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72화 (372/760)

372화

김태훈은 ‘비익연리’ 무대를 입 벌리고 바라보았다. 고막을 쩌렁쩌렁 울리는 거대한 노랫소리는 무대로부터 들려오는 게 아니었다.

전후좌우의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비익연리’를 부르고 있다.

‘이렇게 되는구나.’

김태훈은 공연이 시작하기 전 스크린에 떠오른 안내문을 보고 의아했었다.

공연 마지막에 ‘비익연리’의 가사를 띄워줄 테니 함께 노래불러달라는 것이었다.

어떤 장면을 연출하려고 그러는지 알 수 없었는데.

‘이런 거였구나.’

수천 명이 전하는 노래는 드높은 파고(波高)가 되어 무대를 휩쓸 듯이 나아갔다.

그것을 맞은 소녀연맹은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몸을 떨 뿐이었다.

퍼포머가 무대에서 멍하니 멈춰 선다는, 일반적인 공연이라면 절대로 허용되지 않을 사태다.

하지만 이 순간, 소녀연맹이 가만히 서 있는 모습은 어느 퍼포먼스보다도 심금을 울렸다.

‘팬과 함께 무대를 완성한다는 게 이런 의미구나.’

김태훈의 눈가로 찡한 떨림이 찾아왔다.

슬픈 영화를 보아도 눈물 한 방울 흘린 일이 없었건만, 기어코 김태훈의 뺨으로 눈물이 찔끔 떨어졌다.

‘성필이 넌 항상 프로듀서가 되고 싶다고 했었지.’

김태훈도 대강 이해했다.

매니저에서 본격적인 프로듀서로 전향하는 건 업계에서 흔한 일이었으니까.

성필은 언젠가 프로듀서가 될 것이었다.

경력을 더 쌓고 업계의 감각을 익힌 뒤, 김태훈은 그에게 프로듀싱 권한을 주려고 했었다.

그리고 성필의 매니저 경력이 8년을 채워갈 즈음, 윤상열이 석세스 엔터로 들어왔다.

김태훈은 윤상열에게 프로듀싱을 맡겼다.

‘성필이 넌 화냈었지. 이러면 자기는 뭐가 되냐고.’

김태훈은 ‘나중에’란 말을 되풀이하며 동생의 분노를 가라앉혔었다.

얼굴에 항상 미안하단 기색을 달고 다녔지만, 한편으로는 짜증 나기도 했었다.

누가 봐도 윤상열에게 프로듀싱 권한을 주는 게 옳았다.

KS 엔터의 수석 프로듀서였던 인간이 왔는데, 왜 매니저 출신인 성필에게 그런 중책을 맡기겠는가?

‘아마 앞으로도 쭉, 상열이가 있는 한 너한테 기회는 없었을지도 모르지.’

그걸 알아서인지 성필은 더 윤상열을 마음에 안 들어 했었다.

김태훈에게 사적으로 찾아와 ‘나도 손을 조금 보탤 수 없을까?’라고 한 적도 꽤 있었다.

그럴 때마다 김태훈은 어김없이 ‘나중에’라고 답하며, 미안한 얼굴로 그를 돌려보냈었다.

‘솔직히 이해가 안 됐어. 상열이라는 검증된 인재가 있는데 네가 매달리는 모습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됐어.’

성필의 나이쯤 되면 자신의 주제를 알게 된다. 더 빛나는 별이 곁에 있다면 대충 눈치를 보며 몸을 숨기는 법을 터득한다.

하지만 성필은 그러지 않았다.

부끄러움도 없는지 계속 윤상열을 앞에 두고도 프로듀싱을 입에 올렸었다.

이해가 안 됐다.

조금 모자란 건가도 생각했는데.

‘이제 이해가 되네.’

김태훈은 이 순간이 되어서야 성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이 순간이 아니고서야 이해할 순 없었을 것이었다.

‘이런 광경을 머릿속에 넣고 있는데.’

김태훈이 씁쓸하게 웃었다.

‘당연히 직접 프로듀싱을 하고 싶었겠지…….’

소녀연맹의 무대는 찬란하게 빛났다.

성필, 한 명의 인간이 상상한 세계는 마침내 수천 명이 볼 수 있는 형태로 화하여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태훈은 그 세계를 눈에 담으며 과거의 성필에게 사과를 전했다.

‘미안하다, 속 좁은 놈이라고 생각해서.’

그야 회사를 나가고 싶었겠지.

거의 10년의 인연을 져버리고서라도 나가야만 했겠지.

이만큼 거대한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인간이, 좁은 새장 속에서 언제까지고 참을 수는 없을 노릇이었을 테니까.

콘서트가 끝나고, 김태훈과 윤상열은 함께 공연장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거센 추위가 덮쳤다. 김태훈이 코트를 여미며 윤상열을 살폈다. 그는 추위 따윈 느끼지도 않는지 무표정했다.

그리고 주변을 보니, 다른 관객들도 추위 따위는 신경도 안 쓰는 듯했다.

대신 그들의 얼굴에는 온기 가득한 행복만이 감돌았다.

추위를 느끼는 건 자신뿐인 듯해서, 김태훈은 괜히 주머니 안에 넣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형.”

“응?”

윤상열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김태훈을 보았다. 윤상열은 어째선지 호흡이 거칠어져서, 그의 주위로 하얀 입김이 굴뚝 연기처럼 솟아올랐다.

“정규 앨범 만들자.”

“……어?”

“정규 앨범. 글로브.”

당황해서 눈만 껌뻑이던 것도 잠시.

“뭐? 아, 너, 정규는 나중에 만든다며?”

윤상열은 요즘 시대에 무슨 정규 앨범이냐는 말을 자주 하곤 했었다.

음악이 앨범이 아니라 곡 단위로 소비되는 시대에, 정규 앨범처럼 품이 많이 드는 건 과투자라고 말이다.

윤상열은 히트 메이커로서 싱글을 연달아 발매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그는 인정하지 않지만, 정호환의 프로듀싱 전략과 상통했다.

“4, 5년 차쯤 만드는 게 맞다고…….”

“그랬었지. 근데, 아니야.”

뭐가 아니라는 걸까.

윤상열이 하는 말은 하나하나가 연결되지 않아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상열아.”

김태훈이 타이르듯이 말했다.

“안 그래도 글로브 애들 고생하고 있잖아. 정규 앨범 분량 작업까지 할 수 있어? 아니, 걔들만이 아니라 너도.”

석세스 엔터는 공격적으로 다른 기획사들을 흡수했었다. 윤상열이 말하길 ‘싹수가 보이는’ 그룹을 가진 기획사를 중점적으로 흡수해왔다.

그리고 윤상열은 총괄 프로듀서로서, 그 모든 그룹을 관리했다. 덕분에 윤상열은 말도 안 되는 업무를 소화하고 있었다.

글로브가 싱글과 미니 앨범 위주로 활동했던 건 윤상열의 부담을 최소화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다른 그룹들은 네가 덜 신경 써도 되지 않아?’라고 넌지시 말해도, 윤상열은 듣지 않았다.

‘내가 직접 봐야 안심돼’라며, 다른 사람은 전부 못 믿는 듯한 어조로 반박한다.

“정규 앨범이란 건 곡이 15개 정도는 들어가야 하잖아? 심지어 글로브는 네가 직접 관리하는 그룹이고. 그걸 다 하면 너…….”

“난 또 뭐라고.”

윤상열은 괜한 걱정이란 듯 허 웃었다.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라니…….”

그래, 별거 아니겠지.

윤상열은 체력의 리미트가 없는 인간 같았다. 하루에 5시간 남짓 자고 남은 시간을 죄다 일에만 쏟아도 탈진하지 않으니까.

‘너는 할 수 있겠지…….’

그런데 글로브는?

“상열아. 일단 상황 좀 보고 결정하자. 회사 사정도 다시 둘러보고, 괜찮겠다 싶으면 정규 준비하는 거야. 특히 글로브 걔들 지금 너랑 같이 싱글 준비하는 것만 해도 힘들어하잖아. 갑자기 정규로 전환하면 혼란스러운 것도 그렇고, 많이 지칠 거야.”

“그건…….”

그건.

거기까지만 말하고 윤상열은 입을 닫았다. 하지만 김태훈은 뒤로 이어질 말을 알았다.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글로브가 힘들든 어떻든,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

힘들더라도 해야지 뭐 어쩌겠는가. 그게 본인들의 일인데. 회사에 쓰임 당하고 대중들에게 소비되기 위해 아이돌이 된 애들인데.

윤상열은 그런 말을 하려 했을 것이다.

“정규를 완성하면 레퍼토리가 확보돼서 공연도 할 수 있어. 돈 더 벌 수 있다고. 형 돈 좋아하잖아.”

돈? 좋아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듣고픈 말은 아니었다.

“돈 벌어야지.”

돈엔 관심도 없는 인간이 돈을 들먹이면서 정규 앨범 작업을 주장한다.

김태훈은 이게 자신의 업보라고 생각했다.

평소에 자신의 행실이 어땠으면 윤상열이 설득의 근거로 돈을 들겠는가. 아니, 어쩌면 윤상열이 계속 글로브를 몰아세울 수 있던 건.

‘나 때문인가……?’

석세스 엔터 대표의 목적이 돈이니까.

돈이라는 이름하에, 회사의 목적이란 명분하에, 윤상열은 글로브를 학대하듯 몰아세우는 죄책감을 감출 수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 형 말대로 잠깐은 두고 보자.”

하지만 정규 앨범 계획은 결국엔 이뤄질 것이다. 그리 말하는 것처럼 단호하게 등을 돌린 윤상열을 바라보며, 김태훈은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뭔가 뒤틀렸어.’

이 회사는, 뭔가가 잘못되어가고 있다.

* * *

서울에서의 3일 연속 콘서트를 마쳤다.

가로 엔터는 소녀연맹을 위해 가게를 하나 대절하고 소소한 회식 자리를 가졌다.

리카가 문어숙회를 한아름 집어서 입 안에 넣었다. 그것을 씹으며 감동의 눈물을 줄줄 흘렸다.

“마히혀…… 너므 마히혀…….”

리카는 아까부터 한시도 볼이 빵빵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신아름이 그것을 신기하게 보았다.

“너 그러다 뱃살 나오면 어떡해. 콘서트에서 팬들한테 뱃살 보이면 기분 참 좋겠다.”

“마히혀…….”

순대도 먹고 회도 먹고 국밥도 먹고 보쌈도 먹고, 리카는 참으로 많이 먹었다.

콘서트 때 썼던 칼로리를 이 순간 전부 충당하려는 기세였다.

“으어.”

소주를 들이켠 조아라가 아저씨 같은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또 스스로 잔을 채웠다. 이미 그녀의 얼굴은 불콰해졌고 눈동자 또한 초점을 잃었다.

“아라야, 그러다가 너 개 되면 어떡해.”

장하양이 걱정스레 묻자 조아라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 이미 사람 아니니까 말리지 마요.”

조아라는 숙소에도 개인 술을 두는 유일한 멤버였다.

장하양은 그런 그녀가 조금씩 걱정됐다. 나중엔 스트레스를 술에 의존해서 푸는 인간이 되진 않을까 해서, 조아라가 잔을 채울 때마다 장하양의 걱정도 한 잔씩 채워졌다.

“하양이는 더 안 먹어?”

백설하가 혼자만 맛있는 것을 계속 집어먹는 게 미안해서 물었다. 장하양인 어렴풋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네.”

“왜?”

“식단 지키려구요.”

아이돌이라고 항상 몸 관리를 위한 식단대로 먹는 건 아니다.

치킨도 먹고 피자도 먹고 해장국도 먹는다. 특히 오늘처럼 의미가 깊은 날이면, 평소 충족하지 못했던 식욕을 마음껏 채우려고 한다.

그런데 장하양은 식욕이 아예 없어 보였다.

“그러지 말고 이거 먹어봐.”

백설하가 순대를 하나 집어서 장하양에게 내밀었다. 장하양이 그것을 물끄러미 보자, 백설하가 깜짝 놀라 순대를 다시 가져갔다.

“미, 미안. 다른 사람이 집어주는 거 싫어하지…….”

“아하하. 언니 침 묻은 거면 괜찮아요.”

“아, 그래?”

“한 번쯤은요. 그 이상은 아무리 언니라도 죽음을 면치 못해요.”

“…….”

백설하는 우물우물 오징어순대를 씹었다.

“아하하, 농담!”

장하양의 이상한 농담에 대강 미소만 지어주고 음식에만 집중했다.

맛있다.

“하아.”

신아름이 한숨을 쉬었다. 자연스레 모두의 이목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신아름은 소주잔이 와인잔이라도 되는 양 섬세하게 잡고 빙글빙글 돌렸다.

“내일 저녁에 일본에 가는 거죠?”

다음 소녀연맹의 콘서트는 일본에서 이뤄진다. 한국보다 일본에서 유명하단 소문대로, 일본에선 처음부터 네 번의 콘서트를 잡았었다.

도쿄에서만 네 번이 아니라, 두 개의 지역에서 각각 두 번씩 하기로 했다.

“그치.”

“한 달은 계속 바쁘겠네요.”

“야, 근데 좀 자신감 생기기 않냐?”

조아라가 또 소주를 원샷하면서 실실 웃었다.

“이젠 눈 감고도 콘서트 레퍼토리 전부 할 수 있을 듯.”

“어, 너는 눈 감고 해. 나는 눈 뜨고 할게.”

“뭔 씨, 넌 어떻게 내가 장난치는 거에 한 번도 반응을 안 해 주냐?”

은근히 탓하는 듯한 말투지만, 그 안에는 조금씩 물기가 서려가고 있었다.

신아름은 퍼뜩 조아라가 취한 상태란 것을 깨달았다. 조아라는 속눈썹을 길게 아래로 늘어뜨리며, 억울하단 듯이 눈가를 찡그렸다.

“야 맞아 맞아. 나도 그래. 슬슬 자신감 생기지?”

신아름이 조아라와 어깨동무하고 그녀의 어깨를 슬슬 쓸어주었다.

“아앗!”

갑자기 리카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디자인으로 보건대 성필의 것 같았다. 언젠가 성필에게 받아 돌려주지 않은 듯했다.

“으음, 짧네. 앗!”

리카가 또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디자인으로 보건대 한구인의 것이었다.

신아름이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너 무슨 손수건 수집가야? 회사 직원분들 손수건 하나씩 다 받아서 안 돌려주게?”

“나도 방금 든 거 알았어!”

항상 리카의 겉옷과 함께 세탁기에 들어가서 한 몸이 된 두 장의 손수건이었다.

리카는 두 개의 손수건을 묶어서 하나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조아라의 뒤로 가서 안대처럼 눈에 대었다.

“뭐야. 정전이야?”

“아, 아라야 술 그만 먹어야 하지 않을까……?”

“내 술에 손대지 마요!”

조아라는 눈이 가려지고도 자신의 앞에 놓인 소주를 사수하려 했다.

“됐다!”

리카가 조아라의 눈을 손수건으로 완전히 가렸다. 조아라는 안대를 쓴 모양새가 됐다.

“아라쨩 세쿠시(섹시)!”

“뭔데. 무슨 일인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리카는 안대를 쓴 조아라의 모습을 보며 꺄악 꺄악 좋아했다.

안대가 어째서 섹시한 지 다들 이해하지 못했다. 개처럼 취한 조아라가 안대를 써봤자 섹슈얼리티 따위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음, 그러고 보면.”

장하양이 말했다.

“안대는 아이돌이 자주 쓰는 소품이지?”

“맞아요! 섹시함의 상징이에요! 여기에 얇고 헐렁이는 린넨 와이셔츠까지 입으면 세쿠시의 완성이에요!”

“왜 불 안 켜져? 전쟁 났어? 에이 씨…… 아직 20대 초반인데에…….”

“누가 아라 술 좀 뺏어.”

그 말에 안대를 쓴 조아라는 소주병을 보물처럼 품에 안고 바닥에 털썩 누웠다.

“손대지 마! 내 거야! 다 내 거야!”

다들 새우처럼 몸을 말고 드러누운 조아라를 일으켜 세울 생각은 없었다. 대신 핸드폰을 꺼내 그녀의 흑역사를 늘리는 것에 열중했다.

“뭔가 콘서트 끝나고 회식인데 한산하네.”

백설하는 가게를 쭉 훑어보았다.

콘서트와 관련된 인원들만 모였다는데, 숫자가 20명도 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죠. B파티랑 C파티는 벌써 일본으로 갔잖아요.”

B파티는 밴드와 댄서 등 보조 출연진이며, C파티는 공연기획사의 프로덕션 스태프를 뜻한다.

소녀연맹과 매니저팀, 스타일링 스태프 등의 A파티는 가장 나중에 일본으로 향한다. 그래서 오늘 같은 호사도 누릴 수 있었다.

“근데 저 네 분은 무슨 얘기 하고 있을까요?”

장하양이 몇 테이블 떨어진 무리를 가리켰다.

성필, 한구인, 홍규헌, 손혜빈이 앉은 테이블이었다. 가로 엔터의 중역이 다 같이 모인 곳으로, 누구도 쉽게 다가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게…….”

백설하가 아쉬운 투로 말했다.

콘서트가 끝난 후의 회식이니만큼, 초창기부터 소녀연맹을 서포트했던 이들과 회포를 풀고 싶었다.

그런데 가로 엔터의 중역들은 처음 정한 테이블에서 잠시도 자리를 뜨지 않고 있었다.

“잘은 몰라도, 중요한 얘기일 거야.”

소녀연맹 멤버들은 아쉬움을 삼키고 본인들의 테이블에만 집중했다. 여전히 조아라는 바닥에 드러누워 술병을 사수하는 중이었다.

동시에, 성필이 앉은 테이블에선.

“사장님 진짜 3주 이내에 바디 프로필은 무리라니까요?”

“손 이사도 찍기로 했는데 빠질 거야?”

“아니, 저도 정말 진짜 진짜로 열심히 관리했거든요? 근데 아직 선명도가 떨어져요. 인생 최초의 바디 프로필인데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시기 맞춰서 찍는 건 좀…….”

“이젠 더 못 미뤄.”

“아 사장니임…….”

“올해 안에 찍기로 했었잖아. 약속 지켜야지.”

“성필이 너 어때서 그래? 배 좀 까봐.”

“누나 나한테 성희롱하는 거야?! 아니 배 까보라는 건 성추행이잖아!”

“어차피 바디 프로필 찍으러 가면 다 볼 건데 뭘.”

성필은 절대 안 된다면서 한사코 반항했지만, 주변에서 분위기를 띄워주자 어쩔 수 없이 슬쩍 웃옷을 들었다.

홍규헌이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럭저럭 모양 나온 거 아니야? 괜찮은데?”

“그, 그래요?”

성필이 쑥스럽단 듯 웃자, 장난기가 발동한 손혜빈이 말했다.

“한 이사님도 보여줘요.”

한구인이 웃옷을 슬쩍 들자 홍규헌이 또 고개를 끄덕였다.

“박 이사가 만족 못 할 만하네.”

“내 몸을 공개적으로 평가하다니. 수치스럽네요. 고용노동부에 신고합니다.”

“박 이사님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일 때문에 바쁘시지 않으셨습니까. 일본에서…….”

한구인은 흠칫했다.

주제를 잘못 꺼냈다 싶긴 했지만, 머뭇머뭇 하려던 말을 마무리했다.

“그런…… 일도 있으셨고…….”

“음.”

어색해지려는 분위기를 읽은 홍규헌이 잔을 들었다. 다들 바디 프로필 때문에 술 대신 탄산수를 채운 잔으로 건배했다.

“다들 한 달만 더 열심히 하자. 가로 엔터 파이팅.”

“파이팅!”

“남자들도 복근 깠으니까 여자들도 깝시다.”

“박 이사 방금 발언 진짜 좀 그렇다.”

“그래 성필아. 너 뭐 하는 애니?”

“남녀차별이얏!”

“근데 남자 복근이랑 여자 복근은 좀 다른 의미지. 약간 대등하게 느껴지진 않지 않아?”

손혜빈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니, 정말 그러했다. 남녀의 복근은 같은 매력도를 가지지 않는다.

손혜빈이 물었다.

“남자의 복근은 여자로 치면 어딜까?”

“으음…… 히프(Hip) 아니야? 남자 히프는 여자처럼 주목받는 건 아니…….”

“그래서 너 복근 깠으니까 우린 힙 까라고?”

“박 이사 정말 징계받고 싶어?”

“한 이사님…… 저 미움받는 거 같아요…….”

“그렇습니까.”

“‘그렇습니까’? 그게 끝이에요?!”

네 사람은 오랜만에 업무적인 내용을 완전히 배제하고 수다를 떨었다.

한국에서의 콘서트가 끝나서 마음이 더 가벼웠다. 그들은 회식이 끝날 때까지 즐겁게 담소를 나누었다.

소녀연맹 멤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진지한 이야기는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두 그룹이 대화를 섞게 된 건 회식이 끝나고, 바닥에 널브러진 조아라를 보았을 때였다.

“누가 아라 이렇게 만들었어.”

성필이 곤란하단 듯 말했다.

“아무리 공연이 끝나서 기분 좋대도 애를 이렇게 만들면 안 되지. 숙취는 이틀까지 이어질 수도 있단 말야. 공연에서 혹시라도 컨디션 저하가…….”

“자기 혼자 저렇게 먹었는데요?”

신아름의 답은 타당했기에, 성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근데 아라 눈은 왜 가렸어?”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한민족 고유의 전통 놀이를 체험시켜주려구요!”

“뭐?”

“멍석말이요!”

리카가 쓰러진 조아라를 두들겨서 깨웠다.

가로 엔터 사람들은 리카가 한국 문화를 참 못 배웠다고 생각하며, 그 광경을 훈훈하게 바라보았다.

* * *

4개월 만에 맛보는 일본의 공기는 어쩐지 그리운 느낌이었다.

성필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희미한 향수를 느꼈다. 짧은 비행인데도 지친 티를 내는 멤버들을 보고 있자니, 성필은 살짝 죄책감이 들었다.

‘서울에서의 3일 연속 콘서트는 힘들었겠지.’

겨우 하루 쉬고 또 일본으로 왔으니, 멤버들의 피로도는 이 시점에서도 꽤 높을 것이다.

그리고, 멤버들은 다시금 기력을 빼야만 했다.

“얘들아 빨리!”

소녀연맹은 공항 가득 몰려든 인파를 어찌어찌 뚫으면서 밖으로 향했다.

성필은 가로 엔터의 매니지팀과 함께 필사적으로 사람들을 헤치며 나아갔다.

사방팔방에서 카메라 셔터와 함성이 퍼지는데, 너무 스케일이 커서 비현실적일 지경이었다.

“이쪽! 이쪽입니다!”

미리 한국에서 일본으로 가 있던 인물, 웨벡스의 슈이치가 저 멀리 미니버스 앞에서 외치고 있었다.

그가 알아봐 달란 듯 팔을 허우적거렸다.

“얘들아 저쪽으로 가자!”

성필과 매니저팀이 소녀연맹 멤버들을 감싸며 힘겹게 한 발씩 옮겼다.

공항 청사 밖도 안만큼이나 혼잡했다.

“흐아!”

드디어 버스에 오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숨을 쉬었다.

“와, 뭔데.”

조아라가 버스에 타며 뒤를 돌아보았다. 한눈에 잡는 것도 힘든 규모의 사람들이 소녀연맹을 향해 환호를 보내고 있다.

“우리 진짜 유명한…….”

조아라가 입을 다물었다.

미니버스 전체가 침묵에 잠겨 있었다.

슈이치가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미니버스 앞자리에 앉은 인물을 쳐다보았다.

그 사람은 무심하게 턱을 괴곤 차창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뒤에서 느껴지는 침묵과 시선을 무시할 수 없었는지, 짧게 한마디 했다.

“스케줄 가는 길이라서 탔어요.”

세이코였다.

그녀는 여전히 무심한 듯 뒤로 시선 하나 주지 않았다. 하지만 차창에 반사된 그녀의 얼굴은 기대감으로 옅게 상기되어 있었다.

정적이 이어졌다.

“진짜예요!”

굳이 세이코가 한마디 덧붙였다.

4개월 만의 재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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