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74화 (374/760)

374화

성필과 조아라는 쭈뼛쭈뼛 자리를 잡았다.

데일리 클래스의 수강생은 10명이 될까 말까였다.

원래라면 평화로운 분위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강의실 밖에 잔뜩 몰린 구경꾼들로 인해 평화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강사인 아이라는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죄송합니다. 다들 물러나 주세요.”

수강생들이 편히 수업을 듣게 하는 것도 아이라의 임무였다. 그녀는 문을 쿵 닫고, 문에 난 작은 창엔 가림막을 내렸다.

아이라는 원래 자리로 돌아와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이번 데일리 클래스를 맡은 강사 아이라입니다!”

그녀가 오늘 배울 곡은 케이팝 보이그룹 웨이퍼센트의 ‘하이패스’라는 둥, 쉬운 안무이니 걱정말라는 둥, 그런 이야기를 했다.

세이코는 그 이야기들을 대강 들었다.

그리고 몸을 푸는 시간이 되자 옆의 성필에게 간단히 인사했다.

“파쿠 이사, 오랜만이에요.”

“아, 네. 잘 지내시죠?”

“그럼요.”

성필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이런 곳까지 따로 찾아올 정도면 어떻게든 나랑 접점을 만들고 싶으신 거 같은데.’

5년 후에 만나겠단 약속은, 정말로 5년 뒤에만 만나겠단 뜻이 아니었다.

그 기간 동안 세이코도 놀기만 할 생각은 아닌 듯했다.

‘4개월이면 다 잊으실 줄 알았는데…….’

성필은 그녀의 마음을 확인하자 기쁜 동시에 무거운 압박을 느꼈다.

그런데 의외로 세이코는 성필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녀는 성필과는 인사만 나누고, 조아라에게로 관심을 옮겼다.

“아라, 맞죠?”

성필의 옆에서 상한 음식을 먹은 듯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던 조아라가, 여전히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래 잘하죠?”

“……?”

성필과 조아라는 그 말을 듣고 깨달았다.

세이코가 백설하와 조아라의 특징을 혼동하고 있단 사실을.

“좀 많이 양보해서 제 19살 때 정도랑 비교할 수 있을? 그런 실력인 거 같은데요?”

아무리 봐도 남을 깔보는 듯한 말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게 세이코 나름의 칭찬이란 것을 알았다.

그런데 칭찬이든 뭐든, 세이코는 사람을 헷갈리고 있었다.

성필이 걱정스레 조아라를 보았다.

그녀는 갑자기 연습실로 찾아왔던 세이코를 ‘아줌마’라 부르며 양아치 말투로 쫓아낸 전력이 있었다.

지금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었다.

“어, 뭐, 내가 노래 잘 부르긴 하지.”

조아라는 주변을 살피면서 양아치 말투를 썼다.

‘아라가 컨셉을 지키는 거구나.’

혹시 소녀연맹 조아라의 일본 컨셉 말투를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을 걱정하여, 세이코에게도 그런 식으로 말하고 있었다.

실제로 조아라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

아직 학생으로 보이는 여자는 조아라가 양아치 말투를 쓰자 설렌 듯 바라보았다.

그런데 세이코는 정반대였다. 조아라의 공격적인 말투에 흠칫하며 겁먹은 눈빛을 띠었다.

“뭐, 뭐, 뭐, 열심히 했겠네요!”

세이코는 용기를 불태우며 계속 조아라에게 말을 걸었다.

성필이 보기에, 마치 새 학기에 친구를 사귀려고 관심 있는 무리 쪽으로 다가가는 학생 같은 태도였다.

“혹시 노래에 관해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요. 라인 교환할래요?”

“…….”

조아라는 강사의 안내에 따라 다리찢기를 하면서 세이코를 바라보았다.

처음 정면으로 마주하는 조아라의 눈빛에, 안 그래도 다리찢기에 난항을 겪던 세이코가 더욱 굳어버렸다.

“수업에 집중하자.”

“아, 아, 그렇네요. 모처럼 왔으니까요. 아, 아니, 춤에 관심이 생겨서 온 거니까요. 일본에 있는 동안 여기 자주 올 건가요?”

조아라는 세이코의 질문에 짧게 짧게 답했다. 그런데도 세이코는 포기하지 않았는데, 보고 있는 성필이 괴로울 지경이었다.

“저는 몸 쓰는 데도 자신 있어요. 무얼, 가후니까요. 예술에 관련해선 어디든지 재능이 있지 않겠어요?”

“어, 대단하네.”

“그렇죠, 대단하죠!”

성필은 이곳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 * *

아이라는 세이코가 자신의 수업에 들어왔단 사실이 놀랍고도 기쁘기 그지없었다.

‘세이코 씨의 댄스 영상을 올리면 조회 수가 엄청날 거야!’

가후(歌后)라 불리는 가수가 아닌가?

그런 그녀의 댄스 영상을 레드원 스튜디오의 아이튜브 채널에 올린다면, 수많은 사람이 보게 될 것이 틀림없다.

춤에 관심이 없던 사람이라도 세이코의 팬이란 이유만으로 이곳에 찾아올지도 모른다.

‘이런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칠 순 없어!’

30분 후.

“흐엑, 흐억, 흐끄으윽, 우욱…….”

세이코는 가는 팔다리를 애처롭게 떨었다. 그녀는 벽에 정수리를 박은 채 매달리듯이 벽을 짚고 서 있었다.

넘어지지 않기 위함이었지만, 떨리는 다리로 보아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하다.

“…….”

아이라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세이코를 바라보았다. 조금 실력이 모자라도 칭찬해주면서 댄스 영상을 찍도록 유도할 생각이었건만.

‘아예 동작 자체를 못 하잖아?’

못한다기보다는, 체력이 없다.

세이코는 15분 정도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춤을 추었다. 땀을 흘리면서 기쁘게 미소 짓는 것이, 춤추는 게 즐거운 듯했다.

가르치는 아이라로서도 기뻤다.

하지만 세이코는 본인의 체력을 모르고 있던 것이다. 힘들고 땀이 많이 나는 게, 원래 춤을 추면 이런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자신의 한계를 모르고 춤을 추었고, 그 결과.

“구, 구급차아……. 나, 죽어, 죽을…….”

세이코는 다른 수강생을 방해할 정도가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아이라는 그녀를 휴게실로 안내해서 쉬게 했다.

다시 강의실로 돌아온 그녀는 잔뜩 실망한 표정이었다.

세이코는 데일리 클래스가 끝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고, 클래스의 MVP가 정해졌다.

“수강생님?”

이번에도 성필이었다.

그는 상쾌한 표정으로 조아라와 담소를 떨다가, 아이라의 부름을 받자 움찔 떨었다.

“아저씨 부르잖아요.”

이번엔 조아라도 옛날처럼 충격받지 않았다. 성필이 불린 게 당연하단 듯이 어깨를 밀며 독려하기까지 했다.

“멋지게 찍고 와요.”

“…….”

멋지게 찍었다.

그렇게, 조아라와의 댄스 스튜디오 체험은 이번에도 멋진 추억을 남겼다.

“아저씨 진짜 수상한데?”

조아라는 촬영을 마치고 나오는 성필을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취미가 아이돌 댄스 카피예요?”

“아니.”

“그런데 어떻게…….”

“전에 말했잖아. 그냥 장기자랑용으로 몇 개 연습했다고.”

“웨이퍼센트 ‘하이패스’는 5개월 전에 나왔는데요? 전에 시에이스 ‘에딕티드’는 그렇다 쳐도, 무슨 장기자랑요?”

성필의 말문이 턱 막혔다.

조아라가 그런 세세한 것까지 기억하리라곤 생각도 못 했었다.

성필이 자꾸만 대답을 미루자, 조아라는 ‘하’ 비웃음을 날렸다.

“이 아저씨 안 되겠네.”

“뭐?”

“야유회 때 장기자랑 하고 싶었으면 말을 하지. 이렇게 연습해놓고서도 안 보여줬단 거잖아요.”

아무래도 조아라가 이상한 오해를 한 듯하다.

“우리 몰래 무슨 댄스 학원 다니는 거 아니죠? 춤에 대한 열정이 이렇게 큰데 계속 숨기고 있을 거예요?”

“아니, 그으, 조금 흥미가 가서 연습해본 거야…….”

춤을 다년간 배워온 조아라에게 ‘방금 춘 게 전부다’ 같은 변명은 통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성필은 흥미가 있었단 시답잖은 이유밖에 꺼낼 수 없었다.

“혼자서?”

“응.”

“누구한테 보여줄 목적도 아니고요?”

“……응.”

“그런 사람이 어딨어요. 야유회 때 하려고 연습했던 거 맞죠?”

조아라는 이미 확신한 기색이었다. 성필도 더 이상 변명을 쌓아 올리는 건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전생에 모종의 이유로 연습했었다’라곤 답할 수 없잖아…….

“근데 왜 안 했어요?”

“아라야 너 좀 끈질기다. 왜 안 했겠어. 다들 준비 안 했다는데 나만 나서는…….”

“뭐, 내가 반할까 봐요?”

콘서트 VCR을 찍을 때, 독일 숙소 옥상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하고 하는 말이었다.

성필이 흠칫하자 조아라가 못 참겠단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이내 명랑한 웃음을 터뜨리며 성필의 어깨를 팍팍 쳤다.

“농담 농담.”

“너 농담 통제야.”

“나요?!”

조아라, 농담 통제!

장하양과 같은 반열에 서게 된 조아라는 불만을 표했다.

“잠만 아저씨.”

“또 뭐. 분위기 곱창 내는 농담하게?”

“아저씨 나한테만 취급이 박한 거 아니에요? 쫌 섭섭해질라 그러네.”

“내가? 언제? 전혀?”

“콘서트 표 줄 때도 내 집 오는 것만 싫어했잖아요.”

조아라의 말투는 평소와 같았다.

어디까지나 장난으로 하는 말이란 분위기였지만, 은근한 섭섭함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거기엔 성필도 마땅히 할 말을 찾기 힘들었다. 무어라 조아라에게 변명하려던 차.

“나 화장실요.”

조아라는 자기가 그런 말을 했단 게 부끄러운지, 화장실을 발견하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성필은 그녀의 뒷모습을 쭉 바라보았다.

‘이건…… 옛날 상황이랑 또 비슷해지네.’

조아라가 ‘아라베스크’의 안무를 가지고 고집을 세웠던 시절. 그녀는 성필이 자신에게만 취급을 이상하게 한다면서 울분을 토했던 적이 있었다.

다행히 오해는 풀렸지만, 요즘은 그 상황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근본적인 이유는 이전과 같았다.

성필이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조아라와의 관계에 대한 기억을.

‘아라를 편하게 대했던 친근감이 이제는…….’

오히려 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성필이 무의식적으로 현재의 조아라와 전생의 조아라를 겹쳐보아서, 일정 이상으로 친해지는 걸 꺼리게 된다.

계기는 아마.

‘야유회.’

성필은 괜히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조아라를 기다렸다.

그러다 왠지 답답해져서, 조아라에게 먼저 나가 있겠단 톡을 보내고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 * *

‘앞으로 남은 콘서트가 16개 정도인가…….’

당장 내일만 해도 콘서트가 있다.

조진만이 일본 현지에서 섭외한 팀이 새벽부터 무대를 설치할 것이다. 소녀연맹은 점심 이전에 공연장으로 가서 리허설을 뛰어야 한다.

‘일찍 가는 편이 낫나.’

조아라는 콘서트에 관해 생각하려 노력했다. 잡념이 생기지 않도록 미래의 계획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세면대 거울을 바라보며 손을 박박 씻었다. 방금 성필과 나눈 대화를 떠올리면 창피함이 뱃속에서 끓어올랐다.

그 창피가 손에 묻기라도 한 듯이 계속 씻어냈다.

“우연이네요.”

태어난 지 3시간쯤 되는 아기 사슴처럼 불안정한 걸음의 세이코가 화장실로 들어왔다.

고작 20분 춤췄다고 1시간 40분 동안 휴게실에서 요양을 취한 인간이 조아라의 옆에 섰다. 그녀도 손을 씻었다.

“오늘은 컨디션이 나빴어요.”

조아라는 손 씻기를 그만두었다.

세이코를 보자마자 잡념이 전부 사라졌기 때문이다.

조아라는 핸드 드라이에서 손을 말렸다. 그녀가 나갈 기색을 보이자 세이코는 당황하면서 재빠르게 손 씻기를 마쳤다.

“내일 콘서트 한다죠? 제가 직접 예매한 건 아닌데, 표가 생겨서 보러 가게 됐어요. 아마…….”

“선배님.”

조아라가 연습실과는 전혀 다른 차분한 경어를 사용했다. 그에 세이코는 얼떨떨해하다가, 기분 좋게 뺨이 발그레해졌다.

“네, 세이코 선배예요!”

“왜 자꾸 친한 척하세요?”

“……네?”

손을 다 말린 조아라는 세이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세이코는 말투와 전혀 다른 분위기, 즉 차갑기 그지없는 표정의 조아라를 보자 겁을 먹었다.

“무슨 생각이신지 전혀 모르겠어서요. 갑자기 왜요? ‘뉴아사’ 때는 저희 어떻게 돼도 좋다는 식으로…….”

조아라가 공손히 세이코를 손으로 가리켰다.

“가후씩이나 되시는 분이 나오시고. 그리고…….”

아니다.

조아라는 하려던 말을 목구멍에서 거두었다.

“갑자기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네요. 선배님은 선배님이시고, 그에 맞는 존중은 해드리지만, 이런 식으로 접근하시는 거 불편해요.”

“…….”

세이코는 어버버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움직임이 뚝 멎고는, 죄지은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미, 미안해서…….”

“미안요?”

“나도 알아요. 당신이, 소녀연맹이 저 싫어한단 거요. 그래도 앞으로 같은 회사 소속으로 자주 볼 거고, 그러니까, 다시 관계를 만들어 보고 싶달까…….”

세이코가 소심하게 시선을 올렸다.

“안 될…….”

“거짓말이죠?”

“어?”

“물론 선배님은 ‘나랑 친해지는 거 자체가 굉장한 이득이니, 저들이랑 친하게 지내주는 게 사죄가 될 거야’라고 생각할 위인이시란 건 아는데요. 솔직히…….”

말을 이으려던 조아라는 황급히 자신의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마치 해선 안 될 말을 하려 했단 것처럼, 눈을 마사지함으로써 평정을 되찾으려 했다.

“아니다, 아니에요. 가보겠습니다.”

세이코는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조아라를 가만히 놔둘 수밖에 없었다.

옛날의 그녀였으면 자신이 누군지 아냐면서 위력 행사부터 했겠지만, 그럴 수는 없잖은가.

그때 조아라가 나가다 말고 등을 휙 돌렸다.

세이코는 거울에 비친 조아라와 눈이 맞았다. 피하고 싶을 만큼 적의가 서려 있었다.

옛날에 ‘뉴아사’ 무대 전에 만났던 백설하만큼이나 강렬한 눈빛이었다.

“한 번 거절당했으면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성필과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바쁜 사람 붙잡고 심력 소모하게 하지 마요. 정말 가보겠습니다, 선배님.”

조아라가 나갔다.

세이코는 아까보다 더욱 깊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녀가 주먹을 꼭 쥐었다.

‘그래, 쉽지 않은 일이야. 내가 이기적이기도 해. 이용하려는 거니까.’

성필과 가까워져보겠단 이유로 소녀연맹을 이용하려 했다.

하지만 이 순간, 세이코는 그 생각을 완전히 바꾸었다. 소녀연맹의 조아라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보니, 성필이 그녀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알게 되어서였다.

‘그런 사람을 내가 위험에 빠뜨렸으니 싫어할 만해, 당연하네…….’

세이코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렇게 끝내고 싶진 않아.’

소녀연맹의 ‘뉴아사’ 무대를 보고, 세이코는 굉장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재밌다고도 생각했다.

그런 사람들에게 쭉 미움받는 건 마음이 편치 못하다. 이 또한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소녀연맹을 이용하려 했던 이전보다는 훨씬 나았다.

세이코는 진지하게 임하기로 했다.

‘사과하자. 사과하고.’

이번엔 정말 순수하게 관계를 다시 정립해보자.

웨벡스의 식구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 세이코는 인간적으로 성숙해가고 있었다.

* * *

[아라 씨가 일본 콘서트에서 동물 잠옷 입고 춤췄다는 게 사실임미까?]

“사실이에요.”

[왜 한국에서는 안 한 검미까? 차별이지 않슴미까!]

진저는 나라에 따른 차별을 두는 건 비합리적이라며 성필에게 일장 연설을 토해냈다.

성필은 진저의 투정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그녀가 계속 화내도록 내버려 두었다.

“뭣하면 일본으로 오시는 거 어떠세요?”

[일본 말임미까? 가도 됨미까? 표 구해주시는 검미까? 아, 그런데 스케줄이 있어서…….]

“아뇨, 딱히 구해줄 생각은 없는데요. 뭐, 암표든 뭐든 사서 오시면 되지 않아요?”

[말투가 왜 그렇슴미까! 제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슴미까?! 그리고 암표는 나쁜 짓이잖슴미까! 기획사 이사가 그런 말 하면 안 됨미다!]

성필이 웃자 진저는 뾰로통하게 말했다.

[너무함미다. 박 이사님이 권해주셔서 저는 정말 기뻤는데 거짓말이라니. 복수할 검미다.]

“어떻게요?”

[소녀연맹이랑 컴백 타이밍을 항상 맞출 검미다.]

“허어.”

성필은 오만한 투로 말했다.

“네, 바라던 바예요.”

[바로 정 이사님한테 말씀드리겠슴미다.]

“진짜 말씀드리게요? 정말요? 아니, 진짜?”

[뭠미까. 자신 없슴미까?]

“흐하하, 거참. 이렇게 도전받으면 저도 어쩔 수가 없어요. 나중에 울면서 매달려도 물리기 없습니다?”

[목소리 떨리고 계심미다.]

어째서 성필과 진저가 통화를 하고 있느냐.

조아라가 콘서트 연습 중이기 때문이다. 소녀연맹은 연습 때는 핸드폰을 무음으로 하면서까지 집중하기에, 진저도 함부로 연락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진저는 콘서트 후기를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고, 그 대상이 성필이었다.

[콘서트 정말 좋았슴미다. 제 버킷리스트 하나 생겼슴미다.]

“뭔데요?”

[소녀연맹 콘서트 올콘(모든 콘서트 참여)임미다. 케이어스 휴가랑 소녀연맹 콘서트 기간이 겹치면 꼭 해보고 싶슴미다.]

성필은 진저의 말이 너무나 고마웠다.

소녀연맹의 프로듀서로서, 소녀연맹 올콘이 목표라는 말을 들으면 기쁘지 않을 수가 없다.

성필은 바보처럼 올라가는 입꼬리를 겨우 진정시켰다.

“어떤 게 제일 기억에 남으세요?”

만약 진저가 콘서트 첫째 날에 왔었다면, 앙코르 무대인 ‘비익연리’를 꼽았을 것이다.

의도적으로 처음부터 노래를 차단하고 관객의 떼창을 유도하는 연출은, 예상대로 소녀연맹 멤버들의 깊은 감동을 자아냈었다.

팬들도 소녀연맹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줄줄 흘렸으니 그야말로 피날레에 걸맞았다.

하지만 2, 3일 차 관객들은 그 이벤트를 볼 수 없었다. 아무래도 깜짝 이벤트이니, 다시 사용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아라 씨랑 아름 씨 듀오 무대임미다. 멋졌슴미다. 가, 가능하면 저도 나중에 아라 씨랑 듀오로 서고 싶슴미다. 연말 이벤트 무대 같은 곳에서…….]

“아름이가 들으면 좀 섭섭하겠네요.”

[아름 씨도 멋짐미다! 그래도, 그, 제 최애는 아라 씨니까…….]

“네,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하양이랑 소유 씨도 한 무대에 섰던 적이 있으니까요.”

[정말임미까!]

진심이었다.

케이어스와 합동 무대라고? 소녀연맹이 거절할 이유가 없다.

물론 비즈니스적인 이유로 그렇단 것이고, 소녀연맹이 심적으로 부담감이나 거부감을 느낀다면 어쩔 수가 없다.

‘아라는 모르겠지만, 만약 아름이는 잡히면 무조건 나갈 거 같긴 해. 아니, 아예 자기가 먼저 잡아달라고 할 수도 있겠지.’

성필도 기대된다.

[내년에는 같이 설 수 있는 검미까. 올해는 콘서트 때문에 연말 무대도 다 안 나오고, 섭섭함미다. 내년에는 꼭 보고 싶슴미다.]

“콘서트 때문이라기보다는, 올해는 아예 신곡을 안 냈으니까요.”

[프로듀서로서 게으르신 거 아님미까?]

“하하…….”

그때 성필의 눈에 복도 저 멀리서 다가오는 조아라가 보였다. 방금 연습을 마치고 휴식에 들어갔는지, 겨울철임에도 땀에 절어 있었다.

“네, 대화해서 즐거웠고 이제 끊겠습니다.”

[……예?]

“다음에 다시 연락주세요.”

[잠…….]

성필은 자연스럽게 통화를 종료하고 조아라 쪽을 보았다.

“아저씨 하이.”

“어, 아라야 안녕.”

조아라는 자연스럽게 성필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성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순간, 뒤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돌아보니 조아라가 있었다.

열기라는 건 비유가 아니었다. 조아라는 방금 연습을 끝낸 탓에 체온이 높아, 그녀의 주위로 뿌옇게 증발하는 땀이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겨울철에만 볼 수 있는 진풍경으로, 마치 배틀 만화에 흔히 묘사되는 기(氣)를 내뿜는 것 같았다.

“아저씨.”

“어, 아라야, 왜?”

“아저씨 미국까지는 안 오죠?”

“응, 가까운 일본까지만 동행하지.”

“쓰읍, 그거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

“일본에서도 딱히 할 일은 없잖아요. 그런데 굳이 일본에 올 필요가 있나 해서요.”

“필요라니…….”

이왕 소녀연맹이 일본에 왔잖은가.

성필도 동행하여 웨벡스와 여러 가지 업무적인 사안을 조율하는 일을 할 수 있다.

소녀연맹의 콘서트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말이다.

“우리 뭐, 다음 앨범 준비로 바쁘지 않아요?”

“그렇긴 한데 너희들 일본 활동이랑 콘서트 준비하는 동안 어느 정도는 해놔서.”

“오올, 성실한 회사원.”

“그리고 너희가 있어야 제대로 돌아가는 프로젝트니까.”

다음 소녀연맹이 맞이하게 될 프로젝트명은 ‘우리들의 프로듀싱’이다.

이름에도 짐작할 수 있듯, 그녀들이 각자 돌아가며 프로듀싱에 참여하게 된다.

소녀연맹 멤버들이 직접 프로듀싱을 맡는 만큼, 최대한 홍보할 생각이다. 아이튜브 영상 시리즈로 만들 예정이기도 하며, 언론 이곳저곳에 소식을 마구마구 뿌릴 것이다.

준비는 끝났고, 멤버들이 오기만 하면 된다.

“음…….”

“뭐가 마음에 안 들어?”

“아뇨, 별로. 그리고 또 그거, 현대무용 공연 그건 어떻게 됐어요?”

“참나. 당연하게 물어오는 게 열받네. 내가 네 표 대신 예매해주는 사람이냐?”

“어차피 가기로 해놓고 왤케 튕겨요.”

“못했어. 인기 많더라. 미안.”

“아저씨가 왜 미안해요. 그럼 대강 아무거나 봐요.”

“어? 안 보는 게 아니라?”

“왜요.”

“아니…… 대강 아무거나는 뭐야?”

“이왕 일본 왔는데 현지 공연 하나 정도는 봐야죠.”

“진짜 대강 아무거나 예매해?”

“아저씨 센스에 맡길게요.”

조아라는 지친 기색으로 성필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돌아가려다가, 다시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또?”

“세…….”

“세?”

“……아녜요.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요.”

“아직 몇 주 더 남았어. 근데 너 어디 가? 화장실이면 그쪽 아닌데.”

“내가 뭐 나오면 다 화장실 가는 건 줄 아나. 카페 가요, 카페. 직원들 쓰는 데 있잖아요.”

“사줄까?”

“거기 커피 백 엔밖에 안 하잖아요. 내 돈으로 사 먹어요.”

“드디어 나를 지갑으로 생각 안 하게 됐구나.”

“아니 정산받으면 이제까지 사준 거 다 갚는다고요. 지갑으로 생각한 적 없어요.”

조아라는 정말 대화가 끝났단 듯 조금 거칠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성필은 작아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고민했다.

‘대강 아무거나?’

이왕이면, 조아라의 작업에 도움이 되는 종류면 좋겠다.

‘아니지. 아무거나 되면, 굳이 현대무용일 필요는 없잖아? 그럼 애들이랑 다 같이 보러 갈 수 있는 종류면 좋겠다.’

조아라의 말이 맞다.

이왕 일본까지 왔으니, 모두의 창작에 도움이 될 만한 공연을 보는 게 좋을 것이었다.

* * *

웨벡스 건물 내부에 있는 카페는 넓고 쾌적하며, 무엇보다 가격이 싸다.

오직 직원들의 복지만을 위해 만들어진 카페의 아메리카노 가격은 백 엔. 자판기 커피보다 싼 값이지만, 품질은 여타 카페보다 훨씬 낫다.

슈이치는 한국에서 있으면서 항상 그리웠던 카페를 찾았다.

‘음?’

커피를 시키고 보니, 조아라의 모습이 보였다.

조아라는 카페 구석에 놓인 피아노 근처에 있었다. 정확히는, 피아노 앞에 앉은…….

‘오토나시 치논 씨? 귀국하셨었군.’

슈이치는 커피를 들고 그녀들의 근처로 다가갔다.

아이돌이자 댄서인 조아라와 피아니스트인 치논이 어떤 대화를 나눌까 궁금해서였다.

“헤에, 3,000명? 대단해.”

“아뇨 뭐, 그럭저럭이죠.”

“첫 콘서트라면서. 그럼 대단한 거지. 나는 첫 개인 연주회 때 500명이었어.”

조아라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치논이 과하지 않은 태도로 ‘대단해’ ‘멋져’ ‘굉장해’라고 말해주니, 조아라는 계속해서 자기 자랑을 하게 됐다.

“우린 다섯 명이니까요. 오 등분하면 약 500명이죠. 오토나시 언니랑 비슷하죠 뭐.”

“오 등분해도 나보다 많은걸? 헤에, 다시 생각해도 대단하네. 이제 데뷔 2년 채울 정도라면서. 정말 대단해, 월드 투어.”

“하하…….”

슈이치는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전혀 접점이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이 어떻게 저리도 정답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까.

“오토나시 언니 말고 이름으로 불러. 치논 언니라고.”

“그래도 돼요?”

“대신 나도 아라짱이라고 부를게. 괜찮아?”

“네.”

둘은 그렇게 몇 분을 정답게 대화했다. 그러던 도중 조아라는 시간을 확인하고 치논에게서 멀어졌다. 대화를 마친 그녀의 표정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어, 슈이치 오빠.”

“안녕하십니까 아라 씨.”

“오빠도 커피 마시러 왔어요?”

“예. 멤버분들 커피입니까?”

“리카가 마시고 싶대서요. 가위바위보 져서 내가 왔어요.”

“저한테 연락하셨으면 가져다드렸을 텐데요.”

“에이, 쉬는 김에 내가 나온 거죠.”

조아라는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슈이치와 이야기하는 데에도 평소보다 텐션이 높았다.

치논과의 대화가 그녀의 자존심을 엄청나게 끌어 올려준 모양이었다.

“들어드릴까요?”

“겨우 커핀데요. 내가 들게요.”

조아라와 슈이치는 나란히 카페를 나왔다.

“좋은 경험이었겠군요.”

“뭐가요?”

“오토나시 씨와 얘기한 거 말입니까. 그래미에서 수상한 피아니스트와 대화할 기회는 좀처럼 없으니까요.”

조아라가 우뚝 멈췄다.

“……뭐라고요?”

“모르셨습니까? 오토나시 씨는 10년 전, 22살에 그래미에서 수상받으셨습니다.”

“그래미? 내가 아는 그 그래미요?”

“다른 그래미가 있습니까?”

“…….”

조아라는 혼란스러웠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옛날에 성필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렸다.

보이그룹 WTP가 그래미에서 노미네이트 됐을 때, 성필은 온갖 호들갑을 떨면서 그 역사적 의의를 설명해주었었다.

정말 엄청난 일이라면서.

그때의 조아라는 ‘그래미가 굉장한 시상식이구나’ 정도로 생각했었다. 적어도 한국 아이돌이 오를 만한 곳은 아니라며 막연한 동경을 품었었다.

그런데.

“치논 언니가, 22살에, 그래미에서, 수상?”

“예. 올해의 컨템퍼러리 재즈 앨범상을 받으셨습니다. 정말 대단한 아티스트이십니…….”

그런 인간에게, 조아라 자신은 서울에서 3,000명의 관객을 동원한 콘서트를 세 번 연속으로 열었다며 자랑한 건가?

자기는 춤을 꽤 잘 춘다고 자랑한 건가?

자기는 노래도 어느 정도 한다고 자랑한 건가?

자기는 드럼도 살짝 다룬다고 자랑한 건가?

그래미에서 수상한 아티스트에게?

“아라 씨?!”

조아라, 수치심 때문에 기절.

* * *

웨벡스 내부 카페의 구석에서 소녀연맹에게 다가갈 전략을 짜고 있던 세이코.

그녀의 앞에는 다 마신 커피가 한가득이었다.

노트 위에 여러 계획을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던 그녀는 머리를 식힐 겸 고개를 들었다.

몇 시간이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꽤 시간이 지난 듯했다. 처음 들어왔을 때와 다르게 사람들이 많아졌으니까.

“어?”

그때 세이코의 눈이 구석의 피아노로 향했다.

지금껏 카페에서 튼 BGM인 줄 알았던 피아노 소리. ‘스피커가 정말 좋나 보다’하고 넘겼었는데, 연주하는 사람이 있었던 듯하다.

‘치논이잖아. 그리고 그 옆에…….’

소녀연맹 조아라였다.

두 사람이 정답게 대화하고 있었다.

“……엑?!”

세이코로서는 꿈도 못 꿀 만큼 정겹고도 친밀하게, 치논과 조아라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웃음을 주고받으며 대화하고 있다.

심지어 서로를 ’아라짱‘이니 ’치논 언니‘라 부르고 있지 않은가.

둘이 친해질 이유가 있나? 친해질 계기가 있나? 친해질 인과가 있나?

세이코는 너무나 당황해서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그때, 처음 대등한 입장에서 사귄 친구나 다름없는 치논의 조언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가고 싶다면…….

‘먼저 주변 사람이랑 친해지면 어때요? 저라면 그렇게 할 거 같아요.’

치논은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

세이코가 쥐고 있던 연필을 부러뜨릴 만큼 꽉 붙잡았다. 힘이 약해서 부러뜨리진 못했다.

‘저 손가락 까딱이는 것밖에 못 하는 년이!’

세이코는 피아니스트를 향한 모멸적인 생각을 가감 없이 할 정도로 화가 나버렸다.

아니, 질투했다.

인생에서 처음 맛보는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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