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화
“나 정말 너무 무서웠어.”
저녁 식사 중, 장하양은 콘서트 때를 떠올리며 음울하게 말했다.
“그건 우리도 다 놀랐어요.”
조아라가 맞장구쳐 주자 장하양이 씁쓸하게 웃었다.
일본에서의 첫 번째 콘서트 때, 장하양이 솔로 랩 퍼포먼스 곡인 ‘도미노’를 선보였었다.
상대에 대한 집착을 파워풀하게 표현하는 랩인데, 관객석의 반응이 대단했었다.
대단하게 조용했었다.
“뭔 클래식 공연장인 줄.”
“정말로…….”
장하양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순조롭게 공연을 마쳤었다. 하지만 백스테이지로 돌아와서는 눈물짓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뭔가 잘못했나 싶어서 말이다.
나중에 히무라에게 들으니, 일본 아이돌 팬들이 그런 식의 퍼포먼스에 익숙하지 않다고 했었다.
‘뭐랄까, 그런 쪽보다는 귀엽고 애교 있고 부드러운 모습이 더 먹히는 편입니다.’
소녀연맹이 일본 데뷔 앨범을 낼 때도 타이틀곡은 ‘팅글’이었다.
이는 일본 팬들의 취향을 적극적으로 고려한 조치였다. 멤버들, 특히 장하양은 이번에 일본 팬들의 취향을 뼈저리게 알게 됐다.
신아름이 우중충한 장하양을 위로했다.
“근데 하양 언니 무대를 싫어한 게 아니라 걍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는? 그런 느낌이었던 거 아니에요?”
“그럴까…….”
“언니가 동물 잠옷 입고 춤췄을 땐 다 좋아 죽으려고 했잖아요.”
그때도 장하양은 깜짝 놀랐었다.
공룡 잠옷을 입고 올라가서 춤을 췄을 뿐인데, 관객들은 세상이 떠나갈 듯한 익룡 울음소리를 내주었었다.
장하양은 자신이 마침내 댄스 퍼포먼스의 극에 닿아서, 손짓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을 경악시킬 수 있게 된 건가 싶었었다.
“아하하, 동물 잠옷은 다 같이 입었잖아.”
“근데 언니 내가 봐도 귀여웠어요.”
“난 잘 모르겠는데.”
조아라가 끼어들었다. 그러자 신아름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조아라 너 하양 언니가 안 귀엽단 거야?”
“아니. 일본에서도 우리 팬들은 여자가 더 많잖아. 나는 쫌……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그런 느낌을 잘 모르겠어. 왜 그러지?”
조아라가 리카를 보았다.
리카는 진지하게 답했다.
“아라쨩 카와이(귀여워)! 자기가 귀엽고 예쁘고 멋진 걸 모르는 게 더 매력적이야!”
“아 달라붙지 말라고! 그래 왜 이러냐고 진짜! 달려들려면 남자 아무나 잡아서 달려들지!”
조아라는 리카가 남자와 교류하지 않은 기간이 너무 길어진 나머지, 근처의 여자를 대체재로 삼고 있지는 않나 의심해왔다.
연습생 때부터 계속 말이다.
그 의심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았다.
“멋지잖아!”
리카가 간단히 답했다. 조아라는 리카의 뺨을 밀어내고 지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알 거 같아.”
의외로 동의를 표한 건 장하양이었다. 조아라가 의아해했다.
“언니가요?”
“응.”
장하양이 백설하를 응시했다. 그에 따라 다른 멤버들의 시선도 백설하에게로 옮겨갔다.
가만히 식사에 집중하던 백설하는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지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쳐다보는 네 쌍의 시선에 당황하더니, 불안한 듯 헤헤 웃었다.
“왜, 왜 그래?”
“봤지?”
“와, 진짜 귀여움 천재다.”
조아라는 물론 다른 멤버들도 격하게 동의했다. 어떻게 가장 나이가 많은 언니가 가장 귀여울 수 있을까?
“그으, 귀여움 천재란 말 그만하면 안 돼?”
“왜 그러세요 언니.”
장하양이 백설하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귀엽단 게 싫으세요?”
“아니, 그게…….”
‘뉴아사’ 준비 기간 성필이 붙여준 ‘귀여움 천재’란 별명은 어느새 소녀연맹 내에서 유행하게 됐다.
심지어 가로 엔터에서도 유행하며, 이어서 인민이들 사이에도 퍼져나갔다.
백설하는 공식 귀여움 천재가 된 것이다.
외모는 유려하며 날카롭기 그지없건만 말이다. 때문에 백설하는 데뷔 초창기에는 차가운 무표정에서 살짝 미소를 짓는 게 입덕 포인트라고 불리기도 했었다.
지금은 귀여움 천재로 등극했지만 말이다.
“조금, 그게에…….”
백설하는 말을 끌다가 결국 하고픈 말을 하지 않았다.
‘왠지 동생이 된 기분이다’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런 말을 하면 진짜 동생들이 달려들어 자신을 한껏 귀여워해 줄 것이다.
그런 꼴은 당하고 싶지 않다.
장하양은 동생을 귀여워하듯 백설하의 어깨를 쓸어주곤 다른 주제를 꺼냈다.
“웨벡스 카페 커피 맛있지 않아?”
“정말이에요! 연습할 때마다 열 잔씩은 마시고 싶어요! 한라봉 에이드를 안 파는 건 아쉽지만요!”
“넌 한라봉 에이드를 왜 그렇게 좋아해? 그냥 오렌지 쥬스잖아.”
“아름이는 모르는 추억이 서린 음료거든. 어린애인 아름이는 이해할 수 없겠지, 이 노스텔지아를…….”
신아름이 ‘너 잘났다’며 리카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그리고 조아라를 젓가락으로 가리켰다.
“근데 다음엔 네가 카페에 음료 사러 가지 마.”
“갑자기?”
“너 저번에 엄청 늦게 돌아왔잖아. 중간에 안 새는 사람이 사러 가야 해.”
“맞다. 아라야 그때 왜 그렇게 늦었어?”
백설하의 질문에 조아라는 표정을 굳혔다. 그녀는 곤란한 태도로 시선을 피하더니, 작게 말했다.
“거기 피아노 치는 사람이 있어서요. 신기해서 말 걸었다가 얘기하게 돼서…….”
“피아노? 뮤지션이셔?”
“네, 뭐, 그렇대요.”
“에에엑 아라쨩 남자한테 먼저 말 걸었어?!”
“여자거든!”
“남자한테 말 걸려면 아타시(나)한테 허락받고 말 걸어!”
“너 자꾸 나 관리하려고 하지 마라.”
“맞아 리카. 아라가 그럴 리 없잖아.”
“그래 야. 하양 언니 좀 본받…….”
“찐사랑 규영 선배님이 계신데 어떻게 한눈을 팔겠어.”
장하양은 잠시 조아라의 반응을 살피고, ‘농담’이라고 말하기 위해 손을 활짝 폈다.
그보다 빨리 조아라가 말했다.
“언니 마지막이에요. 진짜 마지막이에요. 한 번만 더 규영 선배님이랑 나 엮으려고 하면 나도 내가 어떻게 할지 몰라요. 소녀연맹 육탄전 챔피언 가리는 거야 그날.”
“……아하하, 미안.”
“조아라 너 나한테도 지잖아. 근데 하양 언니는 어떻게 이기에.”
“씨 너는 가위바위보도 동체시력으로 상대가 뭐 내는지 보고 내는 년이잖아! 너 이기는 인간이 이상한 거지!”
그렇게 대화 주제는 신아름의 신기한 능력으로 넘어갔다.
조아라는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카페에서 만났던 피아니스트, 치논의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미 수상 경력이 있는 아티스트에게 자기 자랑을 한껏 늘어놓았다는 이야기 따위,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 * *
성필은 조진만과 콘서트 세부 사항 조정에 관한 회의를 마치고 휴식을 취했다.
웨벡스 내의 휴게실에 잠시 앉아 있던 그는 커피라도 마실 겸 카페로 향했다.
그때 민경섭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 경섭아. 혼자 한국에서 잘 쉬고 있어?”
[쉬긴 뭘 쉬어요.]
“부하 직원들만 해외에 보내고 여유로운 생활을 보내는 기분은?”
[형도 며칠 뒤에 돌아오죠? 그 말 그대로 돌려줄게요. 담당 그룹 밖에 내놓고 혼자 고향에서 쉬는 프로듀서라고.]
“고맙다. 그래서 왜?”
[예능 출연 제의가 들어와서요.]
“뭔데?”
[‘더 언노운 싱어’요.]
출연자들이 가면을 쓰고 나와 노래로 우승자를 가리는 경연 프로그램이다.
해외에도 플롯이 수출될 만큼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며, 한국에서 평균 시청률 6% 이상을 기록하는 장수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와, 진짜 괜찮네. 준비도 간단해서 애들 감 잡는 것도 좋겠고. 누구 섭외 들어왔어?”
[설하요.]
당연한 인선이었다.
작년의 ‘음악을 위한 동행’도 그러하고, 백설하는 유별나게 음악 예능과 연이 깊은 듯하다.
“작가분들도 설하가 노래 잘 부르는 거 아시나 보네.”
[‘음위동’ 연출하셨던 나석문 PD님이 엄청 추천하셨다던데요?]
나석문은 ‘음악을 위한 동행’에서도 백설하의 노래 실력을 극찬했었다.
다음에도 연이 닿는다면 꼭 같이 프로그램을 하고 싶다느니, 혹시 경연 플롯은 좋아하냐느니,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했었다.
[암튼 그거 때문에 연락했어요.]
“이미 정해놓고 물어보는 거 아니야?”
[에이, 제가 어떻게 형 제치고 먼저 결정해요? 물론 반드시 출연하길 바랍니다.]
“매니지먼트 팀장님이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일단 설하한테 물어볼게. 아 참, 지금 ‘더 언노운’이 누구지?”
‘더 언노운’이란 ‘더 언노운 싱어’의 현재 우승자에게 붙이는 별명이다. 챔피언과 같은 뜻이라 보아도 된다.
‘더 언노운’에 오른 사람은 계속해서 나타나는 경쟁자들에 맞서 방어전을 펼쳐야만 한다.
[지금 더 언노운은…… ‘흥미유발 재미만발 딴따라’인데, 가수 주성인 거 같아요. 두 번째 방어전까지 마쳤고요.]
“주성…… 꽤 세네.”
[설하면 기교적인 노래 골라서 비벼볼 수 있지 않을까요?]
“기교가 다가 아니긴 한데…… 아, 우리끼리 지금 의논해서 뭐 하겠냐. 알겠다.”
[넵. 고생 많이 해요.]
“너도 과로해라.”
통화를 끝내고, 성필은 소리 없이 소리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기다려라 데뷔 8년 차 베테랑 가수 주성! 소녀연맹의 백설하가 간다!’
백설하는 당당히 더 언노운이 되어 세계만방에 이름을 알릴 것이다. 성필은 반드시 그럴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설하는 외국에 떨어뜨려 놔도 버스킹으로 포르쉐 사서 한국까지 돌아올 수준의 아이돌 보컬리스트니까.’
성필은 백설하가 더 언노운이 된 미래를 상상하며 흥겹게 카페로 향했다.
싱글벙글 웃으면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여 받은 후, 적당한 1인석으로 가서 앉았다.
케이어스 라이브 방송 클립을 복습할 겸 아이튜브를 켰다. 이어폰을 꺼낸 찰나, 성필의 귀에 피아노 소리가 잡혔다.
구석에 놓인 피아노에 어떤 여자가 앉아 연주하고 있다.
‘버스킹이다.’
카페에 놓인 피아노를 연주하는 게 버스킹의 사전적 의미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서 연주하는 것이니.
성필은 피아노 선율을 몇 초 듣고는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다.
연주가 시작되고는 관심을 조금 기울였다가, 다시 같이 앉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거나 노트북, 태블릿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연주는 카페 BGM에 머물렀다.
“…….”
또 몇 초 후, 성필은 핸드폰을 테이블에 놓고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집중하여 연주를 감상했다.
수십 명은 있을 카페 안에서, 그녀를 쭉 바라보는 사람은 성필 한 명뿐이었다.
‘뭔가 느껴져.’
생명력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만한 게 연주에서 느껴진다.
무슨 곡일까. 한구인이나 슈이치라면 쉽게 곡명을 댈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이 연주를 더 풍부하게 감상할 수 있었을 텐데.
‘클래식은 감상자의 노력을 요하는 예술이니까.’
클래식을 제대로 듣기 위해선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이 필요하다.
반드시 필요하단 건 아니지만, 알면 음악 자체가 아예 다르게 들린다고 한다.
클래식과 같은 공연 예술을 관람할 줄 아는 능력이 문화 자본이란 이름으로 상류층을 구별하는 방법으로 쓰일 정도이니.
‘클래식이라기엔 선율이 모던하긴 한데.’
클래식도 현대에 이르러선 이런 식으로 발전한 걸까. 성필은 잘은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연주를 집중하여 감상했다.
그녀의 손가락에서 피어나는 생명력을 느꼈다.
성필의 시선은 그녀의 등에서 손가락으로 옮겨갔다. 백설하를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감상이 들었다.
손가락이 길고 하얗고 예쁘다.
연주가 클라이맥스에 들어갈 즈음, 성필은 커피를 하나 따로 주문하여 그녀와 더 가까운 자리로 갔다.
그리고 연주가 끝났을 때 그녀의 뒤로 가서 말했다.
“안녕하세요.”
답이 없었다. 성필을 보지도 않는다.
‘아직 여운에 빠져 계시나?’
성필이 몸을 살짝 더 기울여 그녀를 불렀다.
“안녕하세요.”
그제야 그녀가 돌아보았다.
일본 사극 드라마의 여주인공으로 나올 법한, 단아한 용모의 여자였다. 나이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정도일 듯하다.
그녀가 싱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연주 잘 들었어요. 커피도 받으시나요?”
“이런 걸 기대하고 연주한 건 아니었는데. 감사합니다.”
그녀가 수줍게 미소 지으면서 커피를 받았다.
“연주 잘 들으셨나요?”
“커피 마시면서 쉬러 왔는데 쉴 수가 없더라고요. 너무 아름다운 연주가 들려서요. 덕분에 집중하느라 체력을 또 써버렸네요.”
“말씀이 굉장히 유창하시네요. 들으시면서 미리 생각하셨어요?”
성필은 씨익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박성필입니다. 히무라 실장님이 있으신 팀과 협력 관계를 맺고 있어요.”
“아…….”
그녀가 곤란하단 듯 버릇이 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시 말씀해주실래요?”
“네? 아, 박성필…….”
그때, 성필은 그녀의 시선이 박힌 곳을 눈치챘다. 그녀는 성필의 입술을 보고 있었다. 아마 아까부터 쭉.
“박성필입니다. 히무라 실장님이 있으신 팀과 협력 관계를 맺고…….”
성필의 말이 뚝 그쳤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웃으면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토나시 치논(音無知音)입니다.”
고개를 든 그녀의 눈은 여전히 성필의 입술에 박혀 있었다.
성필은 깨달았다.
‘이 사람, 농인(聾人)이다.’
귀가 들리지 않는다. 아니, 아예 안 들리는 건 아니겠지만 청력이 상당히 낮을 것이다.
그래서 성필이 처음 등 뒤에서 불렀는데도 반응하지 못했던 게 분명하다. 성필의 그림자를 보고서야 왔단 걸 알았겠지.
‘그런데 그런 연주를 할 수 있나? 악보로 외운 건가……?’
성필은 충격에서 쉽사리 헤어나오지 못했다.
베토벤이 청력을 읽고도 작곡과 연주를 했었단 유명한 일화는 알고 있다.
들으면서 시큰둥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을 보니 어지간히 놀라운 게 아니었다.
“어, 음.”
성필은 근처의 의자를 끌고 와서 앉았다. 그녀가 올려다보지 않아도 되게 시선을 맞추었다.
그 배려를 깨달은 치논이 헤실헤실 웃었다. 하지만 청력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피아니스트세요?”
“네에. 이 회사에서도 아는 사람만 아는 피아니스트예요.”
하긴, 웨벡스가 종합 기획사라곤 해도 연예계에 영향력을 뻗친 회사다.
직원들도 피아니스트까지 파악하고 있진 못할 것이다. 아마 치논을 담당하는 부서도 꽤 규모가 작지 않을까 싶다.
“클래식? 뉴에이지?”
“재즈요.”
“아, 어쩐지. 통통 튀더라고요.”
“재즈 들으세요?”
“……아니요.”
“그런데도 제 연주를 들어주신 거네요. 기뻐요. 실은요, 저 여기서 며칠째 계속 연주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놀랍도록 아무도 관심을 안 가져줘서 조금 쓸쓸했어요.”
“며칠씩 계속요?”
“네.”
치논이 부끄러운 듯 피아노 건반을 쓸었다.
“옛날에 어디 책에서 봤는데요. 세계적인 수준의 현악 콰르텟이 뉴욕인가 런던의 지하철역에서 버스킹을 했었어요. 아침 출근 시간, 수만 명이나 수십만 명이 다녔겠죠. 몇 명이나 그 콰르텟의 연주를 서서 감상했을지 예상이 가세요?”
“음…… 수십만 명이면…… 적게 잡아도 한 300명 정도는 멈춰서 듣지 않았을까요?”
“여섯 명이요.”
성필이 과장되게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농인인 것을 배려하여, 표정으로 감정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입 모양도 평소보다 더 크게 움직였다.
“고작 여섯 명이요?”
“네에. 그 콰르텟의 공연을 보려면 3만 엔은 내야 할 거예요. 좌석을 잡는 것도 엄청 어렵고요. 그날의 버스킹 연주는 굉장했겠죠. 세상에서 가장 연주를 잘할지도 모르는 드림팀이 공연했는데, 고작 여섯 명이 멈췄어요.”
지하철역을 분주하게 오가던 사람들은, 그날 회사에 정시 출근해서 일하여 평균적으로 10만 원 정도를 벌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콰르텟의 연주를 멈춰서 줄곧 감상했다면, 약 30만 원의 경험을 한 게 된다.
“물론 다들 바빴겠죠. 아침 출근의 지하철역이니까요. 마음의 여유가 없을 만해요. 그래도…….”
치논이 피아노 건반을 하나 꾹 눌렀다.
두웅, 무거운 진동이 그녀의 검지에 스며들었다. 치논은 그것을 기분 좋게 느꼈다.
“세계 최고의 연주자들이 내뿜는 선율인데 여섯 명은, 너무하단 생각이 들어요.”
“확실히 그러네요.”
“그래서, 그 이야기를 듣고 제 꿈이 정해졌어요.”
“뭔데요?”
“만약 제가 그런 일을 한다면, 적어도 100명 정도는 멈추게 하고 싶어요. 지금은 카페에서 연주하고 있고, 며칠 동안 두 명…… 세 명 정도가 저한테 관심을 가져줬을 뿐이지만요. 그게 제 꿈이에요.”
치논이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여 피아노 선율을 만들어냈다. 그것이 성필의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잡았다.
치논이란 인간을 더 잘 알게 되어서 아까보다 훨씬 매력적으로 들렸다.
“살짝 허황되죠?”
“굉장히 멋져요. 대단하네요. 그런 꿈이 있다는 게요. 응원할게요.”
성필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추상적이지만, 이토록 낭만적인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단 게 신기했다.
“혹시 연주회 있으세요? 보러 가고 싶어요.”
이런 꿈을 가진 사람의 개인 연주회는 어떨지 꼭 보고 싶다.
“하쿠 씨는 재즈에 관심 없다면서요. 오셔도 지루하실 거예요.”
“아, 하쿠가 아니라 박, 성, 필이요.”
“……음?”
치논은 ‘하쿠 세이루’라고 몇 번 발음하더니, 곧 눈을 크게 떴다.
“아, 파쿠 센피루! 센피루 씨!”
“네? 저 아세요?”
“소녀연맹!”
성필은 얼떨떨했다.
치논은 마치 성필을 안다는 듯한 태도였기 때문이다.
“아라짱 만났었어요. 그리고 세이코가 얘기해줬었어요.”
“아아, 그렇구…… 잠시만요. 며칠 동안 관심을 가졌던 두 명이란 게 그 둘이에요?”
“네! 신기하네요, 정말 인연이란 게 있나 봐요.”
성필은 복잡미묘한 심정이었다.
세이코가 성필의 이야기를 타인에게 했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무슨 얘기를 했을까.
그런 고민을 하던 차, 치논이 성필이 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제 다음 공연은…… 아쉽게도 근래엔 잡힌 게 없어요. 그래도 센피루 씨가 보실 수 있을 만한 공연이 있긴 해요.”
“정말요? 어디서 하나요?”
“한국분이시죠? 텔레비전에서 보실 수 있어요.”
“한국 프로그램에 나오세요? 어디 오케스트라 연주회 그런 데요?”
“올림픽요.”
성필의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방금 치논이 뭐라고 한 거지?
“도쿄 올림픽 개막식 때 제가 한 곡 연주할 거예요.”
치논이, 처음 성필과 마주했을 때처럼 수줍게 웃었다.
“직접 오셔서 보는 건 힘드실 테니까, 테레비로 들으시면서 응원해주세요. 오늘보다 더 센피루 씨의 가슴에 닿을 만한 연주를 할게요.”
* * *
‘나도 참…….’
세이코는 어제의 일을 떠올리며 창피함을 견뎌냈다.
‘치논한테 그렇게 막무가내로 말하고…… 친구인데…….’
세이코는 어제 치논을 붙잡고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라면서 난장판을 피웠었다.
한국 사람이라면 불륜을 소재로 다루는 상황극 프로그램을 떠올릴 법한 장면이었다.
치논은 쩔쩔매면서 그런 게 아니란 사실을 조곤조곤 설명했었다. 그리고 세이코도 그녀의 말을 믿게 되어, 눈물의 화해를 한 참이었다.
‘오늘 다시 만나서 미안하다고 해야겠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심했어.’
세이코는 웨벡스 내의 카페로 들어섰다. 오늘도 치논은 이곳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을 것이었다.
실제로 그러했다.
아니, 연주는 안 하고 있지만 피아노 앞에 앉아 있긴 했다. 성필과 함께.
“……아?”
세이코가 쭈뼛쭈뼛 그쪽으로 다가갔다.
대화 소리가 들린다.
‘센피루 씨’라고, 치논이 성필을 부른다.
성필을 이름으로 부른다.
세이코는 아직도 성필을 성(姓)인 ‘파쿠’라고 부르는데 말이다.
“센피루 씨의 가슴에 닿을 만한 연주를 할게요.”
세이코는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들었다.
그러다가 무엇인지 모르고 옆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을 들었다. 세이코가 든 건 커피잔이었고, 잔 안에는 식은 커피가 반쯤 담겨 있었다.
“빌려요.”
“네?”
세이코가 치논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가 소리쳤다.
“야 이 여우 같은 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