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1화
약칭 ‘보라색 튤립’은 1년간 진행해온 소녀연맹 서사의 완결점이란 의미를 가진다.
소녀연맹의 뮤직비디오를 꾸준히 보아온 팬이라면, ‘보라색 튤립’에 담긴 의미를 모를 수 없다.
‘우리 지금까지 많이 힘들었어. 이제 좀 쉬자.’
힘든 싸움을 마치고 마침내 평온을 찾은 그녀들은 함께 놀이공원에 간다.
서로 장난도 치고 웃으면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하지만 놀이공원에는 그녀들만 있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있다.
소녀연맹과 마찬가지로 즐겁게 웃으면서 행복을 만끽하는 이들이, 그곳에 있다.
놀이공원은 소녀연맹이 이뤄온 업적에 대한 보상이며, 동시에 그녀들이 팬들을 위해 완성한 세계를 뜻한다.
‘우리가 여기까지 왔어요. 다들 잘 즐겨주셨나요?’
팬들에게 그리 묻는다.
여러모로 의미가 많은 곡이다.
팬에게만이 아니라, 소녀연맹에게도.
“쌤 언제까지 울려고요.”
조아라가 거칠게 백설하의 등을 팡팡 쳤다. 그런데도 백설하는 울음을 그칠 기미가 안 보였다.
백설하는 언제까지나 스테이지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향해 서 있었다.
“이제에…… 끝이잖아아…….”
콘서트의 최후인 ‘보라색 튤립’마저 마쳤다.
소녀연맹은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백스테이지로 돌아온 참이었다.
그녀들은 일렬로 늘어서서 스테이지와 백스테이지를 연결하는 복도를 바라보았다.
약 3시간, 저 좁은 곳을 수없이 많이도 돌아다녔더랬다. 이젠 저곳이 어릴 때 쏘다녔던 고향 동네의 골목길처럼 정답게 느껴진다.
“끝이야아…….”
백설하는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힘겹게 보냈던 연습생 시절의 기억.
멤버들과 함께였기에 버텨낼 수 있던 데뷔.
실패하진 않을까 가슴 졸였던 나날.
그리고, 객석을 가득 메우며 분에 넘치는 찬사를 주었던 팬들까지.
이 모든 게 머릿속에서 뒤섞이며, 백설하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다행이야, 정말로 다행이야…….’
아이돌을 다시 하기로 해서, 정말 다행이다.
백설하는 끝없이 떨어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았다. 흐려진 시야로 스테이지에서 들어오는 미약한 빛을 계속 바라보았다.
이전에 속했던 그룹이 해산되었을 때, 백설하는 망연자실하게 회사 건물을 나왔었다.
해가 질 때까지 건물을 쭉 바라보았었다. 건물에 불이 켜지길 기도하면서. 하지만 결국 불은 켜지지 않았었다.
그날의 기억이 배경에 서려 있다.
그날의 어둠은 백설하의 심장에 박힌 송곳이었다.
하지만 배경 앞에 놓인 콘서트장은 그날의 어두운 기억과 달리 밝았다.
‘너무 밝아서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데도…….’
또 바라보면 너무 아름다워서 영원히 눈 속에 새겨 넣고 싶었다.
“이제 끝…….”
“끝 아니에요!”
백설하가 울자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진 리카. 그녀는 백설하의 손을 강하게 붙잡고 위아래로 크게 흔들었다.
“아직 앙코르가 남았잖아요! 다시 한번 팬분들을 볼 수 있어요! 그러니까 뚝 그치세요!”
“맞아요 언니.”
장하양도 백설하 위로의 행렬에 끼었다.
“다시 나가서, 언니가 우시느라 못 했던 작별 인사도 착실히 나누고. 팬분들에게 감사하단 말씀도 꼭 드리세요.”
“으응…….”
백설하는 동생들의 위로를 받고 자신의 뺨을 짝짝 두드렸다.
곧 앙코르가 나올 테니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한다. 정말 마지막 퍼포먼스를 보여줘야…….
“근데.”
신아름이 말했다.
“앙코르 나올까요?”
정적이 일었다.
그녀들 사이의 정적은, 백스테이지를 바쁘게 돌아다니는 스태프들의 소음 사이에 있어서 더욱 도드라졌다.
신아름이 당황하면서 덧붙였다.
“진짜 끝난 줄 알 수도 있잖아요!”
“야 신아름. 조 사장님이 앙코르는 한국 공연 문화에서 필수적 요소라고 했잖아.”
“너 웬일로 발음이 정확하냐. 단어도 희한하게 쓰네.”
신아름이 어처구니가 없어 조아라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조아라가 왜 그런지 알 수 있었다.
조아라는 양파라도 썰었는지 콧잔등을 잔뜩 찡그린 상태였다. 아마 울음을 참는 것이리라.
발음을 명확히 하고 평소엔 안 쓰던 어휘를 쓰는 건, 조아라 나름 울음을 참는 법인 듯했다.
“앙코르 나올 거야.”
조아라가 자기 자신에게 하듯, 여전히 명확한 어조로 말했다.
약 30초쯤 기다렸을까.
“……안 나오는데?”
‘앙코르’의 ‘앙’도 들리지 않았다.
백설하가 따뜻한 오두막집에서 설원으로 내쫓긴 듯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장하양이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리카도 마찬가지로 백설하의 손을 꼭 잡았다.
양편에서 느껴지는 온기에도 백설하는 쉬이 진정하지 못했다.
1분이 지났다.
“……야 신아름.”
“왜.”
조아라가 조용히 신아름의 손을 잡았다. 신아름도 뭐라 하지 않고 꼭 손을 쥐어줄 뿐이었다.
“아앗! 아름이 치사해! 아타시(나)도 아라쨩이랑 손잡을래!”
그렇게 다섯 명 모두 손을 잡게 되었다.
사슬처럼 이어진 그녀들은 ‘앙코르’라는 말이 들려올 때까지 기다렸다.
언제까지고 같은 자리에 뿌리 박힌 나무처럼, 앙코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백설하의 눈썹이 침울하게 떨려왔다. 곧 있으면 또 울 것처럼.
“우리가 못 했나 봐아……. 여어, 역시 내가 기타 솔로 따위를 해서어…….”
어쩌면 관객들은 이미 다 나간 게 아닐까.
그걸 본 조진만도 어이가 없어서 아무런 사인을 안 주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절망적인 생각만이 백설하의 머리를 지배했다.
“아, 아타시(저) 실은요오…….”
리카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였다.
“‘보라색 튤립’ 인사하고 들어갈 때요……. 진짜 ‘앙코르 해주실 수 있으실까요?’란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었는데에…….”
하지 않았었다.
공연자가 직접 앙코르를 요청하는 건 세련되지 않을뿐더러 꼴사납게 보이니까.
리카가 흐끅 딸꾹질했다.
“할 걸 그랬…….”
“방금 들었어?”
장하양이 귀를 쫑긋 세웠다.
“들렸잖아.”
다들 장하양처럼 귀를 앞으로 조금씩 기울였다. 그랬더니 들리기 시작한다. 작지만 명확한 외침이.
멤버들이 전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바, 방금…….”
“앙코르예요!”
신아름이 총알처럼 뛰어나갈 기세로 상체를 앞으로 뺐다.
“그치기 전에 빨리 나가야……!”
앙코르!
아까보다 확연히 커진 외침에 신아름이 우뚝 멈췄다. 그리고 또 들려왔다.
앙코르!
아까보다 훨씬 더 커지고.
앙코르!
아까보다 훨씬 명확해진.
앙코르!
누구도 잘못 들을 수 없는 크기의 외침이었다. 3,000명이 동시에 앙코르를 부르짖는다.
소녀연맹을 다시 보고 싶다.
이대로 돌아가긴 아쉽다.
한 번만 더 나와줘.
그런 염원을 담아 소망한다.
앙코르!
“……하하.”
리카가 언제 울었냐는 듯 자랑스럽게 가슴을 폈다.
“어쩔 수 없네요! 그럼……!”
“그거 무대 나가서 할 대사잖아!”
“아 맞다! 에, 에, 어떻게 하는 거더라? 일단 마이크를…….”
“그만하고 빨리 나가!”
신아름이 나머지 네 명을 줄줄이 매달고 스테이지를 향해 뛰쳐나갔다. 그녀의 얼굴은 더없는 기쁨으로 물들어 있었다.
모두가 그러했다.
끝없이 울리는 ‘앙코르’란 외침에 홀려 마주한 스테이지.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무대가 너무나도 생소하게 다가왔다.
앙코르.
그 짧은 단어를 수천 명이 동시에 연호한다.
* * *
“앙코르!”
성필은 마지막으로 외쳤다.
그는 칼칼한 목을 다듬으며 목깃을 정돈했다. 짧게 심호흡을 하면서도 진정하기가 어렵다.
‘드디어 앙코르까지 왔다.’
조진만이 홍연헌과 공연 기획서로 대결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조진만은 공연의 마지막 연출까지 전부 작성해서 가로 엔터에 제출했었다.
그것을 보고 성필과 한구인은 눈물을 또르르 흘렸었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저려오는 감동적인 무대 연출이었으니까.
소녀연맹이 백스테이지에서 뛰어나오는 게 보였다.
관객이 보이고 나서는 주춤주춤 평정을 찾았으나, 방금까지 잔뜩 기대하고 있었단 게 걸음에서부터 전부 보였다.
‘얘들아, 잘 봐.’
너희들이 얼마나 세상에게 사랑받고 있는지.
* * *
“어쩔 수 없네요!”
무대로 나온 리카가 호기롭게 외쳤다.
그녀의 눈은 해가 달을 밀어내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의 빛을 자랑하는 별과 닮았다.
“앙코르예요!”
소녀연맹 정규 1집 Girls’ Union 수록곡.
라스트 트랙, 비익연리(比翼連理).
추억을 자극하는 청량한 사운드가 시작되자 멤버들은 굳은 손으로 마이크를 쥐었다.
괜히 인이어를 꾹 누르기도 했다.
‘마지막 곡이야.’
진짜 마지막 곡이다.
‘앙코르’는 관객이 갈채를 보내어 연주자에게 추가 공연을 요청하는 것이다.
요즘엔 어지간히 못 하지 않고서는 앙코르를 요청하는 게 관례라고는 한다. 관례라고는 해도, 직접 받아보면 절대 가벼운 느낌이 아니다.
‘우리를.’
리카가 인이어를 귀에 꼼꼼히 넣었다.
‘우리를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으셔서. 우리의 공연을 마음에 들어하셔서.’
그래서 앙코르를 외쳐주셨다.
절대 이전의 퍼포먼스에 뒤져서는 안 된다.
전주가 끝날 때가 오자, 리카는 좌측의 백설하를 향해 눈짓했다. 백설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비익연리.’
비익조(比翼鳥)와 연리지(連理枝)를 합쳐 부르는 것이다.
비익조란 하나의 날개만 가진 새가 서로 합하여 마침내 온전한 쌍이 되는 것. 연리지란 얽힌 나무가 결이 통하여 하나가 된 것.
즉, 서로가 없으면 못 사는 사이란 뜻이다.
‘여러분에게 고마움을 담아 부를게요.’
소녀연맹이 팬에게 바치는 세레나데.
이곳까지 함께 해준 것에 대한 감사.
그렇기에 정규 1집의 마지막 트랙이며, 콘서트 최후의 레퍼토리다.
백설하가 최후의 최후에 나와야만 하는 것을 노래했다.
“하늘 대신…….”
갑자기 음악이 툭 끊겼다.
“시이인……?”
백설하의 노래 또한 끊겼다.
갑자기 사운드가 텅 비자 무대 위에 선 소녀연맹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표정에 변화는 없었다. 그녀들은 계속 프로로서 무대 위에 서 있었다.
백설하는 갑작스러운 사태 때문에 벌어진 음 이탈을 재빨리 수습하고 노래를 이어갔다.
하늘 대신.
“새를 더 자세히 본 적 있어?”
음악이 꺼진 지 10초가 다 되어 간다. 그런데도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백설하는 땀을 뻘뻘 흘리며 마이크에서 입을 뗐다. 장하양이 다음 가사를 받는다.
장하양은 아무렇지 않은 듯 노래를 부르지만,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는 것을 자각하여 표정이 편치만은 않았다.
“날개를 이은 삼각형
편대를 이뤄 나아가.”
대체 언제 음악이 돌아오는 것일까.
조아라가 초조한 낯빛으로 노래 불렀다.
“하나가 멀리 떨어져도
모두는 떨어지지 않아.”
신아름은 미소 지으면서 한 걸음 나아갔다. 그녀의 태도에 다른 멤버들이 당황했다.
그녀는 마치 음악이 들린다는 듯 자연스러운 쇼맨십을 선보였다. 의도적으로 하는 건 아니었다. 몸에 배어 있기에 하는 것이다.
“약속 없는 하늘로
하나가 되어 날아가.”
대체 언제 음악이 돌아오는 걸까.
기약 없는 기다림 속에서 리카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에게선 동요가 보이지 않았다.
오직 의지뿐이었다.
음악은 없지만 목소리는 있다.
리카는 비어버린 음악을 채울 생각으로 노래했다. 그녀는 자신이 느낀 모든 사랑을 메아리처럼 반사하여 관객에게 들려주었다.
‘내 마음을 전하는 거야.’
자신이 받은 행복을 돌려주어야만 한다.
음악이 없어도 괜찮다.
음악 이상의 노래를 부르면 된다.
‘그게 아이돌로서 나의 보답.’
어떤 상황에서도 팬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것.
그게 아이돌이기에.
“내 날개가 되어줘
네 날개를 이어줘.”
그렇기에 노래해야만 한다.
정적을 꿰뚫고 모두의 마음을 울릴, 영원토록 가슴 속에 보물로 남겨둘 노래.
“잃어버린 길을 너와 함께 비출래.
너와 함께 날아가.”
리카는 무아지경으로 노래했다.
오직 팬들에게 닿겠다는 일념 하나로 자신의 모든 것을 쥐어짜 냈다.
실패한 앙코르로 만들어선 안 된다.
리카의 머릿속에는 그 생각뿐이었다.
“난 아직 서 있어
네가 찾아주길 바라서.”
그래서 듣지 못했다.
신아름이 어깨를 두드리는 것도.
조아라가 옆에서 무어라 하는 것도.
백설하가 앞을 가리키는 것도.
장하양이 눈물짓는 것도.
리카는…….
“리카!”
신아름이 고함을 내지르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함께 날아가…….”
그녀가 못다 한 가사를 내뱉음과 동시에, 귀를 가득 메우는 열렬한 파도가 덮쳐왔다. 소리로 이루어진 바다가 그녀를 에워쌌다.
“함께…….”
[함께 날아가자.]
노래 부르고 있다.
누굴까, 이토록 큰 소리를 내는 건.
[Please be my wing]
그 목소리는 균일하지 않았다.
남자와 여자가 섞여 있다.
큰소리와 작은 소리가 섞여 있다.
저음과 고음이 섞여 있다.
어느 것 하나 같은 게 없다.
그럼에도 같은 말을 한다.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
[Please be my wing]
관객이, 온 세계가 노래하고 있다.
소녀연맹의, 자신의 ‘비익연리’를 노래하고 있다.
리카가 든 마이크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는 노래 부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시야를 가득 메운 빛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수천 명이 어지러이 섞인, 하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소리가 빛을 타고 휘몰아쳐 들어왔다.
[Please be my wing]
신아름은 마이크를 양손으로 공손히 쥐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Please be my wing]
조아라는 관객으로부터 등을 돌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Please be my wing]
장하양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고 가만히 서 있다.
[Please be my wing]
백설하는 무릎을 꿇은 채 오열하고 있다.
[Please be my wing]
리카는, 리카는 그저 보고 있다.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빛을 보고만 있다. 그 빛은 너무나 압도적이라 메아리로 돌려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인간의 목소리.
수천 명이 동시에 내는 목소리는 심장을 뒤흔드는 감정의 격류를 쏟아내게 한다.
이 순간 리카는 깨달았다.
어째서 인간의 목소리를 최고의 악기라고 부르는지.
[Please be my wing]
목소리에는 감정이 담겨 있다.
인간의 감정에 가장 직접적으로 닿을 수 있기에, 목소리는 최고의 악기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마침내 한계까지 쌓인 감동이 리카의 턱 끝까지 올라왔다. 입술까지 올라온 떨림에 리카가 눈을 찌푸렸다.
소녀연맹의 노래, 자신의 노래를 수천 명이 불러준다는 이 비정상적이면서도 황홀한 상황.
이렇게까지 아름답다면 무어라 할 말이 없다.
세상으로부터 사랑받는단 건 이런 느낌이겠지.
“여, 여러분…….”
리카가 젖은 목소리로 무언가 말하려 할 때, 그녀의 뒤에 놓인 스크린이 빛을 뿜어냈다.
리카는 덜덜 떨며 뒤로 돌아보았다.
자신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예요?]
그 질문에 멤버들의 얼굴이 차례로 잡힌다.
백설하가 답한다.
[음, 잘 때요. 아, 아니 이상한 뜻 아니에요!]
조아라가 답한다.
[춤출 때요.]
장하양이 답한다.
[모두와 함께 있을 때요.]
신아름이 답한다.
[이길 때요.]
그리고, 다시 묻는다.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제예요?]
리카는 오랫동안 고민한다. 그러고는 배시시 웃으면서 팔을 활짝 펼쳤다.
[아타시(저)는 팬분들이 좋아하는 걸 볼 때가 가장 좋아요! 저희 퍼포먼스를 좋아하고 노래를 좋아하는 거요! 막 따라 부르시구! 그런 걸 볼 때면 너어어무 좋아요! 아, 좋은 것보다 더 좋아요!]
[그럼요?]
[행복해요! 그러니까 많이 많이 사랑해주세요!]
멤버들이 장난스럽게 리카를 구박했다.
[리카, 네가 그렇게 말하면 우리는 뭐가 되냐?]
[혼자만 팬분들한테 잘 보이려고 그래?]
[나도 대답 바꿀래. 다시 찍어도 돼요?]
[근데 당연한 거 아니야?]
백설하가 말하자 다들 그녀를 본다.
그녀가 당황하면서 설명했다.
[아, 아니, 팬분들이 우릴 좋아해 주실 때 행복하단 건 너무 당연하잖아…….]
[당연한 걸 말로 표현하는 것도 중요해요!]
다들 그럴듯하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들 대답 바꾸실 거예요?]
멤버들이 동시에 답했다.
[네!]
팬들에게 사랑받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스크린 속의 멤버들이 환한 얼굴로 답했다.
영상이 끝나고 이어서, 팬들이 다시 노래 불렀다.
[나의 날개가 되어줘.]
이내 리카가 어깨를 감싸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오열한다.
이토록 거대한 사랑을 받는 게 자신의 분수에 가당키나 한 것일까.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행복해서 머리를 굴릴 수가 없다.
그 모습을 본 팬들은 더욱더 크게 노래를 불러준다. 그들의 목소리에도 어김없이 물기가 베어갔다.
[우린 같은 곳으로 가고 있었어
그러니 나의 날개가 되어줘.]
공연장의 모든 이들은 서로 생긴 모습이.
입장이.
생각이.
처지가.
어느 것 하나 닮은 게 없다.
하지만 그들은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원래라면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결코 온전히 연결될 수 없는 인간과 인간이란 존재가. 서로 다른 개인의 주파수가 연결됐다.
[나의 날개가 되어줘.]
음악으로, 세계는 하나가 될 수 있다.
* * *
앙코르 무대인 ‘비익연리’도 끝났다.
관객들은 마지막 VCR 영상을 보았다.
소녀연맹 멤버들의 모습이 빠르게 지나가고, 익숙하지 않은 얼굴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남자나 여자였고.
젊거나 늙었고.
서양인이거나 동양인이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조아라의 상징이 담긴 소품을 가지고 있거나, 리카와 비슷한 스타일의 옷을 입고, 68혁명의 한가운데서 튤립을 들고 있거나, 백설하처럼 프랑스 혁명의 선두에 서며, 신아름과 같은 춤을 춘다.
그중엔 로자의 모습도 있었다.
“아, 저분…….”
김마리아가 설마 하는 눈빛으로 스크린에 비친 로자와 옆에 선 로자를 번갈아 본다.
로자는 미소를 지어줌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스크린의 로자는 장하양과 비슷한 차림으로 68혁명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렇군요.”
선전관은 아직도 ‘비익연리’의 감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눈가를 문지르며 말했다.
“소녀연맹이란 이런 거였군요.”
콘서트가 돼서야 소녀연맹의 진정한 의미가 밝혀진다. 소녀연맹은 다섯 명의 소녀가 모인 그룹이나 집단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누구든 소녀연맹이었다.
“저항하고 투쟁하는 모두가 소녀연맹이다…….”
모두가 소녀연맹이 될 수 있다.
모두가 소녀연맹과 같은 특별함을 지니고 있다.
소녀연맹은 그런 메시지를 전한다.
그 메시지가 팬들의 품에 안기고, 조명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공연이 끝났다.
“로자, 안 가나?”
플레하노브의 물음에도 로자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서 있기만 했다.
관객들이 빠져나가 공연장 안은 썰렁했다. 퇴장 안내를 하는 스태프들도 상황이 여유로워지자 하나둘씩 모습을 감추었다.
텅 빈 거나 다름없는 관객석에서, 로자는 하염없이 무대만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던 도중 백스테이지에서 누군가 나왔다. 장하양이었다. 그녀는 여운을 느끼듯 무대 위를 걸어 다니다가 로자와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이 서로를 보았다.
장하양이 싱긋 미소 짓자, 로자도 미소 지었다. 로자가 등을 돌려 공연장을 나섰다.
“로자, 공연은 어땠지?”
이미 밖은 어두웠다.
로자는 그 질문을 받자 대답 대신 기지개를 켰다. 보는 사람이 다 시원해질 정도였다.
그녀는 후련하게 숨을 뱉더니, 상쾌한 밤공기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또 오고 싶어요.”
그건 아마, 소녀연맹에게 최고의 찬사일 것이다.
* * *
“언제까지 여기 계실 건가요?!”
리카가 성필을 닦달했다.
성필은 아까부터 콘서트 무대 위를 질리도록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눈에도 혀라는 기관이 있었다면, 그는 소녀연맹이 밟았던 바닥을 혀로 핥으면서 다녔을 기세였다.
“다들 이미 회식 장소에 갔다구요! 저희만 늦어졌어요!”
“리카 너 혼자 가면 되잖아.”
“이사님이 차 가지고 있는데 혼자 어떻게 가나요?! 택시비라도 주세요!”
“에에…….”
“‘에에’는 무슨 ‘에에’인가요?! 이사님 옛날부터 일본어 조금씩 사용하는 거 되게 차별적으로 들리고 열 받는 건 아시나요?!”
“오늘따라 까칠하네…….”
성필은 아쉬운 투로 입맛을 다시면서 리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관객석을 돌아보았다.
‘정말 콘서트를 했구나.’
심지어 방금까지도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침내 이 단계까지 왔다.
성필은 아이돌을.
음악을.
노래를.
춤을.
문화를.
그리고 마침내.
‘도달했다.’
세계를 창조했다.
누가 무어라 반박하고 깎아내릴 수 없는, 진정한 프로듀서(Producer)가 되었다.
전생에선 오직 꿈이었던 것을 손에 쥐었다.
그런데.
‘다 끝나고 나니 딱히 감회가 생기진 않네.’
성필은 관객석에서 리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한동안 리카를 보기만 했다.
리카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없단 걸 확인한 리카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시나요!”
“……나는 과거를 추억하는 걸로 살아가는 종류의 사람은 아닌 거 같아서.”
“츄니뵤(중2병).”
“맘대로 생각해라.”
“왜 그런 걸 저를 보고 떠올리는 거예요!”
“그냥. 콘서트 말야, 좋았었지?”
“당연하죠!”
리카는 아직도 손발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콘서트’란 단어만 들어도 발끝에서부터 전류가 치고 들어와 뇌수까지 울렸다.
콘서트가 끝난 지금에선 아예 인생무상의 허탈감도 느끼는 상황이었다. 그토록 강렬한 사랑을 받다가 갑자기 정적 속에 놓이니, 삶이 허무해진다고 해야 할까.
“……에엑?!”
리카가 경악했다.
“서, 설마 콘서트가 안 좋았나요! 도시테(어째서)?!”
“아냐. 안 좋았단 게 아냐. 떠올리기만 해선, 너처럼 흥분되지 않는단 거지.”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요…….”
“그냥.”
갑자기 성필이 크게 웃었다.
“말로는 표현을 못 하겠네. 음, 리카.”
“하이(네)?”
성필이 허리를 팍 굽혔다. 리카가 다시 경악하여 성필을 일으키려고 별짓을 다 했다. 하지만 성필은 끄떡하지 않았다.
“부끄러운 말 할 거면 회식 때 들을게요! 그, 그만하고 일어나세요! 저기 청소하시는 분이 보고 계시잖아요!”
“아이돌이 돼줘서 고마워.”
리카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성필이 허리를 펴고 미소 지었다.
“전에 네가 그랬었잖아. ‘저를 찾아줘서 고맙습니다’라고. 근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오히려 감사는 내가 해야겠더라고.”
성필은 콘서트 당시를 추억해보았다. 좋은 기억이지만, 큰 감동은 없다.
오히려 성필은 리카를, 소녀연맹을 직접 볼 때 더 큰 감동을 느낀다. 그녀들이 이 시간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형용할 수 없는 전율이 등골로 흐른다.
여러 묘사를 붙여봐도, 결국은 멤버들을 보기만 해도 행복하단 뜻이었다.
“다시 말할게. 리카, 아이돌이 돼줘서 고마워.”
“…….”
리카는 턱을 가슴에 묻은 채 성필을 향해 눈을 치켜떴다. 그녀는 부끄러워서 견디지 못하겠단 듯이 얼굴을 붉히며, 더듬더듬 말했다.
“정말…… 인가요……? 고마운가요……?”
“그럼. 리카가 아이돌 안 했으면 세상에 아이돌 할 사람…….”
“……사람?”
“설하랑 아라랑 하양이랑 아름이밖에 없었을걸?”
“뭔가요 그 애매하게 넓은 카테고리는?!”
리카는 ‘감동 다 물어내세요!’라면서 성필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성필은 입을 비쭉 내민 그녀를 보고 흥겹게 웃었다. 리카는 분한 티를 내다가, 어쩔 수 없다면서 한숨을 쉬었다.
“아타시(제)가 늙은 이사님이랑 안 놀아주면 누가 놀아주겠어요! 어쩔 수 없네요! 실버타운까지 이 숙명은 제가 가져가는 수밖에 없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양로원을 하나 알아봤어요!”
“벌써?”
“일본에 있어요!”
“일본은 별론데…….”
“에엑?! 일본은 실버산업이 많이 발전했다구요! 한국보다 고령화 사회에 먼저 진입했어요! 실버 선진국이에요!”
“음, 10년 뒤에 생각해볼게.”
“마아(뭐어), 10년 뒤면 늦지 않겠네요!”
둘은 나란히 걸어갔다.
무대를 돌아 나가던 중, 리카가 성필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왜 그래?”
“박 이사님, 그거 해요 그거!”
“그거? 아, 그거.”
“하이(네)!”
“에휴.”
“빨리!”
성필과 리카가 동시에 검지를 치켜들었다.
서부의 총잡이처럼 손을 권총 모양처럼 만든 그들은, 동시에 뒤로 돌아 검지를 앞으로 뻗었다.
“이겼다! 제3부 끝!”
콘서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