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73화 (373/760)

373화

세이코 때문에 미니버스 안의 분위기는 심히 좋지 않았다.

멤버들이 세이코를 노려보거나 낮은 목소리로 험담을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침묵으로 일관되는 공기는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압박을 느낄 만했다.

‘세이코 씨…….’

성필은 복잡한 심경으로 조수석에 앉은 세이코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고백을 거절한 지 4개월이 지났다. 성필의 경험에 따르면, 4개월이면 실연의 아픔이든 뭐든 지워질 만한 기간이다.

그럼에도 세이코가 이곳에 있는 것을 보니, 아직 성필에 대한 마음을 접지 못한 듯했다.

‘어떡해야 하지?’

성필이 화장실 가고 싶은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자, 조아라가 짐짓 태연한 투로 장난을 걸어왔다.

조아라가 성필의 등을 톡톡 쳤다. 뒤를 돌아보니, 조아라가 모른 척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고 있었다.

성필이 다시 앞을 보았다. 그러자 조아라가 다시 등을 톡톡 쳤다. 성필이 홱 돌아보자, 조아라는 역시 창밖을 보고 있었다.

“야, 왜 그래.”

“…….”

“아라야.”

“……나요? 내가 왜요?”

“왜 쳐.”

“나?”

조아라가 옆자리의 리카를 물끄러미 보았다. 싱글벙글 SNS에 달린 댓글을 읽고 있던 리카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에?”

“너 왜 그래.”

“아타시(내)가?”

“왜 그러냐고.”

“나니오(뭐를)?”

“아저씨 왜 때리냐고?”

“난데(왜)? 도시테(어째서)? 아타시(내)가?”

“열받게 왜 자꾸 일본어 써.”

“여긴 일본이잖아!”

“아무튼 아저씨 괴롭히지 마.”

“에에…… 마아(뭐어), 그럴게!”

리카는 ‘어른인 내가 이해한다’는 듯 조아라의 장난을 여유롭게 받아넘겼다. 성필도 한숨을 쉬고 다시 앞을 보았다.

그러자 조아라가 성필의 뒷목을 검지로 아래에서 위로 쓸었다.

성필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조아라가 리카를 가리키고 있었다.

리카가 한숨을 푹 쉬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라쨩 유치원생도 아니…….”

“리카 너 죽을래 진짜?!”

“저요?!”

“너 자꾸 그러면 나중에 국물도 없어 어?!”

“에에엑?!”

리카는 성필을 붙잡고 억울하다며 ‘아타시(제)가 아니에요 제발 믿어주세요!’라고 연신 외쳤다. 조아라는 그 모습을 웃으면서 바라보았다.

그러던 도중, 정면 차창에 비친 세이코의 시선과 조아라의 시선이 마주쳤다.

차창에 비친 세이코의 눈동자가 천천히 다른 쪽으로 향했다. 조아라는 그녀의 시선을 끝까지 쫓았다.

“흥.”

세이코는 가는 길이라 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웨벡스에 도착하기 전에 버스에서 내렸다.

내리는 길 ‘봤지?’란 뜻을 담아 ‘흥’이란 소리를 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가 사라지자 그제야 버스 안에 서려 있던 긴장된 분위기가 사라졌다.

“슈이치 씨.”

“예, 박 이사님.”

“미사토 본부장님은 같이 안 다니시나요?”

“본부장님은 세이코 씨의 전담 매니저 역을 놓으셨습니다.”

“다른 매니저는요?”

“그게, 잘 맞지 않는 모양입니다. 오늘도 ‘저 혼자 갈 수 있어요’라면서 온 거라서요.”

듣자 하니 어느 잡지사의 인터뷰가 하나 잡혀 있다고 한다.

‘인터뷰 정도야 혼자도 할 수 있겠지만, 중간에서 불리한 발언을 컷해줄 매니저가 없단 건 상당한 리스크를 동반할 텐데.’

그런데도 세이코를 혼자 보낸 것을 보니, 웨벡스도 그녀를 제대로 컨트롤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는 듯하다.

‘자립심이 길러졌단 측면에선 좋은 걸까.’

일단, 성필은 그녀가 건강히 지내는 모습을 보니 기뻤다.

옛날에 그녀의 고백을 거절하기도 했었고, 멤버들이 그녀를 싫어하기에 버스에서 말을 걸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따로 찾아뵈는 건…….’

그때 성필의 앞으로 가는 그림자가 졌다. 뒤로부터 내려온 그림자였다.

돌아보니, 조아라가 창밖을 향해 중지를 펴고 있었다. 건물로 들어가는 세이코에게로…….

“아라야 너 미쳤어?!”

성필이 재빨리 조아라의 손을 붙잡아 중지를 내리게 했다.

“아저씨 왜요. 내가 내 맘대로 손가락도 못 펴요?”

“아니 선배님이잖아!”

“하, 선배님.”

조아라가 코웃음쳤다.

“네에, 선배님이죠. 미안함다.”

“아라 이번 주 용돈 3만 원 압수.”

“……아저씨 내 용돈 안 주잖아요. 근데 뭔 용돈요.”

“너한테 밥이나 음료 안 사줘.”

“아 그건 에바지! 한 달에 두세 번 사주는 것도 아까워서 압수하면 난 어쩌라고요!”

“넌 남의 돈 쓰는 걸 되게 당연하게 생각하는구나.”

“아니 이건 아저씨한테 이득이지.”

조아라가 보란 듯이 자신의 머리칼을 찰랑찰랑 쓸었다.

“나 같은 사람이랑 관계 유지비로 월 3만 원 정도는 내야죠.”

“응 압수할 거야. 절대 안 사줘.”

조아라가 차창 밖으로 손하트를 보냈다.

“됐어요?”

성필은 쓴웃음을 지었다.

‘애들이 세이코 씨를 정말 싫어하는구나.’

그렇게 세이코의 등장이라는 가벼운 해프닝을 겪고, 소녀연맹은 웨벡스에 도착했다.

1층 로비에서 히무라 실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10년 만에 만나는 친구를 대하듯 친근한 미소를 지었다.

“잘 오셨습니다. 근 10일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일본에서의 콘서트는 총 4회.

소녀연맹은 일본에서 약 10일을 머물 것이었다.

* * *

“세이코쨩, 일단 친구를 사귀어보자.”

세이코 재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미사토가 그리 권하였다.

“응, 그럴게.”

세이코는 아주 열정적이었다.

성필에게 차인 이후 어떻게 변할까 걱정했던 게 무색할 정도였다.

마치 그날 이후 삶의 원동력을 찾아낸 것처럼, 세이코는 어느 때건 활기가 넘쳤다. 문제는 그 활기를 쏟아낼 대상이 앨범 작업뿐이란 것이었다.

‘얘는 연습 말고 인생에 다른 재미가 있을까?’

가끔 미사토의 집에 찾아와서 서유선과 어색하게 대화를 나누는 게, 세이코가 가진 유일한 여가라면 여가일 것이다.

사실 딱히 대화도 아니었다.

세이코는 미사토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온 거지 서유선과 얘기하려고 온 게 아니었으니까. 미사토의 남자친구이니 어쩔 수 없이 어울린다, 그런 분위기였다.

“취미를 공유하거나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드는 건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야.”

“알아.”

그러곤 세이코는 약간 씁쓸하게 말했다.

“미사토가 언제까지 내 곁에 있어 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미사토는 섬찟해졌다.

세이코가 그날 옥상에서 벌였던 일이 떠올라서였다.

“아니야. 난 언제나 무슨 일이 있어도 세이코쨩 곁에 있을 거야.”

“고마워 미사토.”

세이코는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들지 않으려 다시금 활기차게 말했다.

“그런데 친구는 어떻게 만들어?”

“응? 어, 음, 친구를 만드는 법…….”

세이코는 오랜 세월 가수로 지냈다. 그런 만큼 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중에 마음이 맞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단지 찾지 못했을 뿐이다.

‘세이코쨩은 나한테만 의지했었으니까.’

비즈니스적인 자리에 가서도 이야기하는 건 대부분 미사토였다.

다른 이들도 세이코에게 이야기하는 대신 꼭 미사토를 거쳐서 용무를 전달했었다.

그런 태도가 오랫동안 쌓여, 감히 가후 세이코에게 사적으로 접근하는 인간이 없게 되어버렸다.

가후의 아우라가 인간적인 접근 자체를 막는 것이다.

“일단은 회사 사람들이랑 친해져 보는 게 어떨까? 혹시 ‘이 사람이랑 친구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어?”

“모르겠어.”

“그렇구나.”

미사토랑은 전혀 다른 타입이다. 그녀는 자주 ‘이 사람이랑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스스럼없이 사람에게 접근하는 기술을 학창 시절부터 익혔었다. 그게 매니저 활동에도 도움이 됐음은 명백했다.

그런데 이걸 세이코한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니면 취미 모임 같은 거라도 추천해줄까.’

“아무튼 친해지고 싶은 사람을 찾으면 되지?”

그렇게 세이코의 친구 만들기가 시작됐다.

미사토는 세이코와 잘 어울릴 만한 사람 여럿을 물색했다.

마치 부모가 유치원생인 자식에게 친구를 만들어주기 위해 다른 집들과 안면을 트는 것처럼 말이다.

“세이코쨩, 하나비 씨가 주말에 교토 스타일 카페에 간다고 하시거든.”

하나비는 웨벡스에 소속된 가수다.

취미는 카페와 맛집 탐방으로, 그것을 아이튜브에 브이로그로 올리곤 했다.

세이코도 같이 가도 되냐고 물었더니 ‘조회 수 대박이겠네요’라면서 제발 같이 가달라고 했었다.

“어때?”

“하나비?”

세이코는 잠시 생각하더니.

“별로.”

“에, 왜?”

“급이 안 맞지 않아?”

미사토는 머리가 멍해졌다.

“그, 급이라니?”

“미사토가 옛날에 그랬잖아. 친구는 가려서 사귀어야 한다고.”

아마 세이코가 학생일 때의 일이었을 것이다.

미사토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건 나쁜 물 들지 말라고 한 이야기지.”

“그래도 쫌.”

미사토는 세이코의 기준인 ‘급’에 충격받았다. 사람에 급을 매긴다는 것도 충격이지만, 아니, 가후의 급에 맞는 인간이랑만 친구가 되겠다고?

무슨 문화훈장 받은 배우라도 데려와야 하나?

한 50대 배우와 함께 다도를 하고 있을 세이코를 상상하니, 미사토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러지 말고.”

“아냐, 걔는 아닌 거 같아.”

“세이코, 급이 안 맞는다는 건 그분한테 실례…….”

“뭔가 느낌이 안 좋아.”

“…….”

미사토는 세이코의 기준으로 ‘느낌이 좋은’ 사람을 찾으려고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세이코는 어느 사람을 물어와도 ‘그다지’란 말만 했다.

친구를 사귀고 싶지 않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 게 아닐까. 미사토가 그리 생각하며 침울해질 즈음.

“저 사람은 누구야?”

웨벡스 내부의 직원 전용 카페에서 쉬고 있던 차, 세이코가 한쪽을 가리켰다.

카페 구석에 비치된 피아노에서 어느 여자가 연주하고 있었다. 그녀의 연주는 바쁜 직원들 사이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으나, 세이코의 눈길을 끄는 데는 성공했다.

“아, 저분? 피아니스트인 오토나시 치논 씨야. 32살이시고.”

“나랑 나이도 비슷하잖아! 음, 피아니스트…….”

세이코가 미소 지었다.

“멋지다. 저 사람이랑 친구해도 돼?”

“어? 어, 안 될 건 없지.”

“어떡하면 돼?”

미사토는 인사하고 칭찬하는 등 이야기를 트는 과정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세이코는 메모하듯이 손가락을 허공에 휘적였다. 그리고 결연한 얼굴로 일어나 삐걱삐걱 피아니스트에게로 걸어갔다.

미사토는 그 모습을 보며 안심했다.

‘세이코쨩도 친구를 사귀고 싶었던 거구나.’

게다가 꽤 진지한 듯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세이코는 저 피아니스트에게 ‘좋은 느낌’이란 걸 감지한 듯했다.

과연 그녀의 친구 만들기는 어떨지…….

“가후 세이코예요. 나 알죠?”

미사토가 책상에 머리를 쾅 박았다.

‘가후 세이코인데 뭐 어쩌라고?!’

그로부터 세이코는 치논에게 자기 자랑을 한껏 늘어놓았다.

마치 ‘나는 이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야. 나랑 친구가 안 되면 손해 보는 거야’라고 말하는 듯해서, 미사토의 얼굴이 다 붉어졌다.

부모님이 사 준 최신 핸드폰을 자랑하며 관심받으려는 초등학생 같다.

‘세이코쨩 제발 그만해 내가 다 창피…….’

“헤에, 대단해요.”

의외로 치논은 순수하게 감탄해주었다. 그러자 세이코는 기가 더욱 살아서, 자신의 칭찬을 막힘없이 30분 동안이나 이었다.

치논은 방실거리는 표정으로 끝까지 세이코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잠시 후, 미사토의 곁으로 의기양양하게 돌아온 세이코가 말했다.

“친구 해 주겠대!”

“자, 잘됐네 세이코쨩…….”

“지금 휴가 중이래! 몇 개월은 일본에 있을 거래! 내 집에 놀러 오겠대! 피아노 쳐주기로 했어!”

세이코는 초등학생처럼 친구 사귄 일에 들떴다. 방식은 살짝 불안했지만, 미사토는 세이코가 인간관계에서 용기를 내주어 기뻤다.

그렇게, 세이코가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 * *

세이코는 친구인 치논에게 고민 상담을 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가까워질 수 있겠냐고.

치논이 간단하게 답했었다.

“주변 사람이랑 친해지면 어때요?”

“주변 사람?”

그러고 보니, 성필이 자신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는 이유가 소녀연맹 때문이었다.

소녀연맹이 그만큼 소중하단 뜻일 터다.

그럼 소녀연맹과 친해지면, 그리고 소녀연맹이 자신한테 우호적이 되기만 한다면…….

‘완전 에스컬레이터 아니야?’

소녀연맹이 성필 근처에서 세이코의 좋은 점을 잔뜩 말하게 된다면, 세이코가 굳이 자신의 매력을 어필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렇구나!’

세이코가 치논에게 감사했다.

“치논 천재 아니야? 맞네 맞아!”

“응응, 고마워요.”

“……근데 그 사람들이랑은 어떻게 친해지지?”

“저야 잘 모르죠. 그래도 잘되면 좋겠네요.”

치논이 단아한 미소를 보였다.

이 미소야말로 세이코가 치논을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한 기준이었다. 피아노를 치는 치논도 지금과 같이 아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수수하며 소박하고 절제된, 주변으로 에너지를 뿜어내지 않는 듯한 사람이다.

사방으로 에너지를 뿜어내는 세이코와는 정반대로, 어쩌면 그런 상반된 면에서 끌린 걸지도 모르겠다.

“저한테 했던 거처럼 해보면 어때요? 세이코의 좋은 점을 잔뜩 알려주는 거예요.”

“아…… 전에 해봤는데…….”

세이코는 ‘뉴아사’ 촬영 전 화장실에서 만났던 백설하를 떠올렸다.

서슬 퍼렇게 벼려진 살기는 세이코가 당장 화장실을 뛰쳐나가 미사토를 찾게 할 뻔했었다.

“별로 효과는 없는 거 같아…….”

“세이코처럼 대단한 사람을 싫어한다니, 별나네요.”

아무튼, 세이코는 결심했다.

소녀연맹과 친해지기로.

* * *

“당장 내일이 콘서트인데 이래도 돼?”

전에 일본에 왔을 때도 방문했었던 댄스 스튜디오 레드원. 그 건물 앞에 서서 성필이 말했다. 조아라는 걱정 말란 듯 성필의 등을 팡팡 쳤다.

“조금은 기분 전환…….”

“너 요즘 날 점점 더 나한테 친구처럼 대한다? 너 야 내 나이가 몇인 줄 알아? 33살이야 33살! 어떤 21살도 33살 등을 팡팡 치진 않아!”

“리카랑은 친구라면서 나랑은 안 돼요? 내로남불 미쳤다. 이건 리카한테 사적 감정이 있다고밖에 해석할 수가 없는데.”

“하아…….”

“반박 못 하겠죠? 바로 입꾹닫 했죠?”

“너, 내가 진짜 친구로 생각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조아라는 리카를 떠올렸다.

성필의 장난에 울고 웃기를 반복하는, 그야말로 샌드백이나 다름없는 삶을 보내는 리카.

그러면서도 뭐가 좋은지 헤실헤실 웃기만 반복하는 리카…….

“그건 걔가 좀 모자라서 그런 거고요.”

“리카한테 그대로 전해야지.”

“걔도 나한테 ‘에에 아라쨩 지능 낮은 거 아니야?’라고 그래요.”

“리카가 그런다고?!”

하긴 친구끼리 그럴 수도 있지.

“에에, 아저씨 그렇게 큰소리 내는 거 엄청 지능 낮아 보이는데요?”

성필은 일본 갸루처럼 말하는 조아라의 정수리를 손날로 탁 쳤다.

조아라는 자신의 정수리를 문지르면서 스튜디오 내부로 발을 들였다.

카운터에서 어반 댄스 데일리 클래스를 신청한 후, 둘은 강의 시간이 오기까지 잠시 휴게실에서 기다렸다.

“아저씨.”

조아라가 휴게실에 비치된 공짜 음료를 마시며 물었다.

“이번엔 어쩐 일로 순순히 따라왔네요?”

“네가 순순히 안 따라오면 1층 로비에서 아기처럼 울부짖는다고 했잖아.”

“아니 그건 농담이죠…….”

“내가 아라가 아기처럼 울부짖는 건 또 못 보지.”

“말을 말자.”

조아라는 몇 개월 전과 달라진 게 없는 휴게실을 쭉 둘러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유우토 걔 아직도 여기 다닐까요?”

“음.”

손혜빈의 적극적인 공세에도 유우토는 끝내 함락되지 않았었다. 그는 일본에 남을 수밖에 없겠다면서, 정말 미안한 기색으로 거절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손혜빈도 씁쓸하게 한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아마 다니지 않을까. 어디 기획사에 그룹 멤버로 뽑히려면 댄스 실력이 필요하다고 했으니까.”

“댄스…… 하니까 생각났는데 공연 보고 싶어요.”

“공연?”

“현대무용 공연이요.”

조아라는 오늘 본 적 없던 텐션으로 그 공연에 관해 설명했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현대무용이 가장 발달했으며, 이번에 공연하는 무용단은 월드 투어의 시작을 도쿄에서 한다고 말이다.

“현대무용은 좀 난해하지 않아?”

성필은 조아라가 현대무용에 관심 있단 사실이 적잖이 놀라웠다.

현대무용은 조아라가 익힌 테크니컬한 댄스와는 결이 다르니까. 과연 그녀가 현대무용을 감상할 능력이 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본 적은 있고?”

“아하니, 아저씨.”

조아라가 실망이라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나 미국에서 컨템포러리 댄스 배웠었잖아요.”

“아, 맞다.”

“진짜, 회사에서 돈 들인 것도 까먹고. 6주간이나 배웠으니까 보는 눈이 있죠 당연히.”

“대단하네 우리 아라.”

성필은 조아라의 말에서 칭찬받고 싶어 하는 욕구를 느꼈기에, 순순히 그 욕구를 충족시켜주었다.

그런데 조아라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아저씨, 내가 옛날에 뭐라고 했는지 벌써 잊었어요?”

“……어린애처럼 대하지 말라고?”

“근데 왜 그래요.”

“대단하다고 한 건데 왜 그래.”

“진짜 한 대 쥐어박고 싶네.”

성필이 장난스레 업신여기는 표정을 짓고 있긴 했다. 쥐어박고 싶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어허, 어른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그게?”

“나도 어른인데요? 사회인인데요? 가로 엔터를 떠받치는 기둥인데요?”

“다 맞는 말이라서 뭐라 할 수가 없네.”

“애초에 아저씨가 12살 많다고 나보다 어른스러운 건 아니…….”

“아!”

갑자기 어떤 여자가 놀란 소리를 외쳤다.

성필과 조아라는 움찔하며 그쪽을 보았다.

한눈에 보아도 댄스 강사같이 생긴 여자였다. 춤추기 편하게 입은 복장만 보아도 알 듯했다.

“그분!”

조아라는 곧바로 사용 언어를 일본어로 전환하고, 말투 또한 바꾸었다.

“이런 이런. 이 유명세는 어딜 가나 사라지지 않는…….”

“시에이스 ‘에딕티드’ 췄던 분!”

“…….”

조아라는 어안이 벙벙하여 성필을 보았다. 당황하긴 성필도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그때, 성필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아이라 씨?”

전에 이곳에 왔을 때 시에이스 ‘에딕티드’를 가르쳐주었던 강사였다.

아이라는 손뼉을 치면서 반가워했다.

“와아, 다시 오셨네요? 이번에도 데일리 클래스? 바로 다음 수업이 저인데.”

“네, 맞아요.”

“전에 영상 찍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그거 조회 수 3만 넘어갔는데 보셨어요?”

“하하하, 네, 뭐…….”

성필은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떨떠름했다.

성필의 ‘에딕티드’ 영상이 3만이란 조회 수를 기록한 건 순전히 소녀연맹의 팬덤인 인민이들 덕분이었다.

한때 커뮤니티에 ‘이 정도는 돼야 기획사 이사 됨’이란 글이 유행했었다. 글의 내용은 성필이 ‘에딕티드’를 추는 영상이었다.

그 영상은 순식간에 인민이들에게 전파되어서, 성필은 의도치 않게 화젯거리가 되었었다.

“이 기세를 타서 셀럽을 노려보는 거예요! 마침 이번에도 보이그룹 곡이거든요? 이번에도 한번? 이번에도 한번?”

“아, 아뇨, 이번엔 좀…….”

“해보기 전엔 모르죠. 아, 5분 뒤에 수업 시작인데 가실까요?”

성필과 조아라는 아이라의 뒤를 따라갔다. 조아라가 성필의 등을 콕콕 찔렀다.

“걍 아저씨가 데뷔해요.”

“내가 어떻게.”

“트로트 댄서 같은 거 하면 중장년층한테 선풍적인 인기 끄는 거 아니에요?”

“트로트 댄서는 뭔데. 그리고 중장년층분들도 젊은 사람 좋아해.”

“아저씨 코만 조금 더 세워볼래요?”

“성형 권유하냐 지금? 그거 임마 얼평이야!”

심지어 그냥 평가도 아니고 ‘네 얼굴 좀 그러니까 뜯어고쳐 볼래?’라는, 엄청난 수준의 모욕이다.

“진짜 코만 높이면 괜찮을 거 같아서 그랬어요. 하는 김에 앞트임…….”

“그래, 아예 턱까지 깎아서 하양이처럼 될게. 그럼 됐냐?”

조아라는 배를 부여잡고 웃었다.

성필이 장하양처럼 아찔하게 깎아지른 턱을 가지게 되면 꽤 볼 만할 터였다.

“그게 성형으로 돼요?”

“의외로 성형이란 게 굉장히 발달했단다 아라야. 마법이나 다름없지.”

“그래서 언제 해요?”

“안 해! 난 내가 좋아!”

“오올, 자신감. 세쿠시(섹시).”

“너도 이참에 좀 할래?”

“지금 내 얼굴 평가했어요? 하, 진짜,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네. 국민 권익 위원회에 신고합니다.”

“그래, 감옥 갈게. 제발 보내줘라. 그럼 적어도 너한테 코 높이란 말은 안 듣겠지…….”

조아라는 큭큭 웃다가, 갑자기 살짝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뭐, 나 어디 고쳐야 할 거 같은 데 있어요?”

“없어.”

“근데 왜 그런 말 해요.”

“네가 먼저 했잖아.”

“진짜 없어요?”

“없다니까.”

“나 상처받았어요.”

“정말 나 광기에 젖어서 춤추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그만해라 제발…….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니?”

“아저씨 어차피 내가 부탁하면 어떤 장단이든 춤 안 춰주잖아요.”

“오올.”

성필이 조아라의 언어유희에 감탄하며 손을 내밀었다. 조아라가 손뼉을 짝 마주쳤다.

“어?”

앞서가던 아이라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성필과 조아라도 앞을 보니, 그녀가 놀란 이유를 단숨에 알 수 있었다.

연습실 앞이 강사, 수강생 할 거 없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잠시만요! 지나갈게요! 잠시만요!”

아이라가 인파를 뚫고 안으로 들어갔다. 성필과 조아라도 뒤를 따랐다.

그러자 연습실 앞이 이렇게 변한 원인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아, 우연이네요.”

앉아 있던 세이코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일어나는 것만으로 여기저기서 기쁨의 비명이 울렸다.

“갑자기 춤이 배우고 싶어서요.”

참고로, 아무도 안 물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