를 불러 세이코가 뱉은 식혜를 치우게 했다.
“뭐, 뭔가요 갑자기! 시대의, 뭔, 축복?”
성필은 당황하는 세이코를 내버려 두고 이야기를 이었다.
“세이코 씨의 취향과 대중의 취향이 일치하는 거지. 15년 동안이나 계속 말야. 정말 대단한 거고, 이건 천재성이란 말로도 표현할 수 없어. 시대의 축복을 받는 거야.”
예술가가 예술적 천수(天壽)를 누리는 경우는 별로 없다. 천수는커녕 고작 3, 4년만을 빛내고 사라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예술가가 천착한 장르가 아예 대중에게 외면당하거나, 작업물이 과거에 머물러 있거나, 아니면 예술가의 의욕 자체가 꺾일 수도 있다.
그러니 짧은 시간을 빛내고 사라지는 것만 해도 대단하다.
“물론, 그냥 재능은 아니겠지.”
“무슨 소리예요. 저는 태어날 때부터 별처럼 빛났다구요.”
“노력이 있었을 거야.”
“하, 당연히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죠. 저는…….”
“세이코 씨, 혹시 어떤 음악을 자주 들으세요? 좋아하는 장르라거나?”
세이코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드문드문 말했다.
“그냥, 어릴 때부터 오리콘에 올랐던 건 전부 들었어요. 뭘 좋아한다기보다는, 오리콘 차트 톱 컴필레이션 CD나 테잎을 사서 들었어요.”
“요즘도요?”
“네. 애플 뮤직에서…….”
성필은 고개를 주억였다.
“그게 비결이었던 거 같네요.”
“오리콘 차트 듣는 게요?”
세이코는 자신의 이런 취향이 너무 편의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웨벡스에는 내로라하는 아티스트들이 많다.
그들은 음악을 듣는다면 어떤 CD며 어떤 LP며, 어디 음반사에서 나온 무슨 버전이고, 또 어느 시대의 무엇이다, 이런 것을 전부 꿰고 있었다.
그들은 그야말로 전문가 같은데, 세이코는 그냥 차트에 오른 곡들을 아무런 분석도 없이 반복 재생으로 틀어두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남들이 ‘너무 상업적이다’ 뭐다 해도, 세이코는 그런 음악들이 좋았다. 고민 없이 들을 수 있는 음악들 말이다.
“아라야.”
갑자기 성필이 자신을 지목하자 조아라는 당황했다. 예상치 못하게 식탁 위가 진지한 분위기가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요?”
“응. 아라는 외국 팝송 많이 듣지?”
“네, 뭐.”
“우리나라 차트는?”
“아이돌 노래 나오면 한두 번씩 들어보고…… 괜찮으면 플레이리스트 추가하고…….”
“그래, 사람들은 보통 다 그러지. 그런데 프로듀싱을 하려면 그래선 안 돼.”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들어선 안 된다.
“우리나라 차트에 오른 곡들 줄 세워서 들어보면 ‘와, 이런 걸 왜 좋아하지?’라고 생각한 적 있을 거야. 아무리 들어도 별로인데 왜 이렇게 순위가 높냐고.”
그 말에 멤버들이 쓴웃음을 지었다. 다들 한 번씩 해본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 중요한 건, ‘이런 걸 왜 좋아하지?’가 ‘우리나라 음악 망했네’나 ‘들을 거 없네’로 이어지면 안 된단 거야.”
‘아, 이래서 좋아하는구나’까지 생각이 뻗어나가야 한다.
그게 대중을 상대하는 직업을 가진 자의 마음가짐이며, 앞으로 프로듀싱을 하게 될 멤버들이 가져야만 하는 마인드다.
“세이코 씨 같은 재능이 없으면 그런 노력이 필요해.”
그렇게, 세이코의 재능 설명회가 끝났다.
당사자인 세이코는 평소 자기 자랑을 아무렇지도 하던 것이 전부 거짓말이었단 듯, 한껏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마치 ‘노래 잘 부르시네요’라는 칭찬 대신, 자신의 노래에 대한 찬송시를 선물 받은 기분이었다.
세이코가 겸연쩍은 투로 치논에게 속삭였다.
“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 파쿠 이사도 내 기 살려주려고 그런 걸 거야.”
치논은 답이 없어서, 세이코는 그녀를 자세히 보았다. 치논이 눈에 감탄의 빛을 담아 성필을 보고 있었다.
“저런 사람을 프로듀서라고 하는구나.”
치논은 멤버들과 의지를 다지는 성필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 * *
식사가 끝나고, 다들 거실 소파에 둥그렇게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식사 때와는 달라진 점이 하나 있었는데, 멤버들이 세이코에게 꽤 질문을 던졌단 것이었다.
“의상은 어떻게 하셨어요?”
“옷? 옷은 제가 별로 손 안 댔어요. 아예 신경 안 쓴 건 아니지만요.”
“그럼 선배님은 완전히 음악 쪽만 신경 쓴 거예요?”
“그런 셈이죠.”
이런 식으로 멤버들은 프로듀싱에 관해 궁금한 것을 세이코에게 물어보았다.
큰 도움이 된 건 아니었다. 아이돌인 소녀연맹이 세이코에게서 얻을 유용한 정보는 제한적이었으니까.
하지만 멤버들에게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아티스트의 길을 앞서간, 그것도 오랜 시간 걸어간 사람에게 듣는 경험담이 의미 없을 리가 없다.
치논은 어색하게나마 멤버들과 말문을 튼 세이코를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오토나시 언니!”
그때 리카가 치논을 불렀다.
“응?”
“피아노 쳐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래미에서 상까지 받은 연주 실력, 꼭 보고 싶어요!”
“리카.”
성필이 리카를 부드럽게 제지했다.
“그런 부탁은 실례잖아. 준비도 안 하셨을 텐데.”
갑자기 누군가가 소녀연맹에게 ‘너희 HPT 뮤직 어워드에서 상 받은 아이돌이지? 춤추고 노래 불러줄 수 있어?’라고 하면, 실례인 게 당연하다.
리카도 거기까지 생각이 닿아서 재빨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센피루 씨, 괜찮아요. 리카, 듣고 싶은 거 있어?”
정말로 치논이 몸을 일으켰다.
성필은 물론 멤버들이 놀랐다. 이토록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리라곤 생각지 못했었다.
“에, 괜찮으신가요?”
“응. 피아노야 항상 치는데 뭘.”
치논이 햇볕이 잘 드는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곳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의 앞에 앉았다.
저 피아노가, 리카가 치논에게 연주를 부탁한 이유였다. 눈앞에 저렇게나 멋진 피아노가 있으니 부탁하려는 마음을 참기 힘들었다.
“저희 곡 쳐주실 수 있으신가요!”
다들 못 말린단 듯 리카를 바라보았다.
“알겠어.”
다들 깜짝 놀랐다.
“치논 씨, 저희 애들 곡 들어보셨어요?”
“네. 그저께 ‘아니’ 들어봤어요.”
성필은 치논의 ‘들어봤다’는 게 정말 들었단 건지, 아니면 치논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모종의 방법이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백설하가 감탄하며 물었다.
“치논 언니는 듣기만 해도 바로 연주하실 수 있으세요?”
치논이 싱긋 웃었다.
“아니. 고바야시 씨.”
치논은 가정부 고바야시에게 소녀연맹 ‘아니’의 악보 인쇄를 부탁했다.
고바야시는 2층으로 올라갔다. 10분 후, 고바야시가 악보 사이트에서 다운로드받은 악보를 가지고 치논에게 내밀었다.
다들 치논의 뒤로 다가와서 악보를 보았다.
“팀장님 이거 뭐예요? 저희 곡 악보 유출당한 거예요?”
“사람들이 청음하고 악보에 옮긴 거야. 악보 사이트에 가면 돈 받고 팔아.”
백설하는 악보를 눈으로 간단히 훑었다.
“정말 그렇네요.”
당연히 ‘아니’를 완전히 악보로 옮기는 건 불가능하다. 애초에 전자음으로 만든 곡이니까.
사이트에도 ‘아니’의 악보가 여러 개 있었을 것이다. 고바야시는 그중에서 하나를 적당히 골라 가져온 데 불과했다.
백설하는 악보를 보면서 손가락을 연주하듯이 움직여 보였다.
‘좀 부족한데.’
아무리 일렉트로닉 사운드로 만들어진 ‘아니’를 피아노에 맞게 옮겼다 하더라도, 이 악보는 소리가 너무 빈약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이 악보를 연주하더라도 풍성하게 들릴 리 만무했다.
“10분만 주실래요? 앉아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다들 치논의 말대로 다시 소파로 가서 앉았다. 치논은 악보를 세심하게 눈으로 살폈다.
통유리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치논과 피아노를 비추었다. 그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성스러운 분위기마저 감돈다.
그때 리카가 성필의 눈을 가렸다.
“재미없어. 리카지?”
“맞추라고 가린 거 아니에요! 치논 언니 손가락을 음흉하게 보지 마세요!”
“하아.”
“변명은 안 통해요!”
“손가락을 본 건 맞지만 음흉하게 보진 않았어.”
“왜 그렇게 손가락을 좋아하시나요?!”
“이 정도면 아저씨 페티시 아니야?”
“……아라야 너 그거 무슨 뜻인진 알아?”
성필이 눈을 가린 리카의 손을 치워냈다. 리카는 질리지도 않고 또 성필의 눈을 가렸다. 그래서 그냥 가려진 채로 말했다.
“페티시요? 걍 뭐 특정한 걸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그래.”
페티시에는 성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단순히 무언가를 애호하는 성향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성필은 조아라가 훗날 말실수하지 않길 바라면서 그냥 대화를 끝냈…….
“아라쨩, 페티시는 몸의 특정 부분이나 물건, 상태, 상황에 성적 흥분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성필은 깜짝 놀라서 리카의 손을 이번에야말로 거세게 치워냈다.
“머리에 사전이라도 넣고 다녀?”
“한 이사님한테 배우면 이 정도는 별거 아니라구요!”
한구인 이사님, 대체 리카에게 뭘 가르치신 겁니까?
“뭔데 내가 했던 말이랑 별로 차이 없잖아. 아저씨 페티시…….”
“설하야, 나 내 신세가 왜 이런지 모르겠다. 어린애들한테 이런 소리 듣고 살아야 해? 나 장난감이 된 기분이야…….”
“저도 박 이사님 마음 이해해요…….”
장난감 성필과 귀여움 천재 백설하가 고통을 공유했다.
그러는 사이 치논이 준비를 마쳤다. 그녀는 악보를 조심스럽게 보면대 위에 두곤 손을 풀었다.
“시작할게요.”
치논이 건반 위에 손가락을 부드럽게 올렸다.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단숨에 잦아들었다.
다들 그래미 수상 경력이 있는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기대했다. 하지만 큰 기대는 아니었다.
악보를 전문적으로 읽을 줄 아는 백설하와 리카는 특히 그러했다.
‘악보 그대로 소리가 나오면…….’
치논의 능력에 걸맞은 연주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지금의 연주는 어차피 작은 이벤트에 불과했으니까.
식사에 초대되어 우연히 맞은 소소한 여흥이다. 실제 연주회에서처럼 대단한 연주가 나오지 않았다고 실망할 리 없다.
“소녀연맹의 ‘아니’.”
치논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 순간 다들 거센 바람이라도 맞은 것처럼 절로 몸이 굳었다.
그녀의 손가락에서 탄생하는 음악은 ‘아니’가 아니었다. 전혀 다른 폭풍이 공기를 타고 사방으로 진동을 퍼뜨렸다.
“아.”
연주가 시작되고 20초 후 백설하가 깨달았단 듯 감탄사를 터뜨렸다.
‘아니’의 선율, 멜로디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불꽃놀이의 불똥이 튀듯 화려하게 상승하고 하강하길 반복하는 치논의 손가락, 그곳에서 ‘아니’의 편린이 보였다.
‘아니’와 코드는 같지만 선율이 다르다.
도저히 소녀연맹의 데뷔곡인 ‘아니’라고 생각할 수 없는 연주지만, ‘아니’의 조각을 간직하고 있다.
“즉흥연주…….”
성필은 치논이 쏟아내는 폭풍을 받아들이면서 작게 읊조렸다.
야유회 때 한구인이 빌 에반스의 ‘When I fall in love’라는 곡을 들려준 적이 있었다.
당시 성필의 가슴에 너무 깊이 다가왔던 곡인 터라, 집에 돌아가서 찾아봤었다.
버전이 여러 개여서 전부 들어봤는데, 전부 다 다른 곡 같았다. 심지어 시간도 4분, 6분, 10분 이상으로 제각각이었다.
‘즉흥연주입니다.’
성필이 이상하게 여겨 물어보니, 한구인이 그리 답했었다.
‘라이브 버전마다 다른 게 당연합니다. 즉흥으로 연주한 거니까요.’
곡의 뼈대를 유지하면서, 연주할 때의 영감을 퍼부어 표현한다.
현재의 치논도 그러했다. 그녀는 ‘아니’의 악보를 읽었지만, 그건 뼈대를 파악하는 작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오로지 경험과 영감에 의지해서 새롭게 써 내려가는 것이다.
모든 순간이 창조이다.
‘초견(初見)으로 이렇게…….’
그저께에 ‘아니’를 처음 들었다고 했었나?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악보를 보았었다고 했나?
그런데도 이 정도이다.
치논이 모두에게 달라고 했던 10분. 그 짧은 시간 안에 그녀는 ‘아니’를 전부 파악하고 완전히 자신만의 색으로 재창조해냈다.
“으, 어…….”
조아라는 무릎 위에 꽉 쥔 주먹을 올려놓고, 누군가 목을 조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꽉 막힌 신음을 간헐적으로 내었다.
그녀는 치논의 연주에 끌려가고 있었다.
원곡보다 한참 빠른 박자에, 시시각각 달라지는 선율에, 조아라는 끌려가고 있었다.
반복이 가장 큰 미덕인 대중음악에 익숙한 그녀로선 처음 겪는 음악 형식이었다.
당황스러울 법도 한데, 조아라를 비롯한 모두가 연주를 듣고 있었다. 치논의 바람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손을 보고 있었다.
오직 감탄만 하면서.
‘준비도 안 하고 치는 게 이거라고?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생각해내고 치는 게?’
재즈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들이 치논에게 감탄하는 이유는, 치논이 만들어내는 모든 소리가 이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창조된단 사실에 있었다.
그녀들은 치논의 창조성을 경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신아름은 멍하니 입을 벌리면서 생각했다.
‘멋지다.’
체구가 작고 나긋나긋하게 미소 지으면서, 짓궂은 질문에는 쉽게도 얼굴을 붉히는 치논.
그녀의 평소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방을 가득 채우는 생명력만이 치논이란 인간을 설명했다. 타인의 피부와 뼈를 뚫고 들어와 심장에 직격할 수 있는, 흘러넘치는 창조의 생명력이었다.
“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들 감탄했다.
몰아치던 연주가 휴식기에 들어선 듯 느려지고, 모두에게 익숙한 ‘아니’로 돌아왔다.
소녀연맹이 놀란 이유는 그뿐이 아니었다. 어느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치논이, 세상에 더 없을 행복을 간직한 채 웃고 있었다.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것처럼.
‘이런 사람이…….’
백설하는 치논의 미소에 압도되어 입을 막았다. 음악으로 지복(至福)에 도달한 예술가에게, 백설하는 감히 평가할 생각조차 갖지 못했다.
‘이런 사람이 그래미에 가는 거구나…….’
치논의 연주는 아름답고 신나며 또한 아슬아슬했다.
치논은 연주하는 동안 삶을 다해서 소리를 붙잡고 있었다. 농인(聾人)인 그녀는 자신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온전히 들을 수 없다. 하지만 손가락으로 진동은 느낄 수 있다.
그 진동을 생명의 실로 여겨, 영원토록 놓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실이 가늘고 날카로워, 그것을 붙잡은 손이 찢어지더라도 절대 놓지 않는다. 피아노의 진동이야말로 그녀가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쾌락이며, 세상과 완전히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
4살, 처음으로 피아노를 만졌을 때부터.
21살, 버클리 음대를 수석으로 졸업했을 때도.
22살, 그래미에서 상을 받았던 때도.
그리고 지금도, 항상 그러했었다.
‘이런 사람을…….’
치논은 천장을 바라보면서 느긋하게 연주하고 있었다. 그러던 게 끝나, 그녀는 갑자기 피아노 건반과 얼굴을 수평으로 두었다.
이마에 맺힌 땀이 흩날리는 것과 동시에 손가락이 미친 듯이 빠르게 움직였다.
치논은 손가락 끝으로 진동을, 선율을, 음악을 완전한 형태로 받아들이며 몰입했다.
생명의 실을 붙잡고 매달렸다. 손의 가죽이 벗겨지건 찢어지건 뼈가 드러나건 개의치 않고, 이 순간 살아있단 것에만 집중했다.
이 연주는 치논이 살아있단 증명이었다. 모든 생명력을 쏟아부어 사람들에게 알리는 행위였다.
7분에 걸친 연주가 끝나고, 건반 위에 치논의 땀이 한두 방울씩 떨어졌다.
치논이 고개를 들자 다들 박수를 쳐주었다. 예의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난 박수였다.
백설하가, 아니.
소녀연맹이 생각했다.
이런 사람을.
‘아티스트라고 부르는구나.’
생명을 작품으로 바꾸는 인간.
* * *
성필과 소녀연맹이 떠난 집은 한적했다.
치논이 아쉽단 듯 말했다.
“오랜만에 사람이 많아서 좋았는데, 다 가버렸네.”
“내가 자주 올게.”
세이코는 정리를 도우면서 활기차게 말했다.
만약 미사토가 이 모습을 보았다면, ‘우리 세이코쨩이 남의 집 정리를 돕다니…… 다 컸구나……’라고 했을 것이다.
“고마워 세이코. 혹시 커피 마실래?”
“커피는 이제 됐어…….”
치논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소파 근처의 테이블을 정리하던 치논의 눈에 수첩이 들어왔다. 그것을 펼쳐 안을 보니, 소녀연맹 멤버들의 사인이 있었다.
‘나중에 그래미에 오를 아티스트의 사인이에요! 팔면 돈이 돼요!’
라면서 리카가 사인을 시작했었다.
멤버들은 치논의 연주를 듣고 난 뒤라 기가 죽어 있었는데, 치논이 부탁해서 어쩔 수 없이 사인해주었다.
치논은 사인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한 페이지 더 넘기자 성필의 사인도 나왔다.
[세계적인 프로듀서 박성필]
치논은 입을 막고 큭큭 웃었다. 소녀연맹의 사인을 볼 때보다 더 진한 웃음이었다.
“치논.”
“응?”
“오늘 아무래도…… 잘 안 된 거 같지?”
치논이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세이코와 소녀연맹을 친하게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식사 한 번으로 친해질 리는 없긴 하지만, 안 하는 것보다야 좋으니까.
치논은 친구가 잘되기를 바랐다. 이왕이면 자신의 도움으로 잘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건 치논에게 큰 기쁨을 주는 일이었다.
“얘기 잘 했었잖아.”
“하지만…….”
세이코는 성필을 떠나보낼 때와 전혀 달랐다.
‘세상에 다시 없을 불후의 천재 세이코의 배웅을 받다니 파쿠 이사도 운이 좋네요!’라며, 옆에서 지켜보는 치논이 부끄러울 정도로 활기찼으면서 말이다.
“다, 다시 파쿠 이사랑 소녀연맹을 만나려면 또 7개월을 기다려야 해…….”
그 마무리가 썩 좋지 않았다.
세이코는 며칠 내에 소녀연맹과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되길 바랐는데 말이다.
‘이상하긴 해.’
소녀연맹은 왜 그렇게 세이코를 싫어할까?
전후사정을 모르는 치논으로서는, 소녀연맹의 비정상적인 적대심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세이코가 막연한 피해자처럼 보였다.
“걱정 마 세이코. 다음에는…….”
“아가씨.”
가정부 고바야시가 현관쪽에서 걸어왔다.
“이시카와 씨가 오셨습니다.”
“네?”
치논은 일단 모시라고 했다.
리카는 뛰어왔는지 이마의 땀을 닦으면서 거실로 들어왔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아냐 리카. 뭐 두고 갔어?”
“세이코 선배님한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요!”
세이코가 눈을 크게 떴다.
“저요? 저한테요?”
“네, 그게, 선배님.”
리카는 세이코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뺨이 옅게 붉어져 있었다.
“저희가 좋은 인연으로 만날 순 없었지만요……. 저 어릴 때부터 선배님 음악 정말 많이 들었어요! 웨벡스에 간다고 했을 때도 선배님 만나는 거 기대 많이 했어요!”
세이코는 움찔했다가, 곧 입꼬리가 올라가고, 표정이 밝게 펴졌다.
“아티스트로서 존경해요!”
세이코의 눈가가 찡 떨려왔다. 그녀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그 때문에 옆에 선 치논에게 표정을 다 들켜버렸다.
치논은 ‘자 봤지?’란 뜻을 담아 웃어주었다.
세이코는 물기 섞인 웃음을 뱉곤, 리카에게 ‘고마워요’라고 말하려 했다. ‘앞으로 잘 지내봐요’라고도 말이다.
그런데.
“하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우연한 사건을 가장해서 만남을 만들려는 건 아니라고 봐요!”
“……응?”
“이건 스토킹이나 다를 바 없다구요! 아라쨩이 있는 댄스 학원에도 찾아가시고, 연습실 주위도 기웃거리시고!”
“어, 어?”
“아티스트로서 존경하지만, 이런 일은 지양해주셨으면 해요! 박 이사님한테 5년 유예도 얻으셨잖아요!”
“으엉?”
“그럼 이만!”
리카는 세이코에게서 떨어진 후, 치논에게 팔을 마구마구 흔들면서 작별 인사했다.
치논도 그것을 활기차게 받아주었다.
리카가 떠나고, 치논은 굳은 세이코에게 다가갔다.
“세이코, 오늘 말고도…… 이런 짓을 많이 했었구나? 스토킹…….”
“스, 스토킹 아니야아!”
어쨌거나, 세이코는 소녀연맹과 아주 약간 더 친해진 듯한 기분을 느꼈다.
* * *
한국으로 돌아온 성필.
그의 얼굴은 시종일관 굳어 있었다. 출근하고 퇴근할 때까지 그러했다.
A&R 팀의 정지음과 이재호가 수군거렸다.
“성필이 형 안 좋은 일 있나?”
“음, 제 예상인데 일본에서 반응이 생각보다 안 좋았던 거 아닐까요?”
“평소였으면 일본 반응 자랑부터 했을 텐데. 그럴듯하네.”
“마음이 진정되시면 A&R 회의에서 말씀해주시겠죠. 다음 일본 앨범 방향을 바꿔야 할까요.”
두 사람의 성필 걱정은 곧 A&R팀의 방향성과 차후 전략으로 넘어갔다.
안타깝게도 성필의 얼굴이 굳은 건 소녀연맹이나 가로 엔터 때문이 아니었다.
‘태훈이 형이랑 저녁에 만나네.’
시간이 다가오니 절로 다리까지 떨게 된다. 그렇게 종일 복잡미묘한 마음으로 지냈던 성필은 마침내 퇴근 시각을 맞았다.
중앙 계단으로 향하던 도중 묘하게 상기된 얼굴의 한구인이 그를 불렀다.
“박 이사님, 리카 씨가 피아니스트 치논 씨를 만났다고 하던…….”
“저 바빠요.”
성필은 실망한 한구인을 제치고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밑 1층에서 손혜빈이 그를 불렀다.
“성필아, 오랜만에 돌아왔는데 술…….”
“나 바빠.”
성필은 어버버 거리는 손혜빈을 지나쳐 출구로 향했다.
홍규헌이 1층 휴게 공간에서 성필에게 인사했다.
“박 이사 퇴근해? 오늘도 고생했어.”
홍규헌은 휴게 공간 벽 쪽에 설치된 형광등을 교체하려 했다. 그녀가 새 형광등을 들고 간이 사다리를 올랐다.
“그걸 왜 사장님이 직접 하세요?!”
성필이 위험한 주인을 지키러 달려가는 강아지처럼 홍규헌에게로 쇄도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형광등을 받아 교체와 점검까지 완료했다.
“내가 할 수 있는데.”
“아니 다른 직원들한테 시키시지…….”
“퇴근 시간인데 미안하잖아. 뭐어, 고마워 박 이사.”
“아니에요.”
성필은 내려두었던 가방을 집어 들고 다시 퇴근할 준비를 마쳤다.
‘가자.’
전장에 나서는 장수처럼 결심하고, 성필은 가로 엔터의 문을 나섰다.
“아.”
유리문을 열자마자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성필은 그녀를 보자마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진저 씨?”
“아, 안녕하심미까 박 이사님…….”
진저는 양팔에 종이백을 껴안고 허리를 굽혔다. 왠지 모르지만 잔뜩 움츠러든 모습이었다.
“왜 여기…….”
그때 성필은 뒤에서 시선을 느꼈다. 돌아보니 A&R팀의 정지음과 이재호가 어처구니없단 듯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 굳히고 있던 거 연막이었네…….”
“좋은 거 숨기려고 그러셨나 봐요. 아니 근데 어떻게 케이어스를 퇴근길에 부를까요?”
“몰라. KS 엔터 이직 제안이라도 받았나.”
“끔찍하네요…….”
“아, 아니야!”
성필이 반사적으로 외쳤다. 이재호와 정지음이 야유를 돌려주었다.
성필은 ‘내가 부른 게 아니야’라며 변명하려 했지만, 바로 앞에 진저가 기다리고 있단 데 생각이 미쳤다.
그는 퍼뜩 진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오셨어요? 아라는 지금 없는데.”
진저가 더듬더듬 말했다.
“사과, 사과드리려고 왔슴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