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370화 (370/760)

370화

소녀연맹 미니 1집 타이틀 ‘롱 포’.

걸그룹의 곡으론 이례적이게도 밴드 사운드를 사용했다. 또한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게 섹슈얼리티를 부각했단 점도 특이했다.

특이한 것투성이인 ‘롱 포’로, 소녀연맹은 HPT 뮤직 어워드 본상의 영예를 거머쥐었었다.

소녀연맹과 팬들에게, 그리고 아이돌계에도 적잖은 의미를 지니는 곡이었다.

‘나한테는 더욱더.’

백설하는 ‘롱 포’의 퍼포먼스를 이어가면 이어갈수록 가슴 속에 투지가 들끓었다.

소녀연맹의 ‘롱 포’는 1년 6개월 전보다 훨씬 더 서늘하게 벼려져 있었다.

감히 하나의 작품으로써 완성에 이르렀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경지였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

하지만 소녀연맹은 특별 퍼포먼스를 준비했다.

일본 데뷔 쇼케이스에서 보여주었던 ‘롱 포’ 밴드 연주이다. 그때와 다른 점은 백설하의 독주(獨奏)가 포함되어 있단 것이었다.

‘롱 포는 내 솔로 무대나 마찬가지야.’

리카의 ‘러브 미러’.

장하양의 ‘에피타프’.

조아라의 ‘댄스 위드 미’.

신아름의 ‘크라운’.

그에 이어 백설하의 ‘롱 포’나 다름없다.

‘롱 포의 멜로디는 내가 짰으니까.’

과거, 정지음이 악녀 같은 분위기를 내달라고 해서 흥이 가는 대로 쳤던 기타 멜로디가 ‘롱 포’의 뼈대가 되었다.

백설하에게 ‘롱 포’는 소녀연맹의 다른 곡보다 더 애정이 갈 수밖에 없었다.

‘이 곡으로…….’

1절이 끝나자마자 소녀연맹의 움직임이 멎었다. 음악도 멈춘 터라 관객들은 어리둥절하게 무대만을 응시했다.

무대 사고인가?

고작 5초의 정적이었지만 관객들이 당황할 시간으로는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그때 조명이 꺼졌다.

관객들이 어둠 속을 희미하게나마 눈으로 더듬었다. 무언가 움직이는 듯하지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시 조명이 켜졌다.

와아―!

우레와 같은 함성이 일었다.

소녀연맹이 밴드 세션석에 앉아 있었다. 그녀들은 저마다의 악기를 쥐고 미소 한 점 없이 관객석을 응시했다.

조아라가 드럼의 탐탐을 내려치자 다시 ‘롱 포’가 시작되었다.

‘이 곡으로…….’

백설하가 의지를 다졌다.

‘보컬, 댄스 퍼포먼스 이상의 반응을 끌어낼 거야.’

조아라의 말마따나, 멋지니까.

* * *

이시카와 유우토는 감동한 나머지 입을 틀어막았다.

소녀연맹의 일본 데뷔 쇼케이스에서 ‘롱 포’ 밴드 연주를 보지 못한 것을 천추의 한으로 여기고 있던 유우토였다.

‘롱 포’가 나오기에 혹시나 밴드 연주를 보여주지 않을까 기대했었는데.

‘정말 하잖아.’

유우토가 가장 좋아하는 소녀연맹의 곡이 리얼 밴드 사운드로 퍼부어져 들어온다. 심지어 소녀연맹 본인들이 연주한다.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쁜 사람들이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잘 추고 악기도 연주한다고?’

유우토가 너무나 행복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박수 쳤다.

‘누가 이걸 싫어해?’

이 무대를 생각한 사람은 노벨 평화상을 받아야 함이 틀림없다.

밴드부인 유우토는 소녀연맹의 밴드 무대에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의 감정적 격류는 이후 한 번 더 도약했다.

“손나(그런) 우소(거짓말)!”

백설하가 무대 앞으로 뛰쳐나와 기타 솔로 속주(速奏)를 선보였다.

시원스럽게 뻗은 백설하의 하얗고 긴 손가락이 물수제비처럼 경쾌하게 움직이는 것이 스크린에 비쳤다.

그녀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마법이 일어난다. 일렉 기타의 소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후벼 판다.

‘이건, 이건 블루레이로 촬영해서 국보로 남겨야 해…….’

백설하의 손가락은 쐐기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지판을 붙잡을 때마다 사람들의 심장은 쐐기에 박혀 마법에 걸린다.

문외한이라도 ‘빠르다’고 느낄 만한 속주에다, 그에 집중하는 백설하의 얼굴이 너무도 진지하여, 사람들은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

“얘, 유우쨩.”

이시카와 에미가 유우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엄마 유우쨩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뭐 어떠니. 여긴 한국이라 알아듣는 사람도 없을 거잖니.”

리카가 이시카와네에게 준 콘서트 티켓은, 소녀연맹 최초의 콘서트인 서울의 것이었다.

덕분에 세 사람은 팔자에도 없던 한국 가족여행을 오게 됐고, 지금은 콘서트장에 있었다.

“그래서, 왜?”

“설하가 얼마나 잘하는 거야?”

유우토는 공연의 마력에서 한 걸음 물러나 백설하의 독주를 객관적으로 판단했다.

‘아이돌이 취미로 한다기엔 뛰어난 거고.’

당연하지만, 진지하게 밴드 악기를 다루는 사람보다는 못하다.

수년간 기타를 연습해온 유우토와도 차이가 꽤 날 것이다. 백설하의 기타 솔로는, 유우토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유우토가 백설하의 연주에 감탄하는 건 그녀가 아이돌이기 때문이다.

보컬과 춤에 특화된 뮤지션이 밴드 악기를 이만한 수준으로 연주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 신기하기에 흥미로운 것이다.

“꽤 잘하…….”

어머니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 답하려던 찰나, 유우토의 입이 굳었다.

어머니가 이상하단 듯 쳐다보아도 유우토는 무대만 볼 뿐이었다.

‘뭐야.’

연주가 점점 더 빨라진다. 빨라질 뿐만 아니라 에너지가 넘쳐 흐른다.

한 번에 계단을 두세 개씩 뛰어오르는 사람처럼, 보기만 해도 쾌감이 차오르는 속주다.

여기서 얼마나 더 나아갈 수 있을지 무심코 기대하게 되는 연주.

‘실력을 숨기고 있던 거야?’

백설하의 얼굴이 조금씩 아래로 기울었다. 이내 그녀는 바닥과 마주 보게 되었다.

관객을 바라본다는, 쇼맨십의 기본마저 지킬 수 없는 극도의 집중 상태다.

‘아냐, 집중이 아니야…….’

백설하는 매달리고 있다.

어찌할 바 없이 절벽에 매달려 하나둘씩 떨어져만 가는 손가락을 바라보고만 있다.

그 절벽의 이름은 기타였다. 곧 손가락에 힘이 빠져 놓게 될 것이었다.

‘여기서 느려지거나 애매하게 느슨해지면…….’

연주가 끊기리란 사실을 백설하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연주는 에스컬레이트를 거듭한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거듭해서 빨라진다.

백설하의 턱 끝에 맺힌 땀이 한두 방울씩 바닥을 적신다.

더는 스크린에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눈은 바닥과 마주하여 정수리만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있다.

‘계속해서 얇아진다.’

시원하게 뻗어간다고 생각했던 백설하의 손가락이 비 맞은 거미의 다리처럼 이리저리 꼬여간다.

그럼에도 곡은 계속된다.

위태롭게 올라가는 음정과 가늘고 얇아지는 사운드는, 기타를 모르는 사람은 느낄 수 없는 불안정함을 가지고 있었다.

‘호흡이 거칠어.’

연주의 호흡이 삐걱거린다.

‘언제까지…….’

대체 언제까지 이 외줄 타기를 이어갈 생각일까.

‘이쯤에서 적당히 끊어야 할 텐데.’

유우토가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던 어느 순간, 갑자기 모든 관객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며 귀를 틀어막았다.

유우토는 이 소리에 익숙했던 터라 미간을 좁히는 것으로 끝났다.

“뭐, 뭐니?”

어머니가 놀란 가슴에 손을 얹고 말했다.

관객들의 귀를 소름 끼치게 찢어놓은 소리. 그것은 백설하가 현을 잘못 튕겨서였다.

피크가 선을 거칠게 밀고 지나갔다.

‘순간이라 제대로는 못 봤지만…… 어?’

유우토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와 동시에 관객석에서 동요가 퍼져나간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옅은 비명이 산발적으로 튀어나왔다.

스크린에 떠오른 백설하의 오른손. 피크를 쥐고 있던 엄지와 검지에서 피가 떨어진다.

* * *

백설하는 무기력하게 기타를 들고 바닥만 바라보았다.

숨도 쉬지 않고 기타를 쳤기 때문일까, 춤추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호흡 부족이 찾아왔다.

근처 어딘가에 놓인 마이크를 통해 불규칙한 백설하의 숨결이 공연장 전체로 퍼졌다.

‘뭐라고 하셨더라.’

유선영이 이 기타 솔로를 만들어주면서 백설하에게 했던 이야기가 있다.

그녀는 걱정스레 말했었다.

‘청중을 매료시키는 건 난이도가 아니다, 라고 하셨던가.’

오랜 세월 밴드맨으로 살아왔던 유선영이 깨달은 진리라고 한다.

보통 사람들은 아무리 대단한 테크닉을 보여주더라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여준다.

반면 대중이 익히 알 만하지만, 눈 감고도 칠 만한 쉬운 리프를 하나 쳐주면 ‘아 이거!’하면서 즐거워한다.

‘그러니까 난이도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셨지…….’

백설하는 오른손에서 타고 들어오는 화끈한 고통을 느끼며 입술을 물었다.

안다.

자신도 안다.

단지 백설하는 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자신은 이런 것도 할 줄 안다고. 이렇게나 다방면으로 노력한다고.

‘결국엔 이렇게 됐네.’

백설하는 아이돌이며 대중 가수이다.

하지만 대중에게 각인된 자신의 주된 이미지가 몸이라는 게, 노력하지 않고 타고난 신체 조건이 더 주목받는단 게 항상 분했었다.

그보다는 춤을 보아줬으면 좋겠다.

노래를 들어줬으면 좋겠다.

내 노력을 봐줬으면 해.

아니, 노력도 봐줘…….

‘자기만족 때문에.’

백설하에게 기타란 뮤지션의 상징이었다.

그 상징을 잘 다루는 건, 전혀 논리적인 연관성이 없지만 자신의 뮤지션적인 면모를 돋보일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래서 이토록 집착했었다.

‘같잖은 자기만족 때문에 다 망쳤어…….’

연습했다.

죽도록 연습했다.

춤과 노래에만 할애해도 모자랄 시간을 기타에 쏟았다.

고작 1분 남짓한 퍼포먼스를 위해서.

그런데 하필 실전에서 실패했다. 그리고 이런 꼴이나 보여주고 있다.

아니, ‘하필’이란 단어는 변명이다.

그냥 백설하는 실패한 것이다.

‘미안, 미안해.’

백설하에게 기타란 뮤지션의 상징.

‘아이돌이 기타도 잘 쳐?’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는, 백설하의 노력과 뮤지션으로서의 진지한 자세를 사람들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알릴 수 있는 수단.

방금 그것이 꺾였다.

꺾여서 트라우마의 관속으로 들어간다.

‘미안해, 다들…….’

백설하는 주체할 수 없는 울분과 죄책감으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무대를 마무리하려 했다.

최대한 빨리 수습하고 멤버들과 스태프들에게 사과를 전해야 할 것이다.

영원히 갚지 못할 죄였다.

백설하가 허리를 숙였다.

아니, 숙이려 했다.

둥, 둥, 둥, 둥.

규칙적인 베이스 기타 음이 퍼졌다.

* * *

“뭐야 쟤들 왜 연주해?”

연출 감독이자 공연 총괄인 조진만이 한껏 당황하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조진만은 망연자실하게 다시 무대를 보았다.

‘데비’의 리더인 권동하가 베이스를 연주한다. 연주랄 것도 없이 하나의 현만 규칙적으로 튕길 뿐이지만, 예정에 없던 사고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당황한 건 FOH의 감독들만이 아니었다.

바로 곁에서 권동하의 돌발행동을 지켜보는 장하양도 그러했다.

‘아직 우리가 악기 안 놨는데?’

안 놨다기보다는 못 놓고 있는 것이었다. 백설하가 실수한 뒤 몇 초간 중앙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니까.

멤버들도 어찌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장하양이 우물쭈물하고 있자, 권동하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을 받은 장하양이 움찔했다.

‘지금 나한테…….’

베이스를 튕기는 권동하의 손짓이 예사롭지 않다. 그는 자신의 손을 보라고 시위라도 하듯이 큰 동작으로 현을 튕기고 있다.

‘따라 하라는 거야?’

그 순간 드럼의 심벌이 요란하게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이목을 모으는 데 성공한 ‘데비’의 드러머는 흔들리는 심벌을 손으로 붙잡아 멈추곤, 다시 심벌을 약하고 규칙적으로 치기 시작했다.

드러머도 권동하처럼 같은 악기를 다루는 포지션의 멤버, 조아라를 쳐다보았다.

‘아, 그렇구나.’

권동하는 묻고 있는 것이다.

규칙적인 단선율 속에서 멤버들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이대로 백설하가 넘어진 채로 있게 둘 것이냐. 아니면 일으켜 세워 다시 나아갈 것이냐.

만약 넘어지게 둘 거라면 지금이라도 연주를 멈출 수 있다. 그리고 ‘롱 포’로 넘어가 소녀연맹이 하이라이트 퍼포먼스를 하면 된다.

하지만 아니라면…….

‘다시 설하 언니한테 바통을 넘겨주라는 뜻.’

‘데비’의 보컬리스트는 리카의 옆에 서서 피아노를 느리고도 부드럽게 두드렸다. 기타리스트는 신아름을 바라보며 기타를 튕겼다.

‘데비’의 멤버들이 소녀연맹을 바라본다. 다들 한뜻이 되어 묻고 있다.

‘이대로 둘 거냐?’

대답은 정해져 있다.

소녀연맹이 시선을 교환한다. 시선이 한데 모여 얽히고,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다들 백설하의 등을 바라본다.

‘원.’

조아라가 검지를 들었다.

‘투.’

중지도 들었다.

‘쓰리.’

이어서 사정없이 두들겨지는 탐탐의 타음(打音)과 함께, 다시금 ‘롱 포’가 연주됐다.

* * *

허리를 굽히기 직전, 백설하의 뒤에서 ‘롱 포’가 터져 나왔다.

멤버들이 항의하듯 악기를 최대한 강렬하게 튕기고 두드린다.

여기서 멈출 거냐고.

정말 이게 끝이냐고.

백설하는 상체를 살짝 굽힌 채, 그녀의 등으로 들어오는 동생들의 매를 맞았다. 절벽의 바위가 꿋꿋이 파도를 맞듯이, 계속.

“…….”

백설하가 다시 기타를 붙잡자 객석에서 응원이 튀어나왔다.

환호와는 확실히 달랐다.

팬들도 백설하가 실수를 저질렀단 것을 알았다. 그렇다고 불쾌해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다시 이어가 줬으면 하고 바란다.

‘……네.’

백설하가 피 묻은 피크를 재차 꽉 쥐었다.

‘그럼 송구하지만, 다시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피크로 줄을 튕기자, 붉은 꽃이 만개했다.

이전과 같은 압박감은 사라졌다.

피크를 움직이는 손이 훨씬 가볍다.

‘할 수 있어.’

재능이 있구나.

백설하는 ‘롱 포’의 솔로를 연습하면서 유선영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

기타 스승인 그녀의 앞에서 평가받는 건 항상 살 떨리는 일이었다. 자신보다 잘하는 사람 앞에서의 실연이란 그런 법이다.

‘설하 너는 확실히 재능이 있어.’

백설하의 손이 긴장과 좌절로 굳어갈 때쯤, 유선영을 그리 말하곤 했었다.

백설하는 미소로 화답했었지만, 유선영이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정말 재능이 있었으면 이런 솔로 따위 진작 완성했을 테니까.

그런데.

‘진짜였어.’

백설하는 그 사실을 여실히 깨달았다.

기타를 치는 손 마디마디에 재능이 박혀 있는 기분이다.

자신이 질주하고 있는 오선보란 틀은, 자신을 포용하기에 너무나도 작단 생각이 들 정도다.

‘나는 재능이 있어.’

백설하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몰입에 들어갔다. 매 순간을 황홀경에서 보냈다.

이게 천재만이 볼 수 있는 광경이구나, 그런 깨달음으로 전신이 떨려왔다.

‘이 재능을 계속 가지고 있었어.’

그 재능의 이름은 젊음이다.

노력 이상의 대가를 얻어내는 힘.

정직하게 1대1로 노력과 결과물을 교환하지 않아도 되는 마법.

백설하는 느꼈다.

‘아, 지금이…….’

야유회 때 손혜빈이 설명해주었던.

‘인생의 절정기.’

백설하의 정신은 산만함을 허용하지 않으며, 그녀를 끝없이 기타 속으로 몰아냈다.

정신의 채찍질에 호응하여 그녀의 손가락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고 빠르게 움직인다.

정신과 신체의 컨디션이 최상으로 교차하여 정점에 이른 상태.

25세.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는, 부조리한 재능이 만연한 시기.

그렇기에 칠 수 있다.

‘완성할 수 있어, 이 연주를…….’

아니.

‘넘어설 수 있어.’

* * *

유우토는 주변의 반응을 살폈다. 아까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피를 흘렸음에도 무대를 완성하기 위해 질주하는 백설하의 기백 때문일까?

‘아니야.’

백설하의 연주는 이전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음과 음 사이의 호흡이 아예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악기를 오랫동안 숙련해 온 유우토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밴드부의 선배가 그랬었지.’

기타를 듣는 귀는 일반인과 뮤지션이 다르다.

같은 기타리스트가 알 정도로 잘 친다면, 그건 대단한 연주다.

그런데 일반인이 알 정도로 잘 친다면, 그건 환상적인 연주다.

‘설하 누나는 어느 쪽일까.’

물어볼 필요도 없다.

다들 입만 벌리고 스크린에 비친 백설하만 바라본다. 그들 또한 가타부타 설명 없이도, 자신의 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특별하단 사실을 깨닫고 있다.

‘환상적인 연주.’

콘서트 내내 ‘이건 뭐니? 저건 뭐니?’라고 물어오던 어머니의 목소리도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딸바보처럼 리카만 나오면 탄성을 흘리던 아버지의 호들갑도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마법 같은 침묵 속에서 유우토가 손에 땀을 쥐었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템포가 빨라. 관객한테 싸움을 거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렇기에 몰입하게 된다.

손에 땀을 쥔다.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여기서 더 할 수 있나?

대체 어디까지?

아직 더?

아, 이렇게까지…….

감탄의 연속이다.

* * *

‘틀렸다.’

백설하는 말라붙은 피 때문에 미끌어진 손가락을 살짝 벌렸다. 그리고 피크를 다시금 강하게 쥐고 연주를 시작했다.

‘틀려도 괜찮아.’

사람들은 기계같이 정확한 연주에 감탄하지 않는다.

완벽한 실연이 빼어남의 기준이라면 사람들은 작곡 프로그램을 신으로 숭배해야 마땅하다.

그러지 않는 이유는, 음악의 감동이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호흡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숨결과 숨결이 만나고, 호흡과 호흡이 교차하고, 인간의 생명이 박자를 타고 발산하는 인생의 쉼표.

기계와 같이 쭉 이어질 수 없는, 인간이기에 만들어내는 빈 공간이 연주자의 개성을 결정한다.

‘얼마든지 틀려도 돼!’

백설하는 달렸다.

틀려도, 흔들려도 괜찮다.

오로지 번개처럼 쇄도한다.

이것이 나라는 듯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며 창공을 질주한다.

일렉트릭 기타.

번개가 작렬했다.

백설하는 관객석에 번개를 떨어뜨렸다.

그 후, 그녀는 땀을 한 바가지 쏟으며 숨을 골랐다. 비처럼 후두둑 떨어져 바닥을 물들이는 땀을 보며, 백설하가 웃었다.

그녀가 기타를 번쩍 들어 올렸다.

관객, 천둥이 답했다.

끝없이 이어질 듯한 환호성 속에서, 백설하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빛을 기분 좋게 맞았다.

‘고마워, 얘들아. 응원해줘서. 등을 떠밀어줘서.’

그러지 않았다면 이 풍경을 영원토록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한계까지 몰려간 자만이 마주할 수 있는 구름 위의 햇빛이다.

귀를 울리는 천둥과 같은 함성을 들으며, 백설하는 예감했다.

자신은 진실로 절정에 도달했노라고.

* * *

‘데비’의 리더인 권동하도 백설하와 같은 경험이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올라간 무대에서 대차게 실패했던 쓰라린 과거가 말이다.

그래서 백설하를 가만히 둘 수 없었다.

그건 그런 이야기고…….

‘X 됐다.’

백스테이지로 들어가는 소녀연맹을 보면서 권동하는 짙은 불안감을 느꼈다.

‘이제 이 업계에 소문 파다하게 퍼져서 다신 베이스 세션으로 먹고살 일 없겠지.’

아니다.

아예 다음 콘서트부터 잘리는 건 아닐까?

콘서트만 다 돌면 ‘데비’의 신보를 낼 수 있었는데. 누가 보아도 월권을 저질러서 다 망쳐버렸다.

‘잘 가, 우리의 새 앨범…….’

“고마워요.”

권동하가 번뜩 정신을 차리고 옆을 보았다.

백설하가 백스테이지로 들어가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예상치 못한 감사에 권동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아무런 제스처도 취하지 않고, 사라지는 백설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래, 이러면 됐지.’

백설하는 한번 삐끗했지만, 퍼포먼스에 재도전함으로써 모두의 기억에 남을 환상적인 무대를 만들었다.

적어도 과거의 권동하와 같은 트라우마는 겪지 않을 것이었다.

권동하는 심호흡하며 불안감을 떨쳐냈다.

밴드 세션의 역이 아티스트를 뒤에서 받쳐주는 것이라면, 자신은 올바른 일을 했다.

그리 생각하면서 돈에 대한 집착을 떨치던 도중.

[잘했어요.]

인이어로 연출 감독 조진만의 칭찬이 들어왔다.

권동하는 백설하에게 받은 감사보다 그게 더 기쁠 지경이었다.

[근데, 끝나고 잠시 얘기 좀 나눕시다.]

‘그럼 그렇지.’

그래, 욕하면 욕먹고 때리면 맞자.

권동하는 베이스를 점검하면서 정면을 보았다. 여전히 객석은 마법에 빠져 있었다.

백설하가 떨어뜨린 번개의 잔영이 남아 빛을 내었다.

* * *

“언니, 손 보여줘요.”

백스테이지로 들어오자마자 장하양이 백설하의 오른손을 낚아챘다.

검지 안쪽으로 길게 박힌 붉은 선이 보였다. 피가 검지부터 손바닥, 손목으로 길게 이어져 말라붙어 있었다.

장하양이 괴로운 표정으로 그 부분을 손으로 쓸었다.

“앗 따가…….”

백설하가 멋쩍게 웃자 장하양이 그녀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백설하의 웃음이 멎었다. 그녀는 죄지은 강아지처럼 시선을 힘없이 떨어뜨렸다.

“스읍, 후우.”

장하양은 화를 가라앉히려는 듯 심호흡했다. 그 직후 스태프들이 연고와 반창고를 가져와 백설하에게 응급처치를 해주었다.

“언니.”

“으, 응…….”

“언니 잘못하신 거 없어요. 고개 드세요.”

백설하가 조심스레 장하양의 얼굴을 보았다. 장하양은 따스하게 미소 지은 채였다.

“제가 언니 등 떠민 거잖아요.”

정확하게는, ‘데비’의 베이시스트 권동하가 시작이었지만. 결국 결정한 건 멤버들이었다. 멤버 전원이 리더의 등을 절벽으로 밀어버렸다.

“죄송해요.”

“아니야! 하양이가 뭐가 죄송해! 아, 아니, 하양이가 뭐가 미안해!”

백설하는 장하양을 안으려다가, 자신에게 그런 자격이 있는지 몰라 멈칫했다.

그래서 장하양이 백설하를 꼭 껴안아 주었다.

“방금 화난 티 낸 건…… 언니 다친 거 보니까 갑자기 울컥해서…….”

“그냥 조금 베인 건데 뭐 어때, 헤헤.”

장하양이 백설하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백설하는 그 따스함을 느끼자, 마치 집으로 돌아온 듯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백설하가 우울한 어조로 사과했다.

“미안해 얘들아, 실수해서…….”

“괜찮아요.”

신아름이 기다렸단 듯 답했다.

“언니도 관객들 반응 봤잖아요.”

“어…….”

“뭔데요. 설마 기억 안 나요?”

“으, 응.”

“그럼 나중에 콘서트 DVD로 봐요.”

“어, 어땠는데?”

신아름이 장난스럽게 쏘아붙였다.

“당연히 곱창 났죠. 실수해놓고 부랴부랴 수습했는데.”

“여, 역시 그렇구나…….”

* * *

“……방금 뭐였냐?”

김민주가 자신의 팔을 쓸면서 말했다.

따뜻한 곳에 있다가 갑자기 한파를 맞은 것처럼 팔에 닭살이 돋아 있었다.

록 같은 건 잘 알지도 못하지만, 백설하의 연주가 대단했단 것만큼은 직관적으로 이해했다.

“에리카, 너 기타 치지?”

에리카는 통기타, 일렉 기타, 베이스를 전부 다룰 수 있다. 그녀가 원한다면 웬만한 공연의 세션으로 활동할 수 있을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설하 저 사람이 얼마나 잘한 거야?”

“으음.”

에리카는 검지를 턱에 대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귀여운 척을 보고 김민주가 역겹다는 태도로 미간을 찌푸렸다.

‘진짜 얘 직업이 아이돌만 아니었으면 바로 뭐라고 욕했을 텐데.’

‘과즙미 뿜뿜 케이어스의 비타민 김민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 에리카가 말했다.

“기교적으로…….”

“꽤 잘했나?”

“형편없었어.”

“방금 게 형편없던 검미까?”

진저가 아연히 답하자 에리카는 쐐기를 박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실수한 거 안 들렸어? 끼기긱 소리나, 음이 과하게 튄다거나, 화성도 안 맞는다거나.”

“아, 일부러 한 게 아니었슴미까.”

그럼 대체 이게 뭔가.

전문 연주자의 것을 들어도 느낄 수 없는 전율이, 어째서 백설하의 연주에서 느껴지는가.

에리카는 간단히 답했다.

“스피릿이지.”

“스피릿?”

에리카가 엄지와 검지, 소지를 폈다. 그리고 귀엽게 혀를 빼꼼 내밀었다.

“록 스피릿.”

저항과 자유.

“진짜 가지가지 하네. 실드 치지 말고 제대로 말해.”

“민주야, 이게 실드 치는 거야? 그럼 너 정 이사님이 말씀하시는 노래의 소울이나 스윙 같은 게 다 개소리라는 거야?”

김민주가 입을 꾹 닫았다.

감히 정호환의 어록에 반박할 수는 없었다.

“음악에는 기교로 판단할 수 없는 영역이 있어.”

재즈 아티스트들에게 ‘이게 왜 재즈예요?’라고 물으면 이렇게 답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소울이 있으니까’라고.

누구도 소울이 뭔지 설명할 수 없지만, 기교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만은 확실하다.

예술에는 이성으로 이해하지 못할 영역이 존재한다.

“언니의 연주엔 그게 있던 거지.”

스피릿, 소울, 영혼이 있었다.

* * *

소녀연맹의 콘서트를 보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가.

김채현은 셀 수가 없었다.

오프닝 메들리.

리카의 디제잉.

신아름과 조아라의 듀오 퍼포먼스.

장하양의 에피타프.

‘롱 포’ 밴드 퍼포먼스.

외에도 무대 하나하나가 전설적이었다. 적어도 인민인 김채현은 그러했었다.

그런데, 지금보다 더 눈물을 많이 흘렸던 때는 없었다고 단언한다.

[여러분! 오늘 즐거우셨나요!]

기분 좋게 아른거리는 멜로디.

담백하고 깔끔한 사운드가 객석에 퍼지는 충만함과 아쉬움 사이사이로 파고들었다.

[마지막 곡이에요!]

그 말을 듣자 김채현은 아예 엉엉 울면서 응원봉을 흔들었다.

[보라색 튤립의 사람, 지켜보고 있나요!]

행복의 마무리, 피날레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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