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화
“제가 세이코 씨한테 드린 말씀 중 진심 아닌 게 없습니다. 순간의 면피를 위해 꺼낸 말 따위 하나도 없습니다.”
성필이 세이코의 고백을 거절하며 댔던 이유가 바로 소녀연맹이었다.
그녀들을 맡는 동안 성필은 사랑에 마음과 기운을 쓸 수 없으리라고. 그런 상태에서 누군가와 교제하는 건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그래서 거절했었다.
“그러니, 지킵니다.”
전부 진심이었다.
성필은 자신이 뱉은 말을 무위로 돌릴 행위는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물론 완전한 언행일치를 보일 수는 없겠지만, 할 수 있는 만큼은 하고 싶었다.
“세이코 씨가 흥분하셨던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제 오해였던 게 밝혀졌으니 이번과 같은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무엇보다, 사람한테 커피 같은 걸 끼얹으면 안 돼요.”
“네, 네…….”
세이코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마음먹었던 거랑은 완전히 다르게 이야기가 흘러갔네.’
미사토가 세이코를 크게 꾸짖어달라고 했던 것과는 다르게, 성필은 오히려 세이코에게 포상을 줘버린 꼴이 됐다.
‘아냐, 포상은 무슨 포상.’
설마 세이코가 정말 5년을 기다릴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어떤 인간이 그런 고통을 감내할 수 있겠는가?
‘그냥 내가 뱉은 말을 지키려는 거지. 세이코 씨의 마음을 거절했을 때의 내 결심을 지키려는 거고.’
성필은 소녀연맹이 최고의 자리에 오를 때까지 계속 그녀들과 함께일 것이다.
원래 그런 결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방금의 약속은 그 결심을 언어로 표현한 데 불과했다.
‘얘들아, 봤지?’
이렇게 내밀한 이야기를 멤버들 앞에서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소녀연맹은 성필과 세이코의 관계를 짐작하고 있었으며, 세이코도 그녀들과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내 마음 분명히 봤지?’
성필은 일부러 세이코만을 보았다. 뒤에 선 소녀연맹의 반응을 보려고 흘끗 눈을 돌림으로써 이 멋진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오로지 진심만을 보여준다.
성필은 자신이 소녀연맹에 이토록 진심이란 사실을, 그녀들이 알아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프로듀서인 내 의지만큼 너희들도 힘내주길 바란다.’
이 마음이 그녀들에게 닿을 수 있길…….
“아니 그게 뭔 개소리예요!”
조아라가 곧장 반박했다.
흥분했는지, 아니면 세이코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은지 한국어를 썼다.
너무 큰소리였던 터라 성필도 깜짝 놀라 뒤로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조아라가 손발을 다 써가면서 성필의 결심을 바보 같은 소리라고 몰아갔다.
“아저씨 꽃다운 청춘(33살) 다 버리겠다고요? 그리고 뭐 다 시들어서(38살) 그제야 부랴부랴 결혼정보회사 가입하고 비슷한 나이에 그다지 마음도 안 맞는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그것도 아니면 백수랑 결혼해서 적당하게 아이보고 살려고요?!”
“너 말이 너무 심…….”
“저 인간이 뭐라고 그런 약속까지 해요!”
“세이코 씨 때문도 있지만 난 너희들을 위…….”
“누가 그딴 거 바란대요!”
성필은 가슴이 갈가리 찢기는 듯했다.
자신의 결단과 마음이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
‘나, 나는 너희를 너무 아끼고 위해서 연애조차 할 생각이 안 드는데……. 내가 너희를 이렇게나 생각하고 있는데…….’
서로 마음이 통하지 않는 설움이 성필을 감쌌다.
‘그리고 다 시든다니…….’
성필은 조아라를 오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넌 다 시들어 빠진 나한테 그런 짓을 했었던 거니……?’
“뭐요. 뭘 꼬라봐요.”
“아니…….”
“쌤도 뭐라고 해줘요.”
백설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나 방금 혹시 정신 잃었었나? 이, 이야기를 못 따라가겠어. 왜, 왜 박 이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야? 나 아무것도 모르겠어……. 누가 해석 좀 해줘…….”
백설하가 망가졌다.
“야 신아름 너는? 네 아빠가 저 여자 때문에 청춘 다 버리겠댄다.”
“으어…….”
“뭔데 넌 또 왜 그러는데.”
“음…… 어…….”
신아름은 계산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언젠가 성필이 결혼하게 될 미래를 불안하게 상상하곤 했었다.
그렇게 되면 더는 성필이 신아름의 본가로 오지도 않을 것이고, 지금과 같은 관계가 유지되지 않을 건 당연하고, 아무튼 여러 가지로 엉망진창이 될 터였다.
‘……5년이면 나한테 이득이지 않나?’
계산 끝.
“팀장님 결정 존중해드려.”
“뭐?! 넌 지금 이 인권 박탈의 현장을 보고도 그딴 말이나 나와? 어?”
“인권 박탈은 우리가 연애금지 당한 게 인권 박탈이지.”
“그러니까 그 꼴을 아저씨도 당한다고! 심지어 5년을!”
“너 왤케 흥분했어.”
“흥분 안 하게 생겼냐고!”
짝 짝 짝 짝.
박수 소리의 근원으로 시선이 모였다.
장하양이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물개박수를 치는 중이었다.
“박 이사님의 마음, 확실하게 받았어요.”
“하양아…….”
장하양은 성필의 팔을 천천히 들어 올리고 그의 손을 굳게 맞잡았다.
“저희 꼭 최고의 아이돌이 될게요. 그때까지 함께 힘내요. 반드시. 한눈팔지 않고요. 최고의 아이돌이 되는 그날까지, 반드시.”
“내 마음을 알아줬구나……. 하하, 눈물이 다 나네…….”
조아라가 뒷목을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이제 마지막 남은 희망은 리카밖에 없었다. 조금 모자란 태도를 보이지만, 한구인의 수제자라고 불릴 만큼 방대한 지식을 자랑하는 리카다.
그녀라면 알아줄 것이다.
“…….”
리카는 침묵을 지킨 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조아라의 등에 섬찟한 감각이 내달렸다.
지금의 리카는 뭔가가 다르다. 리카가 이토록 진지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아이였나?
조아라는 밤하늘에 달의 뒷면이 떠오르기라도 한 것처럼 무의식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야, 야 리카 왜 그래.”
“…….”
“리카?”
“그런 건가.”
“……?”
그런가 보다.
“파쿠 이사.”
세이코가 겁먹은 낯빛으로 성필을 불렀다.
“다들 뭐라고 하는 거예요?”
“글쎄요.”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렵다.
생각했던 것과 다른 전개가 되었지만, 성필은 훈훈하게 마무리 지으려 했다.
“얘들아, 아무튼 그렇게 됐다. 앞으로도 잘해보자. 세이코 씨도 커피 같은 거 사람한테 뿌리면 안 돼요. 아시겠죠?”
“앞으로도 잘해보긴 뭘 잘해봐요!”
오늘따라 조아라가 날카롭다.
그렇게, 성필은 그날 하루를 살짝 우울하게 보냈다. 자신의 진심을 다한 결심이 멤버들에게 통하지 않았단 게 슬프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한 명에게는 통했다.
“박 이사님,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더 열심히 할게요. 꼭 함께 정상으로 올라가요.”
“고마워 하양아. 정말…….”
성필은 장하양에게나마 자신의 마음이 통했단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장하양은 감동한 성필에게 해맑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마치 음악방송 1위를 달성했을 때처럼 순수한 성취감이 가득한 미소였다.
* * *
소녀연맹의 두 번째 일본 콘서트는 도쿄의 동쪽에 있는 치바의 제프(Zepp)에서 열렸다.
도쿄에서 그다지 멀지 않던 터라 소녀연맹은 도쿄와 다름없는 컨디션에서 공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 행선지에서는 달랐다.
‘나고야인가.’
조아라는 인터넷에서 나고야의 위치를 검색해보았다.
‘헤엑, 서울에서 부산 정도 거리네. 신칸센으로도 꽤 걸리고.’
그럼 왕복 3시간 정도를 잡아먹게 될 테니, 공연에 꽤 무리가 갈 수도 있겠다.
조아라는 이젠 습관이 되어버린 콘서트 세트리스트 복기를 하면서 복도를 걸었다.
웨벡스 건물은 어디든 할 것 없이 항상 활기찼다. 가로 엔터처럼 복작거리는 맛은 없지만, 큰 회사라는 느낌이 확 들었다.
조아라는 거의 십수 초에 한 번씩 사람들에게 간단히 묵례하면서 걸어야만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저 멀리서 걸어왔다. 인사할 준비를 하던 조아라가 움찔하면서 멈췄다.
“아라쨩.”
오토나시 치논이 살랑살랑 손을 흔들면서 다가왔다. 조아라는 웃으면서 인사했지만 자기도 모르게 눈동자가 돌아가 시선을 피해버렸다.
‘하필 치논 언니랑 마주치네…….’
조아라는 아직도 치논에게 자기 자랑을 떠벌렸던 걸 창피하게 여기고 있었다.
치논은 조아라 자신을 얼마나 우습게 보았을까. 화가가 막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배운 초등학생의 자랑을 듣는 기분이 아니었을까.
다른 점은, 초등학생의 자랑은 애교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성인인 조아라의 자랑은 그럴 수 없으리란 점이었다.
“뭐 해?”
“연습 시작할 때까지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어요. 휴식 겸해서요. 언니는요?”
“카페.”
“피아노 치시게요?”
“응. 맞다 아라쨩. 곧 일본에서 일 끝내고 외국으로 나가지?”
“네.”
“그 전에 내 집에 안 올래? 식사라도 대접할까 해서.”
“……왜요?”
‘왜요?’라며, 치논이 조아라의 말을 따라 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곤 어색하게 웃었다.
“싫으면 괜찮아.”
“아뇨 싫은 게 아니라…….”
만난 지 며칠밖에 안 된 인연이다.
심지어 나이 차이가 11살이니, 거의 성필과 조아라 사이와 비슷하다.
그런 사람이 식사를 대접하겠다면서 초대하는 건 확실히 흔한 일은 아니었다.
“아라쨩이랑 친해지고 싶어서 그래.”
“나랑 왜…….”
대단한 아티스트인 치논이 왜 조아라와 친해지고 싶단 건가.
조아라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동생이라 귀여워해 주고 싶단 말을 돌려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라쨩이 내 연주에 관심을 가져줬잖아. 그때 너무 기뻤어. 솔직히 며칠간 연주하는데 놀랄 만큼 관심이 없었어서, 기가 꺾일 뻔했었거든. 보답이야.”
“보답요…….”
조아라는 폰으로 캘린더를 확인하고 ‘네, 뭐, 알겠어요’라며 떨떠름히 대답했다.
치논은 진심으로 좋아하는 미소를 짓곤, 방금 떠올랐다는 듯 말을 이었다.
“괜찮으면 멤버분들도 데려와.”
“네?”
“대단하신 분들이잖아. 뵙고 싶어.”
대단하신 분들, 이란 말은 조아라가 치논에게 했던 자랑을 토대로 나온 단어일 것이다.
조아라는 다시 이전의 기억이 떠올라 뺨이 붉어졌다.
“대단하긴요. 언니에 비하면 뭐.”
“나에 비하면?”
“언니 그래미에서 상 받았다면서요. 왜 빨리 안 말했어요.”
“그래미? 아, 그랬었지.”
치논은 그래미가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말했다. 그게 조아라를 더 움츠러들게 했다.
모든 음악인의 꿈이라는 시상식이 아닌가.
평생을 자랑으로 가슴에 간직해도 모자랄 판인데, 치논은 ‘그런 일도 있었지’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게 뭐가 대단해. 그냥 미국 어디 협회 같은 데서 주는 거잖아. 그거보다는 앨범을 수십만 장 판 게 훨씬 대단하지.”
치논은 칭찬을 이어갔다.
“나 최근에 낸 앨범은 오리콘 5위였어. 초동 1만 장 조금 넘어가는 정도로. 내가 아라쨩만큼 팔았으면 발가벗고 소리 지르면서 거리를 뛰어다녔을걸? 10만 장이라니, 엄청나잖아.”
대체 어떻게 이런 칭찬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일까. 치논은 자신의 말을 진심으로 느껴지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조아라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자신이 정말 대단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나 혼자 한 것도 아닌데요 뭐.”
“나도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마.”
치논의 얼굴도 어느새 발갛게 변해 있었다.
“내가 정말 엄청 훌륭한 위인인 거 같잖아. 그러지 마 정말. 그래서, 올 거지?”
이번엔 조아라도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미에서 수상한 피아니스트님한테 초대받았잖아요. 멤버들 다 끌고 가야죠.”
“하지 말래두…….”
치논이 어벙하게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아, 맞다. 그리고 또 센피루 씨도 같이 오실 수 있을까?”
“센피루?”
누구지?
“몰라? 모를 리 없는데. 프로듀서시라며.”
“……센피루, 성필, 아저씨? 아저씨 알아요?”
“에, 아저씨?”
치논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센피루 씨가 아저씨야? 그럼 나도 아줌마야?”
“아니 언니는 아줌마 아니죠!”
“그럼 센피루 씨는?”
“아저씨는…… 아저씨예요…….”
치논이 음울하게 수긍했다.
“치논 아줌마가 맛있는 거 많이 준비해두고 있을게. 꼭 와줘…….”
“아니라니까요! 언니 아직 젊고 예쁘고……!”
조아라는 치논을 달래기 위해 익숙하지도 않은 일본어로 온갖 칭찬을 짜내야만 했다.
* * *
소녀연맹의 일본 콘서트 투어가 끝났다.
도쿄, 치바, 나고야 등지의 4회 콘서트는 성황리에 종료되어 일본의 커뮤니티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목을 끄는 건 일명 ‘플라잉 하양’이었다.
[하양이가 날 때 눈물 줄줄 흘렸다.
└ 진짜 날았음?
└ 진짜 날았지.
└ 어떻게 날았는데?
└ 천사니까 날 수 있어.
└ 날았단 게 비유가 아니라?
└ 진짜 날았다니까.
└ 그니까 어케 날았냐고.
└ 날개로.]
이런 식으로 ‘하양이가 날았다’라는 말만이 콘서트 관람자들의 입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관람자들은 집요하게도 ‘어떻게 날았는지’ 발설하지 않았다.
당연히 콘서트를 안 본 사람들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장하양이 날았다는 게 농담인지 과장인지 비유인지 모른 채 ‘사람이 어떻게 날아?’란 질문만 반복했다.
그게 일종의 밈이 되어서, 어느 순간부터 ‘하양이는 날 수 있어’란 말이 아이돌 커뮤니티에서 유행하게 됐다.
[아니 그래서 진짜 어떻게 날았는데?]
성필은 일본 인민이들의 가공할 단합력에 감탄했다. 어떻게 한 명도 콘서트 내용을 발설하지 않을 수가 있지?
‘보통은 콘서트 한 번 열면 기믹이 다 유출되는데.’
“아름아, 이거 봐봐. 이런 거 유행하고 있다?”
성필은 폰의 내용을 신아름에게 보여주었다. 신아름은 그것을 흘끗 보곤 원래 하던 일에 집중했다.
신아름은 성필의 수첩 속지를 교체해주고 있었다. 항상 신아름이 성필에게 생일 선물로 수첩 속지를 주었었는데, 성필이 받은 속지를 아직도 교체하지 않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신아름이 오늘 대신해주고 있었다.
“아름아.”
성필이 다정한 투로 말했다.
“역시, 내가 투어에 다 따라갈까?”
“……아뇨. 이미 결정된 거잖아요. 제가 괜찮다고 했고요. 됐다.”
신아름이 속지를 교체한 수첩을 성필에게 내밀었다.
“내년에도 잘 써요.”
“고마워.”
“……팀장님.”
“응.”
“앞으로도 이렇게 떨어지는 일 있겠죠? 유명해지면 유명해질수록 많아지겠죠?”
“아마도.”
아까부터 신아름은 일부러 성필을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바닥에 뭐라도 있단 듯이 고개를 사선으로 늘어뜨릴 뿐이었다.
“그럼 미리 연습해둬야죠. 팀장님도 한국에서 일이 있으니까요. 계속 같이 못 있는 거 알아요.”
“그래도 이번엔…….”
“저 팀장님 없이 1년도 넘게 버텼었잖아요.”
성필이 석세스 엔터에서 나갈 때를 말하는 것이었다. 성필은 신아름이 ‘버텼다’고 한 게 가슴이 아팠다.
“고작 십몇일은 쉽죠. 대신.”
“대신?”
“돌아오면 더 자주, 많이 같이 있어야 해요.”
“어차피 회사에서 쭉 볼 거잖아.”
“회사 말고요. 사적으로요.”
“알겠어. 그럼 이제 화 다 풀렸어?”
“화 안 났었거든요?”
“놀고 있다.”
성필과 신아름이 문 쪽을 보았다. 조아라가 팔짱을 낀 채 지켜보고 있었다.
“둘이 호적에 각자 이름 적어 넣으러 가거나 빨리 밥 먹으러 나와요.”
“팀장님, 조아라가 저희보고 결혼하라는데요?”
“야이 씨, 이름을 옆이 아니라 위나 아래에 넣으라고. 부녀로.”
“이럴 수가, 배우자도 없는데 딸이 생겼네…….”
“싫어요?”
“근데 법적으로 가능한가?”
“진짜 놀고 있네.”
조아라가 질렸단 듯 먼저 떠났다.
성필과 신아름은 서로를 보고 웃었다. 그리고 식탁으로 향했다.
일본에서의 콘서트가 끝난 기념으로, 성필은 소녀연맹의 숙소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오늘의 요리사는 당연히 리카였다. 그리고 또 당연히 일본식이었다.
“다들 맛있게 드세요!”
리카가 뿌듯하게 말했다.
식사가 시작됐다.
“박 이사님 맛있으신가요!”
“이야, 아이돌이 해주는 밥을 먹게 되네. 이런 날이 올 줄 상상도 못 했어.”
“맛있으신가요!”
“모양이 그럴싸하네.”
“맛없나요?!”
“맛있어.”
“당연하죠! 박 이사님 일본 음식이 입에 맞으신 거 아닌가요!”
“김치 없어?”
“히도이(너무해)!”
그때 조아라가 ‘저……’라며 이목을 모았다.
“다들 내일 시간 있어요?”
“서, 설마 아라쨩이 여행 가이드를 짠 거야? 스고이(굉장해)! 나 갈래! 꼭 갈래!”
소녀연맹은 하루를 온전히 일본 여행에 쓸 수 있게 됐다.
휴식은 콘서트를 연달아 하는 소녀연맹 멤버들에게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남은 투어에서도 이런 휴식이 서너 번 정도 예정되어 있다.
“아니, 내가 어떤 분한테 식사 초대를 받았는데…….”
조아라는 오토나시 치논이란 사람을 설명했다. 그녀가 대단한 피아니스트라는 것부터, 멤버들을 보고 싶다고 말했단 것까지.
그 이야기를 들은 멤버들은 난색을 표했다.
모처럼 얻은 휴일인데 모르는 사람의 집에 초대되어 밥을 먹고 싶진 않았기에.
조아라는 반응이 시큰둥 하자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밥 먹기에 집중하려던 차, 그녀가 문득 성필에게 물었다.
“치논 언니가 아저씨도 왔으면 좋겠다던데요.”
“나?”
은근히 기대하고 있던 성필이 자신을 가리켰다.
“네. 근데 치논 언니 어떻게 알게 됐어요?”
조아라는 치논의 초대를 받아들일 때 미처 정신이 없었다. 치논이 조아라가 성필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에 충격을 받았어서, 그녀를 달래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필과 치논의 관계에 대해 묻지 못했었다.
“아, 그거?”
성필은 치논과 세이코 사이에 일어났던 일을 설명했다.
“세이코 선배가 그래서…….”
백설하가 납득했다. 그러자 조아라가 백설하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쌤 뭘 이해한단 것처럼 말해요. 그런 상황이면 사람한테 커피를 부어도 된단 거예요?”
“아, 아니 그런 뜻은 아니구…….”
“맞아요 언니.”
“하양이까지…….”
“커피로 되겠어요?”
“……?”
백설하는 의아하게 여겼지만, 딱히 심연으로 들어가고 싶진 않았기에 장하양에게 더 이상 묻진 않았다.
“그래서 뭐, 아저씨 갈래요? 아저씨도 안 가면 나 혼자 가겠네.”
“아라 동정심 유발하는 작전 잘 쓰네.”
“됐어요. 나 혼자 치논 언니랑 밥 맛있게 먹게.”
“나도 갈 거야.”
“어, 진짜요?”
“응. 딱히 안 갈 이유는 없지 않아? 오히려 갈 이유가 많지.”
“뭐요. 실은 아저씨가 정말로 치논 언니한테 관심 있어서 말 걸었었단 거요?”
“관심이 가긴 했어.”
“진짜요?!”
“손가락이 길고 하얗게 예뻤거든.”
성필이 백설하를 응시했다.
백설하는 자신의 옆을 쳐다보고, 뒤를 쳐다보고,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돌렸다.
성필이 마저 말을 이었다.
“설하 처음 봤을 때처럼.”
“아앗, 맞아요! 박 이사님 처음 쌤 봤을 때 손가락이 어떻니 하면서 기분 나쁘게 말했어요!”
“나한테?! 나, 나, 나랑 마주친 뒤에 둘이서 그런 말을 했었어?!”
“박 이사님 빨리 해명하세요!”
“설하의 손가락이 지금의 인연을 만든 거지.”
“부정을 안 해?!”
백설하는 땀을 뽈뽈 흘리면서 자신의 손을 관찰했다. 뭔가 특별한 점이 있는지, 보석감정사처럼 섬세하게 들여다보았다.
성필은 그런 백설하를 재밌단 듯 바라보다가, 리카를 향해 서운한 투로 말했다.
“근데 리카, 그때 기분 나쁘게 생각했구나.”
“당연한 거 아닌가요! 몇 번 보지도 않은 여자한테 손가락 길고 예쁘고 하얗다고 하는 게 기분 나쁜 게 아니면 뭔가요! 아니, 생각은 할 수 있는데 18살인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 이상하지 않나요! 솔직히 그때 이사님 머리가 살짝 돈 줄 알았어요!”
“돈 건 너겠지.”
리카는 성필의 간지럽힘에 ‘끼에에엑!’ 소리를 내면서 의자에서 바닥으로 철퍼덕 떨어져 내렸다.
“아무튼 나도 갈 거야. 초대받았으니까.”
“오케이, 그럼 나랑 아저씨…….”
“나도 갈래.”
백설하가 소심하게 손을 들었다. 왠지 모르게 손을 길게 뻗으려는 듯한 느낌이 드는 제스처였다.
“쌤 안 간다면서요?”
“다, 다시 생각해보니까 나도 피아노 칠 줄 알잖아? 대단한 피아니스트시라니까 뭔가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음 뭐, 알겠어요. 그럼 셋…….”
“팀장님 가면 나도 갈래.”
“……그럼 넷인가?”
“아름이 가면 나도 갈래.”
신아름이 장하양을 어처구니없단 듯 쳐다보았다.
“언니, 내가 가니까 간다는 건 뭐예요?”
“그럼 아름이가 박 이사님 가니까 간다는 건?”
“나야 팀장님이랑 같이…….”
신아름은 이런 말을 해야 한단 게 짜증 난단 듯 눈을 질끈 감고, 창피함이 서린 투로 답했다.
“같이 오래 있고 싶으니까요…….”
“나도 아름이랑 같이 오래 있고 싶은데?”
“맘대로 해요 네…….”
마지막은 리카였다.
다들 바닥에 널브러진 리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간지럼의 여운에서 겨우 정신을 차리고 식탁을 짚으며 올라왔다.
“먼저!”
리카가 신아름과 조아라에게 삿대질했다.
“누가 내가 간지럼 타는 부위 가르쳐줬어! 원래 아타시(나)는 철옹성이었는데! 어떻게 박 이사님도 알고 계신 거야!”
“갈래 말래?”
“갈래!”
“그래.”
그렇게 소녀연맹 전원이 치논의 집으로 가게 됐다.
* * *
치논의 자택은 도쿄 근교의 한적한 동네에 위치해 있었다.
잘 닦인 도로의 적당히 가파른 길을 따라 올라가니, 정원이 딸린 멋진 2층 주택이 자리하고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반들반들 닦인 격자무늬 철제 대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와, 돈 많이 버나 보다.”
겨울이라 쓸쓸하게 변한 정원을 가로지르며 조아라가 감탄했다. 그녀는 자연스레 성필을 보았다.
“아저씨, 치논 언니는 앨범 많이 못 판다던데 돈을 이렇게 버네요. 근데 우리는 앨범 수십만 장 팔고도 왜 정산을 못 받아요?”
“내가 횡령해서.”
“와, 이럴 줄 알았다.”
“도망갈 거면 도망가. 난 계속 횡령할 거야.”
“됐어요. 난 내 꿈만 이룰 수 있으면 돈 따윈 어찌 돼도 좋아요.”
“오올.”
성필과 조아라가 하이파이브했다.
“그래서 치논 언니 왤케 돈 많은데요.”
“음…… 일단 세계적인 톱 피아니스트시고. 옛날에 내가 했던 말 기억 나? 음악 산업 수익의 70%는 어디랬지?”
“공연이요.”
“맞아. 공연을 많이 도시는 거지. 클래식이나 재즈 쪽 사정은 잘 모르지만, 아이돌과는 달리 꼭 팬이 아니어도 공연을 많이 보지 않을까?”
이른바, 그쪽은 장르 전체가 관객을 공유하는 경향이 있다.
아이돌로 비유하자면, 팬들이 케이어스이든 소녀연맹이든 상관하지 않고 아이돌 공연이라면 모두 보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기사 검색해보니까 최근에 했던 일본 투어는 30번 연속으로 했더만.”
“30번? 그렇게 많이 하면 사람들이 보러 오긴 해요?”
“오겠지.”
오기에, 치논은 이런 커다란 집에 살고 있다.
다섯 사람은 현관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리고, 40대쯤 되어 보이는 나긋한 인상의 여자가 반겨주었다.
“어서 오세요. 치논 아가씨의 집에서 일을 돕는 고바야시라고 합니다. 안쪽으로.”
가정부 고바야시가 여섯 사람을 공손히 안내했다.
이렇게 큰 집에서 혼자 사나? 어떻게 관리하지? 청소는 어떻게? 그 고민이 순식간에 풀리는 순간이었다.
여섯 명은 널찍하고 긴 복도를 따라 거실로 들어갔다. 그야말로 ‘눈이 탁 트이는’ 넓은 거실이 반겨주었다. 은회색의 인테리어가 사방에서 고풍스러움을 풍겼고, 그 중앙의 고급 소파에.
“우연이네요.”
전혀 우연이 아닌 듯한 세이코가 앉아 있었다.
“파쿠 이사, 소녀연맹. 콘서트 잘 마쳤다죠? 수고했…….”
성필이 유령처럼 뒤로 돌아 현관으로 향했다.
“내 얼굴 봤다고 도망치는 거예요?!”
세이코가 벌떡 일어난 기세와 전혀 다르게, 안절부절 성필을 붙잡으려 다가갔다.
하지만 곧바로 가는 건 불가능했다. 성필로 가는 길을 소녀연맹이 막는 형세여서, 세이코는 빙 둘러 가야만 했으니까.
세이코는 슬금슬금 소녀연맹의 눈치를 보면서 현관으로 도망가는 성필을 쫓았다.
“도망가는 거 아니에요! 전화예요 전화!”
이미 현관 앞에 도착한 성필은 멀리 떨어진 거실까지 닿도록 소리를 질렀다.
“저, 전화라면서 그냥 가는 거 아니죠?”
“아니에요! 전화 받고 올 거예요!”
쿵.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세이코는 옆으로 눈을 돌렸다. 소녀연맹 멤버들이 지긋이 세이코를 보고 있었다.
“저, 정말 우연이에요. 오히, 오히이, 오히려어, 내, 내가 묻고 싶네요. 왜 치논의 집에 소녀연맹이 있죠?”
“…….”
“……노, 노래 불러줄까요?”
세상 누구도 보지 못했던 가후의 비굴한 태도였다.
* * *
세이코를 마주한 성필은 혼란스러웠다. 동시에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했다.
‘치논 씨가 만든 자리구나.’
그 순간, 성필의 품에서 폰이 진동을 토해냈다. 성필은 숙련된 손짓으로 폰을 꺼내 번호를 확인했다. 그 즉시 뒤로 돌아 밖으로 향했다.
세이코가 오해하여 뭐라고 했으나, 성필은 적당히 대답하고 집 밖으로 나갔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야.’
하지만 성필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번호였다.
그와 통화하는 목소리를 멤버들에게, 세이코에게 들려주고 싶진 않았다.
문을 나서자마자 겨울바람이 반겨주었다. 귀가 먹먹해지는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린 후, 성필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성필아?]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알음알음.]
성필은 코로 길게 숨을 뱉어냈다.
“태훈…….”
그리고 붙이고 싶지 않은 호칭을 습관처럼 붙였다.
“태훈이 형.”
석세스 엔터 대표, 김태훈.
[어, 오랜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